하단에서 58-2번 버스를 타고 50분 가면 종점인 용원사거리다. 거기에서 망산도와 용원어시장을 지나 40분 걸어가면 도로변 산등성이에 안골왜성 안내판이 서 있다.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에 위치한 안골왜성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쌓은 일본식 성곽이다. 안내판에 일본어도 표기되어 있다. 일본인들도 오는 모양이다.
데크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넓은 성 터다. 여기저기에 허물어진 성벽들이 널려 있다. 일본 성 특유의 70도 가량 경사진 성벽에 돌들이 정교하게 박혀 있다. 성벽의 모서리는 바지주름을 다리미로 금방 다린 것처럼 각이 날서 있다. 4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예리하고 견고해 보인다.
성 입구에 들어서면 성벽이 직각으로 꺾여 있다. 성벽 사이의 좁은 공간으로 들어가야 된다. 적군이 침입하면 일단 주춤하게 된다. 한 번에 많은 군사들이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때 성벽 위에서 무차별로 공격하면서 시간을 벌고 효과적인 방어를 할 수 있는 구조다. 성 안에 또 성이 있고 미로처럼 되어 있었다 한다. 치밀하다. 왜성의 특징이다.
일본의 축성술은 상당히 발달해 있었다. 조선에서 성벽을 쌓을 때는 주로 농민들이 동원되었다. 일본에서는 전국시대 100년 간 전투를 치르면서 성벽 쌓는 기술자들이 많이 양성되었다. 노하우도 많이 축적되었다. 왜란 때도 이 전문 기술자들이 신속하고 견고하게 축성하였다. 이들은 급료가 많았다.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이 성을 빨리 쌓는 모습을 귀신에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고 한다. 왜란 7년 동안 일본인들이 쌓은 성을 조선군이 싸워서 뺏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본성과 제1외성, 제2외성, 제3외성이 있었다. 제일 안쪽의 조금 높은 곳이 전망대 겸 왜장의 집무실인 천수각 터다. 이끼 낀 돌비와 안내판이 서 있다. 앞에는 망망한 남해 바다가 무한대로 펼쳐져 있다. 남해안의 동태를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명당 터다. 바로 밑에는 아파트 단지와 부산신항의 크레인들이 보인다.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안골포는 왜성 이전에 조선 수군의 석성이 있던 곳이다. 남해 바다가 한눈에 보이고 부산 방면의 가덕수로와 통영 방면의 수로를 통제하기 좋으며, 뒤에는 험한 욕망산이 있어 수비하기 좋은 천혜의 요새지다.’
임진왜란 초기에 일본 육군은 조선을 유린하며 거침없이 밀고 올라갔지만,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으로부터 패전을 거듭하여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였다. 조선 수군을 해상에서 억제하고 일본군의 장기간 주둔을 위하여 1593년 남해안 연안 일대의 요충지에 네트워크처럼 18개소의 왜성을 축성하였다. 안골왜성도 이때 축성되었다. 축성할 때는 우리 백성들을 데려다가 노예처럼 일을 시켰다.
안골왜성을 내려오면 바닷가의 도로다. 왼쪽은 안골마을이고 오른쪽은 안골만을 올라가는 도로다. 왼쪽의 마을로 10분쯤 걸어가면 바닷가에 어른 허리 높이의 반원형 돌무더기로 된 석축이 있다. 일부는 허물어졌지만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길이는 47m다. 조선시대 때, 군선의 임시 선착장인 안골포 굴강이다. 선박 수리 및 보수, 군수물자 하역 등을 목적으로 1462년 세조 때 축조된 군사시설물이다. 옛날부터 안골포는 유서 깊은 군사적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이 주변의 산언덕에는 옛 객사 등이 있었다한다. 지금은 굴강이 경상남도 기념물 제143호로 지정되어 있어 출입을 할 수 없도록 바닷가에 철망이 처져 있다.
안골만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동쪽이 안골만, 북쪽이 웅동만, 서쪽이 와성만이다. 뒤에는 산이다. 안골만은 산 쪽으로 둥글게 들어가 있다. 유사시 배들이 은신하기 좋다. 저 멀리 남쪽의 바다에는 부산신항과 진해신항을 연결하는 안골대교가 보인다. 지도에는 그 밑에 웅천대교도 있는데 여기서는 보이지는 않는다. 바다가 좁고 길어서 대교가 두 개 놓여 있다. 다리를 놓을 만큼 해협이 좁다. 안골만, 웅동만, 와성만에서는 저 수로를 지나지 않고는 남해로 나갈 수가 없다. 이곳 바다의 모양은 후라이팬을 연상케 한다. 남쪽의 길고 좁은 해협은 손잡이에 해당한다.
1592년 7월 10일, 이순신 함대는 후라이팬 손잡이를 밖에서 틀어막으며 안골만에 정박하고 있던 일본 군선 42척의 절반 이상을 대파하고 왜군 250명을 사살하였다. 이것이 안골포해전이다. 조선 수군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안골포해전은 이틀 전 한산대첩의 연장선에 있다. 안골포해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주변 정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592년 4월 13일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19일 만인 5월 2일에 한양에 입성했다. 조선시대 때 보통 사람들이 동래에서 한양까지 걸어가면 14일 걸린다. 왜군들은 전쟁이라고 보기 힘든 속도로 거침없이 북상했다. 6월 15일에는 평양성을 함락했다. 파죽지세였다.
평양의 왜군이 3일 먹을 식량 200석을 부산에서 육로로 운반하면 말 500마리, 운반할 사람 500명, 호위할 군사도 필요하다. 그런데 중간에서 의병들의 습격을 받는 일이 빈번했다. 보급이 원활하지 못해 아사자, 동사자까지 생기고 있었다.
일본에는 의병이라는 것이 없다. 전국시대에는 번국蕃國끼리 전쟁을 하다 한쪽의 영주(다이묘)가 죽거나 항복하면 자동으로 합병된다. 농민이나 하층민의 저항은 없었다. 그런데 조선은 왕과 대신들도 도망가고 없는 무주공산인데 낫과 곡괭이를 든 노비, 승려 등 천민들이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왜군 지휘부는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들은 당황하고 황당하기까지 했을 것이다. “이게 말이 되무니까?” 어떤 조직은 정규군 못지않았다. 무능한 관군을 대신했다. 의병은 조선의 히든 카드였다.
( 2편은 다음에~)
이 글은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은 이효준의 부탁으로 원고를 넘겨받아 올리는 글입니다.
첫댓글 효준친구에 대한 소식을 영남친구가 올린 글을 보고, 시력을 잀어 바깥생활을 하기 어려운 친구가 행여나 우울증에 걸려 더 어려운 생활을 이어갈 환경을 생각하여, 말동무라도 되어줄 마음으로 부산 효준친구의 집으로 내려와 3박4일 함께하며 동고동락하고 내일 상경합니다.
부산에 거주하고 있는 친구분들 조금만 짬을 내어 외로움을 삼키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친구에게 사랑과 용기를 북돋아 주는 배려... 진심으로 부탁드리며 서울로 발걸음을 옮기겠습니다.
효준친구를 위해 정말 헌신하고 있는 영남친구...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말 동무에 산책도 같이하고 화장실 청소에 빨래까지... 수고가 많으시었소^^
친구 2사람 모두 존경합니다. 친구를 위해 애 쓰는 모습 대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