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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월 12일
북한 노동당 비서가 북경소재
중국주재 한국 총영사관에 망명 신청
북한의 황장엽 노동당 국제담당비서가
12일 북경소재 주중한국총영사관으로
찾아와 한국으로의 망명을 신청해왔다고
외무부가 이날 오후 발표했다.
유광석 외무부 아태국장은 『황비서가
이날오전 1 0시5분께 북경주재
한국총영사관으로 찾아와 한국으로의
망명을 요청했다".면서 "주중대사관은
이같은 사실을 중국측에 통보하고
황비서의 망 명을 위해 중국측과
외교채널을 통해 협의중』이라고 말했다.
황비서는 당서열 24위로 당국제부 부장과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사회과학자협회
위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등
을 겸직하고 있 으며 북한체제의 지도이념
인 주체사상을 집대성한 북한 최고의 이론
가인 거물이다.
황비서는 지난 달 30일부터 이달 11일까지
일본에서 열린 국 제주최사상연구소주최
세미나에 참석한 후 11일 귀국하기 위해
북경에 들렀으나 이날 북한으로 귀환하지
않고 한국으로의 망명을 신청했다.
황비서는 이날 수행비서인 김덕홍 조선여광무역총회사사장을 대동하고
함께 망명을 신청했다고 유국장은 밝혔다.
▶2012년원로 서양사학자 노명식 교수 별세
▶2010년아이티, 7.0 강진 피해
▶2010년멕시코 마약왕 테오도로
에두아르도 가르시아 시멘탈 체포
수갑을 찬 채 경찰에게 끌려나오고 있는 엘 테오.
▶2006년하지 순례 마지막날 300여명 압사
이슬람 최대의 종교 행사 ‘하지(haji) 순례’ 마지막 날인 2006년 1월 12일, 사우디아라비아 미나 계곡의 ‘마귀 돌기둥’ 에 돌멩이를 던지던 의식을 치르던 중 적어도 345명의 무슬림이 압사했다.
올해 마귀를 쫓는 의식인 이 투석 행위에 200만명 이상이 참가했으며 이날 사고는 해가 질 무렵, 의식에 마지막으로 참여하려던 순례자들이 한꺼번에 몰리며 발생했다. 이 의식을 치르는 과정에서 1990년에는 1426명이, 2003년에는 251명이 압사했다.
이슬람권 최대 행사 ‘하지 성지순례’.
▶2006년미소짓는 제퍼슨 70년만에 바뀐 5센트
▶2001년휴렛 패커드(HP)의 공동
창업자 윌리엄 휴렛 사망
▶1998년유럽회의 19개 회원국
`인간복제금지` 의정서에 서명
▶1997년 외무부, 북한 노동당 비서가
북경소재 중국주재 한국총영사관에
망명을 신청해 왔다고 발표
▶1992년`라인 모드 브라우저` 버전 1.1 등장
▶1990년대한항공-아에로플로트,
서울-모스크바간 항로 취항키로 합의
▶1989년재일교포 2세 이양지,
일본 아쿠타가와상(芥川賞) 수상
다나카 요시에(田中懺枝)라는
일본명을 가지고 있는 이양지씨.
▶1989년한국ㆍ소련 은행,
사상 첫 신용장 개설
▶1981년전두환 대통령이 81년
국정연설에서 남북한당국최고
책임자의 상호방문을 제의하고
김일성의 조건없는 서울 방문을 제의
▶1981년부산대, 경북 의성군에서
1억년전 공룡 화석 발견
▶1980년북한, 남북총리회담
서한으로 제의(대한민국 호칭 처음 사용)
▶1979년환율인상 등 경제조치
▶1977년박정희 대통령, 대북식량원조 제의
▶1976년여류추리작가 애거서 크리스티 사망
`미스터리의 여왕`으로 불리는 영국의 추리소설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가 1976년 1월 12일 사망했다. 86세였다. 생전에 단편소설 147편, 희곡 15편, 장편소설 90편 등 많은 작품을 남긴 크리스티의 소설은 전세계 50여개국 언어로 20억부가 넘게 팔려 `성경(Bible)` 다음으로 독자수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작품 중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열개의 인디언 인형`) `쥐덫` `나일강의 죽음` `오리엔트 특급 살인` 등은 우리나라 독자들로부터도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작품 세계는 명탐정 셜록 홈스를 낳은 작가 코넌 도일의 작풍에 실증주의와 심미주의를 결합시킨 것으로 평가받았다. 행동보다는 추리를 더 좋아했던 그의 작품 주인공 에르퀼 푸아로가 1975년작 `커튼`에서 죽자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그 해 6월 1일자 1면에 이 탐정의 부음 기사를 실었고, 뜨개질을 좋아하는 그녀의 또다른 주인공인 독신 노처녀 제인 마플은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시카의 추리극장`의 제시카 플레처를 비롯해 그 뒤에 창조된 여성 탐정들의 모델이 됐다.
애거서는 외도가 심했던 첫 남편 아치볼드 크리스티와 이혼하고 14살 연하의 고고학자 맥스 맬로언과 재혼한 얼마 뒤 한 기자로부터 "왜 하필 고고학자와 결혼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 때 크리스티가 한 대답은 이랬다. "고고학자 남편은 내가 늙어갈수록 나를 더 사랑할 테니까요."
▶1973년비상각의 ,정부조직법개정안 의결
(공업진흥청, 공단관리청 신설)
▶1972년라만, 방글라데시 초대수상에 취임
▶1966년존슨 미국 대통령,
주월미군은 19만명이라고 발표
▶1962년정부, 이식제한법 공포
▶1961년국제언론인협회(IPI) 한국위원회 조직
▶1960년파리서 13개국 대서양경제회의 개최
▶1956년여객선 태신호 삼천포서 화재. 65명 사망
▶1950년애치슨 미 국무장관,
`애치슨라인` 발표
좌·우파가 서로 자기 입맛대로 해석한 ‘애치슨 라인’
6·25전쟁이 터지기 직전인 1950년 1월 12일. 미 국무장관 애치슨은 전국기자클럽에서 ‘아시아의 위기: 미국 정책의 시험대’란 제하의 연설을 했다. “극동의 방위선은 알류샨 열도에서 일본과 오키나와를 거쳐 필리핀 군도까지 이어지는 선이다. 우리가 멸망시키고 무장을 해제한 일본은 미군이 주둔해 있기 때문에 중요하며, 오키나와는 태평양 방위에 있어 긴요한 지역이며, 필리핀은 우리와 동맹관계에 있으므로 침략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이 아시아에서 도서(島嶼)방위선 전략을 택하고 있음을 재천명한 그의 연설은 동북아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애치슨의 연설은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전쟁을 결심하게 만들었다.” “한국에서 미국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는 것은 애치슨의 책임이다.” 6·25전쟁이 터지자 워싱턴 정가의 우파 정객들은 한목소리로 그의 실언이 전쟁을 유발했다고 비난했다. 좌파적 시각의 역사학자들도 ‘애치슨 라인’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하기 위해 미국 주전파가 구사한 고도의 술책이었다는 음모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 두 주장 모두 7700단어에 이르는 긴 연설문의 몇몇 문구만을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부각시키는 침소봉대의 오류를 범했다. “한국과 대만이 군사적으로 침략을 당하면 우선 공격당한 국민이 이에 맞서 싸워야 하지만, 그다음에는 결코 갈대처럼 약하지 않은 유엔 헌장에 따라 모든 문명세계가 개입해야 한다. 한국에 대한 원조 포기나 중단은 가장 철저한 패배주의이며, 아시아에서 미국의 이해관계에 대한 가장 넋 나간 짓이다.” 그는 한국을 포기한다는 말을 결코 한 적이 없었다
“우리는 평화로운 해결을 고대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공격을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다. 만약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우리는 적극적으로 행동할 것이다.” 이승만은 1949년 8월 10일 기자회견 시 ‘남북통일’ 구호가 ‘실지회복’으로 바뀌게 된 배경에 대한 질문에 답하면서 북진을 암시했다. 그때 애치슨의 연설은 ‘한국과 대만을 방위선에서 제외시킴으로써 재정 지출 삭감을 주장하는 미 의회와 군비의 효율적 사용을 주장하는 군부를 다독이면서, 북진통일이나 본토 수복을 외치는 이승만과 장제스의 무모한 모험을 견제하고, 그러면서도 유엔을 끌어들여 두 나라의 안전을 확보하겠다는 다목적 발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건국과 부국』, 2004)는 김일영의 해석이 실제에 부합한다. 애치슨의 연설이 있은 지 어언 60년.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豫其懲而毖役患)’는 옛글이 생각나는 오늘이다. 대비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평화가 아닐까.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
▶1950년서울 국제 전신전화국 개국
▶1949년일본의 현대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출생
▶1946년UN안전보장이사회 발족
1946년 신탁통치반대 국민대회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5년간의 미소신탁통치안이 가결되고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열린다는 외신보도가 발표되자 1946년 1월 12일 독립정부의 수립을 갈망해 온 전국민은 이에 격분하여 신탁통치 반대 전국대회를 열고 100여 개의 애국사회단체와 정당의 이름으로 신탁통치 반대성명을 전개했다.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국민대회
특히 김구와 임시정부계는 반탁과 즉각독립을 내걸고 운동의 선두에 나섰으며 이러한 반탁운동은 민족감정을 자극하여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좌익세력이 박헌영의 평양방문을 계기로 신탁통치에 대한 태도를 표변하며 찬성에 나섬에 따라 좌우익의 분열이 시작됐다. 이후, 남한에서의 반탁운동은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될 때까지 극렬하게 전개됐다.
▶1942년미국과 멕시코 공동방위위원회 설치
▶1931년인도에 대폭동
▶1923년의열단원 김상옥 열사
종로 경찰서에 폭탄 투척
의열단원 김상옥 열사가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 일경과 매일신문 기자 등 7명이 다치거나 사망했으며 건물 일부도 파괴됐다.
현장을 벗어난 김상옥은 사건 후 후암동의 친척집과 금호동의 안장사, 효제동의 이혜수 집, 홍제동의 동지 집을 전전하며 거처를 옮겼으나, 1월 22일 새벽, 홍제동에서 끈질기게 뒤쫓아온 경찰 수백 명에게 포위된 채 격전을 벌이다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면서 자신의 총으로 자결했다. 일경 15명을 살상한 뒤였다.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하면서 확인한 총상만 11군데에 이를 정도로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며 일제하 국내외에서 전개된 의열투쟁 가운데 가장 장렬하고 대표적인 항일 시가전이었다.
1890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상옥은 일찍이 아버지를 잃어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낮에는 철공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공부를 했다. 1910년 경성영어학교에 입학해 국제정세에 대한 안목을 기르며 물산장려운동과 야학운동을 통해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9년 4월 비밀결사단체 혁신단을 조직,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나 이듬해 8월 일본 총독 사이토 암살계획이 사전에 발각돼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의열단에 가입, 수차례 국내에 잠입하며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기도 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김상옥 열사.
▶1904년화가 이응로 출생
▶1899년스위스 화학자 뮐러 출생
▶1896년미국 심리학자 데이빗 웩슬러 출생
▶1896년미국 헨리 루이스 스미스 교수,
최초의 X레이 사진 촬영
▶1834년영국의 해외 노예무역을 폐지한
영국의 정치가 그렌빌 사망
▶1746년페스탈로치 출생
페스탈로치 [Pestalozzi, Johann Heinrich, 1746.1.12~1827.2.17] 스위스의 교육자.
취리히에서 출생하였다. 취리히대학교에 재학 중 애국자단체에 소속되어 사회운동에 가담하였으며, 1769년 같은 단체원이던 안나와 결혼하였다. 1771년 노이호프에 농민학교를 세웠으나 실패한 후 사색과 저술생활로 세월을 보냈다.
1798년 프랑스혁명의 여파가 스위스로 밀려왔을 때 슈탄스에 고아원을 설립, 전쟁고아를 돌보았다. 그후 부르크도르프, 이베르돈에 학교를 세워 독자적인 교육방법을 실천하다가 만년에는 다시 노이호프로 돌아갔다.
당시의 유럽 사회를 분석하여, 계층간에 존재하는 불평등을 지적하고 이의 시정은 정당한 교육으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즉, 민중에게 바른 지성의 힘을 기르게 하면 민중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려 할 것이라는 입장에서 인간학교의 이상을 제안하였다.
또한 바른 지성의 힘을 체질화하기 위해서 형(形)·수(數)·어(語)의 개념을 직관적 경험을 통해서 부여해야 함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인간에게 내재하는 자발성·자기활동에 의해 가능하다고 해석하고 기초도야의 이념을 구체적으로 펼쳤다. 도덕적 도야의 근원을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과 믿음의 관계에서 찾으면서 생활이 도야한다는 입장을 역설하였다.
그의 수많은 저서들을 보면, 전생애를 통하여 온갖 고경(苦境)을 참으면서 언제나 교사로서의 뜻을 굽히지 않고 교육이라는 외길을 걸었던 강한 실천성과, 교육에 의한 인류구제의 염원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확립하여 소상히 전개한 교육적 천재의 풍성함을 느낄 수 있다. “모든 것이 남을 위해서였으며, 스스로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라고 새겨진 묘비명은 그의 교육에 대한 모든 것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대표적 저서로는, 농민학교 운영에 실패한 후에 쓴 교육선언 《은자(隱者)의 황혼 Abendstunde eines Einsiedlers》(1780),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불후의 교육소설 《린하르트와 게르트루트 Lienhard und Gertrud》(1781~1787), 그의 근본적인 철학적·인간학적 사상이 담긴 《인류발전에 있어서 자연의 운행에 대한 나의 탐구 Meine Nachforschungen uber den Gang der Natur in der Entwicklung des Menschengeschlechts》(1797), 교육방법에 대한 독자적인 견해를 전개한 《게르트루트는 어떻게 그의 아이들을 가르치는가 Wie Gertrud ihre Kinder lehrt》(1801) 등이 있다.
또한 만년의 저서 《백조의 노래 Schwanengesang》(1826)에서는 교육이상으로서 전인적(全人的)·조화적 인간도야의 입장을 읽을 수 있다. 이들 저서에는 인간성에 대한 깊은 신뢰와 신(神)에 대한 순수한 신앙이 그의 생활과 사상의 바탕이었음이 잘 나타나 있다.
▶1665년프랑스 수학자 피에르 드 페르마 사망
https://youtu.be/iu6gbvZAWn0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