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이 사건 -1/6-
-모리 오가이 (森 鷗外)-
황요찬 譯
명치 원년인 무진년 정월, 토쿠가와 요시노부가 이끄는 구 막부군이 후시미, 토바전투에서 관군에게 패해, 오사카성을 함락당하자, 토쿠가와 요시노부는 뱃머리를 에도로 돌려 도주하였다.
그러자 구 막부의 지배 하에 있던 오사카, 효우고, 사카이의 모든 관리들은 자신들의 직무를 버리고 어디론가 잠적, 이들 도시는 한때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이에 오사카는 사츠마, 효우고는 나가토, 사카이는 토사, 이렇게 세 곳의 영주가 천황의 명령을 받아 관리하게 되었다.
사카이에는 2월 초순에 토사의 제6보병대가 먼저 들어왔고, 이어서 제8보병대가 들어왔다. 이들이 진지로 삼은 곳은 이토야 마을의 요리키 저택과 도우신 저택이었다.
그중, 토사 진영은 사카이의 민정까지 맡아 처리해야 하는 등 업무량이 많아 대감찰관 스기키 헤이타와 감찰관 이코마 세이지가 들어와 큰 길에 있는 쿠시야 마을의 옛 총회의소 자리에 따라 군사감독부를 두었다. 군사 감독부는 카와치, 야마토 부근에 숨어 있던 구 막부 관리 73명을 찾아내, 전례에 따라 이들에게 다시 업무를 맡겼다.
장안은 곧 질서를 회복, 한때 폐쇄되었던 연극 공연장인 키도도 오랜만에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
2월 15일의 일이었다. 프랑스 군사가 오사카에서 사카이로 오고 있는 것을 마을의 한 벼슬아치가 알아내 군사감독부에 알렸다.
요코하마에 정박하고 있던 외국군함 16척이 셋츠의 텐포우산 앞바다에 닻을 내리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영국, 미국 군함과 함께 프랑스 군함도 있었던 것이다.
대감찰관 스기는 제6,8 보병대장을 불러, 야마 토바시에 갈 것을 명하였다.
만약 프랑스 병사가 관의 허가를 받고 지나는 것이라면 사전에 외국사무를 맡고 있던 전 우와지마 영주인 다테이요 무네키로부터 통지가 있었을 터인데,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설령 아직 통지가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내지를 다닐 때에는 반드시 통행증을 소지하게 되어 있었고 이 통행증 없이는 내지의 어느 곳도 다닐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스기는 이코마와 함께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야마토바시에 진을 치고 기다렸다. 이때 프랑스 병사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데리고 온 통역인에게 통행증을 소지했는가 물었더니 없다고 대답했다. 이에 토사의 병사들이 길을 막고 돌아갈 것을 요구하자 프랑스군은 소수의 병력밖에 없었기 때문에 별다른 저항없이 순순히 오사카로 물러났다.
같은 날 저녁 무렵, 야마토바시에서 돌아와 있던 보병대의 진지에 마을사람들이 뛰어와 항구에 프랑스 수병이 상륙했다고 알렸다.
프랑스 군함은 항구에서 불과 1리 정도 떨어진 곳까지 와 20척의 거룻배에 수병을 태워 상륙시켰던 것이다.
두 보병대장이 부하들에게 출동준비를 시키고 있을 때 군사감독부에서 출동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달려가보니, 프랑스 수병들은 이렇다 할 소란은 피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신사 안 불각에 거침없이 들어가는가 하면, 민가에도 마구 들어가 부녀자들을 희롱하고 있었다.
본디 사카이는 개항장이 아니었던 탓에 이곳 사람들에게 있어 외국인은 낯선 존재였다. 따라서 프랑스 수병을 보고 기겁을 하고 달아나, 문을 걸어 잠그고 집안에 숨는 이가 많았다.
두 보병대장은 잘 타일러서 배로 돌려보내려 했으나 이날 따라 통역인이 함께 오지 않았다. 손짓 발짓으로 돌아가라고 해도 단 한 사람 듣는 이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두 대장은 그들을 진영으로 끌고 가라고 명령하였다.
병사들이 각기 가까이에 있던 프랑스 수병을 잡아 오라고 묶으려 하자 이들은 부둣가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중 한 명이, 상가 앞 출입구에 걸어 놓은 군기를 탈취해 달아났다.
두 대장은 병사들을 이끌고 뒤를 쫓았으나, 다리가 길고 뛰는데 익숙한 프랑스인들을 따라 잡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뛰면서 보니 프랑스 수병들은 벌써 거룻배에 올라타려 하고 있었다.
이 당시 토사의 보병대에는 토비쇼쿠(토목, 건축공사의 노무자. 에도시대에는 대개 소방수를 겸해 활동하였다:역주)라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시내 순찰을 돌 때에도 이들을 4,5인씩 데리고 다니게 되어 있었다. 군기를 관리하는 것도 이들의 임무였는데, 이들 중 우두머리는 가장 중요한 기수를 맡고 있던 우메요시라는 자였다.
한 번은 에도에 화재가 난 적이 있었다. 이에 불을 끄기 위해 모두가 에도로 달려갔는데, 단 한치도 뒤떨어지지 않고 말 뒤에 붙어 따라갔을 정도로 대단히 빠른 걸음의 소유자였다. 이 우메요시가 병사들 틈을 앞질러 나와 군기를 훔쳐 달아나던 프랑스 수병을 쫓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그는 들고 있던 토비구치(막대기 끝에 쇠갈고리가 달린 소방 용구:역주)를 내던졌다. 토비구치는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 수병의 정수리에 정통으로 명중했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벌렁 넘어진 수병에게서 우메요시는 군기를 다시 빼앗아 들었다.
거룻배에서 대기하고 있던 프랑스 수병들은 이를 보고 권총으로 일제히 사격하기 시작했다.
두 대장은 순간적으로 응사할 것을 결심하고 병사들에게 발포를 명령하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병사들은 70여정의 총구를 나란히 세워 상륙병들을 태우고 있던 거룻배를 향해 쏘기 시작했다.
프랑스 수병 6명이 총에 맞고 쓰러졌다. 부상을 입고 바다로 떨어진 자도 더러 있었다. 총에 맞지 않은 자들도 급히 물 속으로 뛰어들어 모두 한 손으로 뱃전을 잡고 발로 파도를 차 배를 저어갔다. 총알이 날아오면 물 속에 몸을 잠갔다가, 이내 다시 떠올라 바닷물을 토해냈다.
거룻배는 검차 멀어져갔다. 프랑스 수병 사망자는 총 13명이었는데 그중에는 하급장교 한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 스기가 달려와 사격을 중지케하고 진지에 돌아가 있을 것을 명령하였다.
두 부대가 진지에 돌아와 보니, 군사감독부에서 두 대장을 소환하러 와 있었다. 스기는 왜 상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발포명령을 내렸느냐고 두 사람을 나무랬다. 이에 두 사람은 워낙 화급을 다투는 일이라서 명령을 기다릴 수 없었다고 변명하였다.
물론 총을 쏜 것은 프랑스군이 먼저였고, 토사군은 이에 응전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토사의 병사들은 사실, 애초부터 프랑스군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토사인들이 마츠야마 영지를 토벌하기 위해 관군을 상징하는 깃발을 천황에게 받아들고 고향으로 호송하던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들은 도중에 코우베를 지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마주친 프랑스인들이 이들 일행을 가로막고 조정과 막부의 화친을 위해서라는 이유를 들먹이며 깃발을 빼앗으려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기는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잘잘못을 따져봐야 소용없는 일이고, 또 언제 프랑스 군함에서 기습공격이 있을지 모르니 단단히 방전 태세를 갖추고 있을 것을 두 사람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사건전말의 보고를 위해 이코마를 외국사무계로, 하급감찰관 한 사람을 쿄토 진영으로 보냈다.
불과 2개 소대로 군함을 막으라는 스기의 지시에 두 보병대장은 어이가 없었다. 두 사람은 궁리 끝에 해안에는 척후병을 내보내고, 포대에는 두 소대에서 몇 명씩을 뽑아 교대로 보내 지키기로 하였다. 이때 막부의 패잔병 수십 명이 몰려와 간청하였다.
"만일 프랑스 군함이 쳐들어 온다면 저희들도 함께 싸우게 해주십시오. 포대에는 토쿠가와 막부 시절에 설치해 놓은 대포가 36문이 있사온데, 지금은 키시와타의 영주이신 오카베 치쿠젠노카미나가히로 나으리께서 맡고 계시옵니다. 저희들은 그 대포로 싸우겠습니다. 두 대장님께서는 상륙해오는 놈들을 쳐주십시요."
두 대장은 이들을 포대에 두기로 하였다. 이때 키시와타 진영에서도 포대에 병사를 파견해주었고, 망원경으로 효우고 방면을 감시해 주기까지 했다.
밤이 되자 항구에 프랑스 거룻배가 나타났다는 연락이 왔다. 그러나 그 배의 숫자는 대여섯 척에 지나지 않았는데, 상륙하지 않고 모두 돌아갔다. 프랑스 수병의 시신을 찾으러 온 모양이었다. 실제로 시신 몇 구를 찾아내 배에 싣고 돌아간 것 같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16일 새벽 무렵 외국사무계의 지시로 토사는 사카이 외각의 경계를 풀고 군대를 철수하게 되었다. 군사감독부는 이어서 두 대장에게 오사카 진영으로 철수해 있을 것을 명하였다.
두 대장은 명을 받자마자 바로 사카이를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스미요시를 지나 오사카 미이케 6가에 위치한 토사 진영 관할상가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경이었다.
사카이의 군사감독부에서 외국사무계를 보고하러 간 이코마 세이지는, 그저 사건의 경위만을 대충 질문받았을 뿐이었다.
이어서 외국 사무계에서는 사카이에 있는 군사감독부 감찰이나 보병대장 중 한 사람이 출두할 것을 명하였다. 지시에 따라 스기가 출두해 보니, 오사카의 이시가와 이시노스케가 올린 사카이 사건의 보고서를 돌려주며, 더욱 상세하게 다시 써 제출할 것을 지시했다.
스기는 일단 보고서를 돌려받은 뒤 두 대장의 서명이 적힌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앞으로 더 이상 심문할 사항이 있으면 본인들을 직접 출두시켜 심문해 달라고 덧붙였다.
17일에는 전날의 회의 끝에 쿄토의 토사 진영에서, 원로 신하인 야마우치 하이토, 대감찰관 하야시 카메요시, 감찰관 타니 토모우, 그리고 하급감사관 몇 명과 나가오 타로우 무관이 이끄는 쿄토 주둔부대가 오사카로 파견되었다.
이들 일행은 밤이 돼서야 오사카에 도착했는데, 도착 즉시 대감찰관 하야시의 명령으로, 스기, 이코마와 두 보병대장은 나가호리의 토사 영저로 옮겨졌다.
18일에는 나가오 타로우 무관을 보내, 두 대장에게 근신 처분을 내리고, 부하들의 외출을 금지시켰다. 두 대장은 이 사건의 책임은 자신들에게 있다면서, 단지 자신들의 명령을 따르기만 한 부하들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나가오에게 선처를 호소하였다.
두 대장의 부하들은 소대장 이케노우에 야사키치와 오오이시 칸키치를 대표로 보내, 근신 처분을 받고 있는 두 대장과 면회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두 대장은 부하들과 만나 나가오에게 요청한 내용의 취지를 이들에게 설명하였다.
이때 쿄토에서 토사 진영의 보병 3개 소대가 도착해, 나가호리의 진영을 굳건히 지키며, 사람들의 출입을 엄중히 검문하게 되었다.
이어서 전 토사 영주 야마우치 토요시게의 대리인으로서 원로신하 후카오 카나에가 대검찰관 코나미 고로우우에몬과 함께 도착하였다.
이것은 오사카에 정박하고 있던 프랑스 군함 비너스호에 체류중이던 프랑스 공사 레옹 로슈가 외국사무계에 손해보상 교섭을 요구해 왔기 때문이었다. 공사의 요구는 즉시 조정회의에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계속-
첫댓글
이번에도 아베일족을 쓴 '모리 오가이'의 역사소설 '사카이 사건'
일본 개항후, 1868년 오사카 인근 사카이에서 일어난 프랑스와의 충돌 사건을 다룬 소설.
근세 일본의 외교적 상황이라거나 일본 행정조직의 시스템등 눈여겨 볼 부분도 많지만... 아시지요? 왕선생.
내가 어필하고 싶은 부분은 스스로 배를 갈라 죽는 저 가공할 일본인의 의식이라는 걸. ㅎㅎ
6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역사적 사실을 정밀하게 묘사한,소설 읽는 재미도 만만치 않습니다.
역시 심심풀이 땅콩, 한번 쑤욱 읽어보시우.
댓글은 사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