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言 · 話]의 무게
- 약속을 안 지키는 정치인들을 뽑는 것은 국민들의 책임 -
* 월간 奉恩寺報 《板殿》 2023년 12월호에 실린 글
몇 달 뒤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거가 실시됩니다. 전국 곳곳에서 ‘국회의원이 되겠다’며 현수막 등을 통해 자신을 알리고 각종 학교 동문회 등 다양한 모임에 열심히 찾아다닐 뿐만 아니라, 자신의 종교가 무엇이든 절과 성당 ‧ 교회를 가리지 않고 법회와 예배에 참석하여 ‘기억해 달라’며 사정을 합니다.
가는 곳마다 “이런 것을 해 달라. 이런 일이 필요하다. …”는 지역민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고 “알겠다”고 하는 정도를 넘어 “모든 일을 다 해결하겠다”며 약속을 합니다. 그러다 막상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면, 그 숱한 약속들을 잊어버리거나 “그것은 선거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했던 약속이고, 그것을 지킬 수는 없다”며 발뺌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기는커녕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조차 안 합니다. 이런 현상은 여당이나 야당, 특정 정당을 가릴 것도 없이 거의 모든 정치인들이 보여주고 있어서, 이제는 국민 대다수가 “그러려니~”하고 여기고 있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이런 식으로 용인해주게 되면, 국회의원 등 정치인들의 거짓말과 “선거구민을 속여서라도 당선만 되면 그만이다”는 의식이 사라지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누구든 입을 잘 지켜야 …
몇 달 뒤 실시될 총선거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며 우울한 기분에 잡혀 있다가 ‘말[話]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에 대한 옛 사람들의 ‘말’을 찾아보았습니다.
“口是禍之門구시화지문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요,
舌是斬身刀설시참신도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로다.
閉口深藏舌폐구심장설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
安身處處宇안신처처우 가는 곳마다 몸이 편안하리라.”
이 시를 지은 주인공 풍도馮道 중국 당唐나라 말부터 이어진 혼란기에 다섯 왕조를 거치면서 재상을 지닌 정치가였습니다. 왕조가 다섯 번이나 바뀌는데 재상 자리를 지킨 풍도의 비결이 을 이 시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정치인은 말을 함부로 해도 된다”고 여기는 우리 사회 현실에서는 거짓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치인들과 이를 용인하는 국민들 모두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켜 줄 만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화는 입으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입을 잘 지키라고 했다. 맹렬한 불길이 집을 다 태워버리듯이 입을 조심하지 않으면 입이 불길이 되어 내 몸을 태우고 만다. 입은 몸을 치는 도끼요, 몸을 찌르는 칼날이다. 내 마음을 잘 다스려 마음의 문인 입을 잘 다스려야 한다. 입을 잘 다스림으로써 자연 마음이 다스려진다.
앵무새가 아무리 말을 잘한다 하더라도 자기 소리는 한마디도 할 줄 모른다. 사람이 아무리 훌륭한 말을 잘한다 하더라도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예의를 갖추지 못했다면 앵무새와 그 무엇이 다르리오. 세치의 혓바닥이 여섯 자의 몸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위 글은 불자들뿐 아니라 수많은 국민들에게 맑고 향기로운 말과 글을 선물해주셨던 법정 스님의 말씀입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고통을 감내한 스님들
몇 달 전 휴정 서산休靜西山 대사의 《선가귀감禪家龜鑑》을 읽다가 ‘초계비구草繫比丘’와 ‘아주비구鵝珠比丘’ 일화가 눈에 띄어 컴퓨터에 담아둔 적이 있는데, 이 두 일화는 서산대사께서 《대장엄론경大莊嚴論經》 제3권과 11권에 실려 있는 내용을 인용한 것입니다.
먼저 ‘초계비구草繫比丘, 풀에 묶인 스님들’의 사연은 아래와 같습니다.
어느 때 여러 스님들이 넓은 들판을 지나가다가 도적떼를 만나 입은 옷을 다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도적이 ‘살려두면 관가에 알릴 테니 모두 죽여 버리자’라고 하자, 일찍이 출가했던 경험이 있는 다른 도적이 “비구의 계율에 따르면 풀 한 포기도 상하게 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도적떼는 벌거벗은 비구승들을 풀로 묶어 놓고 떠나가 버렸습니다.
이후 스님들은 낮에는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고통스러워했으며 밤에는 곤충과 짐승들의 괴롭힘에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잘못 몸을 움직이다가 풀이 상할 것 같고 만일 풀이 상하면 계율을 어기게 되기 때문에 “차라리 목숨을 잃을지라도 계율을 지키겠다”며 끝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마침 왕이 사냥하러 나왔다가 풀에 묶여있는 스님들을 발견하고 “왜 이런 일을 당하게 되었는지?” 연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 스님이 “대왕이시여, 매우 연약한 풀을 끊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다만 부처님 제자로서 계율을 지키기 위해 풀을 끊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국왕은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목숨을 돌보지 않고 계율을 지키려는 스님들을 크게 찬탄하며 “스님들을 묶었던 풀을 상하지 않게 풀어주라!”고 명령하고, 마침내 불교에 귀의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두 번째 이야기인 ‘아주비구鵝珠比丘, 거위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잃을 수 있었던 스님’의 사연입니다.
어느 때 한 스님이 ‘구슬세공사’ 집의 문 앞에서 탁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공사는 임금께 바치려고 작업을 하고 있던 구슬을 작업대 위에 내려놓고 공양드릴 음식을 가지러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구슬이 땅바닥에 떨어졌는데 마침 옆에 있던 거위가 이 구슬을 먹이인 줄 알고 삼켜버렸습니다. 세공사가 돌아와 스님에게 음식을 드리고 구슬을 놓았던 곳을 살펴보니 구슬이 보이지 않자, 스님이 구슬을 훔친 것으로 의하게 되었습니다.
세공사가 마구 욕을 하며 스님을 협박했지만, 스님은 거위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거위가 구슬을 삼킨 사실을 감추고 세공사가 욕을 하고 매질을 하는데도 입을 굳게 다물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피가 흘러나와 땅바닥을 적시게 되자, 거위가 다가와 피를 핥아먹는 것을 보고 가 난 세공사가 거위까지 죽였습니다. 거위가 죽는 것을 본 스님이 눈물을 흘리자 세공사가가 이를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그제야 스님은 “내가 매를 맞기 전에 그대에게 거위가 구슬을 삼킨 사실을 말했다면 곧바로 거위를 죽이고 그 배를 갈라 구슬을 꺼내려 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해주니, 세공사가 참회하며 스님께 “잘못했다”며 절을 올렸습니다.
약속을 잘 지킬 사람을 당선시켜야.
여러 왕조를 거치며 재상을 지낸 정치인 풍도馮道나 온 국민의 존경을 받은 법정스님이나 말이 ‘매우 무겁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하여 ‘입에서 나오는 말이 모든 화禍 ‧ 재앙災殃의 원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약속[戒律]을 지키려 했던 스님들이 보여주신, ‘계주繫珠비구’와 ‘아주鵝珠비구’ 일화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무엇일까요. 세속 생활을 하며 살다보면, ‘사실과 진실’만을 말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정치인들에게까지 “이 일화에 등장하는 스님들처럼 약속을 꼭 지켜야 한다”고 요구하기는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자꾸 이런 이야기를 해주어야, 그들도 말을 함부로 하고 약속을 남발하여 공약公約을 공약空約으로 여기는 짓을 조금이라도 억제하지 않을까요.
국민들 중에 정치인들 욕을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만, 욕을 얻어들을 정치인들이 큰소리치게 만든 책임은 상황이 그렇게 되도록 방관하거나 조장해 온 국민들에게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