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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심(2)
부활의 증인들
이성우 목사
오늘은 금년도 부활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인류 역사 상 아무도 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한 사람이 없는데,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 이후 장사지내신바 되었다가 말씀하셨던 대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승리를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며 온 세상에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20장에 기록된 부활의 메시지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아직 믿고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의심을 중단하고 믿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동료 신자들에게는 부활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기를 원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인이라는 사실과 이 세상에서 주님을 대변하고 있는 사람임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는 부활사건을 직접 목격한 11명의 증인들이 나오는데, 1명의 여인과 10명의 남자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의 가까운 친구들이었습니다만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문제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주님은 이들에게 나타나셔서 부활의 산 증거를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순간 이들의 삶의 문제는 해결되었으며 새로운 부활의 증인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부활의 첫 번째 증인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이 여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인생의 슬픔을 떨쳐버리고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증인이 된 여인입니다. 마태복음은 마리아가 홀로 무덤을 찾아간 게 아님을 말해주고 있으며, 누가복음 역시 여자들이 함께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이른 새벽에 무덤을 찾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가 전해주는 상세한 내용들은 기록하지 않고, 무덤을 찾아간 막달라 마리아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요한의 관심은 예수님과 말씀을 나눈 여인에게, 그것도 공관복음서에서 가장 먼저 언급하는 여인에게 집중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말하면서 첫 번째로 마리아를 언급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십자가가 믿음과 소망은 죽일 수 있지만 사랑은 죽일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과거형 사랑이며, 추억을 더듬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안타까워하는 인간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밖에서 슬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8장 2절 말씀을 통해서 이 마리아가 귀신 들렸다가 예수님께로부터 고침을 받은 여인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마리아는 예수님의 사역에 재정적인 도움을 드리기도 했었으며,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실 때 가슴을 치며 울던 여인들의 무리 가운데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아침, 마리아는 부활의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자기가 사랑했던 주님의 시신을 찾고 있었지, 부활을 기대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더욱 큰 슬픔에 빠져 빈 무덤 안을 들여다보면서 인간적인 깊은 슬픔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마리아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마리아야!” 그 목소리는 평소에 주님이 늘 부르시던 목소리였습니다.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양은 그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부릅니다. “선생님!” 그 순간 마리아의 슬픔은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비극은 승리로 바뀌었습니다. 마리아는 더 이상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슬픔에 빠져 인생의 소망이 끊어진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이제까지 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관계를 맺고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랑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신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복음이 갖고 있는 은혜와 개방성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당시 억압받던 여성들의 처지에서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맨 처음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더구나 커다란 범죄의 기록이 있는 여인에게 먼저 나타나신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런 여인에게 부활의 주님이 맨 처음 나타나심으로써 구원의 역사에는 남녀의 차별이 없음을 강력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히려 여성들이 결정적 순간에 주님께 쓰임 받는 것을 그동안의 기독교 역사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먼저 찾아 오셨습니다.
둘째, “너희가 증인이 될 것이다”라는 표현이 오늘 요한복음 20장에는 나오지 않지만 사도행전에서 사도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네 번에 걸쳐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부활의 첫 증인이 마리아임을 전합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마리아는 주님께서 살아나신 것과 그분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깊은 슬픔을 안고 무덤을 찾아 갔던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순간 슬픔을 떨쳐 버리고 기쁨의 여인으로 변화하여 부활의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부활의 두 번째 증인들은 10명의 제자들입니다. 이들은 인간적인 절망과 두려움에 빠져있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써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담대함으로 나아가 부활의 증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사람을 가장 무력하게 만드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사람이 갖고 있는 총명과 재능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빠져 있었는데, 이들이 가졌던 두려움은 신앙의 결핍 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마리아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의 의식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죽은 그 시점, 그 패배와 공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들이 문을 걸어 잠근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활을 전혀 기대하지 않는 패배와 공포의식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이 모여 있는 방 한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그 약속을 지키시고 계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제자들은 매우 놀랐습니다. 평강을 주시지만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며 살아나신 것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누가복음 24장 37절-43절까지의 말씀은 이 장면을 이렇게 전합니다. “나는 유령이 아니다. 어디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시고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셨다.” 요한복음 20장 21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다시 한 번 평강을 주신 후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것은 사명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사명자를 위한 절대적인 무장임을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 빠져 있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변화되었습니다. 제자들의 변화된 모습은 부활의 가장 큰 증거일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타나는 제자들과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제자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제자들은 말할 수 없는 낙담과 환멸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도 아끼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세상을 온통 뒤집어 놓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져왔습니까? 예수님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강림 때문입니다. 성령 강림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한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부활하신 주님은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의 경우를 보십시오. 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저주하고 맹세하면서까지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두려워하는 제자들과 함께 문을 닫고 숨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조금만 넘기면 예루살렘의 돌계단 위에서 수많은 군중을 향하여 가장 담대하고 능력 있는 설교를 하는 사람으로 변화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한 사람이 삼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람에 날리는 모래는 다 날아가고, 그의 별명처럼 그는 진정한 반석이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변화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또렷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어 놓은 것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담대한 용기의 사람들이 되었고 부활의 증인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부활의 세 번째 증인은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도마.
그는 지독한 의심에 사로잡혀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그 사실을 직접 확인하고는 의심에서 해방되어 완전한 신앙을 소유한 사람이 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철저한 증인이 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유다가 배반을, 베드로가 부인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도마는 의심많은 회의주의자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도마가 들어오자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난 사실을 열심히 이야기 했습니다. 하지만 도마가 볼 때 그 이야기는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는 ‘보는 것이 믿는 것’ 이라는 신조를 신봉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그랬지만, 도마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을 거짓 메시아라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면서 도망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살아나셨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도마는 그분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5절을 보면 그는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이런 도마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여드레 후, 문을 꼭 잠가 둔 방안에 다시 주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주님은 도마를 향해 “네 손가락을 내 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 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경험해 보라는 믿음에의 초청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도마를 꾸짖거나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분은 도마에게 증거를 제시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이 말씀은 의심하기를 중단하고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를 느끼는 순간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가장 아름다운 고백을 합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여!” 도마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신약성경의 가장 완전한 신앙고백입니다. 도마는 거칠게 말하는 회의주의자에서 자원하는 예배자가 되었던 것이며 부활의 증인으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도마처럼 주님의 부활을 의심하며 잘 믿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요한복음 20장 29절 말씀에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그래서 말씀을 기록해 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부활의 증인들의 증언을 듣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복인줄로 믿습니다.
켐벨 모건은 부활을 가리켜서 ‘믿음의 닻을 내리는 정박지’라고 말합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 부활의 빛에 비추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생애를 새롭게 이해한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복음은 부활의 빛에 의해서만 온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만이 인생의 슬픔을 떨치고 기쁨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만이 두려움의 늪을 벗어나 담대한 믿음의 용사가 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만이 의심에서 해방되어 완전한 신앙을 소유할 수 있게 됨을 믿으시고 여러분들도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
요한복음 20장 17절, 마태복음 6장 8~9절 / 조용기 목사
<서론>
‘하나님 우리 아버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의 씨앗을 심어준 이가 우리 아버지가 됩니다. 그 때문에 아버지와 우리는 동일한 생명을 나눠 가진 생명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동물은 아무리 가까워도 우리의 아버지가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귀여운 애완동물도 우리의 아들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종종 텔레비 인터뷰에 보면 개나 고양이를 내 아들, 우리 딸이라고 말하는데 아주 징그럽고 마음에 구역질이 납니다. 왜냐, 동물에게는 생명의 씨앗을 줄 수도 없고 받을 수 도 없습니다. 동물하고 인간은 근본적으로 종이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물이 아들이 될 수 없고 딸이 될 수 없고 동물이 아버지, 엄마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징그러운 소리 다시 하지 말아야 됩니다. 인간의 생명과 동물의 생명은 질적으로 전혀 다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본론>
1. 하나님 아버지
그런데 오늘 이 성경말씀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엄청난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어 주시고 우리는 하나님과 생명 공동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친히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과 생명 공동체가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반열에 들어가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는 길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것은 종교를 믿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나 유대교나 어떤 종교를 믿으므로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고 우리가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를 믿는 것은 종교인이 되는 것이지 하나님께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종교를 믿는다고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지 않아요. 생명 공동체가 되지 않습니다. 가문이나 혈통을 통하여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니지요.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는 모태신앙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믿었습니다." 뱃속에서 어떻게 믿어요? 뱃속에서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그것은 너무 과도한 표현인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나는 믿습니다." 그것은 가정 전통이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었다는 것이지 구원받았다는 의미는 아닌 것입니다. 가정혈통이나 가족전통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는 않습니다.
성경말씀에 마3:8~9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하나님이 아들로 만들어야지 혈통으로나 가계를 통해서 구원을 받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뜻대로도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훈장 주듯이 사람의 뜻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합니다. 나는 제가 20대 징병 검사를 받으러갔는데 제가 그때 부흥사 통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전 중에 징병검사를 해야 되는데 오전에 못하고 말미를 얻어서 오후에 갔더니만 나를 징병 검사하는 군의관이 화가 굉장히 났어요. "선교사 통역만 하면 제일인줄 아느냐? 오전에 받을 사람이 왜 오후에 왔느냐?" 그래서 "하나님 사업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사업? 나는 안수 받은 집사야. 나는 세례 받았어. 미션스쿨을 나왔어." 그러더니만 담배를 내어서 탁해서 입에 넣어서 휴 하는데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건방지게 질서를 지키지 않고.." 그래서 내가 속으로 생각하기를 "아니, 안수 받은 집사고, 세례를 받았으면서 그래 다른 사람 앞에서 담배를 입에서 물고 연기를 품으면서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이것은 종교적인 사람이 될지는 몰라도 거듭나지 못했지 않느냐." 그때 그 느낀 충격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학습을 받게 하고 세례 받았다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아닙니다. 사람에게 안수 받았다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로 받는 축복이지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태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셔야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 옛사람을 끌어안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부활하사 새로운 생명을 우리에게 심어준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생명의 씨앗인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씨를 받아 어머니의 뱃속에서 자라서 우리가 사람의 자식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씨앗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므로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가문을 통해서나 혈통을 통해서나 사람의 뜻대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생명 공동체를 얻게 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예수 이름으로 믿어서 성령 받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생명을 받으면 하나님과 생명 공동체가 됩니다. 우리 육신으로도 아버지, 어머니 속에 태어났으면 생명 공동체입니다. 아버지 생명, 어머니 생명, 내 생명 다 공동으로 같습니다. 그와 같이 예수를 믿어 구원받으면 아버지의 생명, 예수님의 생명, 우리의 생명이 같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4:20에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얼마나 놀랍습니까? 예수님이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고 아버지와 아들과 우리는 공동체가 되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한 생명체가 되어요.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는 하나님과 같은 공동체 생명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 속에는 영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생명 공동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로 나지 않았었습니다. 육신의 사람으로 살다가 육신의 사람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믿으므로 하나님의 생명의 씨앗인 예수님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서 생명을 받아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족이 되지요.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동물은 애완동물로 기르지만 가족은 아닙니다. 아무리 이쁜 개나 고양이라도 우리 가족이 될 수는 없어요. 가족은 우리의 품에서 태어난 아들, 딸들이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 아무리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과거에 지음을 받은 인간이라도 하나님과 가족은 되지 못합니다. 예수 믿고 거듭나고 마음속에 하나님의 생명체의 공동체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과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사는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요14:23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가족이니까 거처를 같이 하지요. 오늘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이 이 교회에 와서 우리와 거처를 같이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거처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계신 곳이 바로 아버지가 계신 곳이요. 아들 예수님이 계신 곳입니다. 가족이기 때문에 운명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굉장히 큰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위에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고후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옛날의 나는 지나가고 내가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전혀 옛날 흔적은 완전히 십자가에서 사라지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용서받은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마귀와 세상을 벗어난 거룩하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채찍에 맞아 치료받고 건강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복을 받고 형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 영생, 천국 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므로 아버지께서 우리로 하여금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고 넘치게 얻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으며 아버지께서 우리를 택한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으로 만들어 주시고 거룩한 나라로 만들어 주시고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만들어 주셔서 신분이 달라지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자기 신분이 달라진 것을 모르고 여전히 믿기 전 육신의 사람처럼 생각하고 살면 아주 잘못된 신앙인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 사람의 아들 나라로 옮겨서 국적도 달라지고 신분도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갈4:6에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신분이 달라졌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과 생명 공동체가 되어서 하나님을 향하여 '아빠 아버지' 아빠라는 것은 어린 아이가 굉장히 친밀하게 아버지를 부르는 것이 아빠 아닙니까? 하나님이라고 해서 부툴이 없고 심판의 대상인 하나님이 아니라 이제 우리를 나아 주시고 우리와 생명을 함께 나눈 한 가족이 되어서 아빠, 아버지.. 얼마나 가까운 존재가 되었는지 그것을 깨달아 아는 신분이 달라진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지그 지글러라는 유명한 성공 철학자가 지은 “정상에서 만납시다”라는 책에 17년 동안 저능아로 살았던 한 천재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소년은 15살 때 학교에서 선생님이 말하기를 "너는 둔재뿐 아니라 바보야! 너는 학문적으로 절대 성공하지 못해! 보따리 장수나해! 너는 저능아야!" 그 말을 듣고 그는 자기가 저능아로 생각하고 자기를 저능아로 바라보고 저능아라고 믿고 사람들에게도 "나는 머리가 나쁘니 저능아"라고 말하고 32년 동안 저능아로 살았습니다. 보따리 장사로 이리저리 헤매면서 멸시와 천대를 받고 살았는데 32살에 우연히 IQ조사를 해보았었습니다. IQ조사를 하니까 IQ161이라.. 여러분 IQ140이면 천재에 속하는데 천재보다도 더 높은 161.. 천재 중에 천재라.. 그것을 선생이 잘못 말을 해준 것입니다. 자기가 천재라는 것을 알게 되자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천재라고 깨닫게 되고 천재라고 자기를 보고 믿고, 생각하게 되자 천재처럼 행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후로 그는 많은 책을 쓰고 특허도 내고 사업에도 크게 성공하여 큰 부자가 되고 IQ140 이상의 사람만이 가입할 수 있는 멘사(Mensa)클럽의 회장이 되기도 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깨닫지 못할 때는 바보로 살았으나 깨닫고 난 다음에는 천재로 산 것입니다. 성경에도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옛날에는 육신의 사람, 아버지도 없는 고아와 같은 사람이었으나 이제 신령한 사람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과 생명 공동체가 되고 천지와 만물을 지으시고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아버지가 우리 친아버지가 되어서 아빠, 아버지가 되었으니 이 아버지와 함께 사는 사람들은 모두 다 천치가 아니라 하늘나라 천재들인 것입니다. 자기의 정체성을 알아야 돼요. 신분을 알아야 돼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사람이 된 것을 깨달아 알고 그렇게 바라보고 믿고, 입술로 시인하며 그렇게 생활하고 행동하면 하나님이 함께 역사하사 우리의 삶속에 크나큰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 의식주 문제를 걱정합니까? 여러분, 여러분 아버지가 성공해서 잘사는데 자식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 근심 시킵니까? 절대로 안 시키지요.
성경에 눅12:29~31에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수단과 방법으로 살아야 되기 때문에 아버지 없는 고아이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끊임없이 걱정하지요. 너는 아버지가 있지 않느냐.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신 아버지가 있는데 아버지가 내게 먹을 것, 입을 것, 있을 곳을 마련하지 못할 것 같으냐. 이 믿음이 적은자야.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아빠, 우리 아버지. 우리와 생명을 나눈 친아버지인 것입니다. 친아버지의 친자식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기의 신분을 알게 되면 의식주 문제를 걱정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친아버지 되면 우리에게 치료와 보호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아버지가 되는데 친자식이 영육 간에 병들었을 때 치료해 주지 않고 위험에 처했을 때 보호해 주지 않겠습니까? 반드시 치료하고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성경 시91:2~7에 "나는 야훼를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왜냐,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에 극한 염병, 유행병에서 건져 주시고 그리고 새 사냥꾼의 올무가 쳐져서 우리를 올무에 걸려 잡으려고 하는 사람에게서 건져 주시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안 돌볼 아버지가 누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아시는 우리 아버지가 우리를 내동댕이치고 버려둘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내 새로운 신분을 알게 되면 내가 강하고 담대하게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신1:31에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야훼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짙은 안개로 칠흑 같이 어두운 밤, 영국의 특급 열차가 빅토리아 여왕을 태우고 달리고 있었습니다. 밤에 막 기차가 달려가는데 아! 엔지니어가 보니까 앞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깃발을 마구 흔들고 있거든. 여기는 역원이 없는데인데 깃발을 자꾸 흔들고 그래서 기차를 퓨우~하고 세웠습니다. 그래서 내려가서 보니까 깃발을 흔드는 역원이 안보여요. 그러나 앞에 보니까 철교가 있는데 홍수에 철교가 끊어져서 물에 떠내려가 버렸습니다. 그대로 달렸더라면 곤두박질쳐서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각료가 다 죽을 뻔 당했습니다. 그래서 무사히 역에 도착하고 난 다음에 이상하다 싶어서 가만히 조사를 해보니까 앞에 헤드라이트 안에 나비가 한 마리 들어가 가지고서 빛을 비취면 나비가 날개로 퍼뜩퍼뜩 하니까 깃발을 마구 흔드는 것처럼... 나비 날개 그림자로 말미암아 죽음에서 면하게 된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빅토리아 여왕에게 하니까 여왕이 무릎을 치면서 "하나님이 그 기차 헤드라이트에 나비를 넣어 가지고서 우리의 멸망을 지켜 주었다." 미물의 나비라도 하나님은 사용하셔서 위험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셨기 때문에 아버지를 의지하는 사람에게 아버지가 돌보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그가 그 사자를 명하사 너희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심이라. 그가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아들을 돌보는 사람이 아니라 친아버지가 친자식을 안 돌볼 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버지 있는 자식이라는 자기의 신분을 알게 되면 이와 같이 담대한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이기 때문에 우리 자식을 교육시키고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에게 교육 안 시키는 사람 보았어요? 자식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좋은 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보내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 없는 것 다 팔아서 해외에 공부까지 시키려고 애를 써서 기러기 아빠, 기러기 엄마가 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 교육을 시키려고 있는 힘을 다하는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자식을 교육 안 시키겠습니까? 나는 며칠 전에 테레비를 보니까 한 기러기 아빠가 아내와 자식은 해외로 보내고 난 다음 자기 혼자서 집에서 사는데 개를 데리고 살아요. 개와 같이 밥을 먹고 침대에서 개를 안고 살고 개와 함께 뽀뽀하고 살고 개 팔자가 되었어요. 내가 보고 세상에 세상에 자기 아내와 자식은 외국에 보내놓고 개하고 같이 사는 개 팔자가 되고 저렇게 공부시켜서 뭘 하려고 하느냐. 사람들은 환상과 착각 가운데 살아요. 아들 공부 잘 시켜 놓으면 학교 졸업하고 출세해서 돈 잘 벌고 부모 잘 모실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를 못해요. 요사이 아들이 장가가서 교육 잘 받은 부인을 데리고 살게 되면 그 다음부터 모든 것을 부인에게 보고해야 되는데 부인에게 보고하지 않고 돈벌어가지고서 부모 모실수가 있을 것 같습니까? 아들 교육 잘 시켜 놓으면 남의 딸 좋게 만들어 주는 것밖에는 좋은 것이 없어요. 옛날 아들이지 요사이 아들 보듯 하지 마십시오. 요사이 차라리 딸 가진 사람이 훨씬 낫다구.. 쓸데없는 곳에 애를 쓰고 인생을 버리는 사람 볼 때 가련하기 짝이 없습니다. 여러분 정말 자녀 교육은 예수 잘 믿고 하나님이 섬기게 하시면 하나님이 높이시면 낮출 자가 없고 하나님이 낮추면 높일 자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길을 내시면 머리가 되고 꼬리 되지 않고 위에 있고 아래 내려가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교육을 받아도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고 외국에서 일류대학의 교육을 받아도 하나님이 같이 안계시면 놈팽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고 하나님 잘 섬기고 주와 함께 사는 것이 제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돌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여러가지 시험과 환난을 통하여 깨어지고 회개하고 인간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믿게 만들고 신앙이 자라게 하시고 난 다음에는 마침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신8:15~16에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 이었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침내 복을 주고 장성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 많은 시험과 환난을 통하게 하는 것입니다. 시험의 밤과 환난의 강을 건너고 내가 깨어지고 회개하고 변화 받아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게 만들고 난 다음에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는 그와 같은 교육과 성장의 법칙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천국을 상속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도 부모가 잘살면 집을 상속으로 받고 땅을 상속으로 받잖아요.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만 받을 뿐 아니라 천국을 상속으로 받습니다. 나는 늘 기도하기를 '하나님, 그저 나는 천당 문지기라도 만들어 주십시오. 천국 길거리에 소재부라도 만들어 주면 만족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니야, 너는 내 아들과 함께 하늘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겠다.' 우리가 장차 우리에게 일어날 그 놀라운 은총은 꿈도 꾸지 못하고 상상도 못합니다. 배추밭에 푸른 애벌레가 꿈틀꿈틀 기어 다닐 때 나비가 되어 오색찬란한 날개를 퍼득거리며 이 꽃 저 꽃에서 꿀을 빨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장차 일어날 일은 우리가 감히 상상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우주를 상속으로 받을 우리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롬8:16~17에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고 생명 공동체가 되면 우리가 부활해서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에게 우주를 상속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천사에게 우주를 상속으로 주겠다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같이 못난 인생이 변화 받아 그리스도와 더불어 우주를 상속으로 받아 하나님의 가족으로써 함께 살 것을 생각하니 이는 도저히 상상을 초월하고 몸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3. 하나님 우리 아버지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는 것은 내 아버지뿐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내 하나님이고, 여러분의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은 저도 하나님의 자녀고, 여러분도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열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하나도 없습니다. 부모가 되면 자식들이 화목하게 사는 것이 제일 고마운 일입니다. 잘살고 못사는 자식 다 있지만 그러나 화목해서 서로 싸우지 않고 서로 위해서 살면 제일 큰 효도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잘했다. 네가 못했다고 서로 다투어서 잘한 사람이 인정을 받고 못한 사람이 짓밟히는 것 부모는 원치 않습니다. 부모는 잘해도 좋고 못해도 좋으니 화목해라.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뜻도 그와 한가지인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도 좋고, 못나도 좋으니 화목해라. 사랑으로써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형제가 화목하고 동거하는 것이 어찌 그리 아름다우냐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개인적으로 내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우리 아버지, 나와 너의 관계 속에 하나님 아버지가 된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나와 너의 관계 속에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여, 하나님 내 아버지여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여 그러므로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함께 하나님께 예배 드려야 된다. 네가 하나님께 재물 드리고 예배드리되 누구에게 속상한 일이 있으면 재물과 예배를 버려두고 가서 화해하고 와서 예배드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해와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이기 때문에 친아버지이기 때문에 자식들이 다 서로 사랑하고 화해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예배드리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나 혼자 기도하는 것보다도 너희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구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들어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두 세 사람이 한곳에 함께 모였을 때 아버지가 와서 같이 계시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마18:20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오늘 이와 같이 함께 모여서 우리가 예배드리니까 이 자리에 하나님이 와서 계신 것입니다. 화목해야 되는 것입니다. 또 두 세 사람이 합심하여 구하면 응답하여 주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혼자 기도해도 응답하겠지만 그러나 합심해서 화목하여 기도하면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고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18:19에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나만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나만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니라 너도 하나님을 믿고 너도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알고 함께 손을 잡고 나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당 갈 때 나만 잘 믿고 가면 되지. 너는 잘 믿고 가든지 못가든지 내 무슨 상관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천당 가면 잘못 믿는 사람도 끌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함께 데리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잘못 믿는 사람이 잘 믿게 만들어 주고 도와줘서 함께 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아버지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 아버지이면 모르겠는데 우리 아버지이기 때문에 내 아버지만 될 뿐 아니라 못난 사람의 아버지도 되고 잘못 믿는 사람의 아버지도 되고 가난한 사람의 아버지도 되고, 병든 사람의 아버지도 되고 우리 아버지인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하나님 우리 아버지. 그러므로 나의 아버지가 될 뿐 아니라 우리 아버지가 되므로 우리 함께 가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분이 간증하는데 보니까 구라파에서 북한에 속해 있다가 미국 대사관으로 도망을 치는데 그 부인하고 함께 북한 감시원을 빼돌리고 막 도망을 치는데 부인이 미처 빨리 못따라 가니까 부인을 내버려 놓고 자기 남편이 먼저 북한 사람 따라오지 못하도록 미국 대사관으로 뛰어 들어가더랍니다. 늦게야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아내가 그렇게 남편이 야속하더랍니다. 자기만 살겠다고.. 늦게 잘못 뛰니까 아내를 버려놓고 남편 혼자 뛰어 들어가더라구.. 나보고 두고두고 그런 말을 해요. "세상에 저 양반이 그렇게 야속할 줄 몰랐다구.. 잘못되면 날 잡고 같이 끌고라도 가야지.. 자기만 살겠다고 뛰어 들어가더라구.." 여러분 실제로 내가 그 말이 마음에 잊어지지 않는 것은 부인하고 같이 도망을 치거든 못 도망을 치면 손잡고 끌어 도망을 쳐야지요. 내버려 놓고 혼자 뛰면 안 돼지요. 같이 도망을 쳐야지요. 우리가 천당 갈 때 같이 가야 돼요. 혼자만 가면 안돼요. 우리가 권사님은 집사님, 안수집사님은 평신도 데리고 가야 돼요. 나만 잘 믿고 나만 기도 잘하고 나만 축복받고 나만 천당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중대한 오해에요. 하나님은 나는 너희 아버지뿐 아니라 저 사람들의 아버지도 된다. 그러니 너 혼자 오지 말고 함께 오너라. 이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 예수 믿으면서 잘난 사람도 있고 못난 사람도 있고 부자도 가난한 사람, 건강한 사람, 병든 사람이 있는데 서로서로 돌보아 주면서 앞서거니 뒷 서거니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화목하고 사랑으로 끌고 가야 우리가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우리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고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에 우리들은 모두 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며 살면 되는 것입니다. 가족이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모든 것에 돌보아 주시고 우리를 이끌어 주시므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모든 일에 하나님께 순종하고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계셔 주시는 것입니다.
시100:3에 "야훼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 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파스칼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어져 있는데 그 구멍은 세상적인 쾌락이나 물질이나 명예나 권세로 아무리 채워도 안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늘 허탈한데 예수를 믿고 그 사랑이 부어지면 마음에 큰 구멍이 매꿔 진다. 마음에 허탈이 없어진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들일 때 인간의 절대절망이 예수님의 절대희망으로 채워지고 많은 성도들이 아버지 없이 고아로 방황하다가 아버지를 알게 되면 아빠, 아버지께 의지하게 되면 그렇게 믿음직스럽고 소망차고 기쁘고 활달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린 아이들이 좋은 일이 생기면 신바람이 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좋은 일이 생기면 너무나 기분이 좋아서 신바람이 나는데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알게 되면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신 그분이 나와 같이 살고 나는 그분의 가정 식구가 되고 생명 공동체가 되었으니 정말로 성령 바람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주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게 될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친아버지가 되므로 내가 돌보아 줄 테니까 나를 믿고 의지하고 순종하고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내게 부탁하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내가 책임져주마. 하나님은 안 되는 것도 되게 하시고 악을 변하여 선으로 바꾸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맡겨놓고 의지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축복을 받는다고 해서 항상 좋은 일만 생기는 것이 축복이 아닙니다. 어려운 일이 생겨도 그것이 나중에 복으로 변화되는 것이 축복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의지하면 좋은 일은 좋아서 좋고, 좋지 않은 일은 좋게 될 것이니 좋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가장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지만 그가 가나안 땅에 왔을 때 기근도 왔고, 애굽에 내려가서 아내를 뺏기는 슬픔도 당하고 가나안땅에 들어와서 조카가 아재비를 버리고 도망치기도 하고 여러가지 어려움을 당했지만은 그러나 하나님은 창대하고 거부가 되게 복을 주신 것입니다. 복이란 것은 고난이 없는 것이 복이 아닌 것입니다. 수많은 고난이 다가와도 그를 극복하고 합동하여 유익이 되어 오히려 선하게 되는 것이 축복인 것입니다. 아버지가 계시면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의지하고 아버지께 맡겨 놓으면 좋은 일은 좋아서 좋고 좋지 않은 일은 좋게 될 것이니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하고 마음에 기쁨과 평안을 가지고 성령 바람이 나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고아는 너무나 외롭고 괴롭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고아처럼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심을 깨달아 알고 큰 기쁨과 신뢰 속에 항상 아버지를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고 의지하고 살아야 우리가 참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상실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신분은 안 믿는 고아의 신분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의 친자식이 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자녀가 왜 고아처럼 고개를 떨어뜨리고 삽니까? 아버지의 자녀가 왜 절망하며 삽니까? 왜 아버지의 자녀가 징징 거리고 울면서 삽니까? 아버지가 내게 계시므로 나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이며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눈에는 아무 증거 보이지 않고 귀에는 아무 소리 들리지 않고 내 앞길 캄캄 하더라도 모든 것을 아시는 아버지가 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내게는 아빠, 아버지인 것입니다. 친정 아빠 아버지에게 찾아온 딸이 얼마나 응석을 부릴 수가 있고 의지할 수 있지 않습니까? 또 아버지가 오랫만에 친정 찾아온 딸을 얼마나 사랑하고 돌보아 주겠습니까? 우리는 아버지에게 응석을 부릴 수 있는 것입니다.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것은 응석을 부리라 그 말인 것입니다. 그냥 점잖고 장엄하게 늘 하나님이여하고 벌벌 떨지 말고 그런 관계는 이제 지나갔다. 이제는 친아버지에 친자식이다. 생명 공동체이다. 아버지가 우리를 낳았다. 이제는 아빠, 아버지다. 응석을 떨면서 아빠, 아버지께 의지하고 기도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생애 속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결론>
고아는 외롭고, 괴롭고, 낙심되고, 쓸쓸하지만 여러분 외롭고, 괴롭고, 쓸쓸하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신바람, 성령바람이 나서 깡충깡충 뛰면서 믿음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
우리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아빠, 아버지 하나님 너무나 감사합니다. 옛날에는 아빠 아버지를 알지 못할 때 외롭고, 괴롭고, 고아와 같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서 생명 공동체가 되었고 아버지와 같은 생명을 얻어 아버지의 친자식이 된 것을 감사합니다. 아빠 아버지여 오늘 우리 아버지의 자녀들이 함께 모였사오니 우리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도와주고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면서 아빠 아버지를 즐겁게 하게 도와주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께 사랑받고 칭찬받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아빠 아버지여 오늘은 성찬 예배로 모일 수 있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성령으로 넘치는 복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VACANCY!
요 20:11-29 / 조상호 목사
성탄절만 되면 교회에서 자주 하는 성극이 있습니다. '빈 방 있습니까?'라는 제목의 성극입니다. 이 성극은 원래 1977년 12월호 가이드 포스트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1980년 성탄 무렵 일간신문 한 구석에 <월리의 성탄절>이라는 칼럼으로 소개된 것을 보고, 감동받은 연출가 최종률씨에 의해 극화된 작품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함께 많은 깨달음을 주는 성극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덕구는 ‘빈 방 없습니다.’라고 해야 하지만, 빈 방을 애타게 찾는 요셉과 만삭의 마리아를 보면서 대본과 달리, ‘빈 방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연극을 망치게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연극처럼 아기 예수께서 이 땅에 탄생하실 때에는 방 하나도 구하지 못하여 마굿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베들레헴 그 어디에도 빈방이 없는, ‘NO VACANCY!‘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빈무덤'을 남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VACANCY!‘ 상태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의 삶은 ‘NO VACANCY!‘로 시작되어 VACANCY!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우리가 읽지 않았지만, 요한복음 20장 1절 이하를 보면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 왔습니다. 물론 그녀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려는 목적에서 온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드리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무덤을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덤을 막고 있던 육중한 돌문은 옆으로 옮겨졌고, 그 안에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분명히 사흘 전에 예수님의 시체를 아무도 손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큰 돌을 굴려다가 무덤 문을 막아놓았습니다. 또한 그 돌문에 로마 황제의 도장이 찍힌 인봉을 붙여 놓았기 때문에 이제는 어느 누구도 그 돌문에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질 않아, 군대를 시켜서 24시간 동안 철통같이 무덤을 지키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입니다. 깜짝 놀란 마리아는 제자들이 숨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외쳤습니다. “주님의 시신이 없어 졌어요! 누가 주님의 시신을 가져갔나 봐요!” 마리아의 이 말을 들은 제자 중,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은 단숨에 주님의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말대로 주님의 시신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주님의 시신은 온데간데없고, 주님의 시신을 쌓던 세마포와 수건만이 잘 정리되어 개켜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사실이었습니다. 이쯤 되면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9절에서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은 아직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빈무덤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부활을 믿지도 않고,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없어진 주님의 시신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안타깝게도 그냥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간 베드로와 요한과 달리, 주님의 무덤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꺼리는 무덤에 한 번도 아니고 하루에 두 번씩이나 찾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빈무덤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11절을 보겠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여기 마리아가 '울었다‘는 것은 단순히 울먹이거나 눈물 흘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애간장이 끊어지는 것같이 소리 내어 통곡했다는 말입니다. 아무도 없는 이른 새벽 주님의 빈무덤에 다시 찾아온 마리아는 땅을 치며 통곡했습니다. 가정이지만 만약 주님의 시신이 사라지지 않고 무덤 안에 그대로 있었다면 그녀는 울지 않았을 것입니다. 처음에 마음먹은 대로 주님의 시신에 정성껏 향품을 발라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시신이 사라지고 주님의 무덤이 빈무덤이 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울부짖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시신이 무덤 속에 그대로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막달라 마리아는 울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저와 여러분들은 영원히 울게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시신이 무덤 속에 그대로 있었다면, 우리의 기독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무덤은 막달라 마리아의 기대와는 달리, 빈무덤이었습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심히 통곡하며 주님의 무덤 안을 다시 들여다보았을 때, 흰옷 입은 두 천사가 주님의 시신이 있었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울고 있는 이유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사람들이 주님의 시신을 어디로 옮겼는지 알지 못해서 운다고 대답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인기척이 나며 이러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무덤 속에 누워 있어야 할 주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은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빈무덤을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이 빈무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분명한 증거이며, 기독교진리의 핵심내용입니다.
인도에서 스탠리 존스 선교사가 노방전도를 하고 있는데, 이슬람교도 한 사람이 설교 중간에 나서서 "우리는 당신네 기독교인들이 가지지 못한 것한 가지를 가졌소."라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스탠리 선교사가 물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 이슬람교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메디나에 가면 마호메트의 시체가 들어 있는 관이 있어서 정말 마호메트란 사람이 역사적으로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소. 하지만 당신네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에 가면 빈 무덤밖에 볼 수 없지 않소?"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스탠리 존스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말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다른 점입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빈 무덤밖에 없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죽은 교주를 믿고 있지만, 우리는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다른 어떠한 종교의 창시자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특징인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부활사건은 불교나 힌두교나 회교도, 등의 세상의 종교와 다른 우리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줄로 믿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절과 4절에서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은 성경대로 사흘 만에 살아나신 줄로 믿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자기 앞에 있는 분이 예수님인 줄 깨닫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예수님과 대화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동산지기, 즉 묘지 관리인으로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 가리이다.” 그 때 주님은 다정하게 “마리아야”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대” 마태복음 28장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여인들이 분명히 주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서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언뜻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만지지 말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만지지 말라’는 말은 단순히 손을 대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Hold'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붙잡고 늘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 땅에 40일 동안 더 계시다가 하늘로 승천해야 하는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는 너무 기쁜 나머지 예수님의 붙잡고 늘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붙잡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렇게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보이셨습니다. 이어서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또 다른 여자들과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도 보이셨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5장 5절 이하를 보면, 게바라는 별명을 가진 베드로에게와 12제자에게와 500여 형제에게와 야고보에게와 모든 사도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다메섹 도상에서는 사도 바울에게 보이셨습니다. 이처럼 부활하신 주님은 40일 동안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보이셨을 뿐 아니라, 일시에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보이셨습니다. 여자에게 보이셨을 뿐 아니라, 남자에게도 보이셨습니다. 길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보이셨을 뿐 아니라, 골방에 숨어 있는 사람들에게도 보이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증인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부활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로 볼 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은 사흘 만에 확실하게 부활하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당신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구세주이심이 증명된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몇 가지 귀한 선물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이 선물은 제자들에게 뿐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을까요?
1) 평강(Peace)
첫째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저녁,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예루살렘에 있는 어느 비밀장소에 숨어서 문들을 꼭꼭 닫아 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그곳에 들어오셨습니다. 지금 제자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주님께서 로마 군사들에게 붙잡혀 가실 때, 자기들도 체포당할까봐 뿔뿔이 도망을 쳤던 겁쟁이들이 아닙니까? 베드로 같은 사람은 주님을 두 번씩이나 부인하고 세 번째에는 저주까지 했던 배반자가 아닙니까?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이미 들은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그야말로 제자의 모습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한심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주님이라면 이러한 한심한 제자들에게 뭐라고 하실 것 같습니까? 제가 주님이라면 난리법석을 부렸을 것입니다. 야단과 함께 호통을 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19절을 보겠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전혀 기대하지 않은 말씀을 주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배반한 제자들에게 첫 번째 하신 말씀은 책망이 아니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였습니다. 또 21절에서 다시 한번 여전히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한 도마를 책망하는 대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은 평화의 주님이 되십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평화를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이 주는 것과 차원이 다른 진정한 평강을 우리에게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2) 기쁨(Joy)
둘째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이미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16:20)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올라가실 때 제자들은 슬퍼했지만, 유대인들과 로마 군인들은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의 마음은 절망스러웠지만, 세상 사람들은 기뻐하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20절을 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슬픔과 근심, 절망과 고통이 사라지고 그들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기쁨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악한 마귀는 우리에게 근심을 가져다주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지난 주 화요일 저녁에 인버카고순복음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저녁집회에서 말씀을 증거 한 후, 강대상 앞으로 나온 모든 성도들에게 안수를 해주고 부흥회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친교실에서 성도들과 친교를 하는데, 이지영사모님이 한 여학생을 저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사모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인도에서 3년, 그리고 또 다른 나라에서 몇 년 유학을 하다가, 인버카길로 유학을 와서 지금은 키위집에서 홈스테이를 하고 있는 여학생인데, 그 여학생이 지금 굉장히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학생의 얼굴을 쳐다보니 사모님 말씀대로 그 여학생이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두려움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어떻게 할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 때 두 곳의 성경을 먼저 펼쳐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라는 말씀과, 요한복음 14장 27절의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는 말씀을 읽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결코 당신의 백성들에게 걱정이나 근심을 주시지 않는다. 만약 그러한 마음이 드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라 악한 마귀가 준 것이다. 그러한 마음이 들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된다.’라고 말하고 그 여학생에게 안수하며 간절히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학생의 얼굴이 서서히 평안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조금 후, 이번에는 형제님이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그 형제님은 인버카고순복음교회 성도는 아닌데, 부흥성회에 참석차 교회에 나오신 분이었습니다. 그 형제님은 2주 전에 너무 무서운 꿈을 꾸며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전한 "두 가지 무기"라는 제목의 말씀을 듣고 용기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영적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여러분, 빈무덤을 남기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백성들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사망 권세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세상 가운데에서 슬픔과 걱정과 근심에 쌓여 있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생명(Life)
셋째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물론 우리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입니다. 모든 인간이 범한 죄를 위하여 죄가 하나도 없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해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시고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믿는 자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죄에서 해방되고 영생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피 흘림과 십자가를 빼놓고는 우리 기독교를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기독교가 고난과 죽음에서 끝나버린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돌아가신 것으로 끝나지 않고, 사망 권세 깨뜨리고 다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집트에 가면 고대 왕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물론 아직 저는 가보지 않았지만, 그 무덤은 어마어마하게 크게 만들어졌고, 그 무덤 속에는 많은 미라들이 있다고 합니다. 왕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시신을 썩지 않도록 방부제 처리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3천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은 살아나지 못하고 미라로 남아 있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피라미드를 발굴하다가 작은 물병이 하나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물병 속에서 몇 개의 완두콩이 들어 있었습니다. 비록 색깔은 시커멓게 되었고 겉은 쪼글쪼글하게 말라 있었지만, 3천년 전에 넣어둔 완두콩이었습니다. 학자들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 완두콩을 물에 담가 놓았는데, 놀랍게도 싹이 트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완두콩을 땅에 심었더니 뿌리가 나고 줄기가 솟아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 놀라운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완두콩에서 싹이 난 이유를 아십니까? 그 완두콩 속에는 생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만약 우리가 생명을 소유했다면 우리 또한 영원히 죽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3천년 전에 물병에 들어간 완두콩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생명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살아난 것처럼, 부활하셔서 참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요11:25) 말씀 하신 것처럼, 부활이요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4) 사명(Mission)
넷째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만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사명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21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22~23절)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빚으신 다음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생명이 있게 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용서함 받을 수 있지만, 그대로 두면 그 죄는 그대로 있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 아니고, 사람들이 죄 용서함을 받을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복음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 믿고 죄 용서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따라 살았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이른 새벽에 빈무덤에 찾아왔던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 했습니다. 사도행전 4장 20절에서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였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바울도 옥에 갇히면서도, 돌과 태장을 맞으면서도,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으면서도,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사도 바울은 목숨 걸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러한 모습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우리들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누가 뭐라고 해도 부활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가정이지만, 만약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고린도전서 15장 1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만약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 기독교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이 땅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사이비 집단이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부활사건은 많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고 또 주님 스스로도 수도 없이 많이 예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주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주님은 희대의 사기꾼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빈무덤이 이것을 증명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빈무덤 밖에서 울고 있던 마리아의 눈에 있는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평강과 기쁨과 생명을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마리아의 눈에 흐르던 눈물을 닦아 주신 주님께서는 지금도 살아 계셔서 믿는 자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의 마음을 만져 주신 주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평강과 기쁨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평강과 기쁨과 생명을 누릴 뿐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천국 가는 그 날까지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사모하며 부활의 신앙을 간직하며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우느냐? 울지 말라
김춘섭 목사
1. 오늘의 부활절
초대 교회는 부활절이 따로 없었고, 주님이 부활하신 주일을 예배일로 정하여 부활의 감격을 예배 때마다 되새겼습니다. 그러다가 주후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부활절 날짜를 정하였습니다. 춘분 이후 보름달이 지난 첫 주일로 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절 이전에는 사순절기를 지킵니다. 곧 성회수요일이 시작되는 날부터 부활절까지 사십 일 동안이지만 실제는 40일이 넘습니다. 주일을 뺐기 때문입니다. 주일은 이미 부활을 기념하는 날, 곧 작은 부활절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부활절은 겨울을 지나 낮의 길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정점인 춘분을 지나면서부터는 음력 곧 달의 움직임에 따릅니다. 그래서 부활절은 3월22일에서 4월25일 사이에서 정해지게 됩니다. 이렇게 부활절은 해와 함께 달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탄생과 함께 그의 부활은 세상 역사의 전환점이 되는 것임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창조물인 해와 달, 즉 대자연과 호흡하며 살아가야 할 존재임을 알려줍니다.
엘리 비젤(Elie Wiesel)이 폴란드의 어느 유대인 마을을 소개하였습니다. 노인 랍비가 있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저녁시간이면 뒷산에 들어가 촛불을 켜놓고 시편을 노래하며 기도했습니다. 이 소문이 나자 많은 사람들이 숲 속에 모여 기도와 시편 노래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이 마을의 전통이 변했습니다. 노인이 사망한 뒤 꼭 숲에서 기도해야 되느냐는 의견들이 나와 몇 군데로 장소가 흩어지고 숲속의 기도처는 잊혀진 곳이 되었습니다. 꼭 촛불이 필요하냐는 의견들이 나와 노인 랍비의 촛대도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차차 노인의 기도문도 기억하는 자가 없게 되고, 시편도 망각되었습니다. 결국 남은 것은 노인 랍비에 대한 이야기뿐이었습니다. 하나의 생명 없는 전설처럼 마을 사람들은 이 노인의 이야기를 주고받았으니 그런 노인이 정말 살아 있었다는 사실조차 희미한 옛 이야기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의 부활은 희미한 옛 이야기가 아니라, 매일 매일 우리 속에서 함께 하시고 용기와 힘을 더해주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위대한 경험으로 우리 속에 역사해야 하겠습니다.
2. 어찌하여 우느냐?
이른 새벽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묻히신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는 주님을 잃어버린 슬픔에 잠겨 무덤 바깥에서 울다가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시신이 없어졌고, 시체 뉘였던 곳에 흰옷 입은 두 천사가 있었습니다. 천사들이 우는 마리아에게 물었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13절) 우는 이유를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라, 지금 너는 안 울어도 되는데, 아니 울 이유가 없는데 왜 울고 있느냐는 뜻입니다. 그래서 왜 우는지를 물은 것입니다.
이런 저런 겨를도 없이 곧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하였습니다. 동산지기인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님이 같은 물음을 던졌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15절)
울 까닭이 없는데 괜히 울고 있었다는 것 아닙니까? 그것만큼 싱거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셨는데 아직도 모르고 있으니 우는 것입니다. 울어야 한다면 기쁨의 눈물을 흘려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눈물을 압니다. 그가 흘린 눈물이 어떤 눈물이었는지 압니다. 마리아는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다녔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분의 이적을 경험하였고, 나아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현장까지 갔으며, 그리고 그가 묻히신 것까지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희망과 삶의 기쁨이 사라졌고,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를 잃어버린 이별의 안타까운 눈물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마리아와 동일한 아픔의 눈물을 흘립니다.
수년 전의 통계입니다만 아마 훨씬 더 늘어났을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미국은 5천만 명이 넘는 숫자가 안정제를 쓰고 있으며, 3천만 명이 진정제를 사용하며, 2천만 명이 각종 자극제를 쓰고 있다고 합니다. 속으로 울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며, 속으로 불안하고 참기 어려운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여주는 통계입니다.
그러나 안 먹어도 될 것인데, 자신의 건강을 스스로 파기한 어리석은 자들도 있습니다. 울 일도 아닌데 스스로의 잘못된 판단으로 불안과 우울증으로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그랬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예수님의 무덤에서 괴로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주님은 살아나셨는데도 알지 못하여 쓸데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직도 달빛 비치는 새벽에, 오늘의 걱정도, 내일의 염려도, 이생의 슬픔도, 죽음의 그림자도 깨끗이 몰아내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눈물이지만, 그러나 잃어버린 것이 아닌데 우는 것은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으신 주님은 오늘 우리의 슬픔을 향하여서도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겠습니까? 어찌하여 슬퍼하느냐? 어찌하여 울고 있느냐?
오늘 우리는 어떤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까? 혹시 쓸 데 없는 눈물은 아닙니까? 또한 더 큰 슬픔에 잠기지 않기 위해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잘못 판단하여 울고 있지는 않습니까?
3.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이 열심히 예수님의 뒤를 따르며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는 오빠 나사로가 죽었을 때도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실 것을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나는 나사로를 다시 살려내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지 못하였습니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고서도, 그를 동산지기로 착각하고 예수의 시체를 어디로 옮겼는지 물을 정도였습니다. 혼자의 슬픔 속에 빠지면, 주님이 오셔도 깨닫지 못합니다. 절망이 너무 깊으면 같이 있는 희망조차도 캄캄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절망 옆에는 언제나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극한 절망이 앞에 놓일 때, 왜 함께 하신 주님을 바라보지 못 하는 것입니까?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정말 주님께 부르짖어보았습니까? 겸손히 그분의 도움을 간구해 보셨습니까?
오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 속에 살아있습니까? 성경 말씀은 살아 있는 나의 말씀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앙이 내 가슴과 현실 속에 살아 있습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보고 비로소 복음을 이해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순히 착한 사람이 되라는 도덕적 교훈이 아닙니다. 죽은 영혼을 다시 살리고 영원히 죽을 죄인에게 살길을 제시하는 복된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만났으나 만나지 못한 만남이 있습니다. 알아보아야 만남입니다. 피난길의 기구한 운명처럼, 알아봐야 만남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믿을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게 됩니다. 죄와 죽음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을 보신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내신 것입니다.
조류연구가인 라트릿지는 앵무새의 무서운 습관을 보고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들이 앵무새 새끼를 잡아서 새장에 넣었습니다. 날마다 앵무새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고 기뻐하였습니다. 이튿날 어미 새가 새끼 있는 곳을 알고 먹이를 물어다 주었습니다. 소년은 먹이 걱정도 할 필요가 없다고 더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 새끼 앵무새는 죽어있었습니다. 라트릿지 박사가 조사한 결과 어미 새가 독이 있는 산머루(poison berry)를 갖다 먹인 것이 밝혀졌습니다. 갇혀서 우는 새끼를 눈뜨고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죽음에 눌린 인간, 죄의 포로가 된 인간을 그 고통과 흑암에서 해방시킨 사건이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은 죽는 것이 낫다고 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을 다 죽일 수는 없어서 그 아들을 죽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게 된 것입니다.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주님이셨지만, 빈 무덤은 새로운 해방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1993년 96세의 일기로 세상을 마친 유명한 흑인 여가수 마리안 앤더슨(Marian Anderson)이 1939년 부활주일에 워싱턴의 링컨 공원에서 무료독창회를 가졌을 때, 7만5천 명이 모였습니다. 국회강당에서 가지려 했으나 흑인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하였습니다. 음악회 이후에 앤더슨이 말했습니다. "차별과 고통이 처음에는 좌절을 주지만, 나중에는 나를 강하게 합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앉아있지만 말고, 주님을 위해 일어나 일하십시오."
누구를 찾느냐
요 20:11-23 / 안양준 목사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에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들린 자도 고쳐주시고 죽은 자도 살리는 이적들을 베풀었을 때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이들에겐 희망이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께 모여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인기는 온 이스라엘을 진동시켰습니다.
이제 곧 이스라엘이 로마로부터 독립되고, 성경의 예언대로 메시아 왕국이 건설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설레임을 갖고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3년의 시간이 흐른 후 어느날 예수께서 자신이 십자가에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처형당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꿈이 처참하게 부서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들은 앞날의 희망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두려워서 바깥 출입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의 절망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의 어쩌면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지 사흘째 아침이 되었습니다. 사실 오늘 아침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여인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무덤을 찾아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인들이 준비했던 향품은 아로마타라고 하는 것인데 죽은 사람의 시신에 바르는 물건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면서도 "누가 우리를 위해 무덤에서 돌문을 열어 줄 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들이 무덤에 가까이 갔을 때 큰 지진이 나며 천사가 내려와 예수님의 무덤을 막았던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어서 감히 바라볼 수가 없을 정도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덤을 지키고 있던 그 당당하던 로마병정들이 혼비백산해서 죽은사람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물론 여인들도 무서워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는데 천사가 말하기를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에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존재입니다. 자기의 부모나 형제, 가까운 사람들이 죽을 때마다 인생의 덧없음을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린다해도 죽어 버리고 나면 남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바람처럼 왔다가 안개같이 사라지는 것이 인생입니다. 생자필명이요, 회자정리라, 살아 있는 사람은 다 죽고, 만났다가 다 헤어지는 것이 인생입니다.
도대체 인간이 사는 의미가 무엇이고 가치가 무엇이겠습니까? 죽음은 모든 인간의 노력과 수고를 헛되게 만들어 버립니다. 무덤 속에 모두 묻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휴고 그린이란 유태인이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집단 수용소에서 겪었던 체험담을 [데르 모르겐]이란 잡지에 쓴 글을 원문 그대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날은 1944년 몹시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사실 집단 수용소에 달력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와 함께 감금되어 있었던 저의 아버지께서 저와 몇 친구분들을 데리고 수용소 건물 한 구석으로 모이게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날이 유대인의 명절인 [하누카의 저녁]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우습게 생긴 진흙 주발을 내어 놓으시더니 수용소에서 좀처럼 구하기 힘든 귀한 버터 기름을 녹여서 심지를 적셔 촛불을 대신하여 불을 켰습니다.
아버지가 송축 기원을 말씀하시기 전, 저는 아버지께 그 귀한 버터기름을 먹지 않고 낭비하는 데에 대하여 항의했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가만히 보시더니 버터 기름을 가지고 초를 만들어서 붙여 놓은 불빛을 보신 후에 [네가 알고 내가 알듯이 사람은 밥을 먹지 않고도 3주간을 살 수가 있어, 우리는 한때 물을 먹지 않고 3일 동안 살아 있었다. 그러나 너와 내가 알다시피 사람은 희망이 없이는 살 수가 없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절망적인 환경 가운데서도 희망을 찾아 몸부림 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희망이 있기만 한다면, 어떤 역경과 고난도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인간은 희망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면 그대로 자멸하고 맙니다.
기차를 타고 가는 한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이 사나이는 기차가 가는 동안 내내 창 밖만 바라보며 줄곧 눈물만 흘리고 잇었습니다. 어제 이 사나이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 전화를 받고 모든 일정을 다 포기하고 기차를 타게 된 것입니다. 그 전화의 내용은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토록 사랑하던 아들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가는 걸음은 무거운 슬픔의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저 미어지는 가슴을 안고 기차를 타고 가는 것입니다. 이 사나이는 사회에서 명성이 높은 교수였지만 죽음을 설명해 주는 논리나 학문이 그를 위로해 줄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에게 영원한 희망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이 지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희망을 상실하고 말았을 것이요 인류 역사는 깊은 어둠의 수렁에 빠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신앙의 요소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진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굽힐 줄 모르는 신앙은 바로 이 부활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 것을 알게 되었고 천국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우리의 삶의 의미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고전 15:53-54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