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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왼쪽 사진)과 박지성.
사진 제공=차범근, GETTY IMAGES/ Multibits.co.k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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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언제 축구가 도입됐는지 정확한 자료는 없다. 삼국사기에 김유신과 김춘추가 ‘축국’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 ‘농주’ ‘구희’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모두 ‘동그란 것을 갖고 놀았다’는 뜻이다. 근대 축구는 조선 말 개항과 함께 도입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영국 군함 ‘플라잉 피시’호가 1882년(고종19년) 6월 인천 제물포에 입항해 이 배의 승무원들이 부두에서 공을 차며 선상 생활의 지루함을 달랬다. 그러나 관가의 허락 없이 상륙한 이들은 군졸에 의해 쫓겨났다. 이때 영국 승무원들이 두고 간 공을 아이들이 주워 흉내를 냈는데 근대식 축구가 한국 땅에 도입된 시초다.
이후 한국축구는 영욕을 거듭하며 성장했다. 1954년에는 스위스월드컵에 첫 출전하며 축구사에 큰 획을 그었고 1986년 멕시코대회를 시작으로 2006년 독일대회까지 6회 연속 월드컵에 출전하는 금자탑을 쌓으며 아시아 축구의 강호로 우뚝 섰다. 한국축구는 100년이 넘는 역사 속에 꾸준히 우수선수를 낳았다. 그리고 이들은 좁은 한국무대에 만족하지 않고 유럽을 비롯한 세계 무대에 뛰어들어 한국축구의 위상을 높이는 데 공헌했다. 1978년 12월 독일 다름슈타트에 진출한 차범근(54)과 2002년 12월 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벤에 입단한 박지성(26)은 그들 가운데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해외진출 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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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버쿠젠과 한국축구의 인연은 깊다. 그 시발점이 된 차범근의 레버쿠젠 시절.
사진 제공=차범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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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의 독일 분데스리가 진출은 순탄하지 않았다. 박동희 전 건국대 교수의 도움으로 1978년 다름슈타트와 6개월 단기 계약을 맺었지만 군 복무를 완전히 끝내지 않아 다름슈타트와의 계약은 파기됐고 분데스리가 등록도 취소됐다. 차범근은 군 복무를 끝낸 1979년 6월 다시 독일 분데스리가 진출을 노렸다.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가 입단 테스트를 원했고 차범근은 입단 테스트를 보기 좋게 통과했다. 차범근은 이때 24만 마르크의 연봉을 받았는데 이는 프랑크푸르트에서 4번째로 높은 연봉이었다. 등번호 11번을 단 차범근은 프랑크푸르트 입단과 함께 주전자리를 꿰찼다. 입단 첫해인 1979-80시즌 리그 31경기에 출전해 12골을 터뜨리며 득점 7위에 올랐다.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와 치른 1980년 UEFA(유럽축구연맹)컵 결승전에서는 약관의 로타 마테우스의 수비를 뚫고 어시스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프랑크푸르트는 그 해 UEFA컵을 들어올렸다.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진출과 활약상은 프로팀이 없던 당시 국내 상황과 맞물려 우수선수들의 유럽행을 자극했다. 1979년 김진국이 다름슈타트와 계약했다. 이듬해 허정무가 독일 분데스리가 보쿰의 입단 요청을 뿌리치고 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벤에 안착했고 1981년 박상인은 독일 분데스리가 뒤스부르크에서 활약했다. 같은 해 조영증이 NASL(북미프로축구리그)의 포틀랜드 팀버즈에 입단하면서 한국선수들의 해외진출은 전성기를 이뤘다. 선수시절 골키퍼만 빼고 모든 포지션에서 뛴 전남 허정무 감독은 “차감독이 독일에 진출할 무렵 국내에는 프로팀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우수선수들의 눈이 해외로 쏠렸다”며 “차감독이 독일에서 좋은 성적을 내면서 해외 진출을 노리는 국내 선수들이 크게 고무됐다”고 말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은 한국축구 발전사에 큰 획을 그은 대회였다. 세계 축구계는 경기 내내 강한 압박을 가하며 빠른 플레이를 구사하는 한국축구를 다시 보기 시작했고 아시아축구는 한국축구를 통해 미래를 봤다는 호평을 받았다. 이러한 흐름은 자연스럽게 2002년 월드컵 대표선수들의 유럽 진출로 이어졌다.
국가대표팀에서 왼쪽 미드필더로 활약한 이을용이 터키 트라브존스포르 입단으로 해외 진출의 물꼬를 트더니 송종국과 차두리가 빅리그의 전초기지인 네덜란드와 독일 땅을 밟았다. 안정환은 전 소속팀 페루자와의 갈등 속에 훗날을 기약한 채 일본프로축구 시미즈 S-펄스로 둥지를 옮겼다. 박지성과 이영표는 스승인 거스 히딩크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있는 PSV에인트호벤 유니폼을 입었다. 그리고 이들은 2004-05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PSV에인트호벤의 4강을 이끌며 프리미어리그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유럽 무대에서도 엄청난 활동량과 뛰어난 공간 확보 능력을 보인 박지성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부름을 받았다. 박지성은 ‘축구종가’ 잉글랜드 무대에 진출한 1호 한국인 선수가 됐다. 곧이어 이영표가 토트넘 핫스퍼로 이적하며 프리미어리그 2005-06시즌에서는 두 명의 한국인 선수가 뛰었다. 2006년 독일월드컵이 끝난 뒤에는 잉글랜드 프로축구 2부리그 챔피언십 울버햄튼의 설기현이 1부리그 승격팀 레딩과 계약해 한국인 3호 프리미어리거의 탄생을 알렸다. 설기현은 지난해 9월 SPORTS2.0과의 인터뷰에서 “아시아 선수를 바라보는 유럽축구 관계자의 눈은 여전히 긍정적이지 않다. 그러나 박지성과 이영표의 활약으로 적지 않게 누그러진 게 사실이다. 한국대표팀의 선수라면 누구라도 프리미어리그에서 평균 이상의 활약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설기현의 말은 이동국이 입증했다. 진통을 겪던 이동국의 미들스브로행이 1월 23일 확정됐다. 이천수는 1월 25일 현재 위건 애슬레틱과 협상 중이다. 이천수의 위건행까지 확정되면 한국인 프리미어리거는 5명이 된다.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는 비유럽 나라 출신 선수로는 미국, 호주(이상 11명), 나이지리아(9명), 카메룬(7명), 코트디부아르(6명)에 이어 6번째로 많다. 한국축구 제2의 르네상스가 도래했다.
험난한 적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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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은 1980-81시즌 유르겐 겔스돌프의 고의적인 반칙으로 크게 다쳤다. 차범근의 부상을 놓고 독일 언론도 큰 관심을 보였다.(왼쪽 아래)
사진 제공=차범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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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80년대 서독은 축구강국의 위용을 뽐냈다. 축구강국의 기반은 의심할 바 없이 분데스리가였다. 차범근이 분데스리가 진출을 원했던 이유였다. 진통 끝에 프랑크푸르트에 자리를 잡은 차범근은 독일 수비수들이 질시할 정도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차범근은 유럽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지만 그 때문에 또 아시아인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이후 상대팀 수비수의 표적이 됐다. 차범근은 1980-81시즌 바이에르 레버쿠젠과 경기에서 독일 관중들도 깜짝 놀란 고의적인 반칙을 당했다. 레버쿠젠의 유르겐 겔스돌프는 차범근의 등 뒤에서 고의적인 태클을 가해 척추에 금이 가는 손상을 입혔다. ‘제2요추 골횡 돌기부 골절’이라고 진단을 받았고 차범근은 수개월 동안 그라운드에 서지 못했다.
차범근의 부상으로 독일 축구계에서는 페어플레이 정신이 강조됐다. 차범근은 부상 이전의 경기력을 찾기까지 적지 않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그의 높은 연봉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덩달아 국내에서도 혹독한 평가가 줄을 이었다. 차범근은 “몸이 따라주지 않았고 트래핑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며 힘들었던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기본적인 볼 키핑이 안 되니 관중들의 야유는 커져갔고 차범근은 더욱 주눅이 들었다.
입단 첫해의 강한 인상만을 남겨 놓고 조용히 사라질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차범근은 그러나 리그 막판 카이저스라우테른전에서 부상 복귀 이후 첫 골을 뽑아내며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부상이 있었던 1980-81시즌에 차범근은 8골을 넣었다. 다음 시즌에서는 리그 31경기에서 11골을 터뜨렸고 프랑크푸르트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인 1982-83시즌에는 15골로 팀내 최다득점자의 영예를 안았다.
박지성은 큰 기대를 품고 2002-03시즌 네덜란드 무대에 진출했다. 그러나 이적과 적응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2003-04시즌 전반기까지 부진을 면치 못했다. 이적 첫해 무릎부상이 겹쳐 리그 2경기 출전에 그쳤던 박지성은 다음 시즌에도 자신의 포지션을 찾는 데 금쪽같은 시간을 흘려보내야 했다.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의 시즌 초반 구상은 마테야 케즈만과 박지성의 투톱 체제였다. 그러나 박지성의 부진으로 히딩크 감독의 구상은 깨졌다. 이후 박지성은 측면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당시 PSV에인트호벤에는 아르옌 로벤(첼시) 데니스 롬메달(찰튼) 등이 버티고 있었다. 박지성은 홈팬들의 야유까지 받았고 자신감마저 잃었다. 히딩크 감독은 “박지성이 홈팬들의 반응에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게 반응한다”며 일정 기간 원정경기에만 투입했고 이는 박지성이 자신감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됐다.
위기는 곧 기회였다. PSV에인트호벤의 왼쪽 날개로 활약하던 아르옌 로벤이 잦은 부상에 시달리며 박지성에게 출전 기회가 왔다. 출전 시간을 늘리면서 자신감을 회복했고 박지성의 가능성을 이미 알고 있던 히딩크 감독은 로벤의 복귀 이후에도 박지성을 중앙과 좌우 날개에 고루 배치하며 다양한 실전 경험을 쌓게 했다. 박지성은 2003-04시즌 골키퍼만 빼고 거의 모든 포지션에서 뛰었다. 박지성은 2004년 4월 18일(이하 현지시간) NEC 네이메겐전에서는 후반 한때 수비수로 나서기도 하면서 주전 선수들의 잇따른 부상에 골머리를 앓던 히딩크 감독의 숨통을 트이게 했다. 2003-04 시즌 리그 28경기(교체 9경기)에서 6골 2도움을 기록했으며 챔피언스리그 4경기,UEFA컵 5경기,암스텔컵(네덜란드 FA컵) 1경기에 각각 출전했다. UEFA컵 16강 오제르전에서 1도움을 기록한 것까지 포함해 38경기에서 6골 3도움의 성적표를 남겼다. 박지성이 터뜨린 6골은 케즈만(31골), 얀 베네고어 오브 하셀링크(12골), 욘 데용(8골)에 이어 팀내 4위였다.
최고의 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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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은 PSV에인트호벤에서 뛰던 2004-05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본선에서 한국인 첫 득점자의 영예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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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팬들은 언제나 골에 목말라한다. 긴박한 상황에서 나온 드라마틱한 골은 축구팬들의 머릿속에 오랜 기간 간직된다. 시대를 막론하고 유명선수들은 그를 대표하는 골장면이 있다. ‘그 선수’하면 떠오르는 ‘바로 그 골’은 머지않은 미래에 그 선수의 전부가 된다. 1980년대 서독 분데스리가를 강타한 차범근은 레버쿠젠 소속이던 1987-88시즌 에스파뇰과 맞붙은 UEFA컵 결승전 헤딩골을 최고의 골로 꼽았다. 한국인 1호 프리미어리거 박지성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2004-05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AC밀란전 골을 최고의 골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1976년 화랑팀에서 차범근과 한솥밥을 먹었던 대한축구협회 김진국 기획실장은 “(차범근은)타고난 재능이 뛰어난 공격수였다. 두발을 다 썼기 때문에 유럽 축구팬들이 신기해 했다. 또 빠르면서도 강력한 헤딩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위협적이었다”며 선수시절 차범근의 특징을 꼽았다.
차범근의 남다른 헤딩감각은 에스파뇰과의 1988년 UEFA컵 결승전에서 입증됐다. 레버쿠젠은 에스파뇰과의 원정 1차전에서 0-3으로 져 패색이 짙었다. 레버쿠젠 홈구장인 바이아레나에서 3골을 넣지 못하면 준우승에 만족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레버쿠젠은 후반 13분 티타 그리고 6분 뒤 괴츠가 골을 터뜨리며 역전극을 예고하더니 경기종료 9분 전 마침내 차범근의 헤딩 동점골이 터지면서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차범근은 오른쪽 측면에서 올라온 프리킥을 수비수보다 머리 하나를 더 뛰어오르며 헤딩 슈팅으로 연결해 에스파뇰의 오른쪽 골문을 갈랐다. 1, 2차전 합계 3-3이 돼 두 팀은 승부차기에 들어갔다. 승리의 여신은 레버쿠젠의 손을 들어줬다. 에스파뇰 마지막 키커의 슈팅이 골문을 크게 벗어나면서 레버쿠젠은 3-2로 승리했다. 만년 하위팀 레버쿠젠의 사상 첫 우승이었다. 우승이 확정되자 레버쿠젠의 에리히 리벡 감독과 차범근은 부둥켜안고 감격에 겨워했다.
1970년대까지 평범한 구단이었던 레버쿠젠은 1979년 라이너 칼문트를 단장으로 영입하면서 명문구단으로 도약했다. 레버쿠젠의 오늘을 만든 칼문트가 단장으로 취임해 가장 먼저 공들여 영입한 선수가 차범근이었다. 1983년 레버쿠젠으로 이적한 차범근의 몸값은 135만 마르크로 분데스리가 최고 수준이었다. 당시 레버쿠젠의 감독은 데트마르 크라머였다. 크라머는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한국대표팀 총감독을 맡기도 했다. 지난해 여름 한반도를 뜨겁게 달궜던 독일월드컵 때 한국대표팀은 레버쿠젠의 홈구장인 바이아레나에서 훈련했다. 레버쿠젠과 한국축구의 인연은 깊다. 차범근은 1988년 UEFA컵 우승으로 선수생활의 대미를 장식하고 1989년 레버쿠젠에서 은퇴했다. 그리고 23년 뒤인 2002년 레버쿠젠은 ‘리틀 차붐’ 차두리를 영입했다. 차두리는 그러나 DSC 아르메니아 빌레펠트로 곧바로 임대됐고 프랑크푸르트로 이적하면서 레버쿠젠에서 뛰지는 못했다.
2005년 5월 5일 PSV에인트호벤의 홈구장인 필립스스타디움.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1차전에서 AC밀란에 0-2로 진 PSV에인트호벤은 2차전 홈경기에서 배수의 진을 쳤다. 경고누적으로 출전하지 못하는 안드레 오이에르의 공백은 테오 루시우스가 메웠다. 박지성은 하셀링크, 헤페르손 파르판과 함께 공격 삼각편대를 짰고 이영표는 왼쪽 수비수로 출전해 브라질 대표팀 최다 A매치 출전을 자랑하던 카푸와 정면대결을 펼쳤다. 경기시작 9분 만에 필립스 구장이 출렁였다. 빠른 선제골로 AC밀란을 괴롭히겠다던 히딩크 감독의 공언대로 첫골이 이른 시점에 터졌다. 박지성이 주인공이었다. 박지성은 하셀링크와의 2대1패스로 AC밀란의 페널티구역을 파고들면서 그대로 왼발슛을 날렸다. AC 밀란의 디다 골키퍼가 손 쓸 새도 없이 골망이 세차게 흔들렸다. 필립스 스타디움에는 박지성 응원가인 ‘위송빠레’가 울려퍼졌다.
박지성이 챔피언스리그 본선에서 처음으로 터뜨린 골이었다. 더불어 박지성은 1955년 출범한 챔피언스리그(전신 챔피언스클럽컵) 본선에서 한국인 최초의 득점자로 기록되는 영예를 안았다. 박지성은 추격의 불씨를 살리는 선제골을 넣었고 이영표는 1,2차전 합계 2-2 균형을 맞추는 동점골을 어시스트했다. 경기 막판 마시모 암브로시니의 골이 터지면서 승리의 여신이 2003년 유럽챔피언 AC밀란의 손을 들어준 것을 빼고는 더이상 바랄 게 없는 한판이었다. 전력으로 봐 절대 열세라는 유럽축구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집고 PSV에인트호벤은 AC밀란의 숨통을 죈 채 벼랑 끝까지 몰아붙였다.
위대한 개척자개척자는 외롭다.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헤쳐나가는 개척자의 고통을 주위에서는 알아주지 않는다.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차범근은 한국선수로는 처음으로 유럽에 진출했다. 당시만 해도 독일에 진출하려는 차범근에게 나라를 저버리는 일이라는 비난이 적지 않게 쏟아졌으니 요즘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독일 무대를 밟은 뒤에는 유럽 선수들의 주요 타깃이 됐다. 1970-80년대 축구강국으로 군림하던 독일 선수들의 콧대 높은 자존심이 차범근을 그냥 놓아주지 않았다. 현재와는 다른 당시 UEFA컵의 권위에 대한 논란이 일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닐뿐더러 머나먼 독일에서 땀 흘린 그의 노력과 열정은 높게 평가받아 마땅하다.
차범근은 한국축구 최고의 스타였고 그 무렵 세계 정상의 스포츠무대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몇 안 되는 한국인이었다. 차범근과 같은 시기에 선수생활을 한 루디 푈러 전 독일대표팀 감독은 방송 인터뷰에서 차범근이 레버쿠젠에서 활약한 내용을 높이 평가하면서 “레버쿠젠은 1988년 UEFA컵에서 우승하기 전까지는 그저 그런 팀이었다. 그러나 당시 우승으로 투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후 명문구단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레버쿠젠은 여전히 우승 갈증을 속 시원히 풀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레버쿠젠하면 떠오르는 저력의 팀이라는 이미지는 차범근이 뛰던 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여왔다고 봐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1978년 차범근의 독일 진출과 맞물려 해외이적 러시가 있었던 것처럼 2005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한 박지성을 시작으로 국내 선수의 프리미어리그행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여건만 맞아떨어진다면 이러한 흐름은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K리그에서 뛰고 있는 유망주들은 가장 선호하는 유럽리그로 프리미어리그를 꼽고 있으며 세계적인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는 박지성을 보며 유럽진출이라는 야무진 꿈을 키워가고 있다.
유럽축구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박지성에 이어 이영표, 설기현이 프리미어리그로 진출하며 한국축구의 위상이 많이 올라갔다. 같은 프리미어리거라고 해도 현장에서 느끼는 차이는 꽤 있다. 물론 팬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포지션과 소속팀에 대한 가산점이 있기는 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박지성을 보는 현지 축구관계자들의 반응과 평가는 이영표, 설기현을 뛰어넘는다. (박지성이)아시아를 대표하는 스타는 물론 세계적인 스타로 거듭난 것 같다”고 말했다.
SPORTS2.0 제 36호(발행일 1월 29일) 기사
첫댓글 긴건 왠지.,.,. ㅋ
박지성도 분명 위대한 개척자이자 월드클래스의 선수이지만... 차붐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박지성 깍아내릴 생각은 없구요... 둘다 훌륭한 선수이지만... 차붐은 긱스 급의 레전드...... 윙으로 당시최고의 리그에서뛰면서 세계최고의리그에서 용병출신으로 연봉 3위... 골기록도 페널트킥 하나없이 많이넣었죠... 골기록 어시기록 보니깐... 긱스랑 비슷하더군요...차붐...긱스 생각하면 될듯...
차범근감독은 완료형이고,박지성선수는 현재진행형입니다.지금은 차범근감독의 선수시절 명성이 더 뛰어나지만,박지성선수가 훗날 더 큰 선수로 불려질수도있습니다.
차범근은 정말 ㅎㄷㄷㄷㄷ
솔직히 차붐의 기록은 그의 실력을 대변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함 . 기록이 그의 실력보다 낮은게 아쉬울뿐입니다
그렇죠... 아직도 선수로서의 차범근을 깍아내리는... 몇몇 초딩들과 까들도 아쉬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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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사네요.. 잘읽었습니다..^^a
긱스생각해라고 하는데 차붐은 확실히 센터포워드로 뛰었습니다.. 왜자꾸 윙으로 뛰었다는 소리가 나오는건지.. 차붐 다큐에서도 확인하실수 있음.. 잠시 윙으로 뛰긴했지만 주포지션은 센터포워드입니다.
센터포워드로 뛰면서 조금은 윙포워드적인 움직임을 많이 보여주셔서 착각들을 많이 하시는듯
닮았네...
저도 항상 개척자들을 더 높게 평가합니다. 우리나라선수가 맨유는 커녕 프리미어리그 진출한다면 백두산 폭발한다는 소리만큼 터무니없이 들렸던게 불과 몇년전인데 개척자들은 그런 통념과도 싸워야 하니까요. 길도 직접 터야하고, 신뢰도 쌓아야하고.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죠..자신감이 생겼으니까. 마냥 안된다 비웃는 사람은 이제 없고 좀 더 현실적으로 따져보고 방법을 찾고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