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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마태오 1,1-16.18-23
나는 왜 성모 마리아께서 아담과 하와를 앞서시는 ‘첫 번째 피조물’이라 주장하는가?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입니다. 성경엔 성모님의 탄생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성모님의 탄생이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성모님을 통해 당신 아드님이 탄생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당신 아드님의 어머니로서 성모님만큼 합당한 존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모님은 잉태된 순간부터 그리고 오늘 탄생한 순간부터 이미 그리스도를 위해 준비된 순결한 제물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독서의 로마서에서 보면 성모님께서 선택받으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중략)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나지르인이 되게 하는 순서는 이렇습니다.
‘부르심 – 의롭게 하심 – 영광스럽게 하심’입니다.
먼저 부르시고 그들을 의롭게 하시며 결국엔 당신 영광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이것만 보면 ‘예정설’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 이 말이 먼저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
하느님은 아무나 부르시지 않으십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부르십니다.
그렇지만 세상에 살아보지도 않았는데 그들이 당신을 사랑하는지 어떻게 아실 수 있으실까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모든 예언이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누가 당신을 사랑하게 될지 아셔서 그들을 당신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사랑이 없음이 죄입니다.
성모님은 사랑이 충만하셨기 때문에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모님은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어서는 안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어 그 후손들은 원죄를 지니기 때문에 사랑을 할 수 없는 상태로 태어납니다.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선택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이유는 원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할 줄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영원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기로 예정되었던 분”(「구세주의 어머니」, 3항)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연적으로 성모님은 원죄가 없기 위해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나라 신학계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잘 받아들여 주지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성모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앞서는 첫 번째 피조물임을 주장해야 하는 이유는 사랑의 법칙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상태에서 자녀를 낳았을 때 순결한 자녀가 탄생할 수 있을까요?
카인이 태어납니다. 만약 죄를 짓기 이전에 카인을 낳았다면 카인은 살인자일 수 없을 것입니다.
다윗과 밧세바가 불륜을 저질러 자녀를 낳았다면 그 자녀가 온전할 수 있을까요?
태어나자마자 죽었습니다. 부모의 살과 피가 담기지 않은 자녀의 미래는 죽음뿐입니다.
요즘 넷플릭스에서 방영하는 ‘마스크걸’(2023)이란 드라마가 있습니다.
김모미는 못생긴 얼굴로 어렸을 때부터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하며 자랐습니다.
엄마도 이모도 모두 외모 때문에 사회에서 상처받았지만, 그 상처를 감싸주지 못하고 그 닮은 점 때문에 더 싫어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자신의 외모 콤플렉스를 감사로 승화하지 못하면 그것이 자녀에게 전달될 것은 뻔한 일입니다.
모미는 또한 자살한 아빠를 닮았을 수도 있습니다.
모미는 이제 우리가 예상한 삶을 살아갑니다. 비극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인기 있는 연예인을 꿈꿉니다. 하지만 자라면서 외모가 발목을 잡습니다.
그래서 마스크를 씁니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을 포기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스크걸의 인터넷 방송을 보고 흥분합니다.
모미는 그것을 즐깁니다.
모미는 자신이 그렇게 인기 있는 사람인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게 회사에서 인기 있는 상사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회사의 현실은 인터넷과 다릅니다.
그렇게 지나친 욕망 때문에 모미는 상사를 죽음에까지 몰아갑니다.
그리고 모미를 좋아하는 또 다른 외모 콤플렉스를 앓는 주오남이 그 뒤처리를 해 줍니다.
주오남은 자신이 모미의 살인을 덮어준다는 명목으로 모미를 범합니다.
그 와중에 주오남도 죽습니다.
모미는 주어남과 자신을 통해 태어난 아기를 자신에게도 쌀쌀하게 대했던 엄마에게 맡기고
성형수술을 하여 술집에서 일하게 됩니다. 원작에서 모미는 자기 엄마처럼 딸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이 딸이 있는데도 집안에 여러 남자를 들입니다.
모미는 엄마가 자기를 버릴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자기에게 관심이 없는 엄마를 증오합니다.
모미는 딸을 엄마에게 버려두고 일본으로 밀입국하려다 잡혀 감옥에 갇힙니다.
감옥에 있다가 보니 성형 부작용이 생겨 그것을 해결하려고 탈옥까지 합니다.
모미의 딸 미모는 잘 자랄 수 있을까요? 마치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에게서 나온 카인처럼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이 죄의 굴레를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피입니다.
드라마에서는 모미가 자기를 위해 대신 희생한 친구 김춘애 때문에 드디어 사랑을 알게 된다는
설정입니다.
모미가 주오남을 죽였음을 안 엄마 김경자는 모미도 똑같은 고통을 겪어보라며 미모를 괴롭히고 죽이려 합니다.
모미는 자수하여 감옥에 있었는데 이 사실을 알고는 딸을 살리기 위해 탈옥을 감행합니다. 그리고 딸을 위해 대신 죽습니다.
여기서 이 비극의 역사가 끝이 날 것입니다. 모미는 엄마의 피를 받아 자신이 귀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어 자존감 있게 잘 살아갈 것입니다.
사랑의 법칙은 단순합니다.
사랑을 받아야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할 수 없다면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구걸하다 결국 망해버립니다.
이 굴레를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를 사랑해주는 누군가의 피를 받는 것뿐입니다.
만약 모미가 드라마에서 친구의 사랑을 받지 못했음에도 딸을 살리려고 탈옥을 하려는 설정을 했다면 개연성이 떨어질 것입니다.
하물며 성모님께서 성인 요아킴과 안나의 사랑을 받기는 하겠지만, 여전히 원죄에 물든 사랑을 받았다면 어떻게 예수님께 드릴 완전한 인성을
가질 수 있으실까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아담과 하와의 후예가 아닌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첫 번째 피조물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그래야 우리 자녀도 스스로 죄 없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피 흘림을 통해 죄가 사해지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됨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라면 모든 사랑의 법칙이 무너집니다.
사랑은 받은 만큼 할 수 있고 그만큼 죄가 없는 순결한 인성을 지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성부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딸이 되시며 또한 성령의 궁전이 되시는 이 최고의 임무와 품위를 지니고 계신다.
이 뛰어난 은총의 선물로 마리아께서는 하늘과 땅의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 훨씬 앞서 계신다. 그러나 동시에 구원받아야 할 모든 사람과 함께 아담의 혈통 안에 결합되어 계신다.”(「교회헌장」, 53항)
지혜(마리아)는 창조를 위한 또 구원을 위한 중재자로 나타난다.
하느님의 첫 번째 피조물로서 자신 안에서 창조주의 원의를 발견하고 또 그 원의에 대한 합당한 응답도 함께 발견한다.
이 참된 응답의 모습이 신구약을 아우르는 참된 지혜의 모델이 되는 것이다.
지혜는 응답하고 그 응답은 하느님과 함께 마치 소꿉친구처럼, 애인처럼 하느님 가까이 머문다.”
(요셉 라칭거, 시온의 딸, Jaca book, Milano 2006, 25)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마태오 1,1-16.18-23
마리아는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끊임없이 관상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 탄생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신앙 여정, 하나하나 짚어나가 보니 참으로 만만치 않았습니다.
아기 예수의 잉태 이후 성모님은 당혹해하는 부모와 맞서야 했고, 남감해하는 약혼자 요셉과 맞서야 했고, 따가운 이웃들의 시선과 맞서야 했습니다.
우여곡절을 겪은 성모님께서는 임신 9개월 만삭의 몸을 이끌고 나자렛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향합니다.
그뿐입니까? 정녕 있을 수 없는 마굿간 탄생, 헤로데 박해를 피하기 위한 이집트로의 피신,
때로 이해하기 힘든 아들 예수님의 돌출 발언, 결국 아들 예수님의 출가, 그리고 들려오는 좋지 않은 소식들, 결국 십자가 죽음... 정녕 성모님의 한평생은 길고도 험난한 여행길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이렇게 우리에 앞서 때로 힘들고, 때로 외롭고, 때로 시련 투성이의 가시밭길을 용감히 걸어가셨습니다.
때로 밀려오는 외로움에 돌아서서 울었습니다.
때로 가야할 길이 너무나 아득해 주저앉고만 싶었습니다.
때로 두려움에 사로잡혀 온 몸으로 떨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성모님은 기다림의 달인, 견뎌냄의 달인이셨습니다.
희망의 달인, 믿음의 달인이셨습니다.
철저하게도 ‘Yes woman'이셨습니다.
그 바탕에는 다름 아닌 단순함, 소박함, 가난함, 겸손함의 덕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자신 앞으로 닥쳐오는 비관적인 상황 앞에서도 성모님은 단 한번도 No라고 하지 않으시고 지속적으로 Yes라고 외치셨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지속적으로 Yes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성모님은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고 낳은 거룩한 생명의 잔, 하느님의 거처인 지성소가 되셨습니다.
성모님이 위대하신 이유는 그분의 신앙이 한 자리에 멈춰있지 않고 끊임없이 성장해나간 것입니다.
구세주를 잉태하리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전언을 들었을 때, 나자렛의 마리아가 지녔던 믿음은 아주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님을 출산하고, 그를 양육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시선을 항상 예수님께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즉 관상했습니다.
예수님과 대화하고, 예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많은 상처도 입으셨고, 이해하지 못할 일도 겪으셨지만, 늘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고,
기도 안에서 바라보고, 하느님의 뜻을 찾아나갔습니다.
그 결과 마리아의 신앙은 놀라울 정도로 성장을 거듭했고, 인류 역사상 가장 깊이 있는 신앙의 소유자가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토록 겸손하고 순종적인 마리아를 총애하시고, 하늘의 어머니로 품위를 격상시켜주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강론>
(2023. 9. 8. 금)(마태 1,1-16.18-23)
<성모님의 생애>
성경에는 성모님의 생애에 관한 기록이 없는데, 그래도 성모님의 생애를 연상하게 하는, 또는 복음서 저자들이 성모님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것 같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36-37).”
한나가 남편과 같이 살았던 기간이 짧았다는 것,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는 것,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이 없었다는 것 등이 모두 성모님의 생애와 비슷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모님은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하느님과 함께 사신 분입니다.
그리고 성모님은 ‘살아 있는 성전이신 예수님’을 떠나는 일 없이 끝까지 모든 것을 예수님과 함께 하셨고, 예수님 승천 후에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하신 분입니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4).”
‘렙톤 두 닢’을 봉헌한 어떤 과부의 이야기에서도 성모님이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1-44)”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혹시 그 가난한 과부가
성모님이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생활을 하셨기 때문에(루카 9,58), 성모님도 물질적으로는 늘 궁핍한 생활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진 것을 모두 다 봉헌하셨습니다.
<당신의 생애 전체를 하느님께 바치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칭찬하신 것은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그 마음을 보셨기 때문인데, 아마도 그 과부의 모습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봉헌한다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전부 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느님께서 잠시 나에게 맡겨 주신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봉헌을 자랑할 것도 없고, 생색낼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마주치신 과부의 모습에서도 성모님이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루카 7,11-15).”
이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예수님도 외아들이셨고 성모님도 과부셨습니다.
울고 있는 과부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셨을 때,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때에 성모님이 겪게 되실 ‘비통한 심정’을 미리 보셨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울지 마라.” 라는 말씀은, 성모님께도 하신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젊은이를 살리신 일은, 당신이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신 일이기도 하고, 당신의 부활을 예고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라는 말은, “죽은 젊은이를 살리심으로써 그 어머니에게 ‘기쁨’을 돌려주셨다.”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큰 기쁨을 주는 사건이지만, 그래도 성모님께 가장 큰 기쁨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어머니를 제자에게 부탁하신 것은(요한 19,26-27), 어쩌면 ‘나인’ 고을의 과부의 모습을 기억하셨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성모님의 탄생 축일을 지내는 것은, 창조 이전부터 성모님을 협력자로 뽑으시고, 성모님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구원사업을 시작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 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3-5).”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과 ‘탄생’과 ‘승천’은 모두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일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의 선택과 부르심을 받은 귀한 존재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성모님을 본받아서, 성모님처럼, 그 선택과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