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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1. 묵상글 ( 모든 성인 대축일. - 행복하게 살아갑시다! .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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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1. 모든 성인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신부님 10. 27(월). 강론글 말미에 한주간 강론글 올리지 못한다고 하셔서
아래 신부님의 그간 강론글을 공유합니다.
- 김 루도비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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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1. 01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저는 올해 모든 성인의 날 나눔을 위 둘 말씀을 가지고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먼저 하늘나라의 행복을 사는 성인의 삶을 가지고 나눔을 하겠습니다.
제 생각에 모든 성인의 날에 행복 선언의 복음을 듣는 것은
모든 성인이란 하늘나라의 행복을 사는 사람은 모두 성인임을 알라는 뜻이고
그 하늘나라 행복을 이 세상에서 살면 우리도 모두 이미 성인이라는 뜻일 겁니다.
그러므로 그 행복을 살면 되는데 관건은 살 줄 아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늘나라의 행복을 이 세상에서 이미 삽니까?
말장난 같지만 하늘나라의 행복을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하늘나라를 이 세상에서 사면 됩니다.
To live the Happiness is to buy the heavenly Kingdom in this world.
그리고 하늘나라를 사면 되는데 하늘나라는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돈 없이 가난으로 사는 것이라고 복음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러니 모든 성인은 하늘나라를 사 지금 하느님 나라에서 사는 신앙의 선배들이고,
그들의 모범을 본받아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의 행복을 이미 살고 있는 우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감사송은 아름답고 우리를 격려합니다.
“나약한 저희도 그들의 도움과 모범으로 힘을 얻어 활기찬 믿음으로
영원한 고향을 향하여 나그넷길을 서두르고 있나이다.
그들의 모범은 나약한 저희에게 힘이 되나이다.”
다음으로 모든 성인은 하느님 자녀의 행복을 사는 사람들인데
오늘 요한의 서간은 우리가 이제 하느님의 자녀라고 합니다.
오늘 요한의 서간은 우리가 과연 하느님의 자녀라고 얘기하고
이제 하느님의 자녀라는 표현도 이어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과연’을 먼저 얘기하고 ‘이제’를 이어서 얘기하는 것이고,
과연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게 될 때 이제 하느님의 자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果然)이라는 한자어는 ‘알고 보니 정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과연 하느님의 자녀라는 말은 그전에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모르고 살았다는 뜻이고, 이제 알고 보니 정말로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남들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거짓이 아니고,
성인들의 말도 거짓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실은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라는 세례의 뜻도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모르고 살던 나,
애비도 모르고 살던 우리가 이제 하느님을 애비로 알게 되고
애비의 자녀로 살게 된 것이 세례입니다.
그러니 세례받아 신자가 된 우리는 이제 그리고 이미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사는 행복한 성인들입니다.
그런 줄 알고 행복하게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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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경배 순례자님께서 올리신 아래도 참고하세요
https://cafe.daum.net/ThomasMoreSeoul/UtFb/1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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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 모든 성인 대축일
(욕심으로는 될 수 없는 성인)
http://www.ofmkorea.org/563053
23년 모든 성인 대축일 .
(행복하게 살아갑시다!)
http://www.ofmkorea.org/537903
22년 모든 성인 대축일
(하느님 안에 숨은 성인들, 밀양의 삶)
http://www.ofmkorea.org/511903
21년 모든 성인 대축일
(앞당겨 사는 행복, 그리고 성인들)
http://www.ofmkorea.org/437072
20년 모든 성인 대축일
(누가 성인인가?)
http://www.ofmkorea.org/386356
19년 모든 성인 대축일
(행복은 행운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http://www.ofmkorea.org/281999
18년 모든 성인 대축일
(성인의지聖人意志)
http://www.ofmkorea.org/161772
17년 모든 성인 대축일
(성인, 넘어졌다가 일어선 죄인)
http://www.ofmkorea.org/113055
16년 모든 성인 대축일
(여러분도 성인이 되고 싶으십니까?)
http://www.ofmkorea.org/94961
15년 모든 성인 대축일
(하느님의 자녀라서 행복하면 나도 성인)
http://www.ofmkorea.org/83881
14년 모든 성인 대축일
(성인, 하느님 앞에 있는 죄인들)
http://www.ofmkorea.org/71635
13년 모든 성인 대축일
(우리는 모두 성인이다.)
http://www.ofmkorea.org/57400
12년 모든 성인 대축일
(성인은 아무나 된다.)
http://www.ofmkorea.org/42972
11년 모든성인 대축일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http://www.ofmkorea.org/5344
10년 모든 성인 대축일
(우리 모두 성인 됩시다!)
http://www.ofmkorea.org/4534
09년 모든 성인 대축일
(우리는 모두 성인들!)
http://www.ofmkorea.org/3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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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1. 모든 성인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덕의 여정
“우리의 희망인 성인들”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시편24,3-4ㄱㄴ)
오늘 화답송 시편이 마음을 맑게 합니다. “일일청한 일일일선(一日淸閑 一日仙)”, ‘오늘 하루 동안 마음이 맑고 한가하면 하루 동안 신선이 된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명심보감에 나오는 말마디인데 신선대신 성인을 넣어도 좋겠습니다. 11월 위령성월 하루하루 이렇게 살기를 소망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중심이 있다. 마음에 중심을 곧게 세운 사람을 어른이라고 한다.”<다산>
“사람의 마음은 늘 위태롭고, 도의 마음은 드러나지 않는다. 섬세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켜 그 중심을 붙잡아야 한다.”<송나라 진덕수;심경>
하느님 중심의 한결같은 사람이 어른이요 성인입니다.
11월 위령성월의 첫날인 오늘 11월1일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성인들을 통해 하느님이 환히 드러납니다. 그대로 성인들은 우리의 희망이요 기쁨이 됩니다. 그리하여 저는 11월 위령성월을 성인성월이요 희망성월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해마다 11월 위령성월이 되면 지니는 느낌입니다.
자칫하면 쓸쓸하고 외로운, 허무하고 무의미한 감정에 젖기 쉬운 회색빛 11월을 우리의 희망인 모든 성인들이 우리 마음을 환히 밝히고 있습니다. 희망에서 샘솟는 기쁨입니다. 위령성월이자 성인성월인 희망성월 11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소망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하느님을 닮은 본연의 참나입니다. 바로 이를 위해 평생 보고 배울 모범이 예수님입니다. 비범한 성인이 아니라 평범한 참나의 성인이요 누구나 이런 성인이 되라 불림받고 있는 성소자인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이런 참나의 성인이 되는 것은 우리의 의무요 책임이자 권리입니다.
사도 요한이 제1독서 묵시록에서 우리의 궁극의 희망인 천상비전을 보여줍니다. 바로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 어좌와 어린양 앞에 서서 경배하는 이 성인들이 우리 희망의 구체적 모습입니다. 한 원로가 명쾌하게 이들의 정체를 밝혀 줍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내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세상의 온갖 크고 작은 고통이나 시련을 통해 정화되고 성화되어 본래의 참 나를 회복한 성인들임을 깨닫습니다. 언젠가 그날이 아닌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할 성인의 삶이요 사도 요한이 이런 우리의 신원을 명쾌하게 밝혀줍니다. 이미 성인임을 깨달아 믿고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신감을 고무하여 북돋아 주는 참 아름다운 내용으로 단숨에 읽힙니다. 하느님 자녀가 성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는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어떻게 자신을 순결하게 하여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의 희망이신 주님을, 성인들을 닮을 수 있겠는지요? 바로 그 노하우, 비법이 주님의 산상설교중 오늘 복음의 참행복입니다. 바로 참행복의 진복팔단 중심에 자리잡고 계신 예수님입니다. 참행복의 영원한 모범이자 원천이 예수님이요, 이런 참행복을 살 때 예수님을 닮아 참나의 성인이 됩니다.
“1.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2.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3.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4.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5.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6.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7.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8.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여러분들의 성덕점수를 계산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본점수 20점, 각항목 10점 만점에 도합 몇점인지 말입니다. 천상비전을 반영하는 지상천국의 참 행복하고 자유롭고 부요한 삶입니다. 십계명을 아무리 잘 지켜도 좋은 신자는 될지언정 거룩한 성인은 될 수 없습니다.
천상의 거룩하신 하느님을 향해 끝없이 열려 있는 결코 완성이 없는 성덕의 여정, 성화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성덕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5,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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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1. 모든 성인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성성’에로 나아가라는 강력한 호소를 듣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현대 세계에서 성덕의 소명에 관한 권고 문헌’인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마태 5,12)에서 “모든 이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의 사명입니다.”(9항)라고 밝히셨습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바로 이 ‘성성’에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제1독서>인 <요한묵시록>에서는 말합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 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묵시 7,14)
구원에 이르는 길은 쉽지만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부딪혀야 하는 수많은 시련들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참된 ‘성성’은 언제나 ‘순교’의 형태를 띠기 마련입니다. 인장을 받은 이들의 손에 들려있는 ‘야자나무’는 바로 이 ‘시련에 대한 승리’를 상징한다 할 수 있습니다.
<제2독서>인 <요한의 첫 번째 편지>에서는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 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여기서, ‘성성’은 ‘신적 자녀 관계’로 드러납니다. 곧 ‘성성’은 우리의 생명 안에, 신적 현존이 더욱 명백히 드러나도록 하기 위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상호 추구행위의 결과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삶의 어떤 한 순간의 영웅적 행동에 의해 우연히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 항상 계속되어지는 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참된 행복”을 통해 ‘성성’이란,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나약성’과 ‘그분을 극단적으로 필요로 함’ 외에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는 곳에서 실현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가난을 사는 일’입니다. 이미 그분을 차지한 까닭에 다른 어떤 것들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할 것입니다.
또 ‘슬퍼할 줄을 아는 일’입니다. 그것은 자신과 세상의 죄를 슬퍼하되, 자비 안에서 위로를 받고 기쁠 것입니다. 이미 깨어, 임을 바라보며 기도할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 ‘온유해 지는 일’입니다. 그것은 진정, 있어야 할 하느님 품에 이미 안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감미로움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은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일’입니다. 곧 그분 외에는 아무 것에도 목마르지 않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극단적으로 필요로 하는 일 외에는 결코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은 ‘자비를 베푸는 일’입니다. 이미 주님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손길에 매만져진 까닭입니다.
그리고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영에 끌려 다스림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고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진정,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클 것입니다.
오늘, “모든 성인의 대축일”에, 이토록 우리는 복된 삶에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의 성구를 새겨봅니다.
“성인이 되기 전에 성인으로 불리우기를 바라지 말고,
참으로 성인으로 불리어지도록 먼저 성인이 되라.”(수도규칙 4,62)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행복하여라.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주님!
가난을 살게 하소서. 당신을 이미 차지한 까닭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차지할 것이 없게 하소서.
슬퍼할 줄을 알게 하소서.
가엾이 여기는 당신의 마음에 제 가슴이 찔리게 하소서.
온유해 지게 하소서.
당신의 품에 안겨 다독거려지게 하소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게 하소서.
참된 음료인 당신께 맛 들여지게 하소서.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당신의 마음을 선사받게 하소서.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에 매만져지게 하소서.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당신 손이 저를 이끌게 하소서.
의로움 때문에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제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 되게 하소서.
이 복된 삶이 제게는 참된 행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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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1. 모든 성인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공평(公平)과 형평(衡平)’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평은 능력과 성과에 따라서 보수를 지급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공평이라는 원칙에서 성장하였습니다. 능력과 성과를 인정하기에 사람들은 더 노력하고, 공부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될 것이고, 적게 가진 자는 그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신앙의 차원에서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좋은 밭에 떨어지면 30배, 60배, 100배 열매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갈밭, 가시덤불, 길가에 떨어지면 싹은 나지만 말라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성경 공부에 함께 하고, 주일미사는 물론 평일미사도 참례하고, 본당에서 마련한 피정이나 교육에 참석하는 신앙인은 영적인 기쁨이 커지기 마련입니다. 시련과 고난이 찾아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신앙의 뿌리가 깊고, 신앙의 샘이 마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가 이상과 꿈이 좋았지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공평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능력과 성과에 따른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열심히 일할 동기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형평은 최소한의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국가나 교회가 보호하는 것입니다. 비록 능력이 부족해도, 비록 성과가 없었어도 사람은 하느님을 닮았기에 그 인격과 인권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에게도, 악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주신다.” 신앙의 차원에서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일꾼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침부터 온 사람도, 오후에 온 사람도, 저녁에 온 사람도 똑같이 1데나리온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공평의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차원이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투표권은 모두 일인 일 표의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품위와 인격은 능력과 성과에 따라서 등급이 매겨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막 태어난 아기도, 장애를 지닌 사람도, 한 때의 실수로 감옥에 있는 사람도 모두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사회는 능력과 성과에 따라서 공평하게 보상이 이루어지는 사회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존재이기에 형평이 이루어지는 사회입니다. 공평이 없는 형평의 사회는 발전과 성장을 이루기 어렵습니다. 형평이 없는 공평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품위를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우리가 왜 그분들을 기억하는 것일까요? 그분들이 행복했기 때문일까요? 그분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때문일까요? 저는 그분들의 삶이 우리가 보기에 행복했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이 우리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행복한 삶을 살기 때문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은 주어진 길을 충실하게 걸어갔고, 감사하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를 채우는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행복은 제가 원하는 것을 채워서는 얻을 수 없었습니다. 행복은 주어진 시간을 충실하게 보내고, 감사하며 지낼 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행복은 마치 길과 같아서 내가 걸어가는 순간이 바로 행복이었습니다. 길은 가지 않으면 풀이 돋아나고, 없어지게 됩니다. 길은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오솔길이, 시골길이 되고, 차량이 다니는 길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신학교에 있을 때도, 보좌신부로 있을 때도, 본당신부가 되어서도, 교구청에 있을 때도, 외국에서 지낼 때도 그랬습니다. 제가 감사하면 감사드릴 일들이 생겼고, 제가 사랑하면 사랑받을 일들이 생겼습니다. 제가 이해하니, 남들도 저를 이해해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느 특정한 시간과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내가 감사하면, 지금 내가 사랑하면 바로 그곳이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행복도 그렇습니다. 원하는 것들이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이 행복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참된 행복을 이야기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이런 삶은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삶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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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1. 모든 성인 대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하느님의 때가 충만해진 순간!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10월 31일 금요일- 마흔네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우리 조상들과 연결하기.
우리의 선성(goodness)는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시간 너머로 이어지는 공동의 은총 체험힙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리처드 로어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경계에 우리를 더 가까이 이끌어 주는 '얇은 시간'(thin times: 고대 켈트 전통에서 비롯된 개념으로, 하늘과 땅, 현세와 내세 사이의 영적 장막이 얇아지는 때를 의미)의 영적 의미를 깊이 기립니다:
어떤 사람들이 "경계 공간"(liminal space) 혹은 문턱의 공간(threshold space)이라고 칭하는 것은 우리를 신성한 존재에게 이끌어 주는 특별한 시간과 사건, 장소를 가리키기에 참으로 적절한 표현입니다(라틴어로 limen은 문턱을 뜻함). 우리는 모든 날이 거룩하다는 진리를 깨닫기 위해, 특별히 (성별된) 날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체험 속에서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교 이전부터 이어져 온 인간의 영적 감수성이며, 고대의 입문 예식 또한 매우 신성한 시간 속에서 수행되었고, 그 예식을 통해 참여자는 새롭게 발견된 신성한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모든 성인 대축일"과 "위령의 날"로 지키는 11월 1일과 2일은 이미 고대 켈트인들에게는 "영과 영혼의 장막이 얇아지는 시간"(thin times)으로 여겨졌습니다. (마찬가지로 2월 1일과 2일, 즉 성녀 브리짓다 축일과 주님 봉헌 축일 또한 촛불을 축복하고 밝히며 거룩한 현존을 기리는 날로 지켜졌습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을 가르는 장막은 이 시기에 가장 얇아져, 영혼의 여정이 더욱 쉽게 이어진다고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날들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의 거룩한 순간 안에 모이는 "깊은 시간"(deep time)을 자각하도록 우리 모두 초대받습니다. 우리는 조상들이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며, 우리와 함께 일하시고 우리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인들의 통공"이라 부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이를 "때가 차서 이루어진 순간"이라 표현하며, 이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신 때(마르코 1,15)나, 마리아께서 아기 예수님을 낳으신 때(루카 2,6)를 통해 드러납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하나의 충만한 준비 속에 모일 때, 우리는 이 "경계 공간" 안에 머물게 됩니다. 또한 "바로 여기"와 "바로 저기"의 경계가 우리 의식 안에서 사라질 때, 우리는 그 신비로운 공간 안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경에서 고백하는 "성인들의 통공"과 "깊은 시간"의 신비는 우리의 선성(goodness)이 오직 우리만의 것이 아니며, 우리의 부족함 또한 우리만의 것이 아님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적 존재이며, 부모와 조부모, 증조부모들이 살아낸 삶과 살아내지 못한 삶, 그리고 치유되지 않은 상처까지도 우리 안에 함께 담고 살아갑니다. 이는 유전자와 생명의 흔적을 통해 아주 먼 과거까지 이어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한 사람을 온전히 빚어내기 위해서는 참으로 많은 이들의 손길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이 생물학적으로도 참되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된 세대입니다. 삶의 전체 과정을 존중하고 기리는 가운데, 깊은 치유와 이해가 일어납니다. 오늘날 수많은 이들이 족보 탐구와 개인의 유전적 조상(출신 국가, 민족, 혈통)을 분석해주는 DNA키트와 같은 것들에 흥미를 가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인들의 통공"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가 하느님의 위대한 전체 안에 속한 존재임을 깊이 자각하며 동시에, 그 전체의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겸손함도 함께 품는 삶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저는 이러한 깨달음이 우리를 불필요한 개인적 죄책감에서 자유롭게 하며, 더 나아가 "하느님의 승리의 행진 안에서 시간과 역사를 관통하는 은총의 동반자"(2코린토 2,14 참조)가 되게 하기 위해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이 거룩한 여정에 함께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위대한 은총의 계획 안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주 작은 존재이지만, 아주 큰 신비의 일부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바버라 홈스 박사님(Dr. Barbara Holmes)의 ‘조상을 삶에 통합하는 묵상’(the meditation)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 역시 제 조상들과 깊은 연결감을 느낍니다. 제 여동생은 저보다 15살이나 어린데, 그는 우리 가족이 큰 혼란을 겪던 시기에 태어났습니다. 그 시기는 아버지의 병환과 죽음을 포함한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그때 우리 아이들을 돌봐주신 분은 루(Lou) 이모님이셨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보살피며 곁을 지키셨습니다.
제 막내 여동생은 이모님을 기리는 뜻으로 ‘루이즈(Louise)’라는 이름을 가운데 이름으로 가지게 되었고, 그녀의 딸 역시 같은 이름을 이어받았습니다. 이제 제 조카가 여자아이를 임신했는데, 그 아이에게도 ‘루이즈’를 가운데 이름으로 지으려 합니다. 이것은 우리 가족이 어두운 시기를 지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빛을 비춰주신 루 이모님께 드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존경의 표입니다.
—Ed H.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Yes, And … Daily Meditations (Franciscan Media, 2019), 162–163.
Image Credit: Ravi Sharma, untitled (detail), 2021, photo, Indi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인류를 하나의 끊임없는 숨결로 인식하는 지혜가 있습니다—세상과 세상 사이의 장막은 얇고 살아 있으며, 우리 조상들의 기억은 우리의 세포 하나하나를 통해 흐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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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1. 모든 성인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완전한 복됨은 마음의 겸손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주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는 말씀으로, 야망이라는 영예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본보기로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떨리는 미음으로 받아들이는 겸손한 사람들을 선택하시리라는 것을 예언자들을 통해 알릴 때(이사 66,2 참조), 완전한 복됨은 마음의 겸손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을 받은 사람을 하늘 나라가 자신의 것임을 아는 사람으로 표현하십니다. … 단 한 사람에게만 속한 것은 없습니다. 다들 한 부모에게서 같은 것을 선물로 받아 함께 소유합니다. 생명으로 들어오는데 필요한 것들을 먼저 받은다음, 그것들을 사용하는 수단을 받았습니다.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4 우리는 또 다른 그리스도들이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께 젖을 먹인 가슴은 복됩니다!(루카 11,27).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둘째 주제를 살펴봅시다. “진실히 진실히 말하거니와,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뿐이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많은 열매”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열매를 의미합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졌다고 하는데, 여기서 밀알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리고 밀알이 떨어진 땅은 무슨 뜻일까요? 나는 즐겨 밀알을 영으로 해석합니다. 흔히 영은 사람의 영혼이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밀알이 떨어진 땅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입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열매를 풍성히 맺기 위해 지어지거나 준비된 땅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만큼 고귀한 땅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땅은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 몸소 준비하신 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라는 이 고귀한 땅의 열매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영혼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성령의 능력을 통해 고귀한 본성과 몸이 마리아의 자궁 속에서 육신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영혼이 한순간에 영원한 말씀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합일은 순식간에 이루어졌습니다. 실로 몸과 영혼이 합일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리스도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같은 순간에 그분은 자신을 참 하느넘과 참사람으로, 곧 하느님이신 하나의 그리스도로 이해했습니다.(496)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종교다원론과 해석학적 이론들
농부는 접촉을 통해서 더 좋은 과일을 생산한다
유동식의 ‘접목 모델' 의 종교 신학적 해석학의 특징은 과수원에서 농부가 좋은 과일을 얻기 위해 사과나무의 대목(臺木)에다가 새로운 품종을 접목시키는 ‘접순’接筍) 사이의 상호 관계성을 아날로지로 삼는다.
분명히 농부는 더 나은 유전 인가를 지닌 접순을 대목에 접목시키지만, 접순 자체가 새로운 과실을 저절로 맺게 하지는 못한다. 좋은 유전자를 꽃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데는 기존의 대목이 절대적 역할을 수행해 주어야 한다. 유동식은 기독교 역사를 예로 들어 ‘접목 모델' 의 해석학적 논리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서에 기록된 복음이 유대 문화의 눈을 통해 포착된 하느님의 말씀이라면, 서구 신학은 그리스 라틴 문화의 눈을 통해 포착된 복음 이해일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초월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구원의 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성육신'(Incarnation)의 길을 밟지 않으면 안 된다. 육신이란 문화적 역사적 제약 밑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은 일단 영원의 빛에 비추어서 보편적인 진리로 해석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실존적인 산 진리로 포착되기 위해서는 각자의 주체적인 눈이 필요하다. 주체적인 눈이란 구체적인 문화와 역사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눈이란 곧 그 민족의 영성을 뜻한다.(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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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8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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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1. 모든 성인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내 편’, ‘네 편’이라는 말을 씁니다. 여기서 ‘편(便)’은 사람 인(人)에 고칠 경(更)이 더해진 글자로 ‘편하다’라는 뜻을 지닌 글자입니다. 특히 경(更)은 ‘두 개의 받침을 포개어 힘을 보태 굳건하게 만든다’라는 뜻에서 고치다, 개선하다, 다시 등의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렇듯 ‘내 편’이라는 말 속에는 ‘나를 받쳐주는 힘’이라는 뜻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내 편은 나의 아군이자 열렬한 지지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편’이 누구인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나의 배우자가 될 수도 있고, 부모나 자녀 그리고 친구 등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편인 줄 알았는데, 남의 편 같아 보일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배신감과 함께 분노까지 일어납니다. 그래서 남편이 ‘남의 편’이라는 이상한 해석도 하는 것 같습니다(원래는 편안한 남자, 그래서 동반자가 됩니다).
이렇게 따지고 보니, 진정한 내 편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이를 성경의 저자들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느님은 내 편이시다’라는 말이 참 많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주님을 내 편으로 모신 사람들, 그리고 내 편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희망을 품고 지금을 기쁘게 살아갑니다. 진정한 내 편은 주님뿐입니다.
오늘은 하늘 나라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대축일로,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모든 성인이 하느님 나라에서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왜일까요? 바로 하느님을 내 편으로 굳게 믿었고, 내 편이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철저하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하느님을 직접 뵈면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시는 성인들처럼, 우리 역시 그런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참 행복 선언을 하십니다. 그 행복은 세상의 기준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기준이었고, 하느님 편이 아니라면 선택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모두가 세상을 내 편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을 내 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향해 “행복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오늘, 성인들처럼 우리 역시 하느님을 내 편으로 모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분만이 진정한 내 편입니다.
오늘의 명언: 어떤 가치 있는 행동을 하지 아니한 날, 그날은 잃은 날이다(자콥 보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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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1. 모든 성인 대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하느님께 속해 있다면... 우리는 모두 이미 하느님의 성인들입니다!
"우리가 우리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장을 찍을 때까지 땅도 나무도 바다도 해치지 마라!"(묵시 7,3).
만일 우리가 오늘 이 세상을 떠난다면 하늘 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천상 예루살렘에서 이미 하느님의 품에 안겨 영복을 누리고 있는 성인들과 가족, 친구들과 다시 만날 희망을 품고 있나요?
아니면 영원한 단절과 고통, 우리 생명과 우리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과의 분리 속에 머무는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한 번 상상해 봅시다.
우리가 천국 문 앞에 서 있는데, 거기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왜 내가 그대를 내 나라에 들여보내야 하느냐? 그대는 나의 자녀로 합당한 사람이냐?"
어쩌면 이러한 질문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났을 때 예수님으로부터 들을 질문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부터 계속해서 듣고 있는 질문일지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지금은 예수님의 소리를 뚜렷하게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자주 그냥 지나쳐 버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 질문에 우리는 어떤 답을 드리면 좋겠습니까?
이런 대답이면 참 좋지 않을까요?!
"주님, 저는 제 공로가 아니라, 당신의 은총과 자비로 이 하늘 나라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당신이 은총으로 허락해 주신 세례성사로 당신의 자녀가 되었고, 비록 길을 잃고 헤매기도 했고, 또 당신 사랑을 저버리고 어둠속에 머무른 적도 자주 있었지만, 당신 사랑에 대한 믿음의 삶을 통해 당신을 따르려 애썼습니다. 저는 당신의 것이며, 당신의 사랑 안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예, 우리는 본질적으로 하느님께 속해 있는 이들입니다. 본래는 세례의 유무와 상관없이도 말입니다. 세례성사는 우리가 우리의 잘못으로 잃었던 이런 소속감을 다시 회복하는 길일 뿐입니다....
그러니 세례성사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이런 정체성을 늘 상기하고자 하는 삶을 살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소유이며 그 관계성의 나라에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늘 상기하는 것은 그렇게도 중요한 것입니다.
....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앉으셨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단순한 동작의 묘사가 아닙니다. 유다교 전통에서 랍비들은 제자들과 토론할 때는 다양한 자세를 취했지만, 공식적으로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칠 때는 반드시 앉아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마태오 복음 저자가 예수님께서 앉으셨다고 전하는 것은, 이제 전해질 말씀이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복음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리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진복팔단은 산상설교의 핵심이며, 산상설교는 복음 전체의 심장과도 같은 것입니다.
"복되어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이 구절이 우리 새번역 성경에서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행복하다(happy)"와 "복되다(blessed)"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복됨(beatitudo)은 단순한 감정 상태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서 누리는 은총의 상태입니다.
복된 사람은 자신이 복되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할 수도 있고, 감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한 젊은 부부가 자기들이 낳은 갓난아기를 안고 싶어 서로 줄다리기를 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복됨이 인식과 무관하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아기는 잠들어 아무것도 모르지만, 부모는 아기의 그 존재 자체를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누군가 "당신은 건강이라는 축복을 받았어요."라고 말해도, 우리는 우리 삶이 그저 평범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병들었을 때 비로소 건강이 얼마나 큰 은총이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틱낫한 스님은 치통이 생겨 아플 때 비로소 치통이 없던 상태가 얼마나 좋은지 알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행복(happiness)은 감정의 일시적인 상태입니다. 영어 단어 'happiness'(행복)는 'happen'(우연히 일어나다), 'perhaps'(어쩌면)와 어원이 같으며, 이는 우연성과 들쭉날쭉함을 내포하는 단어입니다. 감정은 날씨처럼 변덕스럽고, 그 위에 삶을 세우기에는 너무 불안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너희는 복되다." 하고 선포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이들은 자신이 그것을 느끼든 느끼지 않든, 인식하든 못하든, 이미 복된 존재입니다. 이 복됨은 감정이나 생각의 변화무쌍한 세계를 넘어서는 은총의 실재입니다.
중세의 신학자들은 이를 'beatitudo', 즉 "복된 상태"라 일컬었습니다. 이는 종종 "행복한 상태"로도 번역되지만, beatitudo는 주관적인 기분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삶이 바르게 정렬된 객관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삶의 여러 단계를 지나며, 때로는 약해지고, 아무런 자원도 없는 상태에 이를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아버지이자 어머니처럼 우리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의 삶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본성을 조금이나마 닮아 살아갈 때, 그 복됨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진복팔단은 단순한 윤리적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살아내신 하느님의 본성을 가장 아름답게 그려낸 영적 초상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진복의 상태로 우리 모두를 초대하시며, 그분의 본성을 우리 안에도 새기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 본성이 바로 오늘 묵시록 독서에서 선언하는 하느님의 인장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가 이미 이런 복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의 온 존재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 삶은 이미 은총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화(聖化)의 여정이 될 수 있고, 지금 여기에서부터 우리는 주님께 우리의 연약함과 죄성을 인정하면서도 본질적으로 사랑의 하느님께 속해 있는 존재임을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속해 있다면.... 우리는 모두 이미 하느님의 성인들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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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1. 모든 성인 대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X X X X X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116401&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서하”를 찿아 들어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위에 X X X X X 로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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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1. 모든 성인 대축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 제자들이 다가옵니다.
그런 그들을 예수님께서는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마태오복음 5장에서 7장에 이르는 긴 가르침은
행복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행복하여라' 이 표현은
단순한 선언이 아닐 것입니다.
즉 특정한 어떤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은
'마음의 가난함', '슬픔', '온유함' 등으로 표현됩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문자로 표현되지 않은 모습도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주위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가옵니다.
그들에게 행복을 말씀하신다는 것은
그들이 행복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누구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당신의 말씀을 듣고 있는 그들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고
슬퍼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즉 마음이 가난하기에 예수님께 다가왔고
슬픔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 다가온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다가오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오복음의 긴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산으로 오르신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성경에서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곳으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려온 메시아로서
세상을 구원하실 하느님으로서
당신의 제자들을 마주하십니다.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은
하느님께 다가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부족함,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가난함, 우리의 슬픔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니다.
그러한 우리의 부족함, 우리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이
고통이지만
그 고통은 이제 하느님 안에서 행복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행복하다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의 어려움을 하느님께서도 아시고
당신께서 몸소 함께하시면서
우리에게 행복이 되어주십니다.
각자의 모습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모습을 부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실 하느님과 함께
기쁨을 살아가기를 희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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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1. 모든 성인 대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5,1-12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11월 위령성월을 시작하는 첫날인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그분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모든 성인들, 특히 전례력에 축일이 따로 정해져있지 않아 그 삶과 신앙이 제대로 기념되지 않는 성인들을 기억하며 그분들이 보여주신 거룩한 삶을 본받겠다고 다짐하는 날입니다. 그래야만 나도 언젠가 그분들처럼 하느님 나라에서 참된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오늘 봉독되는 마태오 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까지 변치 않고 영원히 이어질 참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다시 말해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서는 역설(逆說)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가진 재물이 많아야, 좋은 일 기쁜 일만 가득해야, 남들 위에 군림하며 명예와 권력을 누려야 행복하다고 이야기하지요. 그러나 그런 조건들은 ‘유통기한’이 짧을 뿐만 아니라 작은 파도 한 번에 ‘모래성’처럼 산산히 부서질 정도로 약한 것들입니다. 또한 그것들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누려봐야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무리하고 하느님 앞으로 나아갈 땐 다 두고가야 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조건들에 휘둘리지 말고, 나에게 참된 행복을 영원토록 보장해주실 수 있는 분께 희망을 두라고 하십니다. 가진 게 없어도, 슬프고 괴로운 일들이 생겨도, 남들이 나를 우습게 여기며 바보라고 손가락질 해도,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한 채 그분 뜻을 따르며 살아가면 하느님께서 그런 나에게 큰 보상을 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상들 대부분이 언젠가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가 온전히 실현되어야 주어질 ‘미래형’인 것에 비해, 딱 하나의 보상만큼은 현재형으로 이미 ‘내 것’이라고 분명하게 선포됩니다. 그 보상은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내가 하느님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그분 뜻을 충실히 따르면, 그 즉시 나는 하느님의 백성이자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기쁨과 행복을 미리 맛볼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이 ‘맛보기’가 우리 신앙생활에서 참으로 중요하지요. 어떤 음식이 얼마나 맛있는지 그 참맛을 알면, 그것을 먹기 위해 줄 서서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게만 느껴지지 않듯이, 그것을 먹기 위해 큰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억울하게 생각되지 않듯이, 내가 하느님과 함께 누리는 완전한 기쁨과 행복의 참맛을 알고나면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해야 할 노력, 희생, 봉헌이 하나도 억울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그 나라에 점점 더 가까워지는 과정으로 여겨져 지금부터 설레고 기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런 기쁨과 설렘으로 지금 여기에서 천상의 것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고 애쓰고, 그분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면 어쩌나 두려워하며,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고민하는 그 모든 순간이 우리가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서 살기에 합당한 사람, 즉 ‘성인’으로 변화됩니다. 더 욕심낼 수 있어도, 더 휘두를 수 있어도, 더 큰소리 칠 수 있어도 하느님 뜻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절제하고 자신을 낮추며 묵묵히 신앙의 길을 걷다보면 언젠가 하느님으로부터 ‘너희가 받을 상이 크다’는 기쁜 소식을 듣는 날이 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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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1. 모든 성인 대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big-llight]
■ 성인들은 지상에서 신앙의 증인의 삶을 산 이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들! 땅을 차지할 것이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흡족해질 것이다.
자비로운 사람들!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하느님을 만나 볼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하느님 자녀라 불릴 것이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누가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에게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그 유명한 산에서 가르치신 진복팔단(眞福八端)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부족함을 느끼는 데 진정한 행복이 있단다.
우리는 넉넉하여야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행복의 첫째로 가난을 꼽으셨다.
가난한 이의 대칭이 부자이다.
재물이 넘쳐야 부자라는 소리를 듣는다나.
그렇다고 부자라고 다 행복해질까?
행복과 먼 듯이 사는 자칭 부자가 주위에 너무 많다.
마음의 가난은 소유 앞에서 절제하는 거다.
그런 행동을 할 때에 행복해진다고, 예수님은 가르치신다.
하늘에서 받을 상이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다섯 살 소녀가 억울하게 병으로 죽어 간다.
그 애가 살 수 있는 가장 유일한 길은 항체가 생긴 오빠의 피를 수혈하는 것뿐이다.
의사는 그를 불렀다.
“네 피를 수혈해야만 동생을 살린단다.
그러자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네, 그렇게 하겠어요.’라고 말했다.
수혈이 끝난 뒤, 그 소년은 물었다.
“선생님. 제가 언제쯤 죽게 되나요?”
사실 그는 수혈은 죽는 줄 알았다나.
죽고 사는 건 본시 지상의 인간 것이 아니라 했다.
물론 쉬운 행복도 하늘이 내려 주어야만 그렇게 될 게다.
그러기에 아무에게나 그게 주어지는 건 아니란다.
오직 자격을 갖추었을 때에야.
그래서 그걸 갖춘 이라면 어느 틈에 곁에 와 있는 행복을 느낄게다.
하느님 때문에 베풀고 희생하고 포기하면 결국 행복으로 인도됨을 뜻하리라.
11월 1일 오늘은 모든 성인의 대축일로
전례력에 별도 축일로 지정되지 않은 성인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날이다.
인생은 무한히 짧고 하느님 나라의 기쁨은 영원하니,
눈을 들어 하늘 바라보기를 정녕 잊지 않아야 하겠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이 순례의 길에서 헤매거나 낙오하지 않도록,
천상 교회의 모든 성인이 항상 기도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게다.
그렇다.
참 행복도 세상이 추구하는 부와 권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박해 받을 때도 있지만, 오히려 하느님을 만나 위로받는 이들에 존재한다.
하느님 생명에 참여하고, 나의 삶과 생명을 이웃과 나누는 것이리라.
교회는 오늘을 통해 믿는 이들에게
죽음 후의 새로운 삶을 바라보며 살아가도록 늘 깨우쳐 준다.
지상에서 하느님 때문에 모욕을 받는 이들은 정말 ‘행복’할 게다!
어쩌면 지상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
누가 뭐래도 성인들이라 불리면서도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이처럼 참 행복을 여전히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기에 오늘 ‘모든 성인 대축일’을 이렇게 지내면서
성인들처럼 하느님과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이미 성인 반열에 드신 모든 성인에게 다시 한 번 도움을 더 간청하자.
마음의 가난은 지식이 아닌 행동이다.
소유에 대한 시각을 과감히 바꾸자.
정녕 행복은 물질 소유가 아닌 하느님의 힘을 소유하는 데 있으리라.
그러니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하늘에서 받을 그 상은 정말 너무 너무 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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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1. 모든 성인 대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원석님 공유
김건태 신부님_구름 같은 증인들에 둘러싸인 교회
[말씀]
■ 제1독서(묵시 7,2-4.9-14)
초대교회 신자들은 로마제국에 의한 잔혹한 박해로 말미암아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기다려온 ‘주님의 날’, 승리를 소리 높여야 할 그날은 정녕 다가오지 않을 것인가? 사도이며 복음저자인 요한은 묵시록을 통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주님의 날’은 이미 와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날을 온전히 체감하지 못하는 것은, 신앙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그 이상을 보는 사람들에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련 속에서도 꿋꿋이 예수님을 따를 때 영원한 승리가 보장될 것입니다.
■ 제2독서(1요한 3,1-3)
하느님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분의 사랑을 확신하고 그 사랑에 우리 마음의 눈을 열 때 우리의 모습은 바뀔 것입니다. 곧 새로운 삶이 펼쳐질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며, 이는 언젠가 분명히 드러날 현실이다. 주님의 승리는 이처럼 그분이 택하신 자녀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완성될 것입니다.
■ 복음(마태 5,1-12ㄱ)
단순한 사람들로 구성된 청중을 향하여 예수님은 ‘복음’ 곧 기쁜 소식을 설파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이미 여기서 그 기쁨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이들에게 활짝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새김]
좌절과 체념의 시간 속에서 몸부림칠 때, 또는 시련으로 말미암은 고독이 온몸을 짓누를 때, 우리는 힘과 용기를 찾기 위해서 내게 너무나 소중한 사람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 사람이 사라져 이 세상에 없을 때도, 그에 대한 추억은 변함없이 그 기능을 발휘합니다. 소중한 그의 현존은 죽음을 넘어서도 여전히 자리하며,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밝혀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자인 우리는 우리를 앞서 하느님의 길을 걸어가셨던 분들을 너무나 자주 잊습니다. 그들에 대한 기억, 우리를 그들과 맺어주는 사랑의 고리는 우리가 어떤 상황에 부닥치든 힘과 기쁨의 샘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알려져 있거나 아니면 잊혀 있는 이분들을 기억하면서, 모든 세대를 넘어서 이어져 온 무한한 사랑의 고리를 다시 의식하도록 초대받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 나가며,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는”(히브 12,1-2) 용기를 얻고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신앙의 증인들이신 성인들을 기억하고, 그분들의 삶을 본받아, 언젠가는 그분들과 함께 영원한 천상 공동체의 일원이 되겠다는 다짐과 희망으로, 오늘 하루를 거룩하게 다져나가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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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395
11월1일 [모든 성인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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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오늘은 우리 모두의 영명축일입니다.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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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원 강선곤 임마누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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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도 노력하면 천상 영광에 깊이 참여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한 수녀회 본부에서 수많은 수녀님들과 함께 잘 준비된 부활 성야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잘 아시는 바처럼 정식 부활 성야 미사, 엄청 장엄하고 길지 않습니까?
가치와 의미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고역이 따로 없습니다. 어디 가는지 잘 모르고 부인 따라 오셔서 부활 성야 미사에 참석한 한 어르신의 표정을 보니 세상 고통스러운 얼굴이었습니다.
빛의 예절, 독서 7개에 따른 각각의 화답성가, 거기다 또 다시 제1독서와 응송과 복음 낭독, 강론, 성수 예절...주례 사제석에 앉아서 말씀에 몰입하며 드는 생각 하나! ‘천국의 분위기가 바로 이런 분위기겠구나!’
우리 모두 그리도 그리워하는 하느님 나라의 풍경, 엄청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100퍼센트 정확하게 묘사할 수는 없지만, 성경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영광스러운 사도들의 대열과 놀라운 예언자들의 무리와, 눈부시게 무리진 순교자들의 군대가 한 목소리로 주님을 흠숭하며 경배하는 곳. 동시에 성모님과 성 요셉을 비롯한 모든 성인성녀들이 한마음으로 소리 맞추어,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찬양하는 곳.
하느님 나라라고 해서 뭔가 대단한 것을 기대한 사람들에게는 조금은 실망스러울수도 있겠습니다. 뭔가 기상천외한 것들, 뭔가 특별한 것들, 뭔가 판타스틱한 것들을 기대했었는데, 사도들과 예언자들, 성인성녀들이 함께 모여 주님의 영광과 자비를 흠숭하고 찬양하는 기도 모임 같은 분위기라서 말입니다.
그래서 사실 이 지상에서부터 천상적인 것들, 영적인 것들, 상급 가치들에 맛을 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도, 별 감흥도 없고, 기쁨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이지 놀랍고 근사하지 않습니까? 한없이 나약한 인간 존재이지만,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천상 영광에 깊이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이 말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한 평생을 하느님 마음에 꼭 드는 충만한 삶을 살아, 하늘의 빛나는 별이 되신 성인(聖人)들이 바로 그런 분들이십니다.
은혜롭게도 하느님께서는 거듭되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환한 얼굴로 달릴 길을 열심히 달린 사람들, 영혼이 티없이 맑고 깨끗한 사람들, 진리와 정의를 위해 몸바치는 사람들에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친히 씌워주시고, 당신 가까이에 앉게 하십니다.
더 놀라운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영광스런 성인들이 대열에 참여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성인의 길로 들어가는 문을 활짝 열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 앞에서도 눈부신 미소를 잃지 않고 있다면, 성인의 길에 아주 가까이 다가서고 계십니다. 나와 전혀 다른 그를 기꺼이 견뎌내며, 그의 영혼과 성장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면, 성인의 길에 들어서고 계십니다. 나도 힘겹지만 나보다 더 힘겨운 이웃들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마음을 쓸 때, 성인의 길에서 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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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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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도 '간절히' 원해야만 방법이 보입니다>
오늘은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가 그 이름을 알든 모르든, 이미 하느님 나라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고 있는 모든 성인을 기억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인이 되는 길', 곧 '참행복으로 가는 길'을 선포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이 말씀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놀라운 약속입니다. '마음이 가난해지면', 그 즉시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 된다는 보상의 약속입니다. 행복해지려면, 마음이 가난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믿으려면, 우리 마음속에 아주 근본적인 갈망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오늘 강론의 핵심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정말로 행복해지고 싶다" 는 '간절한' 열망입니다. 오늘 강론의 제목처럼, 우리는 '행복하려는 만큼'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저의 첫 기억은 할머니의 돌아가신 모습입니다. 어린 저에게 '죽음'은 엄청난 공포였습니다. 저는 그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불행하게 살기는 싫었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제 인생의 목표는 단 하나, '최대한 행복하게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후회 없이 살고 나면, 밤에 잠자리에 드는 것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꿀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잠은 '죽음의 상징'입니다. '오늘'의 행복이 '매일의 죽음'(잠)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게 한 것입니다.
덕분에 저는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지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행복'을 향한 갈망이, 저를 이 사제의 길로 이끌었고 지금의 제가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앞으로도 계속 더 행복해지기 위해 나아갈 것입니다.
이 행복을 향한 갈망이 있다면, 우리는 오늘 복음의 말씀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아, 내가 더 행복해지려면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하는구나. 온유해져야구나. 자비로워지고 평화를 이루어야 하는구나.' 물론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박해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 모든 것이 '참행복'에 이르는 길임을 믿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저처럼 '간절히' 행복을 원할까요?
"행복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묻는다면, 아무도 없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의 그 갈망이 '간절'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행복을 막연하게 원할 때, 우리는 두 가지 문제에 빠집니다. 하지만 왜 우리는 성인이 되지 못할까요?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우리는 '지금의 적당한 행복'에 만족해버립니다. 둘째, 우리는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끊임없이 '남 탓'으로 돌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참행복'을 향해 단 한 걸음도 '발전'하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합니다.
더 무서운 것은, 자신이 정한 '거짓 행복'을 향해 달려가면서, '오늘' 자신이 점점 더 불행해지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골룸'을 보십시오. 그의 '행복'은 '절대 반지', 즉 "My Precious"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유일한 '미래 목표'입니다. 그러나 그 목표를 추구하는 '오늘', 그의 삶은
어떻습니까? 그는 햇빛도 없는 동굴에서 생선을 날로 뜯어 먹고, '스미골'이라는 호빗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흉측한 괴물로 퇴보합니다. 그의 '오늘의 행복 게이지'는 편집증, 불신, 증오, 고독으로 매일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영화 ‘시민 케인’의 주인공 '찰스 포스터 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미래 목표'는 '세상을 통제하는 것', '모든 사람의 사랑을 돈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목표를 위해 '오늘'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제너두'라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아무도 없는 거대한 궁전에 스스로를 유폐시킵니다. 그의 '오늘의 감정 게이지'는 '극도의 고독'과 '분노'를 가리켰지만, 그는 자신의 불행을 "주변 사람들이 나를 실망시킨 탓"으로 돌렸습니다.
신화 속 '미다스 왕'은 '미래의 부'(황금)에 눈이 멀어, '오늘의 행복'(음식의 맛, 딸의 온기)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자신의 불행을 깨달았습니다.
골룸이나 케인, 미다스 같은 이들이 왜 '오늘' 자신이 점점 더 불행해지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을까요? 자신들이 믿었던 '행복의 목표'(미래의 반지, 미래의 통제, 미래의 황금)를 너무나 철저히 맹신한 나머지, 자신의 '오늘의 감정 게이지'가 '절망'과 '고독'을 가리키고 있어도 애써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는 불행하다"고 인정하는 대신 "저놈 탓이야"라고 남을 탓하며 자신의 불행을 외면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미래의 자녀 성공', '미래의 은퇴 자금'이라는 목표를 좇느라, '오늘' 내 영혼의 행복 게이지가 '불안'과 '공허'를 가리키고 있는데도 애써 무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묻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참행복'을 간절히 원하게 됩니까?" 막연하게 "행복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골룸처럼 '미래의 쾌락'을 좇습니다. 그러나 '참행복'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오늘의 행복'에 집중합니다.
이 '막연한 원함'이 '간절한 갈망'으로 바뀌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바로 '죽음'이나 '절망'을 정면으로 마주하여, 내가 좇던 '미래의 행복'이 신기루였음을 깨닫는 '바닥 체험'(Rock Bottom)의 순간입니다. 제가 어릴 적 할머니의 죽음 앞에서 '꿀잠'이라는 '오늘의 행복'을 간절히 원하게 되었듯이 말입니다.
이 '바닥 체험'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사람이 바로 '시민 케인'처럼 모든 것을 가졌던 사람, 레프 톨스토이입니다. 그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로 세계 최고 작가의 '명예'를 얻었고, 광대한 영지를 소유한 '부자'였으며, 건강한 '가족'도 있었습니다. 그는 골룸이나 케인이 좇던 '미래의 목표'를 모두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50세가 되었을 때, 그의 '오늘의 행복 게이지'는 '절망'과 '공포'로 바닥을 쳤습니다. 그는 ‘고백록’(A Confession)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내가 왜 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 나는 건강하고 행복한 가장이었지만, 내 삶이 멈추었고 숨을 쉴 수 없음을 느꼈다. ... 나는 밧줄이 걸린 방에 들어가지 않으려 했고, 총을 가지고 사냥에 나가지 않으려 했다.
자살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케인처럼 '남 탓'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오늘의 절망'을 정면으로 마주했습니다. 그리고 이 절망의 원인이, 제가 그랬던 것처럼, '죽음' 앞에서 모든 '미래의 목표'(명예, 부)가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이 '오늘의 행복 점검'이 왜 우리를 성인으로 이끄는지 보여주는 가장 구체적이고 강력한 현대의 예가 있습니다. 바로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AA) 모임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미래의 완벽한 금주'가 아닙니다. 그런 '미래 목표'는 너무나 거대해서 오히려 '오늘'을 절망하게 만듭니다. 그들의 유일한 목표는 "오늘 하루(One day at a time) 술을 마시지 않고 평온하게 잠자리에 드는 것" 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오늘의 행복'입니다.
그들은 '오늘 마음이 불편한가?', '오늘 누군가를 미워했는가?', '오늘 정직하지 못했는가?'를 묻습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분노, 원망, 거짓말, 죄책감을 해결하지 않으면, '오늘 밤'의 행복(평온)이 깨지고 다시 술을 찾게 됨을 뼈저린 '체험'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 밤 꿀잠'을 자기 위해, 필사적으로 '오늘' 용서를 청하고('자비로운 사람들'), '오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오늘' 정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며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노력합니다.
'미래의 성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 밤'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오늘의 행복'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의 '참행복 선언'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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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공평(公平)과 형평(衡平)’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평은 능력과 성과에 따라서 보수를 지급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공평이라는 원칙에서 성장하였습니다. 능력과 성과를 인정하기에 사람들은 더 노력하고, 공부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될 것이고, 적게 가진 자는 그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신앙의 차원에서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좋은 밭에 떨어지면 30배, 60배, 100배 열매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갈밭, 가시덤불, 길가에 떨어지면 싹은 나지만 말라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성경 공부에 함께 하고, 주일미사는 물론 평일미사도 참례하고, 본당에서 마련한 피정이나 교육에 참석하는 신앙인은 영적인 기쁨이 커지기 마련입니다. 시련과 고난이 찾아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신앙의 뿌리가 깊고, 신앙의 샘이 마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가 이상과 꿈이 좋았지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공평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능력과 성과에 따른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열심히 일할 동기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형평은 최소한의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국가나 교회가 보호하는 것입니다. 비록 능력이 부족해도, 비록 성과가 없었어도 사람은 하느님을 닮았기에 그 인격과 인권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에게도, 악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주신다.” 신앙의 차원에서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일꾼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침부터 온 사람도, 오후에 온 사람도, 저녁에 온 사람도 똑같이 1데나리온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공평의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차원이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투표권은 모두 일인 일 표의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품위와 인격은 능력과 성과에 따라서 등급이 매겨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막 태어난 아기도, 장애를 지닌 사람도, 한 때의 실수로 감옥에 있는 사람도 모두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사회는 능력과 성과에 따라서 공평하게 보상이 이루어지는 사회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존재이기에 형평이 이루어지는 사회입니다. 공평이 없는 형평의 사회는 발전과 성장을 이루기 어렵습니다. 형평이 없는 공평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품위를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우리가 왜 그분들을 기억하는 것일까요? 그분들이 행복했기 때문일까요? 그분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때문일까요? 저는 그분들의 삶이 우리가 보기에 행복했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이 우리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행복한 삶을 살기 때문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은 주어진 길을 충실하게 걸어갔고, 감사하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를 채우는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행복은 제가 원하는 것을 채워서는 얻을 수 없었습니다. 행복은 주어진 시간을 충실하게 보내고, 감사하며 지낼 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행복은 마치 길과 같아서 내가 걸어가는 순간이 바로 행복이었습니다. 길은 가지 않으면 풀이 돋아나고, 없어지게 됩니다. 길은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오솔길이, 시골길이 되고, 차량이 다니는 길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신학교에 있을 때도, 보좌신부로 있을 때도, 본당신부가 되어서도, 교구청에 있을 때도, 외국에서 지낼 때도 그랬습니다. 제가 감사하면 감사드릴 일들이 생겼고, 제가 사랑하면 사랑받을 일들이 생겼습니다. 제가 이해하니, 남들도 저를 이해해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느 특정한 시간과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내가 감사하면, 지금 내가 사랑하면 바로 그곳이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행복도 그렇습니다. 원하는 것들이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이 행복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참된 행복을 이야기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이런 삶은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삶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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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위령 성월의 첫째 날이자 모든 성인 대축일인 오늘 제1독서에 구원받을 이의 숫자가 나옵니다. 성경 말씀 가운데 잘못 이해되고 악용되는 한 부분입니다. 이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의 인장”(묵시 7,2)을 받아 구원될 사람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7,4)이라는 것이지요. 시한부 종말론을 내세우는 유사 종교가 자주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구원받을 이가 소수이니 서둘러 자신들의 단체에 들어와 그 한정된 숫자 안에 들고, 또 거기에서 제외되지 않도록 노력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이지요.
그러나 이는 터무니없는 풀이입니다. ‘십사만 사천 명’은 인류 전체에서 구원받는 사람의 수가 아니라, 같은 구절에 나오듯 바로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지파”, 곧 열두 지파에서 만 이천 명씩 구원된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이 ‘만 이천’이라는 숫자도 산술적 의미가 아니라, 완전함을 뜻하는 열둘에 천(충만을 뜻하는 십의 세제곱)을 곱한 숫자로서 참으로 많은 이가 온전히 구원되리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더욱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이어지는 구절입니다. “그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7,9). 이들은 세상의 모든 민족과 언어권에서 나온 이들로서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에 힘입어 삶의 괴로움과 어려움을 이겨 낸 사람들이지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3항에서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는 많은 신앙의 증인이 우리의 힘을 북돋워 주고 있다고 하시며 더 나아가 “이러한 증인들 가운데에 우리 어머니, 할머니, 또는 그밖에 사랑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옆집의 성인들’이라는 표현으로 널리 알려진 말씀이지요. 성인은 멀리 있는 이들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인인 내가 나아가야 할 운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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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1-12: 참 행복(산상설교)
1. 모든 성인을 기리는 날, 우리도 성인이 되라는 초대
오늘은 하늘나라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대축일이다. 이는 이미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고 있는 교회의 승리자들을 찬미하는 날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부르심을 새롭게 확인하는 날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성인들을 주신 이유는 단지 그들을 기리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도 그들을 본받아 성인이 되라는 부르심을 주시기 위함이다.”(Sermo 88, PL 38, 540) 아무리 많은 성인을 공경하더라도 내가 성인의 삶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분들과는 아무런 친교가 없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2. 산 위에서 들려주신 주님의 행복 선언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께서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올라가 제자들에게 참된 행복을 가르치셨다고 전하고 있다. 산으로 오르셨다는 것은 단순한 장소적 이동이 아니라, 제자들을 더 높은 차원의 삶으로 이끌고자 하신 상징적 행위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분은 산 위에서 가르치셨다. 이는 율법이 시나이 산에서 주어졌던 것처럼, 새로운 율법 곧 은총의 복음을 산 위에서 선포하시기 위함이다.”(In Matthaeum Homiliae, PG 57, 58) 따라서 참 행복은 단순히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새 율법, 곧 성덕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는 선언이다.
3. 참 행복의 역설과 그 의미
예수님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불행처럼 보이는 상황을 오히려 참 행복이라 선언하신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세상에서 주목받거나 존경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이들이야말로 진정 행복한 사람들이다. 성 암브로시오는 “참 행복”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주님께서는 거짓 행복을 뒤엎으시고, 진정한 행복이란 세상의 부와 권세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 위에서 발견된다고 가르치신다.”(Expositio Evangelii secundum Lucam, V, 62)
4. 성인의 삶: 참 행복의 완성
모든 성인 대축일에 우리가 기리는 성인들은 바로 이 참 행복의 길을 살아낸 사람들이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실패자나 고통받는 이들이었지만, 그들의 삶은 하느님 안에서 영광으로 드러났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은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교회의 모든 성원은, 저마다의 삶의 처지에서 완덕으로 부름을 받아 있다. 모든 신자는 성덕을 지향해야 하며, 그 길에서 사랑이 완덕의 유대이다.”(교회 40) 즉, 성인이 된다는 것은 선택받은 일부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보편적 소명이다.
5. 오늘의 적용: 성인이 되려는 결단
오늘 대축일은 성인들을 공경하는 날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성인이 되기를 결심하는 날이다. 교부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우리를 깨우친다: “당신이 성인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성인들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들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이 그 길을 걷기를.”(Sermo 335, 1) 우리 각자가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참 행복의 길을 두려움 없이 살아가야 한다. 세상이 외면하는 가난, 온유, 자비, 박해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기 때문이다.
6. 결론
오늘 우리가 기리는 모든 성인은, 산상설교의 참 행복을 온전히 실천하며 하느님의 얼굴을 드러낸 이들이다. 그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완전하라”(마태 5,48)는 주님의 초대를 받아들인 사람들이며, 그 길 끝에 하늘나라의 영광에 들어갔다. 우리도 이 미사 안에서 결심하자. 단순히 성인들을 흠모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참 행복의 길을 살아내어 우리 자신이 성인으로 나아가도록, 그리고 언젠가 하늘에서 그들과 함께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자리에 참여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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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을 닮아 거룩한 사람이 되어요>
마태오 5,1-12ㄴ(참행복)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하느님을 닮아 거룩한 사람이 되어요>
하느님을 닮아
거룩한 사람이 되어요
오늘 하늘의 성인들의
어제 땅의 삶을 돌아보며
내일 우리가 성인이 되어요
거룩한 사람 되라 씨앗 뿌리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지금여기에서 싹을 띄워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하느님만은 곱게 품어 주실
거룩한 사람이 되어요
가난하신
하느님을 닮아
부유함에 비겁하게 숨지 말고
겉포장 벗겨낸 순결한 가난함으로
하늘나라의 사람이 되어요
슬퍼하시는
하느님을 닮아
세상 환락에 휩싸이지 않고
아프지만 깨끗한 슬픔 간직하여
위로 받는 사람이 되어요
온유하신
하느님을 닮아
힘으로 한줌 움켜쥐기 보다는
모든 이 품는 온유함으로
온 땅 차지하는 사람이 되어요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르신
하느님을 닮아
불의로 찰나를 즐기기보다
의로움을 향한 끝없는 목마름으로
언제나 흡족한 사람이 되어요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닮아
더 가지려는 추함을 벗고
나누고 나누어 비움으로써
자비를 입는 사람이 되어요
마음이 깨끗하신
하느님을 닮아
탐욕과 집착을 털어버리고
맑고 깨끗한 마음의 눈으로
하느님을 보는 사람이 되어요
평화를 이루시는
하느님을 닮아
혹독한 폭력에 당당히 맞서
목숨을 내놓는 평화를 이루며
평화이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요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으시는
하느님을 닮아
두려움 없이 주저함 없이
의로움을 이루려 죽어감으로써
영원한 하늘나라의 사람이 되어요
세상을 살리려 세상에 죽으신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닮아
거짓에 짓밟히더라도 진리를
불의에 찢겨지더라도 의로움을
죽임에 쓰러지더라도 살림을
영원히 사는 사람이 되어요
세상이 비웃고 업신여길지라도
하느님만은 따뜻하게 안아주실
거룩한 사람이 되어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뿌리신
거룩한 사람의 씨앗 정성껏
지금여기에서 싹을 띄워요
오늘 하늘의 성인들의
어제 땅의 삶을 돌아보며
내일 우리가 성인이 되어요
하느님을 닮아
거룩한 사람이 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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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희 망>
성경을 몰라도 묵시록에 나오는 ‘십사만 사천 명’은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는 또 다른 한 천사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인장을 가지고 해 돋는 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땅과 바다를 해칠 권한을 받은 네 천사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장을 찍을 때까지 땅도 바다도 나무도 해치지 마라.’ 나는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인장을 받은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지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묵시 7,2-4)
여기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도 ‘상징’이고, 십사만 사천 명도 ‘상징’입니다. (‘144,000’은 ‘12 곱하기 12 곱하기 1,000’으로 풀이되는데, 성경에서 ‘12’는 ‘완전함’을 상징하고, ‘1,000’은 ‘아주 많음, 충만함’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144,000’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완전한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것과 그 수가 많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일부 사이비 종파에서 실제 수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잘못된 해석입니다.)
묵시록에는 ‘십사만 사천 명’을 언급한 뒤에 다음 말이 나옵니다.
“그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그들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 또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묵시 7,9)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라는 말은, ‘십사만 사천 명’이 실제 수가 아니라 상징이라는 근거가 되고, 또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상징이라는 근거가 됩니다.
그런데 ‘구원받을 사람들’에 관해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묵시록의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 라는 말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은, “많은 사람이 못 들어간다.”, 또는 “적은 수의 사람만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라, “들어가기를 바라면서도 못 들어가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곳에 들어가는 사람의 수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이론적으로는, 자격만 갖추면 인류 전체가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격을 갖추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들어가는 사람의 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들어갈 수 있는가, 아닌가?”입니다.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루카 13,28) 밖으로 쫓겨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밖에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밖’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구원의 초대’에 응답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믿지 않고, 응답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것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즉 밖에 남아 있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라는 말씀은, 밖에 있는 자들의 후회와 절망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과 고집의 결과가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뒤늦은 후회와 절망에 빠질 것입니다.>
묵시록은 ‘안에 들어간 사람들’, 즉 구원받은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묵시 7,14)
이 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에 관한 말이기도 합니다. ‘큰 환난’은 종교박해를 가리키는 말인데, 넓은 뜻으로는 지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겪는 모든 어려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는 말은,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림 없이 신앙을 지켰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믿음’만을 강조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믿음을(마태 7,21)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누리는 행복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어좌 앞에 있고, 그분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고 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그들을 덮는 천막이 되어 주실 것이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해도 그 어떠한 열기도 그들에게 내리쬐지 않을 것이다.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묵시 7,15-17)
이 말은, 그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과 평화와 안식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그 행복과 안식은 지상에서의 인생의 고단함과는 완전히 반대쪽에 있습니다. “저희의 햇수는 칠십 년,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 그 가운데 자랑거리라 해도 고생과 고통이며, 어느새 지나쳐 버리니, 저희는 나는 듯 사라집니다."(시편 90,10)
이 말을 간단하게 줄이면, “인생은 허무한 여행일 뿐이다.”입니다. 오래 살았든지 짧게 살았든지 간에,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든지 그렇게 살지 못했든지 간에, 인생이란 결국에는 먼지처럼 사라지는(시편 90,3-6) 고달픈 방랑일 뿐입니다. 그 허무를 극복하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모든 성인 대축일’은 ‘희망의 대축일’입니다. 믿는 사람들의 인생의 끝은 허무가 아니라 ‘영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축일이기 때문입니다. 노력하면 누구든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과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인들은 이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그 행복과 안식을 누리고 있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 8,18)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로마 8,20)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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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성인은 탁월한 성덕과 영웅적인 신앙의 삶이 인정되어, 교회가 모든 그리스도인의 본보기로 삼고자 공적으로 선포한 이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신자는 성인들을 공경하며 그들의 삶을 본받으려 합니다. 성인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풍요로움을 드러냅니다.
단순해 보이는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며 여러 가지 색으로 펼쳐 드러나듯이, 성인들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삶에 투영시켜 다양하게 드러내고 특정한 요소를 돋보이게 하며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을 보여 줍니다.
다른 한편, 성인은 주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바라고 살다가 세상을 떠나,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있는 모든 이를 뜻하기도 합니다. 천국에서 하느님과 깊은 일치를 이루고 있는 모든 이는 교회가 공적으로 선언하지 않았을 뿐, 하느님께는 당신 거룩함에 참여하고 있는 ‘성인’들입니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에 이 넓은 의미의 성인을 기리고, 우리도 성인이 되도록 부름받았음을 기억하게 합니다.
주님께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의지는 우리를 모두 성인으로 이끄신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인이 되겠다는 다짐은 자신의 노력으로 높은 경지에 닿겠다는 야망의 표현도 아니고, 다른 죄인과 나를 구분하며, 자신을 우월하고 특별한 존재라고 여기는 교만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시작하셨으니, 그분께서 반드시 완성하시리라는 믿음이고, 그분 뜻에 순종하는 겸손이며, 그분 부르심에 대한 성실하고 자유로운 협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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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성인들은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있는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참행복 선언은 누가 그러한 성인이 될 수 있는지, 누가 이미 하느님과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있는 성인인지를 알려 줍니다.
하느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하며 철저히 하느님께 순종하는 사람, 진정으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 하느님의 뜻이 거부되는 상황을 슬퍼하는 사람, 예수님을 닮아 다른 이들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는 온유한 사람,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곧 아버지의 의로움이 드러나기를 갈망하는 사람, 하느님께 자비를 입은 것처럼 원수에게까지 자비를 베푸는 사람, 몸과 마음을 주님 법으로 깨끗이 하며, 하느님과 인간, 이웃과 이웃의 깨진 관계를 다시금 잇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로움, 특히 예수님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이 바로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될, 아니 이미 참된 행복을 누리고 있는 성인들입니다.
제1독서에서 봉독한 요한 묵시록은 하늘 나라를 차지하여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될 이들의 수가 144,000명이라고 말합니다.
144,000은 구약의 이스라엘(열두 부족)과 신약의 이스라엘(열두 사도)에, 구원 역사 안에 현존하시면서 구원을 성취하시는 그리스도의 기간인 1,000을 곱하여 나온 수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무수한 성도들을 상징하는 수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인이란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성인 말고도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모든 이를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2독서가 말하듯 하느님의 큰 사랑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하나하나가 성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을 두고 직접 ‘성도들’, 곧 ‘성인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지상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성도들, 성인들이라 불리면서도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참행복을 누리며 살지 못합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을 지내면서 성인들처럼 하느님과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이미 성인 반열에 드신 모든 성인에게 다시 한번 도움을 간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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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신앙의 목마름은 우리를 가끔 엉뚱한 곳으로 이끕니다. 특별한 미사, 특별한 성서 공부, 특별한 기도 모임, 특별한 신심, 특별한 치유는 인간적 부족함을 채워 줄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 “나는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라는 내용이 소개됩니다. 인장은 하느님 백성에 속함을 드러내며, 하느님께서 보호하시는 이들을(에제 9장 참조) 가리키기도 합니다. 십사만 사천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서 만 이천 명씩 뽑은 총합으로 하느님 백성의 충만함을 나타내는 상징적 숫자입니다.
제2독서에서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을 듣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의 상황과(요한 1,12; 3,5; 2코린 3,18 참조)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게 될 종말 때의 상황을(콜로 3,3-4 참조) 나누어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한편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여덟 가지 참행복을 선포하십니다. 하늘 나라를 소유함, 위로를 받음, 땅을 차지함, 흡족해짐, 자비를 입음, 하느님을 뵙게 됨, 그분의 자녀라 불림이 예수님께서 신앙인에게 약속하신 행복의 선물입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을 맞아 우리의 신앙을 성찰합니다. 가톨릭 신앙은 사회, 문화, 역사를 넘어 인류에게 선물로 주어진 보편적 신앙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나약함은 이 보편 신앙보다는 구체적이며 특별한 신심 행위를 찾게 합니다. 세례 때 받은 신앙의 선물을 각자의 자리에서 어떻게 가꾸며, 얼마나 성장시키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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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내 편’, ‘네 편’이라는 말을 씁니다. 여기서 ‘편(便)’은 사람 인(人)에 고칠 경(更)이 더해진 글자로 ‘편하다’라는 뜻을 지닌 글자입니다. 특히 경(更)은 ‘두 개의 받침을 포개어 힘을 보태 굳건하게 만든다’라는 뜻에서 고치다, 개선하다, 다시 등의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렇듯 ‘내 편’이라는 말 속에는 ‘나를 받쳐주는 힘’이라는 뜻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내 편은 나의 아군이자 열렬한 지지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편’이 누구인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나의 배우자가 될 수도 있고, 부모나 자녀 그리고 친구 등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편인 줄 알았는데, 남의 편 같아 보일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배신감과 함께 분노까지 일어납니다. 그래서 남편이 ‘남의 편’이라는 이상한 해석도 하는 것 같습니다.(원래는 편안한 남자, 그래서 동반자가 됩니다)
이렇게 따지고 보니, 진정한 내 편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이를 성경의 저자들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느님은 내 편이시다’라는 말이 참 많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주님을 내 편으로 모신 사람들, 그리고 내 편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희망을 품고 지금을 기쁘게 살아갑니다. 진정한 내 편은 주님뿐입니다.
오늘은 하늘 나라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대축일로,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모든 성인이 하느님 나라에서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왜일까요? 바로 하느님을 내 편으로 굳게 믿었고, 내 편이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철저하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하느님을 직접 뵈면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시는 성인들처럼, 우리 역시 그런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참 행복 선언을 하십니다. 그 행복은 세상의 기준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기준이었고, 하느님 편이 아니라면 선택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모두가 세상을 내 편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을 내 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향해 “행복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오늘, 성인들처럼 우리 역시 하느님을 내 편으로 모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분만이 진정한 내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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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하늘에서 받을 상>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성성’에로 나아가라는 강력한 호소를 듣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현대 세계에서 성덕의 소명에 관한 권고 문헌’인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에서 “모든 이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의 사명입니다.”(9항)라고 밝히셨습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바로 이 ‘성성’에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제1독서인 <요한묵시록>에서는 말합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 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묵시 7,14)
구원에 이르는 길은 쉽지만은 않습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부딪혀야 하는 수많은 시련들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참된 ‘성성’은 언제나 ‘순교’의 형태를 띠기 마련입니다. 인장을 받은 이들의 손에 들려있는 ‘야자나무’는 바로 이 ‘시련에 대한 승리’를 상징한다 할 수 있습니다.
제2독서인 <요한의 첫 번째 편지>에서는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 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여기서, ‘성성’은 ‘신적 자녀 관계’로 드러납니다. 곧 ‘성성’은 우리의 생명 안에 신적 현존이 더욱 명백히 드러나도록 하기 위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상호 추구행위의 결과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삶의 어떤 한 순간의 영웅적 행동에 의해 우연히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 항상 계속되어지는 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참된 행복'을 통해 ‘성성’이란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나약성’과 ‘그분을 극단적으로 필요로 함’ 외에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는 곳에서 실현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가난을 사는 일’입니다. 이미 그분을 차지한 까닭에 다른 어떤 것들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할 것입니다. 또 ‘슬퍼할 줄을 아는 일’입니다. 그것은 자신과 세상의 죄를 슬퍼하되, 자비 안에서 위로를 받고 기쁠 것입니다. 이미 깨어, 임을 바라보며 기도할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 ‘온유해지는 일’입니다. 그것은 진정 있어야 할 하느님 품에 이미 안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감미로움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은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일’입니다. 곧 그분 외에는 아무 것에도 목마르지 않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극단적으로 필요로 하는 일 외에는 결코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은 ‘자비를 베푸는 일’입니다. 이미 주님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손길에 매만져진 까닭입니다. 그리고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영에 끌려 다스림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고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진정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클 것입니다. 오늘 '모든 성인의 대축일'에 이토록 우리는 복된 삶에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의 성구를 새겨봅니다.
“성인이 되기 전에 성인으로 불리우기를 바라지 말고, 참으로 성인으로 불리어지도록 먼저 성인이 되라.”(수도규칙 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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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행복하여라.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주님!
가난을 살게 하소서.
당신을 이미 차지한 까닭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차지할 것이 없게 하소서.
슬퍼할 줄을 알게 하소서.
가엾이 여기는 당신의 마음에 제 가슴이 찔리게 하소서.
온유해지게 하소서.
당신의 품에 안겨 다독거려지게 하소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게 하소서.
참된 음료인 당신께 맛 들여지게 하소서.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당신의 마음을 선사받게 하소서.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에 매만져지게 하소서.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당신 손이 저를 이끌게 하소서.
의로움 때문에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제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 되게 하소서.
이 복된 삶이 제게는 참된 행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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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2)
<참행복을 위하여!>
오늘 복음(마태5,1-12ㄴ)은 '참행복 선언'입니다.
마태오 복음이 전하는 참행복 선언은 '아홉 가지'입니다. 곧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예수님 때문에 모욕 당하고 박해 당하는 사람들. 바로 이런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입니다. 몸과 마음이 예수님께로 향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에 앞서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계시는 분들입니다.
11월의 첫날인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죽음의 다리 저 너머에서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계시는 하늘 나라의 모든 성인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우리 모두의 영명축일'입니다.
천상 교회 안에 계시는 모든 성인들은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에 이미 다다르신 분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런 성인들의 삶을 기억하면서 본받고자 다짐합니다.
천상 교회 안에 머물러 계신 성인들의 수는 신천지 이단이 말하는 십사만 사천 명이 아니라,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요한묵시록 7,4.9 참조)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요한묵시록 7,14ㄴ)
우리도 성인들의 모범을 따라갑시다!
성인들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참행복을 얻기 위해 애쓰신 분들입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닮은 분들, 몸과 마음이 끝까지 예수님께로 향해 있었던 분들이십니다. 우리의 모범이신 모든 성인들을 따라갑시다!
"하늘의 모든 성인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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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2)
가을의 단풍이
땅으로 떨어져
생명의 거름이 되듯,
모든 성인들의 삶도
세상 속에
참된 사랑을 남겨
다음 세대의
신앙을 키웠습니다.
모든 성인들은
하느님의
위대한
작품입니다.
성인들의
삶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모든 성인들의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둡니다.
성인들은
자신의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우선시했습니다.
고통을 피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모든 성인들은
비범한 기적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살아냈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 안에
당신의 사랑을
새기신
살아 있는
복음서입니다.
그들은 비범한
능력을 가진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처럼
한계와 연약함을
지녔지만,
그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성인들의 삶은
철저히
공동체적 삶입니다.
그들은 자신만의
성화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교회와 세상을 위한
사랑의 봉헌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깊은 사랑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삶으로
복음을
써 내려간
복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사랑과
진리 안에서
하느님과
하나 되는
복음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모든 성인의 길은
우리 안에 깃든
사랑의 가능성을
깨우는
거룩한 초대입니다.
우리 또한
자신을 비우고,
세상의
찬란함이 아닌,
하느님의 빛으로
물든 이들이 됩시다.
저마다의 일상에서
뜨겁게 사랑의 삶을
하느님과 함께
사셨던
모든 성인들의
축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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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 복음의 행복 선언의 일부는 이렇습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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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야 하는데 저는 하느님 때문에 환난이나 모욕이나 박해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저도 한때 성인이 되고 싶은 적이 있지만 그것은 저의 완성을 위한 것이었고
그런 뜻에서 그것들을 견디고 참아낸 적은 있지만 하느님 때문에
또 하느님을 위해 그것들을 감수하고 감당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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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은 욕심으로 될 수 없는 것이고 되어서도 아니 되겠지요.
그러니 하느님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환난을 받아들이지 못할지라도
나이 먹어 피할 수 없는 고통이 닥칠 때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봉헌할 수 있기를 이 모든 성인의 날에 바라고 비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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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년 오늘 강론 말미입니다.
저는 고통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봉헌하기를 비는 나날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