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와 그늘
약 22여 년 전,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부터 한국교회 목회자 수급 문제에 대하여 걱정 어린 지적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20여년 전에 신학교를 다닌 분들의 공통점은 “부름받아 나선 이몸”이라는 찬송을 가슴으로 부르며 쓰임 받을 수 있음 자체로 만족했던 세대였다는 점 일것입니다.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이다 보니, 돌이켜 보면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붕괴되기 시작했던 초기였기에 목회자 과잉 공급의 폐혜를 빈번하게 경험한 세대였을 것입니다.
요즘이야 역으로 부 교역자분들을 청빙하기가 어렵기에 오히려 갑과 을의(?) 위치가 바뀌었다 하지만, 라때에는 억울한 일이 있어도 어느 누구에게도 토해 놓을 수 없었던 시기였던 점은 분명합니다.
90년대 중후반에만 해도 한국교회 분위기를 주도했던 그룹은 단연 기도원 운동이었습니다.
기도원과 교회에서 뜨거움을 체험했던 많은 분들이 신학교에 지원을 했기에 지명도가 있는 교단들의 경쟁력은 고시 수준만큼 된다는 우스개 소리가 회자될 정도였습니다.
그러한 세태이다 보니 부교역자의 인권이나 최소한의 품위 유지 같은 것은 사치스러운 사유였습니다.(예외인 교회도 많았겠지요.)
그나마 기성 교회에 부교역자로 선택되지 못한 분들은 맨땅에 헤딩하듯이 개척자의 길로 내몰렸습니다.
90년대에 개척했던 분들은 자리 잡기가 용이했지만 2천년 대에 마지못해 내 몰린 분들 가운데에는 지금까지 개척교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다.
몇해 전에 오지랖 사역을 통하여 알게 된 어느 사모님 가정이 바로 그러한 경우라 하겠습니다.
목회자 부부와 자녀들만으로 중형 도시에 임대 교회를 시작하여 십수년 동안 몸부림치며 사역자로 살아왔음에도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처럼 제자리만 맴돌 수 밖에 없는 현실에 깊은 좌절감과 절망에 빠진 경우입니다.
자녀들은 장성해 가는데 내일을 바라보기조차 힘에 겨운 이분에게 어느 분의 귀한 물질 섬김으로 일시적 혜택을 드리자 보내온 카톡입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희가 받아도 되는 건지 어쩌면 더 어려운 미자립교회 목회자 가정이 받아야 되는 귀한 섬김이 저희에게 잘못 전달된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너무 큰 금액이라 더더욱 조심스러운 것 같아요.
너무 감사드려요 통화로 말씀드렸는데 또 주저리주저리 말씀드려 죄송해요 목사님 지금껏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너무 감사하지만,
믿음이 없어서 그런지 때때로 벼랑 끝에 매달려 숨 쉬기도 어렵고 제 인생은 왜 이렇게 끝없이 고단하냐고 하나님께 투정도 많이 부리며 살아왔어요.
어젯밤 목사님께서 하나님께서 저희 가정에 관심이 있으신 것 같다며 전해 주신 말씀에 제 마음의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어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집사님의 귀한 섬김이 해같이 빛나길~~>
최근 지방 도시에서 개척교회 사모로 살면서도 주변의 어려운 약한 교회를 살뜰하게 챙기시는 분께서 양구쌀을 어느 교회로 보내주길 요청하셨습니다.
방문한 가정 쌀독이 비어감을 보셨다는 카톡에 너무 마음이 아파서 지인분들에게 염치불구하고 카톡을 보내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도심지에서 개척교회를 섬기면서 주변의 약한 교회들을 돌보시는 목회자 아내분이 있습니다.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동역자들 쌀독의 상태를 체크하시는 것 같습니다.
휴일인 어제(3월3일) 어느 목회자 가정을 갔다가 쌀이 떨어져 가는 모습을 보고 쌀을 보내주기를 요청하셨습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참 답답하고도 마음이 쓰립니다.
하여 다시 한번 도심지 약한 교회들에 쌀 보내기를 했으면 합니다.
요즘 세상에 쌀 걱정을 해야 한다는 현실이 아프고 쓰리지만, 외면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염치없지만 이 일에 십시일반으로 협력해 주실분은 응답주셔요. 꾸벅>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교회를 위임하셨고, 또 목양의 권한을 주셨다는 소명감 하나로 경제적 어려움과 외로움, 때로는 박탈감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켜나가야 하는 도심지 상가의 약한 교회들이 있습니다.
쌀독의 바닥이 긁히는 소리에 두려움과 막막함을 느끼는 사역자 가정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한국교회의 빛에 가려진 그늘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누군가는 쉽게 말합니다. 미련하게 목회에 매달리지 말고 다른길을 모색하라고요.
그럼에도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기댈곳 없는 사회적 약자들이 아둘람굴에 모였듯이 주일이면 예배드리러 나오는데 나 혼자 살겠다고 떠나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에 자신의 자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목회자 가정의 진솔한 고백에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비빌 언덕을 가지고 개척 몇 년에 교회가 몇배 부흥을 했다는 목회 성공담(?)들을 자랑하는 분들도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오늘의 조국교회가 존재하는 그늘에는
수많은 지하 교회에서 눈물로 한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씨름했던 많은 분들의 처절한 몸부림과 섬김이 오늘의 중형교회와 대형교회가 존재할 수 있었던 이면입니다.
빛이 있으면 그늘과 그림자는 필연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기성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이 형제 자매된 마음으로 주변의 약한 교회를 섬기는 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상처받고 소외된 영혼들이 그나마 마음 편히 기댈 수 있는 작은 상가 교회를 섬기는 이들을 동역자로 생각하며 품어줄 수 있을 때 복음의 역동성이 회복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나아가 사도 바울의 다음 고백을 오늘 우리도 하나님앞에 토로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7. 내가 갇혔을 때나 기쁜 소식을 변호하고 증거할 때에도 나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고생해 온 여러분을 내가 늘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여러분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는 하나님이 내 증인이십니다.(빌립보서 1:7-8, 현대어 성경)
여러분 한명 한명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