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2막: 노후의 삶을 설계하다
오늘의 삶은 마지막이 아니라 또 하나의 시작이다.
그러기에 데면데면 살아갈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며 보람 있게 살아야 한다.
안셀름 그륀은 『황혼의 미학』에서 노년 역시 늙음의 기술을 배우고 익혀야 하는 시기라고 말한다. 죽음을 삶의 자기완성으로 바라보면서, 나이 들어가는 법을 배우고 자신의 삶을 더욱 성숙하게 가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민 신부님은 『제3의 인생』에서 노년의 삶을 ‘제3의 인생’이라고 표현한다. 제1의 인생이 배우는 시기라면, 제2의 인생은 직장생활을 하며 가족을 이루고 책임을 다하는 시기다. 그리고 제3의 인생은 퇴직 이후의 삶으로,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절대자에게 의탁하며 살아가는 수동의 시기라고 했다. 결국 노년은 세상에서 멀어지는 시간이 아니라 자기 내면으로 돌아가 자신을 더욱 성숙하게 만드는 소중한 시간이다.
모세에게서 배운 제3의 인생
성경의 모세를 생각해 본다. 모세는 어린 시절부터 왕궁에서 자랐고, 40세가 될 때까지 왕의 가족으로 살았다. 그러나 왕궁을 떠나 광야로 들어갔고, 미디안 땅에서 이드로의 딸과 결혼하여 양을 치며 자신의 삶을 살았다.
그렇게 40년의 세월이 흘러 모세가 80세가 되었을 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뜻대로 살던 삶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떠났다. 모세에게 80세는 인생의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새로운 사명을 맡기신 제3의 인생의 시작이었다.
나에게도 새로운 길이 열렸다
나 역시 내 뜻대로 살아오던 삶에서 지천명에 이르러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하느님의 뜻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되기 위해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성경학교 4년, 심화반 2년, 신학원 2년, 신학대학원 2년을 공부했다. 이스라엘 성지를 비롯해 멕시코 과달루페, 스페인의 성가족성당, 포르투갈의 파티마 성지, 일본의 나가이 다카시와 관련된 성지와 고토(五島) 등을 찾아다니며 신앙의 깊이를 더해 갔다.
빈 그릇에 조금씩 무엇인가를 채워가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준비하고 있으니 하느님께서는 또 다른 길을 열어 주셨다. 고 이문희 바울로 대주교님께서 만드신 사단법인 ‘한국여기회’의 제2대 편집장으로 부르신 것이다. 나는 7년 동안 여기회 소식지 『여기애인(如己愛人)』을 만들어 교구민과 회원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길이 열렸다. 바로 글을 쓰는 길이었다.『사랑의 중력』, 『맏배』, 『나그넷길』, 『신앙의 나이테』, 『다림줄』, 『낯섦의 길』 등을 출판하면서 문서를 통한 선교의 길을 걸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계획한 길이라기보다, 하느님께서 한 걸음씩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다는 생각이 든다.
낯선 땅, 라우어
또 다른 삶의 길이 시작되었다. 히브리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40년 동안 광야를 지나야 했듯이, 나에게도 ‘낯섦의 길’이 주어졌다. 그곳이 바로 물설고 낯선 라우어 시니어타운이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내가 왜 이곳에 왔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처음 몇 달 동안은 산과 바다를 찾아다니며 마음을 달랬다. 자연을 바라보면서 낯선 환경에 조금씩 적응해 갔다.
그러다 몇 개월이 지나면서 이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ROTC 동기를 만나면서 인간관계의 지평도 조금씩 넓어졌다. 내가 라우어에서 경험한 일들을 주민자치단체 카카오톡에 올리면서 이웃들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사람, 두 사람 인연을 맺다 보니 어느새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국민체조가 만들어 준 인연
그 가운데 하나가 국민체조였다. 아침마다 함께 몸을 움직이고 차를 나누면서 사람들과 가까워졌다. 처음에는 몇 명이 시작했지만 점차 참여하는 주민이 늘어났고, 지금은 많은 입주민이 청명원에 모여 함께 체조를 한다.
나는 국민체조단의 일원으로 아침체조를 이끌고 있다. 체조가 시작되기 전 몸을 풀기 위한 율동에 사용할 ‘라우어의 인생’이라는 곡도 만들었다. 작곡은 사위에게 부탁했고, 지금도 아침체조에서 그 음악을 활용하고 있다.
건강을 위해 시작한 체조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만남의 장이 된 것이다. 참여하는 주민들은 한결같이 몸이 좋아지고 생활에 활력이 생겼다고 말한다. 나 역시 국민체조를 통해 건강뿐만 아니라 좋은 이웃을 얻었다.
『청명원의 아침』을 펴내다
지난 연말에는 『청명원의 아침』을 출간했다. 책을 통해 입주민들과 나의 경험을 나누고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었다. 글을 쓰는 일 역시 내가 라우어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소통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만남이 줄어들기 쉽다. 그러나 오히려 노년일수록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의 경험을 나눌 필요가 있다. 그것이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라우어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가
라우어 입주민은 주로 부산과 경남 지역 출신이지만 대구·경북과 서울 등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도 함께 살고 있다. 특히 미국 교포들도 상당수 입주해 있어 다양한 삶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는 점이 특징이다. 체험 숙박을 통해 일주일 또는 한 달 정도 직접 살아본 뒤 입주할 수 있는 길도 마련되어 있다.
직원들도 24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직원들은 타운 안에서 정해진 복장을 갖추고 근무하며, 대체로 친절하고 의욕적으로 입주민을 돕는다. 생활하면서 불편한 점을 이야기하면 가능한 한 신속하게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내가 경험한 라우어의 모습
내가 생활하면서 경험한 라우어의 모습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본다.
첫째, 입주 연령은 만 60세 이상이다.
둘째, 주거시설은 라우어와 라티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택형과 면적에 따라 보증금과 생활관리비가 달라진다.
셋째,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수영장, 사우나, 헬스장, 청명원, 청명서가, 콘서트홀, 회의장, 중앙정원, 연못 등 다양한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넷째, 아카데미 프로그램이 다양하다. 취미와 관심에 따라 여러 프로그램 가운데 자신에게 맞는 것을 선택하여 배울 수 있다.
다섯째, 식당과 생활관리 서비스가 제공된다. 식사는 전문업체가 운영하며, 주기적인 청소 서비스도 제공된다.
여섯째, 청명원은 라우어의 중심 공간이다. 청명원에는 오래된 팽나무가 우뚝 서 있어 입주민들이 모여 쉬고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가 되고 있다.
일곱째, 청명서가는 작은 도서관 역할을 한다. 여러 분야의 책을 갖추고 있어 입주민들이 책을 읽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여덟째, 콘서트홀에서는 다양한 문화예술 행사가 열린다. 335석 규모의 공연장에서 음악과 공연을 즐길 수 있으며, 매주 금요일에는 김지세의 ‘클래식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 윤형주, 윤수일, 등 여러 가수가 초청되어 공연하기도 했다.
아홉째, 국민체조가 생활의 한 부분이 되었다. 연중무휴로 아침 7시 25분이면 청명원에 주민들이 모여 함께 체조한다. 체조가 끝난 뒤에는 봉사자들이 차를 나누며 담소를 나눈다.
열째, 다양한 봉사활동도 이루어진다. 목련회, 라라회, 행복클럽, 라우어 체조단 등이 지역사회와 자연을 위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열한째, 의료서비스도 이용할 수 있다. 입주민의 건강관리를 위한 의료기관과의 연계가 이루어지고 있어 필요할 때 진료를 받을 수 있다.
열두째, 라라팜 농장이 있다. 약 3,000평 규모의 농장에서 각종 채소와 배추, 무 등을 재배하고 수확한 농산물을 입주민과 지역사회에 나누는 활동도 한다.
윤미영 회장이 꿈꾸는 라우어
라우어를 이야기하면서 윤미영 회장을 빼놓을 수 없다. 윤미영 회장은 오랫동안 복지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해 온 사회복지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단순히 노년층의 주거공간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주거·문화·운동·복지·의료가 함께 어우러지는 시니어타운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한 뜻이 라우어라는 공간 곳곳에 담겨 있다.
인생의 후반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나의 인생도 여러 번 새로운 길을 만났다. 젊은 시절에는 세상을 배우고 직장과 가정을 위해 살았다. 중년에는 신앙의 길을 찾아 공부하고 성지를 순례했다. 그 후에는 글을 쓰고 문서 선교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지금은 라우어에서 또 다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처음에는 낯설었던 곳이 이제는 이웃이 있는 삶의 터전이 되었다. 아침이면 사람들과 함께 체조하고,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글을 쓰고, 책을 읽고, 때로는 산과 바다를 찾아 나선다.
노년은 인생의 끝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돌아보고, 그 경험을 다른 사람과 나누며,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시간이다.
모세가 80세에 새로운 부르심을 받았듯이 우리에게도 새로운 길은 언제든 열릴 수 있다. 인생 2막, 아니 인생의 제3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늘도 나는 라우어에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한다. 나이 든다는 것은 삶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새로운 의미를 더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