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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중학교 제34회 동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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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우리들의 사랑방 스크랩 치술령
진종문 추천 0 조회 33 07.06.24 22:03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산행지 : 치술령 (765m)

▶소재지 : 울주군 두동면

▶산행일시 : 2007년 5월 13일(일요일)

▶산행코스 : 법왕사~경주망부석 갈림길                       

         ~울산망부석 치술령 갈림길~치술령 정상석

▶총 소요시간 :1시간 50분

▶날씨 : 맑음

▶누구와 : 집사람과 단둘이

▶주의 가볼만한곳 : 울산12경중의 하나인"선바위"와

              "봉계한우불고기단지"

 

 치술령에는 신라 충신 박제상과 그의 부인에 관한 애절한 전설이 있어,「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박제상은 눌지왕 즉위 후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던 두 왕제를 구출코자, 먼저 고구려에 가 있는 복호를 구출해 귀국시킨 후, 일본으로 건너가 미사흔을 구출해 내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일본에 잡혀 심한 고문 끝에 소사 당했다.

이때 박제상의 김씨부인은 두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 일본에 간 남편을 기다리다 죽으니 그 몸은 돌로 변하여 망부석이 되고, 그 영혼은 날아가 숨었는데 그 곳을 은을암이라 한다.

그 후 왕은 박제상의 딸을 미해공의 부인으로 삼고 박제상에게 대아찬으로 관위를 높혀주고, 김씨부인은 국대부인에 추봉하였으며, 사당을 짓고 그 뜻을 기리는 제를 봉행토록 한 곳을 치산서원이라 한다.

법왕사에 주차 시키고 대웅전은 들리지 않고 바로출발함

법왕사 바로위 등산길 접어든곳

 

경주 망부석 갈림길

치술령은 울산과 경주의 경계선상에 위치를 하고 있는데

울산에서는 울산쪽에 있는 바위가 망부석이라고 하고

경주에서는 경주쪽에 있는 바위가 망부석이라고 하면서 편말을 붙혀놓았다.

내생각으로는 바다가 보이는 경주쪽이 진짜 망부석이 아닐까 쉽다.

 

지도상으로 너무나 가까워 간편한 마음으로 왔는데 경사가 생각보다 심하다.

 

생명력이 좋은 야생화를 좋아한다. 이름도 모르지만,,,

그래서 나의 닉네임도 들꽃이고,,,ㅎㅎ 

 

힘들다.

 

울긋붉긋 4월의 꽃보다 5월의 초록이  너무좋다.

 

들꽃,,,

 

 

 

 

쿨맥스 소재의 등산복 속에는 런닝을 입지 않아야 하는데,,,

 

속옷을 벗고나니 시원하고 발걸음도 가볍다.

 

고마운(?)소나무에서 휴식도 취하고,,,

 

치술령 갈림길

치술령 정상먼저 올라가고 내려오면서 망부석 들렸다.

 

 

정상에 있는 방향 지시표

 

치술령 정상석,,,

다른산 정상에 가면 ??산 & ??봉 이라고 하는데 이곳은 령이라고 쓰여있다.

이유가 뭘까~~~ 

망부석과 망부석 전설을 설명해 놓은 표지판

 

 

 

망부석 위에서 바라본 일본 방향

 

망부석 위

 

 

 

박재상 부인이 바라본 방향

 

 

 

 

 

 

 

출발지인 법왕사 도착

 

법왕사 대웅전,,,삼배하고 왔다.

 

법왕사 대웅전에서 바라본 경주쪽 망부석 능선

 

법왕사 범종각

 

법왕사 앞쪽에서 바라본 전경

 

▲박재상 유적지

2. 박제상 설화

신라 내물왕 35년(서기 390년) 왜가 사신을 보내와 신라가 침입을 않는다는 약속으로 볼모를 요구해와 왕의 셋째 아들 미사흔을 보냈으나 계속 억류하고 있었음.또 실성왕 11년(서기 412년)에 고구려가  인질을 요구해와 미사흔의 형인 복호를 인질로 보냈는데 고구려 역시 계속 억류하고 있었읍니다.

서기 417년(눌지왕 원년) 왕은 아우들이 외국에 볼모로 잡혀가 있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이를 삽량주 간 박제상에게 고하니 박제상이 이를 듣고 고구려에 가서 동족 끼리 인질을 잡는 것은 부당함을 역설하여 복호를 데려오기에 이르렀다합니다. 이에 왕은 더욱 슬퍼하며 아우 미사흔을 더욱 보고 싶어 했다합니다.

이를 보고 박제상은 왕에게 미사흔을 구해 오겠다고 말하고 부인에게 말도 없이 일본으로 떠났다 합니다. 뒤에 박제상 부인이 이를 알고 뒤쫓아 갔으나 그 남편은 멀리 떠난 뒤라서 그 모래사장에서 목놓아 울었다 하며 그곳을 "장사" 라고 하며, 주위사람들이 그녀의 양팔을 끌어 집으로 모시려 하였으나 두발을 벌려 버티고 주저앉아 버렸다 해서 "벌지지"라는 지명이 지금도 망덕사 아래에 전해 내려온다 합니다.

한편 박제상은 신라에서 망명했다고 왜왕을 속인 후 미사흔과 배놀이 간다고 하여 유인한 후 그를 배에 태워 신라로 보내었으나 둘이 같이 도망하면 왜왕이 의심하여 뒤쫓아 오면 잡힐 수 있다하여 미사흔만 보내고 그는 미사흔의 방에서 미사흔 행세를 하였다 합니다..

미사흔이 도망간 것을 안 왜왕은 박제상을 그의 신하로 될것을 강요하고 이를 듣지 않자

온갖 고문으로도 실패하자 기시마에 유배시켰으며 거기서도 굴하지 않자 결국 불사라 죽였다 합니다.

눌지왕은 그의 충성심을 기려 대아찬으로 승급시키고 그의 둘째딸을 왕자 미해의 아내로 삼고 박제상부인을 국대부인으로 봉하였으나 박제상부인은 세딸과 함께 치술령(경주와 울산사이의 고개)에 올라 남편의 귀환을 기다리다 망부석이 되었다 합니다. 후세 사람들은 박제상 부인이 죽어 치술신모가 되었다 하며 그의 정절을 기려 치술령곡을 지어 불렀다 합니다.

 

3.김제상?

어떤 기록에는 박제상의 성씨가 김씨라는 설도 있다고 하나 삼국사기  삼강행실도 일본서기등에는 박씨로 나와 있다고 합니다.

 

 

방명록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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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06.25 12:55

    첫댓글 종문아 다음에 갈때는 내한테도 연락해라.. 우리 마눌하고 같이 갈테니까--성열--

  • 작성자 07.06.26 20:26

    성열아,,,렬이가~ 유즘 와이리 한글이 안되는지 몰라~ㅎㅎ 부산하고 울산 한번 모이자 >>>중간에서 한잔 하자. 금정산 단합등반을 하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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