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사람들의 땅
전북 고창군청 인터넷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초기화면에 ‘풍요로운 삶이 있는 곳 고창군입니다’라는 카피가 있다. 삶이 풍요롭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것이 필시 먹을거리가 풍족하다는 의미만은 아닐 터, 맛과 멋과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져야 가능한 것 아닌가.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사람들의 터전을 찾아가는 발길은 봄을 몰아오는 훈풍처럼 가볍고 설레었다.
전라북도 서남부에 자리한 고창군은 면적이 607㎢이며 1읍 13면에 6만여 명이 살고 있다. 고창은 농토가 넓어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터전을 일궈 정착했으며, 쌀을 비롯해 수박·복분자 등 특산물이 많이 생산된다. 유구한 역사에 걸맞게 소중한 문화유산이 도처에 있고, 우리 민족사에서 큰 의미가 있는 갑오농민전쟁(동학혁명)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세계문화유산 고인돌, 동학의 녹두장군 전봉준
고창읍에 이르러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고창읍성이다. 모양성이라고도 부르는 이 성은 서해로부터 침입해오는 왜적을 막기 위해 조선 단종 원년(1453)에 쌓았는데, 호남 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외면을 4~6m 높이로 돌을 쌓고 안쪽은 흙과 잡석으로 다져넣었으며 길이는 1684m에 이른다. 고창읍성은 옹성(甕城)과 치성(雉城)을 비롯한 성벽이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돼 있고 관청·동헌·객사 등 내부 시설물도 복원되어,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 축성 기술 및 성곽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고창읍성에는 ‘답성(踏城)놀이’라는 재미있는 민속이 전해온다. 윤달에 돌을 머리에 이고 성벽을 따라 한 바퀴 돌면 다리의 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 돌면 극락승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설 때문에 예전에 윤달이면 머리에 돌을 이고 성벽을 밟으며 도는 부녀자들의 모습이 장관을 이뤘다. 답성놀이는 지금에도 이어져, 해마다 중양절(음력 9월 9일) 무렵에 개최되는 축제 모양성제 때 재현된다. 찾아간 때가 겨울 끝자락의 평일인지라 찾은 사람이 드물었지만, 성 안에 우거진 숲이 잎을 내고 꽃을 피우면 아름다운 풍광을 보며 산책하기에 안성맞춤일 것 같았다. 성벽 위를 걸어 한 바퀴 도는 데는 30분 정도 걸린다.
(고창읍성)
(고인돌 군)
고창의 오랜 역사는 곳곳에 보이는 고인돌들이 잘 말해준다. 고창에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인 고인돌이 무려 2000여 기 이상 널려 있는데, 특히 고창읍 죽림리와 도산리, 아산면 상갑리와 봉덕리 일대에서는 마치 오늘날의 공동묘지처럼 밀집한 고인돌들을 볼 수 있다. 고창 고인돌군은 세계에서 가장 조밀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돼 보호되고 있다.
이처럼 고창에 고인돌이 많은 것은 넓은 들과 가까운 바다에서 먹을 것을 쉽고 풍부하게 구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수천 년 전부터 집단생활을 하고 이로 인해 권력층이 형성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 결과 우리는 오늘날 조상들이 남긴 세계적인 ‘지붕이 없는 박물관’을 갖게 된 것이다.
고창은 동학농민혁명의 요람이기도 하다. 죽림리 고인돌 유적지에서 가까운 당촌마을에는 동학농민혁명 때의 지도자 전봉준이 1855년 태어나 13세 무렵까지 살았던 생가가 남아 있다. 체구가 작아 ‘녹두장군’이라고 불렸던 전봉준은 갑오년인 1894년 인근의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으로 농민들이 봉기하자 무장(현재의 공음면 구수암리 구수내마을)에서 4000여 명의 농민군을 모아 최초로 무장창의(茂長倡義) 포고문을 선포하고 조직적인 항쟁에 들어갔다.
(전봉준 생가)
(동학농민혁명 발상지 표석) (동학농민혁명 기념탑)
그러나 한때 호남지방을 휩쓸며 기세를 올리고 자치를 실시했던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신식 무기를 앞세운 일본군에게 패퇴했고, 얼마 뒤 전봉준도 체포돼 이듬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농민군들이 모여 훈련을 했던 구수암리에는 동학농민혁명 발상지 표석과 동학농민혁명 기념탑이 세워져, 권력의 수탈에 맞서 농민들이 분연히 떨쳐 일어났던 그날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고 있다.
미당의 시혼이 자라고 동편제 판소리가 흐르는 곳
아산면 삼인리 선운산 북쪽 품에 안긴 선운사는 무려 1430여 년 전인 백제 27대 위덕왕 24년(577)에 검단선사가 창건한 고찰로 알려져 있다. 한때 89개 암자와 189개 요사(승려들이 거처하는 집)를 갖추고 3000여 명의 승려가 수도하며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던 명문 사찰이다.
(선운사)
선운사는 대웅보전을 비롯한 수십 점의 문화재와 아늑하고 단아한 주변 풍광이 어우러져 사시사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절 바로 뒤쪽에 2㏊ 가까이 우거진 동백나무 숲은 수령 500년의 동백나무 3000여 그루가 군락을 이뤄 해마다 4월 중순이면 붉은 꽃망울을 한꺼번에 터뜨려 장관을 이룬다.
또 선운사 앞을 흐르는 도솔천 둔덕과 인근 야산에는 초가을이면 꽃무릇이 지천으로 피어 나그네들을 반긴다. 수선화과에 속하는 상사화는 봄에 돋은 잎이 여름이면 져버리고 초가을에 선홍빛 꽃을 피우는데, 잎이 진 뒤에야 꽃이 피는 것이 결코 만날 수 없는 애절한 사랑을 보여주는 듯하다 해서 상사화(相思花)라고도 불린다.
한편 선운산은 도솔산이라고도 하며 1979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곳곳의 기암괴석과 함께 신록과 단풍 그리고 설경 등으로 계절마다 다른 색의 옷을 갈아입는 풍광이 아름다워 호남의 내금강으로 불리기도 한다.
선운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부안면 선운리에는 미당시문학관이 있어 ‘국화 옆에서’ 등 1000여 편의 작품을 남겼고 생전에 다섯 번이나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되었던 미당 서정주(1915~2000) 시인의 문학적 예술혼을 느낄 수 있다. 미당시문학관은 폐교한 선운분교를 개조해 꾸며졌는데, 그 옆에는 시인의 생가도 복원돼 시문학 순례지가 되고 있다.
(미당 서정주 생가) (미당시문학관)
조선 후기 판소리 이론가이자 후원가로 종래 계통 없이 불러오던 광대소리를 통일하여 ‘춘향가’를 비롯한 6마당으로 체계화하고 독특한 판소리 사설문학을 이룩한 동리 신재효(1812~1884)도 고창 사람이다. 고창읍성 앞 신재효 고택에 세워진 판소리박물관은 신재효의 유품과 고창 지역의 명창 및 판소리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동편제의 본고장 가운데 한 곳인 고창은 판소리 최초의 여류 명창으로 추앙되는 진채선과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하고 국악협회 이사장을 역임한 김소희 등 숱한 명창을 배출한 고장이기도 하다. 또 판소리박물관 바로 옆에는 동리국악당이 자리 잡아 신재효의 공적을 기리면서 수준 높은 판소리 예술의 교육과 감상 기회를 제공한다.
농업과 자연도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상품이다
어떤 농산물이나 음식을 먹을 때 그것을 상징하거나 연관되어 생각나는 지역이 있다면, 그 고장으로서는 이미 커다란 판로를 지닌 셈이다. 그런 점에서 고창은 행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수박, 복분자, 장어 등 ‘고창’이라는 이름과 함께 함으로써 그 가치가 더욱 높아지는 품목들이 있기 때문이다.
수박은 첫손에 꼽히는 고창의 특산물. 고창에서는 197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수박을 재배하기 시작해 요즘에는 2000여 ㏊에서 연간 7만 t의 수박을 생산한다. 이는 전북 수박 생산량의 65%에 해당하며 전국적으로 따져봐도 15%나 차지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이다.
고창수박은 배수가 잘되는 황토에서 재배되기 때문에 당도가 높고 그만큼 맛도 좋다고 한다. 대산면 율촌리에 있는 고창수박시험장(채소연구소)에서는 친환경 수박 재배 기술을 비롯해 더욱 품질 좋은 수박 생산을 위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복분자 밭) (풍천장어 음식점들)
복분자는 최근에 고창의 특산품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요즘 고창에 가면 어디를 둘러보더라도 보랏빛을 띠고 장미와 비슷한 덩굴들이 밭에 그득 심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복분자 덩굴이다. 복분자는 원래 산야에 자생하는 나무딸기의 열매로, 한방에서는 남성의 성기능을 강화하고 여성의 불임을 치료하는 약재로 사용했다. 복분자를 먹으면 오줌줄기가 세진다고 한다. 오죽하면 이름이 요강을 엎는다는 복분자(覆盆子)일까.
재배 면적이 약 1500㏊에 이르는 고창의 복분자는 과거에는 대부분 술로 가공됐으나 요즘에는 즙·환·사탕·젤리 등의 제품으로 만들어지고 있으며 한과의 원료로도 사용된다. 고창군 농업기술센터는 부안면 용산리에 복분자시험장을 설립해 육종과 재배, 가공품 개발 등의 연구를 하고 있다.
장어 좋아하는 사람치고 ‘풍천장어’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 그런데 풍천장어가 바로 고창의 장어라는 것도 아시는지. 뱀장어는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는 지점에 많이 서식하는데, 선운산 어귀를 흘러 서해바다로 잠겨드는 인천강은 예부터 큰 바람이 서해 바닷물을 몰고 들어온다 하여 풍천이라 불렸으며, 이곳에서 잡히는 뱀장어를 풍천장어라 했던 것이다.
풍천장어는 풍천이 뱀장어가 산란을 위해 바다로 내려가기 전에 몸을 단련하는 곳이어서 여기서 잡힌 장어 맛이 유난히 담백하고 구수해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고, 풍천 하구 선운사로 들어서는 길목 일대에는 장어 음식점들이 저마다 풍천장어 원조를 자처하며 미식가들의 입맛을 유혹하고 있다.
쌀 수확이 늘면서 보리는 이제 건강식이나 별미 음식의 재료 정도로 위치가 낮아졌다. 하지만 고창에서는 보리도 당당한 관광 상품의 하나다. 공음면 선동리의 학원관광농장은 무려 100㏊나 되는 면적에 보리를 심어 보리밭을 관광지화 했다. 봄이면 완만하고 드넓은 구릉지대에 청보리밭이 초원처럼 펼쳐져 휴식처가 되며, 특히 4월에는 청보리밭 축제가 열린다. 뿐만 아니라 가을에는 마치 구름이 내려앉은 듯한 하얀 메밀꽃밭으로 변해 장관을 이루기도 한다.
(학원관광농장 보리밭)
서해바다와 접한 고창은 드넓은 갯벌이 펼쳐져 해산물도 풍부하거니와, 요즘에는 갯벌체험을 개발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특히 심원면 하전갯벌체험마을과 만돌갯벌체험마을은 광활한 갯벌에서 바지락 캐기, 경운기로 만든 갯벌택시 타기 등 다양한 체험 캠프를 개발해 운영하고 있다. 해리면 동호리의 동호해수욕장과 상하면 자룡리의 구시포해수욕장은 백사장이 길고 모래가 가늘며 경사도 완만해 여름철 휴양지로 적합하다. 동호해수욕장은 소나무 숲이, 구시포해수욕장은 황홀한 낙조가 자랑거리다.
고창군청 인터넷 홈페이지(www.gochang.go.kr)를 방문하면 초기화면에 ‘풍요로운 삶이 있는 곳 고창군입니다’라는 카피가 있다. 삶이 풍요롭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것이 필시 먹을거리가 풍족하다는 의미만은 아닐 것이고, 맛과 멋과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졌을 때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본다면 고창은 정말 풍요로운 삶이 있는 고장이다.
/몽당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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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인물 가운데는 아쉽게도 출생지가 알려져 있지 않거나 문헌마다 다른 경우가 적지 않다. 동학농민혁명 때의 지도자인 녹두장군 전봉준도 마찬가지.
전라북도 고창군청에서 발행한 ‘맛과 멋 그리고 문화가 어우러진 고창’이라는 소책자의 관광 안내도에는 ‘전봉준 장군 생가 터’가 표기되어 있고, 고창군청이 개설해 운영하는 ‘고창군 문화관광’ 홈페이지(culture.gochang.go.kr) 역사문화 카테고리의 인물 소개에서도 ‘전봉준 장군은 1855년 전북 고창군 고창읍 당촌리 63번지에서 아버지 전창혁, 어머니 광산김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라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당촌리를 찾아가본 결과 전봉준 장군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었으며, 장군의 생가 터임을 알리는 안내판도 세워져 있었다.
반면 전북 정읍시청 문화관광 홈페이지에서는 ‘전봉준 장군의 생가는 여러 이설이 있지만 14세까지는 정읍군 산외면 동곡리에서 살다가…’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