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문헌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중국 동북 지방의 거친 곳에 사는 짐승으로 해치라는 이름의 짐승이 있다. 깊은 수풀이나 산속에 사는 짐승으로 신선(神仙)이 먹는다는 멱구슬나무 열매만 먹기에 해치주위에는 파리 한 마리 꾀지 못하는 성스런 짐승이다. 뿔이 하나에 성품이 충직하여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면 올바르지 못한 사람을 뿔로 받고, 사람들이 논란을 벌이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사람을 물어뜯는다. " <이물지(異物誌)> 애자잡설(艾子雜說)이란 저서에 실린 다음의 대화를 통해서도 해태란 동물을 짐작해볼 수 있다.
전국(戰國)시대 제(劑)나라 선왕(宣王)이 애자(艾子)를 불러 물었다. "옛날에 해태란 짐승이 있었다던데 그것이 어떤 짐승인가?" 애자가 답하기를 "요순(堯舜)시대의 신수(神獸)이온데 조정안에 살면서 신하들 가운데 사악한 행위를 하거나 사특한 마음을 먹은 자가 있으면 대어들어 잡아먹어 버린답니다. " 애자가 계속해서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 그 짐승이 있다면 따로이 먹이를 줄 필요가 없을 것이옵니다. " 고 부패했던 당시 조정을 풍자하고 있다. <애자잡설(艾子雜說)>
이런 각종 문헌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해치라는 짐승의 모습은 뿔을 하나 가진 동물로서 기린 얼굴에 발톱을 가진 형상으로 푸른 비늘이 돋치고 두툼한 꼬리가 달린 환상적인 동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설(一說)에는 해태의 얼굴이 기린이 아닌 소를 닮았다는 우수마면(牛首馬面)의 모습을 띄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또한 힘이 어찌나 억센지 백수(百獸)가 당해낼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런 전반적인 외양에 이 짐승의 속성은 충(忠)하고 곡직(曲直)하여 옳고 그름을 능히 판별하며 구덕(九德)을 고루 갖추었다고 한다. 특히 대단히 영물스럽고 사람의 시비곡직을 판단하는 신령스러운 재주가 있어 만일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그 뿔로 덤비어 받아넘기는 정의의 동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궁궐에 살고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동물로 성군(聖君)을 도와 현명한 일을 많이 하였음을 느껴볼 수 있다.
해태가 정의의 상징이란 속성은 중국이나 한국 등 동양의 문화에 다양하게 이용 반영되었다. 우선 중국 고대의 묘족은 분쟁이 생겼을 때 신의 뜻을 물어서 행하는 신의재판(神意裁判), 해태결송(決訟)이란 말이 있는데 이때는 해태라는 동물을 사용했다고 한다.
즉, 재판관 앞에 두 당사자를 세우고 뿐 하나 가진 해태라는 짐승을 데려오면 해태는 그 본성대로 반드시 죄지은 자에게로 가서 그 하나인 뿔로 떠받는다는 고사가 있다. 또한 초(楚)나라에서는 해태를 법수(法獸)로 사법(司法)의 상징으로 삼았다고 하는 말이 전한다. 따라서 임금님을 비롯 법을 다스리는 벼슬아치들은 이 해태 모습을 한 관(冠)을 쓰도록 했다. 이를 해치관이라 하였으며 한나라 때는 이 해치관을 혜문관(惠文冠)이라 부르기도 했다.
초나라 임금이 금관 대신 해태관을 쓰고 국사(國事)를 다스린 것이 본이 되어 그 후부터 법을 다스리는 수령(守令)이나 어사(御使)들의 관복으로 이해태관과 해태를 흉배에 수놓은 옷을 입도록 제도화하고 있다. 한(漢)나라 때부터는 궁(宮)이나 관아(官衙)앞에 해태상을 놓아 드나드는 사람들이 부정하고 정의롭지 못한 사특한 마음을 씻도록 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 해태라는 짐승이 등장하는 기록은 신라시대부터이다. 신라시대의 관직에 해치부가 있다. 또한 중국의 경우처럼 오늘날의 사법부라 할 수 있는 대사헌의 법모나 흉배에 가식(加飾)되기도 함으로써 정의를 상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해치관에 담 긴 뜻을 신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무릇 관리의 공적과 과오를 기록하는 것은 옛날부터 있는 것이니, 헌부(憲府)에 있어서는 관계가 더욱 중한 것이다. 지금부터 계속하여 해치관을 높이 쓰고 백필(白筆 사 관이 가지는 붓으로 항상 사모에 비녀처럼 꽂았다)을 꽂고 앉아 누구는 어질었고, 누구는 충성하였고, 누구는 아첨하였고, 누구는 간사하였다고 해서 착한 법을 삼고 악한 것을 경계한다면 나라는 맑게 될 것이다.
" <신동국여지승람> 또한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복 사령관 앞에 해태를 붙인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양 관의 앞에 해태상을 붙여 법관으로 인식하였던 것을 미루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문헌에는 해태를 법의 수호자이며 정의의 심판관이라고 할 수 있는 어사(御使) 가 이런 해치관을 썼다는 기록도 있다. 따로 이를 어사관(御使冠)이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어사가 좌기(坐起)할 때 썼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비행의 규정권(糾正權)이 있는 암행어사를 해태의 의미가 전사된 치사라 한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고종 8년에 개정된 흉배표시 제도를 보면 당상관 이상인 문관의 것은 쌍학(?鶴)으로 하고 무관은 쌍호(?虎)로 하였으며 당하관인 문관은 단학(單鶴), 무관은 단호(單虎)의 흉배로 통일하였으나 대사헌의 흉배만은 해태를 가식케 함으로써 암행어사에게 해태관 을 쓰게 하였던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圖說 寒國美術五千年) 근년까지 우리나라 법관이 중국의 해태관을 변형시킨 변모와 해태문양의 검은 법복을 입었던 것은 바로 초나라 이래의 전통이었다.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이런 정의의 상징으로서 해태의 이용은 조선시대 임금님이 근무하던 근정전 앞에 해태상을 세웠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세시풍속에 호랑이 그림은 대문에, 개는 광문, 닭은 중문, 해태는 부엌에 붙여 벽사용 그림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불을 먹고 산다는 해태는 일반적으로 호랑이처럼 무서운것이 특징인데 가정집에서 사용되었던 민화의 해태는 친숙한 모습이다.
해태는 선과 악을 간파하는 불가사의한 힘을 지니고 있으며, 덕분에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분할 줄 알아서 악한 사람은 뿔로 받아 응징한다고 한다. 이 같은 속성 때문에 해태는 재판과 관계지어졌으며, 후세에는 해태의 모습이 재판관의 옷에 그려졌다. 한국의 경우, 조선시대에는 관리들을 감찰하고 법을 집행하는 사헌부를 지켜주는 상징으로, 사헌부의 우두머리인 대사헌이 입는 관복의 흉배에 해태를 새겼다. 또한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의 국회의사당과 대검찰청 앞에 해태상이 세워져 있다. 이는 해태처럼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고 항상 경계하며, 정의의 편에 서서 법을 공정하게 처리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이로 인해 다른 전설상의 동물들은 훌륭한 왕이나 성인이 태어나거나 크게 활약을 할 때 나타났지만, 해태는 왕의 재판이 공정하게 행해지는 시대에 나타난다고 한다.
또한 조선시대 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 잦은 화재로 공사가 지연되자 남쪽의 관악산이 휴화산인 이유로 그 불기가 빌미가 된다는 지관의 주장에 따라 광화문의 좌우에 해태상을 설치하여 화재를 막고 길운을 빌었다고 한다.
해태가 이런 화마(火魔)를 제압하는 영물로서의 의미가 본격적으로 세상에 퍼지기 시작한 것은 무엇보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에 놓여있는 일명 '광화문 해태'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내용인즉 서울 성내의 공전에 여러 차례에 걸쳐 화재가 일어났는데 이것은 서울의 안산인 관악산이 화산(火山)이기 때문이라는 풍수설이 널리 퍼지면서 풍수의 설에 따라 관악산 상봉에 샘을 파고 구리로 용을 만들어 그 샘에 넣었으며 또 광화문 앞 좌우에 해태상 한쌍을 세워 관악산을 보게 앉히어 화기를 진압하게 하였다는 이야기다. 실제 현재 해태의 부릅뜬 두 눈이 응시하는 곳은 관악산이다. 관악산은 풍수지리상 서울의 조산(祖山)으로 능선이 활활 타오른 형상을 한 불기운의 산이다. 그러기에 궁궐의 화재는 그 근원이 관악산의 화기에 있다고 믿었으며 광화문 앞에 해태상을 놓아 끝없이 감시하고 진압하게 했던 것이다.
광화문 앞 해태가 서울의 방화풍수 때문에 건조된 것이라는 이야기는 박제형(朴濟炯) 의 조선근세정감(朝鮮近世政鑑)에 적혀있다.
이 기록에는 "대원군이 음양 풍수설을 믿어서 새 궁궐이 예부터 자주 화재를 당하는 것은 모두 불형체인 관악산이 안산으로 된 데에 연유한다. 이에 흰 돌로써 물짐승 형상을 새겨서 궁문 앞 양쪽에다 두었다. 또 관악산 제일 꼭대기에다 우물을 파고 구리로 만든 용을 우물에다 넣어서 화기를 진압하였다." 고 적혀 있다. 여기에는 해태가 물에 사는 수성(水性)의 짐승이라는 이야기와 따라서 수제화(水制火)의 오행설에 맞추어 관악과 바라보게 했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