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진주시 대곡면 가정리 중앙에 자리한 (중촌마을..中村里)는 겉으로 보기에는 이 땅의 여느 농 촌마을과 하등 다를 게 없다.
마을 뒤로는 송태산(宋台山, 죽방산 혹은 대 방산) 줄기가 남쪽의 분도산(分道山)과 오름산(혹은 筆峰)까지 이어지고 있고, 마을 앞으로는 그 뒷산 주맥과 평행을 이루는 가지산(可止山) 줄기 가 이른바 안산(案山)으로서 남북 방향으로 길게 놓여 있다.
그 두 지맥 사이로는 북에서 남으로 사래들, 항정지들, 개바대들 등이 차례로 위치한 좁고 긴 들판이 펼쳐져 있고, 그 위를 남류하는 대곡천(大谷川)은 월강교 (月江橋) 서편에서 남강(南江)에 합류한다. 북으로는 마을 앞에 있는 큰 숲이 아름답다고 하여 이름지어진 가정리(佳亭里)가 있고,
남으로는 그 옛 날 마을에 큰 오동나무가 있어서 이름붙여진 오곡리(梧谷里 혹은 吳谷里) 가 있으니 아마도 가운뎃마을(중촌)이라는 지명은 무릇 그곳이 그 두 마을 사이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리라.
그렇듯 평화롭던 중촌마을에 갑자기 변고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1990 년대초다. 불과 두어 해 사이에 200여명 남짓한 마을 사람 중에서 30여명 이 잇따라 죽는 해괴한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정확히는 82가구에서 3년사이에 28명이 죽어 3집에 한집꼴로 변고가 났으니...그것도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이를 어찌 우연이라고만 할수가 있을 까?...)..
500년이나 되는 마을 역사 상 전무(前無)한 일이거도 했거니와 더구나 비닐하우스를 살펴보려고 도로 를 건너다가 차에 치여 죽은 사람, 잠을 자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 강물에 빠져 죽은 사람 등 원인을 알 수 없는 의문의 죽음이 대부분 이었다.
한 사람의 삼우제나 사십구일재를 지내기가 무섭게 또 다른 사람 이 잇따라 죽는 정도였을뿐더러 그것도 노인들보다는 청장년층의 숫자가 훨씬 더 많았다고 하니 당시의 마을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를 가히 짐작할만 하지 않는가.
게다가 그 여파로 여러 집이 중촌마을을 떠나 이사를 가버렸 는데 그나마 IMF로 귀농해온 사람도 있고 해서 지금은 비록 주민들이 많이 교체되기는 했지만 전체 주민수는 예전과 비슷하게 유지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주민들은 그런 참변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일을 가만히 좌 시하기만 하였던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나름대로 원인을 알아내려고 백방으로 애써보던 차, 마침내 마을 정남쪽으로 바라보이는 남강 너머의 월아산(月牙山 혹은 달음산) 채석장을 주목하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주변 생활 환경에서 크게 변한 것이라고는 마을에서 약 2.5Km 떨 어진 그곳 채석장에서 산을 크게 깎아 낸 일 외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으로 공교로운 일은 문제의 채석장이 위치한 바로 그 월아산 동쪽 자락에 터잡고 있는 가좌리(加佐里)에서도 중촌리에서와 같은 해괴한 죽음이 몇 차례 잇따랐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웃한 오곡리와 덕곡 리, 그리고 마진리 등에서는 전혀 변괴가 일어나지 않았으니, 사람들은 급 기야 그 마을들이 중촌리처럼 채석장이 정면으로 바라보이지 않거나 아니 면 가좌리처럼 그 채석장이 있는 산에 직접 기대어 터잡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쯤되면 주민들은 마을이 입은 횡액을 모두 그 산을 잘못 건드려 생긴 일종의 풍수동티(動土)로 생 각하기 십상인 바, 아닌게 아니라 그때부터 채석회사(정암산업)와 주민들 간에 예측 불허의 풍수논쟁이 불붙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회사측과 마을 사람들이 제각각 지관(혹은 풍수사)을 동원하여 자문을 구하는 과정에서, 혹자는 중촌마을 뒷산 분묘들 중에서도 채석장이 위치한 월아산을 선영(先塋)의 안대(案對: 묘가 정면으로 바라보는 방위) 로 삼아온 진양 강씨 문중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하고,
또 어떤 사 람은 비록 중촌리에서 석산 개발 현장이 정면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그 사 이에 남강 줄기가 가로놓여 있기 때문에 그 마을에 그런 직접적인 화(禍) 를 가져다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는 등 온갖 구구한 풍수 해석들이 입 에 오르내리게 되었던 모양이다
. 그 와중에서도 한 가지 일치된 의견이 있 었다면 그것은 곧 중촌리에서 바라보이는 월아산의 풍수 형국이 마치 호랑 이가 엎드려 먹이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잠을 자고 있는듯한, 이른바 복호 형(伏虎形) 내지 숙호형(宿虎形)의 지세라는 사실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중촌리에서 월아산 쪽을 바라보면 동서로 길게 뻗은 산의 주릉이 마치 호랑이의 등줄기와도 같고, 북쪽으로 불쑥 나와 있는 알맞은 높이의 봉우리는 호랑이의 머리와 매우 흡사해 보인다.
더구나 가지산 남동쪽 끝자락 너 머로 호랑이의 오른쪽 앞발에 해당하는 듯한 지맥이 어렴풋이 보이니 중촌 리 사람들이 월아산의 생김새를 호랑이의 형상으로 유추, 관념화한 데는 전혀 무리가 없었을 법하다.그런데 문제는 바로 채석을 시작한 현장이 곧 호랑이의 얼굴, 즉 면상(面上)이었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잠자는 호랑이의 얼굴을 건드린 셈인데, 흉측하게 망가뜨려진 그 몰골은 지금도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 께름칙한 여운을 남길 정도다.
어쨌거나 채석회사측과 중촌리 주민들 간에 있었던 풍수 논쟁의 결과로 이루어진 타협안이 무척 흥미롭다. 95년 한가윗날 마을회관 준공식에 때를 맞추어 회사측이 회관 앞마당에 돌로 된 코끼리상(像) 한쌍을 기증해 세워 준 것이다.
아마도 다친 호랑이를 다스려 마을의 평안을 되찾는 데는 그를 능히 제압할 수 있는 코끼리의 힘을 빌리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생각 했던 것 같다.
당시에 이장(里長)이었던 이화용씨의 얘기로는 추진위원장 직을 맡았던 고 이천기씨가 그런 발상을 내놓았다고 하지만 사실 그와같은 석물을 이용한 비보(裨補)와 압승풍수 책략은 이미 통일신라시대때부터 우 리네 전통적인 풍수술법 중의 하나로서 보편화돼 내려왔다.
여기에서 잠깐 고려의 왕도(王都)였던 개성 땅에 적용되었던 그와 유사한 비보.압승풍수 의 예를 살펴보도록 하자. 당시에 궁성터였던 만월대는 마치 늙은 쥐가 밭 으로 내려오는 듯한 형국의 이른바 노서하전형(老鼠下田形)의 터로 받아들 여졌는데, 거기에다 동남쪽의 자남산(子南山)이 새끼 쥐와 같은 형상을 하 고 있었으므로 그 터는 당연히 부귀 안락을 가져다 주고 자손을 번창시켜 줄 명당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만약 새끼 쥐가 위협을 받거나 어디로 가 버리면 어미인 늙은 쥐가 불안해져 결국은 궁성이 평온할 수 없다고 믿었 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새끼 쥐를 그 자리에서 꼼짝 못하게 묶어둘 필요 가 있었다. 그래서 나온 방책이 바로 그 유명한 오수부동격(五獸不動格)이 라는 비보.압승법이다.
요컨대 자남산 주위로 고양이.개.호랑이.코끼리 형상의 석물을 배치하여 서로 돌아가며 견제를 하게 했는데, 새끼 쥐는 고양이가, 고양이는 개가, 개는 호랑이가, 호랑이는 코끼리가 각각 노려서 움직일 수 없으며, 또한 코끼리는 쥐가 제압해서(코끼리는 긴 코에 쥐가 침입하는 것을 극히 꺼려하기 때문에 서로 상극이다) 움직이지 못한다.
결국 팽팽한 세력 균형으로 어느 한 짐승도 움직일 수 없어서 지세의 발복이 유 지된다고 믿은 그같은 풍수관념은 왕도내에 자남산, 묘정(猫井), 구암(狗 岩), 호정(虎井), 상암(象岩) 등과 같은 지명을 생기게 한 직접적인 계기 가 되기도 하였다.
물론 엄밀히 따지자면 고려조의 그런 압승풍수와 중촌리의 그것은 그 등 장배경 자체부터가 다르다. 고려때의 비보.압승풍수는 아무래도 관념적인 유희 성격이 짙은 반면 중촌리의 경우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 라도 잡으려 하듯 심리적으로 매우 절박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더구 나 중촌리 사람 모두가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말하기를 코끼리 석상 한 쌍을 부서진 호랑이 머리를 향하여 세운 후로는 마을내에서 나이가 많거나 질병 에 따른 자연사(死) 외에는 갑작스런 사고로 인한 죽음이 완전히 없어졌다 고 한다.
그런 사실을 논리적으로 증명한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하지 만 필자는 적어도 주민들의 심리상태를 파악하는 일만은 결코 놓치지 않았다.
잎이 무성한 나무들과 마을버스 승강장 시설물이 석상 앞을 가려 코끼 리상이 다친 호랑이 지세를 훤히 바라볼 수 없는데 무슨 효험이 있겠느냐 고 생트집잡듯이 묻자 영물은 원래 그런 하찮은 장애물과는 아무런 상관없 이 그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한다.
그뿐 아니다. 회사측이 사람의 눈에 쉽게 띄는 예전의 채석장 앞쪽 겉표 면을 담쟁이덩굴로 대충 가린 후, 이제는 우측으로 돌아들어간 뒤쪽의 보 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호랑이 목을 잘라나 오는데 몇 년안에 호랑이 머리 부분 지세 전체가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얘기하면서도 전혀 걱정하는 기색 이 없다.
아, 정녕 저 코끼리 석상 한 쌍이 주민들에게 그토록 큰 힘이 되 었다는 말이던가. 그러고 보면 그 석상은 고차원적인 심리풍수(Psycholog ical Pungsu: 이 용어는 95년 말레이시아 이포 국제풍수 심포지엄에서 필 자가 처음으로 발표하여 상당한 호응을 불러 일으킨 새로운 풍수 연구분 야임)의 극치물에 다름아니다.
하기야 그 어떤 영약일지라도 중촌리 주민 들의 그런 마음속 풍수동티 병을 치유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할수록 풍수를 풍수되게 한 그 코끼리 석상 한 쌍이 그토록 마음에 와닿을 수가 없다. 아마도 그 석상이 풍수가 미신의 차원을 넘어 과학의 세계로 돌입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단서가 되어주고 있기 때문이리라.
풍수학자.지리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