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는 예나 지금이나 예술의 도시로 불리고 있어요. 파리
에서도 예술의 중심이 된 곳이 몽마르트르 언덕이에요. 이곳은 19세
기 들어서도 집들이 띄엄띄엄 있는 시골 농촌에 지나지 않았어요. 하
지만 돈이 없는 가난한 예술가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파
리 예술의 심장부가 되었답니다.
해발 130미터에 불과한 이 작은 언덕은 파란만장한 역사의 현장이
기도 합니다. 몽마르트르라는 이름을 얻게 된 데는 흥미로운 전설이
전하고 있지요. 오랜 옛날, 프랑스 지역을 갈리아라 불렀어요. 영웅
카이사르가 갈리아 지역을 정복한 이후 로마의 영향을 받게 되었지
요. 파리 사람들은 몽마르트르 언덕에 전쟁의 신 마르스의 제단을 쌓
고 섬겼답니다.
그런데 3세기 무렵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어요. 당시 로마제국에는
기독교가 급속히 번지고 있었는데, 마침내 파리 지역에도 기독교가
전파되기에 이르렀지요. 하지만 토착 신앙을 믿던 사람들은 기독교
를 받아들이지 않고 박해했어요. 기독교를 전파하러 온 선교사 드니
와 제자 두 사람을 처형했던 것이지요. 그 장소가 바로 마르스 신을
모시는 몽마르트르 언덕이었답니다.
이때 신비한 일이 일어났어요. 드니는 잘린 목을 들고 사람들을 꾸
짖으며 한동안 설교를 했어요.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하고 앞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믿으라고 말이죠. 그리고는 수십 리를 걸어가 미리 준비된 자기의
무덤에 드러누웠다고 해요. 이 기적이 있은 후 파리 지역에 기독교가 널
리 퍼지고, 드니는 성자로 추앙을 받게 되었답니다. 이때부터 몽마르트르
는 ‘순교자의 언덕’이란 뜻의 라틴어 몽스 마르티룸(Mons Martyrum)이라 불렸
어요. 이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발음하기 쉬운 프랑스어 몽마르트르로 변했
던 것이죠. 드니가 묻힌 곳은 성자 드니라는 뜻의 ‘생드니(Saint-Denis)’가 되
었답니다.
파리 외곽에 위치한 몽마르트르는 본래 한적한 시골이었어요. 언덕 기슭
에는 포도밭이나 채소밭 같은 전원 풍경이 펼쳐져 있었지요. 17세기 무렵에
는 이곳의 상징이 된 풍차가 무려 30개가 넘었다고 하네요. 풍차는 매우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바람을 이용해 동력을 얻는 방앗간 같은
곳이에요. 밀가루를 빻거나 포도를 짜서 즙을 내는 데 사용되
었던 것이지요. 풍차 방앗간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인기가 시들
해지자 하나둘 철거되기 시작했어요.
이때 ‘드브레’라는 제분업자가 1824~1825년 무렵 한 농가를 개조하
여 무도회장을 열어 크게 성공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풍차를 상징으
로 한 ‘물랭 드 라 갈레트’였지요. 이곳에서는 여관처럼 잠도 재워 주
고 음식도 팔았는데, 갈레트라는 빵 케이크가 유명했답니다. 갈레트
는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향토 요리지요. 주로 메밀가루에 소금과
물을 넣고 섞어 팬케이크처럼 얇게 구워서 그 안에 계란이나 치즈,
햄 따위를 넣고 대충 접어서 먹는 간단한 요리랍니다. 물랭이 풍차를
뜻하는 말이니, ‘물랭 드 라 갈레트’를 해석하면 ‘갈레트가 있는 풍차
집’ 정도가 될 겁니다.
몽마르트르는 19세기 중반, 정확히는 1860년 파리 시내로 편입
되었어요. 파리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외곽 지역이던 몽마르트르까
지 시 구역을 넓힌 것이죠. 이 무렵부터 이곳은 향락의 거리요, 사교
의 마당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게 되었어요. 신사 숙녀도 있
었지만 시인이나 음악가, 화가 등 예술가들도 있었지요. 그들이 뒤섞
여 환락과 예술이 공존하는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답니다. 이때 물랭
드 라 갈레트는 가장 인기를 끈 무도장이었어요. 온갖 종류의 사람들
이 모여들어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환담을 나누는 쾌락의 공간이었
지요. 당시의 풍속을 잘 보여 주는 것이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
트〉입니다. 르누아르도 이곳의 단골손님이었답니다. 르누아르뿐 아
니라 고흐, 로트레크 같은 유명 화가들도 이 무도장을 소재로 작품을
남길 만큼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는 곳이었지요.
르누아르는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해 거의 1년 반이나 매일 이곳을
드나들면서 스케치를 하고 습작을 그렸다고 해요. 화면 앞쪽에는 젊
은 남녀가 삼삼오오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그 뒤쪽으로 신사
숙녀가 쌍쌍이 어울려 흥겹게 춤을 추고 있어요. 초여름 햇살에 밝
게 빛나는 이들의 얼굴은 환희에 차 있어요. 르누아르는 “풍경을 그
릴 때는 누구나 그 속에서 산책을 하고 싶어지도록 그려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는데, 이 그림을 보면 정말로 그림 속으로 들어가 저들의
즐거운 대화와 행복한 축제 분위기에 함께 빠져들고 싶은 생각이 들
거예요. 하지만 밝고 화사한 무대 뒤편에는 어두운 역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답니다.
이 그림이 그려지기 불과 5년 전인 1871년, 파리의 민중들은 정부
에 대항하여 파리코뮌이라는 세계 최초의 노동자 민중 자치 정부를
세웠어요. 파리코뮌은 두어 달 만에 붕괴되면서 ‘피의 일주일’이라
불릴 만큼 엄청난 희생을 치렀지요. 파리코뮌 당시 지도부가 있던 곳
이 바로 이 무도회장이랍니다. 몽마르트르가 지형상 파리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기 때문에 요새 역할을 했던 것이지요. 자유와
평등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린 역사의 현장이 황홀하리만
큼 즐거운 축제의 무대로 바뀐 것이지요. 그러나 삶의 찬가로 빛나던
이 무도장도 얼마 못 가 옛 추억의 장소가 되고 말았어요. ‘물랭 루
주’ 같은 새로운 무도장과 카페가 들어서면서 인기를 빼앗겨 버렸던
것이랍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년) | 인상파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사람입니다. 프랑
스 리모주에서 가난한 양복쟁이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어릴 적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이자 부모는 열세 살에 그를 도자기 공장으로 보냈어요. 그곳에서 도자기에 그림
을 그리며 솜씨를 익혔지요. 모네, 피사로, 시슬레 같은 화가들과 어울리면서 밝은
빛을 화면 가득 담아낸 인상주의 화풍을 선보였어요.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인상파
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그림 세계를 개척해 나갔지요. 말
년에는 관절염 때문에 붓을 잡을 수 없게 되자, 팔에 붓을 묶은 채 그림을 그렸답
니다. 그는 한때 물감을 사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에 시달렸지만 평생 밝고 화사한
그림을 그렸어요. 그래서 슬픈 그림을 그린 적이 없는 유일한 거장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 별첨 사항: 이 글은 <새콤달콤한 세계명화 갤러리>(길벗어린이)에서 일부 발췌 수록한 것입니다.
글과 도판은 길벗어린이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싣는 것이며, 본 내용은 저작권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