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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맛의 품위 |
기름기 자르르 입 안서 탱글탱글 … 햅쌀로 지은 밥, 韓食의 시작과 끝 |
김화성 동아일보 여행·스포츠 전문기자 mars@donga.com |
‘맛있는 밥의 조건은 대체로 이렇다. 기름기 자르르 흐르고 촉촉한 물기가 배어 있어야 한다.
냄새를 맡았을 때 구수하고 달콤한 향이 나며, 입 안에 넣었을 때는 밥알이 낱낱이 살아 있음이 느껴지고, 혀로 밥알을 감았을 때 침이 고이면서 단맛이 더해지며, 살짝 씹을 때는 무르지도 단단하지도 않게 이 사이에서 기분 좋은 마찰을 일으켜야 한다.’(황교익의 ‘미각의 제국’에서)
밥맛(eating quality)은 누가 뭐래도 가을철 추수 직후가 으뜸이다. 햅쌀로 지은 밥이 살로 간다. 뜸이 잘 든 햅쌀밥은 밥만 먹어도 맛있다. 속이 든든해 배가 쉽게 꺼지지 않는다. 흰 사기그릇에 김이 펄펄 나는 하얀 고봉밥. 조상들은 그 ‘밥심’ 하나로 5000년 역사를 이어왔다.
왜 햅쌀밥은 맛이 있을까? 쌀은 찧고 나서 7일이 지나면 산화가 시작되고, 15일이 지나면 맛과 영양이 줄기 시작한다. 결국 정미한 후 15일 이내가 맛, 영양이 가장 우수하다. 그뿐인가. 쌀은 수분 함량이 16%일 때 맛이 최고다. 햅쌀처럼 갓 수확해 도정했을 때가 바로 수분 함량 16%다. 또 있다. 농사의 ‘農(농)’은 별 ‘辰(신)’ 자에 노래 ‘曲(곡)’ 자를 합친 말이다. 벼는 ‘별의 노래’를 들으며 자란다. 햅쌀은 가장 많이 ‘별의 노래’를 간직한다. 우주의 기운을 가장 많이 머금고 있다. 쌀은 햅쌀일수록 구수하고 차지다. 기름이 자르르하다. 오래되면 묵은내가 난다. 구수한 맛이 사라진다. 햅쌀은 늦가을 한철이다. 귀하다. 그렇다면 ‘갓 도정한 쌀’이 으뜸이다.
우주의 기운 가장 많이 머문 햅쌀
우리나라 쌀은 도정이 문제다. 도정은 정미소에서 벼를 찧어 쌀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백미를 만들려고 현미의 껍질을 깎아낸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수분이 줄어들어 쌀이 쉽게 깨지거나 금이 간다는 것이다. 백미 상태에서 흠 없는 쌀이 완전미(完全米)다. 쌀이 생긴 그대로의 모양을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다. 영양분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밥 색깔도 옥양목처럼 탐스러운 하얀색이다.
시중 싸전의 국산 쌀은 완전미 비율이 겨우 80%를 넘는다. 깨진 쌀, 금이 간 쌀, 낟알이 하얗거나 까만 점이 박힌 쌀, 상처가 남아 있는 쌀, 변질된 쌀, 부러진 쌀, 싸라기, 토막쌀, 덜 익은 쌀, 쌀눈(배아)이 원래 크기로 붙어 있지 않은 쌀이 적게는 10%에서 많게는 20%에 이른다. 미국산 캘로스쌀은 완전미가 99.75%, 일본 쌀은 90% 이상인 것과 비교해 한참 떨어진다.
흠이 간 쌀은 맛이 없다. 깨진 과일이 맛없는 것과 같다. 옆구리 터진 쌀로 지은 밥은 역시 맛도 옆구리가 터진다. 쌀이 깨지거나 금이 가 있으면 그 틈으로 전분과 냄새가 빠져나와 밥이 질척해지고 모양이 흐트러진다. 식혜처럼 푸석푸석해진다. 밥알 모양이 쉽게 흐트러진다. 끓을 때도 바그르르하고 찰기가 없다. 한마디로 흠이 간 쌀로 밥을 지으면 질척질척한 ‘밥풀’이 된다. 꼬들꼬들한 ‘밥알’의 완전미하고 질적으로 다르다. 완전미 밥알은 하나하나가 입에서 살아 뛰논다. 잇몸과 이빨 사이를 탱글탱글 넘나든다. 토막쌀로 지은 밥풀은 입 안 아무 데고 달라붙는다. 젖은 낙엽처럼 떨어질 줄 모른다. 질긴 밥풀때기다.
‘오늘 밥풀은 수저에서 떨어지지 않네/ 오늘 밥풀은 그릇에서 떨어지지 않네/ 오늘 밥그릇엔 초저녁 별을 빠뜨린 듯/ 먹어도 먹어도 비워지지 않는 환한 밥풀이 하나 있네/ 밥을 앞에 놓은 마음이 누룽지처럼 눌러앉네/ 떨그럭떨그럭 간장종지만 한 슬픔이 울고 또 우네/ 수저에 머물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이 저녁의 어둠’(이기인의 ‘밥풀’에서)
식당밥은 너나없이 밥알에 풀기가 없고 푸석푸석하다. 아침에 미리 담아놓은 밥이다. 더구나 대부분 묵은쌀로 지은 것이다. 스테인리스 그릇에 꾹꾹 눌러 담은 밥. 밥그릇에 식은땀이 주르르 흐른다. 밥뚜껑에 소름이 돋은, 맥 빠진 물방울들. 사람들은 그 밥을 아무 생각 없이 입에 꾸역꾸역 넣는다. 김빠진 밥, 풀 죽은 밥, 찰기라곤 하나도 없는 밥. 그런 밥이 몸에 들어가 무슨 도움이 될까.
섬 지역 식당에 가면 더한다. 밑반찬으로 나오는 해산물은 더없이 싱싱한데, 정작 기본인 밥맛이 못 따라간다. 예부터 쌀이 귀해서일까. 하지만 요즘은 섬에서도 얼마든지 좋은 쌀을 구할 수 있다. 어쩌면 밥 짓기에 습관적으로 무심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한식의 주인은 밥이다. 반찬은 밥을 살려주는 조연일 뿐이다.
잘 여문 벼가 쌀알도 좋다. 밥을 지으면 기름이 자르르 흐른다. 벼는 일교차가 클수록 잘 여문다. 벼가 영양을 덜 소모하기 때문이다. 수확하는 타이밍도 중요하다. 이삭이 100% 누렇게 될 때보다 약간 파릇한 기운이 있을 때 거둔 것이 맛있다.
반찬은 밥을 살려주는 조연
벼는 이삭이 맺히고 수확하기까지 약 두 달이 중요하다. 이때 주는 거름이 ‘이삭거름’이다. 대부분 질소비료를 뿌려준다. 이삭거름은 쌀 수확량을 늘리려고 주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늦게 주거나 많이 주면 벼가 웃자라 쌀맛이 없다. 쌀알에 단백질 함량이 많아진다. 쌀에 단백질 함량이 많을수록 밥이 딱딱해지고 찰기와 질감이 떨어진다. 우리나라는 일본보다 질소비료를 거의 3배나 준다. 국산 쌀의 단백질 함유량은 6~11%로 차이가 많다. 밥맛이 좋으려면 적어도 6.5% 이하가 돼야 한다.
일본은 어딜 가나 밥맛이 좋다. 하다못해 간이음식점 밥, 편의점도시락 밥도 한국의 웬만한 식당밥보다 낫다. 쌀이 한국보다 좋아서 그럴까. 아니면 밥 짓는 데 비법이라도 있는 것일까.
일본 대도시에는 즉석도정 전문점이 곳곳에 있다. 최대한 ‘갓 도정한 쌀’로 밥을 짓는 것이다. 일본 식당이나 가정에선 손님이 들이닥칠 시간이나 가족의 귀가시간에 맞춰서 밥을 짓는다. 갓 지은 밥이 맛있는 거야 두말할 필요 없다.
밥맛은 ‘쌀-물-불-솥’의 어우러짐에서 나온다. 그래야 뜸이 잘 든다. 뜸은 쌀이 골고루 잘 익게 하는 마지막 풀무질이다. 불땀이 있는 듯 없는 듯 은근하다. 솥 안의 쌀은 서로서로 껴안고 천천히 몸을 익힌다.
‘꽃을 피워 밥을 합니다/ 아궁이에 불 지피는 할머니/ 마른나무 목단, 작약이 핍니다/ 부지깽이에 할머니 눈 속에 홍매화 복사꽃 피었다 집니다/ 어느 마른 몸들이 밀어내는 힘이 저리도 뜨거울까요/ 만개한 꽃잎에 밥이 끓습니다/ 밥물이 넘쳐 또 이팝꽃 핍니다/ 안개꽃 자욱한 세상, 밥이 꽃을 피웁니다’(엄재국 ‘꽃밥’ 전문)
물은 적당히 부어야 한다. ‘적당한 물’은 오랜 경험에서 나온다. 보통 쌀 한 공기에 물 1.2공기가 적정량이다. 하지만 그건 쌀의 양이나 식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대한민국 어머니들은 식구 수에 따라 밥 짓는 쌀과 물의 양을 귀신같이 조절한다. 정작 어머니 혼자일 땐 그냥 찬밥으로 때운다.
불은 밥에 ‘맛을 불어넣는 기운’이다. 대장장이가 쇠를 달구듯 불을 다뤄야 한다. ‘센 불-중간 불-약한 불’로 지은 밥과 ‘약한 불-센 불-약한 불’로 지은 밥은 맛이 다르다. 가스불이냐, 장작불이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아무래도 장작불은 처음부터 센 불로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밥맛 좋은 집
△서울 인사동 입구의 일본식솥밥 조금(02-725-8400)
△서울 인사동 해물산채돌솥비빔밥 인사동큰집(02-734-3234)
△서울 평창동가나아트센터 앞 영양돌솥밥 강촌쌈밥(02-395-6467)
△서울 신문로 구세군회관 뒤 곤드레무쇠솥찹쌀밥 나무가 있는 집(02-737-3888)
△서울 홍대앞 굴돌솥밥 돌꽃(02-324-5894)
△서울 대치동 돌솥밥한정식 진미가(02-561-3223)
△충남 서산간월도 큰마을 영양곱돌솥밥(041-662-2706)
△경기 이천 가마솥이천쌀밥집(031-633-8818)
△이천 임금님쌀밥집(031-632-3646)
솥맛에 따라 밥맛 확 달라져
‘밥은 솥맛’이다. 어떤 솥을 쓰느냐에 따라 밥맛이 확 달라진다.
냄비 밥이냐 돌솥 밥이냐, 아니면 무쇠솥 밥이냐에 따라 밥알이 달리 익는다. 1809년 발간된 여성생활백과 ‘규합총서(閨閤叢書)’는 “밥과 죽은 돌솥이 으뜸이요, 오지탕관(질그릇에 잿물을 발라 구운 뚝배기)이 그 다음이다”라고 말한다. 1924년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이용만의 한국요리책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선 “밥은 곱돌솥이 으뜸이요, 오지탕관이 그 다음이요, 무쇠솥이 셋째다”라고 지적한다.
그렇다. 밥맛 좋기로 소문난 식당은 대부분 곱돌솥이나 무쇠솥을 쓴다. 간혹 내열 도자기솥, 수정원석솥, 1200℃에서 구워낸 천연유약옹기솥도 있지만 주류는 어디까지나 이 두 가지다.
무쇠솥이나 돌솥은 솥뚜껑이 무겁다. 밥이 끓을 때 김이 잘 새지 않는다. 강한 압력으로 쌀알을 속까지 빠르게 골고루 익힌다. 압력밥솥 뚜껑이 무거운 것도 바로 이들의 장점을 본뜬 것이다. 열이 서서히 고루 퍼진다. 쌀이 구석구석 잘 익는다는 말이다. 돌솥은 은근히 달궈지고 천천히 식는다.
무쇠솥은 밑바닥이 둥글게 나와 있다. 가운데는 가장자리보다 거의 두 배나 두껍다. 넓고 둥근 솥바닥 전체가 가열되면서 상하로 순환하는 대류현상이 솥 안에서 활발하게 발생한다. 열이 잘 퍼질 수밖에 없다. 쌀알을 고루 고슬고슬하게 익혀준다.
바닥에 누르스름하게 앉은 누룽지도 으뜸이다. 돌솥 누룽지보다 더 맛있다. 콩이나 보리, 기장, 조 등 잡곡을 넣은 누룽지는 맛있다 못해 황홀하다. 꼬들꼬들 바삭바삭 고소하다. 솥바닥에선 철분 성분까지 우러나온다. 곱돌솥도 열을 받으면 미네랄 성분과 원적외선을 방출해 영양소 파괴를 최소화한다.
“치이~ 치글치글~.” 무쇠솥에 그때그때 지어먹던 집밥. 하지만 이제 어머니가 해주던 꽃밥은 거의 없다. 전기밥솥이나 압력밥솥에서 울고 있는 보온밥이 있을 뿐이다. 회사원이 사먹는 점심이나 저녁은 말할 것도 없다. 아침밥을 건너뛰는 사람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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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 받아들이는 밥 한 술
밥은 한식의 처음이요 끝이다. 기본이다. 그림으로 말하면 하얀 도화지다. 반찬은 그 백지에 그려진 알록달록한 그림일 뿐이다. 백색은 모든 것을 받아들여 꽃을 피운다.
밥 한 톨, 밥 한 술, 밥 한 끼 제대로 먹기가 얼마나 힘든가. 밥풀때기라고 우습게 보다가는 큰일 난다. 밥 한 톨이 하늘이다. 온갖 정성을 다해 지어야 한다. 그리고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맛있게 먹어야 한다. 너무 싹싹 핥아서 반짝반짝 빛나는 개밥그릇은 ‘가부좌 튼 밥그릇 경전’(이덕규 시인)인 것이다.
밥술이라도 제대로 뜨려면 밥값을 해야 한다. 밥값을 하려면 간과 쓸개는 일찌감치 집에 놔둬야 한다. 강호에서 밥투정은 금물이다. 그러다간 밥숟갈 놓기 십상이다. 밥줄 끊어진다. 밥벌이의 고단함. 솥은 밥맛을 모른다. 하지만 솥은 밥맛을 살린다.
‘우주의 중심은 어디?/ 식탁 한가운데 오른 밥/ 천수답에 잠긴 하늘에서 건져 올린 달/ 어머니 물 항아리에서 건진 별/ 거울보다 더 환하게, 아프게/ 눈을 찌르는 무색무취의 빛// 고가도로를 과속으로 달려와, 밥/ 앞에 무릎을 꿇네/ 뜨겁게 서려오는 하얀 김/ 얼굴 붉어지네/ 밥이 무거운 법(法)이네’(김석환의 ‘밥이 법이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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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eekly.donga.com/docs/magazine/weekly/2010/09/20/201009200500011/201009200500011_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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