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전라남도 진도군의 세거성씨 중 하나.
[연원] 동복오씨(同福吳氏)는 고려 고종 때 거란을 토평(討平)한 공(功)으로 동복군(同福君)에 봉해진 오령(吳寧,․ 1151~1215)을 시조로 하고 동복(전라남도 화순군)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입향 경위] 오령의 19세손 오만국(吳萬國,․ 1597~1650)이 진도군 지산면 세방리에 자리잡았다. 오만국의 아버지 오계적(吳啓績, 1572~1597)은 전라남도 해남군 계곡면 용지리에 살았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오극신(吳克信, 1554~1597)과 더불어 정유재란에 참전했다가 순절했다. 오만국의 어머니는 연일정씨(延日鄭氏)이고 할머니는 광산김씨(光山金氏)로,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정씨는 진도군 세등리를 거쳐 세방리에 자리잡고 유복자 오만국을 낳았다.
[세거지 현황] 2006년 현재 동복오씨는 진도에 120가구가 살아 성 순위 22위이다. 진도에는 지산면 세방리와 임회면 중만리에 주로 살고 있다.
[집성촌 현황] 오만국의 큰아들 오명신(吳名伸) 집안은 신안군 도초면 우이도(牛耳島)로 옮겨가 살았고 오만국의 후손들은 세방리에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진도군 고군면 황조리, 진도군 임회면 중만리에도 후손들이 살고 있다.
[인물] 동복오씨의 대표적 인물은 오령의 손자 오대승(吳大陞)의 아들 오광례(吳光禮)의 10세손인 오억령(吳億齡), 오백령(吳百齡) 형제를 들 수 있다. 오억령은 대사헌을 5회, 형조판서를 3회 역임하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아우 오백령은 인조반정 후 형조참판에 기용되어 도승지․대사헌․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동복오씨의 후손은 거의 이들 형제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다.
동복오씨(同福吳氏)
◀ 묵재(默齋) 오백령(吳百齡)의 사우(祠宇) - 소재지 : 충남 공주시 우성면 단지리 285번지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유형 제7호) 동복(同福)은 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는 백제시대의 두부지현(豆夫只縣)인데 통일신라의 경덕왕(景德王) 때 동복현(同福縣)으로 개명하였고 고려초에는 보성에 편입시켰다가 후에 다시 설치하였다. 1394년(태조 3)에 화순(和順)에 편입시켰고, 1405년(태종 5)에 복순(福順)으로 개칭하였다가 1416년(태종 16)에는 현으로 복구하였고, 그 후 여러차례의 변천을 거쳐 지금은 동복면으로서 화순군(和順郡)에 편입되어 있다. 동복 오씨(同福吳氏)는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거란을 토평(討平)한 공(功)으로 동복군(同福君)에 봉해진 오 녕(吳 寧)을 시조(始祖)로 하고 동복(同福)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후 녕(寧)의 손자 대승(大陞)이 원종(元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시중(侍中)에 이르렀으며, 증손 광찰(光札)이 대장군(大將軍)을, 5세손 선(璿)이 판판도낭사(判版圖郎事)를 거쳐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했고, 6세손 잠(潛)이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거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귀성군(龜城君)에 봉해져 대대로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조선(朝鮮)에 와서는 세현(世賢)의 아들 억령(億齡)과 백령(百齡) 형제가 유명하였는데, 억령(億齡)은 선조(宣祖) 대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當)에 뽑히고 그후 대사헌(大司憲)을 5회, 형조판서(刑曹判書)를 3회나 역임하였으며, 관직생활 동안 근검·청렴하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고 문장(文章)과 서예(書藝)에 탁월한 재질(才質)이 있었다. 그의 동생 백령(百齡)도 선조(宣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광해군(光海君) 때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복천군(福川君)에 봉해지고 인조(仁祖) 때 도승지(都承旨)·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 참판(吏曹參判) ·대사성(大司成)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이들 형제의 후손들이 모두 현달(顯達)하여 가문(家門)을 번성시켰는데, 억령(億齡)의 세아들 익(翊 : 승지를 역임)·정(靖)·전(전 : 교리와 지평을 역임)이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한가(文翰家)로 이름을 날렸다. 뿐만 아니라 백령(百齡)의 맏아들 준(竣)이 효종(孝宗) 때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지춘추관사(知春秋官事)가 되어「인조실록(仁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했고, 그후 대사헌(大司憲)·좌참찬(左參贊)을 거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고 문장(文章)과 글씨에 능했으며, 둘째 아들 단(端)은 인평대군(麟平大君 : 효종의 동생)의 장인(丈人)으로 장령(掌令)·전주부윤(全州府尹)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단(端)의 아들 모두가 뛰어나 정일(挺一)은 인조(仁祖)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고 도승지(都承旨)로서 「효종실록(孝宗實錄)」 편찬에 참여한 후 각 도(道) 관찰사(觀察使)·이조 판서(吏曹判書)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으며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과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이르렀다. 정위(挺緯)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각 도(道) 관찰사(觀察使)와 각 조(曹)의 판서(判書)를 두루 역임하고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 갔으며, 정창(挺昌)은 지평(持平)·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였다. 또한 백령(百齡)의 증손들도 매두 뛰어나 정일(挺一)의 아들인 시만(始萬)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교리(校理)와 이조좌랑(吏曹佐郞)·승지(承旨) 등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올랐고, 정원(挺垣)의 아들 시수(始壽)가 현종(顯宗) 대 중시문과(重試文科)에 급제하여 수찬(修撰)·교리(校理)·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을 거쳐 남인(南人)의 거두(巨頭)로 우의정(右議政)을 지냈으며, 정규(挺奎)의 아들인 시복(始復)도 문과(文科)에 급제한 뒤 대사간(大司諫)과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으며 글씨에 능했다. 이외에도 광운(光運)은 대사헌(大司憲)·대사간(大司諫)을 거쳐 예조참판(禮曹參判) 등을 역임했으며, 대익(大익益)은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덕영(德泳)은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내었다.
항렬표(行列表)
世 25 26 27 28 29 30 31
항렬자 行列字 상 相 병·연 炳·然 재 在 용·탁 鏞·鐸 록 祿 병·근 秉·根 묵 默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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