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암 장편소설
<피안으로 가는 길>은 이승의 길이다
禹漢鎔 (wookong@snu.ac.kr)(서울대 명예교수)
홍성암 교수에게서 우편물이 왔다. 뽁뽁이 포장에 홍교수께서 친필로 주소를 썼는데 흔들림없는 작은 글씨가 정다웠다. 얼마 전에 <한송사의 숲>이라는 책을 받았는데, 또 책이 배달되어 와서, 이 어른 참 필력도 왕성하구나 하면서 피봉을 열어보았다.
호수인지 강인지 물이 있고, 그 물가로 길이 그려진 아주 소박한 그림 위에 <피안으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이 나오고 그 제목 밑에 ‘홍성암 지음’이라고 되어 있어서, 생애를 정리하는 ‘수상집’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소설이라는 것은 ‘작가의 말’을 읽고서야 비로소 알았다. 우주 속에 미미한 존재인 인간의 한계, 우연과 운명에 시달리는 나약한 인간 존재의 본질을 살핀 후, ‘종교야 말로 인간 구원을 위한 마지막 희망’이라는 점도 생각해 보았다고 덤덤하게 적어놓는 걸로 마무리된 글이었다. 그런데 소설에서 피안, 이게 가능할까 하다가 다시 보니 ‘종교 이전의 인간관계.... 그게 종교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는 작가의 입장을 확인했다. 소설로서는 그렇게 다루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책을 덮고 ‘피안’을 다루는 소설이라니! 잠시 고개를 들어 책상 맞은편 서가를 바라보았다. <신>이란 제목이 책등에 검은 활자로 박힌 책이 보였다. 불교에서 해탈의 경지가 ‘피안’이라면 서양식으로는 ‘신의 추구’ 그 구경이 피안이 아닌가 싶었다. 소설로 피안이라는 세계를 다룰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의문은 본문을 펼쳐 읽고 싶은 의욕으로 피어났다. 한편 나의 소설적 화두는 무엇인가를 잠시 생각했다.
며칠 전 장편소설 <악어> 원고를 출판사에 넘긴 뒤였다. <악어>는 폭력을 다룬 소설이라서, 그것도 8년 넘겨 붙들고 씨름하던 것인 터라 내 머릿속이 온통 폭력적인 어휘로 들끓고 있었다. 정리를 좀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그래서 ‘인간 성장’ 문제를 소설로 다루고 싶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순교’를 다루는 소설을 구상하기도 했다.
작가로서 홍성암 교수는 생애주기 맞는 소설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속에 묻혀 사는 중에도 얼마간 자각이 있으면 생애 끝무렵에는 윤리와 성스러움 인간의 존엄 그런 문제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잡답雜沓과 훤소喧騷로 가득한 인환人寰의 풍진風塵 세상에서 ‘피안’을 추구하는 것, 생각만 해도 훤칠한 인격이 아니면 덤비지 못할 일이 아닌가. 홍교수께서 생애주기에 맞는 과업을 착실히 수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부럽기도 했다.
소설의 제목은 독자가 소설을 읽는 일종의 ‘비평적 가정’을 세워준다. <피안으로 가는 길>의 피안彼岸은 그렇게 어려운 말이 아니다. 이승이 차안此岸 피안은 저승, 따라서 내세를 뜻한다. 여기에서 바라보는 저건너편, 즉 대안對岸을 의미한다. 강자의 도덕에 대한 ‘노예의 도덕’이 현대 도덕의 연원이라고 설파한 니체의 <선악의 피안>은 ‘선과 악으로부터 벗어난 저쪽’이라는 뜻이다. 이는 독일어 Jenseits von Gut und Böse를 번역한 것인데, 그 말 자체가 아예 하나의 숙어로 되어 있다.
피안이란 말이 불교적으로 윤색되어 뜻을 어림잡아보기 어려운 부대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뭐랄까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지경을 뜻하는 현요眩耀한 분위기를 지니게 된 것. 그래서 도피안사到彼岸寺라는 이름을 붙인 사찰이 있을 정도이다. 피안의 이러한 의미확장은 세속을 살아가는 일반인에게는 실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해서 ‘색즉시공 공즉시색.... 오온개공’이라는 설명이 어려운 말은 ‘공수래공수거’로 전환되어 입맛대로 해석하곤 한다. 하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주장이 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빈손과 비손 사이를 의미로 채워야 한다는 도덕적 주의를 표방하는 쪽으로 가기도 한다. 진의는 다른 데 있는 듯하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게 인생인데, 인생은 구름과 같아서 모이고 흩어짐을 따라 실체는 자취를 감춘다. 그런데 “오직 하나의 존재만이 늘 홀로 드러나 즐거이 생과 사를 벗어난다.” 獨一物常獨露 湛然不隨於生死 그 하나의 존재라는 게 무엇인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단지 부처를 뜻한다고 하지 말고 자신을 잘 닦은 ‘자유인’ 혹은 ‘달인-위버멘쉬’을 생각해 볼 수 있을 듯하다. 공수래공수거라지만 나를 잘 닦으면, 대자유인으로 존재의 초월을 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자력신앙을 강조하는 불교적 발상이 마음에 끌리는 대목이었다. 일체중생 실유불성 一切衆生悉有佛性(p.78)이라면, 내 안의 ‘불성’은 무엇인가.
보내준 책은 읽지 않고 해찰을 거듭하는 게 낡은 먹물의 우스운 짓이란 걸 내가 왜 모르랴. 책을 열고 읽자니 첫 줄이 무당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이었다. 작중인물 필녀가 신수점을 보는데, 일년 못 살고 죽을 운이라는 것. 점괘가 귀신같아서 필녀는 병을 앓게 되고 잊고 있던 고향을 찾아가 자기 가족의 내력을 알게 되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자기 집안이 무속신앙과 불교적 연기가 겹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어느 교회의 전도사로 일하는 남편의 기독교와 신앙적 갈등이 빚어지나 아내의 생명이 무엇보다 귀하다는 쪽으로 사안이 기울어진다. 고향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필녀의 동생 필수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는 천주교 신부가 되어 백령도에 근무하는 걸로 설정되어 있다.
백령도는 특수한 지정학적 위치로 해서 여러 종교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여건이다. 가톨릭, 개신교, 그리고 불사를 시도하는 이가 있어서 불교가 종교적 복합성을 드러낸다. 더구나 북한과 오가는 거점 지역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남북문제를 연계하는 의미통로가 되기도 한다. 탈북자 이야기를 전개하는 시발점 역할을 할 여건이 갖추어진 것이다. 그리고 북한이라는 피안 -이승에서 보면 지옥 또한 피안의 한 구역이다- 과 오갈 수 있는 통로로 압록강 연안도시 단동(丹東)을 설정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이 소설의 후반부는 백령도를 중심으로 신앙의 문제가 일부 제기되면서 복잡한 인간관계가 풀린다. 물론 작중인물들의 이동에 따라 지방색과 그곳 풍정이 운치있게 묘사, 서술된다.
그 복잡한 인간관계를 일일이 설명하는 것은 소설을 읽는 이들에게 김을 빼는 ‘스포일러’ 역할을 할 듯하다. 한 이 소설의 인간관계는 매우 복잡하다. 그리고 인간관계가 이루어지는 지역- 소설의 지리적 공간도 매우 넓다. 이를 요약 정리하는 일은 독자의 몫일 터. 목숨을 내놓고 살아야 하는, 지독한 모순에 처한 작중인물들의 삶의 과정 가운데 종교문제가 에피소드처럼 개입하고, 사건을 추동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는 소설가의 소설적 거리유지에 기여한다. 무교의 신열神悅-엑스타시이라든지, 불교의 선정삼매禪定三昧의 경지라든지, 기도 가운데 확인되는 성령의 은혜 같은 기독교적 이적의 체험 등은 단편적으로 분산 처리되어 있다. 어떤 데서는 역사소설 이미지가 부각되기도 하고, 다른 데서는 ‘분단소설’ 모티프가 두드러지기도 한다. 이는 작가가 상정하는 ‘피안’의 개념이 초월적이 아니라 한정적이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근대소설의 심리구조는 근대사회의 구조와 일치한다는 점을 밝힌 르네 지라르는 탁월한 소설론을 전개한 걸로 보인다. 근대인의 심리가 모방적으로 구축되고, 그 모방은 주체와 객체의 상호전환을 가능하게 한다는 이론은 설득력이 있다. 꼭 그런 이론과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피안이라는 것은 상호 전환 가능성을 보여준다. 탈북자에게는 남한이이 피안이다. “당은 위대한 거란다. .... 이성을 가지고 대해야만 하는 신성한 것이기도 한”(246-247) 대상으로 승화되어 있는 사회에서 무한자유를 꿈꾸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그런데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만들어갈 수 있는 사회”(258)가 있다는 것, 그것은 피안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밖에 없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근원적인 가능성일 뿐이지 현실적으로는 “과연 남한은 그런 곳일까?”(259) 하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남한에 “김일성 주체사상을 숭배하는 사람도 제법”(259) 있다는 점을 들어 설명하면서 “먹고 사는 것이 첫째여서 이념은 개인적 취향 정도로 가볍게 여기는”(259) 상황을 설명한다. 지적 통제하에 소설적 거리유지를 하고 있는 작가의 편향되지 않은 시각을 엿볼 수 있는 점이다.
결국 피안은 인간이 살아가는 힘을 추동하는 일종의 정신지표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다면 피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는 ‘유토피아’ 본래의 의미인 존재하지 않는 땅이란 데에 이르게 된다. 이 소설의 마지막이 시인 백석의 향토 이미지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소설가가 백석의 시를 소설 본문에 산문으로 풀어 넣은 데는 까닭이 있다. 작중인물 이규씨가 정주, 오산에 지역연고를 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중인물의 고향이 시인 백석의 고향과 일치한다는 문화적 코드가 백석의 시적정서와 상통한다. ‘종교의 근원’으로 보는 ‘인간적 도리’인 인간관계의 섬세함을 백석만큼 면밀하게 형상화한 다른 시인이 안 떠오른다. 특히 배백석의 ’여우난골族‘은 어린 시절 고향의 추억 속에 인간관계가 얼마나 섬세하게 그려져 있는가. 문장의 족보를 안 밝힌 것은 다른 기회에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거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소설 본문에다가 “누구든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실현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면 마침내는 이루어진다”(300)든지, “생각이 있으면 길이 열린다.”고 써 넣는 것은 긴장이 이완된 걸로 보인다. 혹은 소설을 급히 끝내야 하는 어떤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작중인물의 생각을 작가가 쓴 것이지만.
종교를 화제로 삼되 종교현상에 매몰하지 않고 현실에 뿌리를 두고 소설을 구상한 것은 건실한 작가정신의 발로라고 해야 할 터. 그렇게 처리한 결과 ‘피안’은 세속의 길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느낌을 짐져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피안으로 가는 길>은 문장이 시원시원하고, 감정동사 서술을 과감하게 사용하여 잘 읽힌다. 사건이 다양하게 전개되는 소설에서 과도하게 섬세한 문체는 소설독서의 속도를 장애한다. 그런데 읽으면서 틀렸다고 표시를 해야 하는 데가 여러 군데다. 읽어나가다가 멈추게 된다. 정확한 언어를 구사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작가의 책임이지만, 출판사의 역할 또한 그저 넘길 수 없다. 문장을 바로잡고 필기 오류를 정정해 주는 것은 출판사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오늘이 2020년 6월 4일이다. 오늘도 코로나바이러스19 신규확진자가 39면이나 된다. 전체 사망자는 273명이 된다. 그 273명 가운데 내가 안 끼었다는 건 기적이다. 그 기적 가운데 <피안으로 가는 길>을 읽으며 전염병 걱정 잠시 잊었던 것은 문학의 힘이다. 그런데 조지 플로이드가 목을 졸린 채 체포되었다가 사망했다는 뉴스에 이어, 세계에서 인종차별 폐지를 위한 시위가 들끓어 퍼지고 있다고 텔레비전 뉴스가 전한다. 미국교포의 가게가 약탈을 당했다는 뉴스 가운데 인명피해는 없다고...., 그런데 유색인종 차별 문제로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같은 데서 시위가 점점 악화되고 있다고 전한다. 우리들의 ‘피안’이 ‘궁즉통’이란 담방약으로 열릴 것인가. 이승의 길이 곧 피안의 길이라고 하던 생각에 스스로 고개를 흔들어야 하는 오늘, 나는 개양귀비 어지러운 밭으로 인동꽃 냄새를 맡으러 갈 작정이다. 다른 일들은 잠시 내려놓기로 한다. 내가 가는 상림원桑林苑이 나의 피안避岸?일지도 모르겠다. 대책 없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