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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倦怠)
-이상
● 작품 전문
1
어서 차라리 어둬 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는데― 벽촌(僻村)의 여름날은 지리해서 죽겠을 만치 길다. 동(東)에 팔봉산(八峯山), 곡선은 왜 저리도 굴곡이 없이 단조로운고? 서를 보아도 벌판, 남을 보아도 벌판, 북을 보아도 벌판, 아―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 놓였을고?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 먹었노?
농가(農家)가 가운데 길 하나를 두고 좌우로 한 10여 호씩 있다. 휘청거린 소나무 기둥, 흙을 주물러 바른 벽, 강낭대로 둘러싼 울타리, 울타리를 덮은 호박 넝쿨, 모두가 그게 그것같이 똑같다. 어제 보던 댑싸리나무, 오늘도 보는 김 서방, 내일도 보아야 할 흰둥이, 검둥이.
해는 백도(百度) 가까운 볕을 지붕에도, 벌판에도, 뽕나무에도, 암탉 꼬랑지에도 내려 쪼인다. 아침이나 저녁녘이나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는 염서(炎署)가 계속된다.
나는 아침을 먹었다. 할 일이 없다. 그러나 무작정 널따란 백지 같은 '오늘'이라는 것이 내 앞에 펼쳐져 있으면서 무슨 기사(記事)라도 좋으니 강요한다. 나는 무엇이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연구해야 된다. 그럼―나는 최 서방네 집 사랑 툇마루로 장기나 두러 갈까. 그것 좋다.
최 서방은 들에 나갔다. 최 서방네 사랑에는 아무도 없나 보다. 최 서방의 조카가 낮잠을 잔다. 아하, 내가 아침을 먹은 것은 열 시나 지난 후니까 최 서방의 조카로서는 낮잠 잘 시간에 틀림없다.
나는 최 서방의 조카를 깨워 가지고 장기를 한 판 벌이기로 한다. 최 서방의 조카로서는 그러니까 나와 장기 두는 것 그것부터가 권태(倦怠)다. 밤낮 두어야 마찬가질 바에는 안 두는 것이 차라리 나았지― 그러나 안 두면 또 무엇을 하나? 둘 밖에 없다. 지는 것도 권태어늘 이기는 것이 어찌 권태 아닐 수 있으랴? 열 번 두어서 열 번 내리 이기는 장난이란 열 번 지는 이상으로 싱거운 장난이다. 나는 참 싱거워서 견딜 수 없다.
한 번쯤 져 주리라. 나는 한참 생각하는 체하다가 슬그머니 위험한 자리에 장기 조각을 갖다 놓는다. 최 서방의 조카는 하품을 쓱 한 번 하더니 이윽고 둔다는 것이 딴전이다. 으레 질 것이니까 골치 아프게 수를 보고 어쩌고 하기도 싫다는 사상이리라.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장기를 갖다 놓고는 그저 얼른 끝을 내어 져 줄 만큼 져 주면 상승 장군(常勝將軍)은 이 압도적 권태를 이기지 못해 제물에 가 버리겠지 하는 사상(思想)이리라. 가고 나면 또 낮잠이나 잘 작정이리라.
나는 부득이 또 이긴다. 이제 그만 두잔다. 물론 그만 두는 수밖에 없다. 일부러 져 준다는 것조차가 어려운 일이다. 나는 왜 저 최 서방의 조카처럼 아주 영영 방심 상태가 되어 버릴 수가 없나? 이 질식한 것 같은 권태 속에서도 자세한 승부(勝負)에 구속을 받나? 아주 바보가 되는 수는 없나? 내게 남아 있는 이 치사스러운 인간 이욕(人間利慾)이 다시 없이 밉다. 나는 이 마지막 것을 면해야 한다. 권태를 인식하는 신경(神經)마저 버리고 완전히 허탈(虛脫)해 버려야 한다. <조선일보(朝鮮日報), 1937. 5.>
2
나는 개울가로 간다. 가물로 하여 너무나 빈약한 물이 소리 없이 흐른다. 뼈처럼 앙상한 물줄기가 왜 소리를 치지 않나?
너무 더웁다. 나뭇잎들이 축 늘어져서 허덕허덕하도록 더웁다. 이렇게 더우니 시냇물인들 서늘한 소리를 내어 보는 재간도 없으리라.
나는 그 물가에 앉는다. 앉아서 자─무슨 제목으로 나는 사색해야 할 것인가 생각해 본다. 그러나 물론 아무런 제목도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생각 말기로 하자. 그저 한량없이 넑은 초록색 벌판, 지평선, 아무리 변화하여 보았댔자 결국 치열한 곡예의 역을 벗어나지 않는 구름, 이런 것을 건너다본다.
지구 표면적의 백분의 99가 이 공포의 초록색이리라. 그렇다면 지구야말로 너무나 단조무미한 채색이다. 도회에는 초록이 드물다. 나는 처음 여기 표착하였을 때 이 신선한 초록빛에 놀랐고 사랑하였다. 그러나 닷새가 못 되어서 일망무제의 초록색은 조물주의 몰취미와 신경의 조잡성으로 말미암은 무미건조한 지구의 여백인 것을 발견하고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작정으로 저렇게 퍼러냐. 하루 온종일 저 푸른빛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오직 그 푸른 것에 백치와 같이 만족하면서 푸른 채로 있다.
이윽고 밤이 오면 또 거대한 구렁이처럼 빛을 잃어버리고 소리도 없이 잔다. 이 무슨 거대한 겸손이냐.
이윽고 겨울이 오면 초록은 실색(失色)한다. 그것은 남루(襤褸)를 갈기갈기 찢은 것과 다름없는 추악한 색채로 변하는 것이다. 한겨울을 두고 이 황막하고 추악한 벌판을 바라보고 지내면서 그래도 자살민절하지 않는 농민들은 불쌍하기도 하려니와 거대한 천치다.
그들의 일생이 또한 이 벌판처럼 단조한 권태 일색으로 도포된 것이리라. 일할 때는 초록 벌판처럼 더워서 숨이 칵칵 막히게 싱거울 것이요, 일하지 않을 때에는 겨울 황원처럼 거칠고 구지레하고 싱거울 것이다. 그들에게는 흥분이 없다. 벌판에 벼락이 떨어져도 그것은 뇌성 끝에 가끔 있는 다반사에 지나지 않는다. 촌동이 범에게 물려 가도 그것은 맹수가 사는 산촌에 가끔 있는 신벌(神罰)에 지나지 않는다. 실로 전신주 하나 없는 벌판에서 그들이 무엇을 대상으로 흥분할 수 있으랴.
팔봉산 들을 너머 철골 전선주가 늘어섰다. 그러나 그 동선(銅線)은 이 촌락에 엽서 한 장을 내려뜨리지 않고 섰는 채다. 동선으로는 전류도 통하리라. 그러나 그들의 방이 아직도 송명으로 어둠침침한 이상 그 전신주들은 이 마을 동구에 늘어선 포플러나무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들에게 희망이 있던가? 가을에 곡식이 익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희망은 아니다. 본능이다. 내일, 내일도 오늘 하던 계속의 일을 해야지. 이 끝없는 권태의 내일은 왜 이렇게 끝없이 있나? 그러나 그들은 그런 것을 생각할 줄 모른다. 간혹 그런 의혹이 전광과 같이 그들의 흉리를 스치는 일이 있어도 다음 순간 하루의 노역으로 말미암아 잠이 오고 만다. 그러니 농민은 참 불행하도다. 그럼─이 흉악한 권태를 자각할 줄 아는 나는 얼마나
5
원숭이가 사람의 흉내를 내이는 것이 내 눈에는 참 밉다. 어쩌자고 여기 아이들이 내 흉내를 내이는 것일까? 귀여운 촌동(村童)들을 원숭이이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나는 다시 개울가로 가 본다. 썩은 물 늘어진 대싸리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나는 거기 앉아서 이번에는 그 썩은 중(中)의 웅덩이 속을 들여다본다. 순간 나는 진기한 현상을 목도(目睹)한다. 무수한 오점이 방향을 정돈해 가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생물임에 틀림없다. 송사리 떼임에 틀림없다.
이 부패한 소택(沼澤) 속에 이런 앙증스러운 어족이 서식하리라고는 나는 참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요리 몰리고 저리 몰리고 역시 먹을 것을 찾음이리라. 무엇을 먹고 사누. 버러지를 먹겠지. 송사리보다도 더 작은 버러지라는 것이 있을까. 잠시를 가만있지 않는다. 저물도록 움직인다. 대략 같은 동기(動機)와 같은 모양으로들 그러는 것 같다. 동기! 역시 송사리의 세계에서도 시급한 목적이 있는 모양이다.
차츰차츰 하류를 향하여 군중적으로 이동한다. 저렇게 하류로 하류로만 가다가 또 어쩔 작정인가. 아니 그들은 중도에서 또 상류를 향하여 거슬러 올라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장 하류로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하류로 하류로!
5분 후에는 그들의 모양이 보이지 않을 만치 그들은 멀리 하류로 내려갔다. 그리고 웅뎅이는, 아까와 같이 도로 썩은 물의 웅뎅이로 조용해지고 말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풀밭으로 가 보기로 한다. 풀밭에는 암소 한 마리가 있다.
고 웅덩이 속에 고런 맹랑한 현상이 잠복해 있을 수 있다니─하고 나는 적잖이 흥분했다. 그 현상도 소낙비처럼 지나가고 말았으니 잊어버리고 그만두는 수밖에.
소의 뿔은 벌써 소의 무기는 아니다. 소의 뿔은 오직 안경의 재료일 따름이다. 소는 사람에게 얻어맞기로 위주니까 소에게는 무기가 필요 없다. 소의 뿔은 오직 동물학자를 위한 표지(標識)이다. 야우(野牛) 시대에는 이것으로 적을 돌격한 일도 있습니다─하는 마치 폐병(廢兵)의 가슴에 달린 훈장처럼 그 추억성이 애상적이다.
암소의 뿔은 수소의 그것보다도 더 한층 겸허하다. 이 애상적인 뿔이 나를 받을 리 없으니 나는 마음놓고 그 곁 풀밭에 가 누워도 좋다. 나는 누워서 우선 소를 본다.
소는 잠시 반추(反芻)를 그치고 나를 응시한다.
‘이 사람의 얼굴이 왜 이리 창백하냐. 아마 병인인가 보다. 내 생명에 위해(危害)를 가하려는 거나 아닌지 나는 조심해야 되지’
이렇게 소는 속으로 나를 심리(審理)하였으리라. 그러나 5분 후에는 다시 반추를 계속하였다. 소보다도 내가 마음을 놓는다.
소는 식욕의 즐거움조차를 냉대할 수 있는 지상 최대의 권태자다. 얼마나 권태에 질렸길래, 이미 위에 들어간 식물을 다시 게워 그 시금털털한 반소화물의 미각을 역설적으로 향락하는 체 해 보임이리오?
소의 체구가 크면 클수록 그의 권태도 크고 슬프다. 나는 소 앞에 누워 내 세균같이 사소한 고독을 겸손해하면서 나도 사색의 반추가 가능할는지 몰래 좀 생각해 본다.
6
길 복판에서 6,7인의 아이들이 놀고 있다. 적발동부의 반나체이다. 그들의 혼탁한 안색, 흘린 콧물, 둘른 베, 두렝이 벗은 웃통만을 가지고는 그들의 성별조차 거의 분간할 수 없다.. 그러나그들은 여아가 아니면 남아요,암아가 아니면 여아인 결국에는 귀여운 5,6세 내지 7,8세의 '이이들'임에도 틀림없다. 이 아이들이 여기 길 한복판을 선택하여 유희하고 있다.
돌멩이를 주워 온다. 여기는 사금파리도 벽돌 조각도 없다. 이 빠진 그릇을 여기 사람들은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는 풀을 뜯어 온다. 풀─이처럼 평범한 것이 또 있을까. 그들에게 있어서는 초록빛의 물건이란 어떤 것이고간에 다시없이 심심한 것이다. 그러나 하는 수 없다. 곡식을 뜯는 것도 금제니까 풀밭에 없다.
돌멩이로 풀을 짓찧는다. 푸르스레한 물이 돌에 가 염색된다. 그러면 그 돌과 그 풀을 팽개치고 또 다른 풀과 돌멩이를 가져다가 똑같은 짓을 반복한다. 한 10분 동안이나 아무 말이 없이 잠자코 이렇게 놀아 본다.
10분만이면 권태가 온다. 풀도 싱겁고 돌도 싱겁다. 그러면 그 외에 무엇이 있나? 없다.
그들은 일제히 일어선다. 질서도 없고 충도의 재료도 없다. 다만 그저 앉았기 싫으니까 이번에는 일어서 보았을 뿐이다.
일어서서 두 팔을 높이 하늘을 향하여 쳐든다. 그리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 본다. 그러더니 그냥 그 자리에서들 겅충겅충 뛴다. 그러면서 그 비명을 겸한다.
나는 이 광경을 보고 그만 눈물이 났다. 여북하면 저렇게 놀까. 이들은 놀 줄조차 모른다. 어버이들은 너무 가난해서 이들 귀여운 애기들에게 장난감을 사다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뻗치고 그리고 소리를 지르면서 뛰는 그들의 유희가 내 눈에는 암만 해도 유희같이 생각되지 않는다. 하늘은 왜 저렇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푸르냐, 산은, 벌판은 왜 저렇게 어제도 오늘도 푸르냐는 조물주에게 대한 저주의 비명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이들은 짖을 줄조차 모르는 개들과 놀 수는 없다. 그렇다고 모이 찾느라고 눈이 벌건 닭들과 놀 수도 없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너무나 바쁘다. 언니 오빠조차 바쁘다. 역시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노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놀아야 하나, 그들에게는, 장난감 하나 없는 그들에게는 영영 엄두가 나서지를 않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듯 불행하다.
그 짓도 5분이다. 그 이상 더 길게 이 짓을 하자면 그들은 피로할 것이다. 순진한 그들이 무슨 까닭에 피로해야 되나? 그들은 위선 싱거워서 그짓을 그만둔다.
그들은 도로 나란히 앉는다. 앉아서 소리가 없다. 무엇을 하나. 무슨 종류의 유희인지 유희는 유희인 모양인데─이 권태의 왜소인간들은 또 무슨 기상천외의 유희를 발명했나. 5분 후에 그들은 비키면서 하나씩 둘씩 일어선다. 제각각 대변을 한 무데기씩 누어 놓았다. 아─이것도 역시 그들의 유희였다. 속수무책의 그들 최후의 창작 유희였다. 그러나 그 중 한 아이가 영 일어나지를 않는다. 그는 대변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 그는 이번 유희의 못난 낙오자임에 틀림없다. 분명히 다른 아이들 눈에 조소의 빛이 보인다. 아─조물주여, 이들을 위하여 풍경과 완구를 주소서.
7
날이 어두웠다. 해저와 같은 밤이오는 것이다. 나는 자못 이상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배가 고픈 모양이다. 이것이 정말이라면 그럼 나는 어째서 배가 고픈가. 무엇을 했다고 배가 고픈가. 자기 부패 작용이나 하고 있는 웅뎅이 속을 실로 송사리 떼가 쏘다니고 있더라. 그럼 내 장부 속으로도 나로서 자각할 수 없는 송사리떼가 준동하고 있나 보다. 아무렇든 나는 밥을 아니 먹을 수는 없다.
밥상에는 마늘장아찌와 날된장과 풋고추 조림이 관성의 법칙처럼 놓여있다. 그러나 먹을 때마다 이 음식이 내 입에 내 혀에 다르다. 그러나 나는 그 까닭을 설명할 수 없다.
마당에서 밥을 먹으면 머리 위에서 그 무수한 별들이 야단이다. 저것은 또 어쩌라는 것인가. 내게는 별이 천문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시상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향기도 촉감도 없는 절대 권태의 도달할 수 없는 영원한 피안이다. 별조차가 이렇게 싱겁다.
저녁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보면 집집에서는 모깃불의 연기가 한창이다.
그들은 마당에서 멍석을 펴고 잔다. 별을 쳐다보면서 잔다. 그러나 그들은 별을 보지 않는다. 그 증거로는 그들은 멍석에 눕자마자 눈을 감는다. 그리고는 누을 감자마자 쿨쿨 잠이 든다. 별은 그들과 관계없다.
나는 소화를 촉진시키느라고 길을 왔다갔다한다. 돌칠 적마다 멍석 위에 누운 사람의 수가 늘어 간다. 이것이 시체와 무엇이 다를까? 먹고 잘 줄 아는 시체─나는 이런 실례로운 생각을 정지해야만 되겠다. 그리고 나도 가서 자야겠다.
방에 돌아와 나는 나를 살펴본다. 모든 것에서 절연된 지금의 내 생활─자살의 단서조차 찾을 길이 없는 지금의 내 생활은 과연 권태의 극권태 그것이다. 그렇건만 내일이라는 것이 있다. 다시는 날이 새이지 않는 것 같기도 한 밤 저 쪽에 또 내일이라는 놈이 한 개 버티고 서 있다. 마치 흉맹한 형리처럼─나는 그 형리를 피할 수 없다. 오늘이 되어 버린 내일 속에서 또 나는 질식할 만치 심심해야 되고 기막힐 만치 답답해해야 된다. 그럼 오늘 하루를 나는 어떻게 지냈던가. 이런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냥 자자! 자다가 불행히─아니 다행히 또 깨거든 최 서방의 조카와 장기나 한 판 두자. 웅뎅이에 가서 송사리를 볼 수도 있고─몇 가지 안 남은 기억을 소처럼 반추하면서 끝없는 나태를 즐기는 방법도 있지 않으냐.
불나비가 달려들어 불을 끈다. 불나비는 죽었든지 화상을 입었으리라. 그러나 불나비라는 놈은 사는 방법을 아는 놈이다. 불을 보면 뛰어들 줄도 알고─평상에 불을 초조히 찾아다닐 줄도 아는 정열의 생물이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 어디 불을 찾으려는 정열이 있으며 뛰어들 불이 있느냐. 없다.나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암흑은 암흑인 이상 이 좁은 방 것이나 우주에 꽉 찬 것이나 분량상 차이가 없으리라. 나는 이 대소 없는 암흑 가운데 누워서 숨쉴 것도 어루만질 것도 또 욕심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다만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지 모르는 내일 그것이 또 창밖에 등대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다.
● 핵심정리
▶성격 : 지적(知的), 사념적(思念的), 심리적(心理的)
▶구성 : 순행적 구성
▶문체 : 만연체
▶특징 : ①심리묘사를 통해 의식의 흐름을 표현
②작자의 심리적 상태를 통해 자연이나 대상을 재해석
▶갈래 : 경수필
▶경향 : 초현실주의적 경향
▶제재 : 여름날 벽촌에서의 생활
▶주제 : 무의미한 생활의 반복에서 오는 권태
▶출전 : '조선일보(1937)'
● 이해와 감상
인간 이상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그의 수필이다. 글의 구성은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동안의 일과로 그가 보고 느낀 것이 7장으로 나뉘어 기술되고 있다. 지금 이상이 가 있는 곳은 평남 성천의 한 벽촌이다. 이상이 보는 세상은 여느 사람이 보는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녹음 속에서, 모깃불을 피워 놓은 농부들의 한가 속에서, 고요한 물웅덩이를 들여다보며, 소를 보며, 옷 벗은 시골아이를 보며, 멍석 위에서 이상이 느끼는 감회는 도대체 보통의 도회지 사람들이 느낄만한 정서와는 썩 다르다. 평화도 아니고 한가도 아니고 그에게는 모든 것이 오직 권태로만 보인다. 노동에 지쳐 눕자마자 잠이 든 농부들에게서 느끼는 감정도 시체와도 같은 권태이다. 햇볕 아래 건강한 개들의 교미도 권태이고, 아이들의 놀이도 권태이고 세수조차도 권태이다. 자동차가 질주하고 상인들의 외침이 드높은 곳에 이상을 옮겨놓았다 하더라도 그는 견디기 어려운 권태를 느꼈으리라.
이렇게나 주관적으로 사물을 인식하고 자의식으로 뭉쳐진 내면세계를 가졌던 이상이 요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독자는 이 글을 읽으면서 필자의 눈곁에 자신의 눈을 두어 둘의 시각이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보면 흥미로울 것이다. 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은 대체로 이런 자의식 과잉의 경향이 있었다. 짧은 문장, 살아있는 것 자체를 대수롭잖게 여기는 듯 내팽개치듯 한 어조, 날카로운 통찰, 이 짧은 수필 한편 만으로도 이상이 천재라는 것을 인정치 않을 수 없는 섬광이 들어 있는 글이다.
이 작품의 핵심은 상황과 의식의 갈등에 있다. 모든 것이 일상적인 관습으로 가라앉아 있는 세계 안에 홀로 서서 작자는 자신이 접하는 하나하나의 사물과 행위의 의미를 묻는다. 그러나 그가 확인하게 되는 것은 참다운 의미의 확인 없이 되풀이되는 관습의 반복일 뿐이다.
여기에서 그는 참을 수 없는 권태는 자각적 선택과 행동에 의한 삶을 희구하면서 그러한 이상과는 동떨어진 상황 속에 무기력하게 머물러 있는 한 지식인의 심리적 자화상에 해당된다.
● 연구문제
1. 이 글에 나타난 '권태'의 의미는 무엇인가?
▶의미 없는 일상의 반복
2. 7장에서 필자가 권태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정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