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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시대
상(商.BC 1711~1066), 주(周.BC 1066~256)시대부터 운남에 살던 복족 사람들은 차를 심었고 차 잎을 생산 제다 하였는데 이것이 보이차에 대한 시초이다. 문헌에는 복족 사람들이 상왕(商王)에게 작은 개를 받쳤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상나라때 이미 복족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주무왕(周武王)은 기원전 1066년에 남방의 8개 작은 나라를 거느리고 주왕(紂王)을 토벌하였었는데, 동진(東晉) 상거의 화양국지 파지(華陽國志 巴志)에는 '주무왕(周武王)이 주(紂)를 토벌하여 파(巴)와촉(蜀)의 군대를 전부 얻었고 ...물고기, 소금, 동, 철, 붉은 색의 옻칠, 차(茶), 꿀 등을 모두 하였다'라고 기재하고 있다. 파촉지사(巴蜀之師)는 사천(四川), 운남(雲南), 귀주(貴州) 3개성의 여덟개 작은 소수민족들로 구성되었고 그 중에 복족사람들은 운남성 경계내에 살고 있었다. 오늘날 운남성의 여러 민족 중 포랑족(布朗族), 합와족(哈瓦族)은 모두 복족인의 후예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운남은 차의 고향이며 3천여년전 상주(商周)시대부터 운남의 복족 사람들이 이미 차엽을 생산하였다고 볼 수 있다. 복족인의 조상이 운남에서 대대로 살아온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고 분포 면적도 넓었으며 당시에는 차를 심을 수 있는 적당한 조건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족인이 운남에서 차를 심은 시조(始祖)라는 학설이 있는데 이것은 상주시기에 차를 공물로 하였다는것과 일치한다. [운남성차엽진출구공사지(雲南省茶葉進出口公司志)]에 보면 한무제(漢武帝)는 기원전 109년에 상강(賞羌)을 진왕으로 봉하고 진왕에게 인장을 하사하였으며 진왕은 익주군(益州郡)을 설치하고 진지현을 다스렸다. 삼국의 오진(吳晉)은 그의 책 본초(本草)중에서 '고채(苦菜)는 일명 다(茶)라고 부르고 다른 하나는 선(選)이라고 부르며 또 하나는 유동(游冬)이라고 부르는데 익주군 골짜기와 산릉선에서 난다. 겨울에도 죽지 않으며 3월 3일에 따서 말리운다.' 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오진이 말한 다(茶)자는 글자의 뜻에 따르면 곧 차잎이어서 운남이 한(漢)나라 시기에 차를 생산하였다는 것을 실증하는 셈이다.
삼국시대
삼국(三國)시대에 '무후(武侯)가 종자를 선사하였다'고 하여 1700년 전의 음력 7월 23일에 보이차에 관한 이야기를 펼치고있다. '다산에는 다왕수(茶王樹)가 있고 다섯산의 것보다도 유독 크다. 본래는 무후가 종사자로 선사한 것인데 지금까지 이곳 사람들은 제사 지내고 있다' 고 단췌(檀萃)는 그의 '진해우형기'에 기록하고 있다. 무후는 제갈(諸葛) 공명(孔明)으로 그는 서기 225년에 남만을 정벌하러 지금의 운남성 서쌍판납자치주, 맹해현의 남유산에 이르렀다. 그의 출사표중에서 일찍 5월에 노수(지금의 금사강)을 건너 불모지에 깊이 들어갔다고 기록한 것은 곧 진남에 진입하였다는 사실의 기록이다. 공명선생이 남나산에 와서 보이차 나무를 심었었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하는 점은 현재로서는 고증할 수가 없다. 그러나 당시의 하나인 소수민족들은 제갈공명이 차나무를 심었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대대로 전수하면서 제갈공명을 차의 조상으로 모시고 해마다 제사 지내고 있다. 1988년 12월 26일 운남일보를 보면 운남의 '다사(茶事)'라는 글 가운데는 "공명(孔明) 다산(茶山)은 삼국시대에 제갈공명이 맹해 남유산을 지날때 병사들이 풍토가 맞지 않아서 눈병이 났었는데 제갈공명이 지팡이를 산위에 꽂았더니 즉시 차나무로 변하여 잎이 자라났으며, 사병들은 잎차를 따서 끓여 마시고 병이 나았다. 이 후 남유산을 공명산 이라고 불렀다고 진해진다. 또 보이현의 동남쪽에 무영수산(無影樹山)이 있었고 그 망지산은 공명이 화살을 두는 곳이었으며 산에는 제풍태가 있고 산위에 큰 차나무가 있는 것은 무후가 종자를 선한 것이어서 이민족들은 제사 지낸다고 말하고 있다. 운남의 6대 다산의 하나인 유락산(攸樂山)도 공명산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주민들은 매년 음력 7월23일에 공명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공명등(孔明燈)을 걸어놓은 행사를 거행하는데 다조회(茶祖會)라고 부른다고 전해지고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런것들은 원래 풍문으로 전해지고 있는 말이지만 보이차의 정확한 역사적 기록이 없을 때에는 아주 설득력이 있는 말이었다.
당대
당(唐) 함통(咸通) 3년(862년)에 반작이 외교사절로 운남의 남소지에 갔다. 그가 쓴 [만서(蠻書)]의 제7권 중에는 '차는 은생성(銀生城)지역의 여러 산에서 나고 각기 거두어 들여 일정한 제다법이 없었다. 몽사(蒙舍)사람들이 산초나무, 생강, 계피나무와 함께 끓여서 마신다' 는 기재가 있었다. 고증에 의하면 은생성은 지금의 운남성남부의 경동(景東), 사모(思茅)와 서쌍판납 일대이다. 이 일대 지역에는 이미 차가 생산되었고 또 5백여리 거리밖으로 판매 공급되어서 이해 부근의 몽사 지금 운남성의 외산(巍山) 남동현(南洞縣)일대의 만족(蠻族)들이 마신다. 이것은 운남에 이미 차엽이 생산되었고 또한 운송판매의 상업행위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은생성에서 그 당시에 생산한 차가 어떤 차엽 인가에 관해서는 고증할 길이 없다. 그러나 운남의 지리적 환경 및 고대 차나무의 연구로 부터 은생성의 차는 마땅히 운남의 대엽종차의 종류이여야 했다. 그것은 대엽종차의 종자는 운남의 원시차의 종자이고 보이차의 종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생성 에서 나는 차엽은 당연히 보이차의 선조이어야 한다. 이때문에 청나라의 완복(阮福)은 [보이다기(普耳茶記)]중에서 '보이차는 고대에는 은생부(銀生府)에 속하였고 서번(西蕃)에서 사용되는 보이차는 당나라때 부터 시작되였다.'고 말하였다. 우리와 완복의 견해는 같아서 당나라때 은생성에 이미 보이차가 있었다. 보이차는 일찍 당나라때 멀리 서번에까지 팔렸기 때문에 그 시기의 서남의 비단길을 실제로는 '비단과 차의길'이라고 교쳐야만 정확할 것이다. 송(宋)나라의 이석(李石)은 [속박물지(續博物志)] 책에서 '차는 은생의 여러 산들에서 나고 산초나무와 생강을 섞어서 끓여 마신다.'고 기재하였다. 이 말은 당나라 번작(樊綽)의 기재와 대동소이하여 그의 견해를 인용 한 듯 하다. 일반적으로 송나라 때에도 운남성 차엽은 고정된 이름이 없었다. 보이차는 이미 당나라때부터 시작 되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당나라의 다신(茶神)육우가 다경(茶經)중에서 13개 성(省) 42개 주(州)의 명차를 소개하면서 운남성 은생성의 보이차만 빼버렸다. 그러나 지금은 당,송시기의 단차(團茶)의 법통을 잘 이어받은 것은 오히려 운남의 보이차이다. 차문화 역사의 가도에서 보면 차는 당나라에서 흥기 하고 송나라에서 성행하였다. 중국 차엽의 흥성은 차를 마시는 것에 대한 풍습외에 더욱 중요한점은 차마시장(茶馬市場)이 송나라의 차문화 발달에 높은 기여를 하였기 때문이다. 차엽으로써 서번의 말을 쉽게 교환하였고, 서방에 대한 상업거래의 번영을 개척한 것은 보이차의 공로라고 할수 있으며, 서번이 보이차를 마신다는 이 한마디의 말은 움직일수 없는증거가 된다.
송대
송나라 때는 운남의 차잎 수출이 대부분 서역과 인도를 위주로 하였다. 말과 사람의 왕래가 많았기 때문에 도로가 생겼다. 그중 하나는 시쌍판나의 6대다산의 남쪽끝의 이무진(易武鎭)으로 부터 북쪽으로 가서 보이진을 거치고 대리(大理)를 거쳐서 여강(麗江)의 남쪽에 도착하여 금사강(金沙江)변의 석고진(石鼓鎭)에 이른다. 그러한 운남지 경내를 지나는 것을 고차도(古茶道)라고 부르고, 다시 석고진으로부터 티벳의 납살(拉薩)를 거쳐 곧바로 인도에 이르는 운남 이외의 지역을 차마대도(茶馬大道)라고 부른다. 차마대도는 이외에도 미얀마로 통하는 길도 있고, 베트남으로 통하는 길도 있었다. 차의길 주변에는 많은 성시가 형성되었다. 보이부는 보일부(步日部)로 개명한 이래 점차적으로 운남 차엽의 제일 중요한 집산중심지로 개척 되었고, 점점 상인들로 하여금 운남차엽과 보이부가 상인들에 의해 밀접한 관계를 맺으므로써 보차(普茶)의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후에 명나라 말년에 이르러 다시 보이차로 바뀌었다. 이후 운남경내의 키큰 차나무의 차청(茶靑)으로 제조한 차의 제품은 모두 보이차라고 통칭 하였다. 보이부를 중심으로 고차도와 차마대로는 빈번한 동서교통의 왕래를 가져오고 방대한 차마교역을 진행하였다.
원대
원(元)나라는 중국차 문화의 전수, 계승의 기복, 전환의 과정 중에서 평범하게 보이는 하나의 왕조이나 전체적인 보이차 문화를 말하면 원나라는 중요한 시기이다. 관습상으로 보이차의 기원을 삼국시기의 '본래 무후가 종자로 선사하였다'로 보는데 사실 보이차의 뿌리는 중국차를 마신 최초의 사람까지 올라가면 어느 그루 차나무의 차잎인가에는 관계없이 운남대엽종차종자의 후대일 것이며 다시 말하면 보이차일 것이다. 왜냐하면 운남 보이차는 대엽종차를 쓰고 가장 원시 차종자의 차청(茶菁)으로 만들어졌다. 이 때문에 중국차의 역사는 곧 보이차의 역사와 같다. 원, 명 이전에 마시던 보이차는 모두 낙관이 없는 보이차 였는데 그 실물은 있으나 고정된 명칭이 없었다. 그러나 원나라에서부터 그 진짜이름을 얻게 된다. 원나라에는 보일부(步日部)라고 부르는 지명이 있었는데 후에 음이 변하여 보이부로 되었다. '보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타났고 이때부터 진짜이름으로 역사에 써넣을 수 있었다. 원나라의 보이부가 이름지어진 얼마 후 고정적인 명칭이 없는 운남차잎을 보차(普茶)라고 불러서 다시 보이차의 이름에 근거를 얻게 하였다. 순수하고 진한 보이차는 점차적으로 티베트, 서장(西藏), 신강(新疆)등 지역의 육식을 위주로 하는 소수민족의 필수식품이 되었고, 또 이지역에서 시장매매하는 필수상품 이었다. 보차(普茶)라는 이름도이 때부터 이름이 국내외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명나라 말년에 이르러서 보이차 라고 고쳐 불렀다.
명대
명(明)대의 만력(萬曆) 년간(기원 1620년)의 사조제는 그의 진략중 에서 '사대부와 서민이 사용하는 것은 모두 보차(普茶)이고 쪄서 덩어리로 만든다' 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보차의 이름이 처음으로 문자로 보이는 것이다. 명나라 말년에 방이지(方以智)는 그가 쓴 원고 중에서 두 아들 방중통(方中通), 방중리(方中履)가 기원 1664년에 출판한 물리소식(物理小識)중에서 '보이차는 쪄서 덩어리로 만들고 서번에 판다' 라고 기재하여서 보이차의 이름이 정식으로 문자화 된것을 참고 할수 있었다.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은 방목하는 목동인 시절에 사람들이 단차(團茶)를 제다 하고 투차(鬪茶)를 쾌락으로 삼는 사치한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즉위한 후 즉시 단차를 폐지하고 산차(散茶)를 진흥시키라 하고 1391년에는 용단(전문적으로 황제만 마시게 만든 단차)의 제조를 중지하고 오직 아차(牙茶)만 따서 바치라고 하는 최상품 차를 개혁하라는 명령을 내려, 순수하고 소박한 사회적 민풍을 선도하였다. 그러나, 남방의 변경지역에서 생산하는 보이차만 명나라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여 여전히 옛스런 맛이 넘쳐흐르는 단병차(團餠茶)의 모양을 보유할 수 있었다. 당, 송이래 차마시장이 운남에서 발생되어서 운남과 서역 사이를 빈번하게 대상들이 왕래하였다. 대상들은 한번 왔다 가는데 꼬박 4,5천리 길을 걸어야 하는데 상인들은 대량의 모피, 피륙, 종이, 칼, 그리고 마필등 일용품들을 운반하여 왔으며. 교환한 차잎은 사람이 지고 말에 실어서 운송하였다.
청대
청의 보이차는 많은 변화를 겪으며 귀중해져서, 국내외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며, 공다(貢茶)로서 황실의 총애를 배로 받는 최상품차로 되어 흥성한 시기였다. 특히 보이차에 관한 저서도 역대 이래로 제일 풍부하였으며, 보이차를 서술하고 기록한 문장도 아주 많이 나왔다. 공다는 보이현 서문산 에서 생산되었으며, 그 수량이 많지 않았고 품질이 우수하여 역대로 수도에 헌납하는 1순위의 차 였다. 보이현 동문산의 모목수다원복통나무차는 보이의 제2진품에 속하였으나 본고장의 토착민을이 맛보고 팔기를 아쉬워 하였다. 보이 맹선의 소판산(小板山)의 다원은 차왕의 탄생지로 차를 따서 제를 지내며, 해방 후에 맹선차 공장이 성립되는데 역시 역대공다(貢茶)의하나이다. 보이공다는 청 궁중에서 황궁귀족들의 특별한 주목과 총애를 받았다. 동시에 국가선물로 외국사절에게 주었다. 1793년 영국은 전 인도,말레이시아 총독일행 95명을 특파하여 건륭황제의 80세 생일을 축하하러 왔을 때 중국은 만수원(萬樹圓)에서 영국 사절단을 접대하면서 대량의 선물을 보냈는데 그 중에는 보이여아차, 보이다고 등이 있었다. 동시에 세계적인 문호 톨스토이도 보이차에 대해 그의 소설 [전쟁과평화]에 쓰고 있다. 1729년 옹정(雍正) 10년부터 보이차는 정식으로 공다(貢茶)가 되었으며 1908년 광서(光緖) 30년 운남 지방이 혼란하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 공다가 곤명부근에서 강도들한테 모두 약탈당하게 되자 조정도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보이차 공납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보이공다는 청나라 궁중에서 거의 200년 동안 마셔왔다.청의 완복의 [보이다기]중에는 보이차는 이름이 온 천하에 퍼지고 맛이 제일 진하며 수도에서는 더욱 비싸다는 기록이 있다. [진애우형지]에는 산에 들어가 차를 만드는 사람이 수십만이 되고 차객(茶客)들이 구입하여 각지로 실어갔다고 기록하였고 서역시장의 필수상품으로 , 국내에서는 차를 마시는 계층의 유행이 되기까지 하였다. 자연히 보이차를 만드는 상점이 한꺼번에 많이 생겼는데 운남성내에서 유명한 상점으로는 동경호(同慶號), 복원창호(福元昌號), 송빙호(宋聘號), 동흥호(童興號),영춘호(迎春號), 동창호(同昌號), 동태창(同泰昌), 가이흥(可以興), 동순상(同順祥), 원태풍등 차가게들이 있었다. 청의 전기와 중기 약 1660년부터 1870년까지는 보이차 역사에서 가장 전성기였다. 시쌍판나의 6대다산의 최고년간 생산량은 8만 여 석에 도달하였다. 판납문사자료선집(版納文史資料選輯)을 보면 집집마다 차나무를 심고 팔았으며 대상이 길을 점유하고 행상들이 북적대었다고 한다. 차시장에는 조정의 공다 관리들 외에 티베트, 인도, 미얀마, 스리랑카, 안남, 캄보디아와 국내의 상인들도 있었다. 매년 적어도 5만필의 짐수레가 6대다산을 드나 들었다. 그중 궁중으로 들어가는 보이공차는 약 700석이고, 서역으로 파는 것이 약3만석이 되었으며, 극소수양이 다른 나라에 팔리는 것 외에 대부분은 국내시장에서 소비되었다. 그러므로 6대다산의 차의 생산품이 해마다 약 2.3만석이 국민들에 의해 소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외에 운남지역 내의 많은 다산들에서 더욱 많은 차를 생산하여 마시는 풍조가 성행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광서 말년에 와서 보이차는 과거의 8만석에서부터 5만석으로 감산 되었고 원인은 청 말기에 차세금이 너무 과중하여 차농 들이 손해를 입었고 차를 파는 상인들도 취할 이익이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차상인들과 대상들은 다른일을 찾게 되고 오랜 차농들도 잇달아 다원을 버리고 새로운 직업을 구하였으며 과거에는 빈번하게 왕래하던 대상들의 모습도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현대
중화민국(民國)이 건립되면서 본래 보이차의 생산과 판매를 재정비하고 지난날의 위풍을 회복 할 수 있었는데, 처음 운남성 정부에서는 차잎에 대하여 정부가 관리하고 민간에서 경영한다는 정책을 실행하였다. 지방정부에서 관리를 배치하고 세금을 받게 하였으며 차상인 들이 가게를 차리고 차를 만들게 하고 민간에 운송하여 판매하게 하였다. 이것은 보이차의 생산, 판매, 경영에 대하여 적극적인 작용을 일으켰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우수한 보이차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진행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