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신앙의 근본 ‘이신칭의’가 흔들리고 있다 ①
“칭의와 성화의 유일한 조건은 믿음”
본보는 지난 3주간 목원대 신학지 <신학과 현장> 제12호에서 “복음주의를 가장한 자유주의 신학과 정치신학자들이 기독교 진리에 중요한 내용을 왜곡시켰다”고 비판한 이선희 교수(목원대 조직신학)의 논문 <감리교 신앙의 근본적인 소고>에 대해 김홍기교수(감신대 역사신학)의 반론을 게재했다.
김교수의 글에 대한 재반론과 본인의 논문에 대한 설명의 원고를 이선희교수가 보내옴에 따라 앞으로 3주에 걸쳐 똑같은 방식과 지면을 통해 게재한다. <편집자주>
웨슬리의 텍스트에는 ‘칭의와 성화의 유일한 조건은 믿음’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김홍기교수는 웨슬리를 오해하고 있다.
“감리교 신앙의 근본에 관한 소고. 이신칭의(以信稱義)에 대한 감리교 내의 자유주의적 신학들의 오해에 대한 고찰”, 「신학과 현장」제12집(목원대학교 신학연구소, 2002, pp.54-100). 이것이 김홍기 교수가 비판한 본인의 논문이다. 그 비판의 핵심은 ‘이선희 교수는 이신칭의와 중생만을 강조하고 거기서 끝난다’는 것이다. 그는 나의 논문을 이해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증거: (1) 나는 이 논문에서 오직 이신칭의와 중생만이 참된 성화의 시작이고,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5:6)으로 이루는 성화의 행위가 본격적인 기독교인의 삶이며, 마지막 심판의 기준은 각 사람의 행위라는 것(고후5:10)을 바울, 야고보, 루터, 웨슬리를 통해서 입증했다. (2) 칭의와 성화의 유일한 조건은 믿음이라고 웨슬리도 강조한 사실을 입증했다. (3) 그러나 김 교수가 주장하는 소위 ‘사회성화’는 웨슬리의 개념이 아니라, 일종의 민중신학적 사회운동 이념이라는 것을 입증했다. 신학적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기 논문의 주장을 더 쉽게 설명해 보겠다.
상기 논문을 쓰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다:
(1) 본인은 독일 본 대학에서 민중신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직후 1992년부터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조직신학과 웨슬리 신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94년 중생을 체험하고, 웨슬리 신학에서 나의 연구대상을 발견했다. 10년여 웨슬리 신학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웨슬리 신학이 전형적인 복음주의 신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복음주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 교리를 중심으로 하고, ‘칭의와 동시에 중생하여, 이로부터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에 의하여 성화된다’는 성화론을 핵심교리로 삼는 신앙양태를 의미한다.
(2) 또한 이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웨슬리 신학에 대한 해석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대개 자유주의 신학 또는 해방신학의 관점에서 해석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웨슬리 신학이 ‘(복음적) 신인협동설(神人協同說)’이라는 해석은 자유주의 신학적 관점에서 나온 것이고, ‘웨슬리에 의하면, 구원은 믿음으로 시작해서 인간의 행동으로 완성한다’는 주장은 그 후에 해방신학적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의 텍스트를 조금만 치밀하게 분석해 보아도, 그런 관점들은 웨슬리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분석결과를 나는 졸저 「웨슬리 신학의 탐구」(도서출판 복음, 2002)에 피력했다.
(3) 이런 연구과정에서 알게 된 것이 이것이다: 오늘날 한국감리교에서 주장되는 신학들 가운데 웨슬리의 복음주의 신학에 어긋나는 것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자유주의 신학, 토착화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 종교다원주의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모두 넓은 의미의 자유주의 신학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의 도덕적 능력과 행동에 기대를 거는 신학이다. 따라서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칭의 교리에 별로 기대를 걸지 않거나 심지어 불신하는 풍조를 의미한다. 이러한 나의 주장을 입증할 만한 일들이 그간에 한국 감리교 신학계에서 발생했다. 그 중 몇 가지 사례들에 관한 평가를 나는 졸저 「복음주의적 감리교신학의 모색」(도서출판 복음, 2002)에 피력했다. 여기서는 이 논쟁에 관련된 두 가지 실례만 들어 본다.
① 김홍기 교수의 웨슬리 해석에 있어서 “인간의 이성, 양심, 자유의지, 종교성이 선행은혜다”라는 주장은 인간이 가진 도덕적 능력을 강조하는 사상이며, 이는 웨슬리의 텍스트에 명시된 선행 은혜 개념과는 전혀 다른 자유주의 신학의 사상이다. 이를 밝히기 위해 나는 ‘존 웨슬리의 선행은혜 개념에 대한 소고’(「신학과 현장」제11집, 2001, pp.96-136)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김홍기 교수처럼 자유주의 신학으로 출발하면 웨슬리의 복음주의가 말하는 이신칭의와 성화를 올바로 알 수가 없다. 자유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와는 달리 인간 자신의 도덕적 능력을 강조하는 세계관이다. 그래서 김홍기 교수는 이신칭의와 중생을 신학적으로는 인정하지만, 그 속에서 역사하는 ‘개인을 구원하고 사회를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신뢰하지 못한다. 이런 이유에서 김 교수는, 웨슬리 신학과 민중신학을 비교 연구한 그의 박사학위 논문과 그의 ‘사회성화’ 사상에 여실히 나타나듯이, 민중신학적 사회운동의 사상에 의지해서, 인간의 사회적 행동이 사회를 구원해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세계관에 맞춰서 웨슬리를 자기와 비슷한 일종의 ‘종교사회주의’ 색채를 띤 국민윤리적 사회운동가로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② 2001년 4월 경주에서 있었던 ‘위대한 감리교를 위한 감리교 대표자 회의’에서 K 교수가 발표한 강연도 이신칭의에 대한 오해 및 불신을 노출하고 있다. 이 강연에서 그가 주장한 핵심내용은 이렇다: “바울이 말하는 ‘행위없이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 교리가 기독교인들의 도덕성 타락의 원인이다. 신약성경 안에서 이미 바울의 ‘오직 믿음만으로’의 잘못된 신앙유일주의를 야고보와 마태가 ‘행위있는 믿음’으로 올바로 수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와 칼빈은 신약성경의 균형잡힌 가르침을 인식하지 못하고 바울의 신앙유일주의만을 강조하여 믿음을 확대왜곡하고 행위는 축소왜곡함으로써 기독교인들의 도덕적 타락을 합리화했다. 그러나 웨슬리는 바울의 믿음강조와 야고보의 행위강조를 조화시킨 성공적인 신학자다. 오늘날 감리교는 이러한 웨슬리를 본받아야 한다.”
그러나 K 교수의 이런 주장에 있어서 오류는 다음과 같다: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 즉 하나님의 말씀이 도덕성 타락의 원인이 아니라,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오용(誤用)’이 도덕성 타락의 원인인 사실을 그는 간과한 것이다. 그는 이런 착각에 근거하여 ‘오직 믿음만으로’를 말하는 이신칭의 교리 자체를 불신하며 논한 결과, 이신칭의를 강조한 바울과 루터가 믿음만 말하고 행위는 말하지 않은 것처럼 왜곡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울과 루터는 오히려 반대로 성화의 행위를 누구보다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바울과 루터의 텍스트에서 확인했다. 그리고 K 교수는 ‘웨슬리는 그래도 바울 보다는 야고보에 가깝다’고 주장했는데, 웨슬리는 야고보서 2:14에 대한 주해에서 야고보나 바울이나 공히 이신칭의라는 동일한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고 있으며, 진정한 이신칭의는 의와 거룩의 행위를 낳는 것이며, 이 두 사도 사이에 상호모순이 없다고 명시한 사실을 나는 확인했다. 그러므로 나는 K 교수의 경우에서도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근거없는 오해와 불신을 텍스트를 왜곡하면서까지 주장하는 현실을 보았다. 그런데 그 교수님이 주장한 이러한 잘못된 관점이 놀랍게도 오늘날 한국 감리교회의 일부 목회자들과 소위 의식화된 평신도들의 평균적인 인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성경이 말씀하고 웨슬리의 복음주의가 말하는 이신칭의 교리와 성화 교리가 무엇이며, 이것이 어떻게 왜곡되고 있는지를 알리고 바로 잡고자 했다. 이것이 상기 논문을 쓰게 된 동기다.
(4) 오늘날 한국감리교회의 위기상황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라고 웨슬리도 강조한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기대감 상실이다. 일부 신학자들과 수많은 젊은 목회자들이 이신칭의 교리가 행위를 말하지 않거나 개인적 행위만 말한다고 오해하면서 불신한다. 그래서 ‘믿음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능력에 의하여 사람이 구원받으며 사회가 새로워진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대하여 갈수록 무지해지고 있다. 믿음은 신앙생활의 시작부분에서만 중요한 것이고, 그 다음에는 인간 자신의 선행(영성훈련과 사회참여 방식의 선행)이 없으면 소용없다는 천주교식의 오류를 향한 치명적인 의식전환이 감리교도들 사이에서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믿는 자의 영혼과 삶을 주관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 상실을 표현하는, 그리고 그 대신 우리 자신의 눈에 보이는 소위 인간다운 행동으로써 인간을 개조하고 사회를 개혁하자는 일종의 인본주의적 도덕종교의 세계관이다. ‘우리 자신이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도덕적 가치관에 사로잡혀서 성경이 말씀하는, 그리고 웨슬리가 말하는 ‘인간의 영혼을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하고 완성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종교’(설교, ‘원죄’, III,3)를 망각한 일종의 사회윤리적 휴매니즘의 세계관일 뿐이다. 이렇게 하면서 감리교는 예기치 않게 천주교식의 신앙방식으로 전환되고 있다. 천주교는 명시적으로 이신칭의를 거부하며 소위 ‘믿음과 행위를 통한 구원’을 강조해온 교단이다.
이선희 교수(목원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