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쌀이 경제와 생태를 살린다
쌀에 대해서만은 최소한 저농약 수준으로 환경 기준을 높이고 생태직불금 제도를 마련해 중요 생태 안전판이자 농촌 경제의 시발점인 논을 살리자.
시사 in [84호] 2009년 04월 22일 (수) 10:23:33 우석훈 (경제학 박사·<88만원 세대> 저자)
한국 농업을 이야기할 때, 역시 쌀을 빼고는 출발 자체가 어렵다. 그만큼 한국 농업과 농정에서 쌀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1990년 39.9%에 비해 22.7%로 많이 줄어들었지만, 어쨌든 농업생산액 중 쌀이 차지하는 비중은 4분의 1가량 된다. 그리고 농정의 기반으로 치면 역시 쌀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가장 핵심이다.
세계 인구의 80% 가까이가 주식으로 할 정도로 쌀은 중요한 곡물이다. 밀이 주식인 유럽과 미국, 그리고 옥수수가 주식인 중남미 일부를 제외하면 아프리카를 포함해 거의 전 세계인이 주식으로 쌀을 먹는다. 대다수 나라가 먹는 쌀은 흔히 장립종이라고 불리는 인디카종이며, 타이를 중심으로 주로 생산되는 ‘안남미’를 우리는 거의 먹지 않는다.
반면에 우리가 주로 먹는 쌀은 단립종이라고 불리는 자포니카종으로, 상당히 차지고 습기가 많다. 한국·일본이 주로 이 쌀을 먹는데, 전체 생산량은 세계적으로 5% 정도이다. 쌀의 품질은 주로 선도와 찰기를 기준으로 하는데, 이 기준에 따르면 한국과 일본이 먹는 쌀은 지나치게 끈기가 높으므로 저품종 쌀에 해당한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에서는 이런 끈기 있는 쌀을 더 고급으로 친다. 가격도 인디카 시세보다 4~5배 비싸다. 때때로 경제 관료들이 한국 쌀이 경쟁력이 없으니 쌀농사 그만두고 수입하는 게 낫다고 얘기했다가 곤욕을 치르기도 하는데, 원래 품종이 다른 것이다.
이러한 쌀 생산이 국제적으로 교란을 겪게 된 것은, 198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대농들이 자신들은 거의 먹지 않는 자포니카종을 한국과 일본의 쌀 시장을 겨냥해 생산하면서부터이다. 철저한 상업농인 셈인데, 세계무역기구(WTO) 협상 과정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이르기까지 거의 20년 동안 국제 협상에 단골처럼 끼이는 쌀 시장 개방 문제가 바로 미국 자포니카 재배 농가 수천 가구 때문에 생겨난 일이다. 그러나 결국 생각보다 큰 교란 효과가 없었던 것은, 우선 자포니카 생산비가 1년에 4모작씩 하는 타이와 같은 주요 쌀 수출국가에 비해 원래 높기 때문이다. 미국이 한다고 해서 특별히 엄청나게 싸지지는 않는다. 그럼 이렇게 비싸게 생산되는 미국의 자포니카종 생산자들은 어떻게 버티는가? 공적개발원조(ODA)라고 불리는 아프리카 원조 같은 것을 활용해 몇 배 더 비싼 쌀을 상당 부분 처리한다. 어쨌든 농지가 매우 넓은 미국 서부의 농가들은 한국과 일본의 쌀 시장만 열리면 이 두 나라에서 소비할 쌀을 독점 생산하겠다고 여전히 벼른다.
추곡수매제 폐지로 사실상 완전경쟁 시장
이런 상황이다보니, 일본이나 한국이나 쌀 농가를 지키는 일이 매우 중요한 국정수행 과제가 된 셈이다. 정서적으로도 쌀을 지키지 못한 정권은 농업을 지키지 못한 정권과 마찬가지로 치부되었고, 한국도 김영삼 정부 때부터 어쨌든 쌀만은 지키겠다고 사력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2005년 WTO 협상 과정에서 정부가 농민에게 쌀을 전량 사들이는 추곡수매제도가 폐지되었다. 지금은 공공비축제도를 통해서 정부가 10% 정도만 구매하기 때문에, 쌀 시장은 사실상 자유경쟁과 비슷하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각종 브랜드 쌀 수천 종은 이런 추곡수매제도가 폐지된 이후, 지역별·농가별로 살아남기 위해서 벌이는 사실상 완전경쟁에 가까운 시장에 나온 상품이다. 그리고 추곡수매제도를 대체해 쌀직불금이라는 제도가 도입되었는데, 휴경직불제·고령농직불제 따위로 쌀농사를 짓지 않는 데에도 직불금을 주게 되었다. 2008년 농지 투기와 함께 부재 지주의 직불금 수령이 국가적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우리의 곡물자급도는 2006년 기준으로 약 27.7%인데, 이 정도 수치가 나오게 된 데에는 98.5%에 이르는 쌀 자급도가 큰 기여를 한 셈이다. 한국이 쌀만은 사실상 자급하는 셈이다. 그렇다고 이 구조가 튼튼한 것은 아니다. 쌀 생산량은 해마다 줄어드는데, 1인당 쌀 소비량이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감소하는 까닭에 이 정도 자급률 규모가 유지되는 것이다. 쌀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어쨌든 생산량을 늘리는 것이 정책이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이 남는 쌀을 어디론가 수출할 만한 상황도 아니다. 물론 한국 쌀을 일본이나 중국의 특수 지역으로 수출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런 수출을 중심으로 쌀 생산 전략을 잡기는 좀 어려운 일이다.
쌀 생산을 기계적으로 ‘상품’ 생산으로만 본다면, 사실 필자도 논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에 굳이 반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논은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생태적 안전판 구실을 하며, 농촌 지역 경제의 근본 시발점이기도 하다. 경제학 용어로 얘기하면, 농업에 대한 지지는 쌀 농사가 일종의 공공재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며, 실제로 이러한 효과를 위해 정책을 펴는 것은 현 WTO 체계 내에서도 허용된다.
즉, 현재의 쌀을 생태 효과, 보건 효과, 그리고 지역경제에 미치는 효과와 같은 방식으로 세밀하게 구분하고, 이런 방식으로 지금의 직불제도를 개편하는 일은 경제 관료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공공재인 농업 지원은 WTO도 허용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선 쌀에 대해서만은 무농약이나 유기농업은 아니더라도 저농약 수준으로 환경 기준을 높이고, 실제로 이를 위해 기술과 인력을 지원해야 한다. 밭작물에 비해 쌀의 장점은 비교적 대규모로 유기농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오리농법이나 우렁이 농법 따위 기술적 선택의 여지가 있다.
여기에 스위스처럼 좀 더 세밀하게, 예를 들면 논별로 보호종 두루미가 날아온다거나 특정한 보호종이 인근에 있을 경우 농사에는 약간 손해를 보지만 이런 비용을 보상해줄 정도의 생태직불금 같은 제도가 마련된다면 최소한 논 생태계가 인근 생태계와 연계되는 정도의 변화는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보관 기간을 줄이기 위한 사회적 지원 같은 것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실제로 쌀을 장기 보관하려면 어쩔 수 없이 해충을 죽이느라 농약 처리를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쌀의 안전도에 문제가 생긴다. ‘나라미’라고 불리는 이런 비축미들은 주로 군대 급식과 기초수급자용으로 사용되고, 때때로 학교 급식에도 들어가 논란이 된다. 이런 쌀의 품질을 높여서 최소한 저농약 수준의 쌀로 대체한다면, 국민보건 효과를 높이면서 동시에 쌀의 국내 수급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무농약 수준으로 국내 쌀 수준을 높인다면, 아마도 미국 쌀에 대해서만은 밀리지 않을 것이다. 대규모 기계농인 미국산 쌀은 그 특성상 농약를 많이 치기 때문이다.
쌀, 국민에게 쌀 좀 많이 먹으라고 하거나, 이명박 대통령처럼 쌀국수도 해먹으라고 하는 것이 답은 아니다. ‘안전한 쌀’에 경제와 생태가 농업이라는 형태로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