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1월13일 월강종회(구산문중) 대종회를
마치고…
유구한 세월 속에 혼 맥을 이어온 구산마을!
우리는 과연 선조들의 얼을 얼마나 보존 하고 있으며 기억하고 있을까?
보존은커녕 기억마저 사라져 가고 있은 현실에 늘 구산정사의 성문을 들어서면 선조들께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오늘도 그 후손들은 대종회를 하며 기억을 더듬는다.
구산정사기와 상량문을 보며 그 당시 중수를 위해 혼신을 쏟은 성암 안복초(식원) 선조게 다시 한번 마음으로 재배를 올린다.
지금 성암선조는 고향땅이 아닌 충남 공주 장기면 장암이란 곳에 잠들고 계신다.
상량문에 남긴 흔적으로 구산정사는 몇몇 분의 노고로 경남도 문화재에 등재 될 확률이 다소 있는 듯 하다.
좀 늦었지만 참 기쁘고 다행이다.
하지만 태봉선조(안경서)는 벌써 250여년 전에 이곳에 구산서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한 곳이다.
나는 벌써 40년을 넘게 고향을 떠나 빌딩숲 속에 살고 있다.
이미 내 마음은 도시인으로 변질 되어있다.
근데 왜 아직까지 도시에 정을 붙이지 못할까?
그것은 역사와 전통에서 우러 나오는 무게가 없기 때문인 것 같다.
분명 도시는 아름다운 집과 편리한 문화시설이 있지만 역사의 신산(辛酸)에서 우러나는 인문학적 지층이 쌓여 있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도시에 오래 살면 향락적인 방향으로 흐르기 쉽고 돈은 많을 지은정 마음은 늘 졸부들이 많은 곳인 것 같다.
근데 구산정사에 들어 서면 왜 마음이 숙연해 질까?
그것은 구산정사만이 가지고 있는 특이한 정기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한 마디로…
역사성을 가진 전통의 무게와 선조의 얼, 그리고 고향의 향취가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역사와 문화가 없으면 명문가로 인정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만큼 구산정사는 우리에게 영혼이요. 성전 같은 곳이다.
울산으로 귀가 하며 생각한다.
구산정사는 약250여년 전에 태봉처사가 구산서당으로 건립되었다고 족보에
명시되어있다.
그 사이 여러 번 화재와 소실로 중수를 거듭하면서 현재의 기록으로는 약 112년
정도 밖에 확인 할 수 없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약 138년이란
역사를 도둑 맞은 기분이다.
지금 우리의 숙제는 이것을 찾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