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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머리에
인도에 용수보살이 있다면 한국에는 원효대사가 있고, 인도에 유마거사가 있다면 한국에는 부설거사가 있고,
인도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있다면 한국에는 진묵대사가 있다.
진묵대사는 한국 땅에 태어난 석가의 후신이라는 것은 자타가 인정하는 바이다. 진묵대사는 조선 명종과
인조시대(1562~1633)에 조선 땅에 태어나 대자유인으로 유유자적하며 한 생을 살다간 어른이다.
후천개벽의 성자이신 원각성존 소태산 부처님께서도 한국불교계에서 유일하게 진묵대사를 언급하였다.
“그 어른은 술 경계에 술이 없었고, 색 경계에 색이 없으신 여래시니라.”[원불교 대종경 불지품 7]라고
하시면서 ‘여래(如來)’로 인정하였고, “불보살들은 이 천지를 편안히 살고 가는 안주처를 삼기도 하고,
일을 하고 가는 사업장을 삼기도 하며, 유유 자재하게 놀고 가는 유희장을 삼기도 한다.”[원불교 대종경
불지품 23]는 말씀에 비추어 보면 진묵대사는 여실히 한 세상을 유유 자재하게 놀고 가는 유희장을 삼은
어른이다.
진묵대사께서 워낙 세상을 유유자재하게 살고 흔적을 별로 남기지 않고 가신 덕에 진묵대사와 관련한
정통하고 정확한 자료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해탈 초범한 경지에서 보이신 이적과 신통을 보고 들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게 전하고 있고, 진묵대사 스스로도 별로 기록과 흔적을 남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그래도 몇 점 전해지고 있는 자료는「震黙大師 小傳」과 「東師列傳」이고, 이밖에
「海東原流」, 「韓國歷代高僧傳」, 「金提郡誌」,「한국 구비문학 대계」,「진묵조사 무봉탑병서」등에
진묵대사와 연관된 글들이 있는 정도이다. 이를 바탕으로 초의스님이 진묵대사 일화를, 白雲스님이 소설을
쓰기도 하였으며, 최혜숙은 2003년에 진묵대사와 부설거사의 유적지를 답사하여 기행문을 내었다.
이번에 이러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진묵대사의 흔적이나마 찾아보기 위해 붓을 들었으나,
석가의 후신으로 오신 진묵의 진면목을 어찌 짧은 소견으로 짐작이나 할 수나 있으랴?
진묵대사의 탄생
진묵은 조선 명종 17년(임술, 1562)에 김제 만경의 불거촌(佛居村)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의 승장인
서산 사명(1520~1604)보다는 약 40여년 후에 태어난 것이다. 진묵이 태어났을 때 주위의 풀과 나무들이
3년 동안 시들고 말랐으니, 사람들이 이를 보고 큰 사람이 날 징조라 하였다. 어려서부터 비린내 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심성이 지혜롭고 사랑스러워 불거촌에 생불이 태어났다고 사람들이 기뻐했다. 이 동네를
지금은 화포(火浦)라고 하는데, 불거촌의 불(佛)이라는 지명이 유래가 되어 ‘불 화(火)’자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진묵에게는 단 하나의 혈육인 누이가 있다.
진묵스님 진영
沙彌가 된 一玉
진묵의 아명은 일옥(一玉)으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7세 때에 어머니 조의씨(調意氏) 손에 이끌려 전주
봉서사(鳳棲寺)에 출가하였다.
봉서사는 당시 꽤나 큰 사찰로서 칠순을 갓 넘긴 희(希) 노장이 주석하고 있었다. 희 노장은 봉서사 주지
직을 지낸 학덕이 높은 스님인데, 성질이 괴팍하여 시봉(侍奉)이 붙어나질 못하고 거처하는 방의 불도 손수
때야 했고 세끼 공양도 매번 스스로 큰 방에 나가서 발우로 받아먹었다.
산중의 삼직스님들이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나이 어린 사미를 골라 시봉으로 보내주면 번번이 거절했다.
이럴 때마다 거절하는 이유를 물으면, “내 시봉은 미구에 올 것이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 말은 3년
전부터 계속 반복하는 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지 대월(大月)화상이 아침 공양 때 희 노장에게 간밤의 꿈 이야기를 했다.
“간밤에 우연히 한 꿈을 꾸었는데, 석가모니불께서 천 이백 대중을 거느리시고 우리 절로 올라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꿈이 길조인지 모르겠습니다.”
희 노장은 말했다.
“허, 상서로군! 큰 상서지요!”
아침 일찍부터 대중들은 귀한 손님이 온다고 하여 도량을 쓸고 닦고 법석을 댔다. 이날따라 까치 떼들이
수 십 마리나 날아와 삼삼오오 떼를 지어 종일토록 지저귄다. 그러나 저녁 공양을 마치고 인경이 울릴
때까지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대중은 하릴없이 각 법당에서 예불을 마치고 대웅전 큰 법당에 모여 예불을
드렸다. 이윽고 예불이 끝나고 대중은 대웅전을 차례로 나오는데, 대웅전 마당에 칠팔 세 되어 보이는 동자가
대웅전을 향해 합장하고 서 있었다. 대중의 눈은 일제히 동자를 향했다.
동자 앞으로 다가간 법무(法務)스님이 물었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
“예, 저의 집에서 왔습니다.”
동자는 또렷또렷하게 대답했다.
“그래? 너의 집은 어디냐?”
“만경현 불거촌이옵니다.”
“네 이름은 무엇이며, 몇 살이나 되었느냐?”
“이름은 일옥이고, 일곱 살입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대중은 웃으며 떠들어 댄다. 하루 종일 기다린 상서로운 꿈의 결과가 겨우 일곱 살 된
동자 한 명에 불과 했던 것이다. 학인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동자 곁에는 희 노장과 주지 대월화상만 남았다.
주지스님이 물었다.
“여기 어떻게 왔느냐? 혼자 오지는 않았을 터이고.”
“어머님이 일주문 밖에 까지 데려다 주셨습니다.”
“그래? 너 혼자 들어가게 하고 모친께서는 되돌아 가셨구나. 여기에 어인 일로 왔느냐?”
“예, 부처가 되려고 왔습니다.”
“허허, 깜찍한 동자구나. 그래, 어떻게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더냐?”
“글쎄요? 하긴 제가 본래 부처인데 아직 사람들이 몰라주거든요.”
“허허. 네가 본래 부처님이었다면 어째서 지금 어린 동자중생으로 있는고?”
“중생과 부처가 둘이옵니까?”
“너는 대체 누구한테 그런 말을 배웠느냐?”
“스님은 숨 쉬는 것을 누구한테 배우셨는지요?”
희 노장과 주지스님은 어린 동자의 말에 그만 할 말을 잊고 크게 웃을 따름이었다. 희 노장은 일옥을 자기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래, 먼 길을 오느라고 시장하였겠구나. 들어가서 저녁 좀 먹으렴.”
이렇게 하여 희 노장의 시봉(侍奉)이 되어 서방산(西方山) 봉서사에서 사미(沙彌)의 길을 가게 된다. 처음
일옥에게 주어진 일은 대웅전 상단, 중단의 향화와 다기를 올리는 소임이었다. 그리고 저녁 예불 후에 법당
앞에 장명등(長明燈)을 밝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법당 안에 향과 다기를 올리는 일은 문제가 아니었으나, 장명등은 어린 일옥이 불을 밝히기에는
너무 높았다. 주지스님은 일부러 그 일을 맡긴 것이다. 영특하고 비범한 일옥이 어떻게 그 일을 하는지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일옥에게는 그 일이 아무 문제될 것이 없었다. 다른 동료인 선우(善友)와
법희(法喜) 두 사미를 데리고 한 사람은 엎드리게 하고 그의 등에 올라서서 불을 밝혔다. 그리고는 그 대가로
두 사미에게 불경의 모르는 글들을 속 시원하게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일옥은 사실 지난 두 해 동안 절에 있으면서 경전과 어록 등을 대충대충 배우고, 또 읽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사미계를 받은 후에는 책을 펼쳐보지도 않았음에도 불고하고 다른 사미들의 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사미들은
글을 미리 익히지 않으면 중강(中講)스님에게 혼이 나기 마련이기 때문에, 일옥은 이들 사미들의 글을
가르쳐주면서 서로 상부상조하고 있었던 셈이다. 참으로 영특한 일옥이었다.
일옥에게 또 신중단(神衆壇)에도 향을 사루고 예배하는 소임도 맡겼는데, 이 일을 맡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주지스님은 또 꿈을 꾸었다.
“부처님을 받들어 모셔야 하는 것이 우리들 소신(小神)이 해야 할 일이온데, 어찌 감히 부처님의 절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제발 다시는 부처님으로 하여금 새벽과 저녁에 예향(禮香)하지 않도록 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몸 둘 바를 모르고 있는 소신들로 하여금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주지스님은 매우 기이하게 여겨 그 다음날로 바로 일옥에게 그 일을 맡기지 않았고, 이 일이 있은 후
절의 대중들은 “부처님이 다시 태어 나셨다.”고 하여 일옥 사미를 ‘작은 부처님’으로 생각하였다.
일옥이 봉서사에 온지도 어언 팔년이 지났다. 나이도 이제 열다섯이 되었다. 어느 봄날 일옥은
채마밭에서 점심 공양을 위해 상추를 솎고 있었다. 상추를 솎던 일옥은 문득 남쪽 하늘을 응시하다가
표정이 달라졌다. 갑자기 일옥은 상추바구니를 들고 우물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함지박에 물을
길어서 서너 번 상추를 깨끗이 씻은 후 상추를 두 손에 가득 움켜쥐고 물을 묻혀 남쪽 하늘을 향해 연신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입으로는 무엇을 계속 외면서 물을 뿌려 대기를 반 시간째 계속하고 있었다.
점심 공양을 기다리던 몇몇 스님들은 참지 못하고 일옥에게 가 보았다. 아니, 상추는 가져오지 않고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야?”
일옥은 그래도 대꾸도 하지 않고 얼마동안 계속 같은 동작을 되풀이하다가 이윽고 손을 멈추고 말했다.
“하마터면 큰 일 날 뻔 했네. 이제는 수습이 되었을 거야. 글쎄, 방금 해남 대흥사에 불이 나서 불을
꺼주었지요.”
대중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기이하게 생각하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대중의 점심공양을 그르친
잘못이 있어 경책도 하려고 하였다. 다른 사미가 만약 그랬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크게 혼이 났을
것이지만, 평소 일옥의 비범함을 알고 있고 또 희 노장을 모시는 시봉에게 함부로 할 수도 없는
처지인지라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로 했다. 희 노장은 벌써 팔순이 넘어 병석에 누운 지가 오래되었다.
얼마 더 살지 못할 것을 일옥은 가까이에서 시봉하면서 짐작하고 있었다.
이튿날 젊은 스님 둘을 뽑아 해남 대흥사로 보내는데, 일주문 밖에서 일옥이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희 노장의 부고장을 대흥사로 전해달라고 했다. ‘아직 입적도 하지 않은 스님의 부고장이라니?’
스님들은 아연하게 생각했다.
“스님들이 대흥사에 닿는 날 정오에 입적할 것입니다. 그리고 스님들은 단오 날에나 대흥사에 닿을 것입니다.”
스님이 부고장을 열어 보니 ‘음 오월 오일 오시에 입적하심.’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해남 대흥사는
여기서 사백 여리에 달하여 나흘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열흘이 걸린다고 하니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를 너무 무시하는군. 얼마 전 한양에도 열흘에 갔다 왔는데...”
일옥은 말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두 스님은 어쨌든 대흥사로 출발했다. 두 스님이 정읍과 장성을
잇는 갈재[蘆嶺]를 넘어가다가 그만 큰 비를 만났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 어쩔 수 없이 산막에서
꼬박 나흘을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또 영산포에 이르자 불이 불어난 영산강을 건널 배가 없어서 또
하루를 지체하게 되었다. 겨우 강을 건너 허겁지겁 두륜산 어귀에 당도하니 단오 날 한낮이 되었다.
두 스님은 일옥의 말을 무시한 것을 뉘우치며 정오가 조금 지나 대흥사에 당도하여 주지스님을 찾아뵙고
그동안의 자초지종을 여쭈었다.
그 스님들의 말을 다 듣고 난 주지스님은 연신 탄성을 내면서 말했다.
“거참, 신기한 일이오. 틀림없이 지난 음 사월 스무 닷새 날 사시에 불이 나서 대중이 불을 끄느라고
정신없이 뛰어다녔는데, 불길이 하도 거세어서 불길을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때에, 난데없이
북녘에서 맑은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 와서 우리 절에만 비가 쏟아져서 겨우 불을 끌 수 있었다오.
더욱 이상한 것은 그날 밤에 온 대중이 같은 꿈을 꾸었는데, 제석보살님이 나타나서 하늘에서
큰 소리로 외치기를, ‘대흥사 불을 끄신 분은 석가여래시니라!’라고 하시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두 스님들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는 일옥이 준 부고장을 내밀었다.
서둘러 대흥사 주지와 일행이 봉서사에 도착하여 보니 과연 단오 날 정오에 희 선사는 서쪽을 향해
가부좌를 하고 입적하였다.
진묵스님 모친 조의씨 진영
진묵스님의 누이 정옥.
김제 만경 불거촌 성모암에 있는 진묵스님 어머님 묘.
月明庵 落照臺
일옥은 스승인 희 선사가 입적하자 삼 년을 스승의 방에서 영(影)을 모시고 살다가 삼년상을 마치고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일옥은 17세에 변산 월명암으로 향했다. 그동안 봉서사에서 여러 신이(神異)한
자취를 많이 남긴 터라 되도록 자신의 자취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변산의 사대 사찰인 내소사, 실상사,
청림사, 선계사 등에는 들르지 않고 바로 월명암으로 올라갔다. 신승(神僧)으로 이름을 날린 자신을 감추자니
일옥이란 이름을 계속 쓸 수가 없어서 산을 오르면서 ‘진묵’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진(震)은 삼한의 진 나라를
뜻하고, 묵(墨)은 적묵(寂黙)이니, 곧 ‘해동의 석가모니’란 뜻이다. 석가모니를 한문으로 의역하여
‘능인적묵(能仁寂黙)’이라 한다.
부안 변산 월명암. 그 당시의 모습은 아니지만 자리는 틀림없을 것이다.
월명암에서 바라보는 동쪽 산악. 저 멀리 어딘가에서 불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목부암(나중에 원등암으로 개칭)
으로 가셨다고 한다.
월명암에 모셔져 있는 진묵스님 진영.
진묵은 월명암에서 묵언을 시작하여 팔년 동안 밤과 낮을 잊고 오직 참선 정진을 하였다. 때로는 법당에서
때로는 낙조대에서 석양을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참선을 하였다.
부안의 변산(邊山)은 원래 불교와 인연이 깊은 산이다. 원효대사가 수도한 토굴인 ‘원효방’과 진표율사의
부사의방장(不思議方丈), 그리고 월명암은 부설(浮雪)거사의 도량이다. 이 가운데 특히 월명암은 신라
신문왕 11년(691)에 부설거사가 창건한 곳으로 유명한 성 도량(聖道場)이다. 부설거사는 불국사 원정(圓淨)스님의
제자인데, 영조(靈照) 영희(靈熙)와 만나 변산에서 10년을 공부하고 오대산으로 가던 길에 만경에서 묘화를
만났다고 한다. 그리하여 부설거사로 칭하고 네 가족이 함께 수행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부설거사는 앞으로
이곳에서 사성(四聖) 팔현(八賢)이 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고 하는데, 사성은 곧 부설거사의 네 권속이고
팔현은 성암(成庵) 행암(行庵) 두 스님과 학명(鶴鳴)선사를 들고 있다. 그러므로 아직 한 자리가 남아 있다.
팔현이라고 해서 사성 이외에 팔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성을 합쳐서 팔현이라고 한 것이다.
사고팔고(四苦八苦)도 네 가지 고통과 여덟 가지 고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八고 속에는 四고가 다
포함되어 있는 것과 같은 말이다.
월명암 연혁에는 초창은 부설거사(신라 신문왕 11년, 691), 제2창 진묵대사(조선 선조 25년, 1592),
제3창은 서암화상(철종 14년, 1863), 제4창 학명선사(1915), 제5창 원명스님(1956)으로 전하고 있다.
부설거사에 대하여는 따로 글을 지을 생각이므로 여기에는 자세한 기록을 하지 않으며, 그 가운데 학명선사는
원불교 교조 소태산과의 교분으로 잘 알려진 어른으로 그 이름이 일본에까지 전해진 유명한 선사이다.
월명암의 낙조는 동해 낙산사의 일출과 함께 한반도 이절(二絶)이라 할 만큼 절경이다. 일출도 장관이겠지만,
서해의 낙조는 훨씬 아기자기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진묵은 눈 비오는 날을 제외하곤 석양 무렵이면 매일같이
낙조대에 서서 무한한 환희와 감동에 찬 표정으로 서녘하늘을 응시하였다.
음력 칠월 보름날 구순안거 회향일인 해제 날이었다. 이 날도 석양에 진묵은 홀로 낙조대에 우뚝 서서
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 같이 팔년을 수행하던 진여(眞如)와 혜성(慧性) 두 스님도 낙조대로 가서 진묵을
바라보았다.
“아~”
진묵은 석양을 바라보다가 오랜 묵언 침묵을 깨고 감격에 어린 한마디 긴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는 장삼자락을
펄럭이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낙조대에서 바라본 서해안 풍경.
“얼씨구 좋구나! 지화자 좋구나! 나는 이제 자유를 얻었노라! 자유를 얻었노라!”
진묵은 자유를 얻었다는 말만 수백 번 되풀이 하면서 흥에 겨워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진여와 혜성은 말없이 지켜만 보았다. 그 얼마나 희열에 넘쳤으면 노래를 부르며 춤을 덩실덩실 추었을까?
진묵이 17세에 월명암에 올라 팔 년간의 적공 끝에 대각을 이루었으니, 그의 나이 26세 때의 일이다.
이것은 또한 참으로 묘한 기연이다. 원불교 교조 소태산께서도 26세에 대각을 이루었으니 말이다. 진묵이
월명암에서 26세에 대각을 이루었는데 반하여, 소태산은 같은 26세에 영광군 백수읍 길룡리에서 대각을
이루었고 4년 후에 이 월명암을 찾아 한쪽에 석두암을 짓고 새 회상을 열 구상을 하며 정양을 한 곳이기도 하다.
우연으로 돌리기에는 참으로 범상치 않은 기연이다. 소태산은 아마도 전세의 자취를 따라 월명암에 잠시 머물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대각한 나이만 같은 것이 아니라 두 대각도인은 또 하나의 공통점을 가진다. 그것은 별로 스승의 지도나
도움이 없이 스스로 자수 자각하였다는 것이며, 또한 스승의 감정이나 해오(解悟)의 증득과정이 없이 스스로
확철 대오하였음을 자인한 것이 공통점이다. 다만 다른 것은 진묵은 세상을 유유자재하며 유희장을 삼다
가셨고, 소태산은 한 회상을 열고 많은 일을 하고 가셨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다르다고 하는 표현도 굳이
하는 말이고, 결국은 같은 일을 하러 한국 땅에 거듭 오신 것이리라.
두 스님은 진묵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진묵이 드디어 대각을 이루어 대자유를 얻은 것으로 짐작할 뿐이었다.
보름달이 중천에 떠오르도록 까지 춤을 추고 기뻐하던 진묵은 노래와 춤을 멈추고 보름달을 응시했다.
그의 안광은 밝은 달빛을 무색케 하고 있었다. 두 스님은 땅위에 엎드려 큰 절을 올리는 것으로 진묵의
큰 깨침을 경하했다. 선객들을 해제가 되었어도 산을 내려가지 않고 용맹적공하고 있었다. 진묵의
큰 깨침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어느 날 밤 진묵의 눈에 먼데 산에서 반짝이는 불빛이 들어왔다. 전주 청량산 방향인데, 그동안 월명암에서
8년을 지냈어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불빛이었다. 그 먼 거리에서 불빛이 보일 까닭이 없는데 오직 진묵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었다. 필시 무슨 곡절이 있는 것 같았다.
이튿날 새벽에 아무도 모르게 산을 내려와 불빛이 보이던 곳으로 향했다. 아침에 진여와 혜성은 진묵이
사라진 것을 알고 무척 서운했다. 두 스님은 생각에 아마도 봉서사로 갔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봉서사를
향해 길을 떠났다.
둘이 한나절을 걸어서 큰 개울가에 당도했을 때 저 멀리서 천렵(川獵)하는 하동(河童)들과 함께 물장난을
하고 있는 진묵을 발견하게 된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다. 진묵은 장삼과 웃옷을 벗어 던진 채 개울에서
고기를 잡은 아이들과 어울려 한바탕 신나게 천진한 모습으로 놀고 있었다.
도반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치고 인사를 나누었으나 진묵은 이내 아랑곳하지 않고 고기떼를 쫓느라고
물속을 첨벙거리며 아이들처럼 마냥 즐거워하고 있었다. 두 스님이 보기에 진묵의 아무 꾸밈없는 천진한
모습이 마치 화장세계(華藏世界)에서 노니는 불보살처럼 보였다.
이윽고 하동들은 그들이 잡은 물고기를 손질하면서 진묵을 흘낏거렸다. 그러면서 배를 가른 고기를 물에
깨끗이 씻어서 한 소쿠리 내밀었다. 스님을 놀려줄 심산이었다.
“스님도 좀 잡수세요.”
진묵은 태연하게 말했다.
“어이구, 맛있겠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먹누?”
“고추장에 찍어 드시는 거예요.”
“허허, 너희들이야 고기만 먹는다지만 어른들은 안주만 먹는 법이 아니란다. 곡차가 있어야지.”
“스님, 곡차가 무언데요? 고기를 안주삼아 먹는 건 술인데요?”
“응, 원래 곡식으로 빚은 거니까 곡차라고 하는 거야. 술은 속된 범부들이나 하는 말이고.”
한 아이가 집으로 뛰어가더니 잘 익은 막걸리를 가져왔다.
“배 가른 것은 너희들이나 먹고 기왕이면 산 걸로 가져 오렴.”
진묵은 곡차를 마시며 살아있는 물고기를 고추장을 찍어 한 동이나 먹어 버렸다. 그러고는 큰 대자로
누워 잠이 들었다. 두 스님은 어안이 벙벙했다. ‘스님이 살생을 하고 술을 먹다니?’ 한숨을 잘 자고 난
진묵에게 말했다.
“어째서 스님이 살생을 한단 말입니까?”
“내가 무슨 살생을 했다고 그러십니까? 그러면 도로 살려 내면 되지요.”
두 스님은 더욱 어리둥절했다. 아이들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진묵을 바라보았다. 이미 뱃속으로
들어가 버린 물고기를 무슨 재주로 도로 살려 낸단 말인가? 진묵은 주저함도 없이 바지춤을 내리더니
개울물에 엉덩이를 대고 힘을 주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싱싱한 살아있는 물고기가 쏟아져 나와 활기차게
헤엄치는 것이 아닌가? 실로 보도 듣도 못한 놀라운 광경에 두 스님과 아이들은 말문이 막혔다. 제자 되기를
간청하는 두 도반과 헤어져 각자의 길을 떠났다.
日出庵의 도반들, 그리고 樂水川 사미
석양 무렵에 당도한 곳은 용진면의 일출암(日出庵)이었다. 봉서사와 비교적 가까운 곳인데, 그곳에는 마침
월명암 도반 진여와 혜성 두 스님이 있었다. 시냇가에서 헤어진 지 3년 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진묵은 이처럼
큰 사찰에는 들르지 않고 작고 가난하여 낡은 기왓장 사이로 물이 새거나 대들보가 내려앉을 만큼 궁색한
절이나 암자만 찾아다니면서 그 절의 중창에 힘을 보태고 다녔다. 그가 머물렀던 사암의 기록에는 거의 ‘...
중창주 진묵당...’이라는 글귀가 나온다. 그러면서도 평생 주지 직은 한 번도 맡아 하지 않았다. 명리를 떠난
물외(物外)도인으로 평생을 지낸 것이다.
일출암 입구에 세워진 비석.
일출암의 건물들. 예전 진묵스님이 계시던 건물이 남아 있는지는 확인해 보지 못했다.
법당 안의 두 보살상인지 부처상인지 새까만 색으로 바닥에 내려 앉아 있다.
일출암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일출암에 주석한 어느 날 진묵은 어머님과 누이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두 도반에게 말했다. 두 도반은
출가한 물외도인의 효심을 생각하며 차라리 어머님을 이 절에서 모시고 셋이서 아들노릇을 하자고 했지만,
진묵은 절에 속가 사람을 들여 사는 것은 세인의 입방가가 될 것이라며 마다했다.
진묵은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사십이 넘은 나이에 진묵이 출가하여 어언 삼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회갑이 다 되어가는 어머니는 누이와 함께 어렵게 살고 있었다.
진묵은 어머니가 계신 김제를 향해 가다가 두 도반과 헤어졌던 낙수천에 이르렀다. 비가 많은 계절이라
물이 불어나서 제법 큰물이 소리 내어 흐르고 있었다. 낙수천을 건널 궁리를 하면서 산모퉁이를 돌아가는데
난데없이 앞에 자기 상좌만한 사미승 한 사람이 앞서 가고 있었다. 진묵은 걸음을 재촉하여 사미의 뒤를 바짝
쫓았다. 사미와이야기를 하면서 낙수천에 당도하였는데, 예상대로 물이 많이 불어나 있었다. 사미가 먼저
바지를 걷고 물에 들어가서 성큼 성큼 걷는데 겨우 무릎 밑에까지 물에 잠기는 것이었다. 개울을 중간쯤 건너던
사미가 진묵을 돌아보며 말했다.
“스님! 얼마 깊지 않은데요. 어서 건너오시지요.”
진묵은 열 대 여섯 살 정도 된 사미가 쉽게 건너는 것을 보고 마음을 턱 놓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갈수록 물이 점점 더 깊어져 가슴까지 닿았다. 다급해진 진묵이 사미에게 소리쳤다.
“어어? 애야 어서 날 좀 구해다오!”
사미는 이미 건너 언덕에 올라가 있었다. 사미는 문득 놀란 것처럼 하면서 여전히 무릎을 적실 정도의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와서 진묵을 덥석 업고 건너편 언덕으로 갔다.
“고맙구나. 네가 아니었으면 큰 일 날 뻔 했구나.”
“아닙니다. 다만 지난날의 묵은 빚을 갚았을 뿐이옵니다.”
사미는 아리송한 말을 남기고 총총히 떠나더니 금방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진묵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기가
달달 볶아대던 그 나한이 장난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묵은 사미가 사라진 곳을 엄숙한 표정으로 응시하다가
크게 꾸짖었다.
“얘, 소승종자야! 네가 비록 신통을 부려 나를 희롱하였다마는, 그 신통이란 것이 전부가 아님을 명심하여라.
신통은 내가 너에게 못 미친다손 치더라도 너희가 여래지를 들기 위해 대도를 닦을 적에는 응당 내게 물을지니라.
내 그대들을 위해 한 게를 줄 것이니, 자세히 들으라.
奇汝靈山十六愚 樂村齋飯幾時休
神通妙用雖難及 大道應聞老比丘
영산의 십육 어리석은 나한 너에게 부치노니,
촌 잿밥 즐기는 것을 언제나 쉬려느냐?
신통묘용은 비록 너에게 못 미치지만,
대도는 응당 이 노 비구에게 들을 지니라.” 아무도 목격한 사람이 없는 이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진묵이 일출암으로 돌아갔을 때 두 도반에게 그 일을 말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진묵은 두 도반의 호의로 일출암 아래 왜막촌으로 어머니를 모셔 왔다. 아무래도 가까이에서 보살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왜막촌은 지금 전주 아중저수지 옆의 왜막 저수지 윗동네라고 한다. 한번은 진묵이 어머니를
만나보러 내려 와 보니, 여름에 모기 등 물것이 많아서 어머니는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심하게 상해 있었다. 진묵은 이에 그곳 산신을 불러 호통을 쳤다.
“그대는 부모님도 없는가? 어찌하여 우리 어머님을 저 지경이 되도록 까지 놓아두었는가? 당장 모기들을
없애지 못할까?”
그 후로 이 왜막촌에는 모기나 깔다구 등이 없어졌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사실여부는 알아보지 못했다.
유앙산(維仰山) 聖母庵
어느 날 아랫마을에서 전갈이 왔다.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나이는 이제 예순 둘이었다.
진묵은 임종할 때가 된 것으로 직감했다. 효심 깊은 진묵은 어머님 곁에서 많은 법문으로 영가를 안심시키며
착 없이 열반하도록 정성을 다했다. 며칠 후 어머니는 조용히 입적하였다. 출가한 아들 일옥과 아직 혼인도
시키지 못한 딸 정옥(靜玉)남매를 두고.
진묵은 향화를 받들 후사 없는 어머니를 위해 그 전에 이미 ‘무자손 천년 향화지지(無子孫千年香火之地)’를
고향 땅에 잡아 두었었다. 어머니를 만경 땅 야트막한 유앙산 자락에 장사지내고 목수를 시켜 현판을 만들어
직접 붓을 들어 다음과 같이 썼다.
「여기 이 묘는 만경현 불거촌에서 나서 출가 사문이 된 진묵 일옥의 어머니를 모셨는바, 누구든지 풍년을
바라거나 질병 낫기를 바라거든 이 묘를 잘 받들지니라. 만일 정성껏 받든 이가 영험을 못 받았거든 이 진묵이
대신 결초보은하리라.」
진묵의 지극한 효심의 원력으로 인하여 성모암에는 지금까지도 향화가 그치지 않고 있다.
진묵은 어머니의 49일이 이르자 원근 대소 사암에 통지하여 수백 명의 스님을 초청했다. 목련존자의
오백승재를 본받아 최후의 효성을 드리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일출암은 아무래도 비좁아서 봉서사에서
49일재를 봉행했다. 진묵은 친히 제문을 지어 어머니의 열반을 애도했다.
「태중에 열 달을 품으신 은혜 어찌 갚으오리까? 슬하에 삼 년을 기르심도 잊을 길이 없나이다. 만 세 위에
다시 만 세를 더할지라도 아들이 마음은 오히려 부족한 마음 앞서는데, 백 년 안에서 백 년도 채 못 되시니
어머님의 수명은 어찌 이다지도 짧으시나이까?
표주박 하나로 걸식하며 사는 이 중은 이미 말할 것이 없사오나 규중에 혼자 남은 어린 누이로서는 어찌
슬프지 않으리까? 이제 벌써 상단을 마치고 하단의 법요도 마쳐서 스님들은 제각기 처소로 돌아가옵니다.
앞산은 첩첩하고 뒷산 또한 겹겹이 쌓인 이 산중에 혼은 어디로 돌아가시렵니까? 아- 슬프고 슬프옵니다.」
성모암 전경과 진묵스님 어머니 묘
진묵의 어머니를 모신 이곳 유앙산 성모암에는 또한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진묵이 어머니의 묘를
이곳에 쓰고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피폐하여 졌다. 그러다가 1919년 계룡산 신도에서 공부를 하던 조남식의
어머니 이순덕화씨가 이곳을 지나다가 하루를 유숙하게 되었는데, 밤에 현몽을 하여 그날부터 사초를 하고
봉분을 손질하며 시묘하기를 오랫동안 하였다. 이와 같은 선행이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협력하여 성모암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후에 조계종이 이를 관리하면서 원래 있던「성모암」현판을
떼어다가 사무실 같은 건물에 걸고 그 자리에는「대웅전」현판을 걸었다.
고시례전은 또 우연하게도 이 자리에 같이 세워져 있다. 전설에 고씨 성을 가진 노파가 돌아다니면서
한 숟갈씩 얻어먹고 살았는데, 그가 죽은 뒤에는 동네 사람들이 그를 위해 첫 숟가락을 떠서 ‘고씨네!’하고
던져준 것이 연유가 되 었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경기지방에 고씨 성을 가진 대갓집 하녀가 냇가로 빨래를 하러갔다가 물에 떠내려 오는
복숭아를 주어먹고 아들을 낳아 ‘도손(挑孫)’이라고 지었다. 그러나 근거가 없는 자손이라 하여 천대와 멸시를
하므로 중국으로 유학을 가서 풍수지리를 배워 와서 어머니의 묘를 만경들에다가 썼는데, 논 주인이 임자 없는
묘를 살펴주니 해마다 풍년이 들므로 이웃 사람들도 그렇게 하고 재앙을 없애고 복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멀리 있는 사람들은 그곳까지 갈 수가 없으므로 음식의 첫 숟갈을 떠서 ‘고시래’를 부르며 ‘고씨네’라고 한 것이
유래가 되었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다. 어쨌든 고시례전과 진묵대사의 어머니 묘가 나란히 있다는 사실과
전해지는 이야기에 일종의 유사성이 갊아 있어 흥미로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