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의 효성을 다한 소녀’, ‘철저한 신앙 처녀’, ‘억세게 일 잘하는 처녀’, ‘애국심이 강한 처녀’ 이런 이야기가 향학열과 애국심에 불타던 유학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진명유치원을 찾아갔다.
김정도씨의 첫눈에 비친 최덕지 보모는 의지적이었다. 확실히 그녀는 특출한 여성이었다. 처녀의 눈에 비친 김정도씨도 준수했다. 당시 드문 사각모에 끌렸다. 많은 여성들이 흠모하는 동경 유학생이었다.
마주 바라보는 사이에 말없는 약속이 이루어졌다. 통영, 고성, 거제, 순회 전도사인 강상은 조사를 통해 부모의 허락을 받았다.
그해 여름 방학 때 통영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호주 선교사 마산 창신학교장 맹호은 목사가 주례를 맡았다. 많은 성도들이 축하 속에 에워쌌다.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외로웠던 최덕지 보모는 부군을 의지하고 사랑했다. 부모에게 못 받은 사랑을 남편에게받았다. 나날의 생활이 기쁨과 은혜로 충만했다. 시댁이 있는 고성은 아름다웠고, 은월리 산과 들이 정다웠다.
그러나 신혼의 즐거운 꿈이 깨기도 전에 부군은 유학의 길을 떠나야 했다. 부산까지 따라갔다. 연락선의 고동소리와 함께 고요히 머리 숙인다. ‘주여 부군과 함께 하소서.’
당시 한국 유학생들에게는 감시가 심했다. 부산 부두에는 한국의 형사들이 조사가 심했다. 일기장, 책, 소지품 등 샅샅이 뒤졌다. 의심나면 경찰서로 연행했다. 일본 시모노세키 부두에 내리면 감시를 또 받았다.
일본 헌병 형사들이 두 줄로 서서 감시의 눈을 번쩍이고 있었다. 이상하면 손끝으로 가까이 오라는 시늉을 한다. 말을 묻고 말이 막히면 소지품 조사나 몸을 수색한다. 동경이나 일본 유학생 치고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은 학생은 없다. 잘못 걸리면 유치장 신세를 져야 한다.
본국에 소환되기도 한다. 혹은 본집에 형사진들이 들이닥쳐 수색을 한다. 부모를 불러 괴롭게 한다. ‘사상 불온’, ‘불온한 책 소지’ 등 온갖 트집을 잡았다. 일경의 가시가 바로 유학생이다.
한 아기를 주신 기쁨 속에
연락선 선체가 시야에서 안보일 때까지 서 있다. 눈물을 닦는다. 멀리 오륙도가 보인다. 갈매기의 울음소리. 남편의 뱃전으로 달려가는 마음, 사모하는 마음은 너무도 애틋하기만 했다.
여름이 가면 겨울방학을 기다린다. 겨울방학에 만나면 또 헤어져 그리움에 사무치게 되고 다시 봄방학을 기다리게 된다.
과거 일제학제는 4월-7월 1학기, 9월-12월 2학기, 1월-3월 3학기이며 여름방학은 현재와 같고 겨울방학이 12월 초순 2-3주간정도였다.
해가 거듭할수록 사랑은 깊어만 갔다. 김정도씨도 아내를 참으로 사랑했다. 그의 열성, 그의 정성, 자기에 대한 애정과 섬김이 나무랄 데 없는 부인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들 사랑에 한 선물을 주셨다. 최덕지 선생 24세 때 첫 딸이 출생했다. 1924년 7월 1일이다. 이름을 혜수라 지었다.(하나님의 은혜에서 빼어 내었다는 뜻)
부군이 출산 전에 한국에 나오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아 방학에야 나왔다.
3주 후에 어린 딸을 본 아빠의 기쁨 비길 데 없었다. 혜수는 아빠와 엄마를 골고루 닮았다. 시부모님도 기뻐했다. 온 교우들도 축복해 주었다. 보는 이마다 행복한 부부라 했다. 이상적인 가정이었다.
그러나 인생의 앞길을 누가 알리오. 그 가정에 검은 먹구름이 덮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당시 통영(전국적으로)에 장질부사 휩쓸었다. 7월이다.
김정도씨가 그해 방학에 왔다가 고성본가에도 미처 가지 못했다. 어린 딸이 너무 귀엽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아내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리라. 학창에 시달린 몸 휴식도 제대로 못한 탓인가, 장질부사에 전염되어 눕게 되었다.
최덕지 선생에게 청천벽력이었다. 하늘같이 의지하는 남편이 아닌가. 당황하고 염려했으나 시댁에 병고를 알리면 부모님의 심려가 클까보아 감추었다. 한편 본가에서는 방학이 다 지나도록 소식도 없고 오지도 않기 때문에 걱정하고 있었다.
병원에 갔다. 열이 많다고 얼음으로 치료하고자 했다.
장질부사 치료는 경험적으로 이열치열로 다스려야 한다. 한약국보다 신의를 믿었다. 경험도 없었다. 8월 더운 염천이다. 열이 40도가 넘었다. 아우성을 치고 밖을 뛰쳐나오기도 했다.
나 먼저 간다는 말을 남기고
당국에서는 전염병이라고 통영 피병막으로 옮겼다. 장질부사는 여자가 간호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런데도 끝까지 남편을 살리기 위해 혼신의 정성을 다바쳤다. 백약도 아무 효험이 없었다.
열이 해소되지 않았다. 1924년 9월 24일 아내의 손을 잡고 그는 말했다.
“나 먼저 가오. 미안해 혜수를 부탁해.” 이렇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운명하였다.
인생이 이렇게 허무한가. 행복이 이렇게 깨어지다니. 놀람이 너무 커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본가에서는 뒤늦게 알고 안타까와 했다.
일찍 연락했으면… 집에서 치료했으면… 한약을 썼으면… 땀을 내어 주었더라면 죽음을 건지지 않았을까 하고 아쉬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명이 재천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어떻게 하랴. 어릴적 부모 잃은 한이 있더니 또다시 부군을 잃은 한이 사무침을 어이할 것인가.
동양 성인의 말에도 ‘하늘이 대임을 맡기려 할 때 먼저 그 심지를 괴롭게 한다’하였다. 인생의 삶이 뜻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 최덕지씨를 장차 일본제국과 싸우기 위해 일찍 그 심신을 연단하심을 깨닫는다.
이때부터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았다. 전심전력 주의 일에 충성했다. 신앙에는 조금도 동요가 없었다. ‘언제죽을지 모르는 인생, 나의 본분을 다하자’ 굳세게 섰다.
통영읍 장로회 대화동교회에서 유치원을 경영코자 했다. 사람이 필요했다. 김 장로란 분이 사람을 찾고 있었다. 변두리 도천리에 도천리 유치원이 있었다. 이 유치원을 설립한 이가 최덕지 선생이다.
1925년 4월이다. 이곳에다 기도실을 설치하고 예배를 인도했다. 목동들을 대상으로 밤에는 간이학교까지 운영했다. 부군 잃은 아픔을 농촌 계몽에 전념했다.
나라 빼앗긴 백성들은 고아같이 불쌍했다. 기름진 옥토도 일본인에게 빼앗겼다. 농사마저 자유가 없었고 자기들의 정책에 이용되었다. 쌀이 없었다. 농촌은 가난했다. 많은 아이들이 굶주렸다.
영양실조의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고구마’로 끼니를 이었다. 갯가에 나가 해초를 뜯고 조개를 잡아 연명했다.
사내아이는 7-8세 때 쯤이면 산에 갔다. 풀을 베거나 죽은 소나무가지를 주웠다. 낙옆을 긁어(갈비라고 함) 오기도 했다. 당시 한국의 온돌방에는 이 땔나무가 필요했다. 이나무들을 지게에 지고 시장에 팔아서 그날그날을 살아가는 농민이 많았다.
헤어진 옷에 떨어진 고무신짝을 끌고 학교를 찾았다. 그래도 배워야 한다는 신념 이것이 한가닥 바람이었다.
최덕지 선생은 우리가 가난해도 몸마저 더러워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다. 아이들의 때묻은 손발을 손수 씻어주었다. 청결부터 가르치고 기도를 가르쳤다. 한글을 가르쳤다. 자기가 옳다고 하는 것은 먼저 실천했다. 해야할 일은 어떻게 하든지 실천하도록 훈련시켰다.
아이들의 손발 씻어주며
가난한 농촌의 기도실, 그 뜰이 언제나 깨끗했다. 유치원 아이들도 손과 발이 깨끗했다. 옷들이 깨끗하고 단정했다. 야학에 오는 학생도 손발을 깨끗이 하고야 교실에 들어왔다.
수업을 마친 후에도 교실을 깨끗하게 정돈해놓고 집에 돌아갔다. 차츰 도천리 유치원과 야학교가 읍내에 알려졌다. 그리고 여러 마을에도 알려진 것이다.(지금은 이곳에 훌륭한 교회가 세워져 있음)
이리하여 김장로가 최덕지 선생을 만났다. 교회가 유치원을 운영코자 하는 뜻을 최선생에게 설명했다. 이를 추진할 인물이 최선생 밖에 없음을 말했다. 자신이 자란 모교회를 섬기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주일학교에 저축해 둔 헌금이 있었다. 이것을 기금삼아 동부유치원을 설립했다. 1927년 10월이다. 도천리 유치원이 서쪽이라 명칭을 동부유치원이라 하였다. 설립과 동시 보모가 되었다.
한편 1928년 9월에는 통영근우회 회장에 피임되었다.
우리 역사에 있어서 권위 있는 두 단체가 있었다. 남자들의 모임으로는 신간회요, 여자들의 모임으로는 근우회를 손꼽을 수 있다. 근우회는 1927년 5월 27일에 창립되었다.
발기인은 황신덕, 최은희, 유영준 등 여러분이다. 이 회는 여성의 지위 향상과 단결을 위해 조직된 것이다. 비종교적 여성계몽 단체인 것이다. 그 행동 강령을 보면 다음과 같다.
1.여성에 대한 사회적 법률적 차별 철폐 2.일체 봉건적인 인습과 미신타파 3.조혼방지 및 결혼의 자유 4.인신매매 및 공창 폐지 5.농촌부인의 경제적 이익 옹호 6.부인노동의 임금차별 및 산전산후 임금지불 7.부인 및 소년공의 위험노동 및 야업폐지
근우회는 한국여성사에 있어 대표적인 단체다. 또는 기독교적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적 색채를 포함하고 있다. 그 구성원은 언론인, 교육가, 의사 등 범여성적이라 하겠다.
그 사상은 근대적 여성관에 토대하고 있다. 최덕지 선생은 이 근우회의 여성지위 향상에 앞장선 분이시다. 자기는 여성임을 후회해 본 적이 없었다. 과부가 되었다고 비관한 적이 없다. 딸자식만 가졌다고 기가 꺾인 때가 없었다. 딸자식을 천대하는 그 시대에서 천금같이 소중이 여겼다.
여권신장에 앞장을
그는 여권신장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였다. 봉건적 인습타파와 미신타파는 행동으로 실천하였다. 인신매매 공창폐지는 그의 임종 때까지 기도 제목이었다. 남녀의 차별 대우는 철저히 반대하며 투쟁했다. 연후 그가 출옥 후 재건교회를 세우고 여성직(여자 장로, 여자 목사)을 확립시킴은 이때 받은 사상의 영향이라고 믿어진다.
이때 교회로서는 큰 시련이 닥쳐왔다. 다름아닌 12월 25일 탄일송을 당국에서 금지하도록 했다. 이는 1926년 12월 25일 일본의 대정천황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는 1879년 8월 31일 소위 명치천황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2년 이후는 대정시대가 된 것이다. 그리고 1926년 이후를 소화천황 시대라 한다.
1927년 구주성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국의 기독교는 그 세력이 점점 강해갔다. 교회가 늘어가고 교인이 불어났다.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기독교인은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는 자들이다.
로마시대 박해가 이를 증명하지 않는가. 진리에 강한 자들이다. 그러나 한 번 시험에 보자는 그 의도가 바로 한국 기독교회에 성탄송을 금한 조처였다. 12월 25일이 바로 ‘대정천황의 붕어일’이니 근신하라는 것이다. 모든 교회가 반대할 줄 알았다. 그러나 뜻밖이다. 한국 기독교가 ‘예’했다. 그래서 ‘탄일새벽송’을 부르지 아니했다.
이것을 본 최덕지 선생은 가슴이 아팠다. 이럴 수가 있는가. 일본 대정 천황이 죽은 날은 일본 국가의 근조일이다. 그러나 예수탄일은 온 우주의 축일이다. 전 세계적 경축일이다. 온 교회는 이 탄일송으로 교회의 존재를 인식시켜 왔다. 불신자들도 이 날만은 기뻐했다. 죄악에 잠든 영혼들이 이 새벽송을 듣고 깨어났고 살아났다. 만백성이 맞이할 구주 나셨음을 알리는 새벽송이다.
“아, 아, 분하다. 한국교회가 병들었다.” 한국교회가 죽었다. 이 작은 일하나 반대하지 못하고 어떻게 하랴. 이 적은 시험하나 이기지 못하고 큰 시험을 어떻게 하랴.
작은 시험 이겨야 큰 시험도
이렇게 부르짖고 두 주먹을 굳게 쥐었다. 일본 당국은 쾌재를 불렀다. ‘강한 것 같으면서 약하군. 목숨을 걸고 반대할 줄 알았지. 인간은 비겁해. 예수쟁이들 큰소리쳐도 별거 아니군.’ 이리하여 차츰 자기들 마음대로 기독교를 요리해 갔다.
기독교 계통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지 못하게 했다. 국기배례를 시켰다. 마침내 팔백만 잡신 천조대신 우상당에 한국 교회를 굴복시키게 된 것이다.
여기 최덕지 선생은 일어섰다. “내가 죽은 한국 교회를 살려야 한다. 병든 한국교회를 치료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여성이다. 약한 자다.” 에스더를 보라. 그는 금식하고 조국을 구하지 않았느냐.
하늘의 음성이 들려왔다.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기도하자. 죽으면 죽으리라. 에스더 말씀대로 뜻을 정하였다.
최덕지 목사 [5]
최덕지 선생은 보모 일을 보면서 금식기도하였다. 처음엔 3일간 금식했다. 물도 마시지 않고 밥과 과일은 물론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한국교회 죄를 용서하소서. 할 일을 안 한 비겁함을 불쌍히 여기소서. 연약한 나에게 힘을 주소서. 불쌍한 내 동포를 건져 주소서.”
주를 사랑하는 간절한 그 심령은 살아 울부짖었다. 한국교회의 작은 일 하나에서부터 한국교회의 장래를 내다보았다. 역사를 지배하고 섭리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다. 인간을 그 역사의 기관으로 삼으신다.
최덕지 선생의 금식하고 기도하는 소리를 들으셨다. 많은 남자교회 지도자들이 교권지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마음은 탐욕과 지배욕에 눈이 어두웠다. 하나님을 보지 않고 일본의 군벌을 본 그들은 비겁했다.
몇 번이나 되풀이 하면서 금식으로 준비한 최덕지 선생을 하나님은 택하셨다. ‘우상국 일본하고 준비한 너가 가서 싸우라’하는 소명감을 받았다. 다음 한국 3,000교회와 50만 신도가 일본 신사당에게 굴복할 때 신사당은 물론 동방요배(궁성요배), 국기배례, 순국선열에 대한 묵도 등 일본의 사상과 의식에 철두철미 반대하고 투쟁하여 완전 승리를 한 이는 오직 최덕지 선생 한 분이다. 이 승리가 이때 준비된 것이다.
◆ 평양 여자신학교 입학과 생활
유치원 경영
동부 유치원에서 최덕지 선생의 희생적인 봉사와 가르침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안겨주었다. 이를 도우고 싶어 하는 선교사가 한 분 있었다. 호주 여선교사 신애미씨다. 1930년 4월에 진명 유치원으로 최덕지 선생을 다시 초빙하였다.
동부 유치원에는 마산에 있던 최봉선 선생을 모셔왔다. 이 분은 박순천 여사의 제자이다. 의신학교 고등과를 나와 일본 히로시마 고등여학교를 졸업한 수재이며, 모든 일에 열성이 있는 처녀였다.
최덕지 선생은 그녀를 청빙하여 자기 후임으로 동부유치원을 맡겼다.(이 분은 3/1운동 만세사건으로 옥고를 당했고 해방 후 의신여학교를 재건하여 교장으로 봉직하다 정년퇴직하고 마산 문화동에서 여생을 조용히 보내고 계심)
최봉선 선생은 유치원을 경영하면서 유치원 교육의 중대성을 깨달았다. 다시 동경여자 보모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왔다.
그리하여 통영 동부유치원을 이론과 실제에 있어 한국 유수의 유치원으로 이끌었다. 이 유치원은 일제 말기에 강제 해산을 당하고 말았으나 해방과 더불어 다시 재건했다.
올해는 34회 졸업식을 거행하고 졸업생 102명을 내보냈다. 한국의 수난과 함께 한 유치원이요, 한국의 발전과 함께하는 유치원으로 그 면모를 자랑하고 있다.
최덕지 선생을 진명유치원으로 청빙한 신애미 선교사는 그의 신앙과 생활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성경말씀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사는 그를 가리켜 ‘최선생은 보통 여성이 아니오, 비범한 인물이오, 주를 위해 크게 일해야 할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최덕지 선생을 평양여자신학교에 추천하였다. 신애미 여선교사는 통영에서 장래성 있는 인물에게는 교육의 길을 열어 주었다 한다.
신학교 교수가 된 공덕귀 여사
그러한 분 중에 공덕귀 여사도 있다. 이 분도 두뇌가 우수해 동래 일신여학교에 보내주었는데 졸업반 때 송창근 목사 부흥회에 참석하여 그 신앙을 인정받았으며, 이로 인해 일본 횡빈여자신학교에 유학하여 졸업하게 되고 졸업과 동시 김천의 송창근 목사 교회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그 후 송창근 목사는 한국신학대학 설립과 동시 학장이 되고, 공덕귀 선생은 이 신학교 교수직을 맡았다.
1932년 4월 최덕지 선생은 평양여자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의 나이 33세 때다. 가슴이 뛰었다. 마치 병사가 전쟁을 위해 부름받아 입영하는 감회였다. 33살에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속을 십자가로 완성하였고, 최덕지 선생은 그 나이에 예수의 뒤를 이어 십자가 전선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최덕지 선생이 신학교 입학하기 전해인 1931년 7월에 만주 만보산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 군인이 비적을 소탕한답시고 우리 한국인을 사살한 것이다. 집과 재산을 불태운 사건이다. 그리고 1931년 9월 18일에는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한국을 침략한 그들은 만주마저 침략한 것이다. 1932년 9월 일만의정서에 조인하였다.
일본은 입으로는 평화를 말하면서 실상은 평화를 교란했다. 동양 전체를 침략하려는 악마의 나라였다. 바로 세기의 사탄이다. 최덕지 선생은 이 사탄과 싸우기 위해 신학교에 간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신학은 ‘신앙을 조직하는 것, 신앙을 체계 세우는 것, 신앙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신교의 신학은 성경말씀을 토대하고 그 위에 세우는 것이다.
말씀은 곧 검이라 했다. 좌우의 날센 검이다. 그는 이검을 잘 갈았다. 일본국 사탄과 싸우기 위해서다. 한국인의 신앙은 이 말씀을 중하게 여겼다. 그래서 다른 피선교국보다 발전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선교사가 들어가서 그 다음 성경을 번역했으나 우리나라는 다르다.
우리말 성경 번역은 처음 만주에서 이루어졌다. 다음은 일본 요꼬하마에서다. 만주 것은 1880년에 만주 목단에 와 있던 죤 맥킨타이어(스코틀란드의 연합장로교 선교사)와 존 로스가 있었다.
이분들이 서상륜과 이응찬에게 복음진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었다(1881년). 서상륜이 두 선교사에게 우리말을 배워주었다. 1883년 1월에 존 로스는 “한국의 글자는 현존하는 문자 가운데서 가장 완전한 문자”라고 경탄했다. 그래서 우리말로 성경을 번역했다.
성경이 우리말로 번역되고
최초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1882년에 나왔다. 1883년에는 요한복음과 사도행전 3,000부가 간행되었다. 1884년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1887년에 이르러 ‘예수교성교전서’라 하여 신약 전부가 번역 간행되었다. 서상륜은 성경을 만주 동포에게 전하였다.
그리고 1883년에는 압록강을 건너서 본국에 전한 것이다. 일본 번역은 이의 수정 번역이라 한다. 이 수정은 일본 수신사 박영효 사절단의 수행원이다.
이 분이 동경 외국어학교의 한국어 교수이다. 본래 통리외무 아문의 협판이었다. 그가 일본에서 기독교인 쯔다 센(일본 농학계의 대표적인 인물)을 만나 친교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그의 집 병풍에 한문 산상보훈을 보고 감탄했다. 이분에게 기독교 교리를 배우고 신앙이 싹트기 시작했다. 다음 동경에 있는 야스가와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때 일본 주재 장로교 선교사 조지 녹스와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 목사와 함께 성경연구에 정진했다.
그는 일본어가 유창했고 시에도 능했다. 이로 인해 이 수정은 선교사와 일본인 사이에서 적지 않은 관심사가 되었다.
그는 성경을 보고 “이 겨레의 소망이 여기에 있다”고 부르짖었다. 성경 번역의 뜻을 세웠다.
최덕지 목사 [6]
때마침 녹스 목사의 친구인 헨리 루미스가 그를 방문했다. 이 분은 일본주재 영국 성서공회 총무였다. ‘복음서’를 한글로 번역하는 일을 맡아달라고 했다. 흔쾌히 수락하고 번역을 시작했다.
1884년 한한신약성서에 토를 달아 영국 성서공회에서 출간했다. 다시 1885년 마가복음이 미국 성서공회를 통해 1,000부가 출판되었다. 한국에 최초의 선교사였던 언더우드 목사가 1885년 1월 동경에 왔다. 한국엔 갑신정변으로 입국하지 못하고 있었다. 3월까지 머물면서 한국말로 번역된 성경을 보고 놀라와 했다. 그리하여 번역된 이 ‘마가복음’을 가지고 4월 25일 입국한 것이다. 우리 겨레는 진리에 대한탐구심이 강했다. 우리의 한글이 우수했다. 복음을 준비하고 선교사를 맞이했다.
최덕지 선생이 신학교에 입학할 때 학비는 대여장학금을 받았다. 기숙사에 있기로 했다. 한국에서 유일한 신학교였다. 전국 각지에서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기숙사에는 한 방에 두 사람이 합숙하였다. 최덕지 학생은 김택정 학생과 동거하였다.
그는 평안도의 의주 출신이었다. 합숙과 동거는 지역간 감정과 생활습성을 이해시켜 주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남과 북의 장벽을 무너뜨렸다. 동과 서의 파벌을 융화시켰다. 학업에도 정성을 다했다. 당시 쟁쟁한 교수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도 교회사의 윤필성과 선지서의 김인준 두 교수에게 감화를 많이 받았다.
기독교 박해사를 배우며
기독교 박해사를 배울 때는 가슴이 뛰었다. 로마시대 박해는 실로 무서운 것이었다. 로마에 복음이 전해진 것은 바울로 인해서다. 기원 3,000년까지는 박해에 박해가 거듭되었다. 기독교회사는 로마의 십대 박해라 한다.
네로 황제는 자신이 로마시에 방화하여 그 책임을 기독교도에게 뒤집어 씌웠다. 이로 인해 교도들이 네로 자신의 생일연에 촛불을 대신하는 화형을 당했다. 베드로와 바울도 순교를 당했다. 그뿐 아니라 ‘나라 안에 딴나라 만든다. 비밀결사를 한다. 황제 예배를 안 드린다. 사람을 잡아 먹는 놈들이다(성찬식 때 예수님 말씀 ‘떡을 내 몸이라, 포도즙 잔을 이는 내 피라’한데 대한 오해). 지진과 흉년이 기독교로 인함이다’라고 미워하며 모함했다.
그들은 교도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관직을 박탈했다. 고문하고 투옥케했다. 맹수의 밥이 되게 했다. 투기장에 몰아 넣고 사자에게 찢기는 것을 로마시민의 구경거리로 삼았다. 못을 박아 숨지게 하고 불로 태워 죽였다. 먼 섬에 유배시키기도 했다. 많은 교우들이 순교했다. 그 중에서 트라야노 황제 때(97-117) 맹수밥이 된 익나디오가 남긴 말에는 깊은 감명을 받고 고이 간직했다. ‘침묵하고 진실한 신자는 변호하고 진실치 못한 신자보다 낫다’ ‘검을 두려워 않는 자는 하나님과 가깝고, 맹수와 같이 있는 자는 하나님과 같이 한다’ ‘철주같이 굳게 서라’ ‘상함을 받으면서도 승리를 얻는 것은 진정한 무사의 본분이다.’
또한 라틴교부터 툴리안(160-234)의 말도 잊을 수가 없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종자다’ ‘기독교는 풍속이 아니라 진리다’ ‘진리는 외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심에 있다’ ‘이성에 불합한 고로 믿음이 있다.’
김인준 교수는 원어(히브리어 헬라어)에도 능통하였다. 그리고 선지서를 가르침에도 권위가 있었다. 더욱 다니엘서에 크게 은혜를 받았다. 바빌론 제국이 큰 세력을 가졌다. 유다를 멸망시키고 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아갔다. 다니엘, 하나냐, 미사엘 등도 포로였다. 이들은 우상국에서도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기로 뜻을 세웠다. 느부갓네살왕은 자신의 신상을 상징하는 금우상을 만들었다. 이를 두라 평지에 세워 그 제막식에 모든 국민을 참배케 했다.
그러나 유다에서 잡혀 온 세 소년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는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으나 절하지 않았다. 죽지 않았다. 그들이 믿은 그대로였다.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 아옵소서(다니엘 3장 17-18절.’ 이렇게 구원되었다.
다니엘과 같이 승리하리라
또 다리오 왕 때다. 우상국 갈대아가 망하고 메데가 대신한 것이다. 127도로 방백을 세우고 그 위에 세 총리를 두었다. 다니엘은 그 중에 하나다. 악한 자들이 다니엘의 정직과 진실을 시기했다.
다니엘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알았다. 악법을 만들었다. 한달을 정하여 다리오 왕만 섬기게 하고 다른 신을 섬기는 자는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했다. 이 법령이 공포되고 다니엘은 동방 예루살렘을 항하여 문을 열고 여호와께 예배를 드렸다.
이 법을 어긴 죄로 사자굴에 던져 넣었다. 사자는 무죄한 다니엘을 해하지 아니하였다.(다니엘 6장 참조) 이와 같은 성경 말씀을 통하여 자신도 뜻을 굳게 세웠다. “내 몸이 불 가운데 들어가도 우상 섬겨서는 안 된다” “내 몸이 사자굴에 던지움을 당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범죄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풀무 불이 바벨론 두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땅에 있다. 일본은 바로 로마제국과 같다. 우상국 바벨론과 같다. 언제 어디서 시험의 풀무와 사자굴이 닥쳐올지 모른다. 교회사에 나타난 교부처럼 싸우리라. 다니엘과 같이 승리하리라. 세 소년과 같이 풀무불을 견디어내리라. 신학교에 입학한 것이 다행한 일이었다. 배움이 참으로 귀한 것이었다. 확신이 섰다. 용기가 솟았다.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국교회가 맞이할 불시험을 이길 힘을 달라고 빌었다.
“주여 내게 지혜를 주옵소서. 배우는 학과를 감당케 하옵소서. 주여 내게 능력을 주옵소서. 진리를 위해 싸울 수 있게 하옵소서.”
학교 생활하는 동안 유명한 산정현교회로 파송받았다. 장년반 주일학교를 담당하였다. 주일 오전 예배드리기 앞서 성경공부를 가르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매사가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다’라는 교훈을 그대로 지켜 충성하였다.
그의 열심은 주일학교에 출석치 아니한 이를 반드시 예배 후에 심방하는 정도였다. 어떤 부인이 있었다. 이 부인은 심방을 가도 잘 출석하지 않는 부인이었다. 어느 주일날 그가 자진 출석하자 너무 반가와 물었더니, 그 집에 일하는 이가 있었는데 “최 선생이 열심히 심방해 주심에 감동을 받아 주일이 되면 신까지 깨끗이 씻어주고 밥까지 시간 전에 지어주고 교회 가도록 독촉하여 이렇게 출석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최덕지 선생은 무슨 일을 하거나 무엇을 맡으나 최선을 다했다. 남보다 앞섰다. 그의 기질의 한 면모를 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1933년 4월 신학기가 되었다. 2학년 때다. 그의 신앙의 철저함이 교수들에게 인정받았다.
생활의 진실함과 실천성이 학생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2학년임에도 학우회 회장이 된 것이다.
최덕지 목사 [7]
학우회 회장이 된 후에
최덕지 회장은 학우회를 잘 통솔해 갔다. 기도하는 일, 전도하는 일, 봉사하는 일, 제각기 자기 위치에서 본분을 다하도록 이끌었다. 학생들의 기질도 지방마다 특성이 있었다.
평안도는 열성이 대단하고 함경도는 억세고, 황해도는 아담하고, 강원도는 대범하고, 전라도는 영리했다. 충청도는 얌전하고, 경상도는 무뚝뚝하면서도 끈덕지다. 서로 돕고 사랑하고 학원은 평화롭고 은혜로왔다.
그러나 때 아닌 회오리 바람이 불어왔다. 고요한 바다에 노도광풍이 휘몰려 왔다. 다름아닌 이용도 목사 이단사건이다. 또 하나는 동료학생 퇴학 사건이다. 그 진상은 이러하다.
동료 학생의 퇴학 사건
어떤 신학생이 있었다. 평양 출생이다. 용모가 아름다웠다. 이 학생에게 먼 친척되는 청년 한 사람이 있었다. 학교에 종종 찾아왔다. 허물없이 만났다. 하루는 모든 학생이 다 수업을 받고 있는데 이 학생은 학생실에서 청년과 단 둘이서 지냈던 것이다.
공교롭게 그 후에 배가 아프다고 며칠 결석을 하였다. 이 일을 학생들이 문제를 삼은 것이다. 수업시간에 신학생이 청년을 만나다니 수업을 받지 않고 그 시간 단둘이서 무슨 짓을 했느냐. 왜 배가 아프냐. 왜 결석했느냐 등으로 동료 학생을 정죄하고 학교당국에 퇴학을 요구했었던 것이다.(학생들은 아기를 잉태했다고 주장함)
이에 학우회장 최덕지는 어찌하여 동료를 그렇게 의심할 수 있으며 정죄할 수 있느냐고 변론했다. 보지도 못하고 추측으로 퇴학을 요구하는 무정함과 잔인함을 성토한 것이다. 진상을 조사했으나 하등 의심할 것이 없었다.
가정상 피치 못할 일이 있어 청년과 의논한 것을 신학생이 부정하다, 불륜하다고 논란한 것이다. 많은 학생은 동료를 동정하지 않았다. 다들 분노했다. 학교 당국도 학생편에서 해결코자 했다.
이에 대해 최덕지 학우회장은 신학교가 잘못 가는 학생이라도 선도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예수님은 현장에서 잡힌 음행한 여인도 용서했다. 죄를 주지 아니했다. 많은 학생을 진정시키고 설득했다. 그러나 군중심리에 휩싸여 많은 학생들이 더 발악하고 계속 소요 사태를 벌이자 학교당국은 그 학생을 결국 퇴학시키고 말았다. 많이 울었다. 예수를 따르겠다는 저희들이 동료를 억울하게 돌을 들어 친단 말인가.
이용도 목사 이단사건
이용도 목사는 감리교 출신이다. 협성신학교(현 감리교 신학대학)를 졸업했다. 젊은 시절(25세 때) 폐병으로 고난을 겪었다. 그리하여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체험을 지녔다.
‘나는 주의 사랑에 삼킨바 되고 주는 나의 신앙에 삼킨바 되는 이 합일의 원리여. 오 나의 눈아, 주를 바라 일심으로 주만 바라보라’고 그는 고백했다.(변종호씨 ‘이용도 목사전’에 의함)
그는 시무언이라는 호를 가지고 전국을 석권한 대부흥사다. 당시 교회는 형식화되어 가고 사랑이 메말라 있었다.
이용도 목사는 교권에 대해 무서운 비판과 공격을 했다. 사랑의 불길이 타오르게 했다. 최덕지 선생도 이 부흥회 때 크게 은혜를 받았다.
그는 항상 검은 무명 두루마기와 검은 동정을 달아 입었다. 거리에 헐벗고 굶주린 아이를 보면 자기 숙소에 함께 데려와 먹이고 재워주었다. 최덕지 선생이 이용도 목사님댁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된장국과 비지장으로 잡수셨다. 저명한 부흥사의 식탁이 그렇게도 초라함에 놀랐다. 그의 청빈에 목이 메었다. 그뿐 아니다. 이 목사의 부인은 감기로 아파 누워 있었다. 병원에 가지 않았다. 약도 사주지 않았다.
찬물 한 대접을 떠 와서는 눈물로 기도하였다. ‘오 주님이시여. 사랑의 주님이시여. 능력의 손길로 나의 처를 어루만져 주소서. 이 찬물을 마시고는 일어나게 하소서. 오 긍휼의 주님을 믿고 구합니다.’ 이 기도로 사모님이 일어나심을 보았다.
하나님의 종이요, 주님의 사자임을 믿었다. 또한 겸손한 목사였다. 그가 지나간 곳마다 은혜가 폭포같이 쏟아졌다.
회개의 눈물은 강물 같았다. 기도소리는 하늘에 사무쳤다. 산을 찾는 기도꾼이 늘어났다. 다른 목사는 욕심쟁이로 보였다. 싸움꾼으로 보였다.
이용도 목사 집회에 참석하고부터 탕아는 성자가 되고 탕녀는 성녀가 되었다. 그 반대로 목사, 장로 당회, 노회, 총회 때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드디어 한국교회가 돌을 들어쳤다.
감리교회나 장로교회에서 금족령을 내렸다. 집회를 금했다.
드디어 1933년 9월 22일 총회 때에 이단으로 단정하고 말았다. 이 바람이 평양여자신학교에 닥쳐왔다. 모든 학생이 이용도 목사를 의심하고 이단을 단죄할 때 최덕지 회장은 싸웠다.
한국교회가 그의 주님을 향한 절대적 사랑과 실천을 이해 못하고 시기하여 이단으로 몰았다고 변호했다.
그의 신비주의를 단죄했다. 설움 당한 민족을 위해 함께 울어준 자가 누구인가. 한국의 양떼들이 어디에서 이 좋은 풀을 먹을 수 있겠는가. 누구의 생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겠는가.
이는 이용도 목사의 사랑과 실천에서만 얻어진 것임을 최덕지 학우회장은 역설했다. (물론 뒤에 여러 사람으로 인해 잘못된 점이 있었으나) 옳은 사람을 억울하게 하는 일에 자신이 믿는 사람을 끝까지 배신하지 않았다.
대중에 따르지 않았다. 세력과 다수의 편에 치우치지 아니했다.
오직 공의만을 따랐다. 이런 일들의 경험과 싸움이 한국교회가 모두 일본에 가담할 때 오로지 혼자의 몸이나마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진리를 위해 싸울 수 있었다.
전도의 용장 최봉석 목사
최덕지 학생은 존경하는 목사님이 있었다. 최봉석 목사이다. 그는 1870년 정월 5일 평양 장경문 안에서 출생하였다. 16세까지 한문을 공부하였다. 자기 집에 귀신당집들이 많이 있었다. 부모 없는 틈을 타 그 곳에 오물을 퍼부었다.
이로 인해 부모에게 매를 맞고 원두우 목사에게 찾아가 예수를 믿었다. 26세 때 하늘에서 불덩이가 가슴에 떨어져 기절하였다.
후에 열심히 전도하게 되었다. 평북 만주 등지로 다니며 73개 교회를 세웠다. 여러 번 죽을 자리에서 기사와 이적으로 살아났다.
별명을 최권능 목사라고 불렀다. 벽동목회시대 때 천장절(일본 천황 생일) 경축식장에서 천황사진에 대한 경례를 거절했다.
이로 인해 국경수비대에 잡혀가 뭇매를 맞고 기절한 몸을 메어왔다. 얼마 후 소생하였다.
이 사실은 윤산온 선교사가 미국 신문에 발표하여 전 세계에 전해졌다. 그러나 1944년 4월 19일 그는 신사참배를 거절, 평양감옥에서 순교했다. 최덕지 선생은 많은 감화를 받았다.
최덕지 목사 [8]
◆경남노회 여전도사 시절
마산지방 부인 전도사
세월은 흘러갔다. 신학교 졸업반이 되었다. 대개 신학교는 입학하고 계속 공부하는 이가 적었다. 그러나 최덕지 학생은 계속 공부하였다. 새봄이 왔다. 졸업 때가 되면 일할 목장을 구하기 여념이 없었다.
최덕지 학생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고 있었다. 청빙이 왔다. 마산지구 미순회 여선교사 태매시 선교사가 불렀다. 졸업과 동시 전도사로 일해달라는 부탁이다.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허락하였다.
1935년 4월 평양여자신학교 제22회 졸업생으로 교문을 나섰다. 새로운 임지 미순회 마산지방 전도사가 되어 마산으로 부임했다. 당시 노비산(속칭 제비산)은 선교사들의 거주지역이다. 마산 합포만이 굽어보이고 뒤에는 상남천이 흐르고 있었다.
풍광명미한 곳에 미순회 본부가 있었다. 의신학교가 아래쪽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 기숙사에 최덕지 전도사는 혜수 따님과 거처하였다.
미순회 마산지구는 그 산하에 83개교회가 있었다. 함안군, 창원군, 김해군, 의령군 일대에 산재해 있는 교회들이다. 미순회 소속으로 함께 일한 전도사는 윤도일, 염애나, 이복순, 이술연, 김택정, 박경애 등이 있었다.
복음의 사자로서 일선에 나왔다. 양떼들을 잘 먹이고 잘 가르쳐야 한다. 또한 파수꾼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 파수꾼은 경성하고 있어야 한다. 경찰해야 하고 경고해야 한다. 마치 나라에 징집된 병사가 교육을 다 마치고 일선에 배치된 것과도 같다.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보람과 긍지와 감격이 함께 했다.
순회할 때는 태매시 선교사와 함께 다녔다. 보통 토요일에 가면 교인들 가정을 심방하고 전도하며 가정예배를 인도하고 주일예배의 설교를 맡았다. 또한 주간학교를 운영하였다.
이는 학교에 못가는 농촌 아이들을 가르치는 임시학교였다. 최 전도사가 가는 교회마다 많은 일거리가 생기고 많은 성도들이 모여 들었다. 그의 설교는 철저한 신앙의 고백이요. 생활 속에 우러난 간증이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감화케 하였다.
가여운 할머니의 시중을 들고
이러한 일화도 있었다. 어떤 가엾은 여노인이 한분 있었다. 몸이 불결해 악취가 났다. 방바닥에는 청소를 안해 변이 말라 붙었다. 이를 보고 매주일 찾아가서 물을 데워 노인을 목욕시켜 드리고 방바닥변(똥)은 칼로 긁어 깨끗하게 청소하여 주었다. 남이 할 수 없는 더럽고 어려운 일을 몸소 실천하는 것이었다.
순회가 끝나면 몸이 몹시도 피곤했다. 의신학교 기숙사에는 마산교회 교인 중 한글을 모르는 부인들이 언제나 찾아오고 있었다. 이들에게 애써 한글을 가르쳐 주고 이분들이 모두 성경을 읽도록 이끌었다. 많은 분이 집사가 되었다.
이 무렵 마산 경찰서장 초청으로 교회 목사, 전도사, 장로 그 외 각 학교교장 등 지도자의 모임이 있었다. 소위 종교 간담회라는 것이다. 서장의 인사와 시국에 대한 설명이 있었고, 신사참배에 대한 의사를 타진하는 것이었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안식교, 각 목사, 장로 조사 중 문창교회 한상동 목사에게 감상을 물었다. 성경상으로 신자는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고 거절함으로써 이 모임은 끝났다. 여기 신사참배 문제로 인해 교회가 수난을 당하기 앞서 많은 학교들이 수난을 당했다. 그럼 과연 ‘신사’란 어떤 것인가.
일본은 신도로서 설명된다. 일본의 국체는 개국신 천조대신(아마데라스 오오미까미)과 800만 야호요로주노가미로 성립된다. 종교적인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태양신을 중심한 다신국가이다. 이는 미개한 나라들이 다 가지는 원시종교에 불과하다. 즉 원시신이며 자연신이며 인간신이다. 그리고 역대 천황은 현인신(아라비도가미)이라 하여 신으로 올려받든다. 이 신들은 생산신이요 수호신이었다.
일본에서 대표되는 것이 이세신궁이고 한국에는 조선신궁이다. 일본에서 전쟁을 하다 죽으면 다 수호신이 되어 영웅으로 대접받는다. 일본에서 참배하는 것은 호국정신을 심어주기 위함이다. 이것을 한국에 실시코자 한 자가 바로 제6대총독 우가끼다. 그는 조선을 일본화하기 위하여 한국 방방곡곡에다 신사를 짓게 하였다. 신사참배는 죄가 아니라고 우겨대는 교회 지도자가 있는데, 분명 일본 국신이니 우상이고 참배는 바로 계명을 범하는 죄다.
수난의 날은 다가오고 있었다. 1936년 8월에 제7대 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로 인해 본격적인 신사참배 강요가 표면화되었다.
학교에 대한 강요
1932년 평양서 춘기황영제의 제례에 각종 학교의 참석을 요구한 데서부터 시작된다.(이는 만주사변 전몰 장병위령제임) 학교 책임자는 기독교 교리에 있어 제례에 참석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때 일본 관리는 승리의 미소를 짓고 제2단계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위한 교활한 계획을 서서히 굳혀갔다.
당국은 전국 각급학교에 ‘신사참배 여행 명령’을 시달하였다. 학교는 교리신조와 관계됨으로 상회지시가 있기까지 기다리기로 하였다. 장로교 총회 학무부에 자문을 요청하였다. 1932년 9월 제21회 총회는 ‘교회학교 학생이 신사 및 여러 제식에 참배할 수 없다는 것을 총독부 당국에 교섭할 것’을 결정했다. 차재명, 유억겸, 마포삼열 세분을 교섭위원으로 선정하였다.
총독부에 교섭위원을 보냈으나
그러나 교섭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1933년 전북 노회장이, 1934년은 황해 노회장이, ‘기독교학교의 신사참배문의서’를 제출하였다. 평남 순천 자산교회 목사의 ‘지방관청의 신사건축비징수문제’ 문의서도 제출되었다. 1934년 12월 6일 총회장 이인식 목사가 전 총독부 교섭위원과 함께 재청원키로 했다.
“총회 산하에 있는 유치원, 간이학교, 보통학교, 중학교, 전문학교, 신학교, 성경학교의 생도 및 학생의 신사불참배 허용’에 관한 청원서를 제출했다. “여기 총독부는 아무리 교회경영의 학교들이라도 조선총독의 교육령에 의하여 운영되는 학교들이다. 반드시 총독의 교육정책에 따라야 한다. 참배를 부인 불원하는 학생이 있다면 그들의 이름을 지명하여 청원하라.” 이것이 총독부 종교과장의 엄명이다. 청원서는 또다시 퇴각되고 말았다. 결국 신사참배 문제는 각 학교 당국의 신앙양심에 맡길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신사참배를 기독교 학교에 강요한 최초의 사람은 평남도지사 야스다께였다. 1935년 11월 14일 도내 공사립중등학교 교장회의를 소집했다. 개최벽두 참석자 일동에게 평양신사 참배를 명령했다.
이 자리에 숭실중학 윤산온 교장, 숭의여중학 정익성 교장 대리는 명령에 불응했다. 교장회의가 끝난 후 ‘신사참배는 국민교육상의 요건이므로 금후 참배에 응하지 않을 때는 단호히 처치한다’는 공문이 야스다께 지사 명의로 발송되어 왔다.
최덕지 목사 [9]
12월 20일까지 회답의 여유를 달라고 요청했다.
윤산온 교장은 1935년 12월 13일 미북장로교 선교실행위원회(회장 허대전, 위원 소열도, 위원 로해리)와 의논한 바, 참배 거부키로 결정했다. 동년 12월 14일 총독부는 외사과 촉탁인 김인옥을 새벽에 윤산온 교장댁에 보내어 그 결정을 내사하였다.(김인옥은 윤교장과 사제지간이었음) 윤교장은 제자에게 사실을 알려주었다. 동시에 다음과 같은 답서를 야스다께 지사에게 보냈다.
“신사의 제식에 있어서 종교적인 여러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것과 또한 신사에서 신들을 경배하고 있는 사실이 확실함으로 기독교 신자인 나로서는 신앙양심상 신사에 참배할 수 없음.”
여기 평남지사는 다른 방도가 없음을 깨닫고 이 사건의 처리를 총독부 학무국에 의뢰하였다. 총독부는 그 뒤 독 전국 지사 경찰부장 및 경찰서장 회의를 소집하고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당국의 태도를 결정했다.
1936년 1월 16일 야스다께 지사는 숭전교장 윤산온 박사와 설립자 마포삼열 선교사를 도에 불렀다. 신사참배 문제에 최후 확답을 요구했다. 18일까지 태도를 결정하되 불참시는 사표 제출을 지시했다.
윤산온 교장과 마포선교사는 평양선교사회 숭전이사회, 평양교역자회를 소집했다. 신사참배 문제를 검토했다. 신사참배 불가론이 우세했다.
그러나 각 학교 이사들의 의견은 학교 존폐문제를 고려했다. 학교 전체가 아닌 대표자 참배로 당국에 응하자고 결의했다. 그리고 학교 전체 참배 거부와 대표자의 파견은 교장의 재량에 일임키로 하였다.
신사참배 학교 대표자는 반드시 교장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 학감이나 과장 중 한사람이 희생됨으로써 학교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로서 역사 깊은 교육기관은 폐쇄를 면케 되었다. 이렇게 생각한 윤산온 교장은 ‘대표자의 신사참배를 용허’하는 답서를 도지사에게 내기로 작정했다.
답서를 제출하기 앞서 신사참배 문제에 관심이 많은 박형룡 박사, 주기철 목사에게 찬부를 문의했다. 그들은 대표자 참배 역시 기독교 학교 전체의 굴종을 의미하므로 불가하다는 의견을 강하게 내세웠다. 윤산온 교장은 드디어 그들의 의견에 동조하고 그 답서를 난로 속에 던져버렸다.
윤산온 교장의 결심
18일 야스다께에게 신사참배를 거부할 뿐 아니라 교장직 사면도 불응한다는 답서를 제출했다. 이에 야스다께는 곧 숭실전문학교장 인가를 취소하였다.
총독부에서 윤산온 선교사는 교육자로 부적당하니 숭실전문학교 교장직을 취소해달라고 상신했다. 1936년 1월 20일부로 총독부는 그의 숭전교장직의 인가를 취소하였다. 1월 21일 숭의여중학교장 스누크에게도 같은 조처를 내렸다.
북장로교 선교부는 폐교를 각오했다. 그러나 교회지도자 및 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폐교를 반대했다. 이에 따라 선교부는 폐교를 일단 보류하고 다음과 같이 후임을 총독부에 보고했다. 2월 26일이었다.
3월 4일, 숭전교장 마우리선교사, 부교장 이훈구 박사(농과과장) 3월 5일, 숭중명예교장 마우리선교사, 교장 정두현(숭전 교수) 3월 12일, 숭의여중교장(사무취급) 김승섭 교사. 1936년 3월 21일 윤산온 교장은 귀국하였다. 귀국 후 신사참배 부당성 논문을 선교부에 제출했다. 학교정책에 남장로교와 보조를 같이할 것을 권고하였다.
이때 미 남장로교 외지선교국 총무인 훌톤 성명이 나왔다. 1937년 2월이다.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남장로계 기독교 학교는 일제이 폐교할 것을 결정”하고 이를 전주선교총회를 소집하여 발표한 것이다.
1937년 9월 4일 전남북도 지사들은 학교장을 소집하고 애국일 행사 사전협의를 하였다. 남장로교계 남녀중고등학교 교장은 애국일에 궁성요배 행사는 참여할 수 있으나 신사참배는 교리에 위반되므로 시행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한편 학교 직원, 생도에게도 이 뜻을 발표했다. 9월 6일이 애국일로 정해졌다. 각급학교에 신사참배 시행을 요구했다. 이날이 지난 후 각 지역의 여러 학교에 폐교명령을 내렸다. △광주=숭일남자중학교·수피아여자중학교△목포=영흥남자중학교·정명여자중학교△순천=매산학교△전주=신흥학교·기전여학교(폐교 명령이 내리기 전 자진 폐교함)△군산=영명학교 그 외 10여학교 모두 폐교.
당국은 폐교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아국의 신사는 황실의 조선 혹은 국가의 원훈을 제사하는 곳인데 여기에 참배하는 것은 제국 신민된 자의 당연한 의무이다. 고래로 경신숭조는 아국교육의 근본 방침이다. 하물며 이번 애국일 당일의 참배는 황국의 융창과 황군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는 중요한 국가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계 학교장들은 용허할 수 없는 태도를 취하였고, 학생들에게까지 비국민적 행위를 강요한 것은 제국교육의 근본을 교란하는 것으로 절대로 묵과할 수 없어 도로서는 단호한 처분을 내리게 되었다.”
이 성명은 신사가 종교이건 아니건 일본국민된 자는 신사에 참배해야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기독교 신자는 죽음으로 항거하는 외에는 딴 도리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훌톤 성명과 남장로교 처사에 용기를 얻은 북장로교 선교회본부는 1937년 다음 결정을 내렸다.
1. 동선교회가 경영하는 학교들은 매각 또는 양도하지 않는다. 2. 숭전·숭중·숭의여중은 폐교원을 내고 폐문함.
그 후 대구의 계성, 신명, 재령의 명신, 선천의 신성, 보성, 강계의 영실 등 여러 학교가 차례로 문을 닫았다. 이와 같이 학교를 폐쇄시킨 여세를 몰아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할 계획을 세웠다. 총독부가 각도에 시달한 교회에 대한 시정방침은 다음과 같다. 1938년 2월이다.
1. 시국인식 철저를 위하여 기독교 교역자 좌담회를 개최하여 지도계몽에 힘쓸 것. 2. 시국인식의 철저를 위한 지도 및 시설. (1)교회에 국기게양탑을 건설할 것. (2)기독교인의 국기경례, 동방요배, 국가봉창, 황국신민서사제창을 실시할 것. (3)일반신도의 신사참배에 대한 바른 이해와 여행에 힘쓸 것. (4)서력년호의 사용을 삼갈 것. 3.찬송가 기도문 설교에 있어 내용 불온한 것은 엄중 취체할 것. 4. 당국의 지도에 따르지 않는 신자는 법적 조치를 취할 것. 5. 국체에 맞는 기독교의 신건설운동은 이를 적극 원조할 것.
이상과 같이 5개 시정방침을 세우고 서서히 신사참배를 강요할 태세를 취하였다. 그러면 신사참배 강요의 의도는 무엇 때문인지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민족으로 하여금 일본신들에 대한 봉제와 민족 정신의 말살에 있었던 것. 2. 일본의 식민정치의 기본책인 정치의 실현을 위한 것. 3.신사참배로서 민족 정신을 유린하고 해체시켜 한국인을 소위 일본황국 신민으로 만들려 하는 것. 4. 한국교회의 신앙생명을 송두리째 말살해 버리는 것.
평북노회가 맨 먼저 무릎을 꿇고
여기 유일신 하나님을 신앙하는 성도가 신사에 허리를 굽힐 수가 없었다. 민족 정신을 지키려는 애국지사들로서 이 신사 앞에 굴복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국에 있어 최초로 신사참배를 결의한 노회는 평북노회다. 1938년 2월 9일이다. 한국장로교 23노회 중 17노회가 평북노회의 전철을 밟았다. 비록 강요했다 할지라도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이라고 체념했다.
한편 당국은 장로교의 유력한 지도자를 몇 사람 선택했다. 이들을 일본에 보내 신사참배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시켜 교회를 유도하도록 했다. 신사참배 반대자 이승길 목사를 포섭했다. 5월 24일 오문환, 김응순, 장운경 목사 등을 일본으로 보냈다. 그러나 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다음 6월 29일 평양기독교친목회(친일 단체)의 초청으로 일본기독교 대회장 도미다 목사를 소치했다. 그의 강연을 통해 신사참배의 종교성 부인과 신사참배는 애국적 국민의례임을 역설케 했다.
이 자리에 많은 교역자들 불러 모았고 경관이 수십 명이 지켜보고 있었다. 강연이 끝나자 주기철 목사가 일어나셨다. “우리는 도미다 목사의 강연을 듣고 그 풍부한 지식을 흠모하는 바이나, 성경에 비추어 신사참배하라는 말은 용인할 수 없습니다”라고 반박하였다. 원래(遠來)의 도미다씨는 의외의 반박에 얼굴이 붉어졌다. 경관은 독한 눈초리로 주목사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청중은 놀라고 또한 통쾌하였다. 주최자는 무색하였다.
1938년 9월 9일은 장로회 제27회 총회가 개최되는 날이다. 당국은 각지 경찰서장에게 총회 총대로 선정된 노회대표들에게 다음 3조 중 택일을 강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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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총회에 출석하면 신사참배가 죄가 아니라는 것을 동의할 것. 2. 신사참배 문제가 상정되면 침묵을 지킬 것. 3. 전기 양조를 실행할 의사가 없으면 총대를 사퇴하고 출석하지 말 것.
이외에도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불응하는 사람은 검속 투옥할 것도 아울러 지시했다. 총회 개회 전일 평양 경찰서장은 평양, 평서, 안주 3노회 대표를 불러 다음과 같이 각본을 짰다.
평양노회장-신사참배는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제안할 것. 평서노회장-신사참배 결행을 동의하고 안주노회장-재청을 강요하여 허락을 받는다.
본래 총회 장소가 신의주에서 평양 서문밖 교회로 옮겨졌다. 1938년 9월 9일 오후 8시 역사적인 제27회 총회가 막을 올렸다. 그 익일 오전 9시 30분 총회 속회날 수백명의 사복경관으로 교회가 완전 포위되었다. 강대상 아래는 평남경찰부장을 위시하여 고위경관 수십명이 긴 검을 차고 앉았다. 총대들의 좌우에는 지방경찰관 2명씩이 끼어 앉았다.
실내 후면과 좌우에는 무술경관 100여명이 눈을 부라리고 서 있었다. 그 살벌한 분위기는 전쟁터를 방불케 하였다. 당시 저들의 압력에 끌려온 27노회(만주의 4노회 포함) 대표는 목사 88명, 장로 88명, 선교사 30명, 합 206명이었다. 9월 10일 10시 50분 총독부가 짠 각본대로 평양노회장이 신사참배결의 및 성명서 발표의 긴급제안을 했다. 평서노회장과 안주노회장이 동의와 재청을 했다. 총회장은 전신을 떨면서.
협박속에 신사참배는 가결되니
“이 안건이 가하면 예라고 대답하십시오.”라고 묻자 제안자 재청자 10여인만이 떨리는 목소리로 “예”라고 대답하고 전원이 침묵을 지켰다. 이는 신사참배 부당성을 표시한 것이다. 이때 수백명 경관이 일제히 일어나 일대 위협을 표시했다. 당황한 총회장이 ‘부’를 묻지 않고 그대로 만장일치 가결을 선언하였다. 이는 회무처리상 불법이다.
이때 선교사 30여명 전원이 일어나 “불법이요” “항의합니다”라고 외쳤다. 이때 봉천노회 한부선 선교사는 무술경관에게 옥외로 축출까지 당하였다. 이 소란 속에 서기는 성명서를 낭독했다.
아등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요,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에 신사를 솔선여행하고 추히 국민정신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하에서 총후황국신민으로서 적성을 다하기로 기함. 소화 12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장 홍택기
이때 평양기독교 친목회원 심익현이 총회원 신사참배 즉시 실행을 특청하였다. 부회장 김길창의 안내로 전국 노회장 23명이 총회를 대표하여 평양신사에 참배했다. 한국 보수교단을 자처하는 장로회 총회가 불법 강요 앞에 비참히도 굴복하고 말았다. 기독교 신자에게 있어 신앙의 정조를 보전함이 생명보다 귀한 것이다. 동일 하오 1시에 선교사들은 따로 모여 다음의 항의서를 총회에 제출했다.
1. 신사참배 가결은 하나님 말씀에 위반이요. 2. 장로교 헌법과 규칙을 위반함이요. 3. 일본구법인 종교 자유헌장에 위반이요. 4. 이번 처사는 보통 회의법의 위반이요.
동월 12일에는 권찬영 외 25명의 연서로 총회에 다음과 같은 항의서들을 제출했다.
총회의 결의는 하나님의 계율과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에 위반될 뿐 아니라 우리들에게 발언을 허하지 않고 강제로 회의를 집행한 것은 일본 헌법에 부여한 종교자유의 정신에도 어긋난다라는 요지다. 그러나 이것마저 경찰의 강압에 각하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신사참배 문제는 자진굴복의 치욕 속에 일단락을 고하였다. 여기 잠간 다른 교단의 신사참배 결의를 살펴보자.
1. 천주교회 1936년 5월 25일 성명
“한국천주교 장정에는 신사는 다른 신들을 위하는 곳이므로 참배할 수 없느니라”고 명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태리와 일본과의 친선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교황청포교성의 “신사참배는 종교적 행사가 아니고 애국적 행사이므로 그 참배를 허용한다”는 성명에 따라 신사참배, 수난을 면했다.
2. 감리교 1938년 9월 3일 성명
총리사 양주삼 목사의 명의로 신사참배 여행성명서를 발표, 다음과 같이 굴복하였다.
“연전에 총독부 학무국에서 신사참배에 대하여 조회한 바를 인쇄배부한 일이 있거니와 신사참배는 국민이 반드시 봉행할 국가의식이요 종교가 아니라고 한 것을 잘 인식하였을 줄 압니다. 그런고로 어떤 종교를 신봉하든지 신사참배가 교리의 위반이나 신앙의 구애됨이 추호도 없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소화 13년 9월 3일 기독교조선감리회 총리사 양주삼
3. 안식교회 1936년 12월 신사참배 승인 가결.
4. 성결교회 1943년 12월 29일.
강압에 못 이겨 성결교회 해산, 신사참배 승인하다. 이렇게 한국교회는 신구교 모든 교파가 공격적으로 다 범죄했고 여기 신앙투쟁사가 전개되었다. 따라서 많은 신사불참배운동이 일어났다. 숨겨진 역사를 밝히면서 최덕지 목사의 본격적인 투쟁을 알아보자.
◆ 경남 여성경학교 시절
성경 강의
그는 미순회 여전도사로 재직하면서 경남 여성경학교 교사에 임명됐다. 이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나선 것이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시초는 평양신학교에서 부터이다. 신학생 장홍련이 김일선(평북노회장. 제일 먼저 신사참배를 결의한 노회)의 기념식수를 벌목한 데서부터 도화선이 되어 일어났다.
당시 평양신학교 교장, 교수들은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 선교사들 간에도 의견의 일치가 없었고 연전학교는 오히려 신사참배를 지지하였다. 최덕지 전도사는 1936년 4월부터 진주에서 경남 각 지역으로부터 모여든 여성경학생들을 가르쳤다. 처음 2, 3년 간은 성경 말씀 자체에 대한 강의에 열중하였다.
여학생들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계시는 3가지가 있다. 첫째가 양심계시다. 양심은 사람마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양심에 따라 살 때 실수가 적다. 둘째는 자연계시다. 곧 천연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천지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셋째는 성문계시다. 곧 성경말씀이다.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이 성경으로 천지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하심을 안다.
또 성경은 인류의 죄와 하나님의 의를 가르치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나 사탄의 유혹으로 배신하고 타락하고 만다. 하나님의 의는 곧 예수님이시다. 범죄한 인간을 위해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여기 믿음이 필요하다. 곧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것에 대한 예언이요 준비다. 신약의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 오심과 그의 가르치심과 생활의 기록이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역사다. 곧 팔레스틴(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복음이 지리적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을 석권한 역사다. 또한 당시 지식의 그리시아를 정복하고 힘의 로마를 복음이 정복한 역사다. 편지서들은 기독교의 해석이요 설명이다. 중심 인물은 야고보, 베드로, 요한, 바울이다. 그 중에 바울이 대표적이다. 그에 있어 기독교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이 사실이 모든 시대, 모든 민족, 모든 종교를 능히 구원하고 승리할 수 있는 힘이었다.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이 있다. 이는 인류의 구원과 회복, 모든 완성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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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성경은 구약이 39권이요 신약이 27권, 모두 66권이다. 기록한 연대로 보아서 약 2천년에 미친다. 또 기록한 사람은 44인이란 다수다. 이 모든 것이 한 성경이요, 하나님의 말씀이라 함은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류 구원의 계획’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 감동에 의해서 기록된 사실이다. 인간의 기록이 아니라 저자는 한 기자인 것이다. 지금도 성경은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다.(참조 ‘사람이 성령의 감동함을 입어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라’ 베드로후서 1장 12절) 또한 성경은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승리의 힘을 가지고 있다. 성경처럼 많은 핍박과 공격을 받은 책은 없다. 많은 사람이 이를 없애버리려고 했다. 많은 나라에서 불태우고 보는 자를 죽이고 했다. 그러나 성경은 없어지지 아니했다. 그 사람을 정복하고 그 나라를 지배했다.
위자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이 세상은 불행한 사람이 많다. 가난하고 병들고 외롭고 압제당하고 소외당하고 멸시당하고 범죄한 자들이 방황하고 슬퍼하고 있다. 이들에게 성경은 새로운 소망과 용기와 기쁨과 위자를 주고 있다. 감동과 변화케 하는 힘이 있다. 사람 잡아먹는 미개인이 성경으로 새로운 인간이 되었다.
해적국이 성경으로 문명국가가 된 영국을 보라. 실망의 나라 덴마크가 성경과 믿음으로 이상국이 된 것을 보라. 로마를 보라. 미국을 보라. 스위스를 보라. 오늘도 어제 탕아가 오늘 성자가 된다. 지금도 신약과 구약만 먹으면 산다. 이 약을 먹으면 참 지혜자가 된다. 성경은 신앙의 표준이 된다. 어떤 신앙을 가지고 어떻게 믿느냐 그 표준이 성경이다. 인간과 우주의 원리가 있다. 여기 신관, 인생관, 죄악관, 그리스도관, 종말관까지 다 밝혀주고 있다.
성경은 실행의 표준이 된다. 우리가 실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가. 종교적 원리 뿐 아니라 교육·정치·경제·사회·법률까지 향상케 할 원리와 표준이다. 칼빈 신학은 4대주권을 말씀했다. 우주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 구원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주권, 생활에 있어서 성경의 주권, 성경해석에 있어서 양심의 주권이다. 최덕지 교수는 자기가 이렇게 믿고, 기초를 성령과 신앙에서 철저히 가르쳤다. 당시 성경학교는 일년 일차 4월 개학하여 5월까지 2개월 계속하였다.
우상에 대한 계명을 증거하고
1938년 9월 10일 총회적으로 범죄한 후에 성경학교는 양상이 달라졌다. 지금까지 학문을 중심한 수업이 반대 투쟁장으로 변모했다. ‘신사참배’, 이는 하나님 앞에 제일 큰 죄됨을 인식시켰다. 십계명 1, 2계명을 위반함을 말했다. 성경의 우상에 대한 계명을 증거해 주었다.
1. 우상을 만들지 말라(출 20장 4절) 2. 타신에게 경배치 말라(출 20장 5절) 3. 우상숭배는 멸한다(신 4장 26절) 4. 우상을 네게 두지 말라(신 5장 7절) 5. 자손에게까지 책벌하신다(신 4장 25절) 6.우상제물 먹지말라(행 15장 29절) 7. 우상숭배에 불참할 것(고후 6장 16절)
우리는 하나님만 공경하자. 계명을 지키려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나같은 죄인을 택하신 하나님 사랑. 나의 죄를 위해서 갈보리 산 위에 십자가 지신 예수의 사랑. 어려울 때 나를 도와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성령의 사랑.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한 14장 21절). 나와 여러분은 예수 위해 목숨을 바칩시다. 나의 목숨보다도 부모보다 세상부귀 영화보다도 주를 사랑합시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진리를 지킵시다. 증거하는 교수도 비장했고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도 눈시울이 뜨거웠다.
밤에는 뒷산으로 올랐다. 비봉산이었다. 기도하기 위해서다. 십자가를 앞에 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생각했다. 알지 못하고 신사에 굴복한 자는 회개의 기도를 했다. 범죄한 한국교회를 위해 울었다. 우상국 일본이 진노받을 것에 마음이 아팠다. 끝까지 승리하도록 힘달라고 매달렸다. ‘신앙만능’ ‘기도만능’을 체험시키고자 했다.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기도할 때 침략한 ‘불레셋’을 하나님은 물리쳤다.
아랍군대가 엘리사와 그 제자를 포위했을 때 기도로써 불병거와 불말로 지켜 주었다. 영호사반의 기도 때 모압·암몬·세일을 물리쳐 주었다. 히스기야가 기도할 때 앗수르 군대를 정복시켜 주었다. 박관준 장로는 믿음과 기도로 일본갈 때 도항증 없이 가서 일본의회에 진정서를 투척하지 않았는가. 그럼 이 시기에 전국적으로 어떤 조직망을 가지고 어떻게 활동했는가 잠간 살펴보기로 하자. 최덕지 전도사는 개인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이 조직과 함께 협력하여 보조를 같이했고, 자기 신앙과 사상을 굴하지 않고 더 굳세게 철저하게 지키며 싸웠다. 신사 불참배운동 분포지역 및 지도자는 이러하다.
(1)평안북도 주도 인물 이기선 목사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자기가 목회하던 교회(의주 북하동교회 8년)를 사면하고 1939년 4월 평양 채정민 목사와 더불어 신사참배 결사반대 동지를 규합토록 했다. 동지를 확보하면 전국적으로 신사불참배 교회를 설립할 것을 다짐했다. 다음 김의창 목사와 함께 황해도와 평안남북도 일대를 순방하며 동지를 얻었다. 신의주에는 김화준 전도사 이광록 집사 김창인, 영변에는 박관준 장로(다음 평양으로 나옴), 박천에는 안이숙 선생(후에 평양으로 옮김), 강계에는 고흥봉 목사, 서정환 전도사, 장두희 집사, 선천에는 김인희 전도사, 김의홍 전도사, 박신근 집사, 정주에는 김영악 등이 활동하였다.
1940년 월 중순경 이기선, 김영악, 박의흠, 계성수, 김성심, 오영은, 김창인, 김화준, 심일철 등이 모여 다음과 같이 기본방안을 결정했다.
1. 신사참배 학교에 자녀를 입학시키지 말 것. 2. 신사불참배 운동을 일으켜서 현실교회를 약체화 내지 해체시킬 것. 3. 신사불참배 신도를 규합하여 가정예배를 가지며 그것을 육성하여 교회를 신설할 것.
(2)평안남도 평양을 중심 : 주기철 목사 주도 신사불참배 운동의 본거지는 바로 평양 산정현교회요, 주동 인물이 주기철 목사이다. 주 목사는 1938년 2월에 1차검속, 1938년 8월에 2차검속, 1939년 8월 20일에 3차검속, 1940년 5월 4차검속 당하고 1944년 4월 25일 순교를 당하였다.
최덕지 목사 [12]
(3)경상남도 : 부산과 마산을 중심으로
부산에는 한상동 목사, 조수옥 전도사, 손명복 전도사, 배학수 선생 등이고 마산에는 최덕지 전도사, 태매시 선교사, 염애나 전도사 등.
거창에는 주남선 목사, 함안에는 이현속 전도사, 남해에는 최상림 목사(옥중 순교), 진주에는 최덕지 전도사, 통영에는 최덕지 전도사, 김영숙 전도사, 고성에는 최덕지 전도사, 전라남도에는 손양원 목사, 만주에는 한부선 선교사, 봉천에는 박의흠 전도사(순교), 안동에는 김영악 전도사, 최용삼, 계성수, 김성심, 무순에는 박연지 집사, 할빈에는 김윤섭 집사.
(4)경남에서 최덕지 전도사의 활동사항
1939년 12월에 밀양 출신 이인재 전도사가(당시 평양에 있었음) 평북 평남 신사불참배운동 현황을 자기가 시무하던 밀양교회에 임시로 시무하는 한상동 목사에게 보고하였다. 두 사람은 마산의 최덕지 전도사를 만나 경남 신사불참배 운동 방법을 의논키로 하였다.
신앙 동지 한상동 목사가 찾아와
1940년 1월 1일(일본인의 신정을 택한 것) 마산 제비산 소재 태매시 선교사 방에 있는 최덕지 전도사를 한상동 목사와 이인재 전도사가 방문하여 다음 사항을 합의결정했다.
1. 신사참배한 현 노회는 해체토록 한다. 2. 신사참배한 목사에게 세례받지 않는다. 3. 신사불참배주의 신도들만의 산노회를 조직한다. 4. 신사불참배 동지의 상호원조를 도모한다. 5. 신사불참배 그룹 예배를 드리고 동지획득에 주력한다.
최덕지 전도사는 한상동 목사에게 신앙 동지로서 협력하고 따라서 자신은 경남 일원의 부인, 동지 획득에 노력할 것을 승낙하였다.
1940년 3월 초순에 한상동 목사가 최덕지 전도사를 방문했을 때 각각 그간 활동을 피차 보고했다. 이때 최전도사는 일금 50원을 원조하였다.
1940년 3월 5일엔 경남부인 전도회가 부산 항서교회에서 회집됐다. 새 임원을 선출한 것이었다. 만일 신사참배를 긍정하는 자가 선출되면 경남부인 전도회는 죽고만다. 신사불참배자가 임원으로 선출되어야 한다.
이 싸움을 위해 최덕지 전도사는 다음과 같은 전략활동을 폈다. 동년 3월 1일 진영 거주 염애나 전도사를 방문했다. 한상동 목사님도 오게 하셨다. 경남노회 산하인 부인전도회 임원선거가 중대함을 설명했다. 각 회원을 설득키로 했다. 진주, 부산 방면은 한상동, 김해 방면은 염애나, 마산 방면은 최덕지. 이렇게 분담했다.
최덕지 전도사는 3월 3일 마산 문창교회 여신도를 모았다. 박겸순, 박덕실, 이삼순, 김두식, 김영숙, 이계진, 태매시 등 중심되는 집사, 전도사, 선교사들이었다.
이 자리에서 자기의 신앙사상을 피력했다. 3월 5일 여전도회가 모이면 애국적 행사라고 동방요배를 할 것이다. 신사참배는 물론 못하거니와 동방요배나 궁성요배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때 많은 지도자(목사, 선교사)가 신사참배는 못할 것이라고 반대하면서도 동방요배는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멀리 계시는 산 임금에게 절하는 것이니 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최 전도사는 일본의 국체는 산 임금이나 사람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아라비도가미 즉 ‘신’이라 했다. 사람이라도 신이라고 하여 섬기면 분명히 성경에 위배된다. 계명을 범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국기 배례도 성경위반이다.
절한다는 것은 산 인격을 의미함이다. 고로 존경의 대상이나 종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순국령의 묵도도 못한다. 산 자가 죽은 자를 복 빌수 없다. 이것도 다 성경위반이다. 다음 경남여전도회 임원선거는 전원 불참배자로 뽑아야 함을 역설했다. 마귀의 세력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신 능력을 보여주자고 호소했다. 여성도들의 가슴은 뛰었다. 얼굴에는 결의가 엿보인다. 드디어 3월 5일이 왔다. 애국행사도 예배 전에는 못했다. 임원선거가 시작되었다. 최덕지 씨가 회장에 당선되었다. 총무 기타 간부 모두 불참배자가 당선되었다. 하나님은 진리의 편이시다.
기도하기를 더욱 열심히 하니
최덕지 전도사는 기도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했다. 그의 강철같은 믿음이나 중인을 앞서는 영지는 기도에서 얻어진 것이다. 한번은 동지 김영숙, 박경애, 태매시 등과 비밀기도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 한상동 목사, 이인재 전도사로 방문했다. 평양 산정현교회를 중심한 운동의보고를 이 전도사가 했다.
그리고 우리도 일치단결하여 조선의 파수병의 사명을 다하고자 했다. 그때 평양측이나 한상동 목사 등의 신앙노선은 궁성요배는 죄가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해방 이후에는 긍정했다). 이는 민족적 감정으로 고집하면 순수한 신앙싸움이 아니라고 했다. 이에 최전도사는 다시 한번 궁성요배를 토의하고 반대할 것을 권면했다. 궁성요배 반대에 대한 그 이유와 설명은 전술한 바와 같다.
여기(평양 지방법원 예심종결서) 31명중 14호(최덕지) 6항에는 한상동 목사에게 죄된다고 토의하고 이로써 ‘천황폐화의 존엄을 모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책 말이 전재함).
최덕지 전도사는 한 목사를 존중히 여겼으며 궁성요배도 바로 깨닫도록 기도하였다. 그뿐 아니라 계속 적극적으로 한상동 목사에게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검속과 투쟁
제1차 구속
박인순이란 아가씨가 있다.(이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자로 해방후 부산 영도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다 현재 미국에 가 있음) 진주 여성경학교에 가기 위해 마산에 왔다. 당시 성경학교에는 신사참배 찬반 두 세력이 있었다.
마산의 최덕지 선생도 진주에 갔다. 당국에서 성경학교를 인가없다는 구실삼아 수업을 못하게 하였다. 최덕지 선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에 사람의 방해를 받을 수 없다 했다. 이렇게 하여 1940년 4월 초순 경남여자성경학교는 개학을 하였다. 주일이 되었다. 박인순은 진주 옥봉교회를 가고자 했다. 마산지방 학생과 함께 가기 위해 기숙사에 들렸다. 그러나 최덕지 선생은 타협한 교회에 가지 말고 기숙사에서 예배드리게 했다.
박인순 자신이 인도하였다. 성경을 펴니 크게 능력이 나타났다 한다.
최덕지 목사 [13]
기숙사는 보통 밤 10시에 소등하고 새벽 6시에 기상함이 규칙이다. 기숙사엔 학생이 없었다. 전에 기도하던 옥봉 뒷산을 가 보았다. 이곳에는 최선생과 30여명의 학생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
기도의 제목은 ‘경남노회가 해운대 예은배 선교사 기념관에서 회집한다. 이 때 신사시종이 결정된다.’ 이것을 막기 위해 간절히 기도함이다.
박인순의 증언에 의하면 노회 때 동래경찰서 형사 세 사람이 참석했으나 노회 다 마치도록 졸다가 돌아갔다 한다.
당국에서 진주여성경학교를 그대로 두지는 않았다. 경찰서에서 선생과 학생을 송환해 갔다. 기숙사에 있는 모든 소지품을 가져가 개인별로 챙겨 고향집으로 압송했다. 최덕지 선생은 마산경찰서에서 4월 9일 검속해 갔다가 4월 26일 석방시켰다. 이것은 제1차로 당하는 경험이다. 왜정 말기에 민족적 탄압이 극심하였다.
앞서는 ‘수양동우회’ 및 ‘흥업구락부’ 사건을 일으켜 민족지도자들을 검거하여 투옥시켰다. 또다시 평양산정현교회를 폐쇄하고 평양신학교를 폐쇄하고 아울러 전국 각 도시 200여 교회의 문을 닫게 했다. 2000여 성도를 구속하고 50여 순교자를 내었다. 전시 하 한국교회의 수난이 막심하였다.
검속중 최덕지 선생은 금식기도로 싸웠다. 처음 경찰서가 사람을 구속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은 문답에 의하여서다.
1. 신사참배가 국민의식이냐, 종교의식이냐. 2. 천조대신이 높으냐, 그리스도가 높으냐. 3. 국가가 제일이냐, 종교가 제일이냐. 이 물음에 대하여 자기네에게 만족한 대답을 하지 않는 성도는 가차없이 구속, 투옥시켰다.
제2차 구속(진주 유치장에서)
마산경찰서에서 풀려나와 동월 27일 박경애씨의 초대에 참석했다. 위로를 위한 만찬회다. 이곳에는 태매시 선교사, 이술연, 이복순 전도사들도 자리를 같이 했다. 감사예배를 드렸다.
“여러분!” 최선생 입을 열었다. “죄를 짓지 맙시다.” 눈을 감고 경찰서 유치장을 연상한다. “나는 지옥을 체험했습니다.” “주님의 도움을 구합시다.” “끝까지 승리합시다.” 이 간단한 예배시간에 은혜와 감명이 넘쳤다. 최 전도사는 많은 사람이 죄를 짓고 유치장 속에 갇혀있는 군상을 보았다. 만일 우리가 약하여 신사참배를 했을 때 지옥갈 것을 생각했다.
모진 고문 금식 기도로 이기고
최덕지 전도사가 경찰에서 당한 ‘고문’ 내용을 다 기록하지는 못한다. 너무도 잔인하고 혹독했기 때문이다.
당시 전쟁말기 왜경의 단말마적인 광란이 증오의 대상인 기독교인들에게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상상에 맡긴다. 이 무서운 고문과 포악을 최 전도사는 오직 하나의 무기 ‘금식기도’ 이것으로 종국에 승리를 얻었다.
모이는 곳이면 이 기도를 부탁했다. 석방이 되면 ‘금식기도’를 준비하였다. 검속이 되면 ‘금식기도’로 항거하였다. ‘죽으면 죽으리라’ ‘이 한목숨 주를 위해’ 다부어 바친 결사적 기도-여기 힘이 솟았다. 주님이 지켜 주었다.
1940년 6월 23일 진주에 왔다. 이곳에서모 김성심씨와 동생 최달구씨가 있었다. 그 동안 통영읍 조봉연 집을 순방하였다. 통영 성도 십여명을 모았다. ‘가정기도회’를 개최하여 신사불참배 운동을 전개하였다.
5월 25일이다. 6월 초순에는 창원 북면 신촌교회를 순방했다. 창령군 영산면 학포교회를 순방했다. 창원군 대산면 모산교회를 순방했다. 김해군 진영면 사산교회를 순방했다. 신사참배는 바로 우상예배다. 가만이 집에 피해 있을 수가 없었다. 태양신과 싸워야 했다.
이것이 진리의 전쟁이요, ‘신앙은 곧 싸움이다’를 증명한다. 이 모든 지방을 거쳐 드디어 진주 자기집 어머니와 형제를 위해서 온 것이다.
최선생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주변성도들이 모여 들었다. 박내복, 강신애, 문경업 등 십여명이었다. 예배를 드렸다. ‘예수를 사랑합시다’ 주제로 설교했다. “우리가 신사에 절하고 계명을 범치 아니하려면 예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방안에는 사랑의 열기가 감돌았다. 하늘에는 은혜의 문이 열렸다. 가슴마다 뜨거웠다.
이때 밖에서 문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모두 긴장했다. 예배를 마쳤다. 보이는 얼굴은 바로 진주경찰서 고등계 형사 김을도였다. 최덕지 선생을 위시해서 예배드린 전원을 진주경찰서에 구속했다. 이때 구속된 것은 김을도 형사와 의형제를 맺은 목사의 고발에 의한 것이었다.(이분은 현재 서울에서도 큰 교회의 유수한 목사로 재임하고 있다)
최 선생이 이 때 당한 고문은 전 감옥생활을 통해서도 가장 혹독했다 한다. 그 중에도 더 가슴아프게 한 일이 있다. 교인들이 당하는 고문이다. 그 고문보다 더한 아픔이 있었다. 이는 고문당한 교인들이 ‘신사참배하겠다’ ‘아무것도 모르고 왔다’면서 고문에 이기지 못하고 변절함이다.
이 아픔을 이기기 위해 드디어 21일 장기간 금식기도를 하였다. 현대 많은 교단과 교인이 금식(단식)을 한다. 그 일수에 있어 40일 금식도 말한다. 그러나 대부분 물을 마시고 과일즙을 마신다.
최덕지 선생은 전연 물 한모금 삼키지 않았다. 21일은 구약성경 다니엘서 다니엘이 조국을 위한 21일 금식에서 본받은 것이다. 금식도 성경대로 모든 것이 주님 뜻 안에서가 그의 신앙의 기본태도다.
김을도 형사 배후를 목사가 조종한 고로 더 악독했다. 낮에는 XXX목사에게 성경을 배워 밤에만 고문했다. 유치장 안에서 주는 밥에다 소독약을 뿌려서 가져왔다. 최 선생은 금식기도할 때 소독약 뿌린 저들이 “삼계탕 가지고 와 먹게 하소서” 했다.
잔악무도한 김을도 형사
21일의 장기금식을 보고서 포악한 일경도 잔악한 김을도 형사도 이 위력 앞에 자신들이 굴하고 말았다. 가족들을 소환, 최선생을 석방하여 진주 공의집에 머물게 하였다. 죽을까 두려워 저들은 삼계탕까지 가져와 먹게 하고 회복을 빌었다.
몸이 회복되자 1941년 1월 중순 재차 구속하였고 도경찰국 감방으로 이송되었다.(추기=김을도 형사는 해방과 동시 진주 시민에게 맞아 죽었다 한다)
제3차 구속(도 감방으로)
12일 금식한 몸을 5일 휴식한 최덕지 선생은 진리싸움을 다시 계속했다. 그의 활동상황을 간추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기도와 투쟁 조목
1.하나님을 위하여 죽음을 각오할 것. 2.전 조선교회가 하나님의 뜻대로 3. 옥중동지가 진리를 증거하고 승리하여 석방되도록 4. 이 나라가 기독교국이 되도록 5. 천황과 위정자가 회개하고 기독교도에게 자유를 주도록.
(2)증거한 말씀 제목
1. 신앙은 만능이다. 2. 예수를 사랑하라. 3. 자녀의 명분을 중시하라. 4. 안식일을 존종하라. 5. 신은을 감사하라. 6. 아무 염려하지 말라. 7. 복 받는 길 8. 흩어진 바벨탑 9. 재림을 준비하라.
(3)순방한 교회들 20여교회
그가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있어 여러 지역에서 활동을 하였는데, 통영은 자기의 출생지요, 고성은 시댁이 있는 곳이요, 진주는 새어머니와 성경학교 까닭이요, 마산은 바로 자기의 목회지역인 이유 때문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이상과 같이 활동하였다.
1942년 8월이 왔다. 최덕지 선생은 자기의 시가인 고성군 거류면 은월리 교회에 와 있었다. 이 기회가 한때나마 가족이 단란한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그의 하나뿐인 ‘혜수’따님과도 사랑의 정을 나누었다.
태평양 전쟁이 치열해 갔다. 정권에 가담한 노회가 신사참배 반대자를 가시처럼 여기게 되었다. 드디어 노회가 신사참배 반대성도를 일제구속케 한 것이다. 최 선생에게는 삼천포에서 노회원이 피하도록 권면의 편지가 왔다.
그러나 피할 것이 아니라 옥중으로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혜수(19세)를 숙부되는 김정수씨께 맡기려 했다. 부산에 있었다. 고성을 떠나 부산가는 길에 통영에 들렸다. (2006. 6. 8. 크리스천신문)
최덕지 목사 [14]
조봉련 선생 댁이다. 주일이 되어 최선생 오셨다고 많은 사람이 모였다. 예배를 드렸다. 이때 구속이 되었다. 함께 구속이 된 사람은 송복득, 윤갑득, 김조금, 김순연, 정모열, 황의조 등이다. 이 날로 통영에서 도감방으로 이송되었다. 이때 구속한 죄목은 ‘비밀결사죄’다. 항상 비밀리에 기도회를 가진 까닭이다.
경남 도경 감방에서(제4차 구속)
이때 도감방에는 모두 6감방이 있었다. 제1감방에는 최덕지, 송복덕, 박인순, 배학수 등이 수감되었다. 제2감방에는 최달석, 강말식, 제3감방에는 김영숙, 염애나, 이술연, 조복희, 강성화, 김야모, 제4감방에는 김수영, 제5감방에는 이약신, 제6감방에는 손명복이 있었다.
최덕지 선생은 ‘예배’를 신앙의 생명으로 삼았다. 신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마귀에게나 사람에게 빼앗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고로 그는 유치장이나 형무소나 어디에서나 하루 4차 예배를 드렸다.
새벽, 오전 11시, 오후 3시다. 그런데 최덕지 선생이 11시에 드린 것은 12시는 일본인이 죽은 귀신을 위하여 기도하는 시간이므로 이를 피해 앞당겨 11시에 드린 것이다. 정식 고문 당한 것 외에 유치장이나 형무소에서 예배로 인해 맞은 매와 당한 수모는 이를 헤아릴 수 없다.
최 선생이 처음 도 감방에 오자 그날 11시 제1감방에서 찬송이 터져 나왔다.
예수의 이름 권세여 엎디세 천사들 금 면류관을 드리고 만유의 주 삼세. 금 면류관을 드리고 만유의 주 삼세. 여기에 맞추어 3감방에서 찬송이 흘러 나왔다.
주께서 당한 고생을 못잊을 죄인아 네 귀한 보배 바쳐서 만유의 주 삼세. 네 귀한 보배 바쳐서 만유의 주 삼세.
간수가 ‘야까마시’하면서 제지하고자 했다. 시끄럽다면서 격검막대기로 최 선생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배를 다 마치기까지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감방에서는 규칙을 어기면 밥을 안 주거나 벌을 가하거나 매를 때린다.
벌 중에는 변기 소제하는 것, 작업하는 것 등 온갖 일이 많았다. 최 선생은 6, 7개 성상 그들이 정한 벌이나 고문을 아니 당해본 것이 없었다. 어느 추운 대한을 앞둔 날이었다.
내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 때에 힘을 써 궤휼과 권세로 제군물 삼으니 천하에 적수 없도다. 하고 찬송이 나왔다.
간수는 ‘야까마시’하고는 물을 퍼부었다. 1감방에도 3감방에도 찬송이 계속되고 물도 계속 들어왔다. 예배를 다 마치기까지 두 방에 모두 33통의 물을 퍼부은 간수는 드디어 포기했다. 얼마나 차가왔으며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그러나 예배를 꺾이지 않은 승리의 기쁨은 그 고통을 참게 한 것이다.
3감방에 있던 강성화 집사(이 분은 해운대 교회 구재화 조사 부인이다. 구재화 조사는 경남노회 15교회를 개척설립하고 그 둘째 아드님은 서울대 수학과를 거쳐 미국에서 박사학위 받고 미국의 대학교수로 있음)는 그 물에 세탁을 하며 찬송하기를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죄씻음 받기를 원하네. 내 죄를 씻으신 주 이름 찬송합시다. 찬송합시다. 찬송합시다. 내 죄를 씻으신 주이름 찬송합시다.” 하였다.
이 때도 최덕지 선생은 장기 금식을 하였는데 12일간 하였다. 공의의 진단이 병보석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렸다.
석방 권유도 거부하니
이때 도 형사로는 강낙중 부장과 하판낙 부장이 있었다. 이들이 취조하였다. 1942년 5월 1일이다. 도 당국이 최 선생에게 다음 요건을 제시했다. 석방조건은 이러하다.
1. 석방하되 박열순 집사 집에 머물 것(이분 남편은 서상환 변호사로 해방 후 법무장관이 됨.) 2. 다른 사람과 면접하지 말 것. 3. 전도하지 말 것.
여기에 대해서 최덕지 선생은 첫째, 나는 다른 사람과 면접해야 하고, 둘째, 전도해야 하고, 셋째, 도 감방에 있는 모든 성도를 다 석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석방을 거부했다. 내가 석방되면 나를 만나는 사람까지 고통을 준다. 고로 이곳이 편하니 나갈 필요없다. 또 나가면 재차 구속할 것이니 나갈 필요없다는 것이다.
당국은 죄인 아닌 이 억센 죄인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최 선생과 당시 친한 한상동 목사 부인 김차숙씨가 모시러 왔다. 한상동 목사는 도 감방에서 평양으로 압송되어 가고 이미 없었다.
사모님께 최 선생을 부디 모시고 나가 달라고 부탁하였다. 최 선생에게는 면회를 왔다 하고서 내어 보냈다. 박열순 집사가 차로 모시러 왔다.
죄인이 마치 귀인처럼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닌가. 석방된 최덕지 선생은 우선 김차숙씨 댁에 와 감사의 제단을 쌓았다. 원근 각지에서 많은 성도의 위로가 있었다. 정성을 다하여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준해 온 그 고마움 앞에 모두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옥중에 남긴 이야기들
평양으로 옮기기까지 몇가지 일화를 적어 본다. 최 선생은 예배할 때 너무도 부동의 자세라 하부장(취조 형사)이 말하되, “너희는 벼룩도 없느냐.” “물로써 씻어주니 없어요.” 마산서 김야모 씨가 도 감방으로 오자 “아베느고 오신다”(이는 최 선생이 구약에 불 가운데서 승리한 종 사드락과 메삭과 아베느고와 같이 승리한 종을 가르침.)
최 선생이 공판정에서 심문받으면 감방에 함께 있던 죄수들이 11시가 되면 “지금은 예배시간입니다” 하였다. 또한 옥중의 소식을 이 예배기도 시간을 통해 방청석 사람에게 연락하였다. 하부장은 “동방사람을 보내 최선생 옥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다.(이는 바벨론 제국을 동방의 고레스 왕이 멸하고 유다를 석방시킨 역사의 기도를 듣고 조롱한 말) 이 때도 최 선생은 기도의 무기를 들었다.
마침내 22일 장기금식을 하였다. 이도 본래 작정은 20일이었다. 20일을 마치고 당국이 해금을 원했다. 당시 3감방에 수감되어 있던 김영숙 전도사를 자기 방에 오게 하면 해금하기로 하고 김영숙씨를 오게 하였다. 예배를 인도케 하였으나 두려워 사랑함으로 해금을 연장했다. 드디어 최 선생을 위해 예배를 인도하였으므로 2일이 연장되어 결국 22일의 장기금식을 마치게 된 것이다. 당시 감방에서 예배인도는 많은 매와 벌을 각오하지 않으면 인도할 수 없었다. 이때 같은 남감방에 최범술이란 분이 수감돼 있었다.(해방 후 동래지구 국회의원으로 당선) 최 선생의 신앙과 투쟁을 보시고 “불교에서는 석가를 위해 저렇게 싸울 자 없다.” “기독교 역사에도 장기간 저렇게 굳세게 싸울 자 없다.”하고 자기에게 차입된 과일 등을 몸소 가져와 도왔다 한다.(간수 및 같은 방에 있었던 사람의 증언에서)
이제 도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신앙인’ ‘진리의 용사 하나님의 종’을 인식했다. ‘이는 도에서 취급할 위인이 아니야’ ‘평양으로 보내야 한다’하고 당국에서 결정했다.
평양으로 이감
1943년 정월 초순도 감방에서는 소문이 나돌았다. “내일 모레면 최 선생 평양 간다”는 말을 듣고 최 선생은 기도했다. ‘주를 위해 바친 몸’ 주님 뜻대로 하소서. 주일이 왔다. 예배드리기 위해 옷을 입으라 했다. “최선생 나오시오” 했다. “평양 갑니다” 하부장의 말이다.
“오늘은 주일이니 여행 못합니다” 최선생의 말이다. 그러나 강제송환이다. 머리 푼 그대로 버선 벗은 대로 속옷차림 그대로 평양행 열차에 강제승차되었다. 종일 식음을 전폐하였다. 종일 앉지 않고서 그대로 갔었다. 이때 인솔하던 형사들도 종일 식사를 안했다고 한다. 최선생 생애에 있어 이 때처럼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때가 없었다고 한다.
그때 함께 이감되는 남조사 한 분이 있었다. 최선생 모습을 보고도 미안한 마음이 없었다. 사식을 주니 굶주린 몸이라 최선생분까지 다 먹어 치웠다. 그리고 형사에게 또 사달랬다. 이를 본 형사들도 ‘양심이 있소’ ‘욕심많은 개’라고 욕하였다.
최덕지 목사 [15]
제3장 달려갈 길을 다가고
주일날 평양으로 끌려 온 슬픔
평양형무소에 최 선생이 수감될 때 앞서 와 있던 성도들이 많았다. 그 중에 안이숙 선생, 조수옥 선생 등이 있었다. 조수옥의 눈에 비친 최 선생의 속옷차림 모습은 몹시도 초췌하여 저분에게 영양을 도와야겠다고 느꼈다.
최 선생이 평양형무소에 도착한 것은 늦은 오후였다. 제5감방에 수감되었다. 모든 사람이 저녁 식사를 마치고 쉬는 시간이다. 최 선생은 고함을 쳤다. “지금 우리 다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립시다.”
찬송을 우렁차게 불렀다. 모든 감방에 있는 자가 놀랐다. 그 보다 당황한 자는 지키던 간수였다. “멈추라, 멈추라” 고함쳤다. 그 소리보다 찬송은 힘 있게 온 감방에 울려퍼졌다. 이렇게 하여 평양에서의 싸움은 시작되었다.
최 선생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예배는 빼앗기지 않았다. 시간도 어기지 않았다. 그 예배형식은 찬송, 신앙고백, 성경(요절암송), 기도, 주님기도로 마친다. 이 예배가 출옥 때까지 계속되었다.
처음 평양에서 간수가 교체될 때마다 최 선생은 온갖 매질과 욕설을 다 당하였다. 세월이 갈수록 그의 진실이 인정되었다. 변치 않은 신앙의 충절을 존경하였다. 당시 사상범을 다루는 무서운 모리검사가 있었다.
최 선생 예배는 이 모리 검사에게 취조를 받다가도 예배는 허용되었다. 그 때 판사는 가마다였다. 평양형무소의 많은 사상범 성도를 다루던 분이다. 이 분이 증언하기를 최덕지 선생만은 그 신앙이 참되고 그 사상을 존중한다고 하였다. 그의 사위되는 김진택씨가 면회갔을 때 당신은 훌륭한 어머니를 가지고 있다면서 예배 시작 전 면회를 허락하였다.(판사 허락이 있어야 사상범 면회가 되었음)
형무소에서 일어난 일 몇가지만 말하고자 한다. 한 번은 간수장이 순시하러 감방에 왔다. 당번인 간수가 5감방 최선생 앞에 와 똑바로 앉았다. 최 선생이 예배드리려는 시간이다. 간수가 그의 기질을 알고서 3분만 허용하니 빨리 마치라고 했다.
최 선생도 간수의 입장을 고려하여 빨리 끝내려고 했다. 그러나 예배시간을 침해 받을 수 없다는 양심의 가책이 있어 정상적인 예배를 드렸다. 간수장이 당도했을 때 예배가 계속되었다. 예배 후 당한 고문, 맞은 매는 평양형무소에서는 가장 혹심한 것이라 하였다.
그는 결국 뒷고랑을 채우고 찬송을 못부르게 고무 마스크를 씌웠다.
그리고는 최 선생을 더욱 괴롭게 하고자 정신이상 여자를 최 선생 방에 함께 있게 했다. 방해하고자 보낸 이 여자가 예배를 도왔다. 입에 씌운 마스크를 풀어 변기에 던졌다. 다음 간수가 왔다. 변기통에 있는 마스크를 주어 씻어 다시 최선생에게 씌웠다. 이 여자가 또 다시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 후에는 고무 마스크를 씌우지 않았다.
어떤 날 예배로 인해 옷이 모두 찢겨 홑저고리만 입은채 시멘트 바닥의 독방에 가두었다. 조수옥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그날 밤은 영하 36도로 내려갔다고 했다. 다음 간수장이 최 선생을 향해 독방에 온 감상을 물었다.
“내가 일본천황의 법을 어겼다고 이곳에 넣었으니 만일에 만유의 신 하나님의 법을 어길 때는 얼마나 더 무서운 벌을 받겠는가고 생각하니 내 마음은 더욱 굳어집니다”라고 했다. 고문이 약해서 산 것이 아니요 명이 길어서 산 것이 아니라 대일본제국에 ‘진리의 증언자’로 삼았으므로 살아남은 것이다.
이러한 일도 있었다. 주일이다(성일). 자기 감방에 변기를 소제하려고 했다. 그의 신앙은 주일에 일하는 것은 성일을 범하는 것이므로 금하고 있다. 변기를 들어내려 하자 할 수 없이 변기통을 안고 누워 스제 못하도록 막았다 한다.
이렇게 옥중에서도 범죄나 실수를 하지 않았다 한다.1945년 8월 15일, 감격의 해방을 맞았다.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할 때 일본은 반드시 이긴다고 소리쳤다. 그러나 미군이 필리핀을 되찾을 때 겁이 났다. 그리고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일본천황 히로히도(유인)는 8월 15일 정오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일제의 36년 그 포악과 탄압의 정치도 종말이 왔다. 어둡고 슬펐던 밤이 지나고 찬란한 아침이 찾아왔다. 8월 18일 일제는 옥중성도 최덕지 선생을 죽이려 했다.
8월 17일 밤, 옥문이 열리고 출감했다. 꿈 같은 일이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 누가 막으랴. 그 비밀을 누가 알았으랴.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셨다. 여러 옥중 성도와 함께 출영 나온 성도는 감격과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많은 옥중 성도 중 순교하거나 병보석이 되고 최후까지 남은 자가 평양은 14명이었다. 이 분들이 안이숙씨 모친 집으로 안내되었다. 오랜만에 진수성찬을 대했다. 밤 예배는 은혜와 눈물과 감격의 도가니가 되었다. 멀리 고향의 신앙동지들을 생각하며 한밤을 지냈다.
그러나 그때에 아직 일본군이 무장해제를 하지 아니하였음으로 무기를 가지고 난동을 부리며 사람이 모인 곳에 와서는 행패를 부린다고 예배는 드리되 찬송은 하지 말자고 제의함으로 그 뜻 깊은 출옥 감사예배 때 찬송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엉겁결에 예배를 마치고 생각하니 기가 막힌다. 쇠고랑을 차고 물을 둘러쓰고 매를 맞아 가면서도 찬송을 빼앗기지 아니하였는데 자유로운 몸이 되어 찬송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니 분하고 괴로워 밤잠을 자지 못하고 무엇 때문에 이렇게 영지가 혼미해졌는가 반성하며 가슴 아파했다.
돌이켜 보면 최덕지 선생은 부산에서 평양으로 이감된 후 신사참배 거부는 물론이고 비신앙적이요, 비진리적인 궁성요배도 반대했다. 야수구니진자(청국신사) 위령 묵도까지도 생명을 걸고 항거했다.
시종일관 투옥된 지 7개 성상 그 능욕 그 고초를 감수했다. 이 나라 기독교 진리를 보전하기 위하여 초지일관 신앙정조를 지켰다. 수절한 그는 해방과 함께 승리의 개가를 부른 하나님의 사자이다.
철저한 투쟁 완전한 승리
일제에 항거한 종교인이 없었다 하겠는가마는 완전하고 철두철미 반대투쟁한 자는 최 선생밖에 없다. 완전 승리는 그를 제외하고는 없다. 이는 함께 투옥된 이나 일본관헌이 함께 공인하는 바다.
종국에 그들은 ‘최덕지가 믿는 신이 참신이다’고 말하고 증거했다. 나는 분명히 믿는다. 하루도 빠짐없이 1일 4차 기도가 정의는 살고 진리가 종국적으로 승리함을 믿는 최덕지 선생의 충정이 그를 살린 것이다.
이때 영남에서는 손양원, 김영숙, 염애나, 이술연, 김야모, 김두석 등이 출옥하였다. 평양의 출옥성도들은 순교제단 산정현 교회를 중심하여 집회를 가졌다. 강사는 최덕지, 이기선, 주남선, 한상동, 박신근 등이었다. 이때 전국 각지에서 많은 성도들이 나와서 회개의 눈물을 흘린 줄 안다. 최덕지 선생을 황주에서 초청하여 그곳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최덕지 목사 [16]
최 선생은 평양 이귀연씨 집에 머물고 있었다. 이 분은 숭의보육을 졸업하고 유치원 보모로 일했다. 신앙을 지켜 온 그는 최 선생의 신앙과 투쟁을 흠모하여 초빙한 것이다.
또 한편에서는 평양에서 큰 여관을 경영하는 옛 친구가 찾아와 함께 있기를 원했다. 이 분은 다름 아닌 평양여자신학교 때 누명으로 어려움 당할 때 도움받은 사람이다. 정의는 살아있고 외롭지 않은 것이다. 해방의 자유와 광란 속에 한 해가 기울었다. 1946년 정월이었다.
남한에서 잊을 수 없는 김영숙 동지와 서모 김성심씨가 찾아왔다. 이 땅에는 해방과 함께 또 하나의 비극이 생겼다. 바로 38선이다. 종전 6일 앞서 즉 8월 9일 소련군이 일본에게 선전포고했다. 미국은 일본군벌을 해체하기 위해 소련군이 필요한 줄 알았다. 드디어 소련군이 만주와 북한에 침입한 것이다.
최 선생은 월남 길에 올랐다. 이북의 재건은 이북인에게 맡겼다. 밤을 틈타 야행 길에 올랐다. 험하고 어려운 길이다. 그러나 뉘 알았으리요. 가고보니 소련군 사령부로 간 것이다. 최 선생은 기도하였다.
“주님이 일제에서 구하심은 무신자 공산주의 소련인에게 복음증거 하라심인 줄 알았다.”
소련인은 그의 담대함과 그의 신앙에 놀랐다. 조사해 보고 나서 일제 때 투사임을 알고 38선 이남으로 안내해 주었다. 무사히 월남한 것이다.
부산교회 창설과 재건운동
감사기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부산에 온 최덕지 선생은 자기 친정인 최달구씨 집에서 첫 감사의 제단을 쌓았다. 부산을 위시하여 경남 일원에서 사모하는 성도들이 모여 왔다. 그 기쁨과 감격은 헤아릴 수 없었다.
그 동안 피신한 성도들도 자유와 해방과 함께 차차 나타나게 되었다. 출옥한 성도들이라도 사상과 노선이 같을 수 없었다. 일부는 고신측이요 일부는 재건이다. 왜 이렇게 분리되었을까? 잠깐 밝혀두고자 한다.
출옥성도의 엇갈린 신앙사상
일반은 옥중성도라 하면 무조건 동일시하나 사실은 신앙에 많은 차이점이 있었다. 이 신앙사상에 따라 투쟁에도 많은 차이가 있었다. 즉 평양형무소의 출옥성도 13명 중 1명은 신사참배를 인정하고 모교회로 돌아갔다.
최덕지 선생, 박신근 집사, 이광록 집사 등은 신사참배는 물론 동방요배(황거요배라고도 함) 청국신사, 위령묵도까지 전부를 죄악으로 인정했다. 거부반대 투쟁을 한 자와 이를 추종하는 자는 재건교인이 되었다.
기타는 신사참배가 죄이나 동방요배, 묵도, 국기배례는 양심문제로 삼았다. 그들은 동방요배란 산 임금에게 절하는 것으로, 평민이 황제를 대할 수 없으니 다만 거리관계로 가까이서 하나 먼 곳에서 하나 하여간 산 임금에게 절하는 것이다.
우리의 진리만을 위해 싸우는 민족적 관념에서 안 된다는 해석이다. 그런고로 이는 죄 아니라 해도 좋고, 안 해도 무방하다 하는 해석이다. 그러나 최덕지 목사는 이는 죄 되는 이유로 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일본 임금은 사람이나 그들의 국체에 의하면 천조대신을 현인신으로 위하고 있다. 즉 사람이라도 사람으로 섬기라 함이 아니고 사람을 신으로 경배하라는 것이니 이는 곳 제1, 2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도 사람을 신이라고 할 때에는 절하지 못함을 말하고 있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이고 우리도 그를 말미암았느니라.”(고전 8장 5-6절)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 하니.”(요한계시록 20장 4절)
이리하여 옥중에서도, 같은 동료 중에서도 최덕지 선생을 고집쟁이로 생각했고, 일제에는 다른 사람은 동방요배하는데 너는 왜 아니하는가고 형벌을 더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출옥 당시까지도 최덕지 목사는 여자라고 해서 그 신앙과 사상에 반대하였으나 마침내 그려신학의 교수이던 한부선(미국인 선교사) 목사가 이를 죄로 규정함에 따라 비로소 고신측도 굴했던 것이다.
한국인의 신앙과 영지에는 따를 수 없고 선교사의 성경해석이라야 순종한단 말인가.
재건노선의 차이점
최덕지 목사와 한상동 목사가 월남하여 한국교회를 살리기 위해서는 경남노회를 살려야 한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 방법에 있어서 재건운동을 어떻게 전개하느냐에 대하여 최 목사는 ‘밖에서 불러내자’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한상동 목사는 ‘안에 들어가 건지자’는 방법이었다.
최 목사가 본 한국교회는 전부 사탄의 회로 화하고 그들의 지도자는 해방이 되었으나 신사참배 죄악을 회개하지 아니했고 악의 세력이 강하니 먼저 구분부터 하고 죄악을 경책하여 양떼들의 생명을 구하자는 것이다. 이에 반해 한상동 목사는 이제 우리가 들어가면 저들은 물러가고 말 것이니 안에 들어가자는 것이다.
이에 반해 한상동 목사는 이제 우리가 들어가면 저들은 물러가고 말 것이니 안에 들어가 일해 보려고 몇 번이고 기도하고 주의 뜻을 기다렸으나 종내 허락 없어 결국은 밖에서 회개운동을 일으킨 것이 재건교회를 설립하게 된 동기이다.한상동 목사가 들어가 건지려던 그 결과는 과연 어떠했던가.
그가 출옥성도의 자랑을 무시해 가며 관대하게(?) 그 노회 안에 들어가 일해 본 보상은 무엇이었는가. 마침내 1946년 12월 3일 경남노회, 제48회 진주노회 때에 진리의, 승리의 종으로서 최대의 모독을 당하고 자신의 입으로 탈퇴를 선언하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고신측 교단이 생긴 것이다.
이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같이 물에 빠져 건지려할 때 두 사람 함께 익사하는 실례를 보임이다.
만일 이때 한상동 목사가 최덕지 목사의 노선대로 처음부터 구분하여 하나가 되었다면 한국교회는 완전 재건하여 세계적 사명을 완수했을 것이다.
최초의 부산교회는 1946년 2월 당시 약방을 경영하시던 전상옥씨 집에서 시작되었다.
최덕지 목사 [17]
이때 모인 교우로는 작고한 박부준 장로, 박열순 장로, 조복희 장로를 위시하여 하수봉 집사, 유사덕 집사, 강선희 집사, 장봉기 집사 등으로 이분들이 재건교회 창설 때 대표적인 교인들이다. 이때부터 최덕지 목사님의 회개운동이 한국교회에 전개되었다.
최초의 재건교회 부흥집회가 시작된 곳은 경남 창원군 ‘하구지’교회다. 강사로는 최 목사와 이광록 집사였었다. 이 집회에 경남노회 원로 목사이던 마산 강상은 목사가 재건하고 재건운동에 가담하였다. 따라서 진해교회 장로였던 이성출 장로가 회개 재건하였고 하구지교회 이용실 전도사가 회개 재건하였다.
1947년 1월에는 경남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 교회에서 재건부흥 집회를 가졌다. 이때 조용술 장로 일가가 모두 재건하였다. 당시 조용술씨 백씨되는 조용화 집사가 전적으로 회개하고 일제시 범죄한 교회를 회개의 표상으로 불태우고 신축성전을 위해 자기 거처하는 가옥, 전답, 소 한 마리까지 재산 전부를 송두리째 바쳤다. 전국 각지에서 은혜를 사모하여 모여든 성도들이 과거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것과 충성하지 못한 것과 배신배도한 모든 범죄를 회개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때 동래군 기장면 대변에서 왔던 장봉기씨는 크게 은혜를 받아 조용화 집사가 자기 재산 전부를 주께 바침에 감동입어 그 재산을 다시 사서 주께 바치고 그 소와 그 전답으로 농사 짓게 한 일화도 있었다. 초대교회의 유무상통하는 사랑의 세계를 보여준 것이다.
우상 섬긴 교회를 버리다
계속하여 경남 함안군 강명리교회에서 재건부흥집회를 가졌다. 이곳에서도 불같은 은혜가 충만했다. 회개의 눈물과 통곡은 산골짜기에 메아리쳤다. 이 곳은 조용덕 영수(다음 재건교회 장로)가 피신, 성도와 사자들을 숨겨 섬겼다. 이 집회에 크게 은혜를 받았다.
강명교회 건물은 일제 때 문을 닫아서 더럽히지 아니하였음으로 그대로 쓰기로 하고 거기에서 집회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최 선생이 예배인도 시간만 되면 아파서 일어날 수가 없어 이광록 집사로 인도케 하였는데 조금 몸이 나은 듯하여 다음 시간 강단에 서게 되면 또 견딜 수 없는 아픔으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다.
몇 번 되풀이하는 동안 기도를 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제단 문제인 듯하여 그 교회건물에 대하여 물어보니 일제 때 문은 닫았으나 빈집이라 하여 동리에서 이용하면서 일본 가미다나를 차려 놓고 절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안 즉시 추운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마당에다 자리를 깔아 예배장소를 옮겼다. 그리고는 우상섬긴 곳을 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동리 사람들은 그 집을 버리면 자기들이 사용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하는 수없이 의논하여 그 집을 헐어서 불태웠다. 이 집회 때 함안교회 박또석 목사가 회개 재건하고 조광제 장로가 재건하였다. 1947년 2월은 김해군 진례면 담안교회에서 집회를 가졌다.
집회과정에서 새벽예배는 십계명을 강의하였고 낮 공부는 계시록의 소아시아 7교회를 해석하였다. 구구절절 그의 설교는 생명력이 있었고 말의 설교가 아니라 생명을 걸고 진리를 위해 투쟁한 산 체험이어서 듣는 이로 하여금 심령 골수를 찔러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하였고 과연 하나님의 사자로서 권위를 실감케 하였다.
누가 과연 저토록 한국교회의 죄를 책망할 수 있을 것인가. 누가 저만큼 조국을 위하는 열렬한 애국충정을 외칠 수 있을 것인가. 어느 누가 죄에 물든 가련한 심령을 구원하고자 이토록 사랑을 베풀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이 집회에 참석하여 성일관과 십일조에 대한 신앙을 확립하였고 죄를 철두철미 책망하는 능력에 감화되어 회개하고 재건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집회에서 삼일금식을 처음 시작하였다. 이때 출옥성도 염애나 조사도 함께 고신측에서 회개 재건하였고 또한 진해의 주상수 목사가 참석, 은혜를 받았고 자기 교회의 집회를 청한 것이다. 1947년 3월말 진해에서 재건부흥집회가 개최되고 주상수 목사 일가가 재건되었다. 당시에 장로였던 주상수씨는 일찍이 오산고보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고 만주 전도를 위해 만원(현 화폐가치로 일억원 상당)을 헌금한 분이다.
1947년 4월 18일에는 마산교회에서 재건부흥 집회를 가졌다. 마산은 과거 일제시 강상은 목사님의 가정을 중심한 구별된 제단을 쌓아 예배를 드렸다. 1946년 11월 22일 마산시 회원동 340번지 정우순씨 집에서 마산, 석전, 중리, 용담 등지 교인 18명이 합하여 ‘예수교재건 마산교회’를 창설한 것이다. 이 마산 집회 당시 특이한 것은 현실교회 목사의 고발로 외암과 광명 두 교회를 불태운 것에 대해 방화죄로 몰아 최덕지 목사와 광명교회 조용덕 장로, 외암교회 집사 등 7, 8명이 구속되어 마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재판을 받고 무죄석방된 것이다.
성경시대에도 예수님과 그 외 사도들에게 죄를 씌우려하고 처벌하려 한 자가 다름 아닌 교권가진 자 종교인 자신이 아니었던가. 일제시 진리를 파수하고 교회를 지키는 충성된 주의 종인 순진한 양들을 잡아준 자들도 권세와 야욕에 불타던 거짓 목사들이 아닌가.
해방된 오늘에도 성경대로 살고 진리를 사랑하는 재건교회나 교인들을 이단시하고 또는 반국가적이라고 악선전하고 고발하는 자는 다름 아닌 자기 출세만, 자기 교권만 위하여 권력에 아첨하는 거짓 기독교 지도자들이다. 일본제국 때 범했던 죄악을 지금도 그대로 범하고 있으니 참으로 누가 국가의 번영과 안전과 국민의 행복을 위하는 자인가. 하나님 앞에 바로 살고 진리대로 행하며 국가를 위해 하루 4차례 기도하는 재건교회와 재건성도들이 아닌가. 당시 법관들도 참 기독신자와 거짓 기독신자를 그 지도자의 생활과 모습에서 판단하고 최덕지 목사를 존경하였다.
석방된 최 목사가 마산집회를 이끌 때 은혜가 넘쳤다. 이때 많은 사람이 재건하였다. 그 중에서도 정학진 장로는 이때 회개 재건하여 오늘까지 마산교회에 충성을 다 바치고 있다.
부흥의 불길은 타오르고
이리하여 부흥의 불길은 방방곡곡 번져 나갔다. 계속하여 부흥집회는 제단마다 불붙기 시작했다. 부산집회에서는 김갑진 집사와 최 의사가 돌아오고, 모산집회에서는 최달석 목사, 윤석천 장로 등이 재건하였고, 부목집회에서는 윤의섭, 김판동 두 장로가 돌아오고, 진영집회에서는 박용대 장로와 김태금, 신우 두 집사가 돌아오고, 통영집회 때에는 방 집사 가정, 조필연, 윤갑득, 황또순 집사 등이 재건하고, 남해집회 때 최일구 목사 가정, 이상철 장로, 강덕순, 강주천 장로 등 여러 가정이 재건하고, 삼천포집회에서는 김수성 조사 자매들, 최종범 선생 등이 재건하고, 여수집회에서는 김기성씨 가정, 홍정희씨 가정 등이 재건하였다.
이렇게 하여 50여처 교회가 허물어진 제단을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속화된 한국기독교를 재건하기 위해 진리운동은 더욱 뜨겁게 전개되고 전국 방방곡곡 집회 때마다 신앙으로 살기를 원하는 자들이 모여들었다.
목사도 장로도 집사도 평신도도 일제시대 범행을 뉘우치고 잘못된 과오를 회개했다. 진리의 사자, 신앙의 참목자들 우러러 보며 앞을 다투어 나아왔다. 그의 지도를 받으며 그의 재건 노선을 지지하고 추종하는 자가 되었다.
최덕지 목사 [18]
최덕지 목사에 대한 한국교회의 태도
출옥한 동지들의 태도
출옥성도 중 한 분은(성명을 밝히지 않음) 최 목사의 따님(김혜수 집사)이 어머니 뫼시러 평양에 갔을 때 하는 말이 “정신과민이 되었으니 너희집에 잘 뫼셔라”라고 했다. 이는 누구보다도 철저히 싸웠기 때문에 가까이 있으면 자기들이 흠이 드러나서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경남노회의 태도
최덕지 목사를 위시하여 평양형무소에서 출감한 경남출신 성도들이 월남하기 전 부산, 광주, 대구 등지에서 출옥한 성도는 주남고, 손양원, 김영숙, 김야모, 염애나, 이술연, 김두석씨 등 여러분이었다.
출옥성도와 함께 산간과 암굴 골방에서 피신하고 있던 황철도, 이참수씨 등도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 당시 경남노회는 1945년 9월 9일에 부산에서 신앙부흥운동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대표 최재화 목사, 심문태 목사 그 외 20여명 명의로 선전문을 발표하여 그들의 범죄와 과오를 회개하며 경남노회를 재건하려는 준비를 하고 출옥성도들의 지도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임은 빗나가고 말았다. 출옥성도인 모씨를 중심으로 마산 문창교회에서 집회를 가졌는데 과거 한국교회 죄악을 책망하지도 않았고 회개를 권고하지도 않았다. 진리를 구분하고 양떼를 미혹에서 건져낼 영지도 능력도 없었다. 마침내 범죄한 현실교회의 불의의 세력에 타협하고 말았다.
한 때는 출옥성도 주남고 목사를 노회장으로 추대하였다가 그 다음 해는 역시 부패한 세력에 교권이 되돌아 갔다. 이에 경남노회도 나아가 한국교회도 범죄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다만 평양 출옥성도들의 월남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월남 성도 일부가 기성세력에 흡수되고 오로지 신앙재건, 진리재건을 부르짖는 최덕지 목사에 대하여 경남노회는 가음정교회에서 “정신이상자니 조심하라”는 공문을 발송한 것이다. 이는 한국교회 죄악을 너무 공격하고 또한 그의 의로움이 너무도 강하여 그들이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로교단의 태도
“최덕지가 교만하여 여자목사 되었다”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는 복음의 원리보다 봉건주의 남존여비사상의 잔재의식이 아니겠는가. 여자목사 장립에 대하여 최 목사 자신은 몇 번이나 사양하고 또 기도하고 주님 뜻과 진리를 밝힌 후에 재건교회 헌법에 순종하였다.
재건교회가 지향하는 길은 ‘신앙은 보수, 정치는 진보’ 이것이다. 재건교회가 이 땅에 공헌이 있다면 ‘여권의 확립’이다. 이것은 재건교회가 한국교회에 있어 효시오, 한국 기독교사에 있어서 대서특필할 사건이다. 필자가 마산여자 고등학교 교사로 있을 때다.
그 때 창원서 통학하는 3학년 재학중인 이경애라는 학생으로부터 1947년 1월에 박윤선 목사를 모시고 창원교회에서 부흥집회가 있다는 연락을 받고 참석했다. 낮 시간 계시록 강의가 끝나자 자유질의 토의시간이 있었다. 창원교회 장로와 영수들 중에서 재건교회와 최덕지 선생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그 질문과 박윤선 목사의 대답은 이러했다.
문=재건교회가 한국교회를 마귀당이라 한다.
답=성경은 사탄의 회라 하였다. 할 수 있다.
문=교회를 불태웠다. 그럴 수 있나.
답=불태울 수 있다. 우상섬긴 제단 버릴 수도 수리해 쓸 수도 있다.
문=최덕지 선생이 정신이상자라는데…
답=하나님의 사람 함부로 말하면 안 되요. 벌 받아요.
나는 이 때 재건교회 재건집회가 있는 줄 알고 1947년 2월 담안집회 때 달려가 재건한 것이다. 내가 재건교회에 헌신한 것은 1950년 10월 7일 밤 요한복음 10장 36절 말씀으로 소명 입은 것이거니와 그에 앞서 최덕지 목사를 죄인으로 몰고 이단자로 취급하고 광신자로 비난함에 의분을 느껴온 터였다. 그는 의인이요, 그의 주장이 참되고 옳은 길을 가르치지 않았는가.
조국이 해방과 동시 정치도 재건, 산업도 재건, 교육도 재건해야 했다. 그러나 그 보다 앞서 범죄한 신앙재건, 민족의 양심재건, 이것 없이 모든 수포라고 외쳤으니 이들 외치는 자 이 땅의 참선지자가 아닌가. 의인을 핍박하는 나라는 민족이 협동치 못하다.
재건교단 창설과 조직
임시 중앙위원회 시대
최덕지 목사의 재건노선이 옳다고 공명추종하는 교회가 날로 늘어감에 따라 이에 대한 통일된 지도방침이 필요하게 되었다. 본래 최 목사에 있어서는 조직이나 단체를 구성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회개가 급선무였다.
성직(목사, 장로, 집사)을 가지고 범죄한 자는 그 직명까지 부르지 못하게 하며 평교인과 아울러 다 일년 이상 자숙하게 하고 제각기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것과 충성하지 못한 것과 배신배도한 모든 범죄를 회개하도록 이끌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해가 거듭될수록 재건성도나 교회에 대하여 신앙상의 연락과 지도를 하고 대외적으로 전도와 투쟁을 위해 재건교단 창설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3대주의와 5대주장의 채택
드디어 1948년 2월 18일 동래군 기장면 대변리 대변교회에서 임시 중앙위원회가 소집되었다. 참가교회 30여 교회 50여 대표들이 모였다. 이곳에서 ‘예수교장로회 재건교회 중앙위원회’ 규약과 재건운동의 목표인 3대주의와 5대주장이 채택, 통과되었다.
회장에 강상은 목사, 부회장에 최덕지 목사, 서기에 주상수 장로, 부서기에 최종규 집사, 회계에 장봉기 집사, 부회계에 민기부 집사 등이 피선되었다.
여기 명칭문제에 대하여 한 가지 더 밝혀두고자 한다.
제1회 회집 당시 규칙 통과 때 본 초안과는 달리 ‘예수교장로회 재건교회’라고 했다가 제2회 중앙위원회를 진해교회에서 소집했을 때 명칭문제가 논의되었다. 우리가 장로교인들이나 우리 단체가 무슨 교단이나 별개체를 조직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한국교회가 어느 교파를 막론하고 다 범죄했으니 재건하게 함이 목적이다.
그렇다면 장로교란 명칭 아래 운동이 전개될 경우 장로교인 이외 성결교인이나 감리교인 기타 등이 교파로 인해 재건하기를 꺼리게 되고 각 교파마다 재건교회가 생길 수도 있을 터이니 아예 장로교란 특수한 명칭을 사용하지 말고 ‘예수교 재건교회 중앙위원회’라는 명칭으로 개칭한 것이다. 재건교회라 할 때 교회사적 의미도 분명해지는 것이다.(2006. 5. 17. 크리스찬신문)
최덕지 목사 [19]
당시 개회 표어 성구는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장 2-3절) 한대로 재건교회가 하나님의 경영과 섭리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재건교회 주의와 행동강령
표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3대주의
1. 여호와께만 충성하자. 2. 철두철미 회개하자. 3.깨끗한 성전을 지어바치자.
5대강령
1. 한국교회는 완전재건하자. 2. 마귀당은 일절 버리자. 3. 불의와 위선에는 절교하자. 4. 우상은 일절 타파하자. 5. 너도나도 재건운동자 되자.
재건운동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다. 우리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인생관임에도 불구하고 과거 한국교회나 우리 자신들이 그 영광을 짓밟았다.
고로 재건교회의 출발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다. 일찍이 이사야는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 하리라’(이사야 42장 8절) 하셨다.
과거 한국교회에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 이가붓 시대가 되었으니 이 영광을 다시 찾아 하나님께 바치자는 것이다. 고로 재건운동은 인위적인 운동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일이다. 이를 누가 막으리요. 3대주의를 다시 논의해 보자.
여호와께만 충성하자
이는 하나님 제일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것이다. 지상제일, 국가제일주의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에게 충성을 요구하신다. 이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이다. 인생은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과거 국가제일주의에서 신앙을 팔았으니 이제는 하나님 제일주의에서만 살자는 것이다. 우리가 국가에 충성함은 하나님 법을 어기지 않는 한도 내에서다. 하나님께 진정 충성할 수 있는 자만이 국가를 위해서 살 수 있고 진정한 애국적 행위라는 것이다.
과거 일제가 하나님께 바칠 충성을 국가에 바치게 강요하여 국가도 망하고 종교도 망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국가도 제2, 제3의 문제인 것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리자는 정신이다.
철두철미 회개하자
이는 신사참배 죄악을 철저히 회개하자는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근본 죄는 하나님에 대한 배신, 거역, 분리인 것이다. 기타는 다 이 죄의 결과로 이루어진 범행들이다. 고로 과거 신사참배나 동방요배나 청국신사 위령묵도한 죄를 근본적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다른 범행의 죄는 회개할 수 없고 따라서 온갖 범행을 다 행한다는 것이다.
재건운동은 회개운동이다. 죄악을 경책하는 운동이다. 회개가 없이는 한국의 부흥이나 참다운 행복은 바랄 수 없는 것이다. 회개가 깊으면 은혜가 많고 회개가 클수록 사명이 크다. 과거 성직자는 물론 50만 신도나 삼천만 동포 모두가 회개하여 우리의 살길을 찾아보자는 정신이다.
깨끗한 성전을 지어바치자
이스라엘의 통일군주 다윗이 자기의 궁전을 건축하고 하나님의 성전 없음을 탄식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 바치기를 소원함에 하나님은 그에게 피 많이 흘린 자손이라 허락지 않았으며 그 아들 솔로몬 때에야 비로소 그 염원이 성취되었다.
총 경비 20억과 인부 18만과 만7년의 공사로 완성한 솔로몬 성전의 헌당식에서 여호와께서는 솔로몬과 맹세하기를,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 즉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 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여 내가 네게 명한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만일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며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복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김으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열왕기상 9장 3-9절) 솔로몬의 성전에도 이같이 하셨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과거 한국교회가 가미다나 제조공장, 일본군인 환송 연회장으로 사용하던 그 건물들을 다 버리고 이제 한국의 땅 위에는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정성과 우리의 물자로 깨끗한 새 성전을 지어 바쳐 하나님의 영광을 찾자는 정신이다.
불의와 위선을 끊어버리고
이상 3대주의의 정신을 다 갖추어 한국교회가 완전 재건할 것을 주장하고 실천사항으로서 과거 우상당으로 바뀌어진 건물은 일체 포기하고 허위를 가장하는 위선과 불의에는 절교하여 죄에 대한 단절의 태도를 취할 것이며, 이 나라 우상도 일체 타파하기로 하고 이 운동을 전개 실천함에는 직업적 종교가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재건한 사람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명으로 생각하여 활동하기로 다짐한 것이다.
이러한 결의를 내세운 최덕지 목사는 현대 한국교회의 정신과 사상이 타락되어감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설교내용 요약)
1. 신 본위가 아니고 인간 중심이다.
2. 진리 위주가 아니고 세력 중심이다.
3. 신앙 중심이 아니고 사업 중심이다.
4. 성경 중심이 아니고 지식 중심이다.
5. 내세적이 아니고 현세적이다.
6. 애국심이 없고 이기심이다.
7. 독립적 정신이 없고 노예적이다.
최덕지 목사 [20]
‘
그러므로 한국교회를 재건하고 조국의 운명을 구원하려면 그들과 결탁하고 타협하여서는 생명있는 일을 할 수 없음을 밝히고 사람이야 무어라 하든지 어떻게 보든지 하나님이 하는 일을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할 것임을 그 후 최덕지 목사는 분연히 선언한 것이다. 1948년 5월에 부산교회 신축 성전을 지어 봉헌하였고, 아울러 재건교회 성경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1948년 12월 이후에는 서울과 광주, 목포, 해남 등지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광주에서도 최덕지 목사의 집회를 요청했고 참지도자의 말씀을 따랐으며 이 당시 주상주 목사가 최 목사를 도와 함께 집회를 인도하였다. 경남지역에서는 창원 집회 때 성령의 역사하심이 크게 증거 되었다. 이 곳은 출옥성도 염애나 조사가 목회하고 김덕순, 김을수 두 장로가 재건하여 충성된 종으로서 모든 것을 다 바쳤다.
계속 해운대, 함안 등지에 부흥집회가 있었다. 해운대는 강성화 집사의 가정이 주동이 되어 은혜가 넘쳐흘렀다. 함안은 하 집사와 그 아들 고윤만 장로로 인해 교회가 이룩되었다.
또 잊을 수 없는 집회는 가락(김해)교회 집회인 줄 안다. 이 곳은 최복덕 장로가 집회 중 한 주일 동안 금식기도를 계속하며 강사인 최 목사와 주상수 목사를 받들고 진정한 주의 종을 위해 극진히 봉사하였다.
그때 김해읍에는 정찬성 조사(현재 목사) 김명전 집사 댁에서 재건제단을 쌓고 있었다. 다음 김명전 집사는 해운대교회로 이사하여 장로장립을 받았었고 해운대교회 새성전 짓는 데 중심인물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1449년 2월 제2회 재건교회 중앙위원회 때에 이북 출신 김창인 조사가 우리 측에 가입하였다. 이 분은 이북 재건지도자의 한 사람이다.
신앙의 지조를 팥죽 한 그릇에
이때부터 최 목사와 김창인 조사의 부흥시대가 전개된다.
첫 부흥집회가 하구교회에서 개최되어 신령한 은혜가 풍성했다. 감화감동을 일으킨 부흥사였다. 그의 야고보서 강해는 참으로 많은 은혜가 있었다. 또한 성가도 잘 불렀다. 그러나 이북 제단에서 내어몰린 자를 우리 측에서 받아들였다고 말썽이 오갔다.
은혜가 넘치니 이런 잡음은 곧 사라졌다. 최 목사편에 와서는 금식도 잘 하고 순종도 잘 하였다. 매우 귀한 대접과 존경을 받았다. 그의 노래와 외침은 이러했다.
바바바 버버버 밥목사야 법복종 하다가 신사참배 보보보 부부부 보배잃고 분한줄 모르는 밥목사야 한국교회는 신사참배하고 마귀당이 되었으니 재건신자들아 목숨을 바쳐 재건제단 지키자-이렇게 외칠 때 그 누가 감격하지 않겠는가. 그러던 그가 1년도 채 못 되어 재건교회를 이탈하니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외침과 생활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 한국교회가 범죄한 목자상이란 말인가. 신앙의 지조를 팔기를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기업을 파는 것처럼 한단 말인가.
6·25와 신앙활동
6·25사변은 이 민족에게 처참한 상처를 안겨준 전란이다. 이로 인해 이 민족이 입은 인명의 손실이나 물질의 피해는 실로 놀라운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싸움이요, 무신론과 유신론의 싸움이다. 따라서 유물론과 유심론의 싸움이다.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동시 이북에서는 기독교가 새로운 적을 만나 수난을 당했다. 신사참배로 인한 수난 성도가 다시 공산세계에서 순교당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월남하여 신앙의 자유세계에서 주 섬기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일제 때 신앙지조를 판 자는 공산치하나 미군정하에서도 아첨 치부한 자가 많다.
6·25. 이는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회개하도록 일깨우기 위한 민족적 시련인 줄 안다. 이로서 신앙의 진위가 나타났다. 교회를 지키고 순교한 자도 있고 환난과 재난으로 참혹하게 된 사람도 많았다.
최덕지 목사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다시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리고 승리하였다.
당시 최덕지 목사는 서울 충무로 교회에 머물고 있었다. 2층은 교회, 아래층은 박 선생이 주택으로 사용했다. 교회 건너편이 괴뢰군 내무서였다. 매일같이 드리는 예배를 괴뢰군은 못마땅해 했다.
주일날 아침 예배시간이었다. 총을 가진 괴뢰군 3명이 2층 교회로 올라왔다. 교회당으로 신을 신고 들어오는 것이다. 목사는 급히 나가서 두 팔을 벌리고 막았다.
“이 곳은 예배당입니다. 예배시간입니다. 방해하면 벌 받습니다.”
그들은 웃으며, “그러면 왜 주일에 미국 비행기가 날아오는가.” “기도하면 못 오게 할 수 있습니다.” 최 목사는 확신 있게 대답했다.
이렇게 최 목사와 괴뢰군이 다투는 동안에도 교회 안에 찬송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괴뢰군은 총부리를 치켜들고 찬송 부르는 아가씨 목에 대고, “지금 찬송 부르면 쏜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그 아가씨의 찬송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괴뢰군이 쏘지 못한 것이다. 그 아가씨는 지금 서울 대방동교회에 시무하는 김복명 조사의 따님 백금자이며 그 후 결혼하여 해운대교회 이정덕 집사의 부인이 되었다. 한참동안 무거운 시간이 흐른 후 괴뢰군은 최 목사에게, “그럼 미국 비행기 다음 주일 못 오게 하시오. 만일 비행기 한 대라도 오면 그 때는 여러분 모조리 총살입니다”하고 물러갔다.
최덕지 목사는 예배를 마친 후 교인들을 가지 못하게 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은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옛날 여호수아의 기도는 태양도 머물게 했습니다.”
공산주의와 신앙의 대결
공산주의가 이기느냐, 우리 믿음이 승리하느냐 대결전이었다. 최 목사는 금식하고 기도했다. 괴뢰군은 내무서에 가 보고했다.
“다음 일요일에는 총알 좀 준비해야겠군”했다. 신을 믿지 않는 그들은 매일 오는 비행기가 왜 다음 일요일엔 안 온단 말이냐하고 예수쟁이 죽일 구실이 생겨 기뻐했던 것이다. 드디어 죽느냐 사느냐, 최 목사의 승리냐 북괴 내무서의 승리냐를 판가름하는 결단의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성도들 중에도 ‘최 목사님이 그런 약속은 왜 하실까’, ‘옥중에서 지키신 하나님의 종, 아마 지켜 주실 거야’ 반신반의 조바심이 가슴을 울렁이고 있었다. 새벽부터 한시간 한시간 시간이 흘렀다.
오전 예배 드리고 오후 예배 드리고 저녁 예배 드리기까지 비행기는 보이지 않았다. 그 밤이 다가도록 종시 나타나지 아니했다. 내부서 괴뢰군들도. “하나님은 있는가 봐”했다. 왠걸 이제 비행기는 안날아 오는가 했더니 월요일에는 전보다 배나 많이 날아와 서울을 폭격했다. 이 폭격에 견디지 못하고 괴뢰군은 후퇴했다. 교회 주변에 불을 질렀다. 다시 교회는 위기를 당했다. 최 목사가 또 간절히 기도했더니 교회를 향해 다가오는 불길이 멈추어 다른 방향으로 타들어갔다. 재건교회는 공산주의도 물리치고 승리한 것이다.
괴뢰군이 남한 대부분을 침투했으나 마산과 부산만은 짓밟지 못한 것은 재건교회 본부가 있었던 까닭이요, 주의 사자가 계신 곳이기 때문이다.
최덕지 목사 [21]
1951년에 ‘최덕지 선생님’은 ‘최덕지 목사님’으로 세움을 받았다.(목사님 칭호에 앞서 보모 때는 보모, 신학생 때는 학생, 전도사, 때로는 최덕지 전도사 등을 사용했다. 다소 혼돈이 있음을 양해하기 바람)
1951년 9월에는 예수재건교회 신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고, 강상은 목사가 교장이 되었다.(강 목사는 평양신학교 졸, 옥중 성도, 재건교회 총회장이 됨)
중앙위원회에서 남한지방회로
이 땅에 신앙재건 진리운동이 일어난 후 회개 자숙 기간으로 3년이 지났다. 예수교 재건 중앙위원회를 두어 본격적인 신앙재건의 회개운동을 하여 오던 바 경남 일원의 국한된 운동이 그 후 전남, 경기, 경북, 강원 등지에 재건교회가 세워지게 되자 드디어 1952년 5월 13일 중앙위원회 만 4년, 재건활동 시작 후로 따지면 만 7년 만에 부산시 수정동 예수교 재건부산교회당에서 전국 각지 50여 교회대표 70여명이 참집한 가운데 예수교재건중앙위원회는 발전적 해산을 하게 되고 역사적인 예수교재건교회 남한지방회가 발족하게 되었다.
이로서 질서 있는 유법적 행동통일을 본 한 단체가 조직된 것이다. 이때 명칭을 남한지방회라 한 것은 이북 재건교회와 앞으로 완전한 총회를 형성하기까지 잠정적 명칭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때 최덕지 목사는 강상은 목사에 의해 안수를 받고 명예 목사에서 장립목사가 되었다. 여기에 대해 그때의 사실을 좀 더 분명하게 밝혀 두고자 한다. 최덕지 선생을 최 목사로 허락한 것은 1951년 4월 3일 예수교재건교회 중앙위원회 제6회 정기총회 때였다.
한국최초의 여자 목사 장립
그 당시 총회장인 강상은 목사가 “여자에게 목사 주는 것이 아니라, 최덕지 선생에게 준다. 승리의 종이니 앞으로 50년 후 1백년 후에 이런 인물이 나면 몰라도…”하면서 그때 목사의 명칭을 허락한 것이다.
그러나 중앙위원회가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재건교회 남한지방회가 되고 보니 다시 안수문제를 거론하게 되었다. 이에 강 목사는 최덕지 목사 같은 이가 기독교 역사상 또는 성경인물 중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니 줄 수 있다고 말할 때 최덕지 목사 자신이 기립하여 이렇게 분명히 말했다.
“오늘 이 총회 석상에서 나 일개인 최덕지에게 목사 안수한다면 안 받겠습니다. 그러나 여자에게 성직을 줄 수 있는 것이 성경적으로 진리냐 아니냐, 줄 수 있느냐 줄수 없느냐 하는 것을 분명히 결정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발언하여 그때 여러 사람들의 찬반토론 끝에 결론이 여성들도 성경적으로 줄 수 있다고 내려졌기 때문에 총회와 성경을 순종하여 안수를 받았던 것이다.
이 결정과 여자 목사 장립이 한국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일이며 또한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대서특필할 사건이요, 공헌인 줄 안다.
그리하여 우리 헌법을 만들 필요가 있어 그 자리에서 헌법기초 위원으로 강상은, 최덕지, 김영숙, 주상수, 최종규, 박성규, 최일규 제씨가 위촉된 것이다. 총회에서 위촉받은 헌법위원은 그 조직에 있어서 위원장에 강상은 목사, 서기에 최종규 전도사를 선정했다.
헌법위원 모임을 부산은 최덕지 목사댁에서 마산은 정학진 집사댁에서 가졌다. 주로 범죄하기 전 장로교 헌법(1934년 수정함)을 모법으로 기준하고 신조, 성경요리문답, 예배모범, 권징조례를 그대로 채택하고 다만 정치 부문에만 수정키로 방침을 정하고 무려 5, 6차나 모여 연구수정 하였다.
주로 수정된 부분은 ‘제직회’를 ‘교직회’로 ‘당회’를 ‘장회’로 고쳤으며, 정치 제5장 치리장로 제3조 장로의 자격 ‘27세 이상’을 ‘30세 이상’으로, 입교 5년 이후 무흠 1년으로 수정되고 ‘남자 중’하는 ‘남자’를 삭제하고 남녀 다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동시에 정치 제6장 집사 제1조 집사의 직은 무흠한 ‘남자교인’으로 되어 있는데 ‘남자’를 삭제, 남녀 모두에게 집사 안수 임직하도록 했다.
제4조 여집사 (1)항 중 ‘임직함에 안수식은 없나니라’라고 되어 있으나 여기서 안수식을 삭제하였다.
이상을 수정하고 먼저 헌법수정위원회에서 수정안에 대하여 투표한 결과 7인중 반대표가 1표요, 찬성표가 6표로 결정된 것이다. 그 반대표를 던진 이가 최일구 목사이다.(당시 전도사)
사상이야 어찌할 수 없는 것. 자기 소신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나 6대 1이었으니 우리 재건교회는 여성직을 확인하고 조직된 것을 알아야 한다.
헌법통과와 여권확립
1954년 3월 9일 예수재건교회 남한지방회 제3회 정기총회가 부산교회에서 회집되었다. 특히 11일에는 전기 헌법기초위원들이 장기간 연구한 것을 헌법기초위원회 서기인 최종규 전도사가 헌법토안을 본회에 상정, 보고함에 축조통과 채용키로 가결하였다. 이리하여 전기 정치 남녀성직에 종전에는 남자에 한한 것을 여성직(여집사, 여장로, 여목사)을 허락한 것이다.
은혜속에 첫 성찬식 베풀고
이 헌법의 통과로서 재건교회에서는 성직자 ‘남녀 동등권’이 완전히 확립된 것이다.
그리고 부산과 마산을 중심으로 재건교회 남한지방회 총회 산하 동부지방부(부산지방)회장 최덕지 목사, 서부지방회(마산지방)회장 강상은 목사로 감독 지도하게 되었다. 더욱이 3월 11일 밤은 해방 이후의 자숙도 마치고 6·25사변도 마무리 지어졌고 헌법도 제정되었음을 감사하기 위하여 감격에 넘치는 첫 성찬식이 강상은 목사 집례로 거행되었다.
1956년 1월 27일은 최덕지 목사가 창설하고 가르친 성경학교 제1회 졸업식날이었다. 영광에 빛난 졸업생은 구태옥(남), 김혜수(여, 최 목사 따님), 박현숙(여, 당시 여전도사), 황보 일생(여, 집사) 등이었다.
이때 최덕지 교장의 훈사는 감명적이었다. “여러분은 재건성경학교 제1회 졸업생이라는 영광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연구나 배움엔 졸업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 학교에서 배운 방법으로 한 평생 학도로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각오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경은 머리로만, 지식으로만, 배울 뿐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성경을 생명삼아 바른 생활이 필요합니다. 즉 성경말씀대로 사는 삶이 바로 배운 목적입니다. 우리 학교가 좋은 학교, 빛나느 학교가 되느냐, 또 발전하고 번영하는 학교가 되느냐 안 되느냐는 바로 여러분의 활동과 생활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성삼위의 하나님이 여러분과 동행하시기를 빕니다.”
부산교회에서 거행된 졸업식장에서 많은 방청객 그리고 졸업생, 졸업생을 보내는 재학생 모두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한편 1956년 2월 23일은 재건교회에서 최초로 장로 장립을 가진 날로서 의의가 깊은 날이다. 이날 예수교 재건창원교회 염재로 조사가 장로 장립을 받았다. 이를 위시하여 부산교회에서는 박열순, 박부준 두 집사의 장로 장립이 있었다.
최덕지 목사 [22]
새벽예배 출석을 못하고
1956년 3월에 접어들면서 최덕지 목사는 차츰 몸이 불편하게 되었다.
초순부터 새벽예배 출석을 못하고 자리에 눕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1956년 3월 22일에 당시 예수교 재건 부산교회 최덕지 목사 밑에 시무하던 최종규 목사를 자택으로 불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교훈과 해명과 유언을 남겼다.
첫째 자신의 병에 대한 말이 있었다. 배를 다쳤던 일을 말하고는 병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 치료하실 이도 하나님이시니 병원에 가지 않는다고 하면서 의사가 고칠 수 있는 병이라면 지금까지 기도로서 다 치료되었다고 말하였다.
많은 아픔을 참는 것이 보기 민망하여 병원에 가 보기를 권면했으나, “내가 만일 기도로서 병이 치료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데려가실 것이니 염려할 것 없다”하였다.
둘째는 금식 등에 대한 해명이다. 옥중에서의 금식은 주로 진리투쟁과 신앙파수를 위한 것이나 해방 후 계속 금식에 대한 그 하나의 동기는 자기 시동생 되는 김정실씨(전 국회위원 당시 단국대학장)가 자기를 만나러 왔다가 성일을 범하고 상경한 것이 마음 아파 그 시동생을 위한 것이고 또 하나는 한국교회와 한민족의 죄악을 사함받기 위해서라고 했다.
몸이 너무나 쇠잔하였으나 금식은 항상 계속되어(다음 그의 신앙사상과 생활에서 금식을 다시 밝히겠음) 해금을 권했더니, “이제 얼마 안 가 영원히 해금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그의 영원한 나라로의 부르심을 의미한 것이다.
셋째는 나에게 준 유언이었다. 굳게 서기를 원했다. 모든 사람이 다 물러가도 부산교회를 떠나지 말고 재건제단을 지켜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동안 나에게 여러 가지 난관과 시련 속에 오늘까지 재건교회를 지키게 된 것은 이 유언에 힘입고 영향받은 바 컷음을 이 기회에 밝혀둔다.
넷째는 성경학교를 자신의 후계로 계속 맡아줄 것과 목사장립은 신학과를 모두 이수하여 장립받으라고 권면해 주었다. 그리고 신학교를 계승해 많은 재건인물 양성을 부탁하였다.
다섯째는 재건진리를 서울에 널리 외치고 국회와 대통령에게 증거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이러한 유언을 남길 때 옆에는 부산교회 조복희 전도사와 마산교회 김야모 집사(출옥성도. 현 장로)가 지켜 보았다.
1956년 3월 26일에는 재건교회 제7회 남한지방회 정기총회가 부산교회에서 회집되고 아울러 재건교회 창설 1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이 식장에도 최 목사는 출석하지 못했다. 그가 늘 소원하던 부산전역에 재건전도지 5만매가 살포되었고 전도대원에 의한 전도강연이 실시되었다. 이 보고를 듣고 기뻐하던 그 모습은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4월이 되자 대지엔 봄의 생기가 넘치고 만물이 소생하여 푸름이 짙어갔으나 최 목사의 병세는 더하여 점점 쇠잔해 갔다. 이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위문하는 성도들의 발걸음이 줄을 이었고 따라서 최 목사의 병이 낫기를 간구하기 위해 금식기도를 하는 성도들의 수효가 날로 늘어갔다.
최 목사 측근에서 봉사하던 종들은 황보 일생 집사, 최혜경 씨(현 창원교회 집사), 박덕봉 집사(작고), 이말선 집사, 박정순 집사(현 부산교회 권사) 조춘희 집사 등이었다.
그는 웃고 성도들은 울고
5월 들어 최 목사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때로는 아픔을 참으려는 표정을 그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다. 어떤 때에는 담요 위에 누운 최 목사를 교우들이 받들어 들고 빈방과 마루를 돌기도 하면서 그 아픔을 잊게 하려고도 했다. 일제 때 고문당하고 무수히 매 맞은 몸의 살과 뼈마디에 그 상흔이 나타난 것이다.
슬프다. 1956년 5월 13일, 최 목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 날은 주일이었다. 최 목사는 새 옷을 갈아입었다. 주일에는 예배를 위해 항상 토요일에 목욕하고 새 옷을 갈아입었다. 성도들은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최 목사댁으로 모여 들었다. 밤 마지막 예배를 다 마친 후 최 목사는 성도들의 찬송소리를 들으며 한국 기독교 진리파수의 오랜 투쟁 속에 꿋꿋이 외길을 걸어온 생애를 마치고 영화롭게 웃는 모습으로 떠났다. 가신 주의 사자는 기쁜 얼굴이었지만 간호하며 기도하고 지켜보던 성도들은 뜨거운 눈물을 금할 길이 없었다.
이 부음이 전국교회로 알려지고 임원회와 재건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의논한 결과, 예수교 재건교회 남한지방회장으로 결정하고 장례는 5일장으로, 그 일시는 5월 17일에 거행키로 하였다.
부산교회당에 최 목사의 영구가 운구되었고 장례절차는 사회에 강상은 목사(지방회장. 현 총회장)가 맡고 설교는 김영숙 목사(지방회 부회장)가 하였다. 본문 디모데후서 4장 7-8절과 제목 ‘하나님의 종 최 목사’라는 주제로 설교하여 많은 감명을 주었으며 최종숙 조사의 애도사에 식장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사회 유지들이나 전국교회 교우 수백명이 참석한 가운데 고별식은 엄수되었다. 화훼는 3일 동안이나 성도들이 꽃을 손수 만들어 준비된 것으로 3층 흰 꽃송이에 붉은 십자가를 붙인 것이다. 장례행렬의 상여는 남녀 청년들이 메고 교우들이 뒤따랐다. 부산 원예고교 악대가 동원되어(당시 조광제 장로가 이 학교에 근무함) 이 악대의 주악 속에 영구는 부산 시내를 일주하고 그 유해가 초량동 뒷산에 안장되었다. 이 장례 행렬을 보고 혹자는 그 때 떠난 신익희 선생의 장례인 줄로 안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하여 최 목사의 위대한 생이 56세를 일기로 하여 그 육신의 생활을 마친 것이다.
애도사
오호 슬프다. 이날이여.
하나님의 사람이 가신 이날이여. 오늘 최덕지 목사님의 고별식에 임하여 한국교회 재건을 위하여 고락을 함께 하던 신앙동지 여러분과 진리의 후계인 불초는 목사님의 가심을 애통하는 전국 재건성도와 함께 삼가 애도사를 드리옵니다.
오호 통재여.
우리들은 죽음에 대하여 일찍 생리학에서 배운 바 있사옵고 이를 또한 시인의 애가 속에 들은 바 있사옵고 이를 또한 전기자의 기록에서 본 바 있사오니 어찌 타 죽음이 이날처럼 슬프오니까.
아 나는 죽음과 사후에 대하여 강단에서 소리높이 외쳤고 인생의 죽음을 듣게 될 때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고 영웅열사의 죽음들을 말하여 저들을 위로하고 만일에 나의 설교와 위로에 원기를 회복하지 못하는 자를 볼 때에는 마음 속 그들의 신앙이 부족함을 탄한 바 아니었던가. 부활의 소망을 말하고 내세의 행복을 찬미하지 아니 하였던가.
그리하여 죽음은 인생의 공도라 우리가 슬퍼할 것 아니라고.그러나 부활의 소망이 없는바 아니고 내세의 행복을 모르는 바 아니옵니다만 우리의 최대의 애모이신 목사님께 이 죽음이 임하시니 그 아픔과 슬픔과 괴로움을 비로소 맛볼 수 있나이다. 하물며 우리 전 교도들이 연야로 계속하던 열혈의 금식기도에도 또한 칠팔십 노인들이 생명을 바쳐놓고 대신 죽어 목사님을 구해보려는 희생의 성심에도 아 어찌 무참히도, 무자비하게도 우리의 생명이신 주의 사자는 가시었나이까.
최덕지 목사 [23]
오호애재, 사랑이 생명일진데 우리의 사랑이신 당신의 가심은 우리의 생명을 잃음입니다. 아 이제는 천공에 반짝이는 뭇 별들도 그 빛을 잃어 흑암이 되고, 춘절이라 자랑하던 만화방초도 그 향기를 잃어 아름다움이 없고 공중의 종달새의 노랫소리도 마음만을 아프게 할 뿐입니다.
국가는 공의가 없어 아직도 다난하고 한국 교회는 여전히 부패하여 죄악이 관영한 때 우리의 진리재건에도 반란이 그 훼방을 끝마치기 전, 아 하나님의 충복이요 나라의 충민이신 당신의 장서는 진실로 통석함과 애도됨을 형언할 수 없습니다.
돌아보건대 주의 사자의 일생은 또한 기구한 역사와 파란곡절이 많았습니다.
소녀 15세 다감한 때 자모를 잃어 엄친 이모의 슬하에서 자라나시다 엄친마저 병드시니 단지의 효성을 다하였으나, 천도도 무심한 듯 19세 때는 아버지마저 여의었으니 가정적으로 이미 한이 많았으며 또한 결혼한 지 4년 만에 부군의 그 홍지를 이루시기 전 또한 사별의 쓰라림을 겪었나이다. 독수공방에서 어버이 얼굴도 알지 못하는 딸을 안고 무심한 달빛을 바라보고 한숨지음이 그 몇 번이시며 아버지를 찾는 딸의 모습을 바라보고 눈물지음은 그 몇 번이었겠습니까.
또한 뜻에 있어 동지요 정에 있어 벗이요 육친으로는 여서인 고 김진택 선생을 앞서 보낸 것은 또한 자녀의 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위에 아버지 없는 손남손녀를 아버지 대신 양육할 때 뼈 속에 사무치는 한이 오죽하였겠나이까. 당신은 부모의, 한 남편의, 한 자식의 한 많은 세상에 그 생애 실로 박행과 고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오호감사여. 그러나 당신의 불행은 이 민족과 한국교회에 행복을 주기 위함이였사오니 부모에게 효를 다함은 하나님께 충성을 위한 준비였사옵고, 남편에게 열을 다함은 진리를 위한 싸움의 준비였사옵고, 자녀에게 인자를 다함은 오늘 양떼를 사랑하는 준비가 되게 함이였사오니 오직 하나님 그 사자를 이 땅에 보내심에 일하기 위해, 투쟁하기 위해 보내시고 세상에는 모든 것 다 빼앗으므로 그 심신을 단련시켜 전심전력 오로지 당신께만 충성하는 기관이 되기 위한 준비이었습니다.
참으로 천도를 측량하기 어려웁고 세상사의 알기 어려움 또한 사자의 생애에서 이를 발견하나이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가가호호 방문하여 독립정신 고취하며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 임시정부를 원조함은 애국지사로서 조국에 바친 충성이 위대함을 자랑할 바이요. 1938년 한국기독교회가 신사참배 결의로서 공적으로 범죄타락함은 생명보다 귀중한 진리를 배반하고 신앙정조가 유린된 것입니다.
아, 그러나 오로지 당신만은 결사적 투쟁으로 일제의 총검 앞에 진리를 파수하고 한국기독교 생명을 보전하였으니 과연 사자는 여호와의 충복이요, 나라에는 지사요, 신앙에는 영웅이요, 생명에는 은인이었나니 당신이 이 땅에 있음을 우리는 삼천만 온 겨레와 한가지로 세계에 자랑할 바이었습니다.
오호통재. 하루 한 끼의 식사도 제대로 잡수지 못하시며 하나님의 법도를 준행하던 십일조의 정성, 성일을 범치 않기 위하여 변기를 안으시며 울던 모습, 하루 일곱 번 끊임없이 부르던 찬송에 고무 마스크를 차시던 심회, 무수한 철퇴에도 끝까지 굴하지 않던 예배, 우상숭배 일본제국이 망한다 외치던 애국적 용기, 조국해방을 위해 7개성상 기도하던 불굴의 신앙, 이 모든 것 회상할 때마다 성경의 위인이나 사상인물 그 누가 당신을 비견할 자 있으며 추종할 이 있겠나이까. 천우신조! 8월 18일 사형당할 당신의 몸이 조국해방으로 8월 17일 밤 기적적 회생으로 평양형무소를 출감하였나이다.
아, 조국은 양단되고 전 국민은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고 출옥성도 신앙동지마저 노선을 달리하니 비탄과 우수는 여전히 가실 날이 없어 눈물로 예레미야의 생애를 다시 계속하였습니다. 오호통재. 우리가 참을 수 없는 슬픔이 있으니 당신같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롭고 성결하여 죄 밖에 무서움 없고 모든 사람 사랑하는 신앙의 사표로서 충성 밖에 모르시는 사자에게 어찌 하루도 마음 평안한 날이 없고, 한 일도 쉬운 것이 없고, 이 땅 위에 눈을 뜨실 때로부터 눈을 감으실 때까지 불행간난의 연속이며 마지막도 장구한 고통 속에서 가셨나이다.
아, 나라에는 의무를 다하고도 파괴분자라는 지목을 받고, 교회에는 진리를 파수하고도 이단자란 낙인이 찍히고, 일가친척에는 효열을 다했건만 고집쟁이란 누명을 받고, 양떼를 사랑하여 생명을 주였건만 내가 세운 교회와 내가 기른 양들에게 배신을 받았으니, 오호통재. 불의와 허위의 세상에서 의인이 당하신 고난이 얼마나 심하였나이까.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할 것은 환단은 안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소망을 낳는 줄 앎이니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물 붓듯 하심이라”하였사오니 땅 위에 당신이 당하신 환난은 하나님의 사랑을 독점하게 하심인 줄 알았습니다.
주께서도 독생자로서 땅 위에 강림하사 당하심은 역시 고난이었고, 마지막 전 인류를 대속하신 죽음인 십자가를 지심에도 그 고통은 절정에 달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애통을 발하였사오니 당신이 병듦은 한국교회가 병듦을 상징함이요, 당신이 마지막 그 숨을 모우기까지 신음하심은 한국교회 조짐을 담당하신 희생의 제물 됨을 알았나이다.
진실로 생애는 주님 생애 그대로 따랐나이다. 오호 슬프다, 이날이여. 당신이 가심에 우리는 창자를 끊는 아픔과 가슴을 치는 후회의 통곡을 또한 금할 수 없나이다. 재건은 특사의 선물이요, 은총의 기업이건만 이 은혜 감당치 못하는 에서와 같이 망녕됨이 있었고, 주고 싶은 당신의 마음에 받을 자격 못 되어 주지 못하던 그 심정은 누가 알 것이며 당신의 절대신앙에 우리는 미치지 못해 오해함이 또한 얼마던고. 우리가 연약하여 범죄할 때 당신이 금식하였으니 우리의 자신이 당신의 살을 찢고 피를 뽑았음은 또한 얼마입니까.
당신이 우리의 죄를 깨우쳐 생명과 진리로 인도할 때 원망과 불편으로 마음을 아프게 함 또한 헤아릴 수 없나이다. 반란군에 상처입고 병석에서도 각 개인과 교회와 국가를 위한 기도를 끊임없이 하시며 우리에게 기도를 청하자 무정하게도 당신의 곁을 떠난 불실한 사람들입니다.
오호통재. 우상을 파괴하고 매를 맞음에 당신 홀로 이를 당하셨고 모든 잘못은 당신 어깨에만 책임을 돌리던 비겁한 저들입니다. 우리는 진리싸움에 당신을 뫼시다 곤욕을 당하게 하였고 어려운 일과 무거운 짐을 당신께만 맡기고 우리는 방관하던 자들입니다. 당신이 가심에 잘못이 기억나니 하늘과 땅에 부끄러움 금할 수 없나이다. 보답하고자 하나 당신 없고 용서를 청하오나 말이 없습니다.
최덕지 목사 [24]
어제 우리는 베드로처럼 주를 부인한 후 다시 통곡하듯 전비를 회고하고 통한의 눈물을 금치 못합니다.
당신의 풍부한 덕망, 철저한 사랑. 절대의 신앙, 발군의 지모. 그 어느 것이나 광세의 사표로서 우리의 지도자임에 틀림없는 주의 사자여. 어찌 차마 재건교회를 두고서 가셨나이까. 한국교회를 잊고 가셨나이까.
백만실양을 누구에게 부탁하고 어이하려고 가셨나이까. 어지러운 조국과 이 겨레를 어이 잊고 가셨나이까. 마지막 진액이 다 말라 혀가 입천장에 붙어질 때까지 이 강산과 재건의 발전을 위해 간구하시던 그 불변의 기도를 누구에게 부탁하고 가셨나이까.
오호통재. 옛말에 집이 가난하면 어진 처를 생각하고 나라가 어지러우면 좋은 신하를 생각한다 하였는데 이 어지러운 세태와 재건의 전도가 다난하온데 어찌 가신단 말입니까.
우리의 잘못은 누가 충고해 주며 교회의 죄악은 그 누가 경책하며 누가 생명을 다 바쳐 제단을 사수하며 악령의 계획을 누가 방지하여 거리에 헤매는 동포와 누가 생명 나누리까.
재건이 어려워도 당신 계셔 안심했고, 마귀 방해 많아도 당신 있어 평안했소. 앞으로 오는 환난 누가 막아주리까. 당신이 월남할 때 소련군 앞에서도 예배할 때 하나님이 지켜 주셨고 6·25동란 때 서울이 잿더미가 되어도 당신이 계신 곳에는 피난처가 되었사오며, 남한이 재난의 불바다를 이루었으나 중공 괴뢰가 부산만은 침범치 못함은 하나님의 사람 의인 당신이 계신 연고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자없음을 울고 울어도 시원치를 않습니다.
오호애재 목사님의 일생은 기구불행한 그대로, 싸우기 위해 오셔서 싸우기 위해 살다가 이제는 사도 바울의 말과 같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다가고 믿음을 지키었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면류관을 예비하여 두셨으니 주께서 의로우신 재판장이 되사 그 날에 내게 주시고”라고 말씀을 하신대로 면류관 받으실 것을 기뻐하나이다.
목사님의 불변의 신앙과 열심의 기도로써 이미 우상철퇴 명령은 내려졌고 공사창도 완전히 폐지되었사옵고 중첩문제도 완전 해결은 못되었으나 대한민국 형법에 쌍벌주의가 채택되었사오니 국가와 재건을 위해 일생을 통해 분투로써 뿌리고 간 씨는 반드시 결실이 있어 조국이 전리 위에 확립되고 세계가 우리 재건을 취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지난 번 3월 22일 오후 5시 30분 마지막 유훈으로 주시던 대통령각하께와 국회에 진리 증거할 것과 신학과를 필수하여 목사 장립 받아 당신의 뒤를 후계할 것과 아울러 성경학교, 신학교 잘 경영하여 진리 후계의 인재양성을 할 것을 깊이 명심하오며 진리를 분석하여 재건제단 파수할 각오를 이제 굳게 하나이다.
모세를 느보산에서 부르심에 여호수아를 강하고 담대케 하시던 만군의 여호와 우리와 함께 하며 엘리야를 승천케 하시매 엘리사에게 성신을 갑절이나 주시던 하나님, 오늘 저희들에고 성신 충만하게 주셔서 당신의 뒤를 따름에 부족이 없게 하소서. 뿌리고 가신 씨 가꾸고 거두어 추수의 기쁨을 주 앞에서 만날 때 함께 나누기를 영원하는 바입니다. 오호통재. 지난 5월 13일 성일을 맞이하여 저녁예배까지 마지막 마치던 때 해금을 권하자 “이제는 영원히 풀 것이다”하시던 마지막 말씀대로 지금은 저 황금보석 꾸민 집에 그 아픔도 그 고통도 그 금식의 괴로움도 죄악 보고 우심도 없는 이제는 주와 같이 그립던 모든 가족과 성도와 친구를 다 만나서 할렐루야 찬송하실 것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러나 영원의 사표 당신을 잃은 저희는 슬픕니다. 말은 한이 있거니와 정은 한이 없어 소리를 삼켜 울며 삼가 이 애도사를 올립니다.
주후 1956년 5월 17일
예수교재건교회 남한지방회 대표 최종규
예배를 생명으로
종교관
사람들은 그 기질이나 관점에 따라서 종교를 다르게 해석한다. 그 종교관을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과의 교통으로 생각하는 자.
2. 옳은 생활의 영감으로 생각하는 자.
3. 이성의 최대 활동으로 생각하고.
4. 예배로 생각한다.
신약 성경에서 예배로 보는 종교관이 히브리서라고 할 수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그로부터 교통하는 가운데서 그 종교심의 만족을 얻은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가 지상의 종교임을 증명하려 할 때 예배 문제를 다룬 것이다. 종교의 목적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길을 열어주며 그로부터 교통할 방침을 가르쳐 주는 데 있다.
구약(유대교)에 있어 예배(제사)가 모든 짐승을 잡아 그 피로서 죄 많은 인생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예배 방식에 대해 신약(기독교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한 번 드린 제물, 대속의 피로 인해 우리가 영구적 효력을 가지고 직접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게 된 것이다. 이는 모든 종교의 예배 방식과 대조할 때 우리 기독교가 온전한 예배를 드린다는 증명이 되었고 또한 모든 종교의 목적이 우리 기독교에서 완성된 것이다. 그리하여 최대 최고의 종교가 된 것이다.
축복은 예배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그에게 있어 종교는 예배다. 사람의 최고 특권은 하나님 앞에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 목사에게 있어서는 그의 생명은 이 예배에 있었던 것이다. 고로 예배를 빼앗기는 것은 생명을 빼앗기는 것으로 보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는 축복은 전부가 이 예배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악한 마귀는 이 예배를 빼앗고 우리의 신앙생명을 빼앗은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예배는 절대적이다. 그 누구에게도 이 예배는 빼앗길 수가 없었다. 고로 최 목사님은 일제 때 이 예배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투쟁한 결과 한 번도 예배를 꺾이지 않고 완전 승리한 것이다.
6·25사변 당시 서울서 공산 괴뢰군에게도 예배를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생명을 걸어 놓고 싸워 승리한 것이다. 그가 창설 인도한 재건교회는 우상에게 빼앗긴 이 예배를 다시 찾아 하나님께 바치자는 것이다.
에스라, 느헤미야 등이 파사의 고레스왕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바벨론 70년 포로에서 석방됨에 조국재건에 앞서 성전을 재건하고 황폐한 제단을 다시 쌓고 잃어버린 여호와의 경배를 찾음과 같이 우리도 조국 해방과 아울러 조국 재건에 먼저 오천만 민족이 다 이 예배를 찾아야 한다. 그에게 있어 실제 예배생활은 이러하였다.
1. 새벽예배=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잠깐 감사기도가 있은 후 바로 교회로 간다. 교회 새벽예배를 인도한다.(대개 여름은 4시, 겨울은 4시 반 시작) 이 예배 때 교인 각 가정을 호명기도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한다.
이 예배 때 죄를 참회하는 통곡의 눈물이 마루를 적시고 국가 민족의 사죄와 공의를 부르짖는 소리에 먼동이 튼다. 많은 부녀자들이 철야기도했고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밝아오는 아침과 함께 일터에 갔다. 한국교회가 이 새벽예배로 생명이 유지되고 한국의 아침은 밝아졌다.
교회예배 마치면 집에 돌아와서 가족과 더불어 가정 새벽예배를 드린다. 대개 성경 한 장씩 윤독한다. 아침은 금식하고 오전예배(11시)시까지 기도시간에 들어간다.
최덕지 목사 [25]
2. 오전예배=평일에는 이 예배시간에 은혜 받으려고 최 목사집에 많은 성도들이 모여들었다. 11시가 되면 사도신경을 봉송하고 찬송을 하고 성경요절을 주며 계속 설교하고 기도하였다. 이 기도는 전국 교회와 국가 민족을 위해 하였다.
참석한 성도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었다. 지금 재건교회 성도들 중에는 주일은 성일이니 교회 나가 엄수하나, 평일에는 각자 가정에서 바쁘다 핑계하고 일만 한다. 핑계하고 가정예배를 외면하지 아니 하는가 반성해야 한다.
3. 오후예배=최 목사는 12시 오전 예배 마치고 식사(이 식사시간에는 언제나 3, 4명 많으면 5, 6명은 동참하게 된다)를 한 시간 정도로 마치고 모든 교회 문제를 상담 처리하고 개인의 신앙상담 등 맡아 의논하며 잠깐 휴식을 취한 다음에 곧 오후 3시 예배를 시작한다.
혹 신앙 동지가 오면 3시 예배를 인도케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친히 자신이 인도한다. 언제나 그의 예배시간은 늘 부흥회와 다름없이 많은 성도들이 모여 들었다. 아무리 바쁜 손님이라도 이 예배 시간에는 예배 안 드리고는 보내지 않았다. 그만큼 예배를 존중시하였다.
하루 네 번 예배 시간 철저히 지켜
이 정신 그대로 재건교회는 주일에 오후 예배 시간이 있다. 현대 교회가 도시인의 시간편리를 보아 6시, 혹 9시 1부 예배, 11시 2부 예배, 오후 1시에 3부 예배하는 그런 따위의 형식이 아니라 일일 4차 예배드림을 말함이다.
전자는 주일 어느 시간이나 한 번 출석하면 되거니와 우리는 각자 네 번 예배드림을 말한다. 그 중에도 이 오후 예배가 늘 말썽이다.
처음 재건교회 출석하는 자 중에는 오전예배 드리고 계속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해 예배드립니다” 할 때 의구심을 가지거나 지금 같이 바쁜 시대 예배 한 번이면 족하지 계속 무슨 예배냐고 한다.
재건교회 가정에서 자란 청년은 습관적으로 드릴 뿐 즐겁고 기쁜 맘으로 드리지 않는다. 지식이 있는 청년학생들에게는 외면당하기 일쑤다.
또는 재건교회를 염려하는 층에서도 재건발전에 저해된다고 한다. 그리하여 많은 교회가 오전 예배 드린 후 대부분 나가버린다.(안 그런 교회도 있다) 혹 젊은층이 남아 있다면 부모님의 체면, 목사님의 안면을 위함이 많다.
어떤 이는 오전예배 폐회 무렵에 와 그대로 가기 민망해 오후예배 참석하고 가는 자도 있다. 바쁘고 할 일이 많은 시대 과연 오후 예배가 시간낭비인가. 우리가 외면해도 되고 소홀해도 되는가. 또 계명이 아니니 맘대로 해도 되는가.
최 목사는 성경대로 생활하였고 또 우리를 그렇게 가르쳤다. 본래 유대인은 하루 세 번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즉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다. 시편 55편 17절에는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하였다.
다니엘 6장 10절에도 하루 세 번 기도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신약 사도행전 3장 1절에도 “제 9시 기도시간에 베드로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라고 하였다. 이 9시는 오후 3시를 말한다.
그러면 4번은 지나치지 않은가. 성경에 있는 대로만 하면 되지 지나치게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성경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시편 119편 164절에 “주의 의로운 규례로 인하여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라고 하였다.
3번 식사 시간에 찬송과 기도, 4번 예배시 찬송과 기도 이렇게 일곱 번이다.
우리 재건교회 부산노회 측은 이 성경 원리대로 실천한다. 주일에도 교회에서 하루 네 번 예배드림으로 오전 예배, 오후 예배가 계속되거니와 평일에도 가정이나 직장에서까지 심지어 여행 중 배 안에서 열차 안에서 버스 안에서까지 그 어느 장소를 가리지 않고 국가민족과 재건교회를 위해 예배드리는 그 경건하고 열심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4. 밤 예배=최 목사에 있어서 밤 예배는 대부분 가족들의 예배요, 한 날을 지켜 주신 감사의 예배다. 손자손녀를 위해 찬송을 부르고 성경말씀을 암송하고 그 잠자리 옆에서 기도하는 모습은 바로 그의 신앙생활의 기본 자세인 것이다.
성도 위해 찰떡을 굽는 데도
그는 우리에게 예배의 존중성과 절대성을 교훈해 주기 위해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해주고 있다.
일제박해 시 마산에 거주하는 호주 미순회 여선교사 태매시 선생 댁에서 시간예배를 드릴 때다. 김영숙, 염애나 조사(현 여목사) 등이 마산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6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나와 있었고 최덕지 목사도 도경에서 12일 금식기도 후 출감되어 이들이 함께 모여 예배와 기도를 하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3시예배 시간에 태 선생댁에 최덕지, 김영숙 두 선생이 나타나지 않았다. 얼마 후 두 선생은 얼마나 울었던지 눈시울이 빨개진 채 찾아오고 있었다.
사유인 즉 당시 의신학교 기숙사 사람들이 이 옥중에 있는 종들을 주기 위해 찰떡을 굽는다고 예배시간을 안 지켜 최 목사가 그 떡 철판을 뒤집어 엎었는데 떡은 재로 뒤범벅이 되어 버렸다.
“이 떡은 진리를 위하여 싸우는 종들이 먹을 것인데 예배시간 안 지키고 떡판에 떡부터 굽는다니 될 말이냐. 예배시간 어겨가며 굽는 떡 먹고는 싸움에 실패한다”하고 최덕지 선생이 뒤집어 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김영숙과 최덕지는 울며 자복기도 하느라고 늦게 오신 것이다.
또한 최 목사는 어떤 가정에 가셔서 예배 드릴 때 대접하기 위하여 예배시간 불참하거나 혹은 예배드리다 다 안 마치고 음식 준비한 것은 그 대접 받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온전히 드리지 못함은 그것이 바로 불경이었다. 성도를 죄 짓게 하고 그 음식 먹을 수 없다고 교훈해 주었다.
그런고로 최 목사댁에서 예배 드릴 때 간혹 부엌에서 밥이 탔을 때가 있고 음식을 망칠 때가 있어도 그 예배만은 경건하게 마쳤다.
고 최덕지 목사가 남긴 위대한 예배의 유산은 고이 간직되어야 한다. 재건교회가 이 한국교회에 남긴 유산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위대한 신학이 아니다. 화려한 건물이 아니다. 두드러진 사업이 아니다.
오직 하루에 네 번 새벽, 오전, 오후, 밤 정한 시간에 경건하게, 성실하게 몸소 본을 보여준 예배정신이다. 현대의 교회가 생명을 잃어 감은 이 예배를 외면하고자 함에 있다.
새벽에는 잠자기 위해 귀찮아하고 오전에는 바쁘다고 포기하고 오후 예배는 남이 안 한다고 외면하고 밤 예배는 피로해서 안식을 찾는다면 과연 신앙생활을 바로 하겠는가.
재건 성도들은 뜻을 굳게 하고 최 목사가 이끌어 준 예배의 유산과 축복을 자랑하고 고이 간직하여 우리 후손 자손 만대에 그대로 전해주어야 할 것이다.
최덕지 목사 [26]
우상 타파 사상
하나님의 지상명령
최 목사는 우상 타파를 그의 최대 사명을 생각하였고 또한 하나님의 지상명령으로 자임하였다. 그는 이 땅의 생을 받은 것이 우상과 싸우기 위함이오, 우상을 파괴하기 위하여 사신 분이다. 이 사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음에서 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상 섬기면 망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십계명 그 중에서도 1, 2계명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그대로 살았고 그대로 싸운 것이다. 만일 이 사상이 철저하지 않았다면 일제 신사참배로 범죄할 때 그는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성경에서 볼 때 제1계명이 “거짓 신들을 섬기는 것을 금했고 경배의 대상으로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명하였다. 제2계명은 “참 하나님을 그릇된 방법으로 섬기지 말라”고 명한 경배의 방법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인격성, 신령성, 불멸성, 무형성을 강조하였다.
우상숭배에 대하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천지창조의 무형의 실재로서 무소부재하고 무한하신 영이신데 우리가 그 형상은 오직 그리스도로만 알 수 있으며 그를 신령과 진정으로 경배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새긴 우상이나 아무 형상을 만들지 말고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 우상은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1. 허무한 것이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목상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레 26장 1절)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공경하며 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그들을 용서치 마옵소서.”(이사야 2장 8-9절)
2. 두려움의 대상이다.
“아사 왕의 모친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목상을 만들었으므로 아사가 그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고 빻아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니.”(역대하 15장 16절)
3. 고통과 슬픔의 대상이다.
“그 우상들을 섬김으로 그것이 저희에게 올무가 되었도다.”(시편 106편 36절)
4. 이상하고 낯선 신이다.
“그 부친 히스기야의 헐어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며 바알들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성신을 숭배하여 섬기며, 여호와께서 전에 이르시기를 내가 내 이름을 예루살렘에 영영히 두리라 하신 여호와의 전에 단들을 쌓고 또 여호와의 전 두 마당에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하여 단들을 쌓고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그 아들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또 점치며 사술과 요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그 진노를 격발하였으며 또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목상을 하나님의 전에 세웠더라.”(역대하 33장 3-7절)
5. 고통의 대상이다.
“가뭄이 물 위에 임하여 그것을 말리우리니 이는 그 땅이 조각한 신상의 땅이요, 그들은 우상에 미쳤음이니라.”(예레미야 50장 38절)
6. 그림자 새긴 우상이다.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파멸하며 산당을 다 훼파하고 그 땅을 취하여 거기 거하라. 내가 그 땅을 너희 산업으로 너희에게 주었음이라.”(민수기 33장 52-53절)
7. 목상이란 것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단 곁에 아무 나무로든지 아세라상을 세우지 말며 자기를 위하여 주상을 세우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신명기 16장 21-22절)
8. 태양주상이란 것이다.
“내가 너희의 산당을 헐며 태양주상을 찍어 넘기며 너희 시체를 파상한 우상 위에 던지고 내 마음이 너희들 싫어할 것이며.”(레위기 26장 30절)
“아사가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여 이방제단과 산당을 없이 하고 주상을 훼파하며 아세라 상을 찍고 유다 사람을 명하여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하며 그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없이하매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얻으니라.”(역대하 14장 2-5절)
9. 금송아지를 말한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들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출애굽기 32장 4절)
10. 불 뱀을 말한다.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쫓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항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아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 즉 살더라.”(민수기 21장 4-9절)
11. 사람 형상 동상의 뜻으로 조상우상을 말한다.
“미갈이 우상을 취하여 침상에 뉘고 염소 털로 엮은 것을 그 머리에 씌우고 의복으로 그것을 덮었더니.”(사무엘상 19장 13절)
“바벨론 왕이 갈랫 길 곧 두 길 머리에 서서 점을 치되 살들을 흔들어 우상에게 묻고 희생의 간을 살펴서.”(에스겔 21장 21절)
12. 벽, 방에 그린 그림 우상을 말한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들이 각각 그 우상의 방안 어두운 가운데서 행하는 것을 네가 보았느냐.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지 아니하시며 이 땅을 버리셨다 하느니라.”(에스겔 8장 12절)
아무 형상이든지 절하지 말며
형상을 금하고 있다.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 아래로 땅에 있는 것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에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절하지 말며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
형상에는 1. 자연적 형상=일월·성신·산천초목 2. 인공적 형상=조각한 형상, 부어 만든 형상, 그림으로 그린 형상이 있다.
“여호와께서 호렙산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되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상이라든지 땅 위에 있는 아무 짐승의 형상이라든지 하늘에 나는 아무 새의 형상이라든지 땅 위에 기는 아무 곤충의 형상이라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아무 어족의 형상이라든지 만들가 하노라. 또 두렵건데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일월성신, 하늘 위의 군중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분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여 섬길가 하노라.”(신명기 4장 15-19절)여기 분명히 금하고 있는 것은 우상과 형상이다. 이를 어떻게 금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1.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라 했다. 여기 만든다는 것은 ‘예배행위’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다만 조각, 미술, 예술적 가치로서는 몰라도 ‘경배목적’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최덕지 목사 [27]
2.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 이는 그 뜻이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땅에’ 대는 행동이다. 옛날 느부갓네살은 금 우상을 세워 놓고 전 국민으로 하여금 엎드려 절하게 했다.(단 3장 7절) 보이지 않는 신령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절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다.
3. 섬기지 말라. 이는 ‘노동과 봉사’ 등의 종교적 행동을 말한다. ‘섬긴다’는 히브리말의 뜻은 외모로 경의를 표하는 것, 향을 피우는 것, 물건을 봉헌하는 것, 순복하는 것 등 종교적 경배, 제사, 또는 입을 맞추는 행위를 말한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우상을 만들거나 절하거나 섬기지 말라 하셨을까. 그 금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은 질투하시기 때문이다.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까닭에 질투가 있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이니라.”(출 34장 14절) 이 질투는 죄인에게 원수를 갚는 진노를 말한다.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여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스가랴 1장 14절) 이는 자기 백성을 눈동자 같이, 신부 같이 사랑하는 까닭이다.
둘째 우상 섬기면 망하기 때문이다. “나를 위하여 자기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장 5절) 우상 숭배자에게는 반드시 벌이 내린다. 고대, 애굽, 바벨론, 앗수르, 메데파사, 그리스, 로마 등 우상섬긴 나라들이 다 망하였다.
벌은 삼사대로, 은혜는 수천대로
셋째로는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해서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수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장 6절) 우상 숭배자에게는 벌을 내려도 하나님 섬기는 자는 복을 주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진노를 능가한다. 벌은 삼사대까지이나 은혜느니 수천대까지이다.
최 목사는 이 말씀의 원칙에서 우리나라를 돌아볼 때 너무나 많은 우상을 숭배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일월성신을 섬기는 일, 산제불공 하는 일, 용왕 먹이는 일, 조상에게 제사하는 일, 사주관상 보는 일, 무당 데려다 굿하는 일, 점치는 일, 토정비결 보는 일, 택일하는 일 등 우리 일상생활 속에 미신과 우상이 얼마나 많은가.
이 나라 도시나 농촌을 막론하고 망국민의 우상숭배가 너무 심하다. 그는 이 국가가 번영하고 이 민족이 복을 받기 위해서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고 복을 받게 하기 위하여 실제 우상 타파를 행동으로 실천한 것이다.
그 구체적 생활은 길을 가다 어느 집 문전에 ‘건구 친 것’을 보면 가는 길을 멈추고 그 집 문전에 가 기도하고 그 집 주인을 불러 전도하고 반드시 건구를 손수 뜯어 그것을 꼭 변소에 던졌다.(지금은 새 개량주택이 되어 옛날처럼 큰 변소가 없다)
깨닫는 사람은 고맙게 생각하나 대부분 자기들이 공포에 사로잡혀 최 목사를 때리거나 시비가 벌어지기 일쑤였다.
또는 길가에 사주책을 내어 놓고 보는 자가 있으면 그 곳에가 “왜 이런 것을 봅니까” 말을 걸어 “인간의 생사존망 길흉화복은 만유의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이런 것 보면 나라도 망하고 당신도 복 받지 못합니다”하고서 모조리 빼앗아 변소에다 던져 버린다. 이런 파괴로 인해 매를 맞음도 한이 없고 거리의 많은 군중 앞에서 조롱거리가 되는 능욕도 말할 수 없이 많았다.
또는 동네에서 마당 경 읽는 소리, 징 소리 나면 교인을 대동하고 반드시 습격하여 설명하고 북을 빼앗고 징을 빼앗아 파괴하고 우상 차린 상을 뒤엎고 못하게 하였다. 우상 섬기는 자에게 붙들려 옷을 찢기우고 머리채를 잡히며 매를 맞으며 온갖 수치를 감수해 가면서도 우상 타파를 행하심은 조국을 위하는 열성과 복 받게 하려는 일념으로 이 우상 섬기다가 망함을 일깨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최 목사에게 이렇게 물어 본 적이 있다. “건구하나 몸소 타파하지 않으시면 안 됩니까”고. 그 때 한 말이 “나도 육을 가진 인간인데 불편하고 수치 안 당하면 얼마나 좋겠소. 그러나 적은 것(건구 하나) 안 하면 더 큰 일이 내게 오고 또 안 하면 양심에 가책이 되므로 이것인 나의 받은 사명입니다”라고. 그런고로 최 목사가 가는 곳에는 반드시 우상 숭배자들과 싸움이 있음을 본다. 그 싸움의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다. 적은 것은 현장에서 해결되기도 하거니와 사주책을 찢거나 혹은 무당 경 읽는 것을 파괴한 것은 기물파괴라고 그 값을 변상하라고 집까지 찾아와 소동을 벌이는 일들도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최 목사는 사랑과 인내로 그들을 설득시키거나 악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때 따라 징계하셔서 해결해 주었다. 최 목사가 악한 자로 인해 곤욕을 당할 때 하나님이 징계하여 도와주신 일화 한두 가지를 여기 기록한다.
그가 당한 곤욕 하나님이 아시고
1949년 5월경이다. 마산교회가 교방동에 있을 때다. 마산교회 가는 길목에 아기를 난 한 가정이 건구를 쳐 두었다. 마산교회에 잠시 다니러 왔던 최덕지 목사는 이것을 보고 뜯어 교회 변소에 던졌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교회 주변 동민이 일어났다. 아기 할머니 되는 이가 최 목사의 머리를 마구 뜯었다. 그리고 교회 앞에 있던 동민 한 사람이 변소에 던져진 건구를 거두어 그것을 교회 제단 앞 전기줄에 갖다 걸고서 최 목사에게 욕설을 퍼붓고 행패를 부렸다. 참으로 마산교회나 최 목사가 당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아, 누가 알았겠는가. 머리를 뜯었던 아기 할머니는 그날 밤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건구를 교회에 가져다 걸었던 남자도 수일 후에 죽었다.
이로서 동민은 잠잠했다.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그 후 회개하지 않고 최 목사에게 발악한 그 집의 아기 아빠도 죽고 다 망하였다고 한다.
부산에서 당하신 일
부산시 초량동에서 구역 예배 가다가 경 읽는 것을 보고 말렸다. 그 집 할머니가 구역 예배 드릴 집까지 따라와 목사님 치마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죽어도 놓아주지 아니하겠노라고 하였다.
밤이 되어 자기 집에 돌아갔으나 최 목사의 치마를 잡고 늘어졌던 손가락이 부어서 이틀 후 죽었다고 한다. 의인에게 욕을 하는 자는 모두 해를 받는 것을 보고 동네가 잠잠하였다.
참된 애국심
애국심의 근원
최덕지 목사의 애국심은 실로 강한 것이었다. 선지자적 애국심이었다. ‘하나님의 공의에 의한 민족의 구원’이 애국심의 중심 사상이었다. 최 목사의 국가관은 시편 127편 1절에 나타난 대로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한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축복하여야 그 나라가 형통한다고 증거했다.
“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잠언 14장 34절)함과 같이 그 나라의 흥망성쇠가 정치가의 수완, 외교가의 활동, 군대의 강함에 있는 것보다 그 국민의 신앙과 도덕적 능력과 정신에 있다고 했다.그 국민 도덕이 고상하고 신앙과 진리를 사랑하며 성별된 백성 공의가 실천되는 진실한 나라가 될 때 그 나라가 번영하고 부강하고 행복하리라고 믿었다. 그의 애국심은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성경적 예수님의 애국심을 본받음이고, 둘째 외국의 구제품을 거절함이요, 셋째 국가 안 보는 기도로서 지켜진다는 신념이다.
최덕지 목사 [28]
성경적 애국심
“예수께서 제자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태 10장 5-6절)
여기 예수님께서도 세계 인류 구원에 앞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한 애국심을 볼 수 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태 23장 37절)
이는 그 나라를 구원하려는 애국심의 간절한 발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모세의 기도를 보면,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쭈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우상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애굽기 32장 31-32절)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를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아론으로 더불어 금송아지를 만들어 범죄한 자기 동족을 향한 애국심에서 자기 자신 하나님께 버림당할지라도 그들의 사죄를 위한 애절한 기도이다. 그 누가 모세의 이 기도에 접할 때 그의 그 위대한 애국심을 의심할 수 있으리오.
하나님의 사람은 바로 애국자이니 신학에서도 바울의 심정이 또한 그러하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 하노라.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로마 9장 1-3절)
이는 바울이 유대인을 향한 애국심을 보인 것이다. 유대인은 선민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들의 구원을 위한 바울의 태도는 노여움에서가 아니라 슬픔에서 시작한다. 분노와 저주와 추방이 아니라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애절한 슬픔이다.
그는 자기 동족을 그리스도만 믿게 할 수 있다면 자기의 생명을 기꺼이 내어 던질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죄는 미워해도 죄인을 사랑하는 입장이다. 여기서 모세의 기도와 마찬가지임을 보게 된다. 바울은 그의 생애에 있어 아무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자기 동족을 구원하는 어떤 도움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추방되는 일이 있을지라도 감수하려는 심정이다. 여기 바울은 죄인을 구원코자 하면 죄인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다.
최 목사의 애국심은 이와 같이 예수님에게서, 모세에게서, 바울에게서 배운 그대로 ‘이 백성의 죄를 회개케 하여 성별된 백성, 심령과 생활이 재건된 정의의 나라를 이룩’하고자 함이 그의 애국정신이다.
유다 나라에는 거짓 애국자가 있었고 참애국자가 있었다. 이 거짓 애국자는 또한 거짓 선지자(예언자)들이고 참애국자는 또한 참선지자들이다.
이 진위의 분별은 일반 백성이 분별하기 힘든 일이다. 거짓 선지자(거짓 애국자) 이는 참선지자 즉 하나님의 사람의 눈으로 보아서만 알 수 있다.
이 거짓 선지자들은 당시 애국자들이다. 나라의 이익을 주장하고 국위의 선양을 부르짖고 국가의 부강을 도모하려 함을 겉으로 내세운다. 그래서 권력자에 아부하고 정치가와 결탁하고 세력을 잡고 백성의 칭송을 받고자 한다. 이런 자는 종교와 신앙도 국가의 이익과 번영을 위해 이용하고자 한다. 이런 고로 그들은 정의나 공도에 있어 여호와 하나님보다 일시적 이익이 앞섰다.
거짓 선지자와 참선지자
여기 반해 참선지도 물론 나라를 사랑한다. 그러나 나라보다 여호와 하나님을 앞세웠다. 국왕이나 정부 용인이나 정치가나 나라에 잘못이 있을 때 그 죄를 책망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자기 이익이나 명망이 안중에 없고 오직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영광을 늘 먼저 높이기에 열심을 다한다.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미가 3장 8절)
이와 같이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는 용기 있는 결단은 거짓 선지자는 못하는 것이다. 백성의 반대가 무서웠거나 나라를 사랑하는 인정이 그러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참선지자는 하나님의 능력과 공의가 이 인정을 초월해 대담하게 그 죄와 허물을 책하고 드러낼 수 있었다. 구약성경에는 참선지자 대 거짓선지자의 예를 많이 보여주고 있다.
열왕기상 22장에는 참선지자 미가야와 거짓 선지자 시드기야를 볼 수 있고 에레미야 28장에는 참선지자 에레미야 대 거짓 선지자 하나냐가 나타나고 아모스 7장에는 아모스 대 아마샤를 읽을 수 있다. 그 대조되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참선지자 미가야가 원하는 바는 다른 나라를 공략함이 아니라 자기 나라의 개혁에 있었다. 라못의 왕을 정복함이 아니라 이스라엘 왕의 회개를 외쳤다. 거짓 선지자는 나라의 팽창을 원했지만 참선지자는 백성의 개심을 원했다.
거짓 선지자는 국위를 밖으로 떨치기를 원했으나 참선지자는 안으로 거룩되기를 바랐다. 거짓과 참은 여기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국위냐, 진실이냐, 부냐, 깨끗함이냐는 그 원함에 따라 진위가 나타난다.
나라의 부강에 안목을 두는 자보다 나라의 신성에 뜻을 두는 자, 그가 참선지자다.
같은 일을 아모스 대 아마샤의 입장에서도 볼 수 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과를 경계하여 너희가 회개치 않으면 그 벌로서 ‘이삭의 잔당들이 황폐되며 이스라엘의 성소들이 훼파될 것이다. 내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 하시니라’.(아모스 7장 9절)
여기에 대해 아마샤는 여로보암 왕에게 불경된 말로 고하기를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아모스 7장 10절)라고 했다. 아모스를 배반자요, 국적이라고 모함했다.
이와 같이 거짓 선지자(거짓 애국자)의 눈에 비친 아모스는 백성을 문란하게 하고 왕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모독하는 것으로 보였다. 참선지자(참애국자) 아모스의 눈으로 볼 때 아마샤야 말로 역신국적이요, 하나님의 뜻과 그 의를 따르지 아니한 자다. 이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왕을 두려워했다. 그 당시 거짓 선지자(거짓 애국자)는 무력을 상찬하고 그러한 방법으로 나라를 유지하고자 한 자들이다.
고 최덕지 목사는 당시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본처를 버린 죄악을 책망했고 성일을 범하게 한 것, 국기배례 강요 등 모든 죄악을 직언으로 책망하였다. 그의 우상 파괴나 기도나 전도나 이 모든 것이 민족의 죄악을 회개시키고 구원코자 한 애국심의 발로였다.
최덕지 목사 [29]
더욱이 무력이나 미국에 의지하여 나라를 세우고자 함에 만유의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으로 나라를 세워야 함을 주장하였다.
애국심에는 넓은 애국심과 좁은 애국심이 있다. 자국의 이익만을 위하고 타국을 희생케 하려는 것은 다 편협한 애국심이다.
자기 나라도 사랑하고 타국민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이 넓은 애국심이다. 또한 애국심은 깊고 높은 애국심과 낮은 애국심이 있다.
병기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국민의 외부적인 부와 번영만 바라는 애국심은 얕은 애국심이다. 그 보다 그 국민의 정의와 진실과 내부적 성화는 깊고 높은 애국심이다.
또 강한 애국심과 약한 애국심이 있다. 군대나 병기만을 의지하는 애국심은 약한 애국심이요, 만군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과 용기는 강한 애국심이다. 누가 최 목사의 애국심을 따를 수 있으리오.
그가 순국령에 묵도하지 않은 것으로, 국기배례하지 아니했다고 비국민이요, 사이비 종교라고 하는가. 이런 것으로 애국심을 판가름 하는 것은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의 얕은 애국심이요, 우주의 주재 복의 근원 힘의 원천인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죄에서 멀리하여 공의와 진리를 사랑하고 신앙의 국민, 거룩한 국민이 된다면 이 국가는 만세반석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 영원토록 번영과 형통을 누릴 것이다.
최 목사는 이렇게 믿었기 때문에 이렇게 살았고 이렇게 가르쳤다. 재건교회 성도들은 이 애국심을 이어받아 이 나라가 하나님에 의해 구원되고 보존되고 번영되기 위해 계속 기도해야 할 것이다.
외국 구제품을 거절하고
최 목사는 외국의 선교비나 구제품을 일체 거절하였는데 이는 그의 애국심의 발로라고 하겠다. 한국교회에 있어서 해방된 후 외국 달러의 도움 없이 운영한 교회가 있는가. 세워진 신학교가 있는가. 모든 학교기관이나 병원이 외국의 원조 없이 세워지거나 운영되어 졌는가.
그리고 자선사업, 고아원이나 양로원, 모자원, 이 모든 것이 외국이 원조하는 금품에 의해서 운영되어지지 않았는가. 그러면서 선교사의 신앙과 인격을 존경하기 보다는 물질에 더 욕심을 부리지 않았는가. 물질에 의한 불미한 사건들이 그 얼마나 많이 전해지고 있는가.
그러므로 최 목사는 외국 선교사들을 존경하나 그 구제나 원조는 받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우리는 과거 그들에게서 ‘복음’이라는 최대 최고의 것을 받았다. 그들은 우리에게 복음의 은인이다. 복음의 부채도 큰 것인데 물질적 부채까지 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신앙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 나라의 재건은 외국의 군사나 경제적 원조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치적 독립은 경제적 독립이 선행하여야 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 경제의 자립에는 민족의 자주정신이 요구되며 따라서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 동안 많은 선교 단체에서 원조코자 했으나 거절했으며 이 정신에서 자라온 재건교회는 전국 어느 교회에서도 6·25동란 후 그 많은 구제품도 다 거절하고 신앙의 독립심과 우리의 자주 정신을 나타내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을지라도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행 3장 6절)한 대로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일으켜 발과 발목이 힘을 얻어 뛰어서서 걸으며 성전에 들어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여 하나님을 찬미한 것처럼, 이 민족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 것을 모르는 앉은뱅이처럼 구걸하는 가련한 내 동포가 외국의 구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재건되어 자주·자립·자행하는 축복을 받기 원하는 것이다.
진리의 토대 위에 서서 이 강산을 믿음으로 개발하고 한 손에 진리 싣고 한 손에 구제품 실어 세계를 향하여 복음의 빚을 갚고 물질의 빚도 다 갚는 축복받은 백성이 되자는 것이 해방 이후 지금까지 외국의 구제를 거절한 정신이요, 애국심이다.
국가 안보는 기도에 의해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신념이 그의 애국심이다. 최 목사는 국가의 위기나 환란에 대한 구원은 기도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믿었다. 그리하여 매일 일일 4차 때를 정해 나라를 위해 기도하였다.
칼빈이 “인간성은 부패하였으므로 규칙, 제제가 없이는 도무지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함과 같다. 따라서 옛 성도들도 때를 정해 놓고 기도한 줄 안다. 기도로 나라 구한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사무엘의 기도와 승리(삼상 7장 7-12절)이다. 사무엘이 빼앗겼던 법궤를 찾아 미스바에 모여 지난 날의 우상 섬긴 죄를 자복하고 기도하는 등 불레셋이 치러왔으나 사무엘이 전심으로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우뢰’를 발하여 이 불레셋을 진멸하였다. 그리하여 사무엘은 ‘에벤에셀’ 즉 도우심의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었다.
둘째는 여호사밧의 기도와 승리(역대하 20장 1-4, 18-23절)이다. 여호사밧왕 때 모압, 암몬, 세일 삼대 연합군이 치러왔으나 여호사밧은 믿음으로 찬송하며 진군하니 여호와께서 암몬과 모압이 세일을 치고 세일이 멸한 후 암몬과 모압이 피차 쳐 살육당하게 하였다.
셋째 히스기야왕의 기도와 대승리(열왕기하 19장 1-19, 35-37절)이다. 앗수르 왕의 참모장 랍사게가 와서 하나님을 모독하고 항복을 청할 때 히스기야 왕은 이사야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이사야가 전해 주는 말을 믿고 자신이 성전에서 기도하였더니 하룻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 진에서 치시니 십팔만 오천이 다 송장으로 변하였다.
이렇게 기도의 위력은 크시다. 최 목사는 국가 안보를 미국의 군대가 지켜 준다고 안심할 것이 아니라, 우리 국군이 현대병기로 지켜준다고 해서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물론 이 모든 것이 세력균형상 필요하다), 우리가 여호와의 거룩하신 이름을 위하여, 그 영광을 위하여 기도하면 위기에서 구원하심을 분명히 보아 왔다.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은 전심으로 자기를 의지하는 자를 구하고 찾는 자를 도와주신다.
6·25당시 많은 유엔군이 죽었다. 우리나라는 생명에까지 빚을 지게 되었으니 언제든지 복음의 빚, 생명의 빚을 한 손에 구제품 들고 한 손에 복음 들어 세계만방에 전함으로써 보답해야 한다고 최 목사는 거듭 강조하였다.
그의 인격과 생활
하나님의 사람, 그의 참 모습
앞의 부문에서 그의 신앙 사상을 중심으로 설명했으나 여기 다시 최 목사와 함께 생활하며(1951년 9월부터 1년 동안 최덕지 목사의 댁에서 숙식을 함께 하면서 지켜 본 것임) 가까이서 보고 느끼고 깨달은 바를 밝혀 보고자 한다.
역사상 많은 위인이라든가 또 우리가 일시적으로 만나든가 혹 강단에서 설교나 외부에서 존경되는 인물이라도 함께 접하여 생활해 보면 흠이 나타나고 평소에 존경하는 마음이 사라지는 일이 많다.
그러나 최 목사는 가까이 모실수록 과연 그 분이 어떠한 인물이신가를 알 수 있으며 존경과 경모하는 마음이 우러나게 된다.
위대한 인격은 평범한 사람이 그대로 다 평가할 수 없고 표시할 수 도 없는 줄 안다.
일찍이 서울교회 청년회 회지 ‘엠마오’ 제6호에(1975년 10월 광복 30주년 기념특집) 최 목사에 관한 기사를 부탁받고 집필한 ‘내가 본 최덕지 목사님’이란 주제를 중심해서 간추려 적고자 한다. 그는 한말로 표현해서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의 인격에 있어서나 그의 신앙에 있어 그러하다. 한국교회가 송두리째 일본 제국주의 신사당에 굴복할 때 무수한 환난과 고초 속에 신앙과 진리를 파수하고 승리한 하나님의 종이다.
최덕지 목사 [30]
그가 재건운동을 시작하고 그렇게 철저하게 죄를 책망하고 진리로 인도할 때 ‘하나님의 참사람’, ‘하나님의 사자’의 참 모습을 발견했다. 이제 그가 과연 하나님의 사람임을 살펴보고자 한다.
의인 최덕지 목사
성경에는 의인이 없다고 하였다.(로마 3장 10절) 그러나 신자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다.(로마 4장 25절) 이와 같은 이신득의의 교리적인 의인이 아니라 그의 인격과 생활로 보아서 의인이라는 것이다.
그 사람의 인격이나 교양이나 덕망을 추정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말인 줄 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나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다(야고보 3장 2절)” 한대로 최 목사는 말에 실수가 없었다.
그와 함께 기식하면서 또한 수년 동안 함께 일하면서(재건 부산교회 목사로 있을 때 나는 전도사로 함께 일함) 한 번도 남의 허물이나 악평함을 들을 수가 없었다. 어떤 성도의 평이나 허물된 말이 들리면 그 말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직접 본인을 만나 알아보고 벌 내릴 자 벌하고 책망할 자 책망하고 충고할 자 충고할 따름이었으며 자기를 악평한다고, 비난한다고 혹은 잘 따르지 않는다고 또는 허물이 있다고 남의 면전에서 상대방을 절대로 허물하거나 명예를 훼손시키는 일이 없었다.
나는 재건 초창기 여러 지도자들과 함께 일할 때 대부분이 동지를 악평하기 예사고 파벌의식이 있었고 사람의 좋고 나쁨을 가려놓고 자기파 세력,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두둔하고자 체면도 인격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말에 절제를 가지지 못함을 목도했다. 그래서 남의 명예를 깎고 성도의 교제를 흐리게 하고 전도의 문을 막는 불순을 겪어 왔다. 이러한 속에서 고 최덕지 목사 같이 위대하신 인격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최 목사의 생활 중에는 어떤 일을 당할 때(예 성경학교, 신학교, 전도집회 등) 거기 적임자를 바르게 찾아내어 일하도록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이 일할 때 믿음으로 하지 않거나 무슨 잘못이 있거나 앞서의 실수를 최 목사에게 자복하지 않았거나, 하여간 허물됨이 보이면 절교했다. 한 번은 성경학교를 열고 있을 때 최 목사가 다른 분과 절교했다. 그 사이에서 딱하게 여긴 나는 “왜 절교합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고 물었다. 그때 나는 최덕지 목사가 절교하는 상대방과 더 친하고 최 목사를 못마땅히 생각했다. 그럴 때 대부분의 지도자는 상대방과 절교하는 이유와 함께 그 사람의 허물을 말한다.
그러나 최 목사는 절대 침묵을 지키고 그의 허물이나 잘못을 말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되물었더니 부득불 하는 말이 “일후 나 없으면 함께 일해 보시오”라고 했다. 그 후 최 목사가 떠나고 그 분들과 함께 일할 때 너무나 인간적이요, 인위적이요, 감정적인 인간성을 접하고 나서 과연 그는 의인이요, 그와 같은 인격의 소유자가 없음을 다시 한 번 증언하게 되었다.
믿음의 사람
그의 옥중 승리는 바로 신앙의 용사요, 투사였음을 증명한다. 그가 믿음의 사람인 사실 두 가지만 말하고자 한다. 그 하나는 모세가 믿은 대로 옥중에서 믿은 사실이다. 모세의 신앙 표현은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 내가 애굽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출애급 3장 20-21절)” 하였다.
‘빈손’으로 나가지 않게 함이 바로 모세의 신앙이다. 최 목사의 신앙도 이것이다. 옥중에서 몇 번이나 “하나님 거역하는 일본은 망한다”고 외치며 사생결단의 신념과 신앙으로 싸웠다. 믿음으로 잘 싸우면 반드시 우리 강토는 찾는다고 믿은 것이다.
모세에게 빈손으로 나가지 않게 하심 같이 나도 절대로 빈손으로 나가지 않고 이스라엘이 금은 패물을 찾아 그 자녀들이 꾸미고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는 것처럼 우리 한국도 진리로 승리하는 날, 이 옥문이 열리는 날 빼앗겼던 금수강산을 찾고, 우리의 농토를 찾고, 우리의 산업을 찾고, 우리의 문화재를 찾아 올 것을 믿은 것이다. 이 절대적 신앙이 그를 살리고 내 강토도 빛을 본 것이다.
또 하나는 부목교회에 집회와 심방을 마치고 마산교인 몇몇과 마산을 가는 길에 있었던 일이다. 지금은 교통이 편리해 시간마다 버스가 다니고 또 야간 버스도 있지만 그 때만 해도 버스가 흔하지 않았다. 석양이 되고 어두워왔다.
최 목사는 매우 피곤했다. 마산까지 걸어서 가기는 너무도 힘겨웠다. 철원 못 미쳐 길가에 앉아서 기도했다. “종이 피곤하오니 차를 보내 주옵소서.” 아마 이렇게 기도한 줄 안다. 기도했으니 차가 올 것이라고 하면서 앉아 있었다.
“그대로 믿고 구하면 이루리라”는 그대로의 믿음이었다. 믿음이 작은 나는 그래도 어두워지기 전 칠원이라도 가야 하겠기야 “예, 가면서 차가 오면 타면 되잖아요”하면서 가기를 재촉했다. 그러나 최 목사는 “아니, 기도했으면 올 것인데 가기는 왜 가”하면서 그대로 앉아 있었다. 나는 안타까웠다. 한 6, 7분 만에 차 한 대가 왔다. 빈 트럭이었다. 최 목사를 보고 타라했다. 물어 보았더니 남지에서 왔다고 한다. 운전기사 말이 대구 갈 차인데 남지 왔다가 우연히 마산 쪽으로 돌아가고 싶어 핸들을 돌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이 차를 보내심이구나.” 즉각 느꼈다. 이와 같이 최 목사의 믿음은 절대적이다. 또 기도하면 그대로 믿었고 그대로 받았다.
기도의 사람
최 목사 기도의 특징은 금식기도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기도는 영어에 있어 ACTS(행동)를 의미하고 그 한자, 한자를 대표한다. ACTS는 A-Adoration(찬양), C-Confession(고백), T-Thanksgiving(감사), S-Supplication(기원)을 대표하는 것이다.
즉 그의 기도는 이 전형적인 형식에다 금식하고 불철주야 기도한 분이다. 그는 옥중에서 21일 금식기도를 세 번이나 했으며 그 위력은 조국의 해방을 가져온 것이다. 보통 그의 기도는 교회 새벽예배 때 그 교회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어린아이 하나라고 빠짐없이 기도하였다. 오전에는 아침 금식을 평생 동안 하였고 밀실에 들어가서 오전 예배시까지 기도하였다.
눈물의 애국자 예레미야처럼
국가를 위한 그 간절한 기도는 눈물의 애국자 예레미야의 기도를 연상케 했다. 또한 성도나 교인이 범죄나 실수한 일이 있으면 자신이 금식하며 기도한다. 이는 일찍 모세가 범죄한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 앞에 중보의 기도함을 생각하게 한다.
그의 기도에는 능력이 많았다. 그는 옥중에서도, 재판장 심문 자리에서도, 오전 11시와 오후 3시 예배와 기도를 하여 꺾을 자가 없었다. 심문하던 검사도 굴하고 심판하던 재판관도 함께 기도해야 그 재판을 계속할 수 있었다.
재건교회 원로 교우들은 그가 마지막 운명하기까지의 그 간절했던 기도에 감동과 감명과 인상이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까지 매주 3일간, 혹은 일주일간 금식기도하였고 매월 초생 금식을 하였다. 실제 한 주일 2일 식사가 어려웠다. 그는 금식하고 기도하고 기도하다가 또 금식하였다.
이 금식기도로 인해 많은 비난이 있었다. 혹은 이단시하고 혹은 율법주의라 했다. 만일 최 목사에게 이 금식기도가 없었더라면 그 무시무시한 일본 관헌의 고문을 무엇으로 승리할 수 있었겠는가. 곧 이 금식기도가 아니었는가. 그러면 해방된 후에도 왜 금식을 그렇게 하시는가고 비난했다.
에스라가 바벨론 포로 중에서 고국에 돌아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을 생각하고 금식하고 울었다.
최덕지 목사 [끝]
에스더는 금식기도함으로 민족멸망을 구원했고, 니느웨 성은 멸망 받을 죄악을 금식기도하고 화를 면하였다.
이스라엘이 미스바의 금식기도로 대부흥을 이루었고 사무엘의 금식기도가 불네셋의 화를 면했다. 하나님의 사람이 회개하지 않은 백성을 보고 국가의 환난을 생각할 때 조국을 위하는 심정이 내 육신의 안일만 생각하고 금식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최 목사는 3가지 의미에서 금식하도록 권면했다. 첫째는 죄를 깨닫고 자복하기 위하여 이고, 둘째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이며, 셋째는 일을 하기 위함이었다. 한국교회의 범죄가 그로 하여금 금식기도를 하게 하였고 조국의 통일과 민족의 장래를 위해 금식기도를 계속한 것이며 우리의 죄악 때문에 그가 하나님 나라에 갈 때까지 금식 기도를 한 것이다.
길을 가고 차 탈 때도 전도하며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 28장 19-20절)” 하였다. 이는 전도하라는 유훈이다. 이 말대로 꼭 실천하고 쉬지 않고 전도했다. 그의 전도 방법은 주로 개인 전도이다.
첫째 구술 개인 전도를 하였다. 가정에서 예배당에 갈 때나 예배드리고 집으로 돌아올 때 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전도한다.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 예수 믿고 복 받으십시오” 하는 말씀을 꼭 전한다.
만나는 사람마다 모여 있는 무리마다 다 찾아서 전도했다. 혹 욕하는 사람은 참았고 반대·반발하는 젊은이가 있으면 붙들고 깨닫도록 설득했다. 그에게는 설득력이 강하였고 굴복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먼 길을 갈 때는 모든 교통 기관을 이용하여 전도했다. 버스 안에서도, 배 안에서도, 열차 안에서도 예수를 알렸다.
먼저 예배를 잠간 드리게 되는데 그 순서는 대개 이렇게 시작된다.
“경모하는 동포 여러분, 지금 나라를 위하여 예배드리겠습니다. 담배를 피우시는 분은 담배 불을 꺼 주시고 모자를 쓰신 분은 모자를 벗으시고 함께 예배드립시다. 여러분의 자유를 막으려 함이 아니라 우리 함께 나라의 번영과 축복을 위해 참여를 바랍니다.”
이렇게 전제한 다음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고 찬송을 부르고 성경요절 한 구절 암송한 후 전도설교를 하고 주기도로서 예배를 끝낸 후 “대단히 감사합니다”하고 열차일 경우 매 호차마다 다 전도를 마친 후에야 자리에 앉는다. 먼 곳까지는 잠깐 앉아 기도할 시간이 있지만 가까운 곳에는 전도를 마치고 내리기가 바쁘다. 배 안에서도 배 칸칸을 돌며 복음을 전하였다.
이 전도 때 이상한 것은 현실교회 성직자나 또는 신앙사상이 다른 자가 있으면 꼭 훼방을 했다. 그러나 대부분 다 최 목사에게 정복당하였고 일반은 그 열렬한 전도에 감동받았다. 부산교회에서 인도할 때는 매주일 밤 예배 마친 후와 수요예배 마친 후 노방전도를 계속했다. 대개 초량시장과 역전(지금은 그 역이 없어졌음) 고관 입구에서 주로 전도를 했다.
모든 교인이 함께 찬송 부르고 전도 강연도 한다. 최 목사도 하고 다른 이도(주로 내가 하였음) 하였다. 이때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손을 들어 결신자가 나온다. 이 전도는 비가와도, 눈이 와도 계속되었다. 전도의 대상은 남녀노유, 유무식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다 전도하였다.
그 다음은 전도지 전도이다. 최 목사의 전용 성구를 기입한 전도지를 사용하였다. 보통 때도 사용하고 주로 동네를 다니며 축호 전도를 하였다. 또는 구정 때 전도대원(교인들)을 모집해 3일간 금식하고 민족의 우상 섬김을 회개하는 금식기도를 한 후에 정월 초하루에는 부산시내 가가 호호 구역을 정하여 전도했다.
먼저 그 집 문 앞에 가 기도하고 집에 들어가 “새해 복 받으십시다”하고서 전해 주었다. 날씨가 추워 손이 얼었고 어떤 해는 눈보라가 칠 때도 있었다. 이는 매년 계속되었다.
그 다음은 벽보전도를 하였다. 이는 구정 때 성구를 써서 부산시내 일원에 부치는 전도다. 그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우상 섬기면 망합니다.(신 7장 26절) 하나님 섬기고 복 받으십시다. 구원의 길(행 16장 31절) 흥국의 길(잠언 14장 34절) 복 받는 길(요 3장 16절) 사는 길(요 14장 6절) 산 부모를 공경합시다(엡 6장 2절) 이 민족이 사는 길(이사야 1장 19-20절) 대개 이런 제목과 성구를 써 붙인 것이다. 또 성경학교 학생들을 동원해서 사주책이나 그 외 우상들을 파괴하는 데 젼력을 다했다.
우상을 파괴하고 매를 맞고
최 목사가 우상을 파괴하고 또 그 어려움 속에서도 전도함은 첫째, 겨레를 사랑함에서요, 또 하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에서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미신이나 우상을 섬기면 나라가 망하고 복을 받을 수 없다는 성서관과 역사관이 투철하여 열심히 전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전도하지 않으면 “나라 멸망의 유기죄이며 겨레 멸망의 방관죄”라고 하였다. 때로는 우상을 파괴하고 전도할 때 많은 곤욕을 당하였지만 이로써 무지몽매한 이 민족에게 깨우침을 주었고 죽을 영혼, 망할 영혼이 주께 돌아와 구원받게도 한 것이다.
이 전도와 기도는 자유당 때 이 겨레를 망하게 하는 ‘우상 철퇴 명령’이 내렸으나 지금은 오히려 더 팽창하니 이 나라 모든 것이 정화되나 이 사신우상만은 아직 정화되지 않으니 더욱 한스러움을 금할 길이 없다.
주의 뜻만을 순종하다
시편 40편 8절에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고 했다.
이는 곧 주의 사자 최 목사가 즐겨 외우던 성구요, 또한 그 분의 기도였다. 그는 무슨 일을 당할 때 먼저 기도로 ‘주의 뜻’을 물었다. 또는 일을 할 때 ‘주의 뜻대로’하기를 기도했다. 그리하여 최 목사에게는 주의 뜻을 찾는 방법으로써 3가지 원칙이 있었다. 성경, 기도, 천기가 그것이다.
그는 매일 기도하며 주의 뜻대로 살기를 원했다. 성경말씀에 주의 뜻이 어떻게 명하시는가를 상고하였다. 그리고 어디를 가야 할 때 구름 낀 날은 되도록 출입하지 않았다. 최 목사가 출옥성도로서 명예를 탐내 목사직을 받았으므로 출옥 승리자로서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실은 당시 지방회장 강 목사가 사도행전 10장에 고넬뇨 가정에 전도 간 베드로의 사실을 들어 “하나님이 깨끗게 하심을 네가 속되다 하느냐(행 10장 15절, 11장 9절)”라는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승리한 종에게 성령으로 역사하심이라는 권면과 주장에 오로지 과연 주님의 뜻이 어디인지 그 뜻에 복종하겠다는 일념에서 목사안수 받음을 거듭거듭 사양하다가 종국에 허락한 것이다.
주의 사자가 오로지 주의 영광과 주님의 뜻만을 받들고 순종하던 생활은 그 누구나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사랑의 방면이나 인물의 기용이나 적재적소에 그 일을 맡기는 관용이나 모든 사람을 뛰어넘는 지혜 등은 여기에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나는 최 목사에게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받았다. 이로써 그의 신앙생활의 참모습을 아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1. 하나님의 뜻을 찾아라. 그 뜻 알았으면 환경이나 사람의 방해를 받지 말라. 그 뜻 이루어 드려라.
2.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또한 믿음으로 행하여라.
3. 어려움을 당할 때 주를 사랑하고 순교할 마음 있으면 억울하고 분한 함해나 방해를 참고 견디는 그것이 순교이다. (2006. 9. 25. 크리스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