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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기
의과대학 시절부터 전공의 시절까지의 이야기입니다.
마음은 부자
대학교 1학년과 2학년은 의예과였으므로, 산격동에 있는 경뷱대학교 본교 캠퍼스에 다녔는데, 경산에서 버스를 한 번을 타면 1시간, 두 번 갈아타면 50분이 걸리는 거리였어요. 경주에서 버스타고 오는 친구보다 제가 더 시간이 걸렸지요. 이건 그나마 집이 경산역 근처에 있던 때 얘기입니다. 대학교 2학년 때 상방동으로 이사를 했는데, 상방동에서 버스 정류장 까지도 자전거를 타야할 정도로 멀어서, 가족마다 하나씩 자전거가 있어야 했어요. 버스정류소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새 자전거는 영락없이 누가 훔쳐가요. 자전거도 많이 잃었죠. 그래서 그 후부터는 자전거를 살 때는 중고 자전거만 삽니다. 겨울에 밤늦게 집에 돌아오기 위해 자전거를 빨리 달리면, 코 밑에 고드름이 달렸어요. 그 때는 건강해서 마스크를 안 했던 것 같아요.
상방동에서는 아버지께서 창고를 빌려서 방과 거실을 만들고, 길 쪽에는 가게를 만드셨는데, 손수 건축자재를 구해서 거의 혼자 만드셨어요. 그리고 “흥부네 가게”라는 슈퍼마켓을 하셨는데 콩나물이랑 두부도 파는 구멍가게였어요. 장사라는게 공휴일과 명절에도 문을 열어야 해서, 저는 이 가게를 지키느라 여가생활을 즐길 여유가 없었어요. 경제적 여유는 물론 시간적 여유도 없어서, 패션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했어요. 돈이 없어 청바지를 입는다고 했는데, 저는 청바지를 사 달라고 하지도 못하고, 아버지가 입던 거나, 멋쟁이였던 외삼촌이 입다가 싫증나서 안 입던 옷들을 얻어서 입었죠. 친구들이 많이 하던 당구도 비용이 부담이 되어서 못했어요. 간혹 친구들의 권유로 미팅도 했는데, 커피값이 없어서 꾀를 냈어요. 다방 문 앞에 미리가서 기다리다가, 상대방 여성이 오면, 안으로 들어가지 맑고 신선한 공기와 햇살을 쬐자고 하면서 캠퍼스 벤치로 안내하는 거였어요. 그래서인지 연애를 하지도 못했어요. 1학년때 과대표를 했었는데, 친구들에게 뭘 사 줄 수가 없으니, 어울리기가 힘들었지요. 학비만 집에서 겨우 도움 받았어요. 그때는 전두환 대통령 시절이라 과외수업 금지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도 못 하던 시절이었어요. 그런데도 동아리를 여러 군데 가입해서 돌아다녔는데, 회비를 안 내고 버틴 적이 많았어요. 그래도 언젠가는 즐거운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하면서 즐겁게 살았어요. 풍족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부자였어요.
향어 양식을 시작하다
어느날 아버지께서 향어 양식을 하겠다고 준비하시더니. 영남대학교 옆의 남매지 못에서 가두리 양식장을 시작하셨어요. 남매지 못은 마치 바다처럼 넗은 호수입니다. 제가 의과대학 본과 1학년때 쯤이었으니 1986년경인가 봐요. 아버지는 혼자서 가두리 양식장을 만드셨는데, 드럼통들을 두 개의 쇠파이프와 철사로 연결해서 사각형으로 만들어서, 물에 뜨게 하고, 사각형 안에 그물을 늘어뜨렸어요. 그런 가두리들을 대 여섯 개 만들어 연결하고, 하나는 그 위에 지붕을 씌워 사람이 거주할 숙소를 만들고, 작은 사각형은 육지로 갈 배로 만드셨어요. 가두리 양식장의 사방에 굵은 밧줄을 연결하여 육지의 전봇대나 수문기동에 묶어서 가두리를 연못 중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했어요. 여기에서도, 부모님과 일꾼과 번갈아 제가 이곳을 지켜야 했어요. 방학 때 친구들과 놀러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고, 제가 속한 두 개의 동아리 활동만 겨우 할 수 있었어요. 향어들에게 밥을 주는 일, 향어들을 옮기고 가두리 그물을 수리하는 일, 향어를 소독제로 목욕시키는 일, 사료를 육지에서 나르는 일 등, 저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 아주 많았어요. 특히 여름에는 한 시간 마다 향어에게 사료를 줘야했는데, 여름엔 그 놈들이 무지막지 하게 많이 먹기 때문입니다. 이때 살을 찌워야 무게가 많이 나가서 돈을 벌죠. 이 사업으로 아버지께서는 돈을 좀 버셨는지, ‘스텔라’라는 이름의 승용자도 한 대 샀어요.
태풍에서 살아남기 (구어체로 바꾸어야 )
가두리 양식장에서 태풍을 만나서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일은 잊을 수가 없다. 그 해 여름도 태풍예보가 있었다. 태풍이 오기 1주일 전부터 아버지와 가두리 양식장의 그물의 구석구석을 나사와 철사로 더 조이고, 로프를 덧대어 묶었다. 호수의 가장자리의 전봇대와 수문 의 기둥에 긴 로프를 묶어서 가두리가 바람에 밀려가지 않도록 했다. 쇳덩어리 닻을 하나 더 내려서 떠내려가지 않도록 했다. 사료 자루들은 비에 젖지 않게 비닐로 덮고 밧줄로 동여매었다. 드디어 태풍이 왔다. 대낮인데도 검은 먹구름이 하늘을 덮어서 어두워지더니, 바람이 세지고 빗줄기가 거세지면서 급기야 빗줄기가 수평으로 날아들어 얼굴을 때렸다. 분명 빗줄기가 얼굴에 부딪히는데도 마치 나무작대들이 얼굴에 부딪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안경에 빗물이 흘러내려 시야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물을 묶어놓은 쇠파이프들이 파도에 따라 아래위로 요동쳐서, 발이 파이프 사이에 끼이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했다. 나는 고무신을 신고 온게 후회되었다. 바람이 더욱 거세지자, 가두리 전체가 바람에 떠밀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멀리 전봇대에 묶은 로프가 팽팽해지더니 뚝 하고 끊어졌다. 호수 바닥에 내려놓은 쇳덩어리 닻도 미끄러졌다. 내가 전화로 119에 가두리양식장이 떠내려가고 있다고 신고했다. 전화에 잡음이 많았는데, 잠시 후 전화가 끊어져 버렸다. 가두리가 움직이면서 전화선이 끊어진 것이다. 결국 가두리는 호수 가로 밀려가고 있었다. 저 멀리 둑에 비옷을 입은 사람들 대 여섯명이 올라왔다. 메가폰으로 우리를 향해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질렀다. 그런데, 아버지와 나는 우리의 전재산이자 삶의 밑천을 잃지 않게 목숨을 각오하고 지키는 중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우리는 미련할 것이고, 우리가 보기에 저들이 야속하였다. 저녁무렵이 되어서 바람이 잔잔해 졌다. 태풍의 와중에도 아버지와 나는 찢어지려는 그물을 계속 묶었기 때문에, 향어 몇 마리만 뛰어넘어 도망간 외에 손실은 없는듯 했다. 드디어 가두리는 호수 가의 둑에 닿아버렸고, 가두리 옆에 묶어놓은 뗏목은 둑으로 밀려서 올라가 버렸다. 그물들은 호수가의 얕은 바닥의 쓰레기들에 걸려버렸다. 물밑에 잠겨있는 그물에 구멍이 났을까봐 일일이 그물을 끌어올려 확인해야 했다. 호수 바닥에 낚시줄과 낚시바늘이 얼마나 많이 버려져 있은지, 그것들을 일일이 풀어내고 자르고 하면서 낚시바늘에 손가락이 여러군데 찔려서 피가 났다. 장갑을 껴도 소용이 없었다. 어쨌거나 태풍에서 살아남고재산도 지켰다.
향어의 떼죽음
향어 양식을 시작한지 4년째 추석을 앞두고, 가뭄이 심한데다가 아버지께서 향어를 너무 많이 가두리에 넣으셔서 그런지, 죽은 향어들이 허연 배를 드러내떠오르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몇 마리만 그 런줄 알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죽는 놈들이 점점 늘어나는거예요. 죽은 놈들을 건져내고 또 건져내도 끝이 없었어요. 빨리 건져내지 않으면 물이 썩어서 다른 놈들도 병이 들거든요. 학교를 마치자마자 양어장에 와서 밤늦게까지 죽은 놈들을 건져내기를 일주일 넘게 했어요. 근처 육지에 포크레인을 불러 구덩이를 파고, 트럭을 빌려 죽은 향어들을 실어서 묻었어요. 고무장갑과 장화가 썩은 향어에서 나오는 체액으로 미끌거렸어요. 온 몸에서 비린내와 썩은 냄새가 났어요. 향어 사업은 결국 실패로 끝났어요.
해결사 흉내
영화를 보면 해결사가 빚쟁이를 찾아가 돈을 받아내는 장면이 있잖아요. 저도 해결사 흉내를 내다가 별 소득없이 끝난 적이 있어요. 양어장 사업이 망한 후, 돈 나올 데가 없을까 하고 찾아보니 향어를 배달해 준 횟집의 외상값이 있는거예요. 열 몇 군데 되는 곳의 외상값이 대부분 몇 만원 정도였는데, 장사아치들은 끄터머리 돈을 안주고 버티는 습관이 있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 중에 2군데의 외상값이 10만원이 넘었어요. 여기를 친구들과 여럿이 함께 쳐들어가면 겁을 먹고 돈을 줄 것이라 생각했어요. 의사국가 고시를 치기 전이라. 저의 계획을 함께 할 친구들을 모았는데, 주로 뚱뚱하고 키가 큰 친구들을 모았어요. 의사국시를 마친 후 친구들과 모두 10명이 모아, 제가 갖고 간 아버지의 승용차와 택시에 나누어 타고 그곳을 들이닥쳤어요. 아버지가 일러준 대로 가게 안에서 사장의 이름을 부르면서 외상값을 달라고 말하면서 서 있었는데, 사장이 흥분해서 자기 아내의 따귀를 때리는 거예요. 그러면서 당사자가 아닌 제삼자는 모두 나가라고 고함치더라고요. 친구들은 순진하게도 저의 곁을 지켜주지 않고 순순히 나가더라고요. 그래도 두 친구가 남아서 저 옆을 지켰어요. 그런데,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한 30분 지나 가게를 나왔어요.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친구들과 2번째 집을 향했어요. 거기서도 그렇게 했는데 주인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 집에서 모두 저녁을 먹었어요. 푸짐하게 먹었는데도, 외상값만큼의 가격이 안 되더라고요.
그런데 나중에 아버지께서 소액재판이 있다고 말씀하셔서, 법원에 가서 소액재판 청구를 했는데,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쉽게 받아지더라고요. 왜 아버지는 그 방법을 진작 알려주시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이 일이 있은 후부터는 뭐든지 법으로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림 전시회
본과 4학년 때 명덕 네거리의 ‘무량수화랑’에서 개인 전시회를 한 번 했지요. 대학 6년동안 그린 그림들을 모으니 30개 정도 되어서, 전시를 할까 마음먹었어요. 마침 그 화랑는 최 이비인후과’ 선생님이 운영하고 계셨는데,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고 해서였어요. 최 선생님을 찾아가니 진료 중간 휴식시간에 그림을 그리시던 중이었는데, 큰 캔버스에 맨손으로 물감을 칠하고 계셨어요. 제가 전시하는 그림 중에 최선생님이 선택하는 그림 하나를 기증한다는 조건으로 화랑을 빌리기로 했어요. 플랭카드는 천을 사서, 유화 물감으로 직접 그려서, 친구와 같이 전봇대를 기어 올라가서 걸었어요. 전시회 첫날에는 동기 친구들이 많이 구경을 왔습니다. 저녁에 마칠 무렵에 동기 다섯 명과 저녁을 먹으러 가고 싶었어요. 마침 그림을 옮기기 위해 아버지의 트럭을 타고 왔는데, 트럭에는 3사람 밖에 못 타잖아요. 에라 모르겠다. 친구 3명은 짐칸에 타기로 하고, 교통단속에 안 걸리기 위해, 모두 짐칸에 눕기로 했어요. 그 트럭은 기아 자동차의 “쎄레스”였는데, 당시에 가격이 3백만원으로 농촌 보급형 트럭이었어요. 생산비를 낮추기 위해 사람이 타는 곳과 짐칸 사이에 나무와 천으로 칸막이가 쳐져 있었죠. 그러니까, 앞에 탄 친구들과 짐칸에 누운 친구들의 말소리가 서로 잘 들리는 거예요. 그렇게 짐칸에 친구들과 함께 누워서 이야기하며 갔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 생각해보니 그림 같은 추억이네요.
무주읍에 가다.
인턴을 마치고 군대 영장을 받고 영천의 삼사관학교에서 3개월 훈련을 받은 후 공중보건의로 편성되어 전라북도에 배치를 받았어요. 경상도 출신으로 전라도에 배치받는 건 드문 일이었죠. 전라북도에 배치받은 공중보건의들은 5일간 전주에서 공무원 교육을 받고, 마지막날에 시험을 쳐서, 성적순대로 희망 지역을 선택했어요. 저는 성적이 꼴찌여서 끝까지 기다려야 했어요. 모두 전주와 전주에서 가까운 지역을 선택했어요. 마지막으로 남은 지역이 전라북도에서 가장 오지인 무주였는데, 저는 마지막 순서여서 선택의 여지없이 그곳에 배치가 되었어요. 그런데, 그곳이 전라북도에서 대구와 가장 가까운 곳이었죠. 더욱이 그때 무주 스키장이 생긴지 2년쯤 되었는 터라, 난생처음 스키를 탈 수 있는 행운을 얻었어요. 마침 고등학교 때 절친한 친구인 영진이 집에 낡은 스키가 있던 것이 생각났어요. 부산에 있는 영진이 집에 가서 스키를 3년동안 빌리자고 하여, 무거운 스키를 기차에 싣고, 영동역에서 내려, 시외버스 정류소까지 1km를 걸어 시외버스를 타고, 무주읍에서 내려, 다시 무풍면으로 가는 시골버스를 타고, 숙소인 무풍 보건지소에 도착했어요. 무주의 공중보건의들은 모두 스키를즐겼는데, 스키복을 갖춰입지는 않았죠. 스키복 대신에 군대에서 입던 ‘야상’(야전잠바)에 군용 털모자를 쓰고 다녔지요.(웃음). 눈에 유별나게 띄었던지, 간혹 오랜만에 보는 대학동기들이 리프트를 타고가다가 멀리서도 저를 알아보고 소리쳐 부르는 경우가 많았어요. 겨울에는 스키를 타러오는 지인들로, 여름에는 무주구천동에 놀러 오는 지인들로 항상 바빴어요. 친구들이 오면 무풍보건지소에 있는 두 개의 방에 나누어 자게하고, 몇 개 안되는 이불을 나누어 덮고, 아침에는 식사를 만들게 하고 청소를 시켰어요. 모두 즐겁게 했어요.
서산대사의 깨달음을 엿보다
공중보건의의 2년차 때는 무주 군수님 댁에서 살게 되었어요. 이동구 군수님은 가족은 서울에 있고, 무주에서는 사택에서 혼자 생활하셨어요. 제가 공중보건의 1년차일 때, 간혹 군수님이 숙취해소를 위해 진료실로 오시면 제가 주사를 놓아 드리면서 친해지게 되었어요. 그래서 2년차때, 제가 있던 숙소를 신입 공중보건의에게 내 주고 나와야 했을 때 군수님깨 구원을 청했죠. 서울에 자제분들과 사시던 사모님이 주말마다 내려오셔서 요리를 해놓고 가시곤 했어요. 군수님께서 드시라고 요리를 했는데, 군수님은 매일 저녁모임에서 저녁을 드시기 때문에, 요리가 남아서 결국 상해서 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러다가 제가 같이 살게 되면서 제가 그 음식들을 먹어서 깨끗이 비우게 되었어요.
그 때 우리 공중보건의들은 일과를 마치고 모두 테니스를 쳤어요. 제가 간혹 동료들을 초대해서 저녁을 대접하기도 했죠. 저는 냉동실에 있는 소등뼈를 발견하고는 푹 고아서 사골탕을 만들어 먹었어요. 마침 한 솥이 남아있어서, 동료들을 초대해서 대접하니 모두 사골탕이 참 맜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씽크대 밑에 있던 인삼뿌리를 물에 끓여 후식으로 인삼차를 대접했어요. 모두 맛있게 잘 먹고 돌아갔어요. 그 후에 며칠동안 저 혼자서 사골탕을 다 먹고 간혹 인삼차도 먹었어요. 그런데 주말에 사모님이 오시더니, 그건 감자탕에 쓰는 돼지 등뼈이고, 인삼인줄 알았던 거는 도라지라고 했어요. 돼지 등뼈와 도라지를 저는 소 등뼈와 인삼인 알고 먹었던 거예요. 옛날에 서산대사깨서 바가지에 담긴 맑은 물을 먹었는데 나중에 보니 해골에 담긴 썩은 물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저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