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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천사의 목욕탕
구월 중순이었다. 추석 지난 지 일주일 쯤 됐을 때다. 새벽부터 줄곧 까마귀가 울었다. 까마귀가 성가시게 우는 날은 일진이 사나웠다. 가까운 친인척의 부고 소식이 오거나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와 성가시게 했다. 정희는 집 벽에 붙여 만든 평상에서 책을 읽다가 그만 화증이 솟았다. 책을 평상위에 탁 소리 나게 엎어놓고 소리 질렀다.
야, 저리 안 가나. 너 자꾸 귀찮게 할래? 배고프냐?
까마귀는 기름칠을 한 것처럼 윤기 나는 검은 날개를 활짝 펴고 건너 편 버드나무에 날아가 다시 울었다. 정희는 잡친 기분을 풀 겸 쌀독에서 쌀을 한 사발 퍼나가 삽짝과 길섶에 뿌렸다. 할머니는 나쁜 꿈을 꾼 날이나 이웃집 오줌싸개가 키를 쓰고 쌀을 얻으러 온 날은 액땜하라고 소금을 뿌렸지만 정희는 소금 대신 쌀을 뿌렸다. 먹고 나가떨어지라는 주문도 곁들여서. 까마귀는 전신주에 날아와 앉아 쌀을 뿌리는 여자를 보며 갸웃갸웃 고갯짓을 하고 길섶에 숨었던 오목눈이, 참새들이 화르르 놀라 날아올랐다.
이 영감이 살맛나는 갑네. 전화 한 통도 없는 걸 보니.
괜히 심통이 난다. 남편은 현재 동창들과 동남아 여행 중이다. 주저하는 남편의 등을 밀어 여행길에 오르게 한 것도 자신인데. 막상 떠나고 없는 남편의 빈자리는 고요한 못에 돌 하나 던지면 퍼지는 파문 같다. 다시 책을 잡았다. 에크하르트 톨레의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마음이 싱숭생숭할 때 마음다지기 딱 좋은 책이다. 겨우 책에 몰입 중인데 차 소리가 들린다.
검은색 승용차가 스르륵 들어와 섰다. 거실의 벽시계를 보니 오전 열한 시를 가리킨다. 목사리도 없이 키우는 백구가 뛰어나가려고 해서 목사리를 다시 채우고 줄을 매 손에 잡고 삽짝을 주시했다. 차를 돌려 나갈듯 하더니 그 자리에 멈추고 승용차 문이 양쪽으로 열리더니 젊은 청년과 중년의 여인이 나왔다. 여자와 청년은 정희에게 목례를 했다. 정희도 고개를 까딱하며 어떻게 오셨느냐고 물었다.
초면에 실례합니다. 외진 곳이라 물어볼 곳을 찾던 중 이 집이 보여 들어왔습니다. 외람되지만 혹 이 주소지가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여자는 차분하고 교양이 넘치는 목소리로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겉봉에 쓰인 발신자의 주소가 희한했다. <경남 의령군 칠곡면 신전 골짝 천사의 목욕탕에서 이장백 씀>이라고 되어 있었다.
우리 면에는 신전이란 동네가 없어요. 신전은 대의면에 있는데. 바로 등 너머에 있어요.
이미 그 마을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마을 회관에 가서 물어봤지만 인근에 천사의 목욕탕은 없다고 하더군요. 혹 신촌을 신전으로 잘못 안 것 아닌가 하면서 칠곡면에 옛날에 목욕탕이 있었으니 거기 가서 물어보라 하더군요. 그래서 재를 넘어 오다 이 집이 보이기에 혹시나 싶어 들려봤습니다. 혹 신전이란 지명이 칠곡면 인근에도 있습니까?
아니요. 신촌 마을은 있어요. 거기에 목욕탕 하던 집도 있고요. 하지만 지금은 목욕탕 업을 하지 않아요. 외지인이 들어와 산다는 말도 들은 적 없고요. 노인 두 분이 사는 걸로 아는데. 일단 여기 좀 앉으세요. 차라도 한 잔 드시고 가세요.
정희는 어쩐지 두 사람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아 그냥 내칠 수가 없었다. 백구를 개집 기둥에 묶어 놓고 두 사람이 평상에 앉아 쉬는 동안 모과 차를 끓여 냈다. 청년은 티와 바지를 입었지만 귀하게 자란 티가 났고, 여자는 웨이브가 굵게 들어간, 어깨까지 찰랑대는 긴 머리에 밝은 하늘색 투피스, 굽이 낮은 구두를 신었는데 무척 세련되어 보였다.
찾는 분이 누구신가요?
남편입니다.
추석이 엊그젠데 추석에 집에 안 계셨나 봐요?
예, 이 편지만 도착했어요.
기다리시면 다시 연락이 오겠지요.
그럴 것 같았으면 애랑 찾아 나서지도 않았을 겁니다.
여자의 눈이 쓸쓸했다. 여자와 청년은 차를 잘 마셨다며 일어섰다. 두 사람을 배웅하는데 왜 자꾸 거기가 떠올랐는지. 정희는 꼭 누군가 자기 머릿속에 들어와 재촉하듯 생각지도 않은 말이 튀어 나갔다.
저기 신전 골짝을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거기가면 진짜 멋진 소가 있는데. 제가 천사의 목욕탕이라고 부르거든요. 혹 아저씨도 거기에 반했는지 모르겠네요.
펜션 같은 게 있어요?
아니요.
여자는 고개를 저으며 떠났다.
어둠살이 내렸다. 개밥을 주러 나갔던 정희는 갑자기 백구가 사납게 짖는 바람에 깜짝 놀라 삽짝을 봤다. 낮에 봤던 승용차였다. 역시 낮에 봤던 여자와 청년이 내리더니 마당으로 들어섰다. 정희는 백구를 다시 개집에 묶었다.
저 아래 목욕탕 집에도 가보고 간이 주차장에 사람들이 있기에 가서 물어봤지만 천사의 목욕탕은 없다고 하더군요. 남편이 집을 나갈 때 등산복 차림으로 배낭을 메고 나갔어요. 산을 무척 좋아하는 분이죠. 어쩌면 어느 골짝에 텐트를 치고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집으로 돌아가다가 아주머니 말씀이 생각나 염치 불구하고 다시 왔습니다. 그 곳에 가 볼 수 없을까요?
오늘은 늦었는데 밤에 갈 곳은 못 돼요. 남편이 차를 가지고 가셨나요?
한 십년 된 산타페를 타고 다녀요.
차가 있으면 사람도 있겠군요.
그렇겠지요.
그날 밤 여자는 남편에게서 받았다는 편지를 보여주었다.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여보, 미안하오. 모든 재산은 당신과 재현이 앞으로 등기해 놨소. 나를 찾지 마시오. 나는 이곳에서 잘 지내고 있소. 여기서 한 여자를 알게 되었소. 그녀와 함께 남은 인생을 살 생각이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가장 행복하고 편안한 날을 보내고 있소. 당신도 재현이도 행복하길 바라오. 당신의 남편이었던 사람으로부터 행복을 빌며 안녕!>
다음 날, 아침을 먹고 정희는 여자와 청년 틈에 끼어 신전 골짝으로 향했다.
거기, 저수지 다리에서 조금 벗어난 공터에 먼지를 뽀얗게 덮어 쓴 산타페가 있었다. 여자와 청년은 남자의 차를 확인했다. 차는 그 자리에서 오랫동안 움직인 것 같지 않았다. 차문은 꽉 잠겨 있었고, 창문을 통해 들여다 본 차 안은 깨끗했다.
청년과 여자는 사방에 대고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공허만 메아리만 돌아왔다. 여자는 천사의 목욕탕에 가 보자고 했다.
정희는 쇠락해가는 숲을 바라보며 가풀막 심한 길을 가리켰다. 쇠목재 밑이었다. S자 모양의 길에서 소나무를 발견했다. 차를 갓길에 세우게 했다. 차바퀴에 커다란 돌 하나를 받쳐놓고 일행은 오솔길을 따라 숲 안으로 들어갔다. 골짝이 가까울수록 물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비가 잦았던 탓일 게다. 세 사람은 커다란 노송의 등을 짚고 서서 눈 아래 펼쳐진 풍경에 한동안 넋을 잃었다.
어머니, 저기......
다급한 청년의 목소리를 따라 가리키는 곳을 봤다. 뭔가 이색적인 것이 보였다. 바위 위로 얼기설기 나뭇가지를 걸치고 그 위에 칡넝쿨과 풀로 덮여있지만 분명 텐트 같았다. 청년은 가풀막을 나는 듯이 내려가 골짝을 건넜다. 청년의 모습이 집채만 한 바윗덩이 뒤로 사라졌다. 잠시 후 텐트의 흔적 아래로 청년의 키가 쑥 올라왔다.
어머니, 찾았어요. 아버지가 여기 어딘가 계세요.
정희와 여자도 골짝을 건너갔다. 텐트 입구의 지퍼를 열었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바닥에 깔린 침낭이 따뜻해 보였다. 침낭은 방바닥에 얌전히 깔려 있고 몇 권의 만화책과 노트 한 권이 머리맡 부분에 놓여 있었다. 여자와 청년은 남자를 찾아 나갔다.
여보 오~~~~ 재현이 아버지! 재현이가 왔어요. 어디 계세요?
아버지~~~~~저 왔어요. 어디 계세요. 대답해 주세요.
골짝이 우렁우렁 울다 메아리가 되어 돌아와 물소리에 스러져갔다.
정희는 텐트 안에 들어가 가만히 노트를 주워 나왔다. 여자와 청년이 텐트 위로 펼쳐진 너덜겅에 올라 고함을 지르는 동안 정희는 노트를 펼쳤다. 남의 일기를 읽는 것이 송구했지만 뭔가 그 곳에 비밀의 문서라도 있지 않을까. 노트의 문이 저절로 열렸다. 거기 남자가 있었다.
나는 다시 이곳에 왔다. 옛 지명이 모의 골짝이지만 내게는 신이 내린 골짝이라는 뜻으로 신전골짝이라 불렀다. 물론 골짝 바로 아랫동네 이름이 신전이다. 신전, 처음 그 지명을 들었을 때는 옛날에 커다란 신전이 있었던 곳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막상 그 마을에 들려보니 대한민국 시골구석이면 어디나 있음직한 그저 그런 대 여섯 가구가 사는 평범한 오지마을이었다.
신전골짝은 지난여름보다 숲이 더 우거지고, 나무를 감아 오른 칡넝쿨과 으름넝쿨이 더 무성하게 자랐지만 내가 만들어 놨던 텐트 자리는 오직 나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반듯했다. 우선 텐트부터 쳤다. 바닥에 두꺼운 비닐을 깔고 그 위에 텐트를 치고 텐트 바닥에는 도톰한 매트를 깔았다. 텐트 구석에 고우영의 <삼국지>와 이원복의 <먼 나라 이웃 나라> 만화 한 질을 놓았다.
텐트를 정리해 놓고 등산용 낫과 톱을 챙겨 폭포가 있는 소로 갔다. 소는 여전히 푸르고 깊고 맑았다. 폭포의 물줄기는 거칠었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리던 정인이 늦게 와 화난 것처럼 물방울을 사방으로 튀기며 우렁우렁 울었다. 나는 주먹만 한 돌 하나를 주워 폭포에 던졌다. 반갑다는 인사 정도는 해 두고 주변 정리를 했다. 칡넝쿨, 다래넝쿨, 으름넝쿨과 축 늘어진 나뭇가지나 자잘한 나무는 낫으로 베고 소의 가장자리에 쌓인 지푸라기 뭉치도 걷어냈다.
땀을 쭉 빼고 홀딱 벗은 채 소에 들어가 누웠다. 소의 너비는 175센티의 내 키와 딱 맞았다. 나는 물에 반듯하게 누워 천사를 생각했다. 천사, 그랬다. 홀연히 나타나 목욕을 하고 사라지곤 하던 그녀는 천사 아니면 귀신이었다. 귀신이든 천사든 나는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다. 그녀가 천사라면 나는 나무꾼, 천사의 옷을 훔칠 수만 있다면 나는 달콤한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다.
이곳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나만의 비밀 정원이다. 가끔 사람들이 기웃거리긴 해도 감히 침범하지 못하는 곳, 하지만 그녀는 찾아들었다. 분결같은 살 옷을 입고 검은 거웃을 드러낸 채 푸른 소에서 한 시간 정도 놀다가 사라졌다. 처음 그녀를 봤을 때는 내 눈을 의심했다. 어떻게 젊은 처녀 혼자 이런 골짝에 들어와 목욕을 할 수 있지. 내가 꿈을 꾸나. 미친 여잔가. 온갖 상상을 하며 텐트 속에 숨어 그녀를 훔쳐봤었다. 그녀는 아무도 의식하지 않았다. 늘 민소매로 된 하얀 원피스를 입고 왔다. 하얀색 운동화를 신었다. 원피스와 운동화를 벗어 물가의 바위에 올려놓았다. 브래지어도 팬티도 없었다. 알몸 그대로 소에 들어가 놀았다.
그녀는 자주 오는 것도 아니지만 오는 시간은 일정했다. 해가 서산에 한 뼘쯤 걸렸을 때 어둑한 숲길을 바람같이 가볍게 내려왔다가 바람같이 가볍게 사라졌다. 그녀가 숲길을 벗어나면 나도 살그머니 텐트에서 나와 숲길을 나가 보곤 했지만 도로에는 산그늘만 짙어오고 그녀는 사라졌다. 신전 동네에 사는 처녀일까. 차를 타고 왔으면 차 소리가 날 텐데. 자전거를 타고 오는 것일까. 자전거를 타고 왔으면 모롱이 돌아 내려가는 모습이라도 볼 수 있을 텐데. 그녀는 흔적도 없었다. 어떤 날은 무섭고, 어떤 날은 기다렸다. 호기심이 두려움을 이기는 시간이 이어졌다. 내가 신전 골짝에 텐트를 치고 있었던 한 달 가량 그녀와 나 사이엔 기묘한 설렘이 싹트고 있었다.
내가 조금만 유들유들한 성격이었다면 그녀를 그냥 지켜만 봤을까.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지만 지난가을과 겨울에도 그녀를 찾아 이곳에 와서 며칠 씩 머물다 갔지만 그녀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신전마을에 내려가 그녀에 대한 수소문을 해 봤지만 그런 처녀는 없었다. 나는 올 여름을 기다렸다. 열병으로 끙끙 앓으며 기다린 것이다. 오직 희망은 그녀가 남기고 간 마지막 말이었다.
아저씨 기다릴게요. 꼭이요.
지난여름이었다. 아내와 다투고 집을 떠난 지 달포가 되어가자 손 전화에 불이 붙었다. 아내는 사흘이 멀다 하고 집에 안 온다고 야단이었다. 실종신고 내겠다고 협박하고, 그렇게 집에 오기 싫으면 이혼 서류 보내라고 협박을 하다 당신 평생 백수로 살아도 좋으니까 돌아와 달라고 사정할 지경이 됐는데도 나는 그녀 때문에 텐트를 걷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나는 하루도 그녀를 못 보면 죽을 것 같았다. 남자답게 손목도 잡아보고, 대화도 나누고 싶었지만 어찌된 셈인지 몸이 텐트 안에서든 바위 뒤에서든 꼼짝달싹도 못하게 됐다. 사지가 제 자리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야 겨우 숨통이 틔어 ‘처자, 잠깐 있어 봐요.’ 소리쳤지만 내 목소리는 허공을 맴돌다 천사의 목욕탕에서 이는 소용돌이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런데 그만 서울로 가야 할 일이 생겼다. 윤 선생의 자살 소식이었다. 주부로 잘 산다던 그가 한 달 새 마음이 변한 것일까. 죽음을 택했다니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내가 서울에 있었다면 그를 자주 만났을 것이고, 속에 쌓인 앙금도 풀어내 극단적인 생각을 못하게 사전에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너는 나처럼 살지 마라. 고 할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백수는 겉으로 보기엔 화려해도 속이 곪아 병을 앓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나는 짐을 쌌다. 언제 왔는지 모르게 내 곁에 온 그녀는 짐을 싸는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저씨, 이제 집에 가실 거죠? 늘 거기서 나 보는 줄 알고 있었어요. 우리도 올해는 인연이 끝났지만 내년에 다시 만나요. 나도 여름에만 여기 살아요. 내년 이맘 때 오면 나를 만날 수 있어요. 내년부터 우린 행복할 거예요. 아저씨는 땅을 사고파는 일을 하면 좋겠다. 나를 위해 예쁜 집도 지어요. 아저씨가 있는 그 자리, 내 땅이거든요. 거기 작은 오두막을 지을 생각이니까. 아저씨가 설계 해 봐요. 그리고 올 때 만화책 잊지 마세요. 안녕! 아저씨, 기다릴 게요. 꼭이요.
나는 여전히 한 마디도 묻지 못하고 몸은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게 서울로 올라왔고, 윤 선생의 장례식에 갔다. 윤 선생이 죽은 것은 아내의 바람이었다. 새 남자가 생겼다며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의 당당함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윤 선생이 내린 결론은 한 가지 뿐이었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주면 만사가 형통된다는 것, 나는 윤 선생이 공원묘지에 묻히는 것을 끝까지 지켜봤다. 윤 선생과 나, 둘이지만 우리는 하나였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사는 게 죽는 것보다 어렵다는데.
그때 그녀가 떠올랐다. 땅을 사고파는 일을 하면 좋겠다고 했던, 나는 부동산에 대한 책을 사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공인중개사 시험을 쳤다. 시험은 쉽게 붙었고,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열었다. 그때까지 직장도 없이 빈둥거리던 아들을 내 옆에 앉혔다. 아들의 전공이 세무회계니 안성맞춤이었다. 일 년을 살면서 십 년을 사는 것 같이 살았다. 오직 그녀를 만나기 위해. 그녀만 생각하면 내 거시기는 거대해졌다. 밤마다 아내를 열락으로 이끌었다. 아내는 다시 고분고분한 여자로 돌아왔다. 아내는 이미 직장에 나가고 있었다. 처녀 때 아내는 백화점에서 고급 귀금속 담당을 하던 매니저였다. 다시 그 끈으로 직장을 잡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내는 여전히 늘씬하고 예뻤다. 아내는 신혼 때보다 더 좋아졌다고 여행 가서 산삼을 구해 먹고 왔느냐며 얼굴을 붉혔다. 산삼, 그래, 그녀는 내 산삼이었다.
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일 년을 십 년처럼 살다 다시 이 자리에 왔다.
지난여름을 떠올렸다. 서울에서 전국 산 이름을 검색하다가 의령의 명산 자굴산을 알았다. 내비게이션에 자굴산을 치고 찾아 든 곳이었다. 낡은 고물이 된 산타페를 저수지 옆 도로에 세워두고 쉬엄쉬엄 걸어 오르는데 경사가 급한 도로 옆에 있는 굵은 소나무를 봤다. 소나무 곁으로 가는 작은 오솔길을 발견했다. 사람이 만든 것 같지 않은, 멧돼지나 고라니나 산짐승이 다니는 길 같아 호기심이 일었다. 목도 말랐다. 귀를 기울이니 물소리가 들렸다. 물소리를 따라 숲 안으로 들었다가 막다른 곳에 섰다. 길의 흔적은 거기서 끝났다. 발아래는 낭떠러지였다. 가풀막은 커다란 소나무 뿌리가 반쯤 드러난 채 거의 직각 수준이었다. 골짝을 내려다보던 나는 소리쳤다. ‘와, 멋지다.’ 바로 푸른 소였다. 첫눈에 반했다. 골짝은 한낮인데도 햇살이 들지 않아 서늘하고 어둑했다. 피서객도 없었다. 주변은 온통 나무였다. 나뭇가지는 축축 늘어졌고 칡넝쿨은 무섭게 나뭇가지를 휘어잡고 뻗어나갔다. 또한 골짝 여기저기 집채만 한 너럭바위 몇 기가 턱 버티고 있었다. 바위는 검었고, 육중했으며 바닥 역시 크고 작은 돌 천지였다.
나는 배낭을 벗어 소나무 등걸에 기대놓고 소나무 뿌리를 잡고 아래로 내려갔다.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물가에 닿았다. 가까이서 본 너럭바위는 내 키를 훌쩍 넘었다. 너럭바위에 기어올랐다. 너럭바위에 올랐을 때 나는 한 번 더 감격했다. 서쪽 너덜겅과 북쪽 골짜기가 합쳐져 Y자를 이룬 곳은 단단한 반석이었다. 골짝 양쪽으로 집채만 한 바위가 호위를 하듯 앉았고 그 사이로 흐르는 물줄기가 폭포를 이루며 아래로 떨어졌다. 두 개의 골에서 흘러내린 물이 사이좋게 어우러져 내린 곳에 푸른 베일을 덮고 엎드린 소가 있었다. 그 소는 깊고 넓게 퍼져 물을 아랫녘으로 흘러 보냈다.
나는 너럭바위에 앉아 찔끔찔끔 눈물을 찍어냈다. 백수 생활을 청산해야 살 것 같은데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하나. 백수가 된 지 겨우 일 년이다. 처음 백수 생활이 활기찼다. 백수로 사는 선후배랑 등산 친목계를 만들어 여행을 다녔다. 주로 산행 위주였지만. 유럽과 베트남, 네팔, 중국 등 세계를 돌아다니고 백두산도 두 번이나 다녀왔다. 우리나라의 크고 작은 산도 섭렵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찍은 사진들을 개인 홈페이지에 걸면 손님마다 부럽다는 찬사를 달았다. 직장에 매어 못 해 본 것을 모두 해볼 요량으로 너무 서둘렀던 탓일까. 건강에 적신호가 왔다. 무리하게 산을 탄 결과이기도 했으리라. 무릎 관절이 부어올랐다. 퇴행성관절염이란 진단을 받았을 때는 맥이 빠졌다. 물론 아내의 빈축을 샀다. 눈초리도 싸늘해졌다. 한동안 한방 양방을 들락날락하며 치료를 받았다. 무릎이 견딜만 하자 다시 집 떠날 채비를 했다. 이번에는 무리가 아닌 혼자만의 여행을 계획했다.
문제는 아내의 반기였다. 나는 무릎에 이상이 생겼지만 아내 마음에 이상이 생겼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단다. 연금을 칠랑 팔랑 다 써버리면 아들 장가는 어떻게 보내느냐고도 한다. 아들이 한 명 있다. 이미 대학은 졸업했지만 직장은 없다. 나와 마찰이 빚어지자 아내는 원룸을 얻어 아들을 분가시켰다. 아들은 아르바이트를 한다는데 어떤 아르바이튼지 물어보지 않았다. 자식은 우리가 걱정할 필요 없다고 딱 잘랐다가 아내의 빈축을 샀다. 졸지에 아직 육십도 안 된 남자가 백수니 이웃 보기 창피하다. 백수 생활이 오래 가지 않을 줄 알았다. 다시 일자리를 찾을 줄 알았다. 무슨 남자가 미래도 설계해 놓지 않고 덜컥 퇴직부터 했느냐고 내 자존심에 상처를 냈다. 사실 명퇴를 신청할 때는 신바람이 났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산다는 것, 생각만으로도 짜릿했다. 산을 사랑했다. 산에 미쳐 살던 한 해는 행복했다.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 정도는 정복해야 산사나이라 할 수 있다고 호기를 부리며 산을 터득해 나가는 중에 퇴행성관절염에 잡혔다. 안나푸르나는 고사하고 북한산 정도도 오르기 힘들어지자 나 자신에게 절망하는데 아내는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더욱 더 여행이 간절했다. 이번 여행에서 내 인생을 재점검해 볼 필요가 있었다. 혼자 배낭을 메고 발길 닿는 곳이면 어디든 지칠 때까지 돌아다닐 생각으로 아내에게 밑반찬을 부탁했다. 아내는 밑반찬을 만들었다. 멸치 고추장 볶음, 깻잎 양념 무침, 매실 장아찌, 콩장 등이 짭조름하게 만들어져 통에 담길 것이다. 나는 느긋하게 거실에 앉아 한겨레신문을 신문을 읽는데 아내가 말을 걸어왔다. 돌아보니 아내는 여전히 내게 등을 보인 채 싱크대 앞에서 반찬을 만들고 있었다.
당신 믿다간 아파트 팔아 전세 나게 생겼어요. 쥐꼬리만큼 나오는 연금은 당신 혼자 쓰기에도 모자라는데. 앞으로 어쩌라고요. 당신 비자금 있으면 내 놔요. 저축했던 돈은 곶감 빼 먹듯이 야금야금 먹어 치워 이젠 그것조차 바닥이 날판이에요.
씀씀이를 줄이면 되겠네.
어떻게요? 당신이 돈 안 쓰면 되겠네. 돈 나올 구멍 없는데. 어떻게 하냐고요?
내 연금으로 우리 두 사람 살 수 있잖아. 그 보다 더 적은 돈으로도 잘 사는 사람 천지야.
당신이 살림 살아봐요. 가랑이가 찢어진다고요. 당장 당신 여행경비부터 줄여요?
나는 기름 값 정도만 있으면 돼. 다리도 어지간히 나았으니까 이번 기회에 나를 찾아볼 생각이야. 앞으로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지 우리 같이 고민해 봅시다.
고민할 것 없어요. 당신만 사라져주면 만사 해결 돼.
아내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은. 소름이 쫙 돋았다. 30년을 살 부비며 산 여자의 입에서 어떻게 저런 말이 나올까. 30년을 벌어 먹이다 백수 된 지 겨우 일 년 남짓인데. 몸은 백수라도 매달 연금이 꼬박꼬박 나오니 완전한 백수도 아니고, 아직 아내가 가장 노릇을 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저런 말을 저리 담담하게 할 수 있나. 나는 멍해진 눈으로 싱크대 앞에서 배낭에 넣어 갈 밑반찬을 싸는 아내의 등을 바라봤다. 잘 못 들었나? 잘 못 들었겠지.
당신 그 말 사실이야? 내가 사라져주면 만사 해결 된다는 말?
사실이야. 수수께끼 일 수도 있고. 맘대로 생각해.
이유를 물어봐도 되나?
사람이 싫은데 이유가 왜 필요해?
직격타를 맞고 비틀거렸다. 한 순간 내 인생 전체가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일류는 아니지만 유수 대학의 선생질을 했던 나, 이장백이 싱크 홀에 빠져버렸다. 뭔가 할 말을 찾아봤지만 도모지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아내에게서 밑반찬을 빼앗다시피 대충 싸서 배낭에 넣고 그대로 집을 나와 버렸다.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는 ‘세상은 둥글고 할 일은 많다’란 말이 떠올랐다. 도무지 세상은 둥글지도 할 일이 많지도 않은데 말이다. 그때 윤 선생이 떠올랐다. 나와 같은 학교에 있다가 나보다 먼저 백수가 된 친구였다.
서울을 떠나기에 앞서 윤 선생과 간이주점에 앉았다. 술잔을 기울이며 농담처럼 아내가 내가 사라져주면 좋겠다는 말을 하더라고 했더니 윤 선생은 술잔을 후딱 비우고 한참 나를 빤히 봤다. 내가 잔에 술을 채우자 빙그레 웃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자네도 사라져 줄 때가 된 거지. 쓸모가 없다고 버려지는 물건이 된 느낌 들었지? 내 아내는 아직 나를 필요로 해서 고맙지만 퇴직하고 아내랑 이혼한 사람 많아. 그러니 자네도 조심하게. 부인의 심중을 헤아려 쓸모 있는 남자가 되란 말이네. 돈 잘 버는 남자, 백수, 문제는 그게 아니거든. 여자는 복잡해. 자네 부인이 고분고분하지만은 않을 텐데. 자네가 워낙 강해 잘 잡고 사는 줄 알았더니 자네도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 같구먼. 이번 기회에 자네 부인이 진짜 원하는 남자가 어떤 남잔지 알아내 보게. 자네 부인이 수수께끼를 던졌으니 답을 풀어 와야 할 게야.
그런 소리 말게. 여자들은 우리가 뼈 빠지게 벌어다 준 덕에 여태 잘 살았잖은가. 백수가 된 우리에게 더 잘해 줘야지. 우리가 백수지만 연금 꼬박꼬박 나오겠다. 왜 기가 꺾여? 더 팔팔 살아나야지.
자네 아직 정신 못 차렸군. 그 연금 덕에 그나마 참아준다는 생각은 안 해 봤나? 그 연금 없어봐라. 마누라 등살에 지레 죽었거나 갈라섰을 걸.
그랬을까. 나도 사실 요즘 아내 눈치가 보이네. 아내 눈치 보는 내가 더 싫지만.
그럴 때가 됐지.
집에 있는 게 자꾸 힘들어지네. 이번에는 남녘으로 가 볼 요량인데 나랑 같이 갈 생각 없나?
없지. 기운이 딸려 여행도 술도 자제하는 중이네.
벌써 기운 딸린다고 주저앉으면 진짜 우리 뒷방 늙은이 밖에 안 될 것 같아. 아직 죽을 날이 까마득한데 말이야.
어쩜 이미 죽었는지 모르지. 요즘 내가 주부 아닌가. 아내를 위해 밥상을 차린다네.
자네가 밥을?
그렇게 됐어. 아내가 옷 가게를 시작 했다네. 제법 솔솔 한가 봐. 반찬값에 용돈이라고 내 놓는 돈이 생각보다 두둑해. 허참, 아내가 벌어다주는 돈을 받으니까 기분이 묘하데. 우리가 돈 벌 때 생각나서 눈물 나기도 했어. 봉급봉투 내밀면 아내는 사르르 녹는 눈꽃 아이스크림 같잖아. 참 고분고분하지. 자네도 그랬을 거야. 우쭐해서 아내에게 이거 집어 달라, 저거 갖다 달라 보채기도 했겠지. 아내는 너그럽게 다 받아주고, 며칠은 식탁도 푸짐하지 않던가. 지금 내가 그래, 아내에게 참 살갑게 굴어준다네. 불만이라면 가끔 외박을 한다는 거지. 바빠서 가게 쪽방에서 잔다는데 할 말 있겠나. 자네는 나처럼 살지 말게. 제 2의 인생을 펼쳐 보라고. 호방한 성질 그대로 호기롭게.
윤 선생의 말에 자괴지심이 묻어났다. ‘자네는 나처럼 살지 말게.’ 그 말이 명치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다. 윤 선생은 스스로를 아내의 틀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 같지만 속내까지 흔쾌히 적응하지 못하는 뭔가가 있었다. 윤 선생 아내는 뭔가 해야지. 이대로 있다간 미쳐버릴 것 같다며 그동안 살던 넓고 쾌적한 한강 변의 고급 아파트를 팔아 서울 변두리 아파트로 옮겼다. 남은 돈으로 아파트 상가에 조그마한 가게를 얻어 옷 가게를 열었단다. 윤 선생이 사는 곳은 서민 아파트가 밀집한 곳이라 중저가 상품이 먹혔다. 특히 눈썰미나 말주변이 좋은 윤 선생 아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 시장에서 싸고 편한 허드레옷을 도매로 사 와서 진열을 했는데 벌이가 솔솔 하다는 것이다. 윤 선생이 싱겁게 웃으며 ‘나, 괜찮지?’라고 하는데. 나는 ‘그래, 잘 사는 거야.’라고 맞장구 칠 수가 없었다. 윤 선생이나 나나 펜대만 굴리고 선생질 하던 사내 아닌가. 남을 부릴지언정 부림을 당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존재다. 윤 선생이 바로 나다. 슬그머니 퇴직한 것이 후회가 된다. 끝까지 버텨 볼 걸. 정년이 길어진다고도 하는데.
언젠가 농담처럼 웃으며 했던 아내의 말이 떠올랐다.
나도 돈벌이 할까 봐. 이대로 늙어가다 할머니 되긴 억울해. 나, 아직 쓸 만한데.
그러던가. 당신이 나를 돈 방석에 앉혀 놓고 호의호식 시켜 주겠지. 나는 사표 내고 싶어 안달 났으니 우리 역할을 바꾸어 살아볼까?
꿈 깨세요. 당신까지 먹여 살릴 능력은 없어요. 만약 당신이 사표 내면 당신은 찬밥 되기 십상입니다요. 지금 하는 걸로 봐서는.
아내의 말은 야멸쳤다. 순간 나는 깨달아야 했다. 아니, 직시해야 했다. 순정적이고 고분고분하던 아내의 몸에 언제부터 날카로운 가시가 자라기 시작했는지. 잠자리에서 상위 체위를 하며 아내가 리드를 해 나가려고 할 때부터 감을 잡아야 했다.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내가 명퇴를 계획하다가 실행에 옮기자 겉으로는 ‘알아서 하라’고 허락을 했지만 아내 표정은 밝지 않았다. 적어도 한 5년 더 근무하면 노후 대책은 세울 수 있는데. 명예퇴직 수당을 얼마나 더 줄지 모르지만 매달 받는 봉급에 비하겠느냐고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오래전부터 판에 박힌 일상에 염증을 느끼던 차라 명퇴를 결정하자 단 하루도 교단에 서기 싫었다. 수시로 아내는 나를 회유하러 애썼다. 우려되는 점을 나열하고, 조금만 더 직장생활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지만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나는 퇴직을 감행했고, 일 년을 신나게 살았다. 돈 아쉬운 줄 모르고 펑펑 써댔다.
결국엔 혼자 남녘으로 도망치듯 떠나온 것이 아닌가.
나는 너럭바위에서 내려와 비탈을 기어올랐다. 배낭을 메고 다시 골짝으로 내려섰다. 일단 텐트 자리를 물색했다. 골짝 건너편의 커다란 바윗덩이 뒤에 제법 편편한 자리가 있었다. 내 허리통만 한 때죽나무와 자귀나무가 골짝 쪽으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드러누운 탓에 속이 잘 보이지 않던 장소다. 허리를 구부리고 나무그늘로 들어섰다. 텐트 두 개는 칠만한 공간은 됐다. 나무의 낮은 가지를 등산용 작은 톱으로 베어내고 자잘한 나무를 베어냈다. 주변 정리를 하고 보니 그 자리가 봉의 알자리 같았다. 납작한 돌을 주워 바닥에 깔고 돌 위에는 풀과 마른 가랑잎을 긁어모아 도톰하게 펴고 텐트를 쳤다. 길에서는 내 텐트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골짝에 들어와도 내 텐트를 찾기는 힘들었다. 골짝에서 너럭바위를 지나 폭포 아래를 건너 집채만 한 바윗덩이를 돌아야 내 텐트가 있었다. 바위에 덧대어 지어놓은 텐트는 비밀 아지트 같았다. 나는 만족했다. 집 한 채 건사하느라 녹초가 되어 텐트 속으로 기어 들어가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
그 곳은 적당히 오싹했고, 적당히 어두웠지만 혼자 사색하기엔 적격인 장소였다. 책을 보다가 심심하면 홀딱 벗고 소에 들어가 놀았고, 추워지면 나와서 밥을 지어 먹었다. 라면도 끓여 먹고, 소주도 마셨다. 얼큰하게 취해 잠들기도 하고, 산타페를 끌고 나가 시장을 봐 오기도 했다.
그렇게 유유자적 즐기던 나만의 장소에 그녀가 나타난 것은 이삼일이 지난 후였던가. 그녀가 목욕을 하고 사라진 날 나는 그 소에 이름을 붙였다. 천사의 목욕탕. 천사의 목욕탕에 들어가 앉으면 내 몸을 휘감는 그녀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 나는 번번이 백일몽을 꾸었고 사정을 했다. 최근 아내의 적극적인 공세에도 오그라들기만 하던 남성이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솟았다. 나는 혼자 웃고 혼자 노래하고, 혼자 춤췄다.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물소리가 내 목소리를 받아 안아서 밖으로 새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았다. 어쩌다 피서객이 들릴 때도 있지만 낭떠러지를 내려 올 엄두를 못 내고 물러났다.
나는 그녀를 위해 낭떠러지를 오르내릴 수 있도록 길을 냈다. 너럭바위 옆으로 비스듬히 홈을 파서 계단을 만들고 나무에 줄을 매어 잡을 수 있도록 했다. 길 덕분에 용기 있는 피서객이 한 두 팀 들어와 물가에 앉아 놀곤 했지만 오래 견디지는 못했다.
여긴 이상하게 춥고 음침해. 무서워서 오래 못 있겠어. 우리 저 아래로 자리를 옮기자. 물도 겁나서 못 들어가겠어. 꼭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것 같아.
그들은 숲 모기에게 뜯기다가 진저리를 치며 밝은 곳으로 사라졌다. 그들에게 나도 내 텐트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오직 그녀만이라도 나를 봤으면 좋으련만 그녀조차 내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투명인간이 된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진짜 내가 투명인간이 되었나? 숲 밖에 나가 산타페를 세워 둔 곳으로 가서 그 옆에 진을 친 사람들 사이로 일부러 들어가 인사를 한 적도 있다.
안녕하십니까? 피서 오셨어요?
예. 여기 물이 참 깨끗하고 차가워요.
분명 나는 투명인간이 아니었지만 그 골짝에만 들면 투명인간으로 변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좋았다. 내 부재가 길어지자 아내는 수시로 전화를 해 왔지만 내가 숲 밖에 나왔을 때만 통화가 가능했다. 숲 안에 들어서면 물소리가 자동으로 전화기를 차단해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다 윤 선생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이곳에 온 지 달포가 지났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사람이 무릉도원에 빠져 하루를 살다 나오니 십 년이 흘렀더라는 말을 이해했다. 달포가 내 기억에는 삼사일 정도 흐른 것 같으니 말이다. 나는 그렇게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떼어 그녀를 두고 숲에서 나왔었다. 숲 밖은 단풍이 자굴산 중턱까지 내려와 있었다. 산타페는 먼지를 뽀얗게 덮어 쓰고 혼자 외로이 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돌아왔다. 나는 너무나 편하고 좋다. 태초에 내가 태어난 안태 봉이 여기 아니었을까. 그녀는 내가 온 것을 알까. 약속을 잊은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일 년 사이 그녀의 마음이 변해버렸을 수도 있다. 신전 동네에는 그런 처녀가 없다고 했었다. 어쩌면 외지에서 잠깐 신전 아랫마을인 곡소나 행정, 상리, 하리 마을 누군가의 집에 다니러 왔던 처녀는 아니었을까. 그녀 때문에 낯선 동네 이름도 다 파악했다. 왜 그 많은 날들 중에 하필이면 내가 떠나는 날에야 작업을 걸어 온 것일까. 내가 젊지도 않고, 유부남이란 것도 알만한 처녀가 얄궂어라.
물에 누워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부드러운 물결이 발가벗은 전신을 어루만졌다. 꼭 그녀가 만지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전신이 얼얼할 정도로 얼어 있었다. 얼마나 잤는지 숲은 어두웠다. 물에서 나와 너럭바위에 걸쳐 놨던 수건을 찾아 몸을 대충 훔치고 꽉 잠가놨던 텐트의 출입구를 열었다. 혹 뱀이나 지네 같은 것이 침범할까 봐 손전등과 에프킬라 한 통을 출입구 쪽에 챙겨 놨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 더듬거리며 손전등을 찾았다. 불을 켰다. 텐트 안으로 불을 비추는 순간
어헉!
나도 모르게 뒤로 벌렁 넘어져 주저앉았다. 텐트 속에는 그녀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지난여름에 봤던 순백의 원피스를 입은 채 맨발의 그녀는 팔베개를 하고 곱게 잠들어 있었다. 나는 가만히 미소를 짓고 손전등을 텐트 밖의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코펠을 꺼내 라면을 끓였다. 추울 때는 뜨거운 라면이 제격이다. 반찬도 필요 없이 먹으면 금세 속이 풀리는 라면, 누가 만들었는지 기찼다. 아니, 고마웠다.
맛있겠다. 설마 아저씨 혼자 드시려는 건 아니죠?
처녀가 잠이 깨어 텐트 밖으로 나오며 말했다.
소리 소문도 없이 남의 텐트를 침범해 잠자는 그대는 누군가?
아저씨 오기만 기다렸어요.
내가 무섭지도 않아? 더구나 밤이 됐는데. 집에 어찌 갈래?
집 나왔어요. 아저씨처럼. 나 재워주실 거죠?
침낭이 한 개 뿐인데 어쩌누? 밤에는 추운데.
한 침낭 두 사람이면 더 따뜻하겠다.
통성명이나 하지. 나는 이장백 나이는 59살 원숭이 띠 그대는?
나는 블루엔젤, 이백 이십 살, 무슨 띤지 몰라.
푸른 천사? 거짓말 안 하기, 진짜 이름이 필요해
진짜 블루엔젤
아무러면 어때, 이름이 무슨 상관이야.
우리는 라면을 먹고 손전등을 켜 놓고 만화를 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알몸이 되어 침낭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남자가 된 이후 손에 꼽을 정도의 여자랑 자 봤고 아내랑 30년을 줄기차게 잤지만 태어난 이래 그런 경험은 처음 했다. 열락의 도가니란 말을 이해했다. 그녀의 몸이 그랬다. 밤새도록 엉켰다. 이십대에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는 땀을 흘린 후면 천사의 목욕탕에 뛰어들었다. 천년 비아그라를 푼물인지 거기서도 나는 지치지 않았다.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숲이 환하게 열리고, 지나가는 차량 소리가 요란할 즈음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코펠에 밥이 고슬고슬하게 지어져 있고 납작한 돌 위에 아내가 만들어준 반찬이 가지런히 나와 있었다. 나는 우렁이 각시를 얻었다. 날마다 행복하다. 그녀가 물 위를 걷는다. 천사의 목욕탕은 빙판이 된다. 천사는 빙글빙글 춤을 춘다. 나는 그 춤에 빨려 들어간다. 행복하다. 시간도 잊고 밤과 낮도 잊었다. 나는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안녕이라고.
정희는 남편과 아버지를 부르다 지쳐 돌아온 여자와 청년에게 노트를 건넸다.
집으로 가세요. 여긴 그들만의 낙원이니까. 이대로 두고 그냥 가세요.
2014, 8. <의령문학 1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