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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조선 최고의 실학자 이며 성리학자 였던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은 영조(38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父 전(나주)재원과 母 해남윤씨(윤두서 손녀)의 4째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 부터 영특하여 당시의 경전, 사서, 고문 등을 두루 섭렵하였고 자라면서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 선생의 사상을 심취하게 되었으며 23세 때 진사시험에 합격 성균관에 들어 가면서 더뎌 정조대왕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에 때 사돈관계인 이벽으로 부터 천주교를 접하게 되었고 천주교에 대한 새로운 세계를 체험 하기도 하였으나 제사 문제 등 유학에 반하였기에 회의를 느끼게 됨에 손을 뗀다.
1801(신유)년 그렇게도 다산을 아끼던 정조대왕이 승하하자 마자, 순조가 즉위하면서 신유사옥(천주교 탄압사건)으로 포항 장기로 유배되었고 3쩨형 약종은 옥사, 2째형 약전은 신지도로 각각 유배 9개월이 지난 후 황사영(배달은 큰형인 약현의 사위) 백서사건(신유사옥의 실태를 당시 중국에 파견 되어 있던 교황청의 지부에 보고문서 전달 미수사건) 서울로 끌려와서 조사를 받은 후 다산은 강진으로 약전은 흑산도(후에 유배 중 사망)로 유배 되었고 약종의 부인과 3명의 아들은 순교 되었다.
이 시기에 선생은 다산학의 양대 산맥인 경세학, 경학을 집중 연구로 제자들과 함께 500여권의 책을 집필 하였고 57세 떼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서 학문과 생애를 정리하는 세월을 보내게 되었으며 미완인'목민심서를 완성 하였고 흠흠신서 나언각비 등을 저술하였다.
옥련사 입구에서...
오늘은 왼쪽 발목이 안 좋아 8회선배님 등과 함께 하산지점인 귤동마을 입구에서 출발 전에 한 컷.
귤동 마을 끝자락/ 산바람을 쓰다듬고 호젓한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입구.
정석 다산선생께서 10년 동안 여기에 계시면서 직접 세긴 각자.
다산초당/ 주위에 숲이 우거져 평일에도 어둠 침침한데 오늘따라 흐린 날씨 관계로 깊은 저녁을 연상케 하네요.
행서체의 글씨는 추사 김정희선생의 서첩에서 한자 한자 골라 집자(集字)한 글씨라고 함.
다산초당 : 강진만을 한눈에 굽어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이 곳 다산초당은 강진 유배 18년중 10여년 동안을 생활하시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권에 달하는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 하였던 곳이다.
유배 초기에는 강진읍 동문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 겨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10 여년 동안을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 치고 저술하였으며,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노후로 붕괴 된 다산초당을 1957년 복원하였고 그 후 다산선생이 거처하였던 동암과 제자들의 유숙처였던 서암을 복원하였다.
다조/ 선생께서 제자들과 함께 차를 끓여 나눠 잡수시던 반석.
집자한 글씨로 어딘가 어수선한 느낌을 받는다.
연지석가산/ 선생께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작은 연못을 만들고 고기를 키우며 마음의 여유를 즐기시던 모습을 상상 헤 본다. 선비의 아름다움을 작은 것에도 만족하고 고결한 미풍의 멋을 맘껏 느겼을 것 같다.
동암.
다산동암/ 글씨는 선생의 서첩에서 역시 집사한 글씨체라고 함. 억시나 강직한 선비의 간결하고 고상한 기상을 느낄 수 있다. 동암은 선생께서 유숙하시는 방으로 책을 쓰시고 집필한 곳이다.
보정산방/ 아주 보배스러운 방이란 뜻으로, 추사 김정희 선생의 예서체를 변형시킨 글씨체.
참고; 다산선생의 둘째 아들 학유, 나중에 혜장스님의 소개로 알게 된 대흥사 주지스님인 초의선사, 그리고 추사 김정희는 동갑내기로 친구가 됨.
다산과 혜장은 10년의 나이차를 잊고 서로가 존경과 우정으로 학문을 주고 받던 진정한 사상가 였기에 하루에도 수없이 오르내리시던 길이다.
해월루
백련사 주위의 수 백년을 자랑하는 울창한 동백림은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 관리 되고 있다.
백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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