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 청나라 볼모 생활, 370년 만에 재조명
선양 총영사관 주최 한·중 국제학술제 개최
연합뉴스|입력 2014.08.22 17:14|수정 2014.08.22 17:41
(선양=연합뉴스) 신민재 특파원 = '비운의 세자'로 불리는 소현세자(昭顯世子·1612∼1645)가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 8년을 생활했던 중국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 현지에서 그의 삶을 재조명하는 학술행사가 열렸다.
한·중 학자들은 22일 주선양 한국총영사관이 주최한 '제1회 사행단 문화축제'의 주 행사로 열린 국제학술제에서 소현세자의 선양 생활과 역할, 당시의 시대상에 대한 발표와 토론을 벌였다.
조선의 16대 왕인 인조 5년(1627) 정묘년, 조선에 들이친 청은 9년 뒤인 인조 14년(1636) 병자년에 두 번째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침공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한 달가량 항전하다가 삼전도로 나와 땅에 머리를 9번 찧는 의식으로써 항복했다.
명나라와 전쟁 중이던 청은 당시 수도였던 선양으로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鳳林大君·뒷날의 효종) 등을 볼모로 데려갔다.
힘없는 조국과 비극적 운명을 같이한 소현세자는 1637년 4월 선양에 도착, 청이 명에 승리한 뒤 베이징(北京)으로 천도한 1644년 겨울까지 무려 8년간 볼모 생활을 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김남윤 연구원은 "병자호란 직후 청이 소현세자를 비롯해 3정승 6판서의 자제까지, 많은 인질을 선양으로 끌고 간 것은 조선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명과의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식량, 병력을 조선에서 조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김 연구원은 "조선과 사대관계를 맺은 청은 약조 이행을 촉구하며 수시로 조선을 압박했고 모든 사안에 대해 소현세자에게 먼저 말하고 장계(狀啓)로 조선 조정에 알려 실행하게 했다"면서 "소현세자는 대청(對淸) 외교의 최전선에서 청의 강압에 응대하면서 어떻게든 조국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고 김상헌 등 청에 투옥된 척화신들을 보살피려고 애썼다"고 덧붙였다.
산둥대 천상성(陳尙勝) 교수는 "당시 청 황제는 소현세자를 여러 방면에서 우대해 청에 호감을 느끼게 하는 한편 군사훈련을 참관하게 하는 등 일종의 압력을 가해 명을 돕고 청에 반대하는 조선의 생각과 태도를 바꾸려 했다"면서 "이는 결과적으로 소현세자가 부친인 인조의 의심을 사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8년간 볼모 생활을 견디고 1645년 고국으로 돌아온 소현세자는 장기간 청에 머물며 '친청파'가 됐다는 소문과 청이 조선왕을 자신으로 교체하고 인조를 대신 선양에 오게 할 것이라는 모함 탓에 인조의 냉대를 받아야 했다.
아들을 의심한 인조는 귀국한 세자가 군신의 예를 보이려 하자 이를 거부했고 소현세자의 동생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삼았다.
소현세자는 결국 귀국한 지 3개월 만에 숨을 거뒀다.
일각에서는 부친인 인조 또는 정적들에 의한 '독살설'을 주장하지만 오랜 볼모 생활로 지병인 학질이 악화해 숨졌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서울대 이상찬 교수는 "당시 선양에 들어간 소현세자 일행은 문·무관과 역·의관 등을 합쳐 182명이었는데 청은 경비 부담 때문에 인원 감축을 요구하기도 했다"면서 "소현세자가 머물던 선양관소(館所)는 청군에 포로로 끌려온 조선인들에 대한 대민지원을 비롯해 오늘날의 영사업무 창구까지 겸하면서 경비가 늘 궁핍했다"고 설명했다.
소현세자가 생활했던 선양관소는 현재는 아무런 표지나 흔적이 없고 당시 사료들을 토대로 대략의 위치만 추정되고 있다.
sm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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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과의 관계
1616년 광해군(1608~1623) 8년 누르하치(奴兒哈赤, 노아합적, Nurhachi, 1559~1626) 後金 건국
1619년 광해군 11년 명나라 신종(神宗)의 재조지은(再造之恩, 망하게 된 것을 구해준 은혜)을 갚아야 한다는 협박과 조정 신료들의 아우성에 요동파병군 도원수 姜弘立(강홍립),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부원수 金應瑞(김응서, 金景瑞, 김경서), 조방장(助防將) 김응하(金應河, 1580~1619, 선천군수) 13000명 파견. 사르후(薩爾滸) 전투에서 관형향배(觀形向背·정세를 살펴보고 행동하라)”라는 밀명으로 姜弘立과 金應瑞(金景瑞)는 후금에 항복. 선천군수 김응하(金應河)와 운산군수 이계종(李繼宗) 등 전사
1623년 광해군 15년 仁祖反正.
이서(李曙), 이괄(李适), 신경진(申景禛), 구굉(具宏), 구인후(具仁垕), 이귀(李貴), 김유(金瑬), 최명길(崔鳴吉), 심기원(沈器遠), 이중로(李重老),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등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대북파(大北派)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류희분(柳希奮)등을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인조) 종(倧)을 왕으로 세운 정변.
1624년 인조(1623~1649) 2년 이괄(李适)의 난.
1월 22일 李适(이괄), 李邃(이수, 이괄 동생), 이전(李旃, 이괄 아들), 韓明璉(한명련), 한모(韓某), 원종경(元宗慶) 등 9명이 2월 15일 이천(利川)에서 부하장수 奇益獻(기익현, 진도), 李守白(이수백, 거제), 李先哲(이선철, 남해), 李善述(이선술, 영해), 柳震楨(류진정, 금성)에게 죽음을 당함으로써 난은 실패했다. 이괄의 난은 대내적으로 수도의 함락, 국왕의 몽진(蒙塵, 공주) 등으로 인한 민심의 동요와 공신세력 내부의 갈등의 노골화, 어영청 등 군영재편을 초래했으며, 대외적으로는 한명련(韓明璉)의 아들 한윤(韓潤)이 후금으로 도망가 남침(南侵)의 야욕을 자극하여 정묘호란(丁卯胡亂)의 명분을 제공하기도 했다.
1624년 인조 2년 摠戎廳(총융청), 御營廳(어영청) 설치
1626년 인조 4년 守禦廳(수어청) 설치
1627년 인조 5년 丁卯胡亂(정묘호란)
홍타이지는 1627년 1월8일 대패륵(大貝勒) 아민(阿敏)에게 광해군 복위의 명분으로 3만명으로 조선을 정벌하라고 명령. 철산 용골산성의 정봉수(鄭鳳壽·1585∼1668)와 의주의 이립(李立), 가산 부근에서는 김여기(金礪器)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회군하는 적을 맞아 싸웠고 형제관계 및 명에 事大하지 않을 조건으로 화약후 철수.
한족 출신의 이영방(李永芳)(1618년 누르하치가 무순을 공격했을 때 투항)
조선 출신의 강홍립(1619년 심하(深河) 전역에 참전했다가 투항)과 한윤(韓潤)(이괄과 함께 난을 일으켰던 한명련(韓明璉)의 아들)
의주 : 의주목사 이완(李莞)은 사로잡혀 피살.
정주 : 정주(定州)의 능한산성(凌漢山城)을 포위해 선천부사 기협(奇協)이 전사하고, 정주목사 김진(金搢)과 곽산군수 박유건(朴惟建)은 포로
안주(安州) : 평안병사(平安兵使) 남이흥(南以興)은 성 밖의 민가를 불태우고 싸웠으나 방어선이 붕괴되어 성의 함락이 임박하자 남이흥은 부하들과 함께 불붙은 화약 더미 속으로 몸을 던져 순국
인조는 훈련도감과 어영군의 병력을 호위에만 투입
1628년 인조 6년 네덜란드인 Weltevree(朴淵, 朴燕) 표착

1636넌 인조 14년 丙子胡亂(병자호란)
후금은 조선에 사신을 보내 기존의 형제 칭호를 버리고 군신 관계를 맺을 것을 강요하는 국서에서 나라 이름을 청(淸)이라 하고 스스로 황제임을 천명. 조선 정부는 ‘하늘에는 해가 둘이 없다’는 명분론으로 청의 존재를 부정하는 주전론이 팽배하여 주전론은 金尙憲(김상헌), 洪翼漢(홍익한), 尹集(윤집), 吳達濟(오달제), 鄭蘊(정온), 李敬輿(이경여), 趙絅(조경), 兪棨(유계) 등이 주도하였고 주전론은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화친을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는 척화론으로 선회하여 주전론으로 기울자 청은 태종이 12월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 1637년 1월 30일 삼전도(三田渡, 송파)의 청태종 진영에 나와 항복. 조선은 청과 군신관계를 맺고, 청은 소현(昭顯)·봉림(鳳林)의 두 왕자와 강경한 척화론자들(평양서윤 홍익한(洪翼漢)·교리 윤집(尹集)·교리 오달제(吳達濟))을 인질로 데려갔다.
주화론 : 이귀(李貴), ·최명길(崔鳴吉), 홍서봉(洪瑞鳳)
의병 : 박철산(朴鐵山)이 이끈 의병부대는 용강 부근의 적산에서 ‘의병산’으로 불리게 되었고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은 1642년(인조 20년) 명(明)과 연결하여 청(淸)을 치려고 계획하다가 실패하여 청으로 잡혀갔다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