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북공정을 막기위해 한자의 원조인 금문(金文)은 우리 민족이 애초 고조선 유적지인 중국 대륙에서 부족한 글자를 보충하기 위해 그림으로 그려 썼던것을 중국인들이 가져다 자기네 말과 맞추어 자기네 글자를 만들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금문해독이란 우리 상식과 우리 말을 하는 우리가 아니면 해독을 할 수 없다는 실증 금문해독을 전체메일을 보내는 중에 낭하리 고각을 만나 이것부터 해독해 보려한다.
아래 낭하리 고각( 古刻 - 옛날 석각) 그림은 흔히 인테넷에 뜨는 그림이다.
낭하리 고각은 그간 고고학계나 사학계에서 무엇인지 몰라 궁굼해 하던 것이었고 그 설도 분분했던 것이다. 필자도 이 그림을 얼핏 보고 지나친 일이 있는데 독자님중 백산님의 질문을 받고 자세히 검토해 본 결과 이는 낙서가 아니고 매우 중요한 그림이다.
우선 이 그림은 그림이 글자로 발달하는 과정이 나타나고있으므로 우리 역사는 물론 세계 인류문화 유산이 된다고 생각되고, 또 꿈같은 기대인지는 모르나 우리나라 진도등지에서만 나타나는 모세의 기적처럼 초사흘 달이 금성과 만나 물그림자에 비치는 날, 이런 환상적인 날이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이고 이를 낭하리 바위에 새겨 놓았다면 우리 조상의 천문관측 수준은 더 말해 무엇하랴?
이를 자세히 분석해 보고 이를 설명한다.
아래 화면은 흔히 인터넷 상에 뜨는 그림이다.
* 왼쪽그림이 낭하리 고각이고 다음은 평양 법수교 아래에 있었다는 신지녹도 전자인데 이는 필자가 해독해본 바에 의하면 천부경이 아니라 자식을 많이 낳게 해 달라는 일종의 기천문(祈天文)으로 필자 카페 ' 신지녹도 전자 천부경 해독' 에서 이미 해독해 놓은것이며 다음은 지금 중국 산동성 백수현에 있는 창성조적서 비문으로 이도 필자의 카페 ' 신지녹도전자 천부경 해독'에 해독한 글자들인데 이는 중국인들이 자기네 글자를 만든 창힐이 한자 만든 과정을 적은것으로 알고 자기네 국보로 알고 있으나 실은 창힐은 신지한데 6년간이나 글자 만드는 법을 배운자로 환숫(황웅)이 배달(培達-밝달) 나라 세우는 기틀을 만드는것을 보고 적은 일종의 견문록으로 이는 중국의 국보가 아니라 실로 우리의 귀중한 국보인것 이다,
( 또한 소문을 듣건데, 남해도 낭하리(郎河里) 의 계곡과 경박호(鏡珀湖) 선춘령(先春嶺)과 오소리(烏蘇里) 바깥의 암벽 사이에서 언젠가의 조각을 발견하였는데, 범자(梵字)도 아니고 전자(篆字)도 아니어서 사람들은 알수가 없는것 이라 했으니 이것이 신지씨가 만든 옛 글자가 아닌지 모르겠다.)
(대변설大辯說>>의 주에 말하기를 “남해현 낭하리의 계곡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이 있다. 그 글에 <한웅이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리다>라고 되어있다”고 했다. 또 가로대 “대시 大始에 옛것을 전함에 있어 다만 입으로 전해오는 이야기에만 의지한 지 오래이다. 나중에 형상을 그림으로 그렸고 또다시 그림이 변하여 문자가 되었다.)
* 진시황때 서불(徐示)이 불로초를 구하러 다닌 흔적이라는 서불제명각자(徐市題名刻字) 또는 "서불이 이곳을 지나가다"라는 의미의 서불과차문(徐市過此文)이라 불리어 왔다.
또 인터넷에 올라 있는 글을 보면
* ....이 신지 전자의 초기 모습이 바로 위 그림 맨 왼쪽의 낭하리 암각화다. 환단고기에 인용된 대변설의 주에 이르기를 “남해현 낭하리에 계곡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古刻)이 있다. 그 글에 환웅천황께서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린다고 했다”고 하였다. 그 개량된 형태가 1942년에 발행한 영변지에 실려 있다. 환단고기의 저자 계연수 선생이 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에서 천부경이 새겨진 옛 비석을 발견한 내용과 더불어 신지 전자(篆字)를 옮겨 놓은 것이다. 환단고기를 세상에 공개한 이유립 옹도 저서 대배달민족사에 평양 소재 법수교 고비(古碑)라고 밝히면서 신지 전자(篆字)를 소개해 놓았다. 그밖에 구한말 서예의 대가인 김규진이 저술한 서법진결과 백두용(白斗鏞) 편,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에도 신지 전자가 실려있다.
*또한 "최치원(崔致遠)이 일찍이 신지(神誌)가 새겨진 옛비석을 찾아 . . . 즉 낭하리(郎河里)의 암각(岩刻)이 그것(神誌)의 실제 흔적(痕迹)인 것이다." 등으로, 과거부터 여러 문헌에서 보이고 있다. (이하 생략)
* 이상 글들은 필자가 낭하리 고각을 해독해본 결과로는 과연 환단고기의 말은 진실이 된다.
또 이 그림 글자는 어쩌면 개천절에 천제를 지내던 기록일수도 있고 이 날을 잊지 말라는 하늘의 멧세지 나 달력일 지도 모른다.
따라서 아직도 위서 취급을 받는 환단고기의 기록이 위서가 아니라는 또하나의 입증도 된다.
그러나 서불이 자신의 행적을 알리기 위해 그림, 또는 글자를 써 놓았다거나 최치원이 와서 보고 천부경 81자로 번역했다는 말은 모두 속설이며 허구이다.
즉 이 그림하고 서불과는 관계가 없다. 즉 진시황때는 이미 대전(大篆) 소전(小篆) 등 한자가 있었기때문에 서불이 흔적을 남겼다면 전자로 남겼어야 한다.
고 또 최치원도 이 그림글자를 보고 신지녹도전자 천부경을 번역할 수 없다는 것은 신지녹도전자 천부경이나 이 낭하리 석각을 해독해 보면 안다.
이 그림, 글자가 매우 오래?다는것은 꼭 과학적 검정을 거치지 않더라도 그 그림, 글자 해독만으로도 맞는 말이다. 최소한 단군때나 그 이전 그림, 글자로 5~6 천년 이상은 될것이다.
그렇다면 당시는 철이 생산되기전 신석기나 청동기 때라 청동으로된 정 등 시원치 않았을 연장을 가지고 당시 누가 그 애를 써가며 이렇게 아무도 알아먹지 못할 그림을 그려 놓았을까?
글자던 그림이던 그리는것은 누가 보고 알아보라고 그리는것이다.
그렇다면 그간 우리 고고학계 사학계에서는 왜 아직 이 그림을 해독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이 그림이나 글자를 그저 신비하게 볼뿐이었고 또 그간 누가 해독하여 보려 했어도 이 그림을 해독할려면 우선 천부인으로 만들었을 수 밖에 없는 ㄱㄴㄷ...ㅎ 속의 뜻이나 신지녹도전자, 금문, 가림토 또는 수메르의 우르문자 등 해독하는 방법을 모두 알았어야 하기 때문인데 강단사학등에서는 그것을 연구해 보기는 커녕 아직 신지녹도전자나 가림토의 존재 부터 부정했기 때문이다.
이 그림 글자는 인류가 그림에서 글자를 만드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인류에게 아주 중요한 그림 글자이며 또한 인류 최초의 천문현상을 보고적은 환상적 달력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우리에게 국보는 물론 인류문화 발달사에 아주 귀중한 단서가 되므로 유네스코 등에서 세계인류문화 유산으로 지정해 두어야 한다는것이다.
지금까지 공개된 탁본이나 사진들은 모두 위아래가 뒤바뀐, 거꾸로 된것이다 환단고기를 번역하신 임승국 박사의 '한단고기 48 쪽에도 이 그림이 있는데 역시 거꾸로되 있으며 이 그림 설명을 서불제명각자라고 추정하고 있다.
우선 이런 서적등에 나타는 그림은 위 아래가 거꾸로 된것을 모르니 그대로 올린것이다.
이것을 우선 바로잡아 보자.
* 필자가 바로잡아본 그림
우측으로 부터 설명한다.
Y 자같은 것이 양쪽으로 붙어있는것은 일종의 지형이이며 또 천제를 지대던 제사터 라 해도 좋고 후세인들이 그 자리를 찾아가 천제를 지내라는 지도일수도 있다.
다음은 수레 같은것이 있는데 수레 앞에는 상징적인 바퀴까지 그려 놓았다. 그리고 그 수레에는 어떤 사람이 타고 있는데 이 사람은 그림의 비율로 보았을때 과장되게 큰 것으로 보아 높은 사람이다. 이것은 글자가 아니라 그냥 그림인데 이 그림은 위 대변설 주에서 말하듯이 환웅이 사냥을 나왔다는 것을 추상적으로 그렸을 수도 있고 환웅을 높히기 위해 올라 가는 그림이 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뒤에서 天 자 같은것이 수레를 밀고있는데 이 수레가 수평이 아니고 위로 올라간다는것은 이 수레 뒤의 나무는 정상적 수직으로 서 있는데 앞의 나무는 암벽에 붙은 나무라 약간 경사져 있다. 즉 뒤의 나무가 수직으로 선 것으로 볼때 이 수레는 올라가고 있다는것이다.
이 수레를 밀고 올라가는 天자는 금문으로 볼때 사람이다.
즉 초기금문에서 사람을 天자로 그린 예가 많았었는데 그 이유는 大자 처럼 네 활개를 편 사람은 항상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기 때문에 天자 같이 그렸다.
위 그림의 정확한 해독과 증거를 제시하기위해 금문과 갑골문을 비교하며 그 변하는 과정을 설명한 ' 甲骨文字形字典- 北京長征出版社 발행' 에 올려있는 중국 책자를 인용하여 설명하는데 이는 비단 그 책 뿐 아니라 중국의 금문을 설명한 책이 거의 그렇다.
* 天자. 금문 > 갑골문의 그림,
天 자 설명문 이지만 夫 자 같은 글자도 많고 아래에는 아예 사람 머리까지 그려 놓았는데 어떤 사람머리는 口 자 같다. 여기서 주의할것은 이 그림들은 금문에서 갑골문, 그리고 대전(大篆),소전(小篆) 으로 변하는 순서대로 정리해 놓은것이 아니다. 즉 우리 민족이 만든 초기 금문은 하늘 천부인 ㅇ 모양대로 맨아래 그림과 같이 사람은 머리인 ㅇ에 아래 大 를 쓰고 땅은 보통 땅 천부인대로 口를 쓰지만 지나족들은 머리가 ㅇ 이면 개성이 없는 멍청이라 하여 머리도 口 자를 썼다.
따러서 아래 글자중에 머리를 口 자로 그린것은 우리 조상이 만든 글자가 아니라 후세에 중국인들이 제멋대로 그린 그림이다.
* 생명 번식행위를 가장 신성한것으로 알던 우리 원시조상들은 하늘의 정기인 씨 를 여음인 땅에 전할수 있는 사내를 하늘보다 더 귀중하게 생각하였다. 이 사내는 늙은이나 아이들이 아니고 씨를 전할수 있는 젊은 사내이다. 이 사내를 우리말로 아비 라 했는데 지금 父라는 아버지는 이 아비에서 나온말이고 이 아버지와 남편을 분별하기 위하여 나중에 남편은 제아비, 즉 지 아비 라 했다.
이를 한자로는 夫 라 하였고 그래서 이 글자는 하늘 위를 뚫고 올라간 글자이다. 따라서 젊은사내, 즉 일 할 수 있는 사내를 싸울아비, 거칠아비, 중신아비, 심지어 허수아비라 했으며 지금도 農夫니 漁夫니 鑛夫니 한다.
이 아비는 아직 결혼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여자들과 같은집에 살지않았고 무리아들의 집 이라는 서자부(庶子부) 에 따로 모여 자기 부족과 여자들 집을 지켰다. 따라서 서자환웅(庶子桓雄) 이란 말은 아직 결혼제도가 없었으니 본처니, 첩이란 있을수 없다. 즉 환웅은 첩의 아들이 아니라 庶子部의 환웅이란 말이다.
그들은 씨놀음을 통하여 강인한 유전자만 후대에 전하게 했는데 그 씨놀음 이 이젠 씨름 이 되었다.(자세한 설명은 필자 졸저 '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 에...)
* 夫 자. 금문> 갑골문 그림 (역시 ' 甲骨文字형字典- 北京長征出版社 발행' 을 인용)
이 글자는 금문 갑골문 뿐 아니라 지금 우리도 쓰는 夫자이다. 역시 하늘을 뚫고 올라갔다.
그런데 이 지아비를 그리다 보니 아래 그림처럼 더 노골적으로 생식기까지 붙은 太자도 썼는데 생식기가 너무 길게 그린것은 ㅎㅎ. 남근을 그만큼 중요시 했다는 말이다.
* 太자. 금문> 갑골문 그림 (역시 ' 甲骨文字형字典- 北京長征出版社 발행' 을 인용)
그러나 사람중에는 꼭 사내만 있는것이 아니다. 사내가 씨라 한다면 그 씨를 받아 키울수 있는 땅, 즉 여자도 필요하니 여자를 포함한 사람을 표시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붙이지 안은 大 자를 쓰기도 했다. 大 자가 지금 크다는 뜻으로 쓰인것은 하늘아래 땅위에 사람의 존재가 가장 위대하기 때문에 크다는 뜻만 따서 큰大자가 된것이다.
* 大자. 금문> 갑골문 그림 (역시 ' 甲骨文字형字典- 北京長征出版社 발행' 을 인용)
그러나 어차피 사람은 다른 동물과 달리 두 다리로 서서 다니니 복잡하게 그릴 필요가 없이 사람 특징만 나타냈고 이 아래 그림들이 다리 두개로 변하여 人 자 가 ?는데 이 그림에서도 하늘을 이고 있는 사람이 있다.
* 人 자. 금문 > 갑골문 그림 (역시 ' 甲骨文字형字典- 北京長征出版社 발행' 을 인용)
또 다음 工 자에서 보듯이 하늘 아래에 서서 무엇인가 工作하는것이 사람이니 사람을 'ㅣ' 으로 쓴 경우도 많은데 이것은 훈민정음 제자해에서 天地人 三才중 人을 ㅣ 으로 쓴것과 같다. 그리고 이 T 자아래 口 은 천부인, 天地人 즉 ㅇ ㅁ △으로 만든 ㄱㄴㄷㄹ ㅁ...ㅎ 속에서 ㅁ 은 원래 땅을 의미 하니 땅을 口 로 그린것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그냥 ㅡ 자나, 또는 아주많이 펴진 ㄴ 자로 표시 하기도 한다.
아래 그림에서 주의할것은 땅을 뜻하는 口 위에 사람을 'ㅣ' 으로 표시한것은 우리와 같이 천부인 천부경 이 사상이 없는 다른 민족은 만들수 없는 글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아래 그림에서 모 자 같이 써진것은 口인 땅 아래 사람이 서 있다는 말이니 이는 중국인이 만든 글자이고 이 중국인들은 천부인 天地人원방각 ㅇ ㅁ △이 무엇인지 모르니 그래서 위 天 자 풀이에서 보듯이 중국인들은 사람의 머리까지 口으로 그린것에 유의 하면서 금문이란 우리 조상이 만들었다는것을 알아야 할것이다. 중국인들은 왜 사람의 머리가 口 가 되는지는 다음에서 더 설명한다.
* 工 자. 금문 > 갑골문 그림 (역시 ' 甲骨文字형字典- 北京長征出版社 발행' 을 인용)
이상으로 볼때 금문과 갑골문은 큰 차이가 나는것이 아니고 또 어떤 통일된 금문이 갑골문으로 변해간것도 아니며, 금문이란 그져 우리 선조들이 부족한 말이나 글자를 보충하기 위하여 그림으로 그렸던것인데 그림이 통일될리가 없었으니 뜻이 같은 그림이 위 그림에서 보듯 수십가지나 되고 특히 우리말 '업'이 한자로는 福 인데 그 그림글자는 무려 수 백개가 된다.
어떤 분들은 어떤 유물이나 과학적 근거도 전혀없는 부도지 등만을 신봉하여 우리 민족이 수만년전 부터 문화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믿는데 문화생활을 하려면 우선 연장을 만들 쇠붙이가 있어야 하는데 신석기에서 청동기가 나온것은 불과 5-6 천년전이라는것은 이미 과학적 검증이나 당시 글자로 증명되었고 또 문화생활을 하려면 말과 글자가 풍부했어야 하는데 위 그림이 엉터리 같은 글자로 변하는것도 역시 5-6 천년 전이니 허무 맹낭한 전설만 믿을게 아니라 보다 냉정하게 논리적으로 생각해 봐야 한다. 즉 이 그림 > 금문> 갑골문, 또 가림토등은 생긴지가 길게 잡아야 5-6천년전 이라는것은 어떤 근거를 봐도 알수 있다.
이 초기 금문이 우리 조상이 만들었다는것은 위 工 자 그림 口 에서도 나타나는등 그 근거가 너무 많고 또 아래 설명에서도 나타난다.
이렇게 우리 조상들이 그린 금문, 은허갑골문을 지나족이 가져다가 진시황때 대전(大篆), 소전(小篆)을 거쳐 자기네 말로 발전 시켰고 우리는 우리 가림토는 발전시키지 못한채 그것을 삼국초에나 역수입해서 쓰는것이며 그 한자만 쓰는 사람들이 우리나라 역사를 관장했던 선비들이다.
한자가 중국 글자라면 펄펄 뛰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 객설 같지만 몇 마디 한다. 훈민정음을 만드신 세종도 " 國之語音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故愚民有所欲言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易習使於日用矣" 즉 " 나랏 말쌈이 듕귁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매 어린 백성이 말하고자 하나 종래 그 뜻을 얻지 못하는자가 많으므로 내 이를 민망히 여겨 28자를 새로 짓고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익히여 날마다 쓰게 하려 한다 " 이다. 그렇다면 한자가 만약 우리 글자라면 왜 세종은 새로히 훈민정음을 만들었을까? 또 한문과 우리말은 그 어순이 다르다, 즉 異乎中國을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 다르다 중국과.." 이다. 그러나 우리 말로는 " 중국과 달라서" 이다. 또 一二三四...를 중국인들은 "니얼산스" 하면 되는데 우리는 한일,두이 석삼, 넉사 하고 일단 번역해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한자가 우리 글자라면 왜 우리가 한자를 번역해야 안단말인가? 이 이외에도 한자가 우리 글자가 아니라는 증거는 너무 많다. 그러므로 한자의 원조인 금문은 분명 우리 선조들이 우리 말과 글자가 부족하여 그림으로 보충 하던것을 중국인들이 가져다 자기네 말에 맞추어 주어 발달 시켰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역 수입해 쓰면서 한자가 우리 글자라 하는것은 마치 미국 자동차 박람회에 가서 달구지의 원조는 우리이니 자동차도 우리가 먼저 만들었다는것과 같다.
다시 본론으로와 이상으로 위 그림에 나타나는 天,大, 太, 夫, 人 ㅣ 은 모두 사람을 기본으로 하는 같은 글자이다.
다시 다음 그림
수레를 밀고있는 天자 같은 사람은 큰 사람에 비해 아주 작은 사람이니 하인이나 일반 백성을 뜻한다.
그리고 이 작은 사람이 수레를 밀고 있다는것은 사냥을 하러 언덕길을 올라가는것이라고 생각할수도 있겠으나 한편 그 천제를 자내던곳이 약간 경사진곳 이라는것을 나타내는것 이라 할 수도 있도 또 고각, 즉 바위에 새겨진 옛 그림은 그 특징만 나타내니 어딘가 올라간다는것은 하늘에 제를 올리고 있는것, 또는 그 부근에 어떤 바위 형상이 그렇게 생겼을 것이니 이것이 환웅이 사냥을 나온것 이라고 생각해 봐도된다.
다음 그 큰 사람 앞, 뒤 로는 나무가 있는데 뒤의 나무는 수직으로 서 있는 정상적 나무로 위 수레가 수평이 아니라는 근거이며 앞의 나무는 벼랑 즉 암벽에 붙은 나무이니 약간 경사가 져 있다.
이 그림도 그 천제를 지내던 위치를 표현했다고 봐도 된다.
그런데 이 나무들은 가지가 꼭 두개씩 으로 자루가 달린 出 자 모양으로 그렸다. 이는 보통 나무를 그리다 보니 그렇게 ?다고 할지도 모르나 앞 뒤 의 모든 나무가지, 또는 아래 환웅을 뜻하는 수메르 우르문자 에서 나무가지가 하나 나, 셋 이 아니고 꼭 두개 인것으로 보아 이는 환숫(환웅)을 상징하는것이다. 즉 수레에 탄 큰 사람은 환웅이란 말을 상징적으로 말 하는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환웅을 뜻하는 나무를 신지녹도전자 천부경 하나의 하 에서는 아래 그림과 같이 자루가 달린 山 자 두개로 표시했다.
* 아래는 신지녹도전자 천부경 하나의 하
위 하 자는 나무가지가 하나씩하여 결국 두개 이지만 얼마후 위 낭하리 그림이나 또 고대 금문, 그리고 우리와 동족인 쐐기문자의 어머니 수메르 우르 문자에서는 위 가지가 한 나무에 두개인 자루가 달린 出자 모양으로 단축되는데 그 뜻은 같다.
* 수메르 우르문자의 나무들 (EBS 방영에서 촬영한것)
역시 가지가 두개씩인데 이도 환웅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그림이다.
그러면 이 자루달린 出 자가 왜 환웅을 뜻 하는가?
위 낭하리 그림이 환웅과 연관이 있다는 증거이며 초기 금문이 우리 선조들이 만들었다는 증거가 된다.
즉 환웅은 우리말로 환숫, 즉 환한부족의 숫컷이다. 숫컷이란 지금 우리 상식으로는 동물에게나 붙이는 매우 비천한것이지만 이 숫에서 슷응> 스승, 슷님 > 스님이 나왔으니 당시는 매우 존귀한 존칭이다.
이 숫은 하늘로 부터 정기를 받아 씨를 불알(불= 붉 = 밝. 알)에 저장했다가 땅인 여음에게 뿌려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데 그 상징적 표현이 바로 나무로, 나무는 태양의 빛을 받아 땅에 전한다.
환숫은 사람을 대표하므로 天地人 천부인 원방각 (圓方角-ㅇ ㅁ △ ) 중에 사람 천부인 △ 으로 무속으로는 삼지창이 된다.
이 △ 으로 만들어진 ㅅ 은 일단 서는뜻이 있으니 서는 동물인 사람 이되지만 다시 ㅅ 이 붙어 사람이 섯다 하면 ㅅ 하나가 더 들어가 섯 이 되어 또 서는것? 이 붙은 사람중에 사내가 되고 이 섯이접미사 이가 붙어 결국 셋 이된다. 그래서 셋을 최치원 81자 에서 말 하듯 人一三 이다. 즉 人一은 사람의 첫째, 핵심이란 말이고 三은 셋 이니 사내를 세운다는 말이다,
따라서 신지녹도전자 천부경에서 셋은 다음과 같이 삼지창이 위 아래로 두개가 붙는데 이는 아래 甲金蒙隸大字典 -四川辭書出版社 刊 의 맨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 와 같다.
* 木자 금문의 여러 형태. 甲金蒙隸大字典 -四川辭書出版社 刊
木자의 첫 글자와 끝 글자를 유의해보시라.
그리고 이 아래 거꾸로된 삼지창은 우리 민족만이 썼던 솟의 다리가 되고 삼족오의 다리가 세개가 되는 근거가 된다.
그러니까 환숫의 상징은 삼지창 두개가 되는데 나무 등을 그릴때는 신지녹도전자 하나의 하 에 있드시 자루가 달린 山山 이었으나 그 글자가 금방 간편화 되어 금문이나 수메르 우르문자에서는 자루가 달린 出 자로 변한것이다.
우리는 이 환숫을 상징하는 나무를 곰네(웅녀)가 아이배기를 빌었던 신단수(神壇樹)라 하였고 솟터(蘇塗)에 모셔놓고 제를 올렸으며 이것이 전래되어 지금 바이칼호 주변 부라이트족,울치족, 나아이족, 그리고 몽골족 등의 오보가 되고 이 오보 란 옵 인데 우리말에 검둥이 감둥이가 같은말이듯 모음이 혼동?으니 옵은 압 과 같은말이며 압 이란 아비 이니 결국 그 말의 뿌리는 우리 말이며 이 환웅을 상징하는 숫은 우리에게는 서낭나무가 되었다.
그리고 이 오보나 서낭나무 둥치에 둘른 오색천은 환숫의 신성한 음모를 뜻하고 나무가지 위 씨앗 자루는 고환을 뜻한다.(신지녹도전자 천부경 해독과 수메르우르문자, 꽤기문자 해독 참조)
그러니까 위 낭하리 出자 나무 그림은 무엇으로 보나 분명 환웅을 상징하는것이며 또 이 그림으로 위 신지녹도전자가 금문, 수메르 우르문자로 변하는 과정을 엿볼수가 있다. 즉 인류 최초의 문자는 신지녹도전자이고 거기서 금문이나 가림토가 나왔기 때문이다.
다음 그 큰 사람 앞의 나무는 그 방향이 약간 옆으로 기우려져 있다. 이는 암벽에 붙어있는 나무라 했는데 역시 자루가 달린 出자이다.
* 다음 아래그림은 암벽이나 그 암벽에 들어가는 門 까지 그린것 같은데 이 그림도 아주 중요하니 잘 관찰해 보자.
이 그림은 그냥 암벽뿐 아니라 암벽과 바닷물 그림이라 잔영이 보인다. 그런데 그 잔영에는 초사흘 달과 같은 반달과 해의 그림, 아니면 큰 별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우리 눈으로 가장 크게 보이는 별은 샛별인 금성이다.
* 샛별인 초사흘달은 한편 초승달이라 하는데 달 중에 이 초사흘달이 새색씨 눈섭처럼 가장 예뿌다 한다.
아래사진은 지구인만이 볼 수 있다는 아름다운 초사흘 달이다. 흔히들 보름달이 더 아름답다지만 보름달은 다음날밤 부터는 죽는 달이고 이 초사흘달은 앞으로 살아나는 달이다.
야후에 올라있는 글, 그림을 올린다.
작자 : 허세욱(許世旭). 노고단에서 다시 차가 있는 성삼재로 돌아왔을 때의 시각이 오후 6시였다. 서남쪽 하늘에 초승달이 떴다.
이 달이 초승달인지 아닌지는 필자는 모른다. 그러나 사진이 황금비율이 맞는 아름다운것 등으로 보아 유명 사진작가가 찍은것이고 저녁 6 시경이라 했으니 초승달이긴 한 모양인데 초승달은 우측의 배가 나와야 하므로 필자가 임의로 사진을 뒤집은 것이다.
* 초승달 이미지 ... HORNED MOON. IMAGE. 공주성의 초승달. 태극기와 초승달. 서울 ...
금성과 초승달의 랑데뷰
그러니까 위 바다에 비친 그림은 초사흘달과 금성일 수가 있다.
그러나 현지인들의 말에 의하면 신비하게도 이곳에서만은 어떤때에는 달과 해의 잔영이 동시에 다 바닷물에 비치는 곳이라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초사흘 달과 해가 그렇게 만나는 시기일수도 있다.
한편 초사흘 달은 매월 나타날수 있으나 그 초사흘 달이 금성이나 해와 그렇게 가깝게 만나서 물그림자가 비치는 날은 각자 궤도, 공전주기가 다르니 흔치 않을것이다. 어쩌면 일년에 한번만 그런 현상이 일어 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일년에 한번 만나는 날이 달력이 아예 없었거나 있다해도 시원치 않았을 당시 이런 그림으로 표시했는지도 모른다.
환웅당시에 달력이 없었다고 하면 또 환단고기를 인용하여 반박할지 모르니 이를 미리 말 하다.
환단고기 마한세가 상 에는 " 옛날에 환웅께서는...달력을 365일 5시간 48분 46초로 일년을 만드시고.... 라는 기록이 있다. (三韓管境本記(馬韓世家上) 에 昔者桓雄....曆以三百六十五日五時四十八分四十六秒爲一年也)
그러나 이것은 후세인이 너무 조상을 받들다 보니 이런 가필을 붙였다고 생각된다. 아니 그때 벌써 분과 초가 있었다니... 이는 이조중기 이맥의 가필도 아니다. 시계가 우리에게 들어온 후의 계연수나 이유립의 가필로 보인다. 이런 가필때문에 아직도 환단고기가 위서로 취급되는것이다.
우리는 하루의 시간을 子丑寅卯...등 12 시간으로 하였으니 지금 2 시간이 전에는 1 시간이었고 이것도 시계가 없던시절 어림 짐작이었으며 또 특수층에서나 쓰는 시간이었지 일반백성은 새벽, 아침, 점심, 저녁, 밤 이라 했고 그것도 정확한 시간이 아니니 아침나절 저녁나절...하는 나절 이란 말을 썼다.
그러니까 겨우 신석기 문명이 끝나고 청동기 문명이 시작된 환웅, 단군때 벌써 일년이 365일 5시간 48분 46초가 있었다는것은 그때 그분들이 그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우선 위 그림이나 금문에서 보드시 그런글자를 가지고는 달력을 만들수는 없다는것이며 또 그때 사람들 한테는 그런 분 초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환웅 단군때는 달력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시원치 않았을 것이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시와 또 천체 돌아가는것을 보고 계절과 날짜를 짐작했다고 보야한다
그러므로 위 초사흘달과 금성, 또는 해가 만난다는 환상적 그림은 아마 원시 달력 을 그렇게 표시했을 것이고 이것은 상고시대 일식현상의 기록을 슈퍼컴퓨터로 시물레이션하여 환단고기가 위서가 아니라는것을 입증시킨 서울대 박창범 교수같은 천문학자가 현지를 기준으로 증명해 보거나 아니면 일년내내 현지에서 관측해 봐야 하겠지만 우선 필자의 짐작으로는 음력 10 월 상달 초 사흣날이 될것이다.
그럼 이 날이 무슨날인가?
바로 앗선(첫조선)을 세운날이다, 즉 하늘이 열린 개천절이다.
다음 바위 우측 T 자 같은것과 또 그 옆 아주 많이 펴진 ㄴ 자 같이 휜 'ㅡ' , 그리고 큰 점 이 있는데 여기서 T 자의 뚜껑인 위 'ㅡ' 은 하늘이며 T 자를 세운 'ㅣ' 은 工 자에서 보듯 사람이 서 있는것이며 다음 큰 점은 시각을 나타내기 위한 지는 해 이거나, 새로솟은 샛별일 것이다.
해는 어떤 금문에서는 ㅇ 으로도 그렸으나 그냥 큰 점으로 표시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헷갈리게 하는것은 바로 그 T 자 옆 구름같은 아주 많이 펴진 ㄴ과 같은 'ㅡ' 그림이다.
이는 T 자 뚜껑이 하늘이니 그 옆에 있는것은 하늘의 구름이라고 할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신지녹도전자 천부경의 하나 둘 셋 ...열 중 '하나' 의 나 에 나타나는 누리를 뜻하는 아주 많이 펴진 ㄴ 과 같다.
* 아래 그림은 신지녹도전자천부경 하나 에서 나 에 해당하는 그림으로 아주 많이 펴진 ㄴ 이라는, 누리(땅) 위에 햇살이 비치는 그림이다. 우리 선조는 빗살무니 토기에서 보듯이 햇살은 꼭 빗금이다.
그리고 땅은 어떤 금문에서는 천부인 원방각ㅇ ㅁ △ 중 땅인 ㅁ 으로도 나타나고 그냥 ' ㅡ' 으로 나타나지만 신지독도전자나,초기 가림토에서는 위 그림과 같이 아주 많이 펴진 ㄴ 와 같이 나타나고 또 어떤 금문에서의 王 자는 위 'ㅡ' 은 하늘, 다음 十 자는 大자나 아예 생식기 까자 붙었던 太 자 이었고 그 아래 땅 이라는 'ㅡ'도 평지가 아니라 가운데가 나왔거나 위 그림같이 아주 많이 펴진 ㄴ 형태의 땅 으로 나타난다.
* 아래 그림을 사마천의 사오본기 에서는 전욱(?頊) 이라 했는데 ?자는 오로지 란 뜻이고 頊는 멍청한 사람이라는 뜻이니 이는 멍청한 사람을 뜻하는 글자라 하였다.
즉 중국 학자들은 위 둥근것은 모가 져있지 않으므로, 즉 사람은 개성이 있어야 하는데 모가져 있지 않으므로 멍청한것이라 하여 멍청이의 아들 왕이...라고 해독하는데 그 근거는 두번째 글자를 뛰는아이 즉 子 로 보고, 다음은 王자 같이생겼으니 王 이라 하는데 그 글자가 왜 임금인 王 이 되는지는 모른다.
* 가(心 변에 各)齋集古綠 上下 대련국풍출판사 에서 인용.
지금 미 부리티지 박물관 소장 코뿔소 술 두르미 안쪽에 새겨진 금문중 첫번째 글자.
또 다른 중국학자는 위 둥근것을 연못으로 보아 연못의 아들 왕이...라고 해독하기도 하는데 근대 금문해독의 권위자 라는 낙빈기 조차 이것을 구슬로 보아 구슬의 아들 왕이...라고 해독하고 있으니 말이되질 않는다.
그러나 필자는 우리 말, 우리 글자에서는 못쓸놈, 몹쓸것등 모가져 걸림이 있는것은 가림토, 훈민정음, 한글에서도 ㅁ 을 쓴다. 즉 땅인 물질은 항상 걸림이 있으니 모가진 땅 천부인 ㅁ 을 써서 말과 글자가 만들어진것이고, 우리의 상식은 하늘 천부인 ㅇ 처럼 걸림이 없고 원만해야 한다는것이기 때문에 맨위 둥근것을 멍청이로 본다면 이는 크게 잘못된 생각이고 다음 子가 같은 글자는 아이라고 하기에는 머리가 너무크고 또 하늘을 나는듯한 그림이니 아직 子가 되기전 하늘의 정령, 정기라고 보는것이 타당할 것이며 마지막 王 자는 중국인들의 해독과 같으나 그것이 왜 王자로 나타나는지 까지 설명한다.
王 자는 하늘, 즉'ㅡ' 아래 가장큰 것이 사람이니 'ㅡ' 아래大 를 쓴것이고 마지막 그 사람은 평지가 아닌 가운데가 솟았거나 또 많이 펴진 ㄴ 과 같은 땅 위에 서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늘과 땅 사이의 사람이고 사람의 대표가 바로 임금인데 우리말로 임금은 신라 임금 이사금 에서 말하듯 잇큼 > 임금 이며 이를 한자로 쓸수 없으니 이사금(尼師今)이라 쓴것이다.
이를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이빨금이라 했지만 잇 이란 잇본(日本)에서 보듯이 해 이며 금은 큼 이다. 따라서 임금이란 해와 같이 큰 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필자의 위 코뿔소 두르미 속 명문의 해독은 하늘,해의 정기를 받은 임금 이라고 해독한다.
이렇게 금문은 우리 상식으로 만들었기때문에 중국인들의 말과 상식으로는 해독 할 수 없다는것이며 그래서 지금까지 고조선 유적지에서 만여점이나 출토된 금문을 중국인들은 아직까지 천점도 해독하지 못했고 그 해독했다는것도 위에서 보듯 엉터리지만 우리가 우리 말과 우리 상식으로 풀면 쉽게 풀린다는것이며 따라서 금문이란 우리가 글자와 말이 부족했을 당시 이를 보충하려고 그렸던 그림을 중국인들이 가져다가 제멋대로 해독하고 덧붙여 글자를 만들고 자기네 말로발전시켰다는 것이다.
* 이상 신지녹도전자 하나의 나 나, 위 王자의 땅 부분 그림에서 보듯이 T 자 옆 구름같은 그림은 누리(땅) 를 표시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 많이 펴진 ㄴ 의 뜻은 누워있다는 뜻으로 이 그림은 나중에 가림토에서는 진짜 누리 라는 ㄴ 으로 나타나며 이는 훈민정음이나 한글에서도 같은데 그래서 ㄴ 으로 시작되는 순수한 우리말은 모두 누워있는것 뿐이다.(필자 책 참조)
그러니까 이 그림은 하늘 땅, 그리고 사람이며 그 옆 점은 아마 지는 해나 아니면 초저녁의 금성일수 있으니 시간을 나타내는것 이라 봐야 하는데 하여간 그 점이 있다는 것은 천지인으로 볼때는 군더더기 이다.
그런데 이 천지인을 한꺼번에 나타내는 중요한 글자 뭉치가 왜 작게 표현된 것인가?
이는 여기에 그려진 그림 전체는 天地人을 뜻하는 부호이며 싸인이며 마크이기 때문이다.
* 이상으로 보았을때 이 그림, 글자는 절대 할일없는 자가 그린 무의미한 그림이 아니다. 먼저 말 했드시 신석기에서 겨우 청동기가 되어 연장도 별똥별 조각이나 청동기 정 등 시원치 않았을 원시, 누가 누구 보라고 이렇게 정성들여 석각을 했단 말인가? 이는 분명 환웅의 흔적이나 또는 현지에 있을 환웅의 상징적 바위를 보고 새겨놓은 것으로 봐야 한다.
또한 이곳은 당시로 보아서 땅끝이 되기 때문에 천하를 순시하시던 환웅께서 직접 여기에서 하늘과 바다를 포함한 땅에 천제를 지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 그 분은 환웅이 아니라 환웅을 바뜨는 단군일수도 있으며 단군의 신하 삼시랑(三侍郞), 또는 전국에 단군의 도를 이어받아 지방 백성들의 일을 관장하던 당골레 였을 수도 있지만 누가 지냈건 주체적 인물은 환웅이다.
하여간 이 그림은 상고시대 누군가가 개천절날 천제를 지내고 또 후세인에게 그날을 잊지말고 지내라고 여기에 그 지형과 또 달력으로 날짜까지 표시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기록이 '환단고기' 에 인용된 " 환웅이 여기에 사냥을 나왔다가 삼신제를 지냈다" 는 말로 기록?을지을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아직까지 환단고기가 비록 가필은 많을만정 위서만은 아니라는 증거 31 개를 정리해 놓았는데 이 그림은 환단고기가 위서가 아니라는 또하나의 입증도 된다.
한편 이 그림은 서불이 불노초를 구하러 다니다가 흔적을 남겼다는 말은 배제해야 한다. 우선 진시황때는 이미 소전(小篆) 대전(大篆) 이라는 지금 한자의 전신이 있었고 이는 위 낭하리 석각본의 신지녹도전자, 초기 가림토, 금문 보다 최소한 2 천년은 뒤진것이며 또 이 그림에는 십장생에 나오는 불노초(영지버섯) 나 불노초의 상징적 그림이 없는것으로 보아 서불이 불노초를 구하러 다닌 기록이 아니라는것이다.
고각의 그림해독에서 주의할것은 위에서 보았드시 그 요점만 그리는 법인데 이 그림에는 하늘과 바다 암벽등 땅과 그 땅의 나무, 그리고 사람등 天地人 삼극만 있을뿐 불노초는 없다. 즉 서불의 상징은 바로 불노초 인데 그 불노초가 없다.
서불이 불노초를 구하러 다닌 흔적은 해금강에 있으니 가까운 여기다가 또 그려 놓을 이유도 없다.
결론은 이 그림 글자에서 신지녹도전자, 금문, 수메르 우르문자, 가림토가 혼용된 天地人을 뜻하니 이 낭하리 석각은 세계 역사상 그림이 글자로 변하는 과정을 한꺼번에 말하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고 이는 우리의 국보인 동시 인류 문화 유산의 하나가 되니 유네스코에 등록할 필요가 있는것이다,
또 꿈같은 기대인지는 모르나 우리나라 진도등지에서만 나타나는 모세의 기적처럼 초사흘 달이 금성과 만나 물그림자에 비치는 날, 이런 환상적인 하늘의 신비가 바로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이고 달력이라면 우리 조상들의 천문관측 수준은 더 말해 무엇하랴?
이 낭하리 고각해독에 더 확실한 실증을 찾기 위해 필자는 2006.11.23 일 그러니까 개천절 전날 이 낭하리에 가서 양 이틀간 현지 탐사해 본 결과도 이와 같다. 금산 낭하리 고각 탐사기를 보시면 더 확실히 알것이다.
2.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 낭하리 고각(古刻)해독과 현지 탐사 정리
(1 번에서 계속. 이 글은 1 번 낭하리 고각을 해독해 보고 그 실증을 위하여 현지 답사를 해 본 결과로 앞의 해독문을 실증하는것이다. 필자는 이 글을 정리하면서 객관적 입장으로 부정해 보려 했으나 필자는 부정 할래야 부정할 수 가 없다. 이 글을 읽어 보시는 독자님들의 반론을 바란다.)
2.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 낭하리 고각(古刻)해독과 현지 탐사 정리
이 필자가 찍은 이 고각(古刻)사진이나 전해오는 그림, 또는 인테넷 사진은 거꾸로 된 것이고 그 거꾸로 된 이유가 있었다.
필자가 신지녹도문자, 수메르 우르문자, 초기 가림토, 원시 한자인 금문 등을 해독하여 독자님께 전체 메일을 보내는데 독자님이 낭하리 고각(古刻)의 해독을 의뢰 했다. 필자는 임승국님이 번역 주해한 한단고기에도 그 그림이 실려있고 또 여러 문헌에도 실려있던 그 그림을 한번 보고는 어떤자의 낙서인줄 알고 그냥 지나처 버린 일이 있는데 독자님의 질문을 받고 다시 검토해 보니 이 낭하리 고각 그림은 꺼꾸로 뒤집혀 있어 그간 해독이 되지 않았음을 알고 우선 바로 잡아 보니 대략 그 뜻을 짐작할 수 있어서 필자카페 '신지녹도전자 천부경 해독' 114 번에 올린바 있었는데 이는 그림이 원시글자인 신지녹도전자, 초기 가림토, 또는 금문이 혼재되 있어 인류가 글자를 만드는 시초가 되므로 이는 우리 국보뿐 아리라 세계 인류 문화 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록하고 길이 보전해야된 귀중한 문화 유산이라 했다.
더구나 이 그 고각 그림, 글자는 필자의 기대 일지 모르나 잘 분석해 보면 이 그림은 신비하게도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 필자의 해독만으로는 그 고각 그림이 왜 환웅을 말하는지 확증이 부족함으로 현지 답사를 하여 더 증거를 ?고자 2006.11.23 일 음력 개전철 전날 현지를 방문 하고 다음날 까지 현지를 조사 했었다.
그 결과 그간 환단고기에도 써 있드시 이 고각의 흔적은 확실히 환웅을 모델로 그려진 것이며 환단고기에 전해지는 전설이 전혀 허무 맹낭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증거들이 너무 많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 낭하리 고각은 우리 학계에서는 그간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면 중국 일본학자들이 몰려 와 탁본이나 사진을 찍어 간다는 것인데 만약 우리 문화 유산을 우리가 해독을 하지 못하고 동북공정을 하려는 중국인, 또는 우리 역사를 말살 하려는 일본 학자가 먼저 해독하여 발표 하고 이를 정설화 한다면 이는 우리 한국인의 망신이고 또는 다시한번 우리 단군실화가 신화로 추락하게 될지도 모르니 다급한 생각이 들어 필자의 기대일지도 모르는 초승달과 샛별(금성)이 만나는 "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 만큼은 아직 실증이 되니 않은채 이 글을 정리하고 여러 독자님께 알린다.
( 또한 소문을 듣건데, 남해도 낭하리(郎河里) 의 계곡과 경박호(鏡珀湖) 선춘령(先春嶺)과 오소리(烏蘇里) 바깥의 암벽 사이에서 언젠가의 조각을 발견하였는데, 범자(梵字)도 아니고 전자(篆字)도 아니어서 사람들은 알수가 없는것 이라 했으니 이것이 신지씨가 만든 옛 글자가 아닌지 모르겠다.)
(대변설大辯說>>의 주에 말하기를 “남해현 낭하리의 계곡의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이 있다. 그 글에 <한웅이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리다>라고 있다”고 했다. 또 가로대 “대시 大始에 옛것을 전함에 있어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에만 의지한 지 오래이다. 나중에 형상을 그림으로 그렸고 또다시 그림이 변하여 문자가 되었다.)
* 진시황때 서불(徐示)이 불로초를 구하러 다닌 흔적이라는 서불제명각자(徐市題名刻字) 또는 "서불이 이곳을 지나가다"라는 의미의 서불과차문(徐市過此文)이라 불리어 왔다.
또 인터넷에 올라 있는 글을 보면
* ....이 신지 전자의 초기 모습이 바로 위 그림 맨 왼쪽의 낭하리 암각화다. 환단고기에 인용된 대변설의 주에 이르기를 “남해현 낭하리에 계곡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古刻)이 있다. 그 글에 환웅천황께서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린다고 했다”고 하였다. 그 개량된 형태가 1942년에 발행한 영변지에 실려 있다. 환단고기의 저자 계연수 선생이 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에서 천부경이 새겨진 옛 비석을 발견한 내용과 더불어 신지 전자(篆字)를 옮겨 놓은 것이다. 환단고기를 세상에 공개한 이유립 옹도 저서 대배달민족사에 평양 소재 법수교 고비(古碑)라고 밝히면서 신지 전자(篆字)를 소개해 놓았다. 그밖에 구한말 서예의 대가인 김규진이 저술한 서법진결과 백두용(白斗鏞) 편,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에도 신지 전자가 실려있다.
*또한 "최치원(崔致遠)이 일찍이 신지(神誌)가 새겨진 옛비석을 찾아 . . . 즉 낭하리(郎河里)의 암각(岩刻)이 그것(神誌)의 실제 흔적(痕迹)인 것이다." 등으로, 과거부터 여러 문헌에서 보이고 있다. (이하 생략)
3. 지명이 말해주는 증거.
위 환단고기 내용만으로 낭하리 고각이 환웅과 관련이 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그러면 그 지명에서 혹 환웅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까? 필자는 낭하리 고각을 탐사하고 돌아와 다음 일요일 혼자 등산을 해 가며 더 곰곰히 행각해 봤다.
지금 그 동네 이름은 남해군 양아리(南海郡 良阿里) 양이 마을 이라 한다. 그러나 환단고기 기록에는 남해현 낭하리(南海縣 郎河里)라 한다. 그렇다면 낭하리가 양아리로 된것은 선인들이 왜? 낭하리 라고 했는지 그 뜻을 몰라가지고는 한자로 보나 어음 으로 보나 그렇게 부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쓰는 한자가 정립된것은 삼국 초 이니 그 전 우리 말로는 뭐라고 했을까?
지금 전국에 걸쳐 있고 우리가 맥도 모르고 부르는 우리 행정 지명과 촌노들이 말하는 우리 지명을 비교해 보자. 몇가지 예를 들면 지금 우리 지명 중에 大田 이 있는데 과연 우리 선조들이 대전 이라고 했을까? 이는 큰 밭 이란 뜻의 한밭 이 한자로 기록하다 보니 大田이 된것이고 작은고개 라는 애오개가 이제 아현동 이 ?으며 전에 말한 필자의 고향 틀무시는 지금 기지시리(機池市里) 인데 그 이유는 틀무시는 애초 틀못이던것이 틀은 베틀機자를 쓰고 못 은 못 지池를 쓴것이며 市는 틀못에우리가 그 즐겨 붙이는 약방의감초격 접미사 이, 즉 갑순이 갑돌이 하는 이 가 붙어 틀못이> 틀무시 가 되고 그러다 보니 里에 불과한곳에 市 가 붙었으며 이 순수한 우리 지명을 한자로 쓰자니 機池市里 가 되었다 했다.
그렇다면 낭하리(郎河里)도 한자가 들어 오기전 분명 우리 말이 있었을 것이다. 뭐라고 했을까? 필자는 걸으며 생각 하다가 깜짝 놀랐다. 그 전 우리말로는 틀림없이 '앵무리' 였을 것이다.
왜 앵무리 인가? 한자로 기록되는 郎 은 바로 삼시랑(三侍郞)을 말 한다. 가림토를 창제한 사람도 삼낭(三郞) 을보륵이고 ‘고려팔관잡기에 또한 말하되 삼랑(三郞)은 배달의 신하이다. 씨를 뿌리고 재물을 관리하는자를 업(業)이라하고 교화와 복에대한 위엄을 주관하는자를 랑(郞) 이라하고 무리를 지어 공 이름을 주관 하는자를 백(伯)이라 하니 즉 옛날 하느님 시대에 발달된 풍습이다.’ (高麗八觀雜記亦曰三郞倍達臣也主稼種財理者爲業主敎化威福者爲郞主聚衆願功者爲伯卽古發神道也)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郎은 분명 삼시랑을 말하고 그 이외도 우리 사서에서 삼시랑은 그냥 간단하게 郎 이라 한 기록이 너무 많다. 그렇다면 郎, 즉 삼시랑은 환웅 단군등 삼신을 받드는 직책이고 또 지금 전라, 충청지방의 할머니 들이 자녀를 10 여명 이나 낳았고 누가 " 할아버지와 금슬이 좋아 자녀를 많이 두었느냐?"고 물으면 " 금슬은 무슨 놈의 금슬? 삼시랭이가 주책이 없어서 그렇게 ?다고 한다. 즉 삼시랑은 옛 부터 우리의 임신과 출산을 담당했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 지금 국어사전에서 화랭이 를 찾아보면 이는 ' 男巫', 즉 남자 무당으로 나오는데 화랭이의 원 말은 환한나라 앵이(앙이, 옹이)즉 환한것이 송판의 앵이 처럼 뭉처진것을 말하니 바로 환앵이가 화랭이가 되고 이것이 화랑도(花郞道) 가 ?으며 또한 이것은 풍월도(風月道) 라 하는데 風은 바람이고 月은 달 인데 달 은 우리말로 음달 양달 하는 달 이기도 하니 풍월이란 바달 >밝달 이며 환웅이 세웠다는 배달(培達)은 바로 밝달 의 변음이고 또 단군왕검의 우리말은 밝달임금이다.
따라서 위 앵무리 의 앵 은 옹이, 앙이의 앙 에 우리말에 거의 붙어 다니는 접미사 이 가 붙어 앵이가 되고 이 앵이 한자로 바꿔 쓰면서 환앵이가 무당인 화랭이가 되고 또 이것이 화랑(花郞)이 되듯 이 앵이 郎 이 ?을 것이다.
또 앵물이의 물 은 낭하리의 하 가 물河자 이기때문이기도 하지만 낭하리 석각 그림이나 또 그 석각 앞에 바닷물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앵무리 의 리 는 지금 里 가 아니고 위 틀못이 가 틀무시 가 된것같이 앵물이> 앵무리 가 ?을 것이다.
또 위 낭하리 고각위 산 정상에 단군성전이 있는데 이 건물은 지은지는 몇십년 되지 않으나 예전에는 석굴이 있었던 자리였으며 지금도 그 석굴에서 수도를 하시던 77 세되신 선사님? 과 그 할머니를 보좌하고 있는 부부가 단군성전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그 선사님은 다른지방의 음력 개천절을 지내러 가셨다 하므로 필자는 만나지 못하고 그를 보좌 하고 있는 분께 설명을 듣고 질문했다.
" 그럼 그 선사님은 혹 1960년대까지 진도 지방에 남아있던 단군의 도를 세습한 세습무인 당골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는 펄쩍 뛴다. 무당이 아니라 선사 라는 것이다. 그러나 단군의 도를 전하는데 우리 말로 선사(仙師)란 우리 말이 아니다. 단군때는 단군왕검 혼자 전국에 그의 도를 펼 수 없으니 각 지방에 단골> 당골레를 두고 사법 행정, 무속, 즉 누가 분쟁이 있으면 팔결 해결해 주고 또 아이들 혼인날짜나 제례뿐 아니라 심지어 굴뚝 고치는 날 까지 관장 하신 분이 있었고 일반 백성은 보리때 보리 한말, 벼때 벼 한말씩 바치고 그저 아이들 감기만 들었어도 단골집을 드나들기를 지금 단골집 드나들듯 했으며 그래서 지금 단골의 어원이 바로 이 단골이다.
그는 단군의 도를 세습 하였으니 세습무(世習巫)라 하는데 지금 무당은 단군의 도는 전혀 아는바 없이 당골무의 하는것을 어깨넘어로 보고 그저 신이 내려 흉내나 내고 푸닥거리나 하니 단국의 도와는 전혀 관게가 없는 강신무(降神巫) 일 뿐인데 그 분은 무당이면 같은 무당인줄 알고 펄쩍 뛴것이다.
그분의 말을 들어보면 이 산 원래 이름은 금산(錦山)이 아니라 성모산(聖母山)이란다. 이는 필자도 이미 알고 있었드시 이성계가 여기 석굴에서 기도를 드리고 왕이 되면 이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는다고 서약했으나 막상 건국하고 왕이 되자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을 수 없으니 비단금(錦) 자를 써서 錦山이 됐다는 것이다. 그럼 그 전에는 뭐라고 했을까? 바로 성모산 이라는데 성모는 마리아가 아니다. 우리 민족에게 성모란 단군의 어머님이신 곰례(熊女) 일 것이며 그렇다면 이 산 이름은 웅녀산 이었을 것이다.
그럼 왜 이산이 웅녀 산인가? 하긴 여기에는 전에서 부터 임신과 출산을 관장했던 삼신할매, 즉 아기를 낳으려면 빨이 나가라고 우리의 볼기짝을 때려 엉덩이가 시퍼렇다는 그 몽골반점의 원인 삼신할매인 웅녀나 또는 그를 대신하는 삼시랑, 당골레가 수도를 했고 일반 백성이 그 당골래 한데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자주 올라오다 보니 이 산이 웅녀 산이라 했을 것이고 이를 신성시 하기 위해 성모산 이라 했는지도 모른다.
4. 웅녀상이 말하는 증거.
그렇다면 그 웅녀의 흔적이 하나라도 있어야 한다.
" 성모님 상이 어디 하나라도 있습니까?"
" 예 있지요"
그는 나를 단군성전 뒷쪽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에는 제단이 차려져 있고 아주 오래된 여인상이 하나 있긴 한데 그간 비 바람에 마모 되었는지 눈 귀 코 등이 모두 마도되어 있었다.
" 이분이 바로 성모님 이십니다. 아주 오래된 것이지요"
필자는 사진을 찍어 여러 독자님께 올리려고 했으나 그는 촬영금지 팻말을 가리키며 촬여을 금지 시켰다.
" 아니 사진 촬영을 해서 여러 사람에게 알리고 여러 사람이 여기에 와서 우리 뿌리를 찾게 해야 할것 아닙니까?"
" 선사님 께서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만약 이 성모님 상이 세상에 공개되면 단군의 목을 치러 다니는 광신도들이 그냥 놔 둘것 같습니까?"
이상 말은 들어 보면 이 산 원 이름이 웅녀산 이었고 환웅과 웅녀는 한 쌍이니 환웅과 연관이 없을 수 없다.
그렇다면 그 낭하리 석각이 환웅과 관계가 있다는 한단고기 설이 전혀 낭설일 수가 없고 또 옛부터 전해지는 전설은 전혀 허무맹낭한 이야기 만은 아니며 또 필자의 그간 해독은 완벽 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위 기록에서 진시황때 서불(徐市)가 불로초를 구하어 왔다는 흔적이라는 말은 진시 황때는 이미 지금 한자의 전신인 대전(大篆), 소전(小篆)이 있었고 위 낭하리 고각은 신지녹도전자, 초기 가림토, 금문등이 혼재해 있으니 진시황때 서불 보다는 최소한 2 천년은 앞섰을 것이며 또 낭하리 고각에는 영지 버섯이라는 불로초의 흔적이 전연 없으니 서불의 불로초 이야기는 일단 배제 해야 한다.
또 신지녹도전자 등을 해독해 보면 이것이 대변설의 주 에서 말 하듯 글자 만듦의 시초는 될 망정 그것이 최치원이 보고 해독했다는 신지녹도전자 천부경일 수도 없다.
5. 황웅바위 상이 말해주는 증거
환단고기를 보면 이곳에 환웅이 사냥을 나왔다가 천제를 내내던 곳 이라 했다.그렇다면 사냥은 한 군데서 할 수 없으니 여기 저기 환웅상 바위가 있어야 한다. 필자는 아래 이 낭하리 고각 그림해독에서 수례를 탄 사람을 황웅상 이라 했다. 그 이유는 이 그림 전체에서 보듯이 이 수레를 탄 사람은 전체 그림 비율로 보면 너무 큰 사람이고 또 天가가 밀고 있는데 天이란 하늘일 수도 있지만 금문으로 볼때 하늘을 이고 있는 大자 즉 네 활개를 펴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에 있어서 하늘같이 위대한 사람이 과연 누구 일까?
이 석각 그림과 같은 바위를 찾아 보니 여러군데 있었다. 즉 보리암 뒤에 위 석각 그림과 같이 환웅을 밀고 올라가는 비슷한 바위가 보였다.
물론 아래사진은 수레도 없고 바퀴도 없으며 또 수레를 밀고있는것이 天 자도 아니다. 그러나 이런 바위를 보고 이는 환웅이 올라간다는 뜻, 환웅을 높힌다는뜻을 상징한다고 당시 사람들이 추정했을 것이고 이것을 위 그림으로 나타낸것이 아닌가?
다음은 정말 위 석각 그림과 방향도 똑 같은 바위가 바로 낭하리고각 부근에 있었다.
물론 아래사진도 수레도 없고 바퀴도 없으며 또 수레를 밀고있는것이 天 자도 아니다. 그러나 그림이란 사진이 아니고 추상적으로 그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바위를 보고 이는 환웅을 높히기 위해서 환웅이 사냥을 하러 다닌 흔적이라고 했을수도 있었을 것이고 이것이 전설이 ?는지도 모르고 이것이 환단고기에 기록 ?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6. Y자 같은 길이 말해 주는 증거
위 낭하리 고각을 보면 우선 첫번에 아래와 같은 Y 자같은것과 꺼꾸로 된 Y 가 같은것이 양쪽으로 붙어있는데 먼저 필자는 이것은 일종의 지형 이며 후세인들이 그 자리를 찾아가 천제를 지내라는 지도일수도 있다고 했다.
이 낭하리 고각이 있는곳은 상주 해수욕장에서 보리암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보다 국도를 따라 자동차로 한 20 분으 더 가야 하고 그 고각있는 길은 철조망으로 길은 통제 해 놓았다.
그러나 돌맹이로 지질러 놓은 그 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가 보니 그곳에 올라가는 오솔길은 먼저 보리암 올라 가는길 보다 암벽도 적고 경관도 좋았다. 생각해보니 5 천년전 선조들은 구태어 보리암 등산로를 택하지 않고 이 길을 택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즉 그때는 보리암은 그만두고 불교가 생기기 전이니까 구태어 그 급경사이며 암벽 투성이인곳으로 다녔을 리가 없었을 것이고 또 그 바로 위가 웅녀 신상이 있는 토굴이니 일반 백성들은 당연히 낭하리고각이 있는 이 길로 다녔을 것이며 지금 보리암 등산로 같은것은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산 중턱까지 올라가자 Y 자형 세갈래 길이 나오고 이제 좌측으로 조금가면 그 현장이란다.
아래 사진상으로는 Y 자길이 선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는 출입구를 막아 길이 너무 피페해 졌고 거기다가 장마까지 져 길 흔적이 거의 사라졌지만 분명 좌측 덤불 뒤로는 좌측으로 가는 길이 선명하고 우측도 마찬가지 였다.
그렇다면 저 Y 자 밑에 붙어있는 꺼꾸로 된 Y 자는 어디 있을까?
우리가 올라올때 아스팔트 국도에서 철망을 처 놓은 샛길로 올라왔다 즉 ㅗ의 세갈래 길을 올라 왔는데 그곳 지형은 산 줄기로 약간 높았으며 그렇다면 옛날 길은 ㅗ 자의 양쪽 끝이 처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옛날길은 Y 와 꺼꾸로된 Y 자가 붙어 있을 수 밖에 없으니 이는 분명 그 석각이 있는 장소를 가는 지도라는 추측이 맞는다.
" 여기서 더 올라가면 또 Y 자 같은 세갈래 길이 또 나오나요?"
그 낭하리 고각을 안내해준 아가씨들 한테 물어 봤다.
" 이런 길은 여기 밖에 없는것 같은데요"
" 그럼 저 Y자 같은 것이 붙은 그림은 석각의 지형이라는 제 추즉이 맞는것 같습니다"
좌측으로 조금 더 가니 드이어 현장이 나온다. 그 현장이 얼마전 까지만 해도 그대로 방치해 놓았다 했는데 지금은 남해군에서 철책을 두르고 안내 판도 써 붙였으니 고마웠다. 필나는 이 안내판을 보고야 이것이 경남 기념물 제 6 호임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올라 오는 길은 막아 놓고 누구 보라고 이 안내판을 써 붙였을까?
7. 그간 낭하리 고각은 왜 그간 거꾸로 되어 있었을까?
드디어 그 석각본을 촬영 할 수 있었는데 남해군청에서는 하도 많은 사람들이 와서 사진으로는 세밀한 선이 잘 보이지 않을것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탁본을 해 가기때문에 자주 탁본을 하면 자획이 마모 될 수도 있어 사진이나 찍으라고 그 새겨진 선에 힌 페인드를 칠해 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 현장에 들어와 이 거북바위를 한 바퀴 돌아 사진을 찍기 좋은 장소에서 찍다보니 아래 사진과 같이 그림이 꺼꾸로 된다. 즉 우리가 들어온 반대 방향은 게곡의 절벽이고 다른곳으로는 이 현장에 들어 올 수가 없다. 그러니까 여기에 와서 탁본이나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은 반드시 들어온 방향에서 이 거북바위를 한바퀴 돌아가 찍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렇게 찍으면 사진이 아래와 같이 꺼꾸로 나올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부근의 지형과 지질을 조사해 보았다. 이 부근엔 바위가 없고 땅도 그냥 흙 뿐이다. 그렇다면 이 거북바위는 몇 만년전 위에서 굴러 내려와 여기에 가로 세워져 밖힌것일 것이고 바닦이 바위가 아니니 그간 지각 변동, 또는 침강에 의해서 단군때 가로 누어져 있던것이 그후 옆으로 쓰러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단 이 바위를 원래대로 가로 세워 놓는다면 이 고각 그림은 이 거북 바위의 머릿 부분이 되며 그림도 바로 서게 된다. 필자는 바위 위에 올라가 다시 찍어 보았더니 다음과 같이 그림이 바로 잡아 졌다.
그러니까 위 환단고기에 " 환웅이 사냥을 나왔다" 는 말은 정말 환웅이 천하를 순시하며 여기까지 오셨을 수도 있겠지만 환웅께서는 중국 본토, 즉 고조선 유적지에서 밝달나라를 세우시기도 바뿐데 여기까지 멀리 오셨다는것 보다 삼시랑, 또는 당골레 들이 여기에 산재해 있는 환웅상 바위를 보고 환웅이 사냥나온것이라 말 할 수도 있고 또 이 산은 위 삼신할미인 웅녀신상에 치성을 드리느라고 자주 다니는 곳이며 옆에 환웅상 바위가 있으니 여기 세워진 거북바위 위에 낭하리 고각 그림, 글자를 새겨 놓고 이 바위를 병풍삼아 그 앞에 제물을 차려 놓은다음 그앞 에서 삼신께 천제를 지냈다고 보는것이 옳은 해석일것이다. 즉 이 바위 위에 제물을 차려놓고 천제를 지내기에는 바위가 너무 적다.
즉 아래 사진 석각의 반대방향이 들어 오는 입구이니 이 사진을 찍으려면 한 바퀴 돌아와 찍어야 되며 이 석각 쪽 방향은 계곡의 절벽이 되니 길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고각본을 탁본 한다거나 사진을 찌으려면 당연히 그 고각본을 머리로 두도 찍어야 할것이다.
8 天地人 마크의 실체
필자는 낭하리 고각 해독에서 아래 그림은 천지인 마크라 했다.
즉 위 T 자중 ㅡ 은 금문상 하늘이고 ㅣ 은 사람이며 우측 많이 펴진것 같은 ㄴ 은 신지녹도전자 하나의 나 에서도 설명했드시 누리, 즉 땅이다. 그렇다면 T 자옆 점은 무엇인가? 필자는 이는 지는 해 이거나 새로 솟는 샛별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 마크는 천지인 마크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답사 해 본 결과에 의하면 이 점 은 일단 무시해도 좋다. 그 이유는 바위에는 석회 성분이 섞겨 있을 수도 있고 그 석회 성분이 그간 빗물에 녹아 구멍이 ?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 이 낭하리 석각을 안내해준 아가씨 들께 구멍을 집어보며 그 위치와 깊히를 측정해 보도록 했다.
이 구멍들은 비단 이 뿐이 아니다. 심지어 이미 파 놓은 그림 선에도 있는데 이것을 표 하기 위해 단풍잎을 따서 표시 했다.
9.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
다음 사진은 낭하리 고각 그림이 있는데서 조금 더 올라가 좌우 암벽을 상징하는 고각 그림에서 좌측으로 추정되는 바위까지와 와 환웅상 바위를 찍은것이다.
우선 낭하리 고각 그림 그 부분 부터 보자.
이 고각 그림에서 좌 우측으로 세워진것은 암벽이고 그 아래 口 자는 암벽으로 들어 가는 문 으로 추정하며 그 아래 반달 같은것과 물아래 점은 물에 비친 초승달과 샛별(금성)이 만나 물위에 비치는 그림이라고 해독 했었다.
아래 사진은 이 고각 그림의 좌측으로 추정되는 암벽과 환웅상 바위를 찍은것이다.
아래 사진은 고각 그림 우측으로 추정되는 산 높이까지이어진 바위들인데 환웅 바위와 좌우측 바위가 한꺼번에 보이는 사진은 가시덤불과 게곡 절벽으로 길이 없어 찍지를 못했다.
그러나 이 사진보다 더 실질적으로위 석각의 암벽과 암벽 문을 나타내는 바위는 바로 보리암 밑 쌍홍문에 있었다. 먼저도 말 했드시 낭하리 고각은 사진처럼 일정한 장소를 모델로 하여 그린것이 아니라 웅녀산 전체의 특이한 경치중에 특이한 장소만 뽑아 그린것 이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 아래 口 자 모양으로 된 굴 입구 부터 본다.
바위 문을 더 들어가서 찍었다. 멀리 반달형 상주해수욕장 바닷 물도 보인다.
그렇다면 그 문위 석주도 있어야 한다. 석주를 찾았다. 앞에 바닷물도 보이지 안는가?
다음은 필자의 기대 일지 모르나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라는 초승달과 샛별이 만나 물위에 비치는 장면이다. 이 초승달이 뜨는 때는 음력으로 초사흘 이면 항상 뜨겠지만 그렇다고 샛별과 가까이 만날때는 그 공전궤도 등이 다르니 자주 만날 수가 없을 것이고 어쩌면 일년에 한번만 만날수도 있으며 그것이 개천절 이라면 이는 정말 환상적이다.
즉 달력도 없었을 원시에 그저 눈이 오면 겨울이고 더우면 여름인 그 때 하늘을 연 개천절의 정확한 날짜를 무엇으로 알았을까? 하늘의 달과 별의 움직임을 보고 알지는 않았을까?
그렇다면 이 환상적 장면은 개천절 전날 저녁이나 개천절 이른 새벽에 찍어야 하는데 하필 그날 구름이 끼고 빗발이 날려 사진은 찍지 못했지만 쌍홍문앞의 상주 해수욕장, 그리고 낭하리 고각 앞에서 바닷물 사진은 찍었다. 바닷물은 석각 그림에서와 같은 반월형이다. 그렇다면 석각 그림의 반달은 단순한 바닷물 그림인가?
그러나 독자님중 나리 님의 증언에 의하면 나리님은 낙시를 하러 자주 그곳에가는데 음 10 월 상달이면 유난히 바다물이 잔잔하고 또 낙시를 하려면 새벽에 나가는데 정확한 날짜는 기억 못하고 대략 한달전 새벽 5 시 30 분~ 6 시 사이에 초승달과 샛별이 만나 환상적 물 그림자를 나타내고 있는것을 보았다 한다. 그분은 절대 저짓말을 하실 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금년은 윤달이 끼어서 정확한 개천절이 약간 빗나갈 수도 있지만 한달전 이라면 거의 평소 개천절과 비슷하게 맞는다.
그러나 그 초승달과 샛별이 만나는 시기는 꼭 개천절 뿐이 아니고 매달, 아니 몇달에 한번씩 만날 수도 있지 않은가? 이는 더 실증을 요하는 사항이다.
10. 결론
이상을 보면 이 낭하리 고각은 절대 할일없는자가 그린 낙서가 아니다.
낭하리 고각 해독에서 말했드시, 또는 위 대변설 주에 말했드시 이는 그림이 글자로 변하는것이며 또 어느것을 보나 이 고각은 5 천년 이상은 ?을것이고 그렇다면 그때는 쇠 붙이 조차 만들어 지지 않았거나 또 쇠가 있다해도 흔할때가 아니니 청동 정이나 별똥별 떨어진 강한 돌 쪽등, 시원치 않았을 연장을 가지고 이 그림글자를 새긴다는것은 보통 성의가 아니면 않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그림 글자는 그림이 원시 글자로 변하는것이니 이는 우리 국보뿐 아니라 인류 문화 유산이 될 수 있다는것이며 따라서 유네스코 등에 등록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필자의 기대 일지 모르나 그저 꽃이 피면 봄 이고 더우면 여름이며 낙옆이 지면 가을이고 눈이 오면 겨울인줄 알던 원시에 하늘을 연 개천절을 정확하게 알기 어려웠을 것이고 그래서 초사흘 달과 샛별이 만나는날, 이것이 개천절을 알리는것 이라 한다면 이는 우리 조상의 천문 관측 기술이 그만큼 세밀 했다는 것이니 이 환상적 하늘의 편지를 말로 더해 무엇하랴?
그러나 그 하늘의 신비가 일어 나지 않는다면 초승달 그림이 단순한 그 앞에 있는 바닷물 그림이라 해야 하고 또 그 물아래 비치는 샛별 이라는 점도 그냥 빗물 구멍이라 하고 의미를 두지 말아야 할 뿐이다.
좀더 자세하고 재미난 내용은 다음 3~4 번 "여담 낭하리 고각 탐사기" 에 써 있다.
부디 중국, 그리고 일본 학자가 해독하기전 뜻 있는 분들과 관계 당국에서 관심을 가져 점 더 세밀히 감정한다음 유네스코에 등재해 주기 바란다.
-끝-
* 다음 3. (여담) 남해 낭하리 고각 탐사기 는 필자가 낭하리 고각을 탐사하면서 각종 실수 했던 일과 주접을 떨었던 내용이니 그냥 재미로 읽어 주시라.
3.(여담) 남해 낭하리 고각 탐사기.
부자 되는 길을 농땡이 치느라고 중단하고 금문 해독 어쩌구 핑게대며 늦장을 부리고 있었는데 이 글은 금문 해독의 일부인 낭하리 석각 해독과 그 실증을 위해서 현지를 직접 탐사하며 실수하고 주접을 떨었던 내용으로 부자 되는 길 과도 관계가 있음으로 각종 주접 떨었던 일을 이실 직고 하는데 글 내용이 기니 3, 4 부로 나누어 쓴다.
필자는 역사적으로 의견이 분분하던 낭하리 석각을 해독해 보고 이것은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라 했으나 꼭 초승달이 금성과 만나지 않더라도 이 고각은 최소한 5~6 천년전, 연장도 시원치 않았을 당시 어떤 할일없는자가 새겨놓은 낙서가 아니라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며 그 의미란 환단고기에 써 있듯환웅이 사냥을 나왔다가 천제를 지낸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그 후예인 단군, 또는 단군의 도를 바뜨는 삼시랑(三侍郞), 아니면 당시 그 지방의 당골레 들이 천제를 지낸 흔적으로 보는데 이 석각이 중요한것은 그림이 신지녹도문, 금문, 가림토가 혼용되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림이 문자로 발달하는 과정이 되므로 우리 국보뿐 아니라 세계 인류문화 유산으로 등록할 가치가 있다고 말한바 있다.
인터넷에 뜨는 암각화(남해도 낭하리 고각)
필자는 이 그림을 보고 이 그림이 뒤집혀있음을 알고 바로잡아 해독한것이 아래 그림이었다. 여기 아래 보이는 天 자는 그 예리한 조각으로 보아 쇠로된 정이 생겼을때 누군가가 새긴 낙서로 본다.
* 필자가 바로잡아본 그림
그러나 이 그림을 왜들 뒤집어 탁본이나 사진을 찍게 되었는가? 또는 수례를 탄 높은 사람과 그 수례를 미는 天자 같은 사람은 우연히 환웅을 그린것인가? 아니면 그 부근에 그런 모형의 바위를 보고 그 바위가 환웅을 상징하는 바위임을 알고 황웅바위로 명명 한다음 그린 그림이며 또 그 옆 암벽 바위와 그 앞 바닷물은 과연 보이는곳인지를 알기위해 낭하리 석각 탐사를 하기로 했다.
금년은 윤년이라 음력 개천절이 정확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혹 달과 금성이 만나는 시간을 사진찍기 위해서 이왕이면 양력 11월 23 일, 즉 음력 10월 초 3 일 전날밤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를 실증하기 위한 사진을 찍기 위해서 22 일 아침 5시에 일어나 아침도 먹지 못하고 집을 나왔다.
집 사람은 새벽 부터 읽어나 설치는 나를 보고 혹시 딴 짓거리 하러 가는것이 아니냐고 했지만 필자 같이 젊잔한? ㅎㅎ. 사람이 미스코리아에서 갓 떨어진 애들이 눈앞에서 알짱 댄다고 어디 컴컴한 마음을 먹을 사람인가? 걱정 허덜 덜덜 말라고 하고 집을 나왔다.ㅎㅎ.
필자는 전에 친목계원들과 함께 금산 보리암에 몇번 가 본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낭하리 석각을 알지도 못했고 또 친목계원들과 술 먹고 떠들다 보니 어떻게 그곳에 갔는지도 모르게 갔었고 남들은 부처님께 절 하고 어쩌고 했지만 필자는 경관이나 한번 쓱 보고 소변이나 한번 본 다음 온 일 뿐이니 그곳을 어떻게 가야 하는지도 몰랐다.
아는길도 물어 가야 하는것이 실패를 안는 부자 되는 길 인데 고속뻐스 터미날에 가면 그곳 가는 뻐스가 있는줄 알고 고속뻐스 터미날로 갔다. 필자 상식으로는 그곳은 경남 남해에 있으니 경부선 고속터미날로 갔다.
그러나 그곳 매표소 아가씨는 그곳에서는 남해 가는 뻐스가 없고 남해가 어딘지도 모른단다. 또 그곳 경비인지 경찰들도 모른단다. 그때 누군가가 친절하게 말해줬다.
" 남해요? 거긴 호남선 고속뻐스 터미날에 있어요"
남해가 왜 호남선에 있지? 그러나 그곳에 가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옆 건물이 호남선이다. 그곳에 가 보니 여러 행선지 중에 해남도 있었다. 내가 기웃거리자 어떤 예뿐 아주머니가 말했다.
" 어디 가시려는데요?"
" 남해요. 여기서 남해가지요?"
이제야 아는길도 물어 가기로 했다.
" 예 저도 해남가요. 빨리 끊으세요. 시간이 다 되었어요. 저쪽에 매표소가 있어요"
" 어디요?"
아무리 둘러 보아도 매표소가 보이지 않았다.
" 애구 제가 모셔다 드리지요. 원 매표소가 저 구석에 밖혀 있으니..."
그 아주머니는 매표소 까지 데리고 가서
" 빨리 해남표 한장요"
정말 세상에 나 빼놓고는 모두 좋은 사람들만 사는 모양이다. 나는 3 만 8천원을 주고 해남행 뻐스표를 끊었다. 그 아주머니와 함께 뛰다 시피 해서 뻐스에 탓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승객은 댓 사람뿐 자리가 많이 남았다. 좌석표가 있었으나 그 아주머니는 내 자리옆에 앉았다.
" 아주머니는 남해에 사세요?"
" 아니예요. 전 서울에 살아요. 그곳이 고향이라 지난 가을 선산 밀례 한것이 있는데 그간 잘 있는지 바람도 쐴겸 가요.아저씬 뭐하러 거기 가세요?"
" 예 사진도 찍을겸 남해 겨울 바다도 볼겸 놀러 가요"
" 잘 됐네요. 그럼 시간이 많으시겠네요."
" 예 아주머니도 시간이 많을것 같은데 그럼..."
" 예 저도 그냥 놀러 가니 정해놓은 시간은 없어요. 우리 동행해요"
요즘은 여성상위 시대라니 여자가 먼저 유혹하나? 필자의 본색인 컴컴한 생각이 들었다.
" 사진작가 세요? 무슨 사진을 찍으려 하시는데요?"
" 낭하리 석각이라고...그러니까 보리암 밑에 옛날 석각이 있다는데...혹 아주머니 보리암 가 보셨어요?"
" 아니요. 못 가봤어요"
" 아니 남해가 고향이라며 아직까지 금산 보리암에도 못 가 보셨어요?"
" 그곳엔 금산도 없고 보리암도 못 들어 봤는데요"
그때 옆에 있던 할머니까 끼어 들었다.
손님 뻐스를 잘못 타신 모양예요. 금산 보리암은 해남 에 있는것이 아니라 남해 에 있어요."
" 뭐라구요? 아니 그럼?"
지도를 꺼내 보았다. 해남은 남쪽 좌측에 있고 남해는 우측에 있어 아주 거리가 멀었다. 뻐스는 이미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 기사 양반. 내가 남해에 간다는것을 이 해남 뻐스를 잘못탄 모양인데 어떻해야 되지요? 중간에서 갈아 탈때가 있나요?"
" 없어요. 우리는 휴게소에서 한번 쉬는데 혹 그곳에 여수 순천쪽으로 가는 뻐스를 만나면 한번 말해 보세요"
" 젠장 일찍 가려고 서두르다 보니...할머니 해남에 가면 남해 가는 뻐스는 있나요?"
" 예 있어요. 해남에서 남해는 1시간 40 분이면 가요"
그러자 옆 옆 예뿐 아줌마가 말했다.
" 놀겸 사진찍으러 가신다면 그냥 해남으로 가서 내일쯤 남해에 가시지요 뭐"
이 아줌마 심심해 바람이나 쏘이러 간다고 했으니 황웅, 단군 흔적을 찾는다는 낭하리 석각이고 나발이고 다 집어 치우고 이 아줌마 하고 남해 인지 해남인지 바닷가에가서 회나 썰어놓고 쐬주 한잔하며 농아리나 쳐? 히히.또 컴컴한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하여간 오늘 저녁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를 찍어야 하니 그럴 수도 없었다.
뻐스가 휴게소에 서고 화장실을 갔다 와 보니 뻐스 기사가 순천행 뻐스를 가리키며
" 내 이 뻐스 기사에게 말 해 놨으니 이걸 바꿔 타세요. 해남까지 갔다가 거기서 뻐스 타는것 보다 이게 빠를거애요"
이 기사 눈치도 못채고 남의데이트 망쳐 놓는거 아녀? 그러나 나는 순천행 뻐스 기사에게 확인해 봤다
정말 이세상은 나만 빼놓고 좋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살고 있네. 그러고 저러고 그 예뿐 아줌마 하고 쐬주 한잔하며 농아리 치려던 일은 완전 물건너 간것 아녀?
순천행 뻐스가 광주를 통과 하고 있었다.그런데 갑자기 길이 막혔다.
" 뭔 사고라도 났나?"
" 아닌 모양인데요. 농민 시위 인 모양인데요"
그러고 보니 FTA 반대 어쩌구 하는 깃발이 보이고 수 만명이 관광뻐스 수백대를 타고와 고속도로 왕복선을 막고 있었고 경찰은 그져 구경이나 하고 있었다. 아니 농민의 주장도 좋지만 그런다고 죄 없는 국민 바쁜 여행길을 방해 하면 결국 국민들로 부터 FTA 반대시위의 정당성이 훼손 될텐데...누군가가 뛰어 나가 따지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곧 멱살 싸움이 일어났다. 그럴때 나도 쫓아 나가면 나도 터지지...뻐스는 무진장 갇혀 있었다. 언제 출발할지 기약도 없었다. 모두들 시계를 보며 안절 부절 했다.
나도 낭하리 하늘의 편지 찍기는 다 틀렸나 보다. 이거 내가 잠시나마 그 아줌마 한테 컴컴한 생각을 해서 일이 되지 않으려나?
한시간 여나 갇혀 있다가 겨우 풀려났다. 순천 고속뻐스 터미날에 내려서 어떤 사람에게 일반 뻐스 터미날을 물으니 길 밖까지 나와 이리로 쭉 가면 얼마 가지 않아 일반뻐스 정류장이 나온단다. 정말 나만 빼놓고 정말 좋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다.
그러나 축지법으로 아무리 가봐도 일반 뻐스 터미날은 나오지 않는다. 또 다를 사람에게 물어 봤다.
" 터미날요? 여기서 걸어 가다니요? 택시를 타야 해요. 기본요금 2 천원 나올겁니다."
" 어거 뭐야? 젠장 잘 모르면 말이나 말것이지 아무리 내가 축지법을 쓴다는것을 알았어도 바뿐 사람에게 엉뚱하게 가르쳐 주다니...젠장 아까 나 빼놓고 좋은 사람들 이란 말 취소다." 히히
택시로 일반 터미날에 갔다. 남해행 뻐스 표를 끊어 놓으니 출발 시간이 20 분 남았다. 오호 3 시인데 아침도 안먹고 나왔고 점심도 못 먹었으니 시장하다. 옆 소머리 국밥집이 보이길래 들어갔다.
" 3시 20분 출발인데 빨리 되나요?"
" 염려 마세요. 금방 되요."
그리고 전화가 왔는데 전화 통에 매달려 10 분간은 잔소리를 했다. 그러고 보니 당연히 가게 안이 썰렁하다. 손님은 급한데 친구하고 잔소리나 하는데나 마음을 쓰니 아무리 때가 지났다 하나 손님이라곤 나와 파리 열마리 뿐이다. 파리는 아직 음식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달려 든다.
" 빨리 안되면 돈 여기 있으니 그냥 갈래요"
" 아 다 된다니까요"
결국 5 분전에 음식이 나왔다. 그래도 국물 이라도 마시고 가야 본전 생각이 나지 않을것이다. 국물도 무척 짰다.
" 너무 짠데요"
" 그게 왜 짜요? 남들은 다 간이 맞는다고 하는데..."
" 그럼 아주머니나 많이 잡수세요"
그런데 남해행 뻐스는 내가 가던곳으로 되 돌아 오며 정거장 마다 선다. 즉 먼저 말해준 이는 뻐스 정거장을 말해 줬는데 나는 터미날로 착각한 것이다.
오늘 내가 왜 이러지? 아무래도 아까 그 여우 아줌마에게 홀렸나? 히히. 먼저 그 사람에게 나 빼놓고 다 좋은 사람들 만 산다는말 취소가 아니라 다시 복구다. 히히
남해 여객터미날에 도착해 보니 보리암 가는 뻐스가 10 분 후에 있단다. 표를 끊어 놓고 뭐 먹을 시간도 없다. 그런데 뻐스는 저수지 있는곳 까지만 가고 거기서 보리암 올라가는 봉고차를 갈아 타야 한단다. 그러나 봉고차는 최소한 10 명 이상이 모여야 간다는데 손님이라곤 나와 어떤 강호동이 만큼이나 큰 아가씨 뿐이다. 나는 축지법으로라도 올라 가려 했다. 그런데
" 아저씨 저 택시 만원 이라는데 우리 반반씩 내고 같이 타고 가실래요?"
" 그거 좋지요"
강호동이가 아니고 예뿐 아가씨라면 내가 돈 몽땅 내고라도 타고 가겠는디... 히히
나는 결국 보리암 부근 주차장에 도착했다. 거기서 또 1K 는 걸어 가야 한단다.
우리는 부지런히 걸었다. 이 모습을 아마 누가 사진찍었다면 내 모습은 마치 코끼리 옆에 붙은 파리 같았을 것이다. 그래도 날씨도 저물고 바람도 쌀쌀하고 인적이 끊어졌으니 같이 타고온 의리상 같이 가려는데 이 아가씨는 헐래벌떡 도저히 거름이 맞질 않는다.
" 아기씨 뭐하러 보리암에 가세요?"
" 기도 드리러 가지요"
" 시집 보내 달라고요? 히히"
" 하하 예 그래요. 하하"
" 부처님께 기도 드릴게 아니라 아가씨 얼굴이 예뿌니 매일 등산하며 걸어다녀 날씬해 지면 자연 신랑감이 줄로 설건디...히히"
" 그러데 걷기는 정말 싫어요"
" 미안해요. 나는 더 어둡기 전에 사진 찍을 것이 있어서..."
젠장 같이 택시탄 의리고 나발이고 혼자 빨리 가자. 근디 저 아가씨가 만약 날씬했다면 과연 나 혼자 갈 수 있을까? 정말 나는 컴컴한 놈 이라고 생각해 가며 보리암에 도착했다.
인테넷에 올라있는 보리암과 바다를 바라보는 관음상
시간이 5 시가 되 가고 있었다. 낭하리 사진을 꺼내놓고 스님, 신도, 등산객 들한테 물어 봤으나 모두 어디있는지 모른단다. 등산객 한 분이 말 했다.
" 저 아래쪽으로 가다 보면 쌍홍문이 나오는데 혹 거기 가 보세요"
그렇지 않아도 이곳은 식당이나 숙박시설이 보이지 않으니 하루종일 굶은 주제에 천상 상주해수욕장 으로 가야 한다. 그래야 회 쓸어 놓고 쐬주도 한잔 하지...
다음 사진은 23일 아침 다시 보리암에 오면서 찍은 사진으로 혹 낭하리 석각의 높은 사람이 수레를 타고 가는 모습이 이 바위를 보고 그린 그림이 아닌가 하여 사진을 찍었다.
잘 보니 정말 수레에 탄 사람을 미는듯한 바위였고 또는 환웅이 사냥을 나온 그림 같다. 환웅이 사냥을 한다는데 왜 수레를 타고 하지? 아마 높은 사람은 그랬을 거라고 그렸을 꺼야. 그러나 석각 그림과 방향이 반대로 되 있다.
쌍홍문 쪽으로 내려가 보았다. 아래그림 바위 문의 근거가 되지 안을까 하여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은 22 일 저녁 쌍홍문 에서 찍을 사진으로 쌍홍문은 정말 장관 이었다. 이게 위 낭하리 석각 그림의 바위문인가?
바위 문을 더 들어가서 찍었다. 석각과 같이 멀리 바닷물도 보인다.
그렇다면 그 문위 석주도 있어야 한다. 석주를 찾았다.
와! 이거다 바로 이것이다. 앞에 바닷물도 보이지 안는가?
그런데 그 낭하리 석각 그림은 어디있지?
아니지 내일이 개천절이니 초승달과 금성이 만나서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 사진 부터 찍어야지. 그까짓 낭하리 석각 그림이야 제까짓게 도망 갈라구... 시간은 5시를 넘어가는데 금성은 그만두고 초승달도 보이지 않는다. 이거 어디 갔나? 그러구 보니 하늘이 구름이 끼어 캄캄 하다.
젠장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아니 내가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하러 왔는디 하느님이 도와 주지 안네. 할 수 없이 하느님 한테 핸드폰을 쳤다.
" 저 우리란 놈인디 하느님 그럴수 있시유? 당장 구름을 걷어 주슈"
그러나 하느님 대답은 냉정했다.
" 야 이 고얀놈아! 너 성스런 산에와서 성스런 일을 할놈이 그래 삼일전 부터 목욕재계는 하고 오지 못할 망정 오면서 바람난 계집 붙들고 컴컴한 생각이나 하니 내가 도와 줄것 같으냐?"
" 바람난 계집요? 아까 그 아줌마가 바람난 계집? 그런줄 알았으면 그 아줌마 따라 해남으로 가는건디...히히"
" 뗏기 고얀놈! 너 그래가지고 여기서 사진 찍을을 줄 아냐?"
" 아구 잘못했시유. 당최 안그럴텡게 좀 도와 주슈"
" 안된다 이놈아! 글구 이 산은 내가 관리할 산도 아녀. 내일 우리 아기 한테 물어봐!"
" 아기 라니요"
" 야이 녀석아 넌 며느리 보고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냐?"
" 며느리요? 그럼 아드님이 환웅. 그럼 웅녀 말씀인가요?"
" 인석아 환웅, 웅녀가 누구냐? 우리 말로 혀라"
" 아예 환숫, 곰네 말이군요"
" 그래 맞아 오늘저녁 부터 몸을 정히 해 가지고 내일 전화 걸어봐"
그러나 나는 급한 마음에 당장 곰네 할머니에게 핸드폰을 쳐 봤다.
" 곰네 할머니 맞지유? 전 우리란 놈인디..."
" 그래 맞긴 하는데 넌 오늘 마음이 부정하니 않돼. 내년에 다시 와 봐라!"
" 아니 내년에요? 하느님 섭리는 자연 섭리이고 자연 섭리는 오직 생식인데 자연 섭리가 숫컷들에게 암컷만 보면 컴컴한 마음을 먹도록 만들어 놓구설랑..."
" 이녀석 말이 많네. 그럼 너 왜? 강호동이 만큼 큰 아가씨라고 떼어 놓고 왔냐? 그건 여자 아니냐? 왜 우리 여자 차별 하냐?"
" 그건...그건..."
" 잔소리 말고 호랑이가 물어 가기전에 빨리 내려가 봐! "
" 젠장 뭐 이런 할머니가 다 있어? 아니 무슨 할머니가 그래 손주놈 말도 안들어줘? 씨양! 철없는 손자놈이 까불면 볼기짝이나 한대 때려주실 일이지..."
" 이녀석 버릇없는 말 솜씨좀 보게. 그러나 좋다. 손자놈 재롱으로 받다 준다. 그런데 인석아. 네 볼기짝은 이미 때려 줬어. 너 태어 났을때 엉덩짝에 푸를점 찍혀있었다는말 못 들어 봤냐? 이건 다른 나라 놈들 한테는 없는게야"
" 아 예 예 몽골 반점 말이군요."
" 인석아 몽골반점이 뭐냐? 한민족 반점이라고 하던지 이 곰네 반점이라고 혀라"
" 예 예 고마워유. 그런디 제발 사진좀 찍게..."
" 이미 오늘, 내일의 일기 프로그램은 다 짜 놔서 컴퓨터에 입력 시켜 놨으니 지금 내가 프로그램을 변경하면 내 컴퓨터가 애로가 나 않돼. 그 대신 내일은 그따위 컴컴한 마음먹지 말고 마음을 정 하게 가져라. 그럼 그 낭하리 석각은 찾을 수 있게 해 주마"
할 수 없었다. 내 이럴줄 알았으면 차라리 해남에 간다는 그 바람 난 아줌마를 이리 오라고 꾀셔서...히히
본성이 컴컴한 놈이니 하느님께 그렇게 주의를 듣고도 또 컴컴한 생각이다.
시장한 배를 움켜 쥐고 내려 가려는디 바스락 소리가 났다. 혹 그 바람난 아줌마가 나를 따라 왔나? 사방을 둘러 보니 아무도 없다. 그러면 그렇지 역시 내 어리섞음 때문이다 젠장 자성 하는 의미로 시나 한수를 거창하게 읊었다.
마음이 어리섞으니 하는 일이 다 어리석다 만중 운산(萬重雲山)에 어느 님 오랴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가 하노라.
어때? 명시지? 이렇게 되면 나도 시인인가?
그러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시 같다. 그랴 이 시는 내가 지은것이 아니라 바로 화담 서경덕이 황진이를 그리며 지은 시야.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고. 나 같이 컴컴한 놈이 이런 시를 지을수 있을라구? 히히
다시 시를 ?었다.
마음이 컴컴하니 하는짓이 다 컴컴하다.
이 어둔 산중에 그누가 올리 없건만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가 하노라!
그래 봐야 이건 화담 서경덕의 시를 모조한것이다. 젠장 시인 되긴 다 글렀네. 히히
그러나 대 시인이고 理氣一原論을 발표하여 理氣二原論을 발표한 퇴계 보다 더 하늘의 이치를 잘 아는 성리학자인 화담도 컴컴한 생각을 하며 황진이를 생각하는데 나 같은 犬 망나니가 뭐 좀 컴컴한 생각을 한다고 그리 큰 잘못인가? 히히
그러구 보니 오를저녁 황진이 연속극 하는날 아닌가? 빨리 가서 저녁먹고...아니 회 쓸어 놓고 쐬주 한잔 하고 연속극 봐야지. 정말 연속극 황진이는 그 화려한 의상에 춤 그리고 옛날 기생들의 사랑...정말 보기드문 명작이야.
이왕 황진이 말이 나왔으니 해설까지 해 볼까?
화담이 있는 옴팡간은 첩첩 산중에 외로히 있다.
황진이가 성리학의 대가인 서경덕에게 성리학을 배운다는 핑게로 사실상 유혹하려 비를 홈빡맞고 육체미가 그대로 보이는 옷으로 찾아왔을때 서경덕은 황진이에게 갈아 입힐 옷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다 떨어 져 누덕 누덕 기운 자기옷으로 갈아 입혔다. 황진이는 성리학을 배운다고 왔지만 원래 목적이 그것이 아니니 피곤 하다며 자자고 했다.
그러나 단간방에 이불도 다 떨어진것 한채 뿐이다. 할 수 없이 둘이는 한 이불을 덮고 잤다.
그런데 이 쑥맥양반 통 반응이 없네. 혹 병신이 아닌가? 슬쩍 더듬어 보았다. 천만에 말씀, 싱싱하다.
황진이는 마음을 바꾸고 성리학 공부나 했다. 결국 화담은 황진이에게 성리학은 가르쳐 주었을 망정 한 방, 한 이불을 덮고 일주일을 자면서도 아무짓 하지 않다가 그대로 보내놓고 가을이 되어 달은 휘영청 밝은데 낙옆이 떨어지고 바람이 불어 바스락 소리가 나니 혹시 황진이가 아닌가 하는 그리움이 배인 애끓는 시가 바로 위 시 이다.
그럼 황진이의 화답하는 시도 적어야지.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데 월침 삼경(月沈三更)에 올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황진이는 화담 앞에서 만은 진심으로 대했다.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했다.
그런데 화담은 여늬 기생처럼 차게 대한다,
이 가을 달 밝은 밤에 혹시 오지 않을까 하여 귀를 기우리지만 그냥 낙옆 지는 소리일 뿐이니 이걸 어쩌란 말인가?
이것을 보면 화담은 빙신이다. 나 같았으면 당정 달려가서리...히히.
날이 점점 어두어 지고 있었다. 시가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시 타령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어둠 속을 엎어지고 자빠지며 산길을 내려갔고 결국 아스팔트 길이 나오자 또 상주해수욕장쪽 불빛을 바라보며 걸었다. 시장하니 축지법으로 걸었는데도 왜 이렇게 불빛이 멀지?
드디어 상주 해수욕장 부근 어떤 생선회 집에서 생선회 한 접시와 찌개, 소주한병 그리고 밥 한그릇을 뚝딱 비우니 주인 아주머니가 3 일 굶었느냐며 밥 한그릇을 더 주겠다기에 그것도 다 먹었다. 정말 시장한데는 최면이고 나발이고 없다.
여관을 얻어 황진이를 보다가 그대로 쓰러져 잤다. 아침까지 잣으니 남의집 전기세는...
그래도 아침에 일어 나보니 몸은 거뜬했다. 해수욕장을 한 바퀴 돌아 보니 정말 절경이었고 특히 해변의 송림은 환상적인데 정부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려 하는지 주민들은 " 천연기념물 결사 반대" 라고 프랑카드를 써 걸었다. 아마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면 해수욕객 들이 들어 갈 수 없고 따라서 장사가 안되기 때문인 모양이다.
아침을 먹으러 어제밤 그 집에 갔다. 김치 찌개가 있었다. 그런데 김치찌개는 정말 천하 일미였다.
" 뭐 어딘가 이상한 그림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고 일본사람들 까지 온다는 말은 들었어도 전 못 봤는데요."
" 예 할 수 없지요. 전 지금 다시 보리암 쪽으로 올라가며 찾아 봐야 해요"
" 여기서 보리암 입구 등산로 까지 아스팔트 길을 가시려면 꽤 지루 하실텐데 제가 제 차로 거기까지 모셔다 드릴까요?"
" 아구 고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저녁 무척 지루 했걸랑요"
결국 그 예뿐 아줌마는 나를 일부러 등산로 입구까지 태워 줬다.
이 예뿐 아줌마가 나같이 컴컴한 놈 한테 왜 호의를 베풀지? 뗏기. 넌 누가 호의만 베풀면 꼭 컴컴한 생각을 한단 말야. 어제밤 곰네 할머니와 약속한것도 있으니 오늘은 절대로 컴컴한 마음을 갖지 말아야지 그나마 오늘 낭하리 석각도 못찾을라. 그래 이 세상 사람은 나 빼놓고는 모두 좋은 사람들이라 그럴꺼야.
등산로 입구에서 좌우를 두리번 거리며 바위가 있으면 다 찾아가 보았으나 낭하리 석각은 보이지 않았다. 한 시간을 급 경사를 올라가니 드디어 쌍홍문이 나온다.
쌍홍문 근처는 어제저녁 샅샅히 뒤져 봤는데 이거 못찾는거 아냐?
그때 쌍홍문 아래에서 어떤 예뿐 아기씨 둘이 마호병에서 커피를 따라 마시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 커피 한잔 하실래요?"
그렇지 않아도 목이 컬컬한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아기씨 들은 정말 예뻣는데 내가 아무리 컴컴한 놈이라도 컴컴한 생각을 할 상대가 아닌 신성해 보이는 아가씨들 이었다. 내 용건이나 말할 수 밖에 없었다.
" 혹 이 동네 사세요?"
" 예 저 아래 상주 해수욕장 부근에 살아요"
" 여기 등산 자주 오세요?"
" 예 거의 매일 와요"
그러니까 이렇게 날씬한가?
" 그럼 혹시 이런 그림이 새겨진 바위 못 보셨어요? 전 이러구 저러구 해서 꼭 이 바위를 찾아야 하는데..."
" 아 그 그림요? 길을 잘못 오셨네요. 이쪽이 아니고 저쪽예요"
" 그럼 어떻게 가야 하지요?"
" 이 산을 거의 다 올라 오셨으니 저 단군전으로 해서 내려 가는 길도 있는데 길이 험하고 바위 틈이라 못 찾으실거얘요. 다시 내려가셔서 아스팔트 길로 한 시간쯤 더 가신다음...그럴게 아니라 그런 좋은 일을 하신다니 저히들이 저히들 차로 모셔다 드리지요."
이 아가씨 들은 그 낭하리 석각도 뿐 아니라 환단고기등 우리 사서도 읽으셨던 분 들이라 말이 더욱 잘 통했다.
* 동북공정을 막기위해 한자의 원조인 금문(金文)은 우리 민족이 애초 고조선 유적지인 중국 대륙에서 부족한 글자를 보충하기 위해 그림으로 그려 썼던것을 중국인들이 가져다 자기네 말과 맞추어 자기네 글자를 만들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금문해독이란 우리 상식과 우리 말을 하는 우리가 아니면 해독을 할 수 없다는 실증 금문해독을 전체메일을 보내는 중에 낭하리 고각을 만나 이것부터 해독해 보려한다.
아래 낭하리 고각( 古刻 - 옛날 석각) 그림은 흔히 인테넷에 뜨는 그림이다.
낭하리 고각은 그간 고고학계나 사학계에서 무엇인지 몰라 궁굼해 하던 것이었고 그 설도 분분했던 것이다. 필자도 이 그림을 얼핏 보고 지나친 일이 있는데 독자님중 백산님의 질문을 받고 자세히 검토해 본 결과 이는 낙서가 아니고 매우 중요한 그림이다.
우선 이 그림은 그림이 글자로 발달하는 과정이 나타나고있으므로 우리 역사는 물론 세계 인류문화 유산이 된다고 생각되고, 또 꿈같은 기대인지는 모르나 우리나라 진도등지에서만 나타나는 모세의 기적처럼 초사흘 달이 금성과 만나 물그림자에 비치는 날, 이런 환상적인 날이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이고 이를 낭하리 바위에 새겨 놓았다면 우리 조상의 천문관측 수준은 더 말해 무엇하랴?
이를 자세히 분석해 보고 이를 설명한다.
아래 화면은 흔히 인터넷 상에 뜨는 그림이다.
* 왼쪽그림이 낭하리 고각이고 다음은 평양 법수교 아래에 있었다는 신지녹도 전자인데 이는 필자가 해독해본 바에 의하면 천부경이 아니라 자식을 많이 낳게 해 달라는 일종의 기천문(祈天文)으로 필자 카페 ' 신지녹도 전자 천부경 해독' 에서 이미 해독해 놓은것이며 다음은 지금 중국 산동성 백수현에 있는 창성조적서 비문으로 이도 필자의 카페 ' 신지녹도전자 천부경 해독'에 해독한 글자들인데 이는 중국인들이 자기네 글자를 만든 창힐이 한자 만든 과정을 적은것으로 알고 자기네 국보로 알고 있으나 실은 창힐은 신지한데 6년간이나 글자 만드는 법을 배운자로 환숫(황웅)이 배달(培達-밝달) 나라 세우는 기틀을 만드는것을 보고 적은 일종의 견문록으로 이는 중국의 국보가 아니라 실로 우리의 귀중한 국보인것 이다,
( 또한 소문을 듣건데, 남해도 낭하리(郎河里) 의 계곡과 경박호(鏡珀湖) 선춘령(先春嶺)과 오소리(烏蘇里) 바깥의 암벽 사이에서 언젠가의 조각을 발견하였는데, 범자(梵字)도 아니고 전자(篆字)도 아니어서 사람들은 알수가 없는것 이라 했으니 이것이 신지씨가 만든 옛 글자가 아닌지 모르겠다.)
(대변설大辯說>>의 주에 말하기를 “남해현 낭하리의 계곡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이 있다. 그 글에 <한웅이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리다>라고 되어있다”고 했다. 또 가로대 “대시 大始에 옛것을 전함에 있어 다만 입으로 전해오는 이야기에만 의지한 지 오래이다. 나중에 형상을 그림으로 그렸고 또다시 그림이 변하여 문자가 되었다.)
* 진시황때 서불(徐示)이 불로초를 구하러 다닌 흔적이라는 서불제명각자(徐市題名刻字) 또는 "서불이 이곳을 지나가다"라는 의미의 서불과차문(徐市過此文)이라 불리어 왔다.
또 인터넷에 올라 있는 글을 보면
* ....이 신지 전자의 초기 모습이 바로 위 그림 맨 왼쪽의 낭하리 암각화다. 환단고기에 인용된 대변설의 주에 이르기를 “남해현 낭하리에 계곡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古刻)이 있다. 그 글에 환웅천황께서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린다고 했다”고 하였다. 그 개량된 형태가 1942년에 발행한 영변지에 실려 있다. 환단고기의 저자 계연수 선생이 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에서 천부경이 새겨진 옛 비석을 발견한 내용과 더불어 신지 전자(篆字)를 옮겨 놓은 것이다. 환단고기를 세상에 공개한 이유립 옹도 저서 대배달민족사에 평양 소재 법수교 고비(古碑)라고 밝히면서 신지 전자(篆字)를 소개해 놓았다. 그밖에 구한말 서예의 대가인 김규진이 저술한 서법진결과 백두용(白斗鏞) 편,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에도 신지 전자가 실려있다.
*또한 "최치원(崔致遠)이 일찍이 신지(神誌)가 새겨진 옛비석을 찾아 . . . 즉 낭하리(郎河里)의 암각(岩刻)이 그것(神誌)의 실제 흔적(痕迹)인 것이다." 등으로, 과거부터 여러 문헌에서 보이고 있다. (이하 생략)
* 이상 글들은 필자가 낭하리 고각을 해독해본 결과로는 과연 환단고기의 말은 진실이 된다.
또 이 그림 글자는 어쩌면 개천절에 천제를 지내던 기록일수도 있고 이 날을 잊지 말라는 하늘의 멧세지 나 달력일 지도 모른다.
따라서 아직도 위서 취급을 받는 환단고기의 기록이 위서가 아니라는 또하나의 입증도 된다.
그러나 서불이 자신의 행적을 알리기 위해 그림, 또는 글자를 써 놓았다거나 최치원이 와서 보고 천부경 81자로 번역했다는 말은 모두 속설이며 허구이다.
즉 이 그림하고 서불과는 관계가 없다. 즉 진시황때는 이미 대전(大篆) 소전(小篆) 등 한자가 있었기때문에 서불이 흔적을 남겼다면 전자로 남겼어야 한다.
고 또 최치원도 이 그림글자를 보고 신지녹도전자 천부경을 번역할 수 없다는 것은 신지녹도전자 천부경이나 이 낭하리 석각을 해독해 보면 안다.
이 그림, 글자가 매우 오래?다는것은 꼭 과학적 검정을 거치지 않더라도 그 그림, 글자 해독만으로도 맞는 말이다. 최소한 단군때나 그 이전 그림, 글자로 5~6 천년 이상은 될것이다.
그렇다면 당시는 철이 생산되기전 신석기나 청동기 때라 청동으로된 정 등 시원치 않았을 연장을 가지고 당시 누가 그 애를 써가며 이렇게 아무도 알아먹지 못할 그림을 그려 놓았을까?
글자던 그림이던 그리는것은 누가 보고 알아보라고 그리는것이다.
그렇다면 그간 우리 고고학계 사학계에서는 왜 아직 이 그림을 해독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이 그림이나 글자를 그저 신비하게 볼뿐이었고 또 그간 누가 해독하여 보려 했어도 이 그림을 해독할려면 우선 천부인으로 만들었을 수 밖에 없는 ㄱㄴㄷ...ㅎ 속의 뜻이나 신지녹도전자, 금문, 가림토 또는 수메르의 우르문자 등 해독하는 방법을 모두 알았어야 하기 때문인데 강단사학등에서는 그것을 연구해 보기는 커녕 아직 신지녹도전자나 가림토의 존재 부터 부정했기 때문이다.
이 그림 글자는 인류가 그림에서 글자를 만드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인류에게 아주 중요한 그림 글자이며 또한 인류 최초의 천문현상을 보고적은 환상적 달력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우리에게 국보는 물론 인류문화 발달사에 아주 귀중한 단서가 되므로 유네스코 등에서 세계인류문화 유산으로 지정해 두어야 한다는것이다.
지금까지 공개된 탁본이나 사진들은 모두 위아래가 뒤바뀐, 거꾸로 된것이다 환단고기를 번역하신 임승국 박사의 '한단고기 48 쪽에도 이 그림이 있는데 역시 거꾸로되 있으며 이 그림 설명을 서불제명각자라고 추정하고 있다.
우선 이런 서적등에 나타는 그림은 위 아래가 거꾸로 된것을 모르니 그대로 올린것이다.
이것을 우선 바로잡아 보자.
* 필자가 바로잡아본 그림
우측으로 부터 설명한다.
Y 자같은 것이 양쪽으로 붙어있는것은 일종의 지형이이며 또 천제를 지대던 제사터 라 해도 좋고 후세인들이 그 자리를 찾아가 천제를 지내라는 지도일수도 있다.
다음은 수레 같은것이 있는데 수레 앞에는 상징적인 바퀴까지 그려 놓았다. 그리고 그 수레에는 어떤 사람이 타고 있는데 이 사람은 그림의 비율로 보았을때 과장되게 큰 것으로 보아 높은 사람이다. 이것은 글자가 아니라 그냥 그림인데 이 그림은 위 대변설 주에서 말하듯이 환웅이 사냥을 나왔다는 것을 추상적으로 그렸을 수도 있고 환웅을 높히기 위해 올라 가는 그림이 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뒤에서 天 자 같은것이 수레를 밀고있는데 이 수레가 수평이 아니고 위로 올라간다는것은 이 수레 뒤의 나무는 정상적 수직으로 서 있는데 앞의 나무는 암벽에 붙은 나무라 약간 경사져 있다. 즉 뒤의 나무가 수직으로 선 것으로 볼때 이 수레는 올라가고 있다는것이다.
이 수레를 밀고 올라가는 天자는 금문으로 볼때 사람이다.
즉 초기금문에서 사람을 天자로 그린 예가 많았었는데 그 이유는 大자 처럼 네 활개를 편 사람은 항상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기 때문에 天자 같이 그렸다.
위 그림의 정확한 해독과 증거를 제시하기위해 금문과 갑골문을 비교하며 그 변하는 과정을 설명한 ' 甲骨文字形字典- 北京長征出版社 발행' 에 올려있는 중국 책자를 인용하여 설명하는데 이는 비단 그 책 뿐 아니라 중국의 금문을 설명한 책이 거의 그렇다.
* 天자. 금문 > 갑골문의 그림,
天 자 설명문 이지만 夫 자 같은 글자도 많고 아래에는 아예 사람 머리까지 그려 놓았는데 어떤 사람머리는 口 자 같다. 여기서 주의할것은 이 그림들은 금문에서 갑골문, 그리고 대전(大篆),소전(小篆) 으로 변하는 순서대로 정리해 놓은것이 아니다. 즉 우리 민족이 만든 초기 금문은 하늘 천부인 ㅇ 모양대로 맨아래 그림과 같이 사람은 머리인 ㅇ에 아래 大 를 쓰고 땅은 보통 땅 천부인대로 口를 쓰지만 지나족들은 머리가 ㅇ 이면 개성이 없는 멍청이라 하여 머리도 口 자를 썼다.
따러서 아래 글자중에 머리를 口 자로 그린것은 우리 조상이 만든 글자가 아니라 후세에 중국인들이 제멋대로 그린 그림이다.
* 생명 번식행위를 가장 신성한것으로 알던 우리 원시조상들은 하늘의 정기인 씨 를 여음인 땅에 전할수 있는 사내를 하늘보다 더 귀중하게 생각하였다. 이 사내는 늙은이나 아이들이 아니고 씨를 전할수 있는 젊은 사내이다. 이 사내를 우리말로 아비 라 했는데 지금 父라는 아버지는 이 아비에서 나온말이고 이 아버지와 남편을 분별하기 위하여 나중에 남편은 제아비, 즉 지 아비 라 했다.
이를 한자로는 夫 라 하였고 그래서 이 글자는 하늘 위를 뚫고 올라간 글자이다. 따라서 젊은사내, 즉 일 할 수 있는 사내를 싸울아비, 거칠아비, 중신아비, 심지어 허수아비라 했으며 지금도 農夫니 漁夫니 鑛夫니 한다.
이 아비는 아직 결혼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여자들과 같은집에 살지않았고 무리아들의 집 이라는 서자부(庶子부) 에 따로 모여 자기 부족과 여자들 집을 지켰다. 따라서 서자환웅(庶子桓雄) 이란 말은 아직 결혼제도가 없었으니 본처니, 첩이란 있을수 없다. 즉 환웅은 첩의 아들이 아니라 庶子部의 환웅이란 말이다.
그들은 씨놀음을 통하여 강인한 유전자만 후대에 전하게 했는데 그 씨놀음 이 이젠 씨름 이 되었다.(자세한 설명은 필자 졸저 '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 에...)
* 夫 자. 금문> 갑골문 그림 (역시 ' 甲骨文字형字典- 北京長征出版社 발행' 을 인용)
이 글자는 금문 갑골문 뿐 아니라 지금 우리도 쓰는 夫자이다. 역시 하늘을 뚫고 올라갔다.
그런데 이 지아비를 그리다 보니 아래 그림처럼 더 노골적으로 생식기까지 붙은 太자도 썼는데 생식기가 너무 길게 그린것은 ㅎㅎ. 남근을 그만큼 중요시 했다는 말이다.
* 太자. 금문> 갑골문 그림 (역시 ' 甲骨文字형字典- 北京長征出版社 발행' 을 인용)
그러나 사람중에는 꼭 사내만 있는것이 아니다. 사내가 씨라 한다면 그 씨를 받아 키울수 있는 땅, 즉 여자도 필요하니 여자를 포함한 사람을 표시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붙이지 안은 大 자를 쓰기도 했다. 大 자가 지금 크다는 뜻으로 쓰인것은 하늘아래 땅위에 사람의 존재가 가장 위대하기 때문에 크다는 뜻만 따서 큰大자가 된것이다.
* 大자. 금문> 갑골문 그림 (역시 ' 甲骨文字형字典- 北京長征出版社 발행' 을 인용)
그러나 어차피 사람은 다른 동물과 달리 두 다리로 서서 다니니 복잡하게 그릴 필요가 없이 사람 특징만 나타냈고 이 아래 그림들이 다리 두개로 변하여 人 자 가 ?는데 이 그림에서도 하늘을 이고 있는 사람이 있다.
* 人 자. 금문 > 갑골문 그림 (역시 ' 甲骨文字형字典- 北京長征出版社 발행' 을 인용)
또 다음 工 자에서 보듯이 하늘 아래에 서서 무엇인가 工作하는것이 사람이니 사람을 'ㅣ' 으로 쓴 경우도 많은데 이것은 훈민정음 제자해에서 天地人 三才중 人을 ㅣ 으로 쓴것과 같다. 그리고 이 T 자아래 口 은 천부인, 天地人 즉 ㅇ ㅁ △으로 만든 ㄱㄴㄷㄹ ㅁ...ㅎ 속에서 ㅁ 은 원래 땅을 의미 하니 땅을 口 로 그린것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그냥 ㅡ 자나, 또는 아주많이 펴진 ㄴ 자로 표시 하기도 한다.
아래 그림에서 주의할것은 땅을 뜻하는 口 위에 사람을 'ㅣ' 으로 표시한것은 우리와 같이 천부인 천부경 이 사상이 없는 다른 민족은 만들수 없는 글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아래 그림에서 모 자 같이 써진것은 口인 땅 아래 사람이 서 있다는 말이니 이는 중국인이 만든 글자이고 이 중국인들은 천부인 天地人원방각 ㅇ ㅁ △이 무엇인지 모르니 그래서 위 天 자 풀이에서 보듯이 중국인들은 사람의 머리까지 口으로 그린것에 유의 하면서 금문이란 우리 조상이 만들었다는것을 알아야 할것이다. 중국인들은 왜 사람의 머리가 口 가 되는지는 다음에서 더 설명한다.
* 工 자. 금문 > 갑골문 그림 (역시 ' 甲骨文字형字典- 北京長征出版社 발행' 을 인용)
이상으로 볼때 금문과 갑골문은 큰 차이가 나는것이 아니고 또 어떤 통일된 금문이 갑골문으로 변해간것도 아니며, 금문이란 그져 우리 선조들이 부족한 말이나 글자를 보충하기 위하여 그림으로 그렸던것인데 그림이 통일될리가 없었으니 뜻이 같은 그림이 위 그림에서 보듯 수십가지나 되고 특히 우리말 '업'이 한자로는 福 인데 그 그림글자는 무려 수 백개가 된다.
어떤 분들은 어떤 유물이나 과학적 근거도 전혀없는 부도지 등만을 신봉하여 우리 민족이 수만년전 부터 문화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믿는데 문화생활을 하려면 우선 연장을 만들 쇠붙이가 있어야 하는데 신석기에서 청동기가 나온것은 불과 5-6 천년전이라는것은 이미 과학적 검증이나 당시 글자로 증명되었고 또 문화생활을 하려면 말과 글자가 풍부했어야 하는데 위 그림이 엉터리 같은 글자로 변하는것도 역시 5-6 천년 전이니 허무 맹낭한 전설만 믿을게 아니라 보다 냉정하게 논리적으로 생각해 봐야 한다. 즉 이 그림 > 금문> 갑골문, 또 가림토등은 생긴지가 길게 잡아야 5-6천년전 이라는것은 어떤 근거를 봐도 알수 있다.
이 초기 금문이 우리 조상이 만들었다는것은 위 工 자 그림 口 에서도 나타나는등 그 근거가 너무 많고 또 아래 설명에서도 나타난다.
이렇게 우리 조상들이 그린 금문, 은허갑골문을 지나족이 가져다가 진시황때 대전(大篆), 소전(小篆)을 거쳐 자기네 말로 발전 시켰고 우리는 우리 가림토는 발전시키지 못한채 그것을 삼국초에나 역수입해서 쓰는것이며 그 한자만 쓰는 사람들이 우리나라 역사를 관장했던 선비들이다.
한자가 중국 글자라면 펄펄 뛰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 객설 같지만 몇 마디 한다. 훈민정음을 만드신 세종도 " 國之語音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故愚民有所欲言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易習使於日用矣" 즉 " 나랏 말쌈이 듕귁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매 어린 백성이 말하고자 하나 종래 그 뜻을 얻지 못하는자가 많으므로 내 이를 민망히 여겨 28자를 새로 짓고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익히여 날마다 쓰게 하려 한다 " 이다. 그렇다면 한자가 만약 우리 글자라면 왜 세종은 새로히 훈민정음을 만들었을까? 또 한문과 우리말은 그 어순이 다르다, 즉 異乎中國을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 다르다 중국과.." 이다. 그러나 우리 말로는 " 중국과 달라서" 이다. 또 一二三四...를 중국인들은 "니얼산스" 하면 되는데 우리는 한일,두이 석삼, 넉사 하고 일단 번역해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한자가 우리 글자라면 왜 우리가 한자를 번역해야 안단말인가? 이 이외에도 한자가 우리 글자가 아니라는 증거는 너무 많다. 그러므로 한자의 원조인 금문은 분명 우리 선조들이 우리 말과 글자가 부족하여 그림으로 보충 하던것을 중국인들이 가져다 자기네 말에 맞추어 주어 발달 시켰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역 수입해 쓰면서 한자가 우리 글자라 하는것은 마치 미국 자동차 박람회에 가서 달구지의 원조는 우리이니 자동차도 우리가 먼저 만들었다는것과 같다.
다시 본론으로와 이상으로 위 그림에 나타나는 天,大, 太, 夫, 人 ㅣ 은 모두 사람을 기본으로 하는 같은 글자이다.
다시 다음 그림
수레를 밀고있는 天자 같은 사람은 큰 사람에 비해 아주 작은 사람이니 하인이나 일반 백성을 뜻한다.
그리고 이 작은 사람이 수레를 밀고 있다는것은 사냥을 하러 언덕길을 올라가는것이라고 생각할수도 있겠으나 한편 그 천제를 자내던곳이 약간 경사진곳 이라는것을 나타내는것 이라 할 수도 있도 또 고각, 즉 바위에 새겨진 옛 그림은 그 특징만 나타내니 어딘가 올라간다는것은 하늘에 제를 올리고 있는것, 또는 그 부근에 어떤 바위 형상이 그렇게 생겼을 것이니 이것이 환웅이 사냥을 나온것 이라고 생각해 봐도된다.
다음 그 큰 사람 앞, 뒤 로는 나무가 있는데 뒤의 나무는 수직으로 서 있는 정상적 나무로 위 수레가 수평이 아니라는 근거이며 앞의 나무는 벼랑 즉 암벽에 붙은 나무이니 약간 경사가 져 있다.
이 그림도 그 천제를 지내던 위치를 표현했다고 봐도 된다.
그런데 이 나무들은 가지가 꼭 두개씩 으로 자루가 달린 出 자 모양으로 그렸다. 이는 보통 나무를 그리다 보니 그렇게 ?다고 할지도 모르나 앞 뒤 의 모든 나무가지, 또는 아래 환웅을 뜻하는 수메르 우르문자 에서 나무가지가 하나 나, 셋 이 아니고 꼭 두개 인것으로 보아 이는 환숫(환웅)을 상징하는것이다. 즉 수레에 탄 큰 사람은 환웅이란 말을 상징적으로 말 하는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환웅을 뜻하는 나무를 신지녹도전자 천부경 하나의 하 에서는 아래 그림과 같이 자루가 달린 山 자 두개로 표시했다.
* 아래는 신지녹도전자 천부경 하나의 하
위 하 자는 나무가지가 하나씩하여 결국 두개 이지만 얼마후 위 낭하리 그림이나 또 고대 금문, 그리고 우리와 동족인 쐐기문자의 어머니 수메르 우르 문자에서는 위 가지가 한 나무에 두개인 자루가 달린 出자 모양으로 단축되는데 그 뜻은 같다.
* 수메르 우르문자의 나무들 (EBS 방영에서 촬영한것)
역시 가지가 두개씩인데 이도 환웅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그림이다.
그러면 이 자루달린 出 자가 왜 환웅을 뜻 하는가?
위 낭하리 그림이 환웅과 연관이 있다는 증거이며 초기 금문이 우리 선조들이 만들었다는 증거가 된다.
즉 환웅은 우리말로 환숫, 즉 환한부족의 숫컷이다. 숫컷이란 지금 우리 상식으로는 동물에게나 붙이는 매우 비천한것이지만 이 숫에서 슷응> 스승, 슷님 > 스님이 나왔으니 당시는 매우 존귀한 존칭이다.
이 숫은 하늘로 부터 정기를 받아 씨를 불알(불= 붉 = 밝. 알)에 저장했다가 땅인 여음에게 뿌려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데 그 상징적 표현이 바로 나무로, 나무는 태양의 빛을 받아 땅에 전한다.
환숫은 사람을 대표하므로 天地人 천부인 원방각 (圓方角-ㅇ ㅁ △ ) 중에 사람 천부인 △ 으로 무속으로는 삼지창이 된다.
이 △ 으로 만들어진 ㅅ 은 일단 서는뜻이 있으니 서는 동물인 사람 이되지만 다시 ㅅ 이 붙어 사람이 섯다 하면 ㅅ 하나가 더 들어가 섯 이 되어 또 서는것? 이 붙은 사람중에 사내가 되고 이 섯이접미사 이가 붙어 결국 셋 이된다. 그래서 셋을 최치원 81자 에서 말 하듯 人一三 이다. 즉 人一은 사람의 첫째, 핵심이란 말이고 三은 셋 이니 사내를 세운다는 말이다,
따라서 신지녹도전자 천부경에서 셋은 다음과 같이 삼지창이 위 아래로 두개가 붙는데 이는 아래 甲金蒙隸大字典 -四川辭書出版社 刊 의 맨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 와 같다.
* 木자 금문의 여러 형태. 甲金蒙隸大字典 -四川辭書出版社 刊
木자의 첫 글자와 끝 글자를 유의해보시라.
그리고 이 아래 거꾸로된 삼지창은 우리 민족만이 썼던 솟의 다리가 되고 삼족오의 다리가 세개가 되는 근거가 된다.
그러니까 환숫의 상징은 삼지창 두개가 되는데 나무 등을 그릴때는 신지녹도전자 하나의 하 에 있드시 자루가 달린 山山 이었으나 그 글자가 금방 간편화 되어 금문이나 수메르 우르문자에서는 자루가 달린 出 자로 변한것이다.
우리는 이 환숫을 상징하는 나무를 곰네(웅녀)가 아이배기를 빌었던 신단수(神壇樹)라 하였고 솟터(蘇塗)에 모셔놓고 제를 올렸으며 이것이 전래되어 지금 바이칼호 주변 부라이트족,울치족, 나아이족, 그리고 몽골족 등의 오보가 되고 이 오보 란 옵 인데 우리말에 검둥이 감둥이가 같은말이듯 모음이 혼동?으니 옵은 압 과 같은말이며 압 이란 아비 이니 결국 그 말의 뿌리는 우리 말이며 이 환웅을 상징하는 숫은 우리에게는 서낭나무가 되었다.
그리고 이 오보나 서낭나무 둥치에 둘른 오색천은 환숫의 신성한 음모를 뜻하고 나무가지 위 씨앗 자루는 고환을 뜻한다.(신지녹도전자 천부경 해독과 수메르우르문자, 꽤기문자 해독 참조)
그러니까 위 낭하리 出자 나무 그림은 무엇으로 보나 분명 환웅을 상징하는것이며 또 이 그림으로 위 신지녹도전자가 금문, 수메르 우르문자로 변하는 과정을 엿볼수가 있다. 즉 인류 최초의 문자는 신지녹도전자이고 거기서 금문이나 가림토가 나왔기 때문이다.
다음 그 큰 사람 앞의 나무는 그 방향이 약간 옆으로 기우려져 있다. 이는 암벽에 붙어있는 나무라 했는데 역시 자루가 달린 出자이다.
* 다음 아래그림은 암벽이나 그 암벽에 들어가는 門 까지 그린것 같은데 이 그림도 아주 중요하니 잘 관찰해 보자.
이 그림은 그냥 암벽뿐 아니라 암벽과 바닷물 그림이라 잔영이 보인다. 그런데 그 잔영에는 초사흘 달과 같은 반달과 해의 그림, 아니면 큰 별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우리 눈으로 가장 크게 보이는 별은 샛별인 금성이다.
* 샛별인 초사흘달은 한편 초승달이라 하는데 달 중에 이 초사흘달이 새색씨 눈섭처럼 가장 예뿌다 한다.
아래사진은 지구인만이 볼 수 있다는 아름다운 초사흘 달이다. 흔히들 보름달이 더 아름답다지만 보름달은 다음날밤 부터는 죽는 달이고 이 초사흘달은 앞으로 살아나는 달이다.
야후에 올라있는 글, 그림을 올린다.
작자 : 허세욱(許世旭). 노고단에서 다시 차가 있는 성삼재로 돌아왔을 때의 시각이 오후 6시였다. 서남쪽 하늘에 초승달이 떴다.
이 달이 초승달인지 아닌지는 필자는 모른다. 그러나 사진이 황금비율이 맞는 아름다운것 등으로 보아 유명 사진작가가 찍은것이고 저녁 6 시경이라 했으니 초승달이긴 한 모양인데 초승달은 우측의 배가 나와야 하므로 필자가 임의로 사진을 뒤집은 것이다.
* 초승달 이미지 ... HORNED MOON. IMAGE. 공주성의 초승달. 태극기와 초승달. 서울 ...
금성과 초승달의 랑데뷰
그러니까 위 바다에 비친 그림은 초사흘달과 금성일 수가 있다.
그러나 현지인들의 말에 의하면 신비하게도 이곳에서만은 어떤때에는 달과 해의 잔영이 동시에 다 바닷물에 비치는 곳이라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초사흘 달과 해가 그렇게 만나는 시기일수도 있다.
한편 초사흘 달은 매월 나타날수 있으나 그 초사흘 달이 금성이나 해와 그렇게 가깝게 만나서 물그림자가 비치는 날은 각자 궤도, 공전주기가 다르니 흔치 않을것이다. 어쩌면 일년에 한번만 그런 현상이 일어 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일년에 한번 만나는 날이 달력이 아예 없었거나 있다해도 시원치 않았을 당시 이런 그림으로 표시했는지도 모른다.
환웅당시에 달력이 없었다고 하면 또 환단고기를 인용하여 반박할지 모르니 이를 미리 말 하다.
환단고기 마한세가 상 에는 " 옛날에 환웅께서는...달력을 365일 5시간 48분 46초로 일년을 만드시고.... 라는 기록이 있다. (三韓管境本記(馬韓世家上) 에 昔者桓雄....曆以三百六十五日五時四十八分四十六秒爲一年也)
그러나 이것은 후세인이 너무 조상을 받들다 보니 이런 가필을 붙였다고 생각된다. 아니 그때 벌써 분과 초가 있었다니... 이는 이조중기 이맥의 가필도 아니다. 시계가 우리에게 들어온 후의 계연수나 이유립의 가필로 보인다. 이런 가필때문에 아직도 환단고기가 위서로 취급되는것이다.
우리는 하루의 시간을 子丑寅卯...등 12 시간으로 하였으니 지금 2 시간이 전에는 1 시간이었고 이것도 시계가 없던시절 어림 짐작이었으며 또 특수층에서나 쓰는 시간이었지 일반백성은 새벽, 아침, 점심, 저녁, 밤 이라 했고 그것도 정확한 시간이 아니니 아침나절 저녁나절...하는 나절 이란 말을 썼다.
그러니까 겨우 신석기 문명이 끝나고 청동기 문명이 시작된 환웅, 단군때 벌써 일년이 365일 5시간 48분 46초가 있었다는것은 그때 그분들이 그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우선 위 그림이나 금문에서 보드시 그런글자를 가지고는 달력을 만들수는 없다는것이며 또 그때 사람들 한테는 그런 분 초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환웅 단군때는 달력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시원치 않았을 것이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시와 또 천체 돌아가는것을 보고 계절과 날짜를 짐작했다고 보야한다
그러므로 위 초사흘달과 금성, 또는 해가 만난다는 환상적 그림은 아마 원시 달력 을 그렇게 표시했을 것이고 이것은 상고시대 일식현상의 기록을 슈퍼컴퓨터로 시물레이션하여 환단고기가 위서가 아니라는것을 입증시킨 서울대 박창범 교수같은 천문학자가 현지를 기준으로 증명해 보거나 아니면 일년내내 현지에서 관측해 봐야 하겠지만 우선 필자의 짐작으로는 음력 10 월 상달 초 사흣날이 될것이다.
그럼 이 날이 무슨날인가?
바로 앗선(첫조선)을 세운날이다, 즉 하늘이 열린 개천절이다.
다음 바위 우측 T 자 같은것과 또 그 옆 아주 많이 펴진 ㄴ 자 같이 휜 'ㅡ' , 그리고 큰 점 이 있는데 여기서 T 자의 뚜껑인 위 'ㅡ' 은 하늘이며 T 자를 세운 'ㅣ' 은 工 자에서 보듯 사람이 서 있는것이며 다음 큰 점은 시각을 나타내기 위한 지는 해 이거나, 새로솟은 샛별일 것이다.
해는 어떤 금문에서는 ㅇ 으로도 그렸으나 그냥 큰 점으로 표시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헷갈리게 하는것은 바로 그 T 자 옆 구름같은 아주 많이 펴진 ㄴ과 같은 'ㅡ' 그림이다.
이는 T 자 뚜껑이 하늘이니 그 옆에 있는것은 하늘의 구름이라고 할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신지녹도전자 천부경의 하나 둘 셋 ...열 중 '하나' 의 나 에 나타나는 누리를 뜻하는 아주 많이 펴진 ㄴ 과 같다.
* 아래 그림은 신지녹도전자천부경 하나 에서 나 에 해당하는 그림으로 아주 많이 펴진 ㄴ 이라는, 누리(땅) 위에 햇살이 비치는 그림이다. 우리 선조는 빗살무니 토기에서 보듯이 햇살은 꼭 빗금이다.
그리고 땅은 어떤 금문에서는 천부인 원방각ㅇ ㅁ △ 중 땅인 ㅁ 으로도 나타나고 그냥 ' ㅡ' 으로 나타나지만 신지독도전자나,초기 가림토에서는 위 그림과 같이 아주 많이 펴진 ㄴ 와 같이 나타나고 또 어떤 금문에서의 王 자는 위 'ㅡ' 은 하늘, 다음 十 자는 大자나 아예 생식기 까자 붙었던 太 자 이었고 그 아래 땅 이라는 'ㅡ'도 평지가 아니라 가운데가 나왔거나 위 그림같이 아주 많이 펴진 ㄴ 형태의 땅 으로 나타난다.
* 아래 그림을 사마천의 사오본기 에서는 전욱(?頊) 이라 했는데 ?자는 오로지 란 뜻이고 頊는 멍청한 사람이라는 뜻이니 이는 멍청한 사람을 뜻하는 글자라 하였다.
즉 중국 학자들은 위 둥근것은 모가 져있지 않으므로, 즉 사람은 개성이 있어야 하는데 모가져 있지 않으므로 멍청한것이라 하여 멍청이의 아들 왕이...라고 해독하는데 그 근거는 두번째 글자를 뛰는아이 즉 子 로 보고, 다음은 王자 같이생겼으니 王 이라 하는데 그 글자가 왜 임금인 王 이 되는지는 모른다.
* 가(心 변에 各)齋集古綠 上下 대련국풍출판사 에서 인용.
지금 미 부리티지 박물관 소장 코뿔소 술 두르미 안쪽에 새겨진 금문중 첫번째 글자.
또 다른 중국학자는 위 둥근것을 연못으로 보아 연못의 아들 왕이...라고 해독하기도 하는데 근대 금문해독의 권위자 라는 낙빈기 조차 이것을 구슬로 보아 구슬의 아들 왕이...라고 해독하고 있으니 말이되질 않는다.
그러나 필자는 우리 말, 우리 글자에서는 못쓸놈, 몹쓸것등 모가져 걸림이 있는것은 가림토, 훈민정음, 한글에서도 ㅁ 을 쓴다. 즉 땅인 물질은 항상 걸림이 있으니 모가진 땅 천부인 ㅁ 을 써서 말과 글자가 만들어진것이고, 우리의 상식은 하늘 천부인 ㅇ 처럼 걸림이 없고 원만해야 한다는것이기 때문에 맨위 둥근것을 멍청이로 본다면 이는 크게 잘못된 생각이고 다음 子가 같은 글자는 아이라고 하기에는 머리가 너무크고 또 하늘을 나는듯한 그림이니 아직 子가 되기전 하늘의 정령, 정기라고 보는것이 타당할 것이며 마지막 王 자는 중국인들의 해독과 같으나 그것이 왜 王자로 나타나는지 까지 설명한다.
王 자는 하늘, 즉'ㅡ' 아래 가장큰 것이 사람이니 'ㅡ' 아래大 를 쓴것이고 마지막 그 사람은 평지가 아닌 가운데가 솟았거나 또 많이 펴진 ㄴ 과 같은 땅 위에 서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늘과 땅 사이의 사람이고 사람의 대표가 바로 임금인데 우리말로 임금은 신라 임금 이사금 에서 말하듯 잇큼 > 임금 이며 이를 한자로 쓸수 없으니 이사금(尼師今)이라 쓴것이다.
이를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이빨금이라 했지만 잇 이란 잇본(日本)에서 보듯이 해 이며 금은 큼 이다. 따라서 임금이란 해와 같이 큰 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필자의 위 코뿔소 두르미 속 명문의 해독은 하늘,해의 정기를 받은 임금 이라고 해독한다.
이렇게 금문은 우리 상식으로 만들었기때문에 중국인들의 말과 상식으로는 해독 할 수 없다는것이며 그래서 지금까지 고조선 유적지에서 만여점이나 출토된 금문을 중국인들은 아직까지 천점도 해독하지 못했고 그 해독했다는것도 위에서 보듯 엉터리지만 우리가 우리 말과 우리 상식으로 풀면 쉽게 풀린다는것이며 따라서 금문이란 우리가 글자와 말이 부족했을 당시 이를 보충하려고 그렸던 그림을 중국인들이 가져다가 제멋대로 해독하고 덧붙여 글자를 만들고 자기네 말로발전시켰다는 것이다.
* 이상 신지녹도전자 하나의 나 나, 위 王자의 땅 부분 그림에서 보듯이 T 자 옆 구름같은 그림은 누리(땅) 를 표시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 많이 펴진 ㄴ 의 뜻은 누워있다는 뜻으로 이 그림은 나중에 가림토에서는 진짜 누리 라는 ㄴ 으로 나타나며 이는 훈민정음이나 한글에서도 같은데 그래서 ㄴ 으로 시작되는 순수한 우리말은 모두 누워있는것 뿐이다.(필자 책 참조)
그러니까 이 그림은 하늘 땅, 그리고 사람이며 그 옆 점은 아마 지는 해나 아니면 초저녁의 금성일수 있으니 시간을 나타내는것 이라 봐야 하는데 하여간 그 점이 있다는 것은 천지인으로 볼때는 군더더기 이다.
그런데 이 천지인을 한꺼번에 나타내는 중요한 글자 뭉치가 왜 작게 표현된 것인가?
이는 여기에 그려진 그림 전체는 天地人을 뜻하는 부호이며 싸인이며 마크이기 때문이다.
* 이상으로 보았을때 이 그림, 글자는 절대 할일없는 자가 그린 무의미한 그림이 아니다. 먼저 말 했드시 신석기에서 겨우 청동기가 되어 연장도 별똥별 조각이나 청동기 정 등 시원치 않았을 원시, 누가 누구 보라고 이렇게 정성들여 석각을 했단 말인가? 이는 분명 환웅의 흔적이나 또는 현지에 있을 환웅의 상징적 바위를 보고 새겨놓은 것으로 봐야 한다.
또한 이곳은 당시로 보아서 땅끝이 되기 때문에 천하를 순시하시던 환웅께서 직접 여기에서 하늘과 바다를 포함한 땅에 천제를 지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 그 분은 환웅이 아니라 환웅을 바뜨는 단군일수도 있으며 단군의 신하 삼시랑(三侍郞), 또는 전국에 단군의 도를 이어받아 지방 백성들의 일을 관장하던 당골레 였을 수도 있지만 누가 지냈건 주체적 인물은 환웅이다.
하여간 이 그림은 상고시대 누군가가 개천절날 천제를 지내고 또 후세인에게 그날을 잊지말고 지내라고 여기에 그 지형과 또 달력으로 날짜까지 표시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기록이 '환단고기' 에 인용된 " 환웅이 여기에 사냥을 나왔다가 삼신제를 지냈다" 는 말로 기록?을지을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아직까지 환단고기가 비록 가필은 많을만정 위서만은 아니라는 증거 31 개를 정리해 놓았는데 이 그림은 환단고기가 위서가 아니라는 또하나의 입증도 된다.
한편 이 그림은 서불이 불노초를 구하러 다니다가 흔적을 남겼다는 말은 배제해야 한다. 우선 진시황때는 이미 소전(小篆) 대전(大篆) 이라는 지금 한자의 전신이 있었고 이는 위 낭하리 석각본의 신지녹도전자, 초기 가림토, 금문 보다 최소한 2 천년은 뒤진것이며 또 이 그림에는 십장생에 나오는 불노초(영지버섯) 나 불노초의 상징적 그림이 없는것으로 보아 서불이 불노초를 구하러 다닌 기록이 아니라는것이다.
고각의 그림해독에서 주의할것은 위에서 보았드시 그 요점만 그리는 법인데 이 그림에는 하늘과 바다 암벽등 땅과 그 땅의 나무, 그리고 사람등 天地人 삼극만 있을뿐 불노초는 없다. 즉 서불의 상징은 바로 불노초 인데 그 불노초가 없다.
서불이 불노초를 구하러 다닌 흔적은 해금강에 있으니 가까운 여기다가 또 그려 놓을 이유도 없다.
결론은 이 그림 글자에서 신지녹도전자, 금문, 수메르 우르문자, 가림토가 혼용된 天地人을 뜻하니 이 낭하리 석각은 세계 역사상 그림이 글자로 변하는 과정을 한꺼번에 말하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고 이는 우리의 국보인 동시 인류 문화 유산의 하나가 되니 유네스코에 등록할 필요가 있는것이다,
또 꿈같은 기대인지는 모르나 우리나라 진도등지에서만 나타나는 모세의 기적처럼 초사흘 달이 금성과 만나 물그림자에 비치는 날, 이런 환상적인 하늘의 신비가 바로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이고 달력이라면 우리 조상들의 천문관측 수준은 더 말해 무엇하랴?
이 낭하리 고각해독에 더 확실한 실증을 찾기 위해 필자는 2006.11.23 일 그러니까 개천절 전날 이 낭하리에 가서 양 이틀간 현지 탐사해 본 결과도 이와 같다. 금산 낭하리 고각 탐사기를 보시면 더 확실히 알것이다.
2.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 낭하리 고각(古刻)해독과 현지 탐사 정리
(1 번에서 계속. 이 글은 1 번 낭하리 고각을 해독해 보고 그 실증을 위하여 현지 답사를 해 본 결과로 앞의 해독문을 실증하는것이다. 필자는 이 글을 정리하면서 객관적 입장으로 부정해 보려 했으나 필자는 부정 할래야 부정할 수 가 없다. 이 글을 읽어 보시는 독자님들의 반론을 바란다.)
2.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 낭하리 고각(古刻)해독과 현지 탐사 정리
이 필자가 찍은 이 고각(古刻)사진이나 전해오는 그림, 또는 인테넷 사진은 거꾸로 된 것이고 그 거꾸로 된 이유가 있었다.
필자가 신지녹도문자, 수메르 우르문자, 초기 가림토, 원시 한자인 금문 등을 해독하여 독자님께 전체 메일을 보내는데 독자님이 낭하리 고각(古刻)의 해독을 의뢰 했다. 필자는 임승국님이 번역 주해한 한단고기에도 그 그림이 실려있고 또 여러 문헌에도 실려있던 그 그림을 한번 보고는 어떤자의 낙서인줄 알고 그냥 지나처 버린 일이 있는데 독자님의 질문을 받고 다시 검토해 보니 이 낭하리 고각 그림은 꺼꾸로 뒤집혀 있어 그간 해독이 되지 않았음을 알고 우선 바로 잡아 보니 대략 그 뜻을 짐작할 수 있어서 필자카페 '신지녹도전자 천부경 해독' 114 번에 올린바 있었는데 이는 그림이 원시글자인 신지녹도전자, 초기 가림토, 또는 금문이 혼재되 있어 인류가 글자를 만드는 시초가 되므로 이는 우리 국보뿐 아리라 세계 인류 문화 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록하고 길이 보전해야된 귀중한 문화 유산이라 했다.
더구나 이 그 고각 그림, 글자는 필자의 기대 일지 모르나 잘 분석해 보면 이 그림은 신비하게도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 필자의 해독만으로는 그 고각 그림이 왜 환웅을 말하는지 확증이 부족함으로 현지 답사를 하여 더 증거를 ?고자 2006.11.23 일 음력 개전철 전날 현지를 방문 하고 다음날 까지 현지를 조사 했었다.
그 결과 그간 환단고기에도 써 있드시 이 고각의 흔적은 확실히 환웅을 모델로 그려진 것이며 환단고기에 전해지는 전설이 전혀 허무 맹낭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증거들이 너무 많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 낭하리 고각은 우리 학계에서는 그간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면 중국 일본학자들이 몰려 와 탁본이나 사진을 찍어 간다는 것인데 만약 우리 문화 유산을 우리가 해독을 하지 못하고 동북공정을 하려는 중국인, 또는 우리 역사를 말살 하려는 일본 학자가 먼저 해독하여 발표 하고 이를 정설화 한다면 이는 우리 한국인의 망신이고 또는 다시한번 우리 단군실화가 신화로 추락하게 될지도 모르니 다급한 생각이 들어 필자의 기대일지도 모르는 초승달과 샛별(금성)이 만나는 "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 만큼은 아직 실증이 되니 않은채 이 글을 정리하고 여러 독자님께 알린다.
( 또한 소문을 듣건데, 남해도 낭하리(郎河里) 의 계곡과 경박호(鏡珀湖) 선춘령(先春嶺)과 오소리(烏蘇里) 바깥의 암벽 사이에서 언젠가의 조각을 발견하였는데, 범자(梵字)도 아니고 전자(篆字)도 아니어서 사람들은 알수가 없는것 이라 했으니 이것이 신지씨가 만든 옛 글자가 아닌지 모르겠다.)
(대변설大辯說>>의 주에 말하기를 “남해현 낭하리의 계곡의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이 있다. 그 글에 <한웅이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리다>라고 있다”고 했다. 또 가로대 “대시 大始에 옛것을 전함에 있어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에만 의지한 지 오래이다. 나중에 형상을 그림으로 그렸고 또다시 그림이 변하여 문자가 되었다.)
* 진시황때 서불(徐示)이 불로초를 구하러 다닌 흔적이라는 서불제명각자(徐市題名刻字) 또는 "서불이 이곳을 지나가다"라는 의미의 서불과차문(徐市過此文)이라 불리어 왔다.
또 인터넷에 올라 있는 글을 보면
* ....이 신지 전자의 초기 모습이 바로 위 그림 맨 왼쪽의 낭하리 암각화다. 환단고기에 인용된 대변설의 주에 이르기를 “남해현 낭하리에 계곡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古刻)이 있다. 그 글에 환웅천황께서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린다고 했다”고 하였다. 그 개량된 형태가 1942년에 발행한 영변지에 실려 있다. 환단고기의 저자 계연수 선생이 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에서 천부경이 새겨진 옛 비석을 발견한 내용과 더불어 신지 전자(篆字)를 옮겨 놓은 것이다. 환단고기를 세상에 공개한 이유립 옹도 저서 대배달민족사에 평양 소재 법수교 고비(古碑)라고 밝히면서 신지 전자(篆字)를 소개해 놓았다. 그밖에 구한말 서예의 대가인 김규진이 저술한 서법진결과 백두용(白斗鏞) 편,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에도 신지 전자가 실려있다.
*또한 "최치원(崔致遠)이 일찍이 신지(神誌)가 새겨진 옛비석을 찾아 . . . 즉 낭하리(郎河里)의 암각(岩刻)이 그것(神誌)의 실제 흔적(痕迹)인 것이다." 등으로, 과거부터 여러 문헌에서 보이고 있다. (이하 생략)
3. 지명이 말해주는 증거.
위 환단고기 내용만으로 낭하리 고각이 환웅과 관련이 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그러면 그 지명에서 혹 환웅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까? 필자는 낭하리 고각을 탐사하고 돌아와 다음 일요일 혼자 등산을 해 가며 더 곰곰히 행각해 봤다.
지금 그 동네 이름은 남해군 양아리(南海郡 良阿里) 양이 마을 이라 한다. 그러나 환단고기 기록에는 남해현 낭하리(南海縣 郎河里)라 한다. 그렇다면 낭하리가 양아리로 된것은 선인들이 왜? 낭하리 라고 했는지 그 뜻을 몰라가지고는 한자로 보나 어음 으로 보나 그렇게 부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쓰는 한자가 정립된것은 삼국 초 이니 그 전 우리 말로는 뭐라고 했을까?
지금 전국에 걸쳐 있고 우리가 맥도 모르고 부르는 우리 행정 지명과 촌노들이 말하는 우리 지명을 비교해 보자. 몇가지 예를 들면 지금 우리 지명 중에 大田 이 있는데 과연 우리 선조들이 대전 이라고 했을까? 이는 큰 밭 이란 뜻의 한밭 이 한자로 기록하다 보니 大田이 된것이고 작은고개 라는 애오개가 이제 아현동 이 ?으며 전에 말한 필자의 고향 틀무시는 지금 기지시리(機池市里) 인데 그 이유는 틀무시는 애초 틀못이던것이 틀은 베틀機자를 쓰고 못 은 못 지池를 쓴것이며 市는 틀못에우리가 그 즐겨 붙이는 약방의감초격 접미사 이, 즉 갑순이 갑돌이 하는 이 가 붙어 틀못이> 틀무시 가 되고 그러다 보니 里에 불과한곳에 市 가 붙었으며 이 순수한 우리 지명을 한자로 쓰자니 機池市里 가 되었다 했다.
그렇다면 낭하리(郎河里)도 한자가 들어 오기전 분명 우리 말이 있었을 것이다. 뭐라고 했을까? 필자는 걸으며 생각 하다가 깜짝 놀랐다. 그 전 우리말로는 틀림없이 '앵무리' 였을 것이다.
왜 앵무리 인가? 한자로 기록되는 郎 은 바로 삼시랑(三侍郞)을 말 한다. 가림토를 창제한 사람도 삼낭(三郞) 을보륵이고 ‘고려팔관잡기에 또한 말하되 삼랑(三郞)은 배달의 신하이다. 씨를 뿌리고 재물을 관리하는자를 업(業)이라하고 교화와 복에대한 위엄을 주관하는자를 랑(郞) 이라하고 무리를 지어 공 이름을 주관 하는자를 백(伯)이라 하니 즉 옛날 하느님 시대에 발달된 풍습이다.’ (高麗八觀雜記亦曰三郞倍達臣也主稼種財理者爲業主敎化威福者爲郞主聚衆願功者爲伯卽古發神道也)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郎은 분명 삼시랑을 말하고 그 이외도 우리 사서에서 삼시랑은 그냥 간단하게 郎 이라 한 기록이 너무 많다. 그렇다면 郎, 즉 삼시랑은 환웅 단군등 삼신을 받드는 직책이고 또 지금 전라, 충청지방의 할머니 들이 자녀를 10 여명 이나 낳았고 누가 " 할아버지와 금슬이 좋아 자녀를 많이 두었느냐?"고 물으면 " 금슬은 무슨 놈의 금슬? 삼시랭이가 주책이 없어서 그렇게 ?다고 한다. 즉 삼시랑은 옛 부터 우리의 임신과 출산을 담당했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 지금 국어사전에서 화랭이 를 찾아보면 이는 ' 男巫', 즉 남자 무당으로 나오는데 화랭이의 원 말은 환한나라 앵이(앙이, 옹이)즉 환한것이 송판의 앵이 처럼 뭉처진것을 말하니 바로 환앵이가 화랭이가 되고 이것이 화랑도(花郞道) 가 ?으며 또한 이것은 풍월도(風月道) 라 하는데 風은 바람이고 月은 달 인데 달 은 우리말로 음달 양달 하는 달 이기도 하니 풍월이란 바달 >밝달 이며 환웅이 세웠다는 배달(培達)은 바로 밝달 의 변음이고 또 단군왕검의 우리말은 밝달임금이다.
따라서 위 앵무리 의 앵 은 옹이, 앙이의 앙 에 우리말에 거의 붙어 다니는 접미사 이 가 붙어 앵이가 되고 이 앵이 한자로 바꿔 쓰면서 환앵이가 무당인 화랭이가 되고 또 이것이 화랑(花郞)이 되듯 이 앵이 郎 이 ?을 것이다.
또 앵물이의 물 은 낭하리의 하 가 물河자 이기때문이기도 하지만 낭하리 석각 그림이나 또 그 석각 앞에 바닷물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앵무리 의 리 는 지금 里 가 아니고 위 틀못이 가 틀무시 가 된것같이 앵물이> 앵무리 가 ?을 것이다.
또 위 낭하리 고각위 산 정상에 단군성전이 있는데 이 건물은 지은지는 몇십년 되지 않으나 예전에는 석굴이 있었던 자리였으며 지금도 그 석굴에서 수도를 하시던 77 세되신 선사님? 과 그 할머니를 보좌하고 있는 부부가 단군성전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그 선사님은 다른지방의 음력 개천절을 지내러 가셨다 하므로 필자는 만나지 못하고 그를 보좌 하고 있는 분께 설명을 듣고 질문했다.
" 그럼 그 선사님은 혹 1960년대까지 진도 지방에 남아있던 단군의 도를 세습한 세습무인 당골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는 펄쩍 뛴다. 무당이 아니라 선사 라는 것이다. 그러나 단군의 도를 전하는데 우리 말로 선사(仙師)란 우리 말이 아니다. 단군때는 단군왕검 혼자 전국에 그의 도를 펼 수 없으니 각 지방에 단골> 당골레를 두고 사법 행정, 무속, 즉 누가 분쟁이 있으면 팔결 해결해 주고 또 아이들 혼인날짜나 제례뿐 아니라 심지어 굴뚝 고치는 날 까지 관장 하신 분이 있었고 일반 백성은 보리때 보리 한말, 벼때 벼 한말씩 바치고 그저 아이들 감기만 들었어도 단골집을 드나들기를 지금 단골집 드나들듯 했으며 그래서 지금 단골의 어원이 바로 이 단골이다.
그는 단군의 도를 세습 하였으니 세습무(世習巫)라 하는데 지금 무당은 단군의 도는 전혀 아는바 없이 당골무의 하는것을 어깨넘어로 보고 그저 신이 내려 흉내나 내고 푸닥거리나 하니 단국의 도와는 전혀 관게가 없는 강신무(降神巫) 일 뿐인데 그 분은 무당이면 같은 무당인줄 알고 펄쩍 뛴것이다.
그분의 말을 들어보면 이 산 원래 이름은 금산(錦山)이 아니라 성모산(聖母山)이란다. 이는 필자도 이미 알고 있었드시 이성계가 여기 석굴에서 기도를 드리고 왕이 되면 이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는다고 서약했으나 막상 건국하고 왕이 되자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을 수 없으니 비단금(錦) 자를 써서 錦山이 됐다는 것이다. 그럼 그 전에는 뭐라고 했을까? 바로 성모산 이라는데 성모는 마리아가 아니다. 우리 민족에게 성모란 단군의 어머님이신 곰례(熊女) 일 것이며 그렇다면 이 산 이름은 웅녀산 이었을 것이다.
그럼 왜 이산이 웅녀 산인가? 하긴 여기에는 전에서 부터 임신과 출산을 관장했던 삼신할매, 즉 아기를 낳으려면 빨이 나가라고 우리의 볼기짝을 때려 엉덩이가 시퍼렇다는 그 몽골반점의 원인 삼신할매인 웅녀나 또는 그를 대신하는 삼시랑, 당골레가 수도를 했고 일반 백성이 그 당골래 한데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자주 올라오다 보니 이 산이 웅녀 산이라 했을 것이고 이를 신성시 하기 위해 성모산 이라 했는지도 모른다.
4. 웅녀상이 말하는 증거.
그렇다면 그 웅녀의 흔적이 하나라도 있어야 한다.
" 성모님 상이 어디 하나라도 있습니까?"
" 예 있지요"
그는 나를 단군성전 뒷쪽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에는 제단이 차려져 있고 아주 오래된 여인상이 하나 있긴 한데 그간 비 바람에 마모 되었는지 눈 귀 코 등이 모두 마도되어 있었다.
" 이분이 바로 성모님 이십니다. 아주 오래된 것이지요"
필자는 사진을 찍어 여러 독자님께 올리려고 했으나 그는 촬영금지 팻말을 가리키며 촬여을 금지 시켰다.
" 아니 사진 촬영을 해서 여러 사람에게 알리고 여러 사람이 여기에 와서 우리 뿌리를 찾게 해야 할것 아닙니까?"
" 선사님 께서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만약 이 성모님 상이 세상에 공개되면 단군의 목을 치러 다니는 광신도들이 그냥 놔 둘것 같습니까?"
이상 말은 들어 보면 이 산 원 이름이 웅녀산 이었고 환웅과 웅녀는 한 쌍이니 환웅과 연관이 없을 수 없다.
그렇다면 그 낭하리 석각이 환웅과 관계가 있다는 한단고기 설이 전혀 낭설일 수가 없고 또 옛부터 전해지는 전설은 전혀 허무맹낭한 이야기 만은 아니며 또 필자의 그간 해독은 완벽 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위 기록에서 진시황때 서불(徐市)가 불로초를 구하어 왔다는 흔적이라는 말은 진시 황때는 이미 지금 한자의 전신인 대전(大篆), 소전(小篆)이 있었고 위 낭하리 고각은 신지녹도전자, 초기 가림토, 금문등이 혼재해 있으니 진시황때 서불 보다는 최소한 2 천년은 앞섰을 것이며 또 낭하리 고각에는 영지 버섯이라는 불로초의 흔적이 전연 없으니 서불의 불로초 이야기는 일단 배제 해야 한다.
또 신지녹도전자 등을 해독해 보면 이것이 대변설의 주 에서 말 하듯 글자 만듦의 시초는 될 망정 그것이 최치원이 보고 해독했다는 신지녹도전자 천부경일 수도 없다.
5. 황웅바위 상이 말해주는 증거
환단고기를 보면 이곳에 환웅이 사냥을 나왔다가 천제를 내내던 곳 이라 했다.그렇다면 사냥은 한 군데서 할 수 없으니 여기 저기 환웅상 바위가 있어야 한다. 필자는 아래 이 낭하리 고각 그림해독에서 수례를 탄 사람을 황웅상 이라 했다. 그 이유는 이 그림 전체에서 보듯이 이 수레를 탄 사람은 전체 그림 비율로 보면 너무 큰 사람이고 또 天가가 밀고 있는데 天이란 하늘일 수도 있지만 금문으로 볼때 하늘을 이고 있는 大자 즉 네 활개를 펴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에 있어서 하늘같이 위대한 사람이 과연 누구 일까?
이 석각 그림과 같은 바위를 찾아 보니 여러군데 있었다. 즉 보리암 뒤에 위 석각 그림과 같이 환웅을 밀고 올라가는 비슷한 바위가 보였다.
물론 아래사진은 수레도 없고 바퀴도 없으며 또 수레를 밀고있는것이 天 자도 아니다. 그러나 이런 바위를 보고 이는 환웅이 올라간다는 뜻, 환웅을 높힌다는뜻을 상징한다고 당시 사람들이 추정했을 것이고 이것을 위 그림으로 나타낸것이 아닌가?
다음은 정말 위 석각 그림과 방향도 똑 같은 바위가 바로 낭하리고각 부근에 있었다.
물론 아래사진도 수레도 없고 바퀴도 없으며 또 수레를 밀고있는것이 天 자도 아니다. 그러나 그림이란 사진이 아니고 추상적으로 그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바위를 보고 이는 환웅을 높히기 위해서 환웅이 사냥을 하러 다닌 흔적이라고 했을수도 있었을 것이고 이것이 전설이 ?는지도 모르고 이것이 환단고기에 기록 ?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6. Y자 같은 길이 말해 주는 증거
위 낭하리 고각을 보면 우선 첫번에 아래와 같은 Y 자같은것과 꺼꾸로 된 Y 가 같은것이 양쪽으로 붙어있는데 먼저 필자는 이것은 일종의 지형 이며 후세인들이 그 자리를 찾아가 천제를 지내라는 지도일수도 있다고 했다.
이 낭하리 고각이 있는곳은 상주 해수욕장에서 보리암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보다 국도를 따라 자동차로 한 20 분으 더 가야 하고 그 고각있는 길은 철조망으로 길은 통제 해 놓았다.
그러나 돌맹이로 지질러 놓은 그 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가 보니 그곳에 올라가는 오솔길은 먼저 보리암 올라 가는길 보다 암벽도 적고 경관도 좋았다. 생각해보니 5 천년전 선조들은 구태어 보리암 등산로를 택하지 않고 이 길을 택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즉 그때는 보리암은 그만두고 불교가 생기기 전이니까 구태어 그 급경사이며 암벽 투성이인곳으로 다녔을 리가 없었을 것이고 또 그 바로 위가 웅녀 신상이 있는 토굴이니 일반 백성들은 당연히 낭하리고각이 있는 이 길로 다녔을 것이며 지금 보리암 등산로 같은것은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산 중턱까지 올라가자 Y 자형 세갈래 길이 나오고 이제 좌측으로 조금가면 그 현장이란다.
아래 사진상으로는 Y 자길이 선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는 출입구를 막아 길이 너무 피페해 졌고 거기다가 장마까지 져 길 흔적이 거의 사라졌지만 분명 좌측 덤불 뒤로는 좌측으로 가는 길이 선명하고 우측도 마찬가지 였다.
그렇다면 저 Y 자 밑에 붙어있는 꺼꾸로 된 Y 자는 어디 있을까?
우리가 올라올때 아스팔트 국도에서 철망을 처 놓은 샛길로 올라왔다 즉 ㅗ의 세갈래 길을 올라 왔는데 그곳 지형은 산 줄기로 약간 높았으며 그렇다면 옛날 길은 ㅗ 자의 양쪽 끝이 처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옛날길은 Y 와 꺼꾸로된 Y 자가 붙어 있을 수 밖에 없으니 이는 분명 그 석각이 있는 장소를 가는 지도라는 추측이 맞는다.
" 여기서 더 올라가면 또 Y 자 같은 세갈래 길이 또 나오나요?"
그 낭하리 고각을 안내해준 아가씨들 한테 물어 봤다.
" 이런 길은 여기 밖에 없는것 같은데요"
" 그럼 저 Y자 같은 것이 붙은 그림은 석각의 지형이라는 제 추즉이 맞는것 같습니다"
좌측으로 조금 더 가니 드이어 현장이 나온다. 그 현장이 얼마전 까지만 해도 그대로 방치해 놓았다 했는데 지금은 남해군에서 철책을 두르고 안내 판도 써 붙였으니 고마웠다. 필나는 이 안내판을 보고야 이것이 경남 기념물 제 6 호임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올라 오는 길은 막아 놓고 누구 보라고 이 안내판을 써 붙였을까?
7. 그간 낭하리 고각은 왜 그간 거꾸로 되어 있었을까?
드디어 그 석각본을 촬영 할 수 있었는데 남해군청에서는 하도 많은 사람들이 와서 사진으로는 세밀한 선이 잘 보이지 않을것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탁본을 해 가기때문에 자주 탁본을 하면 자획이 마모 될 수도 있어 사진이나 찍으라고 그 새겨진 선에 힌 페인드를 칠해 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 현장에 들어와 이 거북바위를 한 바퀴 돌아 사진을 찍기 좋은 장소에서 찍다보니 아래 사진과 같이 그림이 꺼꾸로 된다. 즉 우리가 들어온 반대 방향은 게곡의 절벽이고 다른곳으로는 이 현장에 들어 올 수가 없다. 그러니까 여기에 와서 탁본이나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은 반드시 들어온 방향에서 이 거북바위를 한바퀴 돌아가 찍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렇게 찍으면 사진이 아래와 같이 꺼꾸로 나올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부근의 지형과 지질을 조사해 보았다. 이 부근엔 바위가 없고 땅도 그냥 흙 뿐이다. 그렇다면 이 거북바위는 몇 만년전 위에서 굴러 내려와 여기에 가로 세워져 밖힌것일 것이고 바닦이 바위가 아니니 그간 지각 변동, 또는 침강에 의해서 단군때 가로 누어져 있던것이 그후 옆으로 쓰러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단 이 바위를 원래대로 가로 세워 놓는다면 이 고각 그림은 이 거북 바위의 머릿 부분이 되며 그림도 바로 서게 된다. 필자는 바위 위에 올라가 다시 찍어 보았더니 다음과 같이 그림이 바로 잡아 졌다.
그러니까 위 환단고기에 " 환웅이 사냥을 나왔다" 는 말은 정말 환웅이 천하를 순시하며 여기까지 오셨을 수도 있겠지만 환웅께서는 중국 본토, 즉 고조선 유적지에서 밝달나라를 세우시기도 바뿐데 여기까지 멀리 오셨다는것 보다 삼시랑, 또는 당골레 들이 여기에 산재해 있는 환웅상 바위를 보고 환웅이 사냥나온것이라 말 할 수도 있고 또 이 산은 위 삼신할미인 웅녀신상에 치성을 드리느라고 자주 다니는 곳이며 옆에 환웅상 바위가 있으니 여기 세워진 거북바위 위에 낭하리 고각 그림, 글자를 새겨 놓고 이 바위를 병풍삼아 그 앞에 제물을 차려 놓은다음 그앞 에서 삼신께 천제를 지냈다고 보는것이 옳은 해석일것이다. 즉 이 바위 위에 제물을 차려놓고 천제를 지내기에는 바위가 너무 적다.
즉 아래 사진 석각의 반대방향이 들어 오는 입구이니 이 사진을 찍으려면 한 바퀴 돌아와 찍어야 되며 이 석각 쪽 방향은 계곡의 절벽이 되니 길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고각본을 탁본 한다거나 사진을 찌으려면 당연히 그 고각본을 머리로 두도 찍어야 할것이다.
8 天地人 마크의 실체
필자는 낭하리 고각 해독에서 아래 그림은 천지인 마크라 했다.
즉 위 T 자중 ㅡ 은 금문상 하늘이고 ㅣ 은 사람이며 우측 많이 펴진것 같은 ㄴ 은 신지녹도전자 하나의 나 에서도 설명했드시 누리, 즉 땅이다. 그렇다면 T 자옆 점은 무엇인가? 필자는 이는 지는 해 이거나 새로 솟는 샛별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 마크는 천지인 마크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답사 해 본 결과에 의하면 이 점 은 일단 무시해도 좋다. 그 이유는 바위에는 석회 성분이 섞겨 있을 수도 있고 그 석회 성분이 그간 빗물에 녹아 구멍이 ?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 이 낭하리 석각을 안내해준 아가씨 들께 구멍을 집어보며 그 위치와 깊히를 측정해 보도록 했다.
이 구멍들은 비단 이 뿐이 아니다. 심지어 이미 파 놓은 그림 선에도 있는데 이것을 표 하기 위해 단풍잎을 따서 표시 했다.
9.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
다음 사진은 낭하리 고각 그림이 있는데서 조금 더 올라가 좌우 암벽을 상징하는 고각 그림에서 좌측으로 추정되는 바위까지와 와 환웅상 바위를 찍은것이다.
우선 낭하리 고각 그림 그 부분 부터 보자.
이 고각 그림에서 좌 우측으로 세워진것은 암벽이고 그 아래 口 자는 암벽으로 들어 가는 문 으로 추정하며 그 아래 반달 같은것과 물아래 점은 물에 비친 초승달과 샛별(금성)이 만나 물위에 비치는 그림이라고 해독 했었다.
아래 사진은 이 고각 그림의 좌측으로 추정되는 암벽과 환웅상 바위를 찍은것이다.
아래 사진은 고각 그림 우측으로 추정되는 산 높이까지이어진 바위들인데 환웅 바위와 좌우측 바위가 한꺼번에 보이는 사진은 가시덤불과 게곡 절벽으로 길이 없어 찍지를 못했다.
그러나 이 사진보다 더 실질적으로위 석각의 암벽과 암벽 문을 나타내는 바위는 바로 보리암 밑 쌍홍문에 있었다. 먼저도 말 했드시 낭하리 고각은 사진처럼 일정한 장소를 모델로 하여 그린것이 아니라 웅녀산 전체의 특이한 경치중에 특이한 장소만 뽑아 그린것 이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 아래 口 자 모양으로 된 굴 입구 부터 본다.
바위 문을 더 들어가서 찍었다. 멀리 반달형 상주해수욕장 바닷 물도 보인다.
그렇다면 그 문위 석주도 있어야 한다. 석주를 찾았다. 앞에 바닷물도 보이지 안는가?
다음은 필자의 기대 일지 모르나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라는 초승달과 샛별이 만나 물위에 비치는 장면이다. 이 초승달이 뜨는 때는 음력으로 초사흘 이면 항상 뜨겠지만 그렇다고 샛별과 가까이 만날때는 그 공전궤도 등이 다르니 자주 만날 수가 없을 것이고 어쩌면 일년에 한번만 만날수도 있으며 그것이 개천절 이라면 이는 정말 환상적이다.
즉 달력도 없었을 원시에 그저 눈이 오면 겨울이고 더우면 여름인 그 때 하늘을 연 개천절의 정확한 날짜를 무엇으로 알았을까? 하늘의 달과 별의 움직임을 보고 알지는 않았을까?
그렇다면 이 환상적 장면은 개천절 전날 저녁이나 개천절 이른 새벽에 찍어야 하는데 하필 그날 구름이 끼고 빗발이 날려 사진은 찍지 못했지만 쌍홍문앞의 상주 해수욕장, 그리고 낭하리 고각 앞에서 바닷물 사진은 찍었다. 바닷물은 석각 그림에서와 같은 반월형이다. 그렇다면 석각 그림의 반달은 단순한 바닷물 그림인가?
그러나 독자님중 나리 님의 증언에 의하면 나리님은 낙시를 하러 자주 그곳에가는데 음 10 월 상달이면 유난히 바다물이 잔잔하고 또 낙시를 하려면 새벽에 나가는데 정확한 날짜는 기억 못하고 대략 한달전 새벽 5 시 30 분~ 6 시 사이에 초승달과 샛별이 만나 환상적 물 그림자를 나타내고 있는것을 보았다 한다. 그분은 절대 저짓말을 하실 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금년은 윤달이 끼어서 정확한 개천절이 약간 빗나갈 수도 있지만 한달전 이라면 거의 평소 개천절과 비슷하게 맞는다.
그러나 그 초승달과 샛별이 만나는 시기는 꼭 개천절 뿐이 아니고 매달, 아니 몇달에 한번씩 만날 수도 있지 않은가? 이는 더 실증을 요하는 사항이다.
10. 결론
이상을 보면 이 낭하리 고각은 절대 할일없는자가 그린 낙서가 아니다.
낭하리 고각 해독에서 말했드시, 또는 위 대변설 주에 말했드시 이는 그림이 글자로 변하는것이며 또 어느것을 보나 이 고각은 5 천년 이상은 ?을것이고 그렇다면 그때는 쇠 붙이 조차 만들어 지지 않았거나 또 쇠가 있다해도 흔할때가 아니니 청동 정이나 별똥별 떨어진 강한 돌 쪽등, 시원치 않았을 연장을 가지고 이 그림글자를 새긴다는것은 보통 성의가 아니면 않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그림 글자는 그림이 원시 글자로 변하는것이니 이는 우리 국보뿐 아니라 인류 문화 유산이 될 수 있다는것이며 따라서 유네스코 등에 등록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필자의 기대 일지 모르나 그저 꽃이 피면 봄 이고 더우면 여름이며 낙옆이 지면 가을이고 눈이 오면 겨울인줄 알던 원시에 하늘을 연 개천절을 정확하게 알기 어려웠을 것이고 그래서 초사흘 달과 샛별이 만나는날, 이것이 개천절을 알리는것 이라 한다면 이는 우리 조상의 천문 관측 기술이 그만큼 세밀 했다는 것이니 이 환상적 하늘의 편지를 말로 더해 무엇하랴?
그러나 그 하늘의 신비가 일어 나지 않는다면 초승달 그림이 단순한 그 앞에 있는 바닷물 그림이라 해야 하고 또 그 물아래 비치는 샛별 이라는 점도 그냥 빗물 구멍이라 하고 의미를 두지 말아야 할 뿐이다.
좀더 자세하고 재미난 내용은 다음 3~4 번 "여담 낭하리 고각 탐사기" 에 써 있다.
부디 중국, 그리고 일본 학자가 해독하기전 뜻 있는 분들과 관계 당국에서 관심을 가져 점 더 세밀히 감정한다음 유네스코에 등재해 주기 바란다.
-끝-
* 다음 3. (여담) 남해 낭하리 고각 탐사기 는 필자가 낭하리 고각을 탐사하면서 각종 실수 했던 일과 주접을 떨었던 내용이니 그냥 재미로 읽어 주시라.
3.(여담) 남해 낭하리 고각 탐사기.
부자 되는 길을 농땡이 치느라고 중단하고 금문 해독 어쩌구 핑게대며 늦장을 부리고 있었는데 이 글은 금문 해독의 일부인 낭하리 석각 해독과 그 실증을 위해서 현지를 직접 탐사하며 실수하고 주접을 떨었던 내용으로 부자 되는 길 과도 관계가 있음으로 각종 주접 떨었던 일을 이실 직고 하는데 글 내용이 기니 3, 4 부로 나누어 쓴다.
필자는 역사적으로 의견이 분분하던 낭하리 석각을 해독해 보고 이것은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라 했으나 꼭 초승달이 금성과 만나지 않더라도 이 고각은 최소한 5~6 천년전, 연장도 시원치 않았을 당시 어떤 할일없는자가 새겨놓은 낙서가 아니라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며 그 의미란 환단고기에 써 있듯환웅이 사냥을 나왔다가 천제를 지낸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그 후예인 단군, 또는 단군의 도를 바뜨는 삼시랑(三侍郞), 아니면 당시 그 지방의 당골레 들이 천제를 지낸 흔적으로 보는데 이 석각이 중요한것은 그림이 신지녹도문, 금문, 가림토가 혼용되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림이 문자로 발달하는 과정이 되므로 우리 국보뿐 아니라 세계 인류문화 유산으로 등록할 가치가 있다고 말한바 있다.
인터넷에 뜨는 암각화(남해도 낭하리 고각)
필자는 이 그림을 보고 이 그림이 뒤집혀있음을 알고 바로잡아 해독한것이 아래 그림이었다. 여기 아래 보이는 天 자는 그 예리한 조각으로 보아 쇠로된 정이 생겼을때 누군가가 새긴 낙서로 본다.
* 필자가 바로잡아본 그림
그러나 이 그림을 왜들 뒤집어 탁본이나 사진을 찍게 되었는가? 또는 수례를 탄 높은 사람과 그 수례를 미는 天자 같은 사람은 우연히 환웅을 그린것인가? 아니면 그 부근에 그런 모형의 바위를 보고 그 바위가 환웅을 상징하는 바위임을 알고 황웅바위로 명명 한다음 그린 그림이며 또 그 옆 암벽 바위와 그 앞 바닷물은 과연 보이는곳인지를 알기위해 낭하리 석각 탐사를 하기로 했다.
금년은 윤년이라 음력 개천절이 정확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혹 달과 금성이 만나는 시간을 사진찍기 위해서 이왕이면 양력 11월 23 일, 즉 음력 10월 초 3 일 전날밤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를 실증하기 위한 사진을 찍기 위해서 22 일 아침 5시에 일어나 아침도 먹지 못하고 집을 나왔다.
집 사람은 새벽 부터 읽어나 설치는 나를 보고 혹시 딴 짓거리 하러 가는것이 아니냐고 했지만 필자 같이 젊잔한? ㅎㅎ. 사람이 미스코리아에서 갓 떨어진 애들이 눈앞에서 알짱 댄다고 어디 컴컴한 마음을 먹을 사람인가? 걱정 허덜 덜덜 말라고 하고 집을 나왔다.ㅎㅎ.
필자는 전에 친목계원들과 함께 금산 보리암에 몇번 가 본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낭하리 석각을 알지도 못했고 또 친목계원들과 술 먹고 떠들다 보니 어떻게 그곳에 갔는지도 모르게 갔었고 남들은 부처님께 절 하고 어쩌고 했지만 필자는 경관이나 한번 쓱 보고 소변이나 한번 본 다음 온 일 뿐이니 그곳을 어떻게 가야 하는지도 몰랐다.
아는길도 물어 가야 하는것이 실패를 안는 부자 되는 길 인데 고속뻐스 터미날에 가면 그곳 가는 뻐스가 있는줄 알고 고속뻐스 터미날로 갔다. 필자 상식으로는 그곳은 경남 남해에 있으니 경부선 고속터미날로 갔다.
그러나 그곳 매표소 아가씨는 그곳에서는 남해 가는 뻐스가 없고 남해가 어딘지도 모른단다. 또 그곳 경비인지 경찰들도 모른단다. 그때 누군가가 친절하게 말해줬다.
" 남해요? 거긴 호남선 고속뻐스 터미날에 있어요"
남해가 왜 호남선에 있지? 그러나 그곳에 가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옆 건물이 호남선이다. 그곳에 가 보니 여러 행선지 중에 해남도 있었다. 내가 기웃거리자 어떤 예뿐 아주머니가 말했다.
" 어디 가시려는데요?"
" 남해요. 여기서 남해가지요?"
이제야 아는길도 물어 가기로 했다.
" 예 저도 해남가요. 빨리 끊으세요. 시간이 다 되었어요. 저쪽에 매표소가 있어요"
" 어디요?"
아무리 둘러 보아도 매표소가 보이지 않았다.
" 애구 제가 모셔다 드리지요. 원 매표소가 저 구석에 밖혀 있으니..."
그 아주머니는 매표소 까지 데리고 가서
" 빨리 해남표 한장요"
정말 세상에 나 빼놓고는 모두 좋은 사람들만 사는 모양이다. 나는 3 만 8천원을 주고 해남행 뻐스표를 끊었다. 그 아주머니와 함께 뛰다 시피 해서 뻐스에 탓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승객은 댓 사람뿐 자리가 많이 남았다. 좌석표가 있었으나 그 아주머니는 내 자리옆에 앉았다.
" 아주머니는 남해에 사세요?"
" 아니예요. 전 서울에 살아요. 그곳이 고향이라 지난 가을 선산 밀례 한것이 있는데 그간 잘 있는지 바람도 쐴겸 가요.아저씬 뭐하러 거기 가세요?"
" 예 사진도 찍을겸 남해 겨울 바다도 볼겸 놀러 가요"
" 잘 됐네요. 그럼 시간이 많으시겠네요."
" 예 아주머니도 시간이 많을것 같은데 그럼..."
" 예 저도 그냥 놀러 가니 정해놓은 시간은 없어요. 우리 동행해요"
요즘은 여성상위 시대라니 여자가 먼저 유혹하나? 필자의 본색인 컴컴한 생각이 들었다.
" 사진작가 세요? 무슨 사진을 찍으려 하시는데요?"
" 낭하리 석각이라고...그러니까 보리암 밑에 옛날 석각이 있다는데...혹 아주머니 보리암 가 보셨어요?"
" 아니요. 못 가봤어요"
" 아니 남해가 고향이라며 아직까지 금산 보리암에도 못 가 보셨어요?"
" 그곳엔 금산도 없고 보리암도 못 들어 봤는데요"
그때 옆에 있던 할머니까 끼어 들었다.
손님 뻐스를 잘못 타신 모양예요. 금산 보리암은 해남 에 있는것이 아니라 남해 에 있어요."
" 뭐라구요? 아니 그럼?"
지도를 꺼내 보았다. 해남은 남쪽 좌측에 있고 남해는 우측에 있어 아주 거리가 멀었다. 뻐스는 이미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 기사 양반. 내가 남해에 간다는것을 이 해남 뻐스를 잘못탄 모양인데 어떻해야 되지요? 중간에서 갈아 탈때가 있나요?"
" 없어요. 우리는 휴게소에서 한번 쉬는데 혹 그곳에 여수 순천쪽으로 가는 뻐스를 만나면 한번 말해 보세요"
" 젠장 일찍 가려고 서두르다 보니...할머니 해남에 가면 남해 가는 뻐스는 있나요?"
" 예 있어요. 해남에서 남해는 1시간 40 분이면 가요"
그러자 옆 옆 예뿐 아줌마가 말했다.
" 놀겸 사진찍으러 가신다면 그냥 해남으로 가서 내일쯤 남해에 가시지요 뭐"
이 아줌마 심심해 바람이나 쏘이러 간다고 했으니 황웅, 단군 흔적을 찾는다는 낭하리 석각이고 나발이고 다 집어 치우고 이 아줌마 하고 남해 인지 해남인지 바닷가에가서 회나 썰어놓고 쐬주 한잔하며 농아리나 쳐? 히히.또 컴컴한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하여간 오늘 저녁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를 찍어야 하니 그럴 수도 없었다.
뻐스가 휴게소에 서고 화장실을 갔다 와 보니 뻐스 기사가 순천행 뻐스를 가리키며
" 내 이 뻐스 기사에게 말 해 놨으니 이걸 바꿔 타세요. 해남까지 갔다가 거기서 뻐스 타는것 보다 이게 빠를거애요"
이 기사 눈치도 못채고 남의데이트 망쳐 놓는거 아녀? 그러나 나는 순천행 뻐스 기사에게 확인해 봤다
정말 이세상은 나만 빼놓고 좋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살고 있네. 그러고 저러고 그 예뿐 아줌마 하고 쐬주 한잔하며 농아리 치려던 일은 완전 물건너 간것 아녀?
순천행 뻐스가 광주를 통과 하고 있었다.그런데 갑자기 길이 막혔다.
" 뭔 사고라도 났나?"
" 아닌 모양인데요. 농민 시위 인 모양인데요"
그러고 보니 FTA 반대 어쩌구 하는 깃발이 보이고 수 만명이 관광뻐스 수백대를 타고와 고속도로 왕복선을 막고 있었고 경찰은 그져 구경이나 하고 있었다. 아니 농민의 주장도 좋지만 그런다고 죄 없는 국민 바쁜 여행길을 방해 하면 결국 국민들로 부터 FTA 반대시위의 정당성이 훼손 될텐데...누군가가 뛰어 나가 따지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곧 멱살 싸움이 일어났다. 그럴때 나도 쫓아 나가면 나도 터지지...뻐스는 무진장 갇혀 있었다. 언제 출발할지 기약도 없었다. 모두들 시계를 보며 안절 부절 했다.
나도 낭하리 하늘의 편지 찍기는 다 틀렸나 보다. 이거 내가 잠시나마 그 아줌마 한테 컴컴한 생각을 해서 일이 되지 않으려나?
한시간 여나 갇혀 있다가 겨우 풀려났다. 순천 고속뻐스 터미날에 내려서 어떤 사람에게 일반 뻐스 터미날을 물으니 길 밖까지 나와 이리로 쭉 가면 얼마 가지 않아 일반뻐스 정류장이 나온단다. 정말 나만 빼놓고 정말 좋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다.
그러나 축지법으로 아무리 가봐도 일반 뻐스 터미날은 나오지 않는다. 또 다를 사람에게 물어 봤다.
" 터미날요? 여기서 걸어 가다니요? 택시를 타야 해요. 기본요금 2 천원 나올겁니다."
" 어거 뭐야? 젠장 잘 모르면 말이나 말것이지 아무리 내가 축지법을 쓴다는것을 알았어도 바뿐 사람에게 엉뚱하게 가르쳐 주다니...젠장 아까 나 빼놓고 좋은 사람들 이란 말 취소다." 히히
택시로 일반 터미날에 갔다. 남해행 뻐스 표를 끊어 놓으니 출발 시간이 20 분 남았다. 오호 3 시인데 아침도 안먹고 나왔고 점심도 못 먹었으니 시장하다. 옆 소머리 국밥집이 보이길래 들어갔다.
" 3시 20분 출발인데 빨리 되나요?"
" 염려 마세요. 금방 되요."
그리고 전화가 왔는데 전화 통에 매달려 10 분간은 잔소리를 했다. 그러고 보니 당연히 가게 안이 썰렁하다. 손님은 급한데 친구하고 잔소리나 하는데나 마음을 쓰니 아무리 때가 지났다 하나 손님이라곤 나와 파리 열마리 뿐이다. 파리는 아직 음식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달려 든다.
" 빨리 안되면 돈 여기 있으니 그냥 갈래요"
" 아 다 된다니까요"
결국 5 분전에 음식이 나왔다. 그래도 국물 이라도 마시고 가야 본전 생각이 나지 않을것이다. 국물도 무척 짰다.
" 너무 짠데요"
" 그게 왜 짜요? 남들은 다 간이 맞는다고 하는데..."
" 그럼 아주머니나 많이 잡수세요"
그런데 남해행 뻐스는 내가 가던곳으로 되 돌아 오며 정거장 마다 선다. 즉 먼저 말해준 이는 뻐스 정거장을 말해 줬는데 나는 터미날로 착각한 것이다.
오늘 내가 왜 이러지? 아무래도 아까 그 여우 아줌마에게 홀렸나? 히히. 먼저 그 사람에게 나 빼놓고 다 좋은 사람들 만 산다는말 취소가 아니라 다시 복구다. 히히
남해 여객터미날에 도착해 보니 보리암 가는 뻐스가 10 분 후에 있단다. 표를 끊어 놓고 뭐 먹을 시간도 없다. 그런데 뻐스는 저수지 있는곳 까지만 가고 거기서 보리암 올라가는 봉고차를 갈아 타야 한단다. 그러나 봉고차는 최소한 10 명 이상이 모여야 간다는데 손님이라곤 나와 어떤 강호동이 만큼이나 큰 아가씨 뿐이다. 나는 축지법으로라도 올라 가려 했다. 그런데
" 아저씨 저 택시 만원 이라는데 우리 반반씩 내고 같이 타고 가실래요?"
" 그거 좋지요"
강호동이가 아니고 예뿐 아가씨라면 내가 돈 몽땅 내고라도 타고 가겠는디... 히히
나는 결국 보리암 부근 주차장에 도착했다. 거기서 또 1K 는 걸어 가야 한단다.
우리는 부지런히 걸었다. 이 모습을 아마 누가 사진찍었다면 내 모습은 마치 코끼리 옆에 붙은 파리 같았을 것이다. 그래도 날씨도 저물고 바람도 쌀쌀하고 인적이 끊어졌으니 같이 타고온 의리상 같이 가려는데 이 아가씨는 헐래벌떡 도저히 거름이 맞질 않는다.
" 아기씨 뭐하러 보리암에 가세요?"
" 기도 드리러 가지요"
" 시집 보내 달라고요? 히히"
" 하하 예 그래요. 하하"
" 부처님께 기도 드릴게 아니라 아가씨 얼굴이 예뿌니 매일 등산하며 걸어다녀 날씬해 지면 자연 신랑감이 줄로 설건디...히히"
" 그러데 걷기는 정말 싫어요"
" 미안해요. 나는 더 어둡기 전에 사진 찍을 것이 있어서..."
젠장 같이 택시탄 의리고 나발이고 혼자 빨리 가자. 근디 저 아가씨가 만약 날씬했다면 과연 나 혼자 갈 수 있을까? 정말 나는 컴컴한 놈 이라고 생각해 가며 보리암에 도착했다.
인테넷에 올라있는 보리암과 바다를 바라보는 관음상
시간이 5 시가 되 가고 있었다. 낭하리 사진을 꺼내놓고 스님, 신도, 등산객 들한테 물어 봤으나 모두 어디있는지 모른단다. 등산객 한 분이 말 했다.
" 저 아래쪽으로 가다 보면 쌍홍문이 나오는데 혹 거기 가 보세요"
그렇지 않아도 이곳은 식당이나 숙박시설이 보이지 않으니 하루종일 굶은 주제에 천상 상주해수욕장 으로 가야 한다. 그래야 회 쓸어 놓고 쐬주도 한잔 하지...
다음 사진은 23일 아침 다시 보리암에 오면서 찍은 사진으로 혹 낭하리 석각의 높은 사람이 수레를 타고 가는 모습이 이 바위를 보고 그린 그림이 아닌가 하여 사진을 찍었다.
잘 보니 정말 수레에 탄 사람을 미는듯한 바위였고 또는 환웅이 사냥을 나온 그림 같다. 환웅이 사냥을 한다는데 왜 수레를 타고 하지? 아마 높은 사람은 그랬을 거라고 그렸을 꺼야. 그러나 석각 그림과 방향이 반대로 되 있다.
쌍홍문 쪽으로 내려가 보았다. 아래그림 바위 문의 근거가 되지 안을까 하여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은 22 일 저녁 쌍홍문 에서 찍을 사진으로 쌍홍문은 정말 장관 이었다. 이게 위 낭하리 석각 그림의 바위문인가?
바위 문을 더 들어가서 찍었다. 석각과 같이 멀리 바닷물도 보인다.
그렇다면 그 문위 석주도 있어야 한다. 석주를 찾았다.
와! 이거다 바로 이것이다. 앞에 바닷물도 보이지 안는가?
그런데 그 낭하리 석각 그림은 어디있지?
아니지 내일이 개천절이니 초승달과 금성이 만나서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 사진 부터 찍어야지. 그까짓 낭하리 석각 그림이야 제까짓게 도망 갈라구... 시간은 5시를 넘어가는데 금성은 그만두고 초승달도 보이지 않는다. 이거 어디 갔나? 그러구 보니 하늘이 구름이 끼어 캄캄 하다.
젠장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아니 내가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하러 왔는디 하느님이 도와 주지 안네. 할 수 없이 하느님 한테 핸드폰을 쳤다.
" 저 우리란 놈인디 하느님 그럴수 있시유? 당장 구름을 걷어 주슈"
그러나 하느님 대답은 냉정했다.
" 야 이 고얀놈아! 너 성스런 산에와서 성스런 일을 할놈이 그래 삼일전 부터 목욕재계는 하고 오지 못할 망정 오면서 바람난 계집 붙들고 컴컴한 생각이나 하니 내가 도와 줄것 같으냐?"
" 바람난 계집요? 아까 그 아줌마가 바람난 계집? 그런줄 알았으면 그 아줌마 따라 해남으로 가는건디...히히"
" 뗏기 고얀놈! 너 그래가지고 여기서 사진 찍을을 줄 아냐?"
" 아구 잘못했시유. 당최 안그럴텡게 좀 도와 주슈"
" 안된다 이놈아! 글구 이 산은 내가 관리할 산도 아녀. 내일 우리 아기 한테 물어봐!"
" 아기 라니요"
" 야이 녀석아 넌 며느리 보고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냐?"
" 며느리요? 그럼 아드님이 환웅. 그럼 웅녀 말씀인가요?"
" 인석아 환웅, 웅녀가 누구냐? 우리 말로 혀라"
" 아예 환숫, 곰네 말이군요"
" 그래 맞아 오늘저녁 부터 몸을 정히 해 가지고 내일 전화 걸어봐"
그러나 나는 급한 마음에 당장 곰네 할머니에게 핸드폰을 쳐 봤다.
" 곰네 할머니 맞지유? 전 우리란 놈인디..."
" 그래 맞긴 하는데 넌 오늘 마음이 부정하니 않돼. 내년에 다시 와 봐라!"
" 아니 내년에요? 하느님 섭리는 자연 섭리이고 자연 섭리는 오직 생식인데 자연 섭리가 숫컷들에게 암컷만 보면 컴컴한 마음을 먹도록 만들어 놓구설랑..."
" 이녀석 말이 많네. 그럼 너 왜? 강호동이 만큼 큰 아가씨라고 떼어 놓고 왔냐? 그건 여자 아니냐? 왜 우리 여자 차별 하냐?"
" 그건...그건..."
" 잔소리 말고 호랑이가 물어 가기전에 빨리 내려가 봐! "
" 젠장 뭐 이런 할머니가 다 있어? 아니 무슨 할머니가 그래 손주놈 말도 안들어줘? 씨양! 철없는 손자놈이 까불면 볼기짝이나 한대 때려주실 일이지..."
" 이녀석 버릇없는 말 솜씨좀 보게. 그러나 좋다. 손자놈 재롱으로 받다 준다. 그런데 인석아. 네 볼기짝은 이미 때려 줬어. 너 태어 났을때 엉덩짝에 푸를점 찍혀있었다는말 못 들어 봤냐? 이건 다른 나라 놈들 한테는 없는게야"
" 아 예 예 몽골 반점 말이군요."
" 인석아 몽골반점이 뭐냐? 한민족 반점이라고 하던지 이 곰네 반점이라고 혀라"
" 예 예 고마워유. 그런디 제발 사진좀 찍게..."
" 이미 오늘, 내일의 일기 프로그램은 다 짜 놔서 컴퓨터에 입력 시켜 놨으니 지금 내가 프로그램을 변경하면 내 컴퓨터가 애로가 나 않돼. 그 대신 내일은 그따위 컴컴한 마음먹지 말고 마음을 정 하게 가져라. 그럼 그 낭하리 석각은 찾을 수 있게 해 주마"
할 수 없었다. 내 이럴줄 알았으면 차라리 해남에 간다는 그 바람 난 아줌마를 이리 오라고 꾀셔서...히히
본성이 컴컴한 놈이니 하느님께 그렇게 주의를 듣고도 또 컴컴한 생각이다.
시장한 배를 움켜 쥐고 내려 가려는디 바스락 소리가 났다. 혹 그 바람난 아줌마가 나를 따라 왔나? 사방을 둘러 보니 아무도 없다. 그러면 그렇지 역시 내 어리섞음 때문이다 젠장 자성 하는 의미로 시나 한수를 거창하게 읊었다.
마음이 어리섞으니 하는 일이 다 어리석다 만중 운산(萬重雲山)에 어느 님 오랴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가 하노라.
어때? 명시지? 이렇게 되면 나도 시인인가?
그러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시 같다. 그랴 이 시는 내가 지은것이 아니라 바로 화담 서경덕이 황진이를 그리며 지은 시야.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고. 나 같이 컴컴한 놈이 이런 시를 지을수 있을라구? 히히
다시 시를 ?었다.
마음이 컴컴하니 하는짓이 다 컴컴하다.
이 어둔 산중에 그누가 올리 없건만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가 하노라!
그래 봐야 이건 화담 서경덕의 시를 모조한것이다. 젠장 시인 되긴 다 글렀네. 히히
그러나 대 시인이고 理氣一原論을 발표하여 理氣二原論을 발표한 퇴계 보다 더 하늘의 이치를 잘 아는 성리학자인 화담도 컴컴한 생각을 하며 황진이를 생각하는데 나 같은 犬 망나니가 뭐 좀 컴컴한 생각을 한다고 그리 큰 잘못인가? 히히
그러구 보니 오를저녁 황진이 연속극 하는날 아닌가? 빨리 가서 저녁먹고...아니 회 쓸어 놓고 쐬주 한잔 하고 연속극 봐야지. 정말 연속극 황진이는 그 화려한 의상에 춤 그리고 옛날 기생들의 사랑...정말 보기드문 명작이야.
이왕 황진이 말이 나왔으니 해설까지 해 볼까?
화담이 있는 옴팡간은 첩첩 산중에 외로히 있다.
황진이가 성리학의 대가인 서경덕에게 성리학을 배운다는 핑게로 사실상 유혹하려 비를 홈빡맞고 육체미가 그대로 보이는 옷으로 찾아왔을때 서경덕은 황진이에게 갈아 입힐 옷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다 떨어 져 누덕 누덕 기운 자기옷으로 갈아 입혔다. 황진이는 성리학을 배운다고 왔지만 원래 목적이 그것이 아니니 피곤 하다며 자자고 했다.
그러나 단간방에 이불도 다 떨어진것 한채 뿐이다. 할 수 없이 둘이는 한 이불을 덮고 잤다.
그런데 이 쑥맥양반 통 반응이 없네. 혹 병신이 아닌가? 슬쩍 더듬어 보았다. 천만에 말씀, 싱싱하다.
황진이는 마음을 바꾸고 성리학 공부나 했다. 결국 화담은 황진이에게 성리학은 가르쳐 주었을 망정 한 방, 한 이불을 덮고 일주일을 자면서도 아무짓 하지 않다가 그대로 보내놓고 가을이 되어 달은 휘영청 밝은데 낙옆이 떨어지고 바람이 불어 바스락 소리가 나니 혹시 황진이가 아닌가 하는 그리움이 배인 애끓는 시가 바로 위 시 이다.
그럼 황진이의 화답하는 시도 적어야지.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데 월침 삼경(月沈三更)에 올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황진이는 화담 앞에서 만은 진심으로 대했다.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했다.
그런데 화담은 여늬 기생처럼 차게 대한다,
이 가을 달 밝은 밤에 혹시 오지 않을까 하여 귀를 기우리지만 그냥 낙옆 지는 소리일 뿐이니 이걸 어쩌란 말인가?
이것을 보면 화담은 빙신이다. 나 같았으면 당정 달려가서리...히히.
날이 점점 어두어 지고 있었다. 시가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시 타령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어둠 속을 엎어지고 자빠지며 산길을 내려갔고 결국 아스팔트 길이 나오자 또 상주해수욕장쪽 불빛을 바라보며 걸었다. 시장하니 축지법으로 걸었는데도 왜 이렇게 불빛이 멀지?
드디어 상주 해수욕장 부근 어떤 생선회 집에서 생선회 한 접시와 찌개, 소주한병 그리고 밥 한그릇을 뚝딱 비우니 주인 아주머니가 3 일 굶었느냐며 밥 한그릇을 더 주겠다기에 그것도 다 먹었다. 정말 시장한데는 최면이고 나발이고 없다.
여관을 얻어 황진이를 보다가 그대로 쓰러져 잤다. 아침까지 잣으니 남의집 전기세는...
그래도 아침에 일어 나보니 몸은 거뜬했다. 해수욕장을 한 바퀴 돌아 보니 정말 절경이었고 특히 해변의 송림은 환상적인데 정부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려 하는지 주민들은 " 천연기념물 결사 반대" 라고 프랑카드를 써 걸었다. 아마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면 해수욕객 들이 들어 갈 수 없고 따라서 장사가 안되기 때문인 모양이다.
아침을 먹으러 어제밤 그 집에 갔다. 김치 찌개가 있었다. 그런데 김치찌개는 정말 천하 일미였다.
" 뭐 어딘가 이상한 그림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고 일본사람들 까지 온다는 말은 들었어도 전 못 봤는데요."
" 예 할 수 없지요. 전 지금 다시 보리암 쪽으로 올라가며 찾아 봐야 해요"
" 여기서 보리암 입구 등산로 까지 아스팔트 길을 가시려면 꽤 지루 하실텐데 제가 제 차로 거기까지 모셔다 드릴까요?"
" 아구 고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저녁 무척 지루 했걸랑요"
결국 그 예뿐 아줌마는 나를 일부러 등산로 입구까지 태워 줬다.
이 예뿐 아줌마가 나같이 컴컴한 놈 한테 왜 호의를 베풀지? 뗏기. 넌 누가 호의만 베풀면 꼭 컴컴한 생각을 한단 말야. 어제밤 곰네 할머니와 약속한것도 있으니 오늘은 절대로 컴컴한 마음을 갖지 말아야지 그나마 오늘 낭하리 석각도 못찾을라. 그래 이 세상 사람은 나 빼놓고는 모두 좋은 사람들이라 그럴꺼야.
등산로 입구에서 좌우를 두리번 거리며 바위가 있으면 다 찾아가 보았으나 낭하리 석각은 보이지 않았다. 한 시간을 급 경사를 올라가니 드디어 쌍홍문이 나온다.
쌍홍문 근처는 어제저녁 샅샅히 뒤져 봤는데 이거 못찾는거 아냐?
그때 쌍홍문 아래에서 어떤 예뿐 아기씨 둘이 마호병에서 커피를 따라 마시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 커피 한잔 하실래요?"
그렇지 않아도 목이 컬컬한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아기씨 들은 정말 예뻣는데 내가 아무리 컴컴한 놈이라도 컴컴한 생각을 할 상대가 아닌 신성해 보이는 아가씨들 이었다. 내 용건이나 말할 수 밖에 없었다.
" 혹 이 동네 사세요?"
" 예 저 아래 상주 해수욕장 부근에 살아요"
" 여기 등산 자주 오세요?"
" 예 거의 매일 와요"
그러니까 이렇게 날씬한가?
" 그럼 혹시 이런 그림이 새겨진 바위 못 보셨어요? 전 이러구 저러구 해서 꼭 이 바위를 찾아야 하는데..."
" 아 그 그림요? 길을 잘못 오셨네요. 이쪽이 아니고 저쪽예요"
" 그럼 어떻게 가야 하지요?"
" 이 산을 거의 다 올라 오셨으니 저 단군전으로 해서 내려 가는 길도 있는데 길이 험하고 바위 틈이라 못 찾으실거얘요. 다시 내려가셔서 아스팔트 길로 한 시간쯤 더 가신다음...그럴게 아니라 그런 좋은 일을 하신다니 저히들이 저히들 차로 모셔다 드리지요."
이 아가씨 들은 그 낭하리 석각도 뿐 아니라 환단고기등 우리 사서도 읽으셨던 분 들이라 말이 더욱 잘 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