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시아 향기/온 마을을 흠뻑 적시며/오뉴월 한여름이 찾아 오면/헐벗고 굶주렸던 아이들/천국을 만난듯/너나없이 집을 뛰쳐나와/세검정 너럭바위/감돌아 흐르는 여울목에서/무자맥질하며 신명나게 놀다가/뱃속이 출출해지면 산성을 넘어/수줍은 열여섯 소녀 볼처럼/볼그스레 잘 익은 능금/서리하기 도 하였고/홍제천 방죽 너머/논도랑에서 잡은 개구리/뒷다리 뽑아 구워 먹으며/릴릴리 삐리삐리삐/풀 피리 불러댔었지
이 시는 『문학예술』 2005년 봄호에 수록된 필자의 향수(鄕愁)를 주제로 한 장시 <사향(思鄕)> 전 5부 중 제2부 여름 노래의 전연이다. 나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3년전 일제시대 때 서울 청진동(淸進洞) 49번지에서 출생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 곳에서 오래 살지 못하고 선친의 사업 실패로 다섯 살 무렵 선친의 등에 업혀 지금의 서대문구 현저동과 홍제동 사이에 있는 무악재(毋岳-)고개를 넘어 홍은동 산동네로 이사 가서 그곳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지금은 도시화로 인해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되어 옛 모습을 털끝만큼도 찾을 길이 없는 삭막한 동네가 되었지만, 그 당시 홍은동(弘恩洞)은 자연 환경이 서울 근교에서 가장 빼어나게 아름다웠던 전원마을이었다.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산동네 앞을 큰 가뭄에도 마를 날이 없이 흘러내리는 홍제천(弘濟川)은 북한산 국립공원 문수봉, 보현봉, 형제봉에서 발원(發源)하여 창의문(彰義門) 밖 조선조 인조 반정(仁祖反正) 때 우국지사 이귀(李貴), 김유(金瑬) 등이 광해군(光海君)을 폐위시키기 위해 칼을 씻으며 모의했던 세검정(洗劍亭)을 감돌아서 홍지문(弘智門=漢北門) 바로 옆 오간수(五間水) 다리 밑과 보도각백불(普渡閣白佛=부처바위) 앞을 지나 내가 살았던 홍은동 앞으로 흘러 지금의 성산대교 근처에서 한강과 합류하는 그야말로 1급 벽계수(碧溪水)였다.
홍제천 방죽 위에는 미루나무들이 일렬로 사열병처럼 도열해 서 있었고, 방죽 너머에는 인왕산(仁旺山)이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사시사철 각기 다른 아름다운 풍광을 토해 내고 있었으며, 왼쪽으로는 산성(山城) 너머 북한산(北漢山=三角山)의 삼형제 백운봉(白雲峰), 인수봉(仁壽峰), 국망봉(國望峰)이 항상 인자한 모습으로 미소 짓고 있었던 그런 곳이었다.
나는 여름만 되면 위의 시에서 노래한 바와 같이 오간수 다리 밑이나 부처바위 밑을 감돌아 흐르는 여울목에서 ‘미역’감기를 즐기며 신명나게 놀았었다(그때 개구리헤엄을 치면서 배운 수영 실력은 나중에 고등학교와 대학생이 되어서 물살이 급했던 뚝섬 한강을 도하할 정도의 실력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렇게 아침부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가 점심 때가 되어 배가 출출해지면, 부처바위 윗쪽 북한산성을 넘어 능금서리를 해서 먹거나, 칡덩굴을 찾아 맨손으로 칡뿌리를 캐서 흙 뭍은 채 질겅질겅 씹어 먹거나, 방죽 너머 논도랑에서 개구리를 잡아 뒷다리를 뽑아서는 불에 구워 먹거나, 심지어는 그 아래 포방터(砲放-) 쪽으로 내려와서는 사격 훈련 왔었던 일본군이 먹다 남은 나무도시락에 붙어 있는 밥알을 뜯어 먹으며 허기를 달랬었다.
그때 그 시절은 정말 먹을 것이 너무나 부족해 많은 어린이들이 성장에 지장을 줄 정도로 영양 실조에 걸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필자가 『문예사조』 2007년 4월호에 발표한 바 있는 <막걸리 유감>이라는 제목의 수필에서 이미 밝힌 바 있지만, 나는 초등학교 시절 식량 대용으로 술지게미를 시도 때도 없이 자주 먹어 이미 어려서부터 술꾼(?)이 되어 있었고, 이따금 술에 취한 채 등교했다가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호되게 야단맞고 벌을 선 적이 있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세월은 백마가 문틈으로 휙 지나가듯 흘러 어느덧 내 나이 망팔(望八)의 나이가 된 지금도 나는 그때 오간수 다리 밑과 부처바위 밑에서 ‘미역’감고 천진무구(天眞無垢)하게 뛰놀았던 어린 시절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있다. 비록 먹을 것이 부족해서 굶주리며 살았지만, 그 순간만은 배고픔의 고통도 가난의 번민(煩悶)도 자연에 몸을 던져 그를 호흡하는 동안 모두 용해(溶解)되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채 마냥 즐겁기만 했었고 행복하기만 했었다.
‘미역’이라는 낱말의 뜻은 국어사전마다 뜻풀이가 조금씩 달리 나온다. 『국어 대사전(이희승, 민중서관, 1982)』에는 ‘냇물이나 강물 같은 데에 들어가 몸을 씻는 일’로 출현하고, 『새 우리말 큰 사전(신기철, 신용철, 삼성출판사, 1980)』에는 ‘(냇물이나 바닷물 등에서) 물 속에 몸을 잠가서 씻는 일, 또는 물 속에 몸을 잠그고 헤엄치거나 씻거나 하며 노는 일’로 출현하고, 『국어 대사전(운평어문연구소, 금성출판사, 1999)』에는 ‘냇물이나 강물에 들어가 몸을 씻거나 노는 일’로 출현하고, 『우리말 큰 사전(한글학회 지음, 어문각, 1992)』에는 ‘냇물이나 바닷물 같은 데에 들어가 몸을 씻거나 놀거나 하는 일’로 출현하고 있다. 또한 북한에서 출간된 『조선말 사전(과학원 출판사, 1990)』에는 ‘(주로 내’물이나 바다’물 등에서) 물 속에 몸을 잠가서 씻는 일‘로 출현하고, 『현대 조선말 사전(사회과학원 언어학 연구소, 1988)』에는 ’(주로 내물이나 바다물 같은 데서) 물 속에 몸을 잠가서 씻거나 노는 일’로 출현하고 있다.
그러나, 위의 남북한 국어사전에서의 ‘미역’에 대한 풀이말은 모두 완전한 풀이말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 하면 ‘미역’이라는 낱말은 원래 ‘머리감을 목(沐)’자와 ‘몸 깨끗이 할 욕(浴)’자와의 합성어이기 때문이다(『시경(詩經)』, 소아(小雅), 채록(采綠)에 ‘내 머리가 뒤엉켰으니 돌아가 머리를 감으리라(予髮曲局 簿言歸沐)’로 출현하고 있고, 『광아(廣雅)』, 석고(釋詁) 2에 ‘浴 洒也(욕의 뜻은 세(酒; 씻다)이니라’라고 출현하며, 『좌전(左傳)』문공(文公) 18년조에는 ‘두 사람이 못에서 몸을 씻었다(二人浴于池)’라고 출현하는 사실로 보아, ‘목욕(沐浴)’의 뜻은 ‘민물로 머리를 감거나 몸을 씻는 행위’를 뜻하는 말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목욕(沐浴)’이라는 한자어는 중국에서 조자(造字)한 한자어로, 이 한자어가 최초로 출현하는 문헌은 B. C. 11세기경 고대 중국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아들 주공(周公)이 주나라의 관제(官制)와 전국시대(戰國時代) 각국의 제도를 수집하여 유가(儒家)의 정치사상을 덧붙여 편찬한 『주례(周禮)』(『의례(儀禮)』,『예기(禮記)』와 더불어 삼례(三禮)라고 함)로 이 책 천관(天官), 궁인(宮人)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궁인이 왕의 육침(六寢 ; 천자의 침전과 다섯 개의 소침전)의 관리를 담당하는데, 그 정언(井匽 ; 빗물이나 구정물을 흘려 보내는 도랑, 또는 그 물을 받아 둔 곳)을 다스릴 때, 깨끗하지 못한 것을 제거하고 그 악취를 제거하여 왕과 함께 머리를 감고 몸을 씻는다 (宮人掌王之六寢之脩 爲其井匽 除其不蠲 去其惡臭 共王之沐浴).
또한, 이 한자어는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하고, 부정(不淨)한 일을 멀리 하는 일’의 뜻인 ‘재계(齋戒)’와 합성되어 ‘머리를 감고 몸을 깨끗이 하여 몸을 가다듬어 부정을 피하는 일’의 뜻인 ‘목욕재계(沐浴齋戒)’의 사자성어(四字成語)를 이루면서 널리 쓰이고 있다 (이러한 사자성어가 최초로 보이는 문헌은 『맹자(孟子)』로, 이루장구(離婁章句) 하에 ‘맹자 가로되 (아무리 절색미인인) 서자(西子=서시(西施)라도 불결한 것을 머리에 쓰면, 사람들은 모두 코를 가리고 지나갈 것이다. 추악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목욕재계하면 상제(上帝)를 제사할 수 있을 것이다(西子蒙不潔 則人皆掩費而過之 雖有惡人 齋戒沐浴 則可以祀上帝).‘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한자어는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목욕(沐浴)<월인천강지곡, 63>> 모욕<구급간이방, 一, 104>’처럼 ‘ㄱ’이 간접 동음생략(또는 모음간 ‘ㄱ’탈락)되었다가 ‘모욕’이 되었고, 다시 모음 이화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미역’으로 음운변화 과정을 거치면서 ‘물 속에서 노는 행위’의 의미가 첨가된 의미변화어의 귀화어(歸化語, naturalized word)가 되었다.
따라서 ‘미역’의 올바른 풀이말은 ‘민물인 강물이나 냇물 속에 몸을 잠그고 머리를 감기도 하고 몸을 씻는 일, 또는 무자맥질이나 헤엄을 치며 노는 일’로 고쳐야 한다고 본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그 옛날 내 어린 시절 내내 오간수 다리 밑과 부처바위 여울목에서 ‘미역’감으며 배고픈 줄도 모르고 뛰놀았던 과거 속으로 빠져 들어가서는 한동안 행복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2007. 7. 22 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