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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올드 랭 사인
자리를 떠나 유액 위장약을 손에 든 채 창가에 서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가을 이 끝나 가는 거리에는 낙엽들이 수북수북 쌓여 있었다. 늙은 환경 미화원이 은행나무 낙엽들을 대나무 갈퀴로 긁어 커다란 자루에 담고 있었다. 지난주 그는 장대를 들고 은행을 땄다. 열매와 잎 들이 몸 위로 후두둑 쏟아졌다. 나와 함께 점심을 먹고 들어오던 김과장이 발을 멈추었다. 아저씨는 세월을 두드리시는 것 같아요. 그가 장대를 잡은 채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두드리지 않아도 세월은 갑니다. 며칠 전 세월을 두드렸던 그는 이제 세월의 잔해를 담고 있었다.
낙엽이 불룩하게 담긴 자루를 바라보며 유액 위장약 봉지를 빨아 마셨다. 삼 년 전 타은행과 합병하며 감원 태풍이 불었던 우리 은행이 다시 감원과 파격인사를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이 아침에 전해졌다. 2백 명을 감원하고, 삼십대 후반의 능력 있는 직원을 점포장으로 발탁한다는 것이었다. 삼 년 전에 살아남은 터라 점포장까지는 갈 것으로 알았는데 마흔 다섯 살 가을에 다시 위기가 닥쳐오고 있었다. 자꾸만 위(胃)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신경성 위궤양이 다시 도지고 있었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우리 은행의 경인지역 본부장을 저녁에 찾아가리라 결심하며 자리로 돌아왔다. 지난달 일요일 아침, 공원에서 조깅을 하다가 그와 마주쳤다. 그가 알은체를 했고 우리는 잠시 벤치에 앉았다. 나는 전공학과는 다르지만 대학의 후배라고 말했다. 그는 반색을 하고 자기 집이 303동 1202호라고 하면서 한 번 놀러 오라고 했다. 나는 오늘 저녁 그의 집에 찾아가 무릎을 꿇고, 열심히 일할 것이며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컴퓨터 모니터의 입출금 현황에 눈길을 돌렸다.
그 때 전화가 왔다. 나는 수화기를 들고 밝고 친절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큰빛은행 이현수 차장입니다.'
“오랜만이다.”
낯익은 바리톤의 음성이 귓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고등학교 동창 동식이었다. 학창시절에는 같은 중창단 멤버라 가깝게 지냈으나 한동안 뜸하게 지내 온 사이였다. 그는 고향 인천에서 불도저와 포크레인 따위 중기(重機)사업을 해 왔는데 엎치락뒤치락 부침이 심했다. 그리고 위기에 빠졌을 때 내가 신용대출을 도와 주지 않았다고 야속해하고 있었다.
“끗발 좋은 은행 간부님한테 개길려고 전화한 게 아니니까 걱정 마라.'
비꼬는 어투였다. 다시 위에서 신물이 올라왔으나 나는 꾹 참았다.
“아주머니와 애들은 잘 있니?'
“네가 걱정 안 해도 잘 있지. 광희가 온댄다.'
“뭐라구?'
나는 그렇게 말했다. 옛 친구 이름은 그만큼 망각의 골짜기 깊은 곳에 묻혀 있었던 것이다.
“브라질로 이민 간 뒤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 없던 조광희가 돌아온단 말야.'
“뜻밖의 소식이구나.'
내 머릿속은 생애의 절반이 넘는 긴 세월을 치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내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 묻혀 있던 기억의 조각들이 한꺼번에 떼를 지어 표면으로 떠올랐다.
“지금 일본 도쿄에 있어. 사업 때문에 출장 왔는데 오늘 오후 인천공항에 내린댄다. 한국에 머물 시간이 이틀밖에 없대. 옛날에 부산 가서 배웅한 네 사람 이름을 찍어서 오늘 여섯시 동인천역으로 나와 달라는 연락을 해 왔어.'
동식은 광희가 총동창회 사무국으로 전화를 해서 그런 요청을 했으며 그것이 간접적으로 자신에게 전달되었다고 설명한 뒤 내게 물었다.
“넌 오겠지? 우리 멤버 중 광희와 가장 친했으니까. 난 선약이 있어 못 가.'
나는 길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나도 사정이 있어.'
“그럴 줄 알았다, 임마. 우정이라고는 개미 눈물만큼도 없는 놈.'
못 나가는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하고 내가 말하려는데 전화는 끊어졌다.
우울한 기분으로 일에 매달려 있는데 이번에는 윤찬에게서 전화가 왔다. 역시 조광희를 부산까지 배웅한 중창단 친구였다.
“조금 전에 동식이 전화 받았어. 너 광희 맞으러 오기 어렵다고 했다며? 나도 바쁜데 너 어떻게 안 되겠니?'
윤찬이 증권회사에서 일할 때 나는 돈을 맡겼다가 치명적인 손해를 보았다. 내가 의뢰한 주식을 사지 않고 제멋대로 딴 것을 사 놓고는 당장 팔라고 하는데도 듣지 않고 며칠만 더, 며칠만 더, 하다가 거의 휴지처럼 값이 떨어졌던 것이다. 내 생애에서 안았던 가장 쓰라린 실패였다. 그 뒤 그는 실적을 못 올린 탓에 명예퇴직을 하고 나와 음식점을 하다가 퇴직금을 날려 버렸다.
그는 고등학교 중창단 시절에는 베이스 바리톤 파트에다 기타 반주도 맡았는데 대학시절부터는 영화에 깊이 빠져들어 전문가 뺨치는 영화 매니아가 되었다. 결국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얼굴을 하고 인천에서'시네 빌리지’라는 전국적 체인에 속한 비디오 대여점을 차려 실컷 영화를 보며 살고 있었다. 수입이 적어 아내가 보험설계사로 일하는데 그는 팔자 좋게 동네 문화센터에서 영화 해설을 하고 때로는 기타를 치며 노래도 한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몹시 미안해하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그래.'
“난 구청 문화회관에서 한 달에 한 번 영화 강의를 해. 근데 그게 오늘이야.'
윤찬은 잠시 묵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넌 실리가 있는 일이라야 오겠지.'
“그게 무슨 말이야?'
“관두자. 옛날에는 우리가 이러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호남이놈은 찾을 수도 없고.'
그는 툴툴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두 친구가 뒤집어 놓은 속을 달래려고 회전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김호남은 덩치가 컸으나 눈치가 빠르고 영민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미장이일을 해서 집이 가난했고 공부 잘하는 형 때문에 대학에 가지 못했다.
영악한 것이 그의 병이 되었다. 9급 공무원 임용고시에 합격해 동사무소와 구청에서 삼사 년 일했으나 진득하게 붙어 있지 못했다. 사표를 내고 나와 피라미드 판매에 맛을 들여 많은 사람들의 돈을 끌어들였는데 그게 망해 검찰에 구속되고 사람들의 원망을 샀다. 교도소에서 몇 달 살고 나와 유통업으로 다시 일어서나 했더니 IMF 구제금융을 받은 경제위기 때 주저앉았다. 이삼 년 뒤 통신판매업으로 또다시 일어섰으나 경기가 나빠지면서 부도를 냈다. 그렇게 뜬구름 잡듯이 사느라 결혼도 하지 못했다.
동창들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린 그 녀석한테 고마워해야 해. 실패한 사업에 한 번도 동창생을 끌어들이지 않았으니까.'
“맞아. 우리 동창 누구에게도 손해를 끼치지 않았어.'
졸업한 뒤에도 모교 중창단은 후배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었다. 그리고 동문들도중 어떤 기는 사십대에 들어서 OB 중창단을 부활하여 발표회도 갖고 후배들의 예술제에 찬조출연하기도 했다. 우리 동기 중창단은 잊혀져 있었다. 가장 재능이 뛰어났던 리더가 졸업 전에 이민을 가 버리고, 나머지 네 사람도 사는 길이 워낙 다른데다 몇 가지 일들로 갈등이 생겨 결속력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중창단 동기들도 그랬지만 동기 동창회도 잘 안 돌아가고 있었다. 약국을 해서 돈을 모은 동창회장은 내년 시의원으로 출마하기 위해 조직을 활성화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래서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었고 언제고 접속만 하면 25년 전의 졸업 앨범과 몇 사람의 가족사진들, 송년 모임의 동영상들, 그리고 하루에도 십여 개씩 올려지는 동창들의 메시지들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드나드는 사람은 스무 명 안팎이었다. 그리고 컴퓨터에 미리 장치를 해 놓아, ‘근조 아무개 동창 부친상 빈소 00대학병원 장례식장’식으로 메시지를 치면 일제히 전체 동창의 휴대전화에 꽂히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각자 살기에 바빠서인지 그것도 반응이 약했다.
중창단 리더였던 조광희가 갑자기 이민을 떠난 것도 가을이었다. 우리는 처음에 아무 영문도 몰랐다. 두 해 동안 같은 반에 짝으로 나란히 앉아 학교생활을 했던 나는 아무 낌새도 느끼지 못했다. 광희는 타고난 재능 때문에 성악을 전공해도 좋을 듯했지만 육군 대령인 아버지 뜻에 따라 법과대학에 가려 하고 있었다. 며칠 표정이 시무룩했는데 나는 그것이 마지막 모의고사 성적이 떨어진 때문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무단결석을 했다. 집에 전화를 했으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 방과후 집으로 찾아갔으나 불이 꺼져 있었다.
다음날 학교에 나온 광희는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나 브라질로 이민 간다. 아무것도 묻지 마. 아버지의 결정을 따를 뿐이야.'
우리 중창단 동기들은 털썩 풀밭에 주저앉았다.
“언제 떠나는데?'하고 내가 물었다.
“다음달 십삼일 부산항에서 이민선이 떠나.'
우리는 왜 갑자기 떠나냐, 집안에 무슨 문제가 있냐, 아버지가 갑자기 예편을 하게 됐냐, 어떻게 이민을 이십 일 만에 갈 수 있냐, 하고 열심히 물었지만 광희는 머리만 설레설레 흔들다가 벌떡 일어나 교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다음날 가족들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대입 예비고사가 목전에 있었지만 우리는 방과 후 며칠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허사였다. 그의 아버지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이라고 추측만 하였다.
이민선이 떠나는 날은 월요일이었다. 전날에 우리 넷은 가느다란 희망을 갖고 우리 집에 모여 공부를 했다. 혹시 광희에게서 전화가 올지 모르며, 그런다면 우리 집으로 우선 걸어 올 것이라고 추측했다. 우리의 짐작은 들어맞았다. 저녁 7시경 그에게서 전화가 오고 우리는 잠깐씩 통화를 하며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부산으로 가자!'
그렇게 말한 것은 머리 회전이 빠른 김호남이었다. 그는 광희네가 고국에서 마지막 밤을 보낼 광복동의 여관 이름과 이민선의 이름을 적은 손바닥을 펴 보였다.
“그래!'
나머지 셋은 동시에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마침 우리 집에는 동생들만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장롱에서 돈을 훔치고 대신 편지를 넣었다. 어머니, 용서하세요. 부산 가서 광희를 보내고 오겠습니다, 하고. 아버지의 카메라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세 친구와 함께 무작정 전철을 타고 영등포역으로 갔다.
일요일 밤이라 열차 좌석표는 없고 간신히 10시에 떠나는 입석표를 샀다. 부산에 내린 것은 새벽 4시 40분, 여관을 찾아 광희와 가족을 만난 것은 6시였다.
광희는 우리를 보자 입이 얼어붙은 사람처럼 눈만 껌벅거렸고 어머니는 '얘들아, 얘들아.'하며 울먹였다. 세 살 아래 누이동생 은혜는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광희의 아버지가 우리를 하나씩 끌어안았다.
“이놈들, 예비고사를 코앞에 두고 부산까지 오다니. 올라가는 표는 사 놨느냐?”
“네. 일곱시 십오분 차예요.'
“서둘러야겠다. 역 앞에 가서 아침을 먹자.'
광희네 가족과 우리는 택시를 타고 부산역 앞으로 가서 해장국집으로 들어갔다. 어머니가 전화를 빌어 우리 집과 장거리 통화를 하고, 아버지는 술 한 병을 들고 왔다.
“사나이답게 이별주를 마시고 헤어져라.'
광희네 가족들이 자리를 비켜 주었으므로 우리는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셨다.
“고맙다, 얘들아. 여기까지 와 줘서.'
“잘 살아라.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편지해라.'
시계를 보며 천천히 국밥을 떠먹다가 내가 물었다.
“왜 떠나는지 이젠 말해 줄 수 있지?'
조광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 시간 뒤엔 떠날 테니 말해도 되겠지. 대신 너희들은 입을 열면 위험해진다는 걸 명심해. 보도통제 때문에 그냥 묻혀 버리겠지만 아버지는 독재정권을 쓰러뜨리는 군사혁명 조직에 참가하셨어. 그걸 정보기관이 눈치챘지. 장성과 고급장교들을 줄줄이 구속하면 세상에 알려질 테니까 은밀하게 처리하고 있어. 아버지는 남미행 이민선에 실어 보내라는 게 높은 분의 뜻이었대.'
내가 광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래서 남들은 일년이 더 걸린다는 이민절차를 후딱 해치운 거구나.'
우리는 아직 어둑어둑한 역광장을 걸었다. 늦가을 아침 바람은 차가웠다. 가로등 불빛에 어깨를 응승그리고 걷는 우리 다섯과 광희네 가족들의 그림자가 커졌다가 다시 작아졌다.
우리는 플랫폼까지 갔고 거기서 사진을 몇 장 찍은 뒤 포옹을 했다. 그리고 '새야 새야 파랑새야’와'올드 랭 사인’을 불렀다. 앞곡은 우리 중창단의 상징적인 노래였다. 몇 해 전 우리 선배들을 데리고 중창단을 창단한 음악 선생이 무척 좋아하여 집중적으로 연습시켜 대표곡이 되었다. 그래서 교장 선생님이 중창단 이름을 '파랑새’라고 지었던 것이다.'지나간 오랜 옛날’이란 뜻을 가진 스코트랜드의 이별 노래인 뒷곡은 선배들이 졸업할 때 불러주던 것이었다. 부산역 플랫폼에서 처음에는 테너 파트를 나 혼자 불렀는데 묵묵히 듣고 있던 광희가 하이 테너를 넣으며 들어왔다. 아침 플랫폼에 남성 5중창이 울려 퍼지자 승객들이 모여들었다. 곡이 끝나자 사연을 물었고 사정을 알고는 뜨겁게 박수를 쳤다.
인천의 학교에 도착한 것은 5교시가 진행중인 오후 2시경이었다. 우리는 삼년 개근이 깨어졌고 4시간 동안 복도에서 무릎을 꿇는 벌을 받았다.
나는 인연이 있는 현금 많은 큰손들에게 예금을 요청하는 전화를 하고 창구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챙기며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내 젊은 날을 풍요롭게 했던 중창단의 노래들과 친구를 보냈던 부산역의 정경이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나는 어찌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옛 친구를 맞으러 나가기로 결심했다.
오후 6시를 앞두고 동인천역에 도착해 유료 주차장에 차를 두기 위해 택시 승강장 옆으로 난 통로를 타고 들어갔다. 알루미늄 난간에 기대 서 있는 동식이 보였다. 지난해 말 동창회 송년회에서 보고 열 달 만에 만나는 것인데 앞머리가 더 벗어지고 배도 더 많이 나와 있었다.
내가 차창을 열자 그는 놀부처럼 심술 섞인 표정을 하고 말했다.
“이렇게 올 수 있는데 아까는 왜 퉁겼냐, 임마.'
나는 그를 외면한 채 입을 열었다.
“너 보고 싶어 온 게 아니라 광희가 허탕칠 거 같아서 왔다, 임마.'
차를 전진시키려는데 그가 내 차 창틀에 손을 짚었다.
“찬이도 왔다. 이건 찬이 생각인데, 광희가 동인천역 어디 나타날지 모르잖아. 그래서 찬이는 백화점 지하 전철 출구를, 나는 택시 승강장을 맡기로 했다. 넌 시계탑으로 가라. 옛날에 늘 거기서 만났으니까.'
주차장에 차를 두고 나왔다. 지난날 이 도시의 중심이었던 역 주변은 한가했다. 십여 년 전에 옛 역사를 헐고 지은 백화점식 상가 건물 빼고는 거의 변하지 않고 옛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길도 그대로이고 건물들도 거의 그대로였다. 백화점식 상가 건물도 외벽이 낡아 시멘트가 벗겨진 자리가 흉터처럼 보였다. 내 일터가 있는 신도시의 화려하고 활기찬 모습과는 달리 조용하고 초라했다.
뻥튀기를 파는 노점상과 중국산 싸구려 양말을 파는 리어카들, 유리문이 부서진 공중전화 부스들 사이로 오후의 가을 바람이 낙엽 부스러기를 굴렁쇠처럼 몰고 다니고 있었다. 아직 불이 들어오지 않은 가로등의 기둥이 긴 목을 뽑아 올리고 허리에 울긋불긋한 광고 전단들을 갑주(甲冑)처럼 덕지덕지 붙이고 있었다.
웃옷 속주머니에서 휴대 전화기가 울렸다. 전철역을 지킨다는 윤찬이었다.
“왔구나.'
“응, 방금 도착했어. 시계탑 앞이야.'
전신이 증권분석가인 비디오 대여점 주인은 그냥 끊기 심심했는지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수학여행 때 김호남이한테 거시기 사진 찍힌 일 생각나니?'
나는 그것이 화해를 구하는 말이라고 생각해 웃음을 섞어 말했다.
“응. 그런 일이 있었지. 그건 왜 물어?'
“갑자기 생각났어. 사진 찍힌 놈들이 다 모이니까 말야. 물론 우리 옷을 벗기고 찍은 놈은 못 오지만.'
“그렇군.'
나는 핫핫 과장하여 웃으며 발을 옮겼다.
2학년 수학여행 때 우리 다섯은 설악산에 도착하자마자 학년과장 선생한테서 특별명령을 받았다.
“내일 캠프파이어 할 때 교장선생님이 좋아하시는 탐 존스의'딜라일라’와 ‘고향의 푸른 잔디’를 화음 넣어 부를 수 있겠느냐?'
리더인 광희가 대답했다.
“방을 따로 주신다면 연습하겠습니다.'
여관 2층에 작고 아늑한 방이 하나 있었는데 학년과장 선생은 그것을 우리에게 주었다. 첫날 저녁 우리는 거기서 연습을 했다.
그 때 내가 카메라를 가지고 갔다. 아버지가 사진 찍기를 취미로 가진 터라 우리 집에는 괜찮은 카메라가 있었다. 칼라 필름이 귀하고 현상 인화도 비쌀 때였으므로 나는 단 한 장도 헛두루 찍지 않았다.
연습을 끝낸 다음 소주를 마시고 취해서 정신 없이 쓰러져 잤다. 그런데 취하지 않고 잠 안 자는 친구가 하나 있었다. 김호남이었다. 그는 내 배낭에서 카메라를 꺼낸 뒤 우리들의 바지와 팬츠를 벗겼다. 민망한 말이지만 그가 툭툭 건드리자 우리들 대부분이 페니스가 발기했다. 그는 혼자 킬킬 웃으면서 하나씩 카메라에 담았다.
다음날 아침에 카메라를 꺼내 든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네. 이번 필름에 몇 방이 남은 줄 알았는데 다 돌아갔네.'
그러다가 내가 착각한 것으로 여기고 새것으로 갈아 끼웠다.
둘쨋날 캠프파이어에서 우리는 두 곡을 불렀다. 윤찬의 기타 반주까지 잘 맞아서 효과는 만점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좋아서 입이 크게 찢어지셨다.
여행을 끝내고 귀가하자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우리 회사 현상소에 맡길 테니 필름을 다오. 시중의 반값이면 되니까.'
나는 필름을 내드렸다.
사흘 뒤에 일찍 퇴근한 아버지는 사자처럼 성이 나서 다짜고짜 나를 마당에 엎드려뻗쳐를 시키셨다.
“왜 그러세요, 아버지?'
“네놈 때문에 망신당한 걸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임마.'
아버지는 흥분하여 숨을 몰아 쉬셨다.
아버지는 필름들을 현상소에 갖다 주라고 여직원에게 맡겼고 이틀 뒤에 다시 찾아오게 했다. 현상소에서 일하는 청년은 '좋은 사진 몇 장이 들어 있으니 잘 보고 하나 고르세요.”하고 말했다. 여직원은 걸어오면서 미리 보았고 거기서 성기 사진들이 나오자 울고불고 했던 것이었다.
그 날 어머니가 담임 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두 시간째 엎드려 있는 나를 구하게 했다. 담임은 우리 집으로 전화를 걸어 대신 사죄를 하며 아버지의 화를 풀게 했다.
다음날 학교에 가자마자 교무실로 불려 갔다. 담임은 내게서 사진들을 빼앗아 책상 위에 늘어놓았다.'이놈들아, 자기 것을 찾아.' 그러나 우리는 쉽게 자기 것을 찾아내지 못했다. 한참만에 자기 것을 찾은 우리는 그것을 교복 윗주머니에 클립으로 매달고 담임의 훈시를 들었다. 다른 반 담임 선생들은 들여다보고 “단단하게 잘 익었군.” 하며 우리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뒤 우리는 한동안 동기생들에게 ‘거시기 중창단’이라고 불리웠다.
인생의 모든 일이 대개 그런 것처럼 그 놀랍고 부끄러운 일도 세월이 가면서 잊혀졌다.
나는 주의 깊은 시선으로 광장을 훑어보며 발을 옮겼다. 이제는 낡아서 볼품 없는 시계탑이 서 있고, 그것의 그림자가 석양을 받아 길게 드러눕고 있었다. 그 쪽을 주목했으나 조광희는 없었다. 시계탑 아래에는 오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몸이 북어처럼 마른 중늙은이와 해병대원이 서 있었다. 중늙은이는 나와 잠시 눈이 마주쳤으나 이내 광장으로 눈을 돌렸고 해병대원은 두 손을 야전재킷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입만 뻐끔거려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 등나무 테라스가 있고 나무 벤치들이 놓여 있었다. 거기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려다가 나는 숨을 멈추고 벌떡 일어섰다. 그 중늙은이의 뒤에 검정색 여행가방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본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몸을 돌이키던 나는 보았다. 그 비쩍 마른 중늙은이가 나를 향해 손짓을 하며 걸어오는 것을.
“너 현수지?'
그의 눈매가 낯익다고 느끼는 순간 그가 한 말이었다.
“광희구나.'
나는 달려가 그를 얼싸안았다. 기억 속의 그는 어깨가 넓었는데 내 팔이 허전할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자세를 유지한 채 휴대전화를 꺼내 그의 등뒤에서 윤찬과 동식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다.
“왜 이렇게 야위었어?”하고 말하며 그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사업 때문에 몇 년 고생했지.'
나는 깊은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였다. 그의 눈빛이 형형한 것을 보고 그가 매우 치열하게 세상을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언제 도착했어?'
“한 삼십 분 전에.'
“왜 돌아오는데 이십오 년이나 걸렸어?'
“미안해. 차차 이야기할게.'
그 때 동식과 윤찬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왔다.
나는 옛 친구들을 태우고 그 곳을 떠났다. 송도에 있는 한정식집이 7시에 예약되어 있었다. 약간 시간이 남을 것이므로 여유 있게 구시가지를 통과해 가기로 했다. 그 곳에는 우리의 모교가 신개발지로 옮겨간 뒤 옛 건물 일부를 사용하고 있는 초등학교가 있었다.
우리는 광희에게 어떻게 살았는가, 왜 25년 동안 소식을 끊고 살았는가 묻지 않았다. 그의 표정에 엿보이는 고단했던 삶의 흔적이 우리 가슴을 찔러 오기 때문이었다.
“내일 돌아가야 한다는 게 사실이니?
내 말에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삼 일이라도 더 머물면 안 돼?'
“일본 정부의 초청으로 산업시찰을 하러 왔어.'
나는 원망 섞인 탄식을 했다.
“아, 이 사람아. 이틀이 뭐야.'
광희는 몹시 미안한 표정을 하고 내 손을 잡았다.
“모레 합작 공장을 세워 준다는 일본 회사를 방문해야 해.'
윤찬이 광희가 앉은 조수석으로 몸을 기울였다.
“일 끝난 뒤 다시 와서 며칠 머물다 가면 안 돼?'
“미안해. 나는 아르헨티나에 살아. 아르헨티나는 지금 경제가 쑥밭이 돼 있어. 내가 경영하는 농장과 식품공장도 쓰러지기 직전이야. 수백 명의 종업원이 있고 그들 가족 수천 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
그가 몹시 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화제를 바꾸었다.
“부모님은 어떠시니?'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건강하셔.'
“누이동생 은혜는?'
“미국 남자하고 결혼해서 샌프란시스코에서 살아.'
윤찬이 입을 열었다.
“인천도 많이 바뀌었지. 안 바뀐 데는 동인천역과 근방뿐이야. 아까 거기 어땠어? 옛 기억이 살아왔어?'
광희는 쓸쓸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 바뀐 건 카메라대학병원 하나뿐이야. 그것도 이층이었는데 삼층으로 하나 더 올렸더군. 아리랑소리사는 누렇게 바랜 타일을 갈색으로 새로 바꿨고 나무 창틀을 알미늄으로 바꿨어. 일번지다방이 있던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광장을 그만큼 넓힌 거야. 축현서점 건물은 인천여고 중창단 최순옥이네 집이었는데 헐어버리고 다시 지었더군.'
나는 그만 입을 떡 벌리고 말았는데 거의 잊어버린 사실들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깊고 깊은 기억의 계곡에서 갑자기 나비 떼처럼 날아올랐다. 눈을 감고 고장난 카메라를 작은 드라이버 하나로 순식간에 해체하는 솜씨를 가졌던 키큰 유동식 아저씨, 비틀즈의 음악을 틀어주었던 아리랑소리사, 노래도 잘하고 얼굴도 예뻐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책방집 딸 순옥이. 광희의 말 때문에 그것들은 아련한 그리움으로 내 가슴을 젖게 해 주었다. 동식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동영상 카메라로 찍어간 것도 아닌데 어떻게 다 기억하는 거야?'
광희는 서양 사람들처럼 두 팔을 벌리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는 무언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밖에도 무수히 많은 것을 기억한다고.
모교 자리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방과후인지라 학교는 텅 비어 있었고 우리는 경비원의 양해를 구한 뒤 교정으로 들어갔다. 광희는 본관 건물 앞에 선 휘어진 소나무 앞으로 걸어갔다.
“이학년 예술제 때 우리가 여기서 인천여고 중창단 애들이 오기를 기다렸지.'
그랬던가, 하며 우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광희가 계속 말했다.
“우리의 관심이 집중됐던 순옥이는 노란 스웨터에 청바지를 입었고, 정미와 혜리는 교복, 미림이와 명애는 손톱 봉숭아물이 덜 빠진 채 왔지.'
나는 눈을 감고 한참을 생각한 뒤에야 그런 일이 있었던 듯해 겨우 머리를 끄덕일 수 있었다.
“어렴풋이 떠오르긴 하는데 옷차림이나 손톱 봉숭아물은 기억이 안 나네.'
윤찬이 말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광희는 졸업하기 전에 떠났으므로 졸업 앨범이 없는 터인데도 3학년 5반 65명의 이름을 거의 외우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분단에 누가 앉았는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내 자리마저도 기억할 수 없었다.
차를 타고 송도로 달릴 때에도 그랬다. 광희는 차창을 스쳐 가는 거리 풍경을 보며 옛날을 회상했는데 너무 생생해서 마치 새 그림 위에 옛 그림 두루마리를 펼쳐나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는 마치 우리가 잊어버린 것들을 되찾아 주려고 온 사람 같았다.
우리는 한정식집에 도착해 방으로 들어갔다. 다행히도 광희는 고국 음식을 참으로 맛있게 드는 것 같았고 우리가 주는 술잔도 잘 받아 마셨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그가 마흔 살이 다 되어 스페인계 여자와 결혼하여 겨우 여섯 살과 네 살이 된 아이들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지갑에 넣어온 사진도 볼 수 있었다. 그의 아내는 젊고 아름다웠다. 아이들은 그녀처럼 푸른 눈을 갖고 머리칼은 그를 닮아 검은색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기억 속에 가장 우아한 어머니로 남아 있던 모친은 늙은 노인이 되어 있었다.
술을 마시며 지나간 세월을 돌아보았다. 때때로 슬픔이 물결처럼 밀려왔고 그럴 때면 우리는 쓸쓸히 웃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역정도 이야기했고 가장 영리했던 김호남이 잘못 풀린 것을 안타까워했다. 광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몹시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숨김없이 들려주었다. 한국의 사십대 남자가 일터에서 밀려나지 않으려 얼마나 분투하는가를, 집을 장만하고 처자를 부양하기 위해 얼마나 고단하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그러다가 나는 발견하였다. 옛날을 회상할 때 외에는 그와 거의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모든 것을 그 시절의 잣대로 보고 그 시절의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소주를 세 병쯤 비웠을 때, 윤찬의 휴대전화로 동창회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윤찬은 '내가 아까 동창회 홈페이지에 광희가 올 거라고 알렸거든.'하고 우리에게 설명하고는 동창회장과 직접 통화하도록 광희를 바꿔 주었다. 그리고 잠시 뒤에는 동창회 총무가 전화를 걸어 왔다. 우리는 광희의 동의를 얻어 내일 동창들과 점심식사를 같이 하는 것으로 약속했다.
동식이 광희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우리는 이렇게 때로는 미워하고 때로는 위로하며 살 비비고 살아왔어. 그런데 너는 어디 갔다 온 거야?'
광희는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고는 무대에서 독백하는 배우처럼 말했다.
“이민선 프린세스 오브 아틀란티스 호를 타고 두 달 반 동안 남태평양, 인도양을 거쳐 대서양을 횡단해서 지구 반대편으로 가서 살았지. 모국이 아침 여섯시면 정확히 저녁 여섯시인 나라, 모국이 여름이면 겨울인 나라에서.'
그렇게 말하다가 그는 갑자기 뚜릿뚜릿해진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내 기억이 선명하다고 너희들은 놀라고 있지. 너희는 함께 인생 길을 걸으며 추억을 이어 왔지만 나는 열아홉 살 가을로 정지됐지. 외롭고 힘들 때면 영화 필름을 꺼내 돌리듯이 너희들과의 추억의 필름을 돌렸어.'
우리 셋은 숙연해졌다.
윤찬이 조용히 물었다.
“우리가 연습했던 곡들도 필름을 돌렸냐?'
광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파트의 음은 물론 너희들 각각의 것도 대부분 기억할 수 있어.'
그러더니 '새야 새야 파랑새야’의 첫 소절 4부 파트를 따로 한 번씩 조그맣게 불렀다.
“대단하다, 정말.”하며 윤찬이 광희의 잔에 술을 부어 주었다.
광희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는 고국과 연결되는 모든 끈을 끊어 버렸어. 한국인 이민자들한테는 물론 현지인들에게도 자신이 고급장교였다는 걸 말하지 않았어. 아버지가 그렇게 사시니 나도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리고 우리는 브라질에 자리잡는 데 실패했어. 한국인 이민자들의 사기에 넘어가서 무일푼이 됐지. 아버지는 공장 경비원을 했고 어머니와 은혜는 노점상을 했고 나는 거기서 빈데라고 부르는, 고물차에 옷을 싣고 지방을 떠돌면서 파는 일을 했어. 그러다가 돈을 좀 모아 아르헨티나의 오지 라마루케라는 곳으로 가서 현지인이 실패해 거의 버려둔 농장을 사서 일으켰어. 십 년 동안 거의 매일 새벽 네시부터 밤 열시까지 일했지. 아버지는 농장을 반듯하게 일으켜 세운 뒤 돌아가셨어. 나는 기차역이 있는 가까운 도시에 식품 가공 공장을 세웠어. 그게 잘 되는가 싶더니 아르헨티나가 경제 위기에 빠지면서 악전고투를 하게 됐지. 나는 떠나 있었지만 늘 너희와 같이 있었어.'
“그랬구나.'
우리는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2차로 양주집을 가기로 한정식집을 나오다가 한꺼번에 화장실에 갔다. 한 줄로 서서 소변을 보는데 윤찬이 갑자기 큭큭 웃었다.
“우리의 거시기들이 다시 만났군. 잘들 지냈냐, 거시기들아.'
우리는 웃으며 고개를 돌려 서로의 성기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 순간 세 사람에게 쌓였던 미움과 갈등이 봄눈처럼 녹아 버렸다고 생각했다.
먼저 일을 끝내고 바지 단추를 채우던 윤찬이 손뼉을 쳐서 우리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내 엉뚱한 생각을 한 번 들어봐 줄래?'
우리는 어서 말하라는 뜻으로 수염 덥수룩한 그의 얼굴을 주목했다.
“리더가 돌아왔으니 노래를 부르자는 거야.'
술을 어느 정도 마셨으니 노래방이라도 가자는 것이리라 생각하고 나는 손을 들어 동의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그게 아니었다.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나더니, 하고 몽금포 타령을 자신의 베이스 바리톤 음정으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각자의 파트 음정으로 가세했다. 그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광희의 하이 테너였다. 몸이 야위었는데도 성량이 풍부했다. 복식호흡을 하면서 배에서 시작하여 머리로 끌어올리는 펠칸토 창법은 옛날보다 더 능숙했다. 전문적인 수련은 안 했더라도 지금까지 꾸준히 노래를 불러 왔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름다운 서정과 힘을 함께 가졌다는 평을 들었던 그의 노래는 이제 깊이와 무게까지 곁들여져 있었다. 곡이 끝난 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윤찬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아까 광희가 옛 레파토리의 파트별 음정을 거의 외우고 있다고 했지? 내 가게에는 우리의 중창 녹음 테이프가 있어. 거기서 연습을 해서 동창들 앞에서 부르자는 거야. 내일 점심때는 어렵고 광희가 모레 아침 첫 비행기로 가 줄 수 있다면 가능하지.'
내가 손을 들어 발언권을 얻었다.
“아침 여덟시에 나리타 공항행 첫 비행기가 있어.'
광희가 활짝 웃었다.
“그럼 됐어. 일본 회사 방문은 오후 두 시니까.'
우리는 그 자리에서 아홉 곡을 뽑고 발표 순서까지 결정해 버렸다. 1. 민요 ‘몽금포 타령' 2. 김동진 작곡 '추억' 3. 채동선 작곡 '새야 새야 파랑새야' 4. 시벨리우스 작곡 '핀란디아' 5. 슈만 작곡 '두 사람의 척탄병' 6.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중 '드링킹 송' 7. 비틀즈가 부른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 8. 탐 존스가 부른 '고향의 푸른 잔디’, 9. ‘올드 랭 사인’이었다.
다음날 동창회장이 공연장소로 마련한 곳은 우리의 후배가 경영하는, 문화예술회관 근처의 큰 카페였다. 팬터마임으로 전국적 명성을 쌓아가고 있는 후배는 그 카페에 무대를 만들고 아내에게 경영하게 하며 매주 세 번씩 공연을 하고 있었다.
나는 전날 밤 집에 가지 않고 윤찬의 집에서 친구들과 같이 잤다. 그리고 아침에 휴가를 신청하고 출근하지 않았다. 동식과 윤찬이 일을 쉬겠다고 하는 터라 기꺼이 그렇게 결정했다. 우리는 온종일 윤찬의 가게에 같이 있으면서 옛날처럼 열심히 연습했다. 성대가 상하지 않게 조심하면서 파트별 음정을 회복하려고 애썼다.
오후에 윤찬의 기타 반주에 맞춰 마지막으로 화음을 조절하고 있을 때였다. '오늘은 휴업합니다’라는 쪽지를 붙이고 굳게 닫은 가게 셔터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찾아온 사람은 소식을 모르던 베이스 김호남이었다.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우리는 한꺼번에 소리쳤다.
김호남은 멋쩍은 듯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PC방에서 홈페이지를 봤어. 제기랄, 난 지명수배된 경제사범이지만 안 올 수가 없었어. 내가 없으면 저음이 약하잖아. 그래서 총무에게 전화를 했지. 하지만 공연 끝나면 난 소리 없이 사라질 거야. 너희들 앞에서 체포될 수는 없으니까.'
공연시간이 임박하여 카페로 간 우리는 깜짝 놀랐다. 온갖 애를 써도 막무가내로 모이지 않는다던 우리 동창들이 가족들까지 데리고 나와 백 석이 넘는 자리를 가득 메웠던 것이다. 그 가운데는 동창회 총무가 몰래 연락하여 나온 동식과 윤찬과 나의 가족도 있었다.
비록 완벽한 중창은 아니었지만 혼연일체가 되어 노래를 불렀다. 역시 조광희가 가장 빛났다. 그리고 마지막 곡 '올드 랭 사인’은 2절을 우리말 번역가사로 불렀는데 동창들과 가족들도 일어서서 합창했다. 그 순간은 참으로 감동적이어서 우리 멤버들의 아내와 딸들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인사를 하기 위해 혼자 무대에 남은 광희는 조명을 한 몸에 받으며 도쿄에서 총동창회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전화를 건 뒤부터 그 순간까지의 일을 찬찬히 이야기했다. 그러고는 두 팔을 치켜올리고 외쳤다.
“나는 외롭지 않습니다. 남은 생애를 이 순간을 회상하며 살겠습니다.'
준비한 행사가 끝난 터라 우리는 동창들 속으로 흩어져 술잔을 들었는데 김호남은 우리 넷과 급히 한 잔씩 나누고 사라져 버렸다.
그 날 밤 만취하도록 마셨던 광희는 내 집에서 자고 아침에 총총히 일본으로 떠났다. 나는 두 해 전에 사 놓고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노트북 컴퓨터를 그에게 주었다. 고교생인 내 아들은 자기 책꽂이에 꽂혔던 윈도우즈와 인터넷 사용 설명서, 그리고 새벽까지 노트북 컴퓨터 사용법을 차근차근 설명해 녹음한 테이프를 가방에 넣어 주었다.
“허, 이거만 있으면 홈페이지도 들어가고 그 채팅이라는 것도 할 수 있나?'
“네. 아저씨는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거예요.'
내 아들이 그렇게 말했고 나와 아내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나는 출근해야 하므로 공항까지 가서 배웅할 수 없었는데 그는 아침 일찍 내 집 앞으로 온 동식의 차에 오르면서 내 손을 잡았다.
“어제 많이 마셨는데 위장 괜찮냐?'
“씻은 듯이 편안해. 나는 알았어, 노래하면 낫는다는 걸. 호남이와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남은 셋이서라도 중창을 할 거야.'
나는 사실 위가 쓰렸지만 밝은 표정을 지으면서, 곧 다시 지구 반대편으로 갈 친구에게 말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