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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신문 가을문예 1천만 원 고료 신인 공모 당선작
중편소설 자전거 타는 남자
서은아
밤새 내리는 빗소리에 잠을 설친 그녀는 거실로 나와 커튼을 젖힌다. 창밖은 지독한 안개비에 젖어 있다. 우기로 접어든 지도 두 달이 지난 11월 하순인 것이다. 이 나라의 P주에 온 지 2 년. 이런 날은 어김없이 그녀의 우울 지수도 치솟아 삶의 질이 최상이라는 도시에 살고 있다는 사실도 별로 위안이 되어 주지 못한다. 서둘러 출근 준비를 마친 그녀는 주방으로 간다. 그녀 집에 머물고 있는 이층의 여학생과 아래층의 최도 일찌감치 집을 나선 것 같았다.
오늘부터 방을 빌리겠다고 전화했던 손님이 곧 도착할 것이다. 커피메이트의 여과지를 새로 갈고 티스푼 두 개 분량의 분말을 담아 커피를 내린다. 금세 퍼지는 헤이즐넛 커피향으로 인해 그녀는 기분이 다소 환기가 되는 느낌이다. 그녀는 커피가 든 컵을 들고 테라스 문을 열고 정원을 내려다본다. 안개비는 어느새 굵은 빗줄기로 변해 있다. 약속한 시간에서 이미 삼십분이 지나 있었음에도 기다리는 손님은 오지 않는다. 곧 출근해야 할 시간인 그녀는 내심 초조해진다. 마침내 벨 소리가 들리고 그녀는 창문을 내다본다. 집 앞에는 택시도 자동차도 보이지 않는다. 잘 못 들었던가 싶었던 벨소리가 다시 들려오자 그녀는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 현관문을 연다. 문을 열고 방문객을 바라본 그녀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다. 공항에서 전화 하셨던 분이시죠. 그런데 저 비를 다 맞고 걸어오신 건가요? 네. 버스 정류장에서 꽤 먼 거리군요.
남자의 몸에서 물방울이 연이어 떨어져 내린다. 남자를 이층 거실로 안내한 그녀는 더운 차와 마른 수건을 내준다. 남자는 30대 후반의 어딘지 불안한 모습이다. 그녀는 남자의 모습이 어디선가 본 듯, 낯익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방을 보여 주시겠어요? 아, 네. 따라 오세요. 트윈베드에 월 550불입니다. 그녀는 아래층에 남아 있는 방 중 침대도 채광도 최상인 방을 보여 준다. 방을 돌아보던 남자가 입을 연다. 저, 다른 방은 없을까요? 그녀는 남자의 손에 들린 낡은 배낭을 바라본다. 남자의 차림새로 미루어 보아 더 싼 방을 찾는 것에 분명했다. 저희는 그 아래 가격으로는 비어 있는 방이 없네요. 그녀가 말을 마치자 잠시 머뭇대던 남자가 말한다. 가진 것이 넉넉지 않아서요. 실례했습니다.
남자가 몸을 돌려 현관 쪽을 향한다. 그녀는 이미 지나 버린 출근 시간과 비오는 밖으로 남자를 내보내야 한다는 것에 마음이 불편해진다. 현관으로 가기 위해 복도를 지나던 남자가 갑자기 멈춰 서서 그녀에게 말한다. 이곳은 뭐죠. 여기도 방 같은데. 아, 거기요. 창고로 쓰는 곳이에요. 볼 수 있을까요. 거긴 쓰지 않는 곳이라서. 그냥 둘러보게만 해 주십시오. 남자의 말에 그녀는 마지못해 방문을 연다. 환기구도 없이 밀폐된 그곳의 방문을 열자 냉기와 곰팡내가 끼쳐 온다. 방을 보고 난 남자는 막무가내로 그 방을 임대해달라고 한다.
히터는 물론 침대조차 없는 그곳을 어떻게 사용하겠다는 것인지. 그녀는 남자의 행색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핀다. 그녀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이곳에서 적지 않게 경험해 왔다. 한 번 틈을 보여주면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와 자신의 영역을 넓혀 가는 부류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남자를 내치고 싶었지만 무엇보다 완강하게 자기의지를 관철시키려는 이 남자와 협상할 시간이 없다. 늦어도 아홉 시까지는 사무실 문을 들어서야 하고 그녀가 움직여야할 일정들이 빼곡히 칠판을 메우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순간, 남자가 그 방에서 버텨봐야 이틀일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친다. 몇 번 그런 선례가 있었던 것이다. 그 방을 쓰겠다고 했다가 반나절 만에 짐을 싸들고 나간 이들. 결국 그녀는 월 200불에 그 방을 남자에게 임대한다. 지하실에서 쓰지 않는 매트리스를 두 개 가져다 포개 놓은 후 그 위에 시트를 깔아 준다. 아니 그 모든 일은 남자가 다했다. 그녀는 시트만 내 주었을 뿐이다. 창문조차 없는 그 방에 달랑 배낭 한 개에 노트북, 펜탁스 카메라가 전부인 짐을 내려놓는 남자의 움직임에 활기가 돈다. 남자의 성은 박 씨라고 했다. 그녀는 남자에게 집안에서 지켜야할 규칙 등을 일러주고 바쁘게 집을 나선다.
오늘은 본국에서 국회의원이 오는 날이다. 그녀는 행사장으로 가려 했던 것과 달리 국장의 말대로 공항으로 간다. 공항에 도착하니 오 의원은 이미 도착해 있다. 인삼 아가씨까지 포함한 총인원이 20명, 그중 수행기자만 열 명이 넘는다. 여기까지 와서 오 의원, 그를 만나게 되다니. 막상 오 의원과 얼굴을 맞닥뜨린 그녀는 잠시 멀미가 일 듯 현기증이 인다. 오 의원은 아무 의미 없는 웃음을 지으며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있다. 그녀가 좌중을 돌아보는 동안 먼저 와 있던 리가 그녀에게 다가 온다. 일간지 세 개, 정보지 두개, 라디오 방송국 하나가 전부인 이곳이다. 교민 행사나 그밖에 자리에서 번번이 마주치게 되던 리는 차가 없던 시절에 그녀를 몇 번쯤 집에 데려다 준 적이 있다. 리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쩐지 그늘이 있어 보였다. 국장의 말로는 독재시절 검사였던 리의 아버지가 어떤 사건에 휘말려 망명을 했다. 또한 그 때문에 사법고시 2차에서 몇 번의 낙방을 경험한 리는 한국 쪽으로 머리도 두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라는 휘청휘청 다시 명예로운 순채무국이 되었는데 국회의원 관광 나오는데 먼 수행기자들이 저렇게 많나. 이 삼 일이면 끝날 일정도 길고,”
“수행원 한 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하긴, 그래도 새삼 화나네. 지금이 어떤 판국인데 우리나라만 어려운 것도 아니고, 강대국까지 경제대란인데. 그런데 윤 기자는 왜 얼굴이 그렇게 해쓱해요? 안 풀리는 거라도 있습니까? 요즘 그 방송국 잘 나가던데. 그게 다 윤 기자의 탁월한 마케팅 덕이라면서 너무 무리 하는 거 아닌가.”
리의 말은 언제나 잘 나가다가 마치 럭비공처럼 튄다. 상대를 예민하게 반응하게 하지 않고는 한 두 마디 이상 주고받기가 어려운 사람의 화법. 그녀에게는 종종 리의 그런 말들이 편치 않게 다가왔다. 말투와는 달리 리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럴 일이 뭐 있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선배도 낯빛이 좋진 않아요. 말 좀 덕스럽게 하면, 무슨 일 나나. 선배처럼 말하는 사람은 말로 인심을 잃는다고 어머니가 늘 말씀하셨는데. 이따 저녁에 오시죠. 거기서 봐요.”
방송을 뜨고 나자 의례적인 환영행사지만, 얼굴을 내밀어야 하는 기자 간담회에 늦고 말았다. 공식 일정이 끝나고 의원이 주최한 저녁 만찬에 들렀던 그녀는 일찌감치 자리를 빠져 나온다. 오래 앉아 있다가는 수행기자들에게 붙들려 2차, 3차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2
침대에서 눈을 뜨자 그녀는 습관처럼 창문의 커튼을 젖힌다. 그녀가 그렇게 고대하던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다. 오랜만에 보는, 어떤 색에도 쉽게 물들지 않을 것 같은 잉크 빛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그녀는 키스하고 싶은 심정이 된다. 안방에 딸린 샤워 부스에서 잇솔질을 하던 그녀는 오늘이 주중에 한 번, 방을 렌트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침을 제공해 주는 수요일 아침이라는 것을 기억해낸다. 손놀림이 빨라진다. 오디오 버튼을 눌러 앙드레 가뇽의 ‘바다위의 피아노’를 불러낸 그녀는 주방의 냉동실에서 스테이크 감을 꺼내 해동한다. 마늘과 오렌지 즙, 그리고 후추를 뿌린 양념에 고기를 잰다. 어제 퇴근길에 아침 메뉴를 위해 인도인 가게에서 장을 봐왔다. 남편이 본국으로 돌아가고 난 다음에 그녀는 대부분의 식품을 한국인 그로서리에서 배달시켰다. 대형마트에 쇼핑하러 가는 일이 어쩐지 엄두가 나질 않았던 것이다.
남편은 잘 지내고 있을까? 자신의 일 외에 집안일은 어떤 일도, 하물며 은행에 가는 것도 큰일인 듯 해내던 남편이 그녀 없이 이민 수속을 잘 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소식이 더딘 남편에게 아침부터 신경이 쓰인다. 오늘 메뉴는 조개를 넣은 클렘차우더스프, 종종 썬 열무김치와 오렌지, 요플레를 마늘 바게트에 얹은 카나페, 그리고 가볍게 구운 쇠고기 산적이다. 그녀의 방과 면하고 있는 방을 쓰고 있는 여학생이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주방으로 나온다. 오늘 메뉴는 뭐예요. 수요일, 아침 식탁은 정말 기대가 돼요.
식탁 차리는 것을 거들며 여학생의 말은 계속된다. 정말 이 나라 음식은 즐겨 먹을 수가 없어. 도대체 햄버거까지 짠 건 어떻게 이해해야해요. 여학생이 그녀의 집에 온 것은 지난 이월이었다. 박사학위 코스를 밟기 전에 부족한 영어공부를 위해 왔다는 여학생은 랭귀지 스쿨에 등록했다. 이집에서 가장 방문 목적이 분명한 여학생은 바지런하고, 성실하다. 주방에는 십 인용 식당이 따로 설계되어 있다. 그녀는 모슬린 식탁보를 깔고 그 위에 사인용 식기를 세팅한다. 한 번의 망설임도 없는 익숙한 손놀림이다.
이 나라에 온 지 삼 개월 만에 그녀는 이 집을 임대했다. 아래층에는 거실과 식당, 욕실. 그리고 일곱 개의 방이 있었다. 이층에는 안방과 거실, 서재, 식당, 손님용 방, 그리고 두 개의 욕실이 있는 대지만 이 백 평이 넘는 규모였다.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고집을 한 것은 하숙을 치거나 임대를 한다면 당장에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처음엔 다소 만류하던 남편은 그녀의 의견을 따라 주었다. 땅콩 소스에 버무린 야채샐러드를 끝으로 식탁차림은 끝이 난다. 그녀는 주방에 설치되어 있는 스피커폰을 통해 아래층 사람들을 불렀다. 창고 방의 박이 제일 먼저 올라 왔다. 그녀는 박이 한 밤중에라도 올라와 숙소를 옮기겠다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잘 주무셨어요? 방은 춥지 않으셨나요. 그녀가 먼저 박에게 인사를 건넨다. 네, 괜찮았습니다. 그녀의 맞은편에 여학생이 앉고 최가 앉는다. 최가 그녀 옆에, 그 앞에 박이 마주 앉는다. 서로 인사하시죠. 그들은 각자 자기를 간단히 소개했다. 여학생은 이십대 후반, 최는 삼십대 중반의 나이였다. 식사제공은 안 하신다고 들었는데 초대해 주신 건가요. 박의 말에 최가 대답했다.
“일주일 중 수요일만 스텔라씨가 저희를 배려한 특별한 아침이죠. 이 산적은, 산적 맞죠. 제사 때 어머니가 해주시던 맛과는 달라요. 우리 와이프는 아직 뭘 해도 제 맛이 안 난단 말야. 비슷한 양념을 쓴 것 같은데 느끼하지도 않고 맞아. 참기름을 안 쓰시는 것 같아. 그렇다고 스테이크 맛이 나는 것도 아니고, 연한 육질에 독특한 양념 때문인 것 같아요.
최는 서울이 고향이라고 했다. 취업이민을 위해 왔다는 최가 이집에 체류한 지도 6개월이 넘고 있었다. 최는 여기 머물렀던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육 개월 동안 머물렀던 사람들이 이곳을 떠날 때 그들 모두의 주소를 받아 내는 친화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또한 최는 그들에게 누누이 아버지는 시의원이고, 어머니는 모 대학의 강사라는 것을 일삼아 말했다. 최는 아직 이 집에서 가장 좋은 방에 머물고 있으며, 겐조 향수와 아르마니로 치장하고 있다. 그녀는 가끔 늦은 밤, 최가 큰 소리로 본국의 아내와 오랫동안 통화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최는 규칙적으로 아침에 집을 나섰다가 저녁에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정작 취업이민을 위해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최는 취업이민 조건에 부합되지 않는 인물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속사정을 그녀는 일일이 캐묻지 않았다. 올해 들어서서 부쩍 그녀의 집을 지나쳐 가는 방문자들이 외면상으로 내세우는 관광이나 어학연수의 목적이 아닌, 모호한 방문이 늘고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머무는 동안 집이나 깨끗이 쓰고 돌발적인 상황만 일으키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사정을 일일이 아는 체 해서 뭘 어쩌겠는가 말이다. 그녀에게 뭔가를 기대하는 것 같았던 최도 그녀의 그런 태도를 인식했는지, 지극히 형식적이나 정중한 태도로 그녀를 대했다. 그녀도 최의 그 정중한 태도만은 마음에 들었다.
그럼 이 요리는 선배가 신청한 거네요. 여학생은 두 달 먼저 들어온 최에게 언제부터인지 선배라 부르고 있었다. 그럼, 내가 수요일의 먹고 싶은 메뉴로 적어 넣었지. 역시 예의바른 최가 박에게 묻는다. 저보다 연배가 있으신 것 같은데 형님이라 불러도 되겠습니까? 이 나라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박은 마침 접시 위의 샐러드를 게걸스럽게 먹어대던 참이다. 그런 박에게 시간을 주려는 듯 여학생이 요리를 화제 삼는다.
“스텔라씨, 전 이 클렘챠우더스프가 정말 맛있어요. 쫄깃한 조갯살과 양송이 버섯. 살짝 익힌 샐러리를 씹는 맛, 샐러드 맛도 그만이죠. 땅콩소스에 슬라이스한 래디쉬에, 톡 쏘는 이 맛은 뭔가요. 식초를 넣은 거죠.”
여학생은 그녀에게 세레명인 스텔라라라고 불렀다. 그녀도 여학생이 자신을 언니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한국식대로 나이를 구별하고 연장자에게 덤인 듯 붙여주는언니라는 호칭으로 친숙한 척 자신의 영역을 만만한 듯 침범해 오는 습성이 싫었던 그녀였다. 이집에서 그녀와 가장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여학생은 이제 며칠 후면, 과정을 마치고, 이곳을 떠날 것이다.
“올리브 오일과 레몬즙을 넣었고, 신맛은 식초 때문일 거예요. 인도인 가게에서 산 사과 식초인데. 그 주인 말이 자기가 직접 담아 오 년 넘게 숙성시킨 거라더군요.”
그녀가 말을 마치자 모두의 시선이 박에게로 쏠린다. 그러나 박은 그런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식사에 열중하고 있다. 그녀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한다.
“괜찮다면 나 먼저 일어날게요. 오늘은 아침부터 일정이 잡혀 있어서요. 도우미 아주머니가 오시는 날이니까 식탁은 그냥 내버려두셔도 괜찮아요.”
“아, 어디 출근하시는 가봅니다.”
박이 반문했으나 그녀는 황급히 거실을 가로질러 자신의 방에서 외투를 꺼내 들고 현관문을 나선다. 그녀의 판단으로 짐작해 볼 때 박도 불법 체류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다. 어쩐지 최보다도 더 말을 섞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그녀는 시내에 있는 대형마트로 향한다. 오 의원이 그곳에서 자신의 지역구 특작물인 인삼 홍보를 위해 시식행사를 갖는다고 했다. 입구에는 벌써 한복 차림의 인삼 아가씨들이 들어서는 손님들에게 구 십도로 허리를 굽히고 있다. 입구로 들어서니 현지 일간지 기자들과 수행기자들도 보인다. 몇몇 현지 기자들의 알은체에 그녀는 희미한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 했다. 이런 경우는 기자들의 취재 태도부터 달랐다. 수행기자들이 행사장을 휘젓듯 현지인들과 인터뷰를 하며 요란을 떨 때 현지 기자들은 조용히 그것을 스케치 할 뿐이었다. 그들만의 잔치에 얼굴을 내미는 것으로 예의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트 지사장과 오의원이 홍보사진을 찍는다. 교민회에서 급조한 교민 두 명과 쇼핑을 하고 있던 현지인 몇의 인터뷰를 끝으로 행사는 지극히 형식적으로 끝난다.
그녀는 두 건의 녹음을 따고 방송국으로 돌아온다. 국장은 자리에 없다. 아마도 교민 단체 어딘가에서 오늘 점심을 기웃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책상에 앉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대학생이 기업인 협회장의 메모를 전한다. 통화를 원하는 내용이다. 그녀는 한국 방송국에서 들어 온 팩스와 메일함을 확인하고 기업인 협회장에게 전화를 한다. 금요일로 잡았던 인터뷰를 내일로 당기고 싶으시다고요? 다른 일정이 생기셨나요? 그게 아니고 오의원이 금요일에 돌아간다기에 그 전에 하고 싶어서요. 그리고 그 질의서 중 별표 표시한 것은 꼭 좀 질의서에 넣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보내주신 것을 일단 읽어봐야 대답을 드리겠네요. 그녀는 수정본을 팩스로 넣어달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는다. 그녀의 짐작대로라면 기업인 협회의 난점을 회장이 인터뷰를 통해 본국에 알려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때마침 울린 전화는 교민회 회장에게 온 전화다. 언제나처럼 풀기를 빳빳이 세운 목소리로 수고 많으십니다로 시작한 그의 말은 방송 잘 듣고 있습니다. 우리 교민 사회에 참, 능력 있는 여자 아나운서를 발굴한 만큼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이어진다. 그녀가 한국의 대학 방송국보다도 열악한 시설의 교민 방송국에서 일하게 된 것은 순전히 교민회 회장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녀가 세를 든 집은 그의 친구 집이었고, 주인이 다른 도시에 살고 있던 관계로 집을 관리하고 있었다. 집을 계약할 때부터 그녀의 집에 드나들던 그는 방송국 국장을 데리고 와 그녀에게 소개 시켰고, 어찌하여 교민회에서 초대한 여가수의 공연, 사회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그녀는 방송국국장의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를 타고난 사람이 방송 안하고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거요. 페이는 많지 않지만, 우리 방송국에서 교민을 위해 일해줘요.”
긴 망설임 끝에 그녀는 방송국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본국을 떠나 올 때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던, 다시는 일을 시작하지 않으리라던, 그녀의 결심을 깨트린 것은 타국에서 만난 일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방송국은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사정이 나빴다. 그녀는 일간지들을 취합해 분석하고 기사를 필사했고 경험을 쌓기도 전에 바로 생방송에 투입되었다. 서울 방송과 중앙 방송국이라 할 수 있는 K주의 방송국의 프로그램을 24시간 방송하는 것이 고작인, P주 자체 프로그램이 아예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녀가 합류한 지 일 년 만에 P주 자체 편성은 하루 7시간으로 늘어났다. K주 방송국 사장은 내년 초까지 12시간이상 P주 자체 방송을 늘릴 계획을 세우고, 인력을 충원할 것이라며 의욕에 차 있었다. 회장은 긴 서론 끝에 내일 저녁, 교민회 주최로 귀빈을 모신 만찬을 열 것이라며 취재를 부탁한다. 그가 일컫는 귀빈은 오 의원일행이다. 어차피 잡혀 있던 일정이었기에 그녀는 흔쾌히 그러마라고 대답한다.
차고에 차를 주차하고 뒷마당으로 들어와 부엌문을 열려다가 그녀는 마당 한쪽에 서있는 자전거를 발견한다. 못 보던 것인데 새 것은 아닌 성 싶다. 공을 들여 닦았는지 바퀴살이 은빛으로 빛난다.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난다. 세입자들이 취사용으로 쓰고 있는 아래층 주방은 상당히 넓었고, 편의성을 갖추고 있다. 이 시간에 집에 돌아와 있을 사람은 박일 것이다. 그녀는 이층으로 올라와 욕조에 더운물을 틀고 아침에 채 살펴보지 못한 일간지를 뒤적인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그녀의 청각은 예민하게 선다. 목조를 주재료로 쓴 이 주택은 아주 작은 소음도 공명음이 멀리까지 메아리친다. 11월 들어 임대객이 눈에 띄게 줄었다. 남편은 아직 아무 소식이 없다. 본래 일에 대한 진행 상황을 신속하게 전해주는 타입이 아닌 것에 익숙한 그녀다. 하지만 본국 소식을 들은 지 일주일이 지나버렸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다. 아주 바쁘던지 뭔가 계획한대로 안 풀리고 있다는 신호처럼 여겨진다. 그녀는 생활 정보지나 인터넷에 임대 소개 글을 올리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목욕을 마친 그녀는 무선 주전자의 스위치를 누르고 티백을 넣어 우린다. 내일 아침 뉴스 작성을 위해 자판을 두드리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난다. 박이다. 다른 숙소를 찾았을까? 거실로 나오며 마지못해 그녀가 말한다.
“홍차 드시겠어요?”
불현 어제 도우미의 전화 내용이 생각난다. 어찌나 접시를 깨끗이 비웠던지 설거지 할 일이 없더라고요. 넉넉하게 했던 음식이라 꽤 남았었는데. 그녀는 이어지는 상념으로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야물게 다문 입 언저리가 왠지 완강해 보이는 인상이다.
“주시면 고맙죠. 정원에 잔디가 많이 자랐더군요. 잔디 깎는 기계는 있나요”
“네, 있죠. 남편이 한국에 들어가고 손질을 자주 못하고 있어요. 저는 힘에 부치더군요.”
“그럼 바깥 분은 지금 이민 수속 중 이십니까? 아니면 이민자인데 한국에서 일을 하고 계신 겁니까.”
이 사람은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성격일 것이다. 그녀는 처음 보는 이에게 속사정을 털어놓느니 약간의 거짓말을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이민자죠. 한국에 일을 아직 정리 못해서요.”
“ 저런. 남편분이 스텔라씨가 많이 보고 싶으시겠습니다. 스텔라씨도 그렇고, 그리고 잔디라면 제가 깎아도 되는데 그러고 싶습니다만, 참 도우미 아주머니를 부르시던데.”
“… …… 도우미 아주머니는 세탁하고 대청소를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하고 있어요. 주방일도 가끔 돕고”
“한 번 부를 때마다 페이는 얼마나 주세요.”
그녀는 이어지는 박의 질문이 영 성가시다. 아니, 한국을 떠나 이 도시에 와서 그녀의 집에 묵으면서, 시작되는 이들의 같은 질문에 언제부터인지 대답이 귀찮아졌다. 그녀도 이곳에 와서 육 개월 정도는 애썼던 기억이 있다. 자신보다 늦게 온 고국, 모든 이들의 궁금증에 친절하고자 노력했던 기억.
“그게 달마다 조금씩 달라요”
박은 내쳐 물으려다 그녀의 태도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듯 입을 다문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그녀가 묻는다.
“자전거가 있던데 혹시?”
“ 그거 오늘 재활용품 마켓에서 샀습니다.”
“재활용 마켓을 어떻게 아시고. 여기 처음 온 거 맞으세요?”
“그럼요, 처음이죠. 오늘 자전거를 타고 교외까지 다녀왔는데 악명보다도 더 지저분하더군요. 컨테이너 집도 많고”
그녀는 박의 말을 들으면서 여러 가지 의구심이 솟는다. 이 나라에 처음 오면 한 주일은 이것저것 적응하느라 지나간다. 온 지 삼 일째 되는 날에 중고 자전거를 사다니. 게다가 한 달만 머물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홍차 잔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녀의 눈길이 잔이 깨질 것처럼 날이 서 있다. 그녀가 찻잔을 쟁반에 받쳐 들고 일어서는데 박이 말한다.
“제가 잔디를 깎아 드릴까요? 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잔디를요?”
그녀는 정원의 무성하게 자란 잔디에 눈길을 주며 무성의하게 되묻는다. 이 도시에서 시간의 흐름을 실감 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잔디가 자라는 속도일 것이다.
“제가 잔디를 깎으면 ……”
박이 말끝을 뭉개며 그녀를 바라본다. 제 쪽에서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그녀가 먼저 꺼내주기를 바라는 심중을 담고 있는 눈길이었다. 잠시 상대의 의중을 헤아리다 그녀는 잔디 깎는 것을 계산해달라는 이야기임을 눈치 챘다. 뭐든 대가가 있어야만 움직이는, 하기야 그런 방을 임대한 것만 봐도 사정이 빤한 거다.
“잔디 깎는 사람이 잔디를 한 번 깎을 때마다 50달러 정도 지불하는데 그렇게 잘 깎으실 수 있겠어요.”
그녀는 짐짓 싸늘한 어조가 되었다. 박이 어쩐지 더 쌩쌩해진 목소리로 신속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현금보다는 식사를 제공해 주시기 바랍니다. 밥 해먹는 게 습관이 안돼서 좀 귀찮네요.”
식사를 제공해 달라는 박의 말에 그녀는 난감해졌다.
이곳에 오고 처음 한두 달, 홈스테이를 해보다가 그녀는 한국 부식으로는 도저히 타산이 맞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홈스테이를 접고 장기 임대는 물론 단기 임대까지 하게 된 이유였다. 식단 준비에 대한 부담을 없앴으며 한 달 내내 고용해야 했던 도우미를 일주에 한 번만 불렀다. 결과는 훨씬 비용이 절감되었다. 혼자가 된 그녀는 더러 밖에서 식사를 하고 오기도 했다. 그녀는 지난번에 무전취식을 해 간신히 쫓아내고, 한동안 마음이 불편했던 남자가 자꾸 박과 겹쳐진다. 본국 경제 사정이 악화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벌써 서 너 번째 겪는 일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녀는 대충 셈을 해 본다. 잔디 깎는 정도의 비용이라면 한 달에 열 번 정도의 식사면 될 것이다. 박까지 내칠 수는 없다.
“생각해 보죠. 제가 늘 집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매끼 식사는 어렵겠고, 잔디가 뭐 그렇게 부쩍부쩍 자라는 것도 아니니까요.”
“생각해보시고 그럼.”
소파에서 일어서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는 박이 편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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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그녀는 테라스에 앉아 잘 다듬은 잔디를 바라본다. 숙련된 기술에는 못 미쳐도 제법 시간을 들인 흔적이 엿보인다.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자목련에도 새벽부터 박의 손길이 미쳤던 듯 가지가 단정해졌다.
출근을 하자마자 그녀는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남편이었다.
“잘 있지? 내가 다니던 회사에서 그쪽 노동청에 서류를 보냈다는데, 그걸 기다리고 있어. 생각보다 복잡하고 오래 걸리네. 랜트객들은 좀 있어?”
“그냥 그래. 어디서 지내.”
“여기저기서, 여기 우리 집이 없으니 좀 이상하긴 해. 연락을 안 해도
너무 걱정하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끊자”
“ …… 알았어.”
“그리고……. 아니, 그냥 끊자. 다음에 말할게.”
“ 말을 해. 무슨 말인지. 여보세요? 여보세요?”
전화는 이내 끊겼다. 전화로 남편의 속내를 듣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남편은 그런 사람이었다.
곧 있을 기업인 협회장의 취재 질의서를 살펴 본 그녀는 질의서 중 첫 번째 질문에 별표 한다. 방송 전에 회장과 마주 앉은 그녀는 의도하는 바가 무엇이냐고 솔직하게 묻는다. 오늘은 질문만 해 달라는 것이 회장의 궁색한 대답이었고 그녀가 마지못해 그러겠다고 한 것은 회장이 내어 놓을 예상 기부금액수 때문이었다. 첫 번째 질문은 기업인 협회장직을 맡고 주력해서 추진하고 있는 사업이 무엇인가였다. 회장의 대답은 본국의 정부 차원에서 사업을 추진할 때는 개인보다는 기업인 협회를 통해 계약이 이루어져야 일관성 있는 창구가 될 수 있고 교민들의 형평성에도 맞출 수 있다는 논지였다. 방송을 끝내고 회장은 삼백불이 든 기부금 봉투를 내놓는다. 기업이라지만, 교민의 수가 몇 안 되는 이곳의 업종은 뻔했다. 방송국은 주파수를 대여해서 쓰고 있어 꼭이 라디오를 사야만 교민 방송을 청취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재정 충당이 어려운 시점에서 취재원들의 기부금 제도는 그녀의 아이템이었고, 일 년 반이 지난 현 시점에서 초기, 일부의 잡음을 잠재우고 이미 만 오 천 대 이상의 라디오를 교민들에게 나눠주는 소기의 성과를 올렸다. 그 때문에 인터뷰 대상은 이민을 와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안정권에 든 소위 교민 사회유지들이 대부분이었다. 때로는 그런 상황이 그녀에게 정형화된 틀처럼 여겨 질 때도 있었지만, 청취자가 일정 수준이 넘어 광고 수익이 생길 때까지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신임 협회장은 인터뷰 내내 기업의 투명성을 강조하는 것이 특산품을 가지고 방문한 오 의원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그가 내놓은 액수는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회장이 사무실을 나가자 국장에게 전화가 온다. 오늘 저녁 한국관, 취재 신경 써 줘. 영사 지시야. 지시라는 말에 그녀는 혀끝에 달린 대답을 삼켜 버린다. 국장은 방송국에 별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 K주의 중앙 방송국 사장이 P주에 지국을 설립한 후 마땅한 사람을 찾다가 순전히 무던하고 오지랖 넓은 품성으로 발탁된 사람이었다. 그녀는 방송국에 출근하는 첫 날부터 이것저것 따질 경황이 아니었다. 그녀가 근무를 시작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그곳의 대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한국 교수를 찾아 이쪽에 경력을 쌓고 싶어 하는 자원 봉사자를 찾는 일이었다. 그녀의 제의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인 교수가 유학중인 학생들에게 공지를 하자마자 이메일로 이력서가 밀려들었다. 그녀는 자료 조사, 보조 진행, 재무 등 세 명을 뽑았다. 왜 지원했느냐고 묻는 그녀에게 응모자들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돌아가면 기자가 되려고요. 이력이 되잖아요. 그런 과정을 국장은 그저 지켜만 봤다. 사정이 그러하니 국장에게 방송의 방송의 기술적 지원을 요청 하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국장은 의리에 죽고 산다는 해병대 전우회 회장을 겸임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직 차를 마련하지 못했을 때 중요한 취재 때문에 일찍 출근하면, 국장은 그녀를 취재지에 내려놓고 어디론가 행방을 감추기 일쑤였다. 후에 행방을 물으면 ‘본국에서 후배가 나와서’라는 대답이었고, 나중에 알고 보면 국장은 생면부지의 해병대 후배를 관광 시켜 주느라 바빴던 것이다.
한국관에서 교민회 주최로 마련된 국회의원 환영회는 성황이다. 국장은 애국통일자문위원, 신용예금 조합장등, 자칭 유지들과 합석해 있다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든다. 교민회 회장은 그녀를 보자 반색을 하며 어깨를 감싸 안듯 이끈다. 그런 교인회장의 행태를 한 두 번 본 것이 아니지만 오늘은 더 거북하다. 교민회 회장이 이끈 곳은 기자석이다. 그녀가 다가가자 자리하고 있던 수행 기자들과 현지 기자들이 반색을 했다. 그녀도 웃음으로 목례를 나눈다. 의례적인 식순으로 행사는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공기는 탁했고 얼마쯤 긴장이 풀린 행사장에는 질펀한 웃음소리가 오간다. 그녀는 밖으로 나와 던힐을 꺼내 문다. 그녀에게 다가와 불을 붙여준 건 일간지 기자 리다.
“내, 참 눈꼴이 시어서.”
“왜 무슨 일이 있었어요?”
“우리가 가서 앉을 때는 쳐다보지도 않더니 윤 기자가 앉으니 인사를 합디다. 여기자만 지들 눈에 기자인가. 하하하. 내가 뭐래는 거야. 항상 그렇지만 이런 취재가 제일 싫어요. 본국에서 나온 수행기자 놈들 거들먹거리는 것도 보기 싫고 우릴 뭐 도망 나온 피난민처럼 여기잖아요. 저렇게 많이 데리고 나올 돈 있으면 여기 교민 미디어를 위해 좀 쓰지. 아직 밤 운전 안하죠? 집에 그만 갑시다. 데려다 줄게요.”
리 기자가 말하는 우리란 이곳의 일간지 기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녀도 그만 집에 가고 싶어진다. 자리로 돌아가 가방을 챙겨 오려던 그녀는 의원 보좌관에게 붙들린다. 수행기자들까지 합세해 가방을 빼앗듯 잡는 바람에 그녀는 도리어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리를 불러온다.
2차는 의원이 마련한 기자 간담회였다. 간담회 중에 그녀는 내내 오 의원에게 질문하고 싶었던 것을 눌러 참는다. 공식적으로 질문을 해서 오 의원을 잠깐 난감하게 하는 것은 별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간담회는 오 의원 사기 진작용 질의 대답으로 삼 십분 만에 끝났고, 꼼짝없이 붙잡힌 그녀는 일행과 함께 술자리로 이동한다. 술자리는 최근에 우후죽순처럼 생기기 시작한 단란주점이다. 시설은 한국의 웬만한 룸살롱 수준을 능가한 치장이다.
오의원이 기자들과 음주가무를 일삼는 걸 즐긴다는 건 알고 있던 터였다. 오의원을 필두로 폭탄주 돌리기가 시작된다. 여기자는 그녀 혼자뿐이었으므로 일찌감치 표적이 된 꼴이다. 폭탄주는 그녀에게 치사량이다. 게다가 내일부터 K주의 뉴스 시간에 P주 뉴스를 생방으로 전하는 프로그램이 신설 되었다. 다섯 시간의 시차로 인해 새벽 네 시에 일어나야 한다. 그녀 앞에 놓인 폭탄주를 보면서 그녀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할 때 뜻밖에도 흑기사가 나타났다. 흑기사는 오의원 보좌관이다. 그녀는 단독 취재를 빌미로 오 의원과 맞부딪쳐 봐야겠다는 생각을 내내 하고 있던 참이다. 그녀는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 보좌관을 데리고 로비로 나온다. 보좌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그녀는 직설적으로 의원 단독 취재 일정을 잡아 달라고 말한다. 보좌관은 단독 취재요? 하고 되물었고 그녀는 방송국에 나오시는 게 뭐하면 제가 움직일 게요. 라고 재빨리 말한다. 잠시 망설이나 싶던 보좌관은 아. 그게 뭐 어렵겠어요. 모레 들어가시니까 스케줄을 잡아보죠. 한 시간이면 충분하죠. 라고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그녀는 보좌관과 같은 타입에 익숙해 있다. 오의원이 4선을 지내는 동안 타성에 젖을 대로 젖어 그 자신이 의원이라도 되는 양 행세하는, 외려 오의원보다 더 약자에게 함부로 굴었을 그런 타입. 그녀는 재빨리 덧붙인다. 아주 유능해 보이세요. 그래요? 고맙습니다. 하기야 경력이 몇 년이에요. 이밥 먹은 지도 벌써 이십 년이 넘었고, 의원님 모신지도 ……. 이제 나갈 일만 남았는데.
네? 아. 출마하시려구요. 계획이 서 있으시군요. 기밀인데, 뭐 다음 공천은 제 차례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이 십 년이시면 나가셔야죠. 나가시고도 남죠. 전 아침 방송이 있어서 그만 돌아가야겠어요. 더 있다가는 목이 잠기거든요. 네에. 그러시죠. 차를 내드릴까요. 그녀는 만류하려다 생각을 바꿔 데려다 주시면 고맙죠. 라고 했다. 비서관에게 이야기 해 놓고 얼른 올게 기다리세요. 보좌관은 술이 다 깬 듯 로비를 잰 걸음으로 걸어갔다.
4
직원들과 도시락 샌드위치를 막 펼쳐 놓으려 할 때 사무실로 찾아 온 사람은 리였다. 웬일이세요? 윤 기자 도시락 맛 좀 보려구요. 좀 나눠주시죠. 농담이구, 같이 나가시죠. 리는 그녀를 리조또 집으로 안내했다. 이태리 사람이 하는 곳인데 아주 맛이 독특해요. 윤기자도 단골이 될 겁니다. 난 리조또 별로 안 좋아해요. 쌀이 날아 갈 것 같잖아요. 촌스럽게, 여기 온 지 좀 되지 않았습니까? 또 그 쌀 타령입니까? 식당은 세 평 규모로 다운타운가에 위치해 있었다. 그녀는 새우 리조또를 주문했고 리는 치즈 리조또를 주문했다.
리는 늘 고개를 외로 꼬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평소와 달리 진지해 보인다. 그녀의 시선은 리의 앞이마에 내려온 몇 가닥의 고슬 머리에 멎어 있다. 잠자코 물 잔을 바라보던 리가 그녀를 바라본다.
뭔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오의원은 몇 년째 월드 코리아 하고만 특작물 계약을 하고 있는 거죠? 그녀는 잠자코 샐러드를 즐기며 리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이상하지 않냐구요. 리가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재차 묻는다. 글쎄요. 그런가요. 전 아직, 하늘같은 선배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요. 그녀는 말끝을 웃음으로 흐린다. 그녀도 사전 취재를 시작한 터였다. 공항에 마중 나온 것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월드 코리아 사장이 의원의 공식, 비공식 일정에 그림자처럼 동행 하고 있는 것을 단순한 비즈니스 파트너라고 보기에는 석연찮았다. 어젯밤,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보좌관에게 단단히 약속을 해 두었고 월드 코리아 사장과도 이미 미팅스케줄을 잡아둔 그녀였다. 리조또 접시를 말끔하게 비우며 그녀는 생각에 잠긴다. 오늘 점심은 윤 기자가 사시죠. 뭐라도 건질까 싶어 왔더니 한마디도 안하고. 볼멘 어투였지만 리는 테이블에서 계산서를 집어 들고 앞서 간다. 근데 요즘 부쩍 틈만 나면 왜 자꾸 윤 기자 얼굴이 생각나는지 모르겠습니다. 헤어지면서 리가 툭 던지듯 한 말이다.
그녀가 오후 내내 기다리던 보좌관의 전화가 온 것은 퇴근 무렵이다.
“인터뷰 일정은 오늘 저녁 아홉시로 잡았는데 괜찮겠습니까?”
“그럼 장소는요.”
“공식 일정이 끝난 뒤이니까 호텔에서 해야죠. 스위트룸인데 로비에서 전화 주십시오”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내친김이다. 이런 경우 상대가 원한 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를 그녀가 제시했을 경우, 그것이 빌미가 되어 인터뷰가 틀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의원님께 도움이 될 질의서로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보좌관이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픽업을 해 준다던 국장은 나타나지 않는다. 자원봉사 하는 학생들도 퇴근한 금요일 밤. 사무실을 나선 그녀에게 섬처럼 소외된 고립감이 지병처럼 도진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 낯선 냄새. 그녀는 몰려오는 한기에 코트 깃을 단단히 여미고 버스 정류장까지 걷는다. 남편이 하려다만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두 사람사이에는 특별한 이유 없이 아이가 없었다. 경영난으로 남편이 회사를 그만둔 시점과 그녀가 당한 실직의 시점이 같았다. 그녀는 한국 땅에 염증을 느꼈고, 당장 그 땅을 떠나고 싶었다. 그런 그녀가 이 나라로 이민을 하자고 남편에게 말했을 때 남편은 그녀에게 물었다. 정말 이 땅을 떠나기를 원해? 일없이 살 수 없는 네가 그곳에서 뭘 하며 살려고? 남편은 그녀가 불안했을 것이다. 남들이 바라보는 남편은 성실하고 보증 수표 같은 사람이었지만, 남편이 바라보는 그녀는 위태롭게 속력을 내며 달려가는, 언제 장애물과 충돌할지 모르는 자동차 같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며, 남편과 시작된 불통. 결혼 전의 그녀에 대한 지극함은 그녀가 가족이 아닌 타인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 남편의 배려의 기준이 가족이 아닌 남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그녀는 남편의 곁을 떠나고자 했다. 남편이 염두에 두는 배려의 대상, 타자 속에 그녀가 늘 소외되어 있다는 것을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결혼이란 제도 안에서 남편의 의미는 새로운 기억을 함께 만들어 가는 신뢰의 대상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남편에게 결혼이란 제도에서의 익숙함은 노력하지 않아도 그대로 유지되는 계약의 의미였다. 때문에 그녀는 타자 앞에서만, 배려되고 존중되었다. 그녀가 남편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그런 점이었다. 그녀로서 남편을 견디는 것은 곧 남편과 같은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와 같았다. 그럴 수 없었던 그녀에게 남편은 점점 견디기 힘든 존재가 되었다. 지금 그가 머물고 있는, 사방이 타자인 그곳에서 사람 좋은 표정으로 그들을 배려해야 하는 남편은 매 시간 정서노동중일 것이다.
호텔에 도착한 그녀는 프런트데스크에서 곧장 룸으로 전화를 건다. 잠시 후, 보좌관이 내려온다. 인터뷰는 질의서에 있는 대로 진행되는 거죠. 보좌관이 인사를 대신해 건넨 말에 그녀는 웃어 보이고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보좌관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이 나라에 오신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엘리베이터가 19층 까지 올라가는 동안 보좌관이 던지는 몇 가지의 질문에 그녀는 상투적인 대답을 한다. 스위트룸은 꽤 넓고 쾌적하게 느껴졌음에도 호텔 룸 특유의 오래된 향수 같은 냄새가 난다. 이 밤에 이런 장소에서 인터뷰를 해야 하다니. 인터뷰어로서 기선을 잡지 못한 것에 그녀는 잠깐 후회가 인다. 그녀를 맞는 의원 역시 지친 기색이다. 반가워요. 참 열심인 여 기자분이네. 이런 시간에도 인터뷰 일정을 잡고. 고맙습니다. 이런 시간에 응해주셔서.
룸에는 의원 말고도 수행비서와 월드 코리아 사장이 함께였다. 다탁에는 기백만 원을 호가한다는 마개를 딴 리차드헤네시 병과 안주 접시가 놓여 있다. 그들은 이미 전작이 있었던지 다들 얼마쯤 취기가 돈 얼굴이다. 식사는 하셨나? 하고 오는 길입니다. 그녀는 사실, 점심 이후에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그런데 의원님, 말씀 나누는 동안에는. 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의원이 재게 말을 받았다. 아. 그게 편한가? 그래. 자네들은 자리를 좀 비켜주지, 기자 분이 그래야 좋으시다니까. 월드코리아 사장이 그럴 것까지야 하는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소파에 앉는다. 그들이 옆방으로 사라지자 의원은 방송국에 대해 의례적인 질문을 한다. 그녀는 방송국의 열악한 사정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말하며 자연스럽게 녹음기를 꺼내 버튼을 누른다.
인터뷰는 질의서대로 순조롭게 진행된다. 그녀가 의원에게 말치레 한 것이 주효했는지 의원은 상당히 호의적인 태도다. 그런 오 의원을 바라보며, 그녀는 오 의원이 연습이 충분한 연극배우 같다고 생각한다. 같은 연극의 배역을 너무 오랫동안 공연해서 대본을 보지 않고도 자신의 대사를 쏟아내는, 그러나 정작 관객에게 배역을 소화해내는 것 외에는 특별한 이입을 주지 못하는 배우. 오의원이 준비한 답변이 끝나고, 이제 질의서에 없는 그 답변을 듣기 위한 마지막 질문을 할 차례다.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술잔으로 가볍게 목을 축인다. 온더락 잔이었지만, 빈속의 그녀에게는 술기운이 금세 퍼진다. 펜을 쥐고 있는 손이 파르르 떨린다. 그녀는 하이톤의 목소리를 줄여 나직이 말한다. 월드 코리아 사장님과 친분이 두터워 보이세요. 보기 좋으세요. 아 그래요? 하하하. 기자 양반이 유심히 보셨구먼. 그게……. 오의원이 잠시 말을 멈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가 어려울 때 그 친구가 힘이 되어 주었거든. 네에. 그러셨군요. 그래서 의원님 지역구의 특작물 수출도 월드코리아에서 하게 된 거구요. 그녀는 굳이 독점 계약이란 표현을 피해 쓴다. 의원은 접시에서 치즈 한 조각을 집어 든다. 그녀도 상아색의 크리미한 질감이 느껴지는 약간의 신맛과 쓴맛, 가벼운 나무향이 섞인 까망베르(Camembert)치즈 몇 조각으로 허기를 달랜다. 인터뷰는 두 시간이 넘게 진행된다. 그녀는 입안에서 녹아 가는 치즈처럼 녹취 테이프 메모리를 넘기게 될까봐 내심 조바심이 쳐진다. 이렇게 미묘한 시점에서 움직이면, 의원은 인터뷰를 중단하라고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게 사람 사는 거니까. 신세를 졌으니 나도 뭔가 돌려주어야 할 것 아니오. 의원이 호기 있게 말을 부린다. 그렇죠. 그러니까 현직에 계시는 동안 앞으로도 그 밀월 관계는 유지 될 수밖에 없겠네요. 그녀는 그렇게 묻고 싶은 말 대신 의원님. 참 의리가 있으신 분이시네요로 바꿔 말한다.
그녀는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요의를 느낀다. 인터뷰 마지막 단계에서 확인 사살을 남겨 두면 습관처럼 요의를 느끼게 된 것이 언제 부터였는지 모른다. 그녀는 교묘하게 묻고 싶은 말을 에둘러 물었고 아리송한 표정을 짓던 의원에게 시인 비슷한 대답을 듣는다. 보좌관이 배웅하겠다는 것을 만류하고 그녀는 프런트에서 택시를 불러 집으로 돌아온다. 간단한 샤워 후에 내일 아침 방송분의 원고를 침대 머릿장에 순서대로 붙여 놓는 일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잠자리에 든다. 오의원의 말, 그의 행동들이 머릿속을 어지러이 떠돈다. 4
누군가 침실 문을 세차게 두드린다. 그녀는 간신히 일어나 머리만 내민 채 신경증적으로 문을 연다. 방문 앞에선 박의 복장도 잠옷을 대충 여민 차림이어서 그녀의 눈은 더 커진다. 전화벨이 계속 울려서요. 놀란 그녀가 시계를 보니 5시가 넘어 있다. 황급히 수화기를 들자 K주 방송국의 이연상 피디이다. 삼분 후, 바로 스텐바이 들어갑니다. 원고 준비 되셨지요. 수화기를 방바닥에 내려놓고 그녀는 일련번호대로 황급히 원고를 간추린다. 큐 사인이 들리고 그녀는 P주의 소식과 교민뉴스를 전한다. 준비된 원고를 다 읽어 끝내야 하는 시간인데 어찌된 일인지 저쪽에서 권 선배가 시간을 늘리며 애드립 질문을 퍼붓는다. 돌발 상황에 그녀는 자신이 제대로 대답을 하고 있는지조차 판단이 서지 않는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서야 그녀는 방송 내내 무릎을 꿇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그린 다리를 간신히 펴고 희붐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전화가 걸려 온다. 사정없이 깨질 것 같던 예상을 깨고 뜻밖에도 K주의 본부장은 수고했다고 한다. 다른 주의 리포터가 갑작스럽게 낸 펑크 때문에 사전협의 없이 생방을 늘려 미안하다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새벽부터 몹시 긴 하루가 예감된다.
여학생이 한식을 먹고 싶다는 말을 듣고 아침식사를 약속한 아침이었다. 약속을 지켜야 하는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오는지, 그녀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한식으로 식탁을 차린다. 시금치 된장국, 국적을 알 수 없는 꽁치 구이와 총각김치. 그리고 굽지 않은 김과 계란찜이 전부인 식탁이다. 스피커로 아래층에 안내 멘트를 했지만 박은 다시 잠들었던지 기척이 없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노크 소리에도 아무 움직임이 없어 그녀는 방문을 슬쩍 밀어 본다. 희미한 불빛에 방안의 풍경에 눈이 익었다 싶은 순간 그녀는 놀라서 저도 모르게 외마디 소리를 지른다. 박이 벽 쪽에 물구나무를 선 채 기척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돌아서는 그녀를 막아서며 박이 변명처럼 말한다. 이렇게 하면 피로가 풀린다고 하길래……. 어제 자전거를 종일 탔더니 다리가 아파서요. 그녀가 대꾸를 한다. 기척이라도 하셨음 안 놀랐을텐데. 그녀가 얼핏 본 노트북 화면에는 사오십대 남자의 얼굴이 모자이크 기법으로 가득히 차 있다. 지난번에도 봤던 하나 같이 고단해 보이는 표정의 사진들이다.
식사를 하면서 최가 말한다. 우리도 아침 대신 저녁에 식사를 함께 하면 어떻겠습니까? 이렇게 좋은 메뉴에 와인도 한 잔씩 하고. 여학생이 말을 받았다. 그렇게도 해봤는데 다들 스케줄 맞추기가 어려워서 영 어렵더라고요. 유난스레 맛나게 먹는 박의 수저 소리만 요란했을 뿐, 아침 식탁은 조용하다.
그녀는 출근하기 전,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전화는 영사관에서 걸려 온 것으로, 영사관으로 와달라는 내용이다. 무슨 일인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짐작 가는 일이 없다. 그녀가 내키지 않은 발걸음으로 영사관으로 들어서자 비서는 그녀를 바로 접견실로 안내한다. 영사와 공식 석상에서 이미 수차례 마주치고 인사도 나눈 처지였지만 영사관에서 대면 하기는 처음이다. 마른 체형에 금테 안경을 착용한 영사는 오십대 초반이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호출 하셨는지요.” 그녀가 짐짓 미소를 띠며, 묻는다.
“아이구 호출은요. 기자님을 어떻게 호출합니까. 앉으십시오. 요즘 아침 뉴스에 초대석에 음악 프로까지 잘 듣고 있습니다. 윤기 있는 목소리에 발음도 정확하시고, 본국에서 경력이 많으셨던 가봅니다.”
“아뇨. 여기서 어쩌다 얼결에, 잘하고 있진 않죠. 배우면서 하고 있으니까요.”
“그런가요. 전 경력이 아주 많으신 줄 알았는데 놀랍군요. 암튼 교민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탁월하게 잘 선택하십니다. 저도 애청자입니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는데 나는 언제 초대석에 불러 주십니까?”
이미 그녀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을 영사의 딴청이 일순 그녀는 불쾌해진다.
“그렇잖아도 그 프로 만들고 초대 손님 일 순위셨는데, 국장님이 특별한 이슈를 기다리고 있으신 가 봐요. 바쁘신 분이시기도 하고.”
사실 그녀는 영사를 어떤 타이밍에 초대해야 거절당하지 않고 기부금을 원하는 만큼 받을 수 있을 것인가를 신중하게 계산하고 있던 지 오래였다.
“그 프로 나갔다가 도네이션만 하고 윤 기자 곤혹스런 질문에 방어만 하다가 끝나는 거 아닙니까? 하하하”
“그럴리가요. 영사님이 제게 그런 질문을 받으실 일이 있으시겠어요?”
“소문이 자자합디다. 한국 방송국 ‘일레븐에 만난 사람’ 출연 못하면 이곳의 유지 아니라고. 아무리 기다려도 섭외가 안 오길래 윤 기자가 날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그게, 패널 선정은 제가 하는 게 아니고”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영사는 말허리를 자른다.
“왜 그러십니까?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 그 방송국 실세가 윤기자라는 거. 허 참. 하하하”
“별 말씀을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요. 과찬이십니다. 그건 그렇고 오늘 저를 부르신 건?”
“아. 다른 게 아니고 방송을 들었는데……”
“뉴스요? 아님. 초대석요? 어떤 프로를 말씀하시는지요.”
“초대석, 기업인 협회 김광철 회장 인터뷰요”
영사 입에서 기업인 협회장 이름이 나오자 그녀는 다탁에 놓인 찻잔으로 입안을 축이고 다음 말을 기다린다.
“그 방송이 어디까지 방송되나요?”
“아. 그거요. 그 방송은 우리 P주 만 되었고, 토요일에는 4개주 전역으로 송출합니다. 왜 무슨 문제가 있나요?”
“뭐 특별히 문제 될 건 없고,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별일이 있는 건 아니고, 오늘은 윤 기자에게 점심을 대접하고 싶었어요. 바로 앞에 베트남 국수가 맛있는데 들고 가시죠.”
그녀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오 의원 보다 속내짐작이 더 어려운 영사의 뒤를 잠자코 따른다. 이른 점심인지라 베트남 식당은 대부분 식탁이 비어 있다. 그녀가 일부러라도 찾아 먹을 만큼 즐기는 국수였지만, 비오는 날의 습도처럼 끈끈한 영사의 눈길. 식사 내내 그녀는 그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게 그러니까, 서울에서 나름대로 그 방면에서는 이름이 있으신 분이셨는데, 윤 기자는 여기가 좋으신 가 봅니다. 육 개월에 한 번씩 서울에 다녀오시면서 체류기간을 연장하시는 것 같던데.”
“네. 이민 수속중인데 시간이 걸리네요.”
“국장이 제게 와서 의논을 하시더군요. 알고 싶은 건 윤 기자가 이민을 원하는 건지, 아니면 장기 체류를 원하는 건지입니다. 한국인이 꼭 필요한 방송이니까 취업이민을 신청하시면 어렵지도 않을 것 같은데.”
호의적인 말투와 달리 영사의 눈빛은 차가워져 있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제동을 건 민원이라도 제기한 것일까?
“몇몇 분들이 의논을 해봤는데 상당히 긍정적인 분위기입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면 말씀하시지요. 윤 기자, 교민 사회에 꼭 필요한 능력 있는 분이니까 웬만하면 정착하시는 쪽으로 생각을 굳히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현재, 여러 사람 눈에 노출이 되는 위치니까. 입장을 확실히 하는 게 일하시기가 훨씬 수월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한 가지 부탁 말씀 드리자면, 본국에서도 다루지 않은 사건을 취재하시게 되면 꼭 사전에 알려 주십시오. 제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시끄러운 일이 생기기 전에 제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즘 하도 일이 많아서. 윤 기자. 조용한 게 피차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 조용하게 있다가 들어가자구요. 하하하 계시다가 힘든 일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힘닿는 데까지 도와드리겠습니다. 돕고말고요.”
몇몇 분들이라니. 어떤 사람들이 그녀도 모르게 그녀의 거취에 대한 의논을 했단 말인가. 방문자 신분의 불안함을 지적하는 영사의 의도는 무엇일까. 지금 하고 있는 일조차 타인의 의지로 그만 두게 된다면, 그녀를 부른 영사의 의도를 재조합해보느라 머릿속에서 뭔가가 거꾸로 쏟아진 듯 요란해진다. 그녀는 집으로 가서 뜨거운 샤워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접고, 사무실로 들어온다. 기다리고 있던 기업인 협회회장을 그녀는 회의실로 안내한다.
“이거 윤 기자님이 필요하실 것 같아서 참고하시라고 드립니다.”
김 회장은 두툼한 서류 봉투를 그녀에게 건넨다.
“이게 뭐죠?”
“월드 코리아의 수출입 장부 사본입니다.”
“구하기 쉽지 않으셨겠는데 어떻게 이걸 제게 주시나요.”
“여기 일간지들도 믿을 수가 없어서…… 윤기자라면 유용하게 쓰실 것 같은데 일을 좀 만들어 주시죠.”
“김 회장님은 일이 확대되는 걸 원치 않으실 것 같았는데 오의원이나 월드코리아와 잘 지내고 싶으셨던 거 아닌가요?”
“처음엔 그런 의도로 자료를 수집했는데 이쪽을 너무 무시하고, 그리고 장부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건 그쪽 지역의 특산품을 거저 월드코리아에게 주는 저가 매입이에요. 더러워서 참, 그래도 뭔가 우리 시장에 활기를 주고 싶어서 시도해봤는데, 씨알도 안 먹히고, 윤 기자. 이거 이대로 놔두면 절대 안돼요. 단단히 개망신을 한 번 당해봐야 정신을 차릴 족속들야.”
그녀가 봐오던 우유부단한 이미지가 아니다. 김 회장의 눈빛이 단단히 비틀린 심사를 말해 주고 있다.
“회장님의 의사는 알겠습니다. 검토 해보고 연락드릴게요.”
“되도록 빨리 검토 해보시고 연락을 주셔야 합니다.”
김 회장이 돌아가고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이 서류는 그녀가 아닌 어떤 통로이든 세상에 공개 될 것이다. 그녀가 장부를 꼼꼼히 살펴보고 있을 때 리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윤 기자, 오늘 날씨가 참 좋습니다. 시간 어떠세요. 한국 무용 초대권이 있는데 같이 가시죠.”
“아, 민예랑이가 하는 공연요? 그거 완전 아마추어 수준의 취미 발표라고 하던데 그런데도 가시는군요. 초대권 보태 드릴게 다른 사람과 가시지요.”
“취재겸. 윤 기자와 데이트를 할까 싶었더니. 또 비아냥입니까? 하하하. 그건 그렇고 어쨌거나 저녁은 함께 먹죠.”
“요즘 매일 보는데 새삼스럽게 무슨 저녁을 또 먹어요.”
“좀 섭섭하네요. 오 의원 단독 인터뷰 했다는 소문이 자자합디다. 도대체 무슨 감을 잡았길래 혼자 조용히 움직이는 겁니까. 하기야 오 의원 뒤 구린 건 천하가 다 알고, 걸어 다니는 핵폭탄이라 부르니, 어차피 방송에서만 터트리기엔 한계가 있는 거 아닌가? 그러지 말고 더불어 삽시다.”
이 좁은 P주에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이 차라리 쉬울 것이다. 리가 알았다는 건 여기 일간지들이 다 알고 있다는 뜻이다.
“…… 아직은 말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방송에 출연하지 않을 것 같아 취재를 간 것뿐이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연극 한 편 감상하고 온 거나 같아요. 알 만 한 사람이 뭘 물어요.”
“그럼 방송은 왜 안 해요? 그동안 우리 신문, 최신 기사 서비스를 우선으로 다 해 줬는데. 잘 아시네. 오 의원 만만한 상대 아니죠. 윤 기자 혼자 들이 밀었다가 오히려 윤 기자가 다칠 수 있어요. 우리 신문사 도움이 필요할 거라고요.”
그녀가 무어라 말을 할 새도 없이 리는 전화를 달가닥 끊는다.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기에 차분한 평상심을 잊고 조급해 하는 것일까?
집에 돌아온 그녀는 박의 전갈을 받는다. 아침에 제가 전화를 받았는데 도우미 아주머니가 앞으로 못 오시게 됐다네요. 왜요? 의아해 묻는 그녀의 시야에 들어 온 집안은 깨끗하다. 제가 청소며 세탁, 설거지까지 다 했는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기색을 살피며, 박이 말한다. 그게 제 전문이거든요. 오랫동안 실직 상태였던지라 와이프 대신 제가 살림을 했지요. 자랑삼아 늘어놓는 박의 말에 그녀는 짜증이 난다. 왜 이런 때 하필 도우미까지 못 오게 된 거지 속엣말을 하며 그녀는 전화번호를 찾으려던 걸 포기하고 주방으로 들어간다. 뒤따라 들어 온 박은 식탁에 되는대로 음식을 차려내는 그녀를 돕는다. 보기보다 손길이 민첩하다.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대신 도와드리면 안 될까요?”
알량한 임대비는 물론 식사까지 해결하겠다는 박의 속내가 알전구처럼 훤히 보인다. 박이 그녀의 집에 편입한 뒤로 냉장고의 내용물이 더 줄어들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녀는 이미 아는 쥐인 최 외에 박까지 키울 자신이 없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제 식대로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기로 작정한 사람에게 때로 사소한 일은 받아들이는 것이 편하다. 다만 다시 박과 같은 불청객이 그녀의 집에 임대를 빙자해 찾아오지 않기를 바랄밖에.
“제가 식사를 해드릴 순 없고, 편하게 오셔서 있는 부식으로 식사를 해 드시는 건 어때요. 수요일은 함께 하시구요.”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저는 고맙지요. 가끔 제가 음식을 만들어 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래봬도 한 요리합니다.”
박의 입이 귓가에 함지박만하게 걸린다. 안방으로 들어온 그녀는 책상에 앉아 김 회장이 주고 간 월드 코리아 장부를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주의 깊게 살핀다. 그녀는 나이트가운을 걸치고 안방에서 베란다로 통하는 문을 연다. 훅 끼쳐 오는 습한 밤공기. 그녀의 집과 면한 영국인 부부가 사는 집의 차창만 환할 뿐 거리는 조용하다. 그녀는 테라스를 서성이며 남편을 생각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타인에게 말하는 훈련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는 한 템포씩 늦게 발휘되는 남편의 순발력. 남편이 돌아오기도 전에 이 도시의 습기가 그녀를 삼켜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방으로 들어 온 그녀는 시계를 노려보듯 바라본다. 수화기를 들고도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는 이윽고 버튼을 누른다. 본국의 방송국 피디와 통화를 끝낸 그녀는 잠이 오지 않는 듯 오랜 시간을 뒤척이다 잠이 든다.
5
그녀를 깨운 것은 거실에서 들려오는 청소기의 소음이다. 그녀는 더듬더듬 스탠드를 켠다. 콘솔 위의 시계는 5시 30분을 가리킨다. 이 시간에 청소기를 작동할만한 사람은 틀림없이 박일 것이다. 소음은 좀처럼 멎지 않는다. 그녀는 치미는 짜증을 달래려 시디플레이어 버튼을 누른다. 골드 베르크 변주곡, 글렌 굴드의 곡이 방안을 가득 채운다. 맨몸에 시트를 둘둘 말고 욕실로 간 그녀는 박하 향이 나는 입욕제를 풀고 레버를 돌려 더운물을 받는다. 그녀는 월드 코리아 관계서류를 챙겨 욕조 안으로 들어간다. 적당한 온도의 물이 등을 감싸자 간밤의 눅진함이 일순 가시며 다시 잠이 온다. 그녀는 들고 있던 서류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목을 한껏 뒤로 젖혀 욕조에 기대고 눈을 감는다. 6번을 지나는 변주곡을 들으며 그녀는 며칠 전 배달된 음악잡지에서 밑줄을 그으며 읽었던 구절을 기억해낸다. ‘굴드의 연주가 전체적으로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특히 그의 바흐 연주는 자신의 연주자로서의 고립을 확인하고 그것을 더욱 깊게 축척해 나가는 고독한 독창성의 연장선상에 있다.’ 굳이 평론가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그녀 역시 깊이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자신의 행로와 유관하게만 펼쳐 놓을 수밖에 없는 연주가의 예술성.
남편은 종종 그녀의 어떤 점, 일에 대해 공격적이고 성취욕이 남다른 그녀가 굴드와 닮아 있다고 했다. 도자기를 디자인 하면서 지나치게 독창성을 주장해 아이디어 회의에서 자주 상사들과 부딪히던 그녀에게 남편은 자주 앙드레 가뇽의 연주를 들려줬다. 그녀가 싫어하는 장르의 뉴에이지, 남편은 음악이란 것이 들을 때 청자가 편안한 것이 보편성의 힘을 갖는 것이라고 했다. 남편은 타자와 자신의 조화를 우선순위로 두는 사람이었고, 그녀는 늘 자신 속의 자신이 잣대가 되는 사람이었다. 그 레이블의 마지막 곡, 32번이라 부르는 아리아 다카포를 들으며, 화장을 하고, 옷을 입고, 완벽하게 무장한 그녀는 거울속의 자신을 바라본다. 이제 잠에서 깨어 다시 무대에 설 시간이다.
안방 문을 열고 거실로 나서자 박이 의기양양한 기세로 커피 잔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선다. 이 정도 농도면 되겠습니까? 그녀는 그런 박의 목소리가 거슬려 몸을 반대쪽으로 튼다. 이런! 박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그녀에게 기운 것은 그때다. 찻잔이 떨어지면서 소파 모서리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난다. 그녀는 오늘 있을 행사 때문에 입은 벨벳 슈트에 쏟은 커피보다도 깨진 커피 잔에 신경이 더 쓰인다.
아, 어떡하죠. 이런, 실수를 하다니 박은 비굴한 웃음을 베물고 그녀의 어깨에 마른행주를 가져다 댄다. 아니! 그걸로 닦으면 먼지가 더 묻어요. 놔두세요. 그녀는 박의 손길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안방으로 간다. 옷을 갈아입으며 그녀는 청록빛깔의 사슴이 페인팅 된 그 커피 잔을 떠올린다. 다시 같은 커피 잔을 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나라에 오던 날 그녀는 출국 수속을 마치고 공항 면세점 진열장 앞에 서 있었다. 우연히 면세점을 둘러보다가 그 커피 잔을 발견한 그녀는 못 박은 듯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그녀를 발견한 판매원이 말했다. 딱 하나 밖에 없는 디자인이에요. 아시죠. 이 브랜드. 본국에서 짐을 싸며 출국준비를 할 때 자신이 디자인한 한 개의 찻잔도 지참하지 않겠다던 심사가 무너지고, 그녀는 결국 그 찻잔을 사는데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해야 했다. 그녀의 눈은 어느새 안압이 올라 붉게 충혈 되었다.
그녀가 거실로 나왔을 때 바닥의 커피 잔은 말끔히 치워져 있다. 한켠에 앉아 있던 박이 그녀에게 다가온다.
“괜찮으십니까?”
“아까 커피 잔 깨진 거 어떡하셨어요. 그 조각들 좀 가져다주실래요.”
박은 대답도 없이 그녀를 멀뚱히 바라만 본다. 그녀는 다시 울화가 인다.
“그거 강력 접착제로 붙여서라도 원상태로 만들어 주세요.”
“그게……, 파손이 많이 되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접착제로 붙인다 해도 사용할 수 없을 거란 말입니다.”
“쓰든 안 쓰든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꼭 그렇게 해주세요.”
“제가 다른 걸로 사다 드리겠습니다. 마음에 드실 걸로 찾아볼게요.”
박이 말을 마치자 그녀는 그예 소리를 지른다. 그동안 눌러 참았던 박에 대한 마땅찮음이 터지는 순간이다.
“이보세요! 꼭 그 커피 잔이어야 해요. 당신이 뭘 안다고 다른 것으로 그걸 대신하라고 하는 거죠. 그거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디자인이라고요. 아시겠어요. 단하나 밖에 없는…….
순간, 뜨거운 것이 목울대에 치받쳐 마지막 말은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몸을 돌려 이층 계단을 뛰듯이 내려와 현관 앞길에 정차 시켜 놓은 자동차로 향한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조금만 길었다면 그녀는 어쩌면 박 앞에서 눈물을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는 액셀러레이터를 세게 밟아 차를 급하게 출발시킨다.
리가 몸담고 있는 일간지에서 주최한 훌륭한 교민상수상식인 오늘, 그녀는 사회가 예정되어 있다. 짐작하건데 그녀에게 의뢰가 온 건 공동 사회를 맡은 리의 의도였던 것 같다. 처음 의뢰를 받고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국장은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수상식장에는 국장의 말대로 교민 사회의 유지들이 대거 참석했다. 시상식이 끝나고 뒤이은 디너 행사는 노래자랑으로 이어졌다.
“윤 기자, 오늘 눈이 부십니다. 하하하. 참 다들 대단한 애국자에요. 노래 선곡표 좀 봐요. 선구자, 가곡 일색이니 마지막에는 애국가를 안 부르려나 몰라.”
교민회 총무에게 2부 순서 마이크를 넘기고,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리가 툴툴거린다. 오의원이 좌중의 박수를 받으며 무대로 나와 두만강을 부르며 장내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월드코리아 사장은 취재했습니까?”
“아니, 아직요. 일정을 자꾸 미루는 것이 오 의원 들어 간 후에 하고 싶은 모양이에요.”
“그럼 밀어붙여야죠. 그 페이스에 말려들면 안 됩니다. 뭔가 터트릴 것이 있으면 여기서 터트려 공항에서 기자들이 그들을 환영하게 해줘야 극적인 타이밍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지 말고 윤 기자”
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오 의원 보좌관이 다가온다. 사회를 아주 매끄럽게 보시네요. 윤 기자님 면모가 돋보이는 밤입니다. 그랬나요? 고맙습니다. 그녀가 뻔한 칭찬에 웃음으로 답례하자 보좌관이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리를 등 뒤로 하고 말을 잇는다. 다른 게 아니고, 의원님 모레 들어가시는데 내일 몇몇 지인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십니다. 함께 하실 멤버에 윤 기자님도 초대하라고 하셔서요.
멤버라면 누가? 네. 조용히 움직일 거니까 몇 분 안 되시죠. 월드코리아 사장님도? 그분이야 형제처럼 지내시니까 당연히 같이 가시죠. 저희 국장님도 가시나요? 잠시 생각하는듯하던 보좌관은 윤 기자님이 원하신다면, 고려야 해보겠지만 이동수단이 불편하겠네요. 차가 한 대만 움직일 거라서요. 라고 말한다. 그녀는 보좌관의 제의를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그렇게 할게요. 내일 오후에 연락을 주시죠. 하고 말해 버린다.
직업적 촉수에 의지한 것이지만, 뭔가 더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흥미로워진다. 오랜만에 본 사회 끝이라 긴장이 풀린 탓인지 노곤해진 그녀는 국장에게 인사를 하고 주차장으로 나온다. 비가 내리는 옥외 일 층 주차장에서는 리가 기다리고 있다.
“ 오늘 차가 없는데 그동안 제가 픽업한 것 좀 갚아 주시죠.”
리는 그녀와는 반대쪽 교외에 살고 있었다. 그동안 번번이 신세를 진 그녀로서는 농담반 진담반인 리의 말을 거절하지 못한다.
“기꺼이 모셔다 드리죠. 신세 갚을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차는 빗길을 맹렬하게 달린다. 리는 손잡이를 꼭 잡고 말한다.
“아이구 숙녀분. 좀 서행해 주십시오. 설마 제가 미워 이러는 건 아니시겠죠.”
리가 시디 버튼을 누르자 앙드레 가뇽의 ‘바다위의 피아노’가 실내에 차오른다. 차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통과한다. 처음, 이 나라의 공항에 내려 달리던 길에서 한 눈에 매료되었던 다리였다. 푸른빛의 요염한 자태로 서 있는 그 다리는 분명, 에로티시즘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 다리를 지날 때마다 일상사에 묻혔던 갈망이 조용히 일어서는 것을 느낀다. 그녀는 그 다리에 열광하던 남편을 떠올린다. 남편은 말했었다. 여기 북쪽 산봉우리에 두개 꼭지가 튀어나와 있어서 원주민들은 이걸 공주님들이라고 부르는데 백인들은 대영제국의 상징인 사자라고 우긴다나. 하긴 역사라는 것이 정복자들에 의해 다시 쓰이는 것이니까.
자동차는 공원을 끼고 달린다.
“월드 코리아, 말이에요. 좀 윤곽이 잡혔습니까?”
리가 묻는다.
“윤곽이랄 게 뭐 있나요. 선배가 먼저 잡으셨을텐데. 방금 지나온 다린 볼 때마다 느끼지만 디자인이 참 아름다워요.”
“본인이 상습적인 언어 폭행인 거 알고 있어요?”
“언어 폭행이라뇨?”
“상당히 심각한 수준입니다. 말 돌리기, 자르기, 들이대기, 게다가 상대방 배려치 않고 입 다물고 있기, 등등이죠. 방송국에서 일 안했다면 그게 어느 조직에서 통하겠어요. 담에 보면 절대 알은체 말아야지 했다가도 얼굴 보면 또 말 걸게 되니 참.”
그녀는 리의 말보다는 와이퍼에 온통 신경이 쏠린다. 지난번에 한국인 주유소에서 갈았던 게 불량이었던지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면서 오작동이다. 리가 와이퍼 동작 스위치를 만져 보지만 여전하다. 줄기차게 내리는 이 비는 밤새 그치지 않을 기세다.
“또 말 잘라먹죠. 하기야 얼굴 익힌 지 한참이라 이젠 어지간히 익숙해졌습니다. 스타 벅스 가서 커피나 한 잔하죠. 드라이브인 하면 내릴 일도 없고, 커피 생각이 간절하네”
자동차 실내에 부착된 시계는 아홉시다. 그녀는 스타 벅스 드라이브인에 차를 정차시킨다. 리가 커피 스몰 사이즈 두 개를 주문하고 값을 치른다.
“내리시죠. 내가 운전할게. 우리 집이 어딘지 잘 모르잖습니까.”
그녀는 운전대를 잡은 리의 옆얼굴을 본다. 눈매가 깊어 더 서늘해 보이는 눈빛. 처음, 그녀가 교민 사회에서 이목을 끌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그녀를 경계하거나 호기심의 대상으로 관찰했다. 그런 중에 말은 뾰족하게 하지만 아무 계산 없이 무조건적인 호의를 베풀어 준 사람이 리였다. 그렇다고 그가 누구에게나 자기 곁을 내주는 이가 아니라는 걸 일 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안다. 리는 버릇대로 한 손으로 운전을 한다. 기아 변속기 위에 얌전히 놓여진 두툼한 오른손. 일순, 그녀는 그 손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리의 손을 잡고 싶었던 것은 오래전, 리의 스포츠카에 동승하면서 리가 내민 손을 잡았을 때 였는 지도 모른다. 우연히 곁에 앉아 취재 수첩을 넘기는 손끝에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손의 표정에서 그녀는 때때로 리의 손에 유난하게 예민해지는 자신을 불편해 하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리에게 묻는다.
“내가 그렇게 못된 상습범인가요?”
“못되기로 말하면 둘째가라면 서럽죠. 메일 답신 떼어먹기 일쑤죠. 지금도 아까 한 말을 이제서 묻잖습니까. 왜 한참 지나니 걸리십니까?”
리는 차를 한적한 도로에 정차시킨다. 그녀는 왜 차를 세우느냐고 묻지 않는다. 모래가 낀 듯 뻑뻑한 눈을 잠시 감고 싶을 뿐, 돌아가려면 눈을 감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이다. 설핏, 잠이 들었던 그녀는 뺨에서 누군가의 손길을 느끼고 눈을 뜬다.
“아, 깼네요. 그냥 …… 한참 전부터 만져 보고 싶었습니다. 결례를.”
그녀가 황망히 거두는 리의 손을 잡자 리가 와락 그녀를 당겨 안으며 입맞춤을 한 것은 한순간이다. 리의 입술은 건조했다. 입맞춤은 오래 계속 된다. 서로를 갈망하고 있었던 것일까? 모른 체 해왔을 뿐 리의 감정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모습은? 단지 리의 손을 만져 보고 싶었을 뿐인데. 그녀는 자신의 자연스러움이 당황스러워진다. 하지만 입맞춤을 나누는 동안 타지에 머물며 그녀 안에 빙하조각처럼 떠오른 고적함이 한 번에 녹아 내리는 녹녹함과 뜨거움을 경험한다. 그녀의 입술은 잃었던 엄마 젖을 찾는 아이처럼 리의 혀를 놓지 못한다.
열쇠로 뒷문을 열고 들어서던 그녀는 화들짝 놀란다. 일층 주방에서 음식을 조리하던 박이 무척 놀란 표정이다. 더 늦으실 거라고, 여학생이 그러던데 일찍 오셨네요.
그녀는 일별도 주지 않고 이층으로 올라가려다 식탁 위에 펼쳐진, 주로 한국 남자들인 사진에 시선이 간다.
“아. 이거 그냥 심심해서 찍어 봤습니다. 무료해서요.”
싱크대에도 여러 개의 식기가 나와 있고, 어수선한 것이 평소의 청결한 식당 같지 않았다. 박이 주섬주섬 사진을 챙긴다. 그녀는 이층으로 올라갔다가 옷을 갈아입고, 다시 일층으로 내려온다. 그새 주방에 있던 박은 방으로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박의 방을 노크 한다. 한참 후에야 나타난 박의 모습이 어딘지 어정쩡한 모습이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니요. 일이라뇨. 아무 일 없습니다. 그리고 그 커피잔요. 그거 며칠 기다리셔야겠습니다. 제가 오늘 샅샅이 찾아 봤는데 성능 좋은 강력 접착제가 여긴 없더라고요. 제가 오늘 다리가 아프도록 자전거를 타고 돌아 다녀 봤으니 곧…….”
그랬겠지. 그런 인간인줄 진작 알아봤어.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미안해하기는커녕, 말끔하게 해결도 하지 못하면서 시간이 지날 때마다 변명만 늘어놓는 유형의 인간. 아마도 박은 이번 일을 어찌어찌 그녀가 잊어버리길 바라고 있을 것이다.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 박의 변명이 끝나기도 전에 돌아 서려다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그녀는 복도를 걸어 현관 쪽으로 간다. 마주 보고 있는 두 개의 큰 방은 요즘 비어 있다. 그녀는 큰 방의 문을 열어 본다. 방안은 잘 정돈 되어 있다. 문을 닫고 돌아 선 그녀는 내친김에 바로 앞의 방문도 열어 본다. 방문을 열자 방안은 컴컴했으나 석연찮은 음식 냄새가 확 끼쳐 온다. 그녀는 전등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켠다. 방안이 환해지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녀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한다. 트윈베드가 놓인 그 방에서 두 남자가 식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세요?”
박이 화급히 그녀에게 말한다.
“아. 제 친구들입니다. 오늘 우연히 만나 제가 밥이나 한 끼 먹자고, 데려 왔어요. 밥 먹고 인사드리려고 했는데, 인사해. 여기 안주인이셔.”
“그런데 왜 나와서 식탁에서 드시지. 여기서 불까지 끄고.”
“아, 그게요. 잠깐 정전이 되었던지라, 불이 들어 온 줄 몰랐네.”
그녀는 방안을 꼼꼼히 살핀다. 박이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자 라면을 먹던 그들은 엉거주춤 일어나서 그녀에게 인사를 한다. 그들의 인사를 건성으로 받으며, 이층으로 올라온 그녀에게 알 수 없는 불안함이 몰려온다. 도대체 박은 뭘 하는 작자일까? 기억해 보니 그렇게 돈을 아끼는 사람이 라면을 박스로 사다 놓는 걸 봤는데, 그 라면박스는 또 금방 비어버리곤 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수상쩍은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그녀가 본 방안은 그들이 잠시 놀러와 머문 풍경이 아니었다. 방에 걸린 옷가지들, 그들은 도대체 언제부터 거기서 머문 것일까? 그녀는 박을 불러 궁금증을 해소하려다 생각을 바꾼다. 혼자 그 큰집을 건사한다는 것을 알고는 무엇이든 도와주겠다는 것을 핑계로 불순한 의도를 가진 남자들의 심사를 심심치 않게 목격한 그녀였다.
남편을 사랑하지 않게 되면서, 그 자리를 대신해 들어선 형제 같은 감정. 그녀는 그 감정이 곧 남편에 대한 실연임을 알고 절망했다. 누가 누구를 떠나보내지도 않았는데, 실연을 경험하고 있는 그 결혼생활은 그녀에게 위선적인 한 장의 가족사진과도 같았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홀로인 시간 속에서 그녀는 오랫동안 곁을 지키던 남편에 대해 느껴지는 형제애가 단순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것이 두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고리였다는 것, 이따금 그녀는 가족의 정체성에 심한 회의감을 느끼곤 했다. 언제부터인지 남편이란 말과 동의어가 된, ‘형제’ 그러나 지금, 그녀는 그가 그립다.
차분하고, 냉정하게 대처해야해. 박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종잡을 수 없는 그녀는 내심 자신을 다 잡으며, 어렵게 잠이 든다.
6
아침에 사무실을 들어서면서 그녀는 오 의원 보좌관에게 전화를 받는다. 9시 30분에 호텔로 오시죠. 아직 출근하지 않은 국장에게 그녀는 전화보고를 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간다. 호텔에 도착하자 현관문을 막 나오던 오의원이 반색을 한다.
“어, 방송국 기자 양반 오셨네. 반갑습니다.”
가볍게 목례를 하며 그녀는 보좌관이 이끄는 대로 승용차에 오른다. 차에는 월드코리아사장, 그녀, 오 의원, 그리고 낯이 많이 익은 여자 한 사람을 포함해 네 명이 동승했다. 운전은 월드 코리아 사장이 직접 하는 듯 보좌관은 서서 일행을 배웅한다.
“내일이면 일정도 끝나고 오늘은 속닥하게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서로 다들 아시죠.”
오의원의 말에 어색한 목례를 나누자 차가 출발한다.
“일단 댁으로 가십니다.”
운전석 옆에 여자가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너무 바쁘시겠어요. 그제서야 여자의 얼굴이 제대로 보인다. 남편이 한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여자와 아이들만 이곳에 살면서 남편과는 스무 살 차이가 난다던. 가끔 한국무용 발표회를 하는 민 예랑이라는 여자. 바로 전에 초대권을 보내온 적도 있었다.
“아, 네. 잘 지내시죠. 지난번에 못 가뵈어 죄송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어떤 의도로 만들어진 자리일까? 오 의원과 민예랑은? 그녀는 옆에 앉은 오 의원의 속내가 점점 궁금해진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짐작이라도 하듯 오 의원이 입을 뗀다.
“윤 기자, 우리 세 사람의 인연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어요. 우리끼리 밥이나 먹자고 만든 자리에 내가 윤 기자를 한 번 더 보고 싶어 초대했는데 불편하진 않으시오?”
“아, 네 괜찮습니다. 세분 자리에 제가 외려 민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민폐라니, 우리가 고맙죠. 총기 있는 젊은 분이 우리 사석에 함께 해주셨으니, 오늘은 그냥 맘 편히 같이 밥이나 먹읍시다. 나도 윤 기자도 일은 다 잊어버리고.”
해변을 끼고 달리던 차는 언덕을 올라 정차한다. 언덕위에 자리 잡은 흰 저택은 한눈에도 꽤나 넓은 평수다. 기다렸던 듯 도우미처럼 보이는 이가 문을 열어 준다. 처음엔 두 사람 중 한사람의 집이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다.
월드코리아 사장이 출발할 때 ‘댁으로 간다’ 던 말이 떠오른다. 더욱이 오의원의 행동이 제집인 듯 자연스럽다. 저택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집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정원에 풀장이 갖춰진 집이다. 일행은 거실에 앉아 있다가 도우미의 식사가 준비돼 있다는 말을 듣고 정원으로 나간다. 흰 아사 식탁보가 깔리고, 정성스럽게 세팅된 식탁에 앉는다. 요리사를 불렀음직한 싱싱한 해물요리의 성찬이다. 어젯밤의 비가 말끔히 개고 맑은 하늘에 적당한 바람이 분다. 멀리 기차가, 바닷가를 잇고 있는 나무다리가 아스라이 보인다. 날씨, 사람들, 그리고 오가는 대화까지도 다 지나치리만큼 적당하다.
“의원님, 오늘 바람이 요트 타기에 적당한 날씨입니다.”
“그렇지? 그러고 보니 요트 탄지 한참 됐구먼. 그렇게 좋아하는데 참 시간을 즐겨야 하는데 시간에 쫓겨 사니 말이야. 윤 기자는 요트 좋아하시나?”
월드 코리아 사장의 말에 대꾸를 하던 오 의원이 화살을 그녀에게 돌린다.
“네, 보기엔 좋아 보이는데 타 본 적이 없어서요.”
“이렇게 요트 즐기기 좋은 나라에 와서 못 타봤다니. 언제 같이 타 봐야겠구먼. 그런데 우린 전에 어디서 만난 적 있던가. 난 윤 기자가 이상하게 낯이 익어요.”
그녀를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 묻는 듯한 어투에 그녀도 고개를 가로 저으며 분명하게 아니요라고 말한다.
오 의원은 잘 손질해 놓은 새우를 들고 말을 잇는다.
“하기야 이제 나이가 드니 처음 보는 사람도 낯설지 않고, 다 어디선가 만난 듯해지더라고. 그래도 나 같은 사람이 사석에서 식사하고 싶은 사람 만나는 게 드문 일인데, 건배합시다.”
오 의원은 글라스에 아이스 와인을 찰랑하게 따라 그녀에게 건넨다. 네 사람의 리델 아이스와인 잔이 허공에서 창 소리를 내며 가볍게 부딪친다. 월드 코리아 사장은 웃음기를 머금고는 있지만, 그녀의 시선을 정면으로 바라보지도 그녀와 말을 섞지도 않는다.
“나는 대학을 그리 좋은데 못 나왔어요. 공부보단 딴 데 정신이 팔려서. 어찌어찌하다 정치판에 들어와서 소위 명문대 출신들끼리 노는 걸 보고 참 눈꼴이 시었어. 그런데 말야. 지금은 그들이 우리를 무시 못해요.”
“다 의원님이 애쓰신 덕분이죠. 누가 뭐래도 .옹벽 같은 패밀리를 구축하셨잖습니까.”
월드 코리아 사장이 말을 받았다.
“옹벽 같긴, 어찌됐든 사람 마음이란 게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울타리 밖에서 그들을 쳐다 볼 때의 꼬였던 심사는 다 잊어버리고 울타리 안에 섞이고 보니 참 편안하더란 말이야.”
오 의원의 패밀리, 21세기 클럽이라는 이름을 빌리고 있지만 오의원의 패밀리라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재계, 정계, 학계, 문화계의 내노라하는 명사로 구성된 21세기 리더십 클럽 덕에 살얼음 같은 정치판에서 오 의원은 그 천수를 누릴 것처럼 보인다. 해마다 40명을 엄선하여 새로운 기수로 받아들여 전 과정을 무료로 운영하고 그곳을 수료한 기수들이 수순대로 각지부의 단체장을 맡고 다시 비슷한 커뮤니티를 만들어 문어발처럼 오의원지역구, 나아가 세를 불렸다. 그러나 오 의원을 위한 단순한 후원회보다 더 큰 정치적 집단이 배경이었다.
그녀는 신제품 론칭 때 여러 번 명품관에서 다회를 열며, 미디어에 도자기 디자이너로서 얼굴과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때문에 그녀도 회사의 한국 지사장으로부터 여러 차례 가입권유를 받았다. 그녀가 집요한 권유에도 가입을 거절하게 된 것은 일간지에 있던 선배에게 그 모임의 성격에 대해 소상히 들어 알고 있던 탓이었다. 비록 도자기 디자인이지만, 예술가라고 자부하고 있던 그녀에게 오 의원의 그 커뮤니티는 섞이고 싶지 않은 탁한 물이었다.
그러나 그 후, 그녀에게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사건, 기억 하고 싶지도 않은 타사 디자인 카피 사건은 오 의원 구성원들의 행태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는 일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러나 심증뿐이었다. 그녀는 그 일로 그 업계에서 매장되고 말았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와인 잔을 든다. 오의원도 그녀의 그 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일까? 묻고 싶은 것이 많은 그녀도 할 말이 있어 불렀을 오의원도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이상한 식사였다. 어쩌면 오 의원은 그녀에 대해 이미 물을 것이 없는지도 모른다. 티타임이 끝나자 소복을 한 민예랑이 정원에서 일명 씻김굿 공연을 펼친다. 씻김굿이라. 그녀는 민 예랑의 춤사위를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본다. 모든 것이 완벽했지만, 마음을 내려놓을 수 없는 그곳의 초대 손님 중 VIP는 단연 풍경이었다.
그녀는 방송국 앞에서 오 의원 일행과 헤어진다.
“윤 기자. 공항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쓰였어요. 윤 기자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고속 상승을 할 수 있는 열정을 지니고 있어요.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쓸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을 보는 눈이야. 너무 혼자 뭘 하려 하지 말고 같이, 함께 하도록 해요. 언제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해요.”
차에서 내리기 전 오의원이 그녀의 손을 마주 잡고 한 이야기였다. 오의원의 손은 물컹한 연체동물의 그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손이었다. 그녀는 돌아서면서 영 기분이 개운치 않다. 고작 식사 초대를 해서 ‘패밀리‘운운이라니. 월드 코리아 취재 건을 안 오의원이 그런 식으로 그녀에게 사전 경고를 한 것이리라.
7.
오전 취재는 교민 재향군인회가 보훈 병원에 있는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방문하는 행사였다. 굳이 취재를 나가야 할까 망설였던 그녀에게 취재를 요청하는 전화를 건 것은 애국 통일 위원장이었다. 병원 입구에서 일행들과 마주친 그녀는 시선이 영 부자유스럽다. 사람들 틈에 리가 섞여 있다. 리는 거침없이 그녀에게 다가와 말간 얼굴로 인사를 건넨다. 얼굴에 빛이 생긴 그런 얼굴. 병원은 우리나라 무궁화 두 개정도의 호텔 정도 되는 쾌적한 시설이었다. 노인들은 행복해 보인다. 모든 사적인 것들이 허용되는 분위기. 병원이 아니라 에이급 시설의 실버 요양원 같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서는 그녀에게 위원장이 말한다. 육십대, 부드러운 말씨에 결코 범상치 않은 교민 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다. 오늘 윤 기자와 점심 한 끼 합시다. 리가 멈칫대는 그녀를 끌다시피 해서 자기 차에 태운다. 마침 식당은 가까이 있다. 식당에 도착하니 식사를 함께 할 사람은 네 사람이었다. 딤섬을 먹으며 위원장은 그녀를 화제 삼는다. 라디오, 처음엔 별스럽지 않게 들었는데 정말 잘 듣고 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라디오부터 켠다니까. 유익한 뉴스예요. 교민 뉴스, 본국 뉴스 등, 목소리만 듣고는 미스인 줄 알았는데 미세스라며.
그녀와 리의 눈길이 딱 마주친 건 그때였다. 교민회 회장이 다급히 말한다. 아니 싱글이에요. 그러니까 그게…… 그렇죠, 윤 기자 이미 소문이 다 돌았다고. 그런 일은 얼른 알리는 게 나아요. 우리끼린데 뭐 어때.
막 춘권을 집으려던 젓가락을 멈춘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무슨 소문? 그녀는 교민회 회장을 노려보듯 바라본다.
“아버지. 그만 하세요. 사생활인데.”
애국통일위원장에게 리가 아버지라고 부른다. 공안 검사로 정치적 망명을 했다던 리의 아버지가 애국통일위원장이었다니. 갑자기 머릿속에 여러 개의 빨간 전구가 동시에 켜진 느낌이다. 재빨리 화제를 바꾼 교민회 회장의 너스레로 식사를 마친 그녀는 리의 차에 오른다. 오늘 오 의원에 관해 리와 의견을 나누고 싶었던 그녀였다. 그녀는 지난밤, 리와의 일 년은 그만한 신뢰를 충분히 쌓을만한 세월이었다고 판단했다. 지금까지 그녀가 보아 온 리는 그녀에 대한 호의를 배제하고라도 기자적 근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불쾌했던 건가? 그 정도가 왜? 어떤 말이 윤 기자를 불쾌한 거죠?”
차창에 듣는 빗줄기를 바라보는 그녀에게 리가 묻는다.
“제 사생활이 그런 식으로 교민사회에 안주거리가 되고 있는 거, 그리고 애국교민 회장님이 아버님인 거 몰랐어요. 주의를 기울였음 금방 알 일이었겠지만, 좀 당혹스럽네요.”
“그건 다시 말해 나한테 관심이 부족하다는 거고 그리고 윤 기자가 싱글이 되었다는 소문이 떠돈 건 한참 되었는데. 사실, 나도 궁금해요. 이야기 나온 김에 하나 물읍시다. 진행 중입니까? 아니면 다 정리된 겁니까.”
그녀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리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가끔 사람들은 스스로 말하고 싶지 않은 치명적인 질문을 너무나도 쉽게 들이댄다. 가라앉은 듯 했던 울증이 다시 치민다.
“다운타운이네요. 차를 세워줘요. 여기 잠깐 들를 데가 있어요.”
“그냥 갑시다. 암말 안하고,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진짜 꼭 달팽이 같은 사람이에요. 불편해지면 껍질 안으로 숨어 버리잖습니까.”
“정말로 내려야 할 참이었어요. 차 세워줘요. 고마워요.”
어이없어 하는 리의 얼굴을 외면하고 그녀는 차에서 내린다. 리의 차가 출발하고 난 후에야 우산을 두고 내렸다는 걸 알았다. 빗발이 아까보다 더 거세지지만, 그녀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대로를 걷는다. 한낮임에도 불을 밝힌 상가들. 그러나 거리는 한산하다. 한참을 걷던 그녀는 본차이나 대리점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늘 브랜드가 주장하는 품격을 고집하느라 새로운 시도를 하지 못하는 디자인. 이 브랜드는 곧 도태될 것이다. 신제품 다회에서 벌어졌던 그 일을 지울 수만 있다면, 그녀는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특정인의 기호에 맞게 그리는 단 한 개의 작품이 아니라 앙드레 가뇽의 연주처럼 불특정 다수가 그녀가 디자인한 찻잔을 편히 쓰게 하고 싶다. 쇼 윈도우에 전시해 놓은 그릇들을 살피는 그녀의 얼굴에 빗물이 흐른다. 그녀는 성당을 지나고 그녀가 그토록 좋아하는 아름다운 도서관을 지나쳐 사무실까지 그 비를 다 맞고 걷는다. 그럼에도 마음속에 강물을 이룬 슬픔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사무실에 도착하면서부터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오한이 몰려온다. 그녀는 사무실에 남아 있던 인턴들을 퇴근시키고, 늦게까지 원고를 작성하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다. 더운물을 끓여 쟈스민차를 계속 마셔보지만 오한은 가시지 않는다. 마지막 원고를 출력하고 수정자를 본 그녀는 본사 국장에게 보내는 메일함에 문서를 첨부해 예약한다. 시계는 자정을 향한다. 갑자기 견딜 수 없는 피로가 몰려온다. 오 의원 건 취재를 시작하면서 세 시간 이상 깊이 잔 적이 없다. 월드코리아, 물류 창고를 비롯해 월드코리아와 관련된 사람들, 민 예랑과 오 의원과의 사이에 낳은 두 명의 딸. 그들의 오래된 애정 행각까지 취재할 수 있는 건 다 취재했다. 핸드폰 벨이 계속 울린다. 리의 번호다. 그녀는 받지 않는다. 그녀는 몸이 너무 뜨겁다고 생각한다. 집에 가려고 행거에 건 바바리를 집어 든 순간 그녀는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어찌할 수 가 없어 책상에 엎드린다.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어렴풋이 보이는 전화번호는 집이다. 그녀는 간신히 수화기를 든다. 여학생이다.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 안 오시니까. 걱정이 돼서요. 박 선생님이 전화해보라고 하셔서”
“…… 어떻게 혼자 집에 갈 수가 없을 것 같아……”
내일, 한국과 이곳의 경제인 미팅이 있는 날인데. 가물해지는 의식사이로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8.
그녀는 얼핏 박의 얼굴을 본 것도 같다. 자신의 익숙한 침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그녀는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든다. 설핏 깼을 때 여학생이, 그리고 완전히 눈을 떴을 때 사람들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리와 국장의 목소리다.
“깼네, 윤 여진씨. 얼마나 잤는지 알아? 자그만치 열 네 시간을 잤어.”
“누가 절 여기로 데려 왔어요.”
“집에 계신 분들이 응급차를 불러서 사무실로 간 모양이고. 암튼 무리했어. 내가 너무 부려먹은 모양이야. 미안해.”
국장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는다. 마치 아버지처럼 근심 어린 진정성이 전달되는 손이다. 뒤에 서 있던 리의 안타까움과 연민이 가득한 눈빛과도 마주친다. 그녀는 리에게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리는 말없이 밖으로 나간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선다.
“이제 괜찮아요, 집에 가야죠”
시민권자가 아닌 그녀의 병원비도, 잡혀 있는 일정도 걱정이 된다. 그녀의 마음을 눈치 챈 듯 국장이 말한다.
“병원비는 격무로 인한 거니까 회사에서 지불할 거고 아까 오 의원 비서가 치료비에 보태라고 금일봉을 놓고 갔어. 왜 그렇게 그쪽에서 신경을 쓰는지 모르겠어. 윤 기자가 나 모르게 뭔가 큰 거 한 건 가지고 있나? 치료비 걱정은 말고 있고 싶은 만큼 있어도 돼.”
그녀는 국장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간 어지러울 뿐 몸은 가벼워진 것 같다.
“ 오늘이 며칠이에요? 오 의원 귀국하는 날 아닌가요?”
“그러게, 오늘 6시 비행기라는 것 같던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른 집에 데려다 주세요.”
국장이 뭐라는 것도 담당의사가 과로로 일어난 탈진이라 더 쉬어야 한다는 만류도 뒤로 한 채 그녀는 환자복을 벗고 짐을 챙긴다.
집 앞에 국장을 기다리게 하고 그녀는 대충 옷을 갈아입고 급하게 공항으로 향한다. 영사와 항공사 지사장, 그외의 사람들이 접견실에 나와 있다.
반색을 하며 다가온 오 의원이 그녀를 한켠으로 부른다.
“그렇잖아도 소식을 듣고 걱정했는데. 아직도 안색이 안 좋군. 여긴 안 나오셔도 되는데 무리 하셨네”
“인사도 드릴 겸, 이거 돌려 드리고 싶어서요.”
그녀가 틈을 놓칠세라 내미는 봉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의원의 눈동자에 복잡한 심사가 보인다.
“봉투를 뜯어보지도 않았구료. 액수를 확인했소? 그건 윤 기자 병원비라기 보다 방송국 사업에 보태 쓰라는, 교민 사회를 위한 일종의 기부금이요. 알아보니 주파수대여 기한이 지나 있더군. 재계약은 물론 대여비도 연체중이고 그렇게 되면 의욕적으로 일하고 있는 윤 기자가 어려워질 것 아니오.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그런 형식으로 전한 것이니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으면 좋겠오.”
“고맙습니다. 하지만 호의만, 그것만 받겠습니다. 돈은 사양하겠어요. 목적이 있는 기부금은 받을 수 없습니다. 잘 돌아가세요.”
그때 돌연 그녀 쪽으로 몸을 바짝 붙인 오의원이 그녀의 눈을 뚫어질세라 응시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윤 기자, 혹시 여우와 사냥꾼의 이야기를 알고 있오? 여우와 사냥꾼은 아주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전형적인 쫓고 쫓기는 대명사의 캐릭터지. 익숙한 관계이기 때문에 여우는 사냥꾼이 어떤 경우의 수를 쓰더라도 속속 다 읽고 숨을 수 있습니다. 사냥꾼이 여우를 당해낼 재간은 없을 거요.”
잠시 납덩이같은 침묵이 흐르고 그녀가 말문을 연다.
“…… 사냥꾼이 적당히 총질을 해대서 여우를 겁주고 쫓아 버리던 낭만이 있던 시절은 지나갔어요. 왜냐하면 여우가 교활해져 겁만 주고 쫓아 버리면 사냥꾼을 되려 물려고 한다는 걸 알게 됐거든요. 말씀 잘 들었습니다.”
봉투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돌아서는 그녀의 발목을 붙잡은 것은 오의원의 다음 말이었다.
“내가 이런 말까지는 안하고 싶었는데. 자네 본차이나에서 십 일 년 동안이나 수석 디자인이었더군. 신제품 출시 과정에서 카피 누명을 쓰고 중도 하차한 것이 맞나. 한국 지사 마케팅 전략팀의 수뇌였고. 차기 지사장으로 물망에 올랐었더군. 복권되고 싶지 않은가? 자네 같은 인재가 본국의 소도시만도 못한 교민 방송국 일이나 한다는 것은 국가적인 낭비지. 우리 집에도 아내가 애지중지 하는 자네가 디자인한 하나밖에 없는 찻잔이 있어. 자네가 어디로 숨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화려하게 복귀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네. 사냥꾼은 천부적이어야 하네. 자네에겐 그 근성이 부족해. 전의 회사도 어이없이 놓아 버려 여기까지 흘러들어 온 것 아닌가.”
바로 이 순간, 이 순간이야말로 그녀가 기다려 온 순간이었다. 그녀는 오 의원에게 분명하게 해야 할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잠시 멈칫하던 그녀는 뻣뻣해진 뒷목을 숙여 인사를 하고 돌아섰을 뿐이다. 분명히 바로 걷고 있는데도 허방을 딛고 있는 것처럼 다리를 곧게 펴기가 어렵다. 묵은 기억속의 일그러진 자신의 초상이 순식간에 올라와 명치에 걸린다.
오 의원이 게이트를 나서기 전에 그녀는 리를 불러 사무실 근처로 온다. 커피 전문점에 가려던 그녀를 카페로 이끈 리는 맥주를 벌써 여러 병째 비우고 있다. 그녀는 레몬에이드를 마신다. 오늘은 꼭 오의원에 관한 리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지역구 특산물, 형식은 공개 입찰이었는데 본국에서 알아 본 바로는 월드 코리아 단독 입찰이나 다름 없었다네요. 입찰가를 다 알려주고 형식만 취한 거죠. 그것뿐만 아니라. 종목만 다를 뿐 가지가지의 특혜가 부지기수더군요. 오의원이 전에 뇌물수수죄로 어려웠을 때 그 뒤를 월드 코리아 사장이 다 봐주었고, 월드 코리아 사장 형이 또 대단한 권력자더군요.”
리의 큰 눈은 핏발이 서 있다. 취기보다는 피로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그게 문제가 아니고 이봐요. 윤여진씨. 몸은 괜찮아요? 왜 벌써 퇴원을 한 거예요. 그날, 그 비를 다 맞고 사무실까지 갔다면서요. 당신이란 사람. 참 알 수 없는 사람이야. 왜 날 이렇게 미안하게 만드는 거죠.”
리가 그녀의 이름을 부른 건 처음이다.
“사적인 이야긴 나중에 하고. 지금은 오 의원 이야길 좀 더 하죠.”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의 말이 이어진다.
“난 당신에게 사적인 관심이 먼저 생겨 일도 같이 하고 싶어진 사람입니다. 당신은 공과 사를 구분하라고 하지만 그건 당신 같은 사람에게나 쉬운 일이지. 당신, 어떤지 압니까? 나에 대해선 다 알고 있지만 자신에 대해선 한마디도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 사람야. 솔직하지 못하지.”
“솔직하지 못한 게 아니라 말하지 않을 뿐이에요. 리 선배가 나의 과거나 현재, 미래에 대한 생각을 안다고 무엇이 달라지나요?”
“원하지도 않았는데 언제부터인지 당신에게 골똘하게 됐어. 당신 같은 사람을 들여다보는 게 도대체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 알아요? 당신도 그걸 모른다고 말할 순 없을 거야. 무리한 걸 바라는 것도 아니야. 난, 알고 싶을 뿐이야. 당신의 과거 미래. 현재. 아픔, 기쁨. 왜 당신에겐 그런 게 중요하지 않은 거지? 어떤 말을 해야 당신의 미소를 볼 수 있는지, 어떤 말을 해야 당신이 가끔씩 슬픔을 감추지 못해 보이는 그 애매한 표정을 다독여 줄 수 있는지. 왜 주류사회에서 떠밀려와 이런 유배지의 삶을 선택했는지도. 당신이 싱글이 된 건지. 아닌지도 너무 궁금해. 난 겉으로는 씩씩해 보이지만 안에서 상처를 키우고 있는 당신 같은 사람이 아니니까. 내 눈엔 다 보여요. 당신이 끌어안고 있는 그 상처들이 어느 순간 , 확연히 보인다고.”
“과음했어요? 너무 피곤해요. 일어서요.”
“히야, 피곤하단 말을 하네. 한 번도 피곤하다. 아프다. 힘들다란 말 못 들어 봤는데. 당신도 피곤하단 말을 쓰긴 쓰는군. 그래도 오늘은 다 말하고 맙시다. 내가 얼마나 묻고 싶었던 걸 참고 있었는지 알지 못하는 당신은 이해 못하겠지만. 보고 있으면 있을수록 불투명해지는 유리를 보고 있는 기분이야. 그렇게 투명한 얼굴을 하고서 왜 그렇게 내게 아니,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하는 이유는 뭐랍니까? 이 사람은 여기까지, 저 사람은 여기까지. 당신이 그어 놓은 선까지만 허용하면서. 난 당신의 어디까지 갈 수 있는 건지 궁금해. 상처란 우리 아버지의 경우를 보더라도 드러내야 낫는 겁니다. 꼭꼭 싸매서 평생을 보관해 보라고 당신이 정말 진심으로 한 번이라도 웃을 수 있는 날을 만날 수 있는지. 사는 건 전쟁이 아니야. 사는 건 그저 새로운 시간을 맞아 살아 내야 하는 거라구요. 가능하면 가볍게 기쁘게 말입니다. 그러려면 혼자는 절대 안 되지. 때론 부서지면서 사람들과 함께 가는 겁니다. 아파서 쓰러지더라도 타인에게 기대는 법, 부탁하는 걸 모르는 당신은 뭐든 스스로 견뎌야 한다고 생각하지. 당신이 뭐 신이랍디까?”
이 남자는 얼마나 많은 말을 참고 있던 것일까. 활화산처럼 쏟아내는 리의 말에 대꾸를 하기에 그녀는 지쳐 있다. 거침없이, 의구심 없이 자신의 마음을 토해내고 있는 리에게서 그녀는 모처럼 ‘사람답다’라는 말을 떠올린다.
어느 쓸쓸한 저녁. 서울의 인사동 거리가 지독하게 그리울 때, 이 낯선 땅에서 그래도 속내를 털어놓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리, 당신이었다고 말하게 될 날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지도 모른다. 리의 다부진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맑은 눈물을 한 두 방울 쯤 떨구며 따뜻한 위로의 말을 기다리는 그런 순간을 고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오늘은 오의원의 일을 의논해야 하는 날인 것이다. 어떤 말이라도 듣고 싶어 하는 리의 집요한 눈길을 외면하지 못하고 그녀가 말한다.
“당신이 보는 나란 사람, 드라이하고 마음을 내 보이지 않는 사람인 거죠. 맞아요. 나 그런 사람이에요. 사람과 기억을 나누면 뭐하죠? 헤어지면 나눠지는 추억을 갖고 뭘 할 수 있나요.”
“누군가를 만났었습니까?”
“타성이나 집착에 얽매이게 되는 걸 경계했지요. 그게 싫어서 가능성을 열어 두지 않았어요. 그러다 누군가를 만나게 되었죠. 말 그대로 어느날, 예상치 못한 일이 내게도 벌어졌어요. 교통사고처럼 만난 그에게 몰두하게 된 거죠.”
“지금도 계속 되고 있는 만남입니까?”
“어느날, 그에게 타성처럼 돼가는 관계를 왜 지속해야 하나 싶어 내가 먼저 이별을 말했지요. 그가 많이 힘들어했어요. 그래야만 하는 결정적 이유가 없었으니까. 문제는 그 후, 나 자신이었죠. 헤어지자고 한 그 순간부터 모든 게 말끔히 정리되는 건 줄 알았는데.”
“그 후에는요”
“…… 이런 이야길 계속 해야 하나요. 더 하고 싶지 않아요.”
“오늘만이라도 일 이야기 말고 윤여진씨. 마음이 담긴 옛이야기든 뭐든 듣고 싶습니다.”
그녀는 리의 담배 갑에서 말보로를 꺼내 불을 붙인다. 독한 연기를 들여 마시자마자 머리가 핑 돈다.
“헤어지자 말하고, 그 사람을 아픔 없이 기억하게 될 때 까지 많은 시간이 흘러갔어요. 끝없이 그가, 그와 함께 했을 때 행복했던 스스로가 그리웠죠. 그를 마음속에서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서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곁에 있는 사람과의 좋은 시간을 기억하게 되는 게 더 힘들었어요. 차라리 볼 수 없는 먼 곳에 있다면, 미화라도 될 텐데 그와 있을 때의 시간의 정체가 더 겁났던 거죠.”
“여진씨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로 이별을 하는 건 아니니까, 이별도 보편적인 이유가 아니면, 더 아플 수 있지요. 타성쯤은 어떤 관계이든 있는 감정 나닌가요”
“…… 그걸 한참 후에 아주 오랜 생각 끝에야 알았어요. 서로의 단점, 그러면서 조금씩 닮은꼴이 되어 가며 타성을 견뎌야 헤어지지 않을 신뢰가 선다는 거. 하지만 되돌아가기엔 너무 늦은 것 같아요.”
리가 담배를 꺼내 들고 그녀의 담배에서 불을 당겨 간다.
“그가 지금의 남편이군요.”
“그가 지속하길 원했는데 거절했던 거, 그 거절에 얼마나 마음이 상했을까가 아픔으로 되살아 왔어요. 내게 참 따뜻했고 나 또한 따뜻해지고 싶었던 사람인 것만은 틀림없는데, 관계의 한계성을 스스로 극복하지 못한 게 늘 가시처럼 걸려 있었지요.
“타성도 사랑의 한 형태에요. 그걸 넘어서면 모든 걸 극복하게 되는 거죠. 나도 그걸 깨닫느라 비싼 수업료를 치뤘어요.”
리가 선험자의 진리인양 결론을 내린다.
“극복하게 되나요? 극복하면, 무얼 만날 수 있죠? 남과여로 만나서 형제 같은 가족애를 느끼며, 평생을 함께 가는 것? 그게 선배가 말하는 극복인가요?
리는 말 수가 줄었다. 한동안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이 흘러간다. 리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녀는 레몬에이드 잔을 만지작거린다.
“선배가 알고 싶어 하니 기회에 확실히 말해 둘 게 있는데 난 이혼하지 않았습니다. 잘못된 소문이에요. 아직 그를 확실히 보내지 못해서 그럴 생각도 없구요.”
그녀가 갑자기 단호한 어조로 말하며 핸드백을 집어 든다. 의자에서 일어선 순간, 다리가 허청 흔들린다. 그녀 뒤를 곧 바로 리가 뒤따른다. 그녀는 생각한다. 왜 분명한 단어만 선택해 쓰고 더 단호한 어조로 말해야 나답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렇게 지나치리만큼 차갑게 말하지 않아도 되는데. 리, 어떤 의미에서는 이 땅에서 그녀가 의구심 없이 호의를 가지고 있는 단 한 사람인데. 관계에 실패한 기억에 사로잡힌 자의 두려움 때문일까? 모습을 다 보여 주지도 못한 채 망설이는 사이 다른 사람들처럼 지친 리를 보내게 될 것이다.
사무실에 들어온 그녀는 커피포트에 스위치를 넣고 물을 끓인다. 몰아치는 격랑을 잠재우는 유일한 법이 차에 기대는 것이라니. 더운물로 다기를 덥히며 그녀는 숨을 고른다. 차통을 열고 장미 몇 송이를 찻잔에 넣자 금세 꽃잎이 활짝 벌어진다. 리의 말들이 그녀 생각의 갈피갈피를 헤집는다. 리가 본 모습이 어쩌면 타인이 보는 그녀모습의 다 일지도 모른다. 장미차를 마시는 동안 집에서 전화가 걸려 온다. 박이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제가 퇴근할 때 모시러 갈 생각인데. 아니, 됐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 전화 주시면 언제라도 모시러 가겠습니다. 그녀는 차를 마시며 박에 대해 생각한다. 그녀가 정신없이 밖으로 몰아치는 사이 박은 놀라우리만치 주부의 역할을 유능하게 소화해냈다. 자전거로 꽤 먼 거리의 대형마트에 가서 장을 봐 오는 것은 물론, 세탁에 쓰레기 분리수거까지 오래 전부터 현지인이었던 것처럼 모든 일을 척척 해냈다. 집안은 늘 청결한 상태를 유지했다. 가끔은 누가 주인인지 그녀 자신도 헛갈릴 정도로 가사 일에 적극적인 박이었다.
그녀는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메일함을 연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던 본사 국장의 회신을 읽는다. 내용은 간단했다. 오 의원 건은 잘 읽었으나 당분간 보류하라는 것이다. 본국의 일간지 선배에게도 비슷한, 타이밍이 좋지 않다는 대답을 들었다. 어떤 커넥션이 느껴질 정도로 어떤 경로든 오 의원 건은 다 차단되고 있는 듯한 의혹이 인다. 그녀의 답답증에는 기별이 없는 남편도 포함된다. 물론 남편답게 일이 원하는 모양새대로 틀이 잡힐 무렵에야 기별을 해 올 것이지만. 한국에 나갔다가 돌아오던 남편은 공항에서 일차 입국 거부를 당했다. 머물 숙소의 주소와 현지인 주소를 댔음에도 출입국 횟수가 너무 잦다는 이유로 하루를 감금당한 후, 곧 바로 다음 비행기로 한국으로 돌려보내졌다. 본국의 경제가 하향지수로 돌아선 후로는 한국인들이 종종 겪는 일이었다. 지나치게 자존감이 강한 남편이 그 과정에서 느꼈을 수치심에 그녀는 한없는 연민을 느꼈다. 남편은 자신이 옐로우 리스트에 올라 있을 것이라고 했다. 때문에 수속이 완전히 끝난 후까지 이곳에서 자신을 다시 볼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체류기간 연장을 위해 나갔던 사 개월 전, 서울에서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헤어지며 그녀의 저혈압을 걱정했다.
전화벨이 울린다. 수화기를 들자 남편이었다.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뒤 남편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의 특성상 나보다 당신이 취업이민을 하는 것이 유리하대. 내 서류는 거절당했어. 그러니까 대행사의 말에 의하면 이혼을 하고 이민 수속이 완전하게 되면 다시 그곳의 법으로 결혼하면 된다네. 그렇다고? 그래야 수속이 빨리 된다네. 서류가 아마 오늘쯤 도착 할 거야. 받는 대로 이쪽으로 빨리 보내. 건강 조심하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잠자코 듣고 있다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남편의 말대로 서류는 그다음날 배달되었다. 그녀는 이혼서류와 위임장에 도장을 찍어 인턴사원을 불러 빠른우편으로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그녀가 그렇게 원했던 이혼을 그렇게 간단히 하게 된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고작 앎을 가진지 일 년 여밖에 안 된 리에게는 마음을 털어 놓으며, 십 수 년 을 함께 산 남편에게는 고작 건강 조심하라는 말밖에는 할 수 없다니. 정말로 남편에게 완전히 소외된 듯한 허망함과 함께 가슴속에서 무거운 돌덩이들이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9
교민회 선거전 유세는 치열했다. 열두 명의 후보가 올라오자 현 회장단은 선거법을 고쳐서 삼 만 불의 공탁금을 후보자들에게 걸게 했다. 공탁금을 걸 수 없는, 재력이 없는 사람은 선거에 나오지 말란 뜻이었다. 그러자 후보는 세 명으로 줄었다. 그녀는 요즘 부쩍 전화가 잦아진 리와 통화를 한다.
“모레가 선거네, 참. 이 짓도 못 해먹겠습니다. 교민은 사만 밖에 안 되는데 왜 이렇게 바쁘대요. 하기야 본국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불법 체류자가 이만 오천이란 말이 떠도니.”
“삼 만 불의 공탁금을 걸면서까지 교민회 회장을 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게 다 대통령 손 한 번 잡아보는 영광을 누리고 싶어서 아니겠습니까?. 내년에 대통령이 들를지도 모른다는 말도 있고, 그렇게 되면, 교민회 주최로 만찬이 열릴 거고, 대통령 손 한 번 잡아 보자는 거죠.”
“참. 한국 사람들은 정치적인 걸 좋아하는 민족성이 있나봐요. 요즘은 어딜 가도 교민회 회장선거 이야기에요”
“방송국에서는 어떻게 취재를 하십니까”
“중앙 방송국에서 개표 실황 생방 지시가 내려와서 하루 전부터 교민회 가서 텐트 쳐야 할 운명이네요.”
“그렇게 까지나. 하기야 다른 도시에서도 관심이 많을 겁니다. 이 선거 끝나면 연합회 회장 선거가 곧 있을 거고, 교민 총 연합회 회장인 거죠. 현 회장도 당연히 출마하니, 그건 그렇고 저녁 시간은요. 얼굴 본 지도 꽤 됐는데 제가 그리 갈까요.”
“오늘 저녁은 선약이 있어요. 집에 가서 저녁상을 봐야 해서요.”
수화기 저편에서 리가 말을 고르는 기미가 느껴진다.
“혹시 한국에서 손님이 오셨습니까?”
“아니요. 생일 맞은 학생이 있어서요.”
이내 쾌활함을 되찾은 리의 목소리가 되돌아온다.
“아, 그렇군요. 저도 그 식탁에 초대해 주시면 영광일텐데. 물론 안 되겠지만.…… 교민회에 위문이나 가야겠는데 사양하진 않으시겠죠?”
“방문 선물을 스시로 지참하신다면 고려해 보죠.”
“하여튼 입맛도. 여기 일간지 기자 월급이 얼마나 된다고. 알겠습니다. 삼 개월치 가불을 당겨서라도 꼭 초밥으로 대령하죠.”
오랜만에 베트남 가게에서 장을 본 그녀는 집에 도착하자 서둘러 저녁 준비를 한다. 오늘은 여학생의 생일이다. 여학생이 좋아하는 베트남 쌈을 메뉴로 골랐다.
그녀는 아보카도와 붉고 푸른 파프리카와 맛살, 햄, 오이 등을 길게 썬 것들과 불고기 볶음과 날치 알을 모양 좋게 세팅한다. 갓 지은 고슬고슬한 밥을 볼에 담고 싱싱한 양상추를 샐러드 볼에 아무렇게나 뜯어 놓는다. 마지막으로 굴로 다시를 낸 미역국을 뜬다. 여학생도, 최도 박도 모처럼의 식탁에 활기 있게 움직인다. 준비한 케이크를 중앙에 놓자 모두들 원탁에 둘러앉는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최가 어쩐지 잔뜩 풀기가 죽어 있다.
“와우. 무척이나 근사한 식탁입니다. 한 달을 기다려 온 보람이 있네요. 기대한 것이 바로 이거였어요. 바쁘신데 고맙습니다. 스텔라씨”
여학생이 답례의 인사를 하고 촛불을 끈다. 모두들, 진심의 박수를 치는 이 순간만은 식사의 즐거운 낭만에 젖는다. 그녀가 뒷마당의 포도나무에서 수확한 것으로 담근 포도주를 한 잔씩 따르고 박이 건배를 제의한다.
“소원 비셨습니까?”
박이 여학생에게 물었다.
“ 아, 소원요. 당연, 스텔라씨의 쾌유죠. 우리 모두 밥 못 얻어먹게 되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줄 알아요. 가만 보면 스텔라씨 워크 홀릭 증세가 있어요. 것도 중증. 일 좀 그만 하시고 건강 좀 챙기세요.”
그녀가 웃으며 대답한다.
“네,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요. 다신 안 아플 게요. 그럼, 이제 진짜 소원은?”
“이것도 소원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영어를 국어처럼 하게 해달라고 빌어야지요.”
여학생은 국문학 전공이었다.
“나름대로 우리말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는데 약소국가의 국어라는 것이 얼마나 무기력한 것인지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는 참이에요. 이 기회에 석사부터 다시 시작해서 영문학을 전공해 볼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러게요. 약소국가의 말이란 것이 이 나라의 사람들은 성인이고 우리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입니다. 그들의 역사를 새로 배우고 본국에서는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실력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 강사들, 어떤 건 우리보다도 문법에 약합니다. 그런데 회화는 정작 밖에 나와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우리나라는 죽은 영어 교육을 하고 있어요.”
기운이 없어 보이던 최가 여느 때처럼 큰 목소리로 말하고, 페이퍼 위에 김을 깐다. 그 위에 쌀국수와 밥, 가지가지 야채를 늘어놓고 마지막으로 날치 알로 덮는다. 어떤 요리든 자신만의 방법으로 음식을 먹는 취향이다.
“아하, 페이퍼 위에 김을 까는군요. 그거 맛있겠습니다. 저도 먹어봐야겠어요.”
박이 김을 집어 들며 말한다.
“요즘 좀 어때요? 계획대로 잘 되어 가고 있나요.”
그녀가 최를 보며, 묻는다.
“그럭저럭요. 형님이 도와주시고 계셔서 잘 될 듯 합니다.”
“아 제가 뭘요. 최형이 더 잘하고 있는 걸요”
“두 사람, 뭘 같이 하고 있나요?”
“아뇨, 최형이 취업이민이나 비자내는 방법에 대하여 아주 잘 알고 계시더라구요.”
‘아유 제가 잘 알긴요. 형님. 내일 시내에 같이 나가시는 시간 비워 놓으시죠. 제가 소개해드릴 분이 있다고”
“아. 그래 같이 나갑시다.”
최와 박 두 사람은 아주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인양 친분이 돈독해 보인다.
“ 아저씨 보고 싶으시겠어요. 이 댁은 아이도 없는데 왜 기러기 아빠신지? 한국에서 너무 오래 계시는 거 아닌기요.”
“그야 그쪽 일을 정리하시는 중이시니까.”
최의 질문에 잠자코 있는 그녀를 대신해 박이 해명을 한다.
“근데 사진을 봤는데 인상도 좋으시고, 두 분 금슬이 좋으셨겠습니다.”
“아저씨 정말 인상 좋으시고, 매너도 좋으십니다. 아마 형님도 만나면 좋으실 거예요.”
“스텔라씨, 자탄 아저씨가 오시고 집안이 얼마나 깔끔해졌는지 아세요? 정말 살림을, 이렇게 말해도 되나? 딱 적성이세요.”
자탄 아저씨는 박이 자전거를 타고 시내 어디든 쏘다닌다고 여학생이 붙여준 별명이다.
“맞습니다. 마치 주인아저씨가 돌아오신 것 같아요. 집안 구석구석을 살피시고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 계셔 주시면 좋겠습니다.”
주인아저씨? 그녀는 최의 말에 신경이 쓰인다.
“과찬의 말씀, 그런데 제가 여쭤 보지 않고 광고를 냈는데 괜찮으시겠지요?”
그녀가 수저를 멈추고 박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손님이 너무 없어 걱정이 돼 제가 교차로에 광고 신청을 했습니다. 내일부터 일주일간 게재될 겁니다.”
박에 대해 가까스로 가졌던 호의가 다시 의구심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참견의 도가 지나치다.
“저한테 묻고 하셨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게, 너무 바쁘시니까 얼굴을 볼 사이도 없고 또 제 말을…….”
분위기가 일순 싸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애써 화를 참는다.
“잘하셨네요. 이 집 세도 만만치 않고 곧 방학이니까 성수기고.”
여학생의 말을 들으며 그녀는 식탁에서 일어선다. 더운물을 다시 끓여 내며 베트남 쌈을 무척 즐기는 남편을 떠올린다.
집을 나서려던 그녀는 하이드로비 청구서를 들고 놀란다. 지나치게 액수가 많이 청구된 것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옆에서 기색을 살피던 박이 청구서를 빼앗듯이 가져가더니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제가 가서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10
교민회 강당은 돗대기 시장처럼 소란스럽다. 투표가 끝난 현재 투표율은 전체 교민인구의 30%를 밑돌았다. 선거는 정치적이고 싶은 그들만의 잔치라는 것이 증명된 결과다. 그녀는 몇 번이나 방송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개표가 중반쯤 접어들었을 때 그녀의 목은 벌써 잠겨온다. 그때 정말 스시 포장을 든 리가 출입구에서 손짓을 한다.
K주와 다음 연결까지는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다.
“잠깐, 시간 되죠. 저녁 먹고 합시다.”
리는 성큼성큼 앞서 어린이 한글교실로 들어간다. 불을 켜고 책상에 포장을 펼친 뒤 젓가락을 쥐어준다.
“피곤하죠? 라디오를 내내 듣다 왔는데 여진씨 프로 되려면 아직 먼 것 같더라.”
“무슨 말이에요. 새삼스럽게. 방송을 배운 적이 있어야죠. 당연히 아마추어인걸.”
“그래도 경력이 있는데. 이 방송하기 탐탁지 않은 거죠? 목소리는 자꾸 높아가고 하기 싫은 거 억지로 하는 게 티가 납니다.”
연어 초밥을 먹으려던 그녀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린다.
“그러게, 눈치 챘구나. 정말 하기 싫어요, 근데. 그렇다면 야단맞을 일 아니에요.”
“여진씨에게 민감한 사람이 나 말고 또 누가 있겠어요. 난, 그런 여진씨가 마음에 드니까. 걱정 말고. 사람 같잖아요. 그리고 참, 경력을 차분히 쌓다가 저희 회사로 오시죠. 우리 국장이 여진씨를 잘 봤더라구요. 보는 눈은 있어서. 하하하 ”
“암 그러게 보는 눈은 있군요. 그런데 제가 거기 가서 뭘 하게요.”
“ TV 개국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정말요? 굿 뉴스네요. 하지만 전 TV 체질 아니죠. 화면에 얼굴 광고하는 거, 일찍부터 사양이에요. 다른 분 알아보시죠.”
일간지에서 TV 개국을 준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며 그녀는 마음이 따스해진다. 본국의 일간지 기자였던 지사장은 낯선 땅에서 하루하루 버거움을 감내하면서 교민들의 영역을 확장해나가는 일에 몸을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이다.본국에서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말을 잊지 않으려 이민 2세에게 한국말을 가르치고, 그들의 미디어를 만드느라 애쓰고 있다. 공항에 내리니 단돈 35불이 전부였다던 이민 일 세대, 교민회 회장은 치기공사 기술을 배워 이젠 직원을 여럿 둔 사장이 되었다. 그들의 삶의 과정은 그녀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초밥을 먹고 리가 준비해 온 커피를 마신다. 생각에 잠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가 말한다.
“타이밍이 좋지 않은 건 알지만 물어 볼 게 있는데 대답해 줘야 합니다.”
“가벼운 것만요. 복잡한 건 싫어요.”
가볍게 도리질을 하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응석이 섞인 어조가 되는 걸 스스로 느낀다.
“그래도 한가진 꼭 알아야겠습니다. 수속이 잘 안 되고 있는 거 맞죠. 내가 뭐 도와줄 게 없을까요. 아니, 솔직하게 물을게요. 여진 씨 수속이 안 돼 돌아가는 일은 없는 거죠? 난 한국에서 거부당한, 희망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러니 여진씨도 여기 있어야 합니다.”
“……”
“서류상으론 깨끗하게 정리가 됐더군요.”
“선배, 내 뒷조사를 했어요?”
“ 미안한 일이었지만 본의는 아니었어요. 우리 소문이 파다하니까 아버지가 알아 보셨던 모양이에요.”
“그 집, 랜트비가 감당이 되요? 방송국 수입이야 빤한 거고, 지금 렌트하는 사람들도 없고 한겨울에는 연료비도 많이 들 텐데, 방이 열 개나 된다면서요. 이참에 정리하면 어떻겠어요.”
예상치 못했던 리의 질문에 그녀는 순간, 당황한다.
“걱정은 고마운데 제게 생각이 있어요. 알아서 할 거에요. 그런데 어디서 그렇게 소상히 들은 거죠?”
“그 집이 교민회 회장 친구 집인 건 다 알지요. 회장이 걱정을 합디다. 방송국에서 더 일하려면 확실한 신원 조건도 갖춰야하고.”
그녀를 지나칠 정도로 염려하게 되는 말을 주변에서 자주 듣게 된 것은 남편이 본국으로 돌아가고 나서부터였다. 국장도 아들이 살고 있던 집이 이 년 동안은 비어 있을 것이니 집을 정리하고 그곳을 사용하라고 했다. 교민회 회장, 별명이 스피커인 그가 어떻게 떠들고 다닐지는 불을 보듯 훤했다. 그러나 리의 순수한 걱정만은 그렇게 받을 수가 없다. 갑자기 그녀의 마음, 저 깊은 곳에 무수한 물방울이 방울방울 맺힌다. 리가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쓸쓸하고 시린 등을 쓸어 준다면 오래도록 리의 품에 안겨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사는 것에 대한 걱정이야말로 삶의 한가운데 서 있을 때에야 할 수 있는 일인 것을. 이만한 일로 리에게 안길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은 홀로 견뎌야 하는 사막의 시간이다.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시간이 벌써 다 됐네요, 큐 사인 들어 올 시간이에요. 초밥 잘 먹었어요.”
그녀는 벌떡 일어서서 총총 걸음으로 현장을 향해 간다. 결국 신임 회장은 현 회장단에서 밀었던 인물이 당선됐다. 당선자의 소감까지 방송하고 나자 시간은 열 한 시가 조금 넘어 있다. 그녀는 새벽 방송까지 마치고 나서야 잠자리에 든다.
아침에 그녀는 박과 여학생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다. 최가 본국에서 온 방문자들에게 비자를 만들어 줄 수 있다고, 한인 식당에 소문을 낸 뒤 여러 사람에게 돈을 받아 자취를 감췄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가끔 일어나던 일을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그런 일을 그녀의 집에 묵던 사람이 저지르다니, 그녀 가슴이 방망이질 친다. 다행히 박과 여학생에게는 피해가 없었지만, 최가 여학생에게도 돈을 빌리고자 했으며, 박에게도 역시 미국 비자를 내주겠다고, 사람을 소개시키며 수수료를 챙기려고 했던 것이 확인 되었다. 벼룩의 간을 빼먹지, 불법 아르바이트로 랭귀지스쿨 학비를 마련하는 여학생과 그녀의 집에 빌붙어 의식주를 해결하는 신세의 박에게 돈을 갈취할 생각을 하다니. 그녀는 최가 과장이 심한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믿기 어려워 오금이 떨려 왔다.
그녀는 마트에 가서 부식을 배달시킨 뒤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월드코리아 장부를 기업인 회장에게 주어야겠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 안 좋은 일이 터지면, 조급해지는 것인지 그녀는 뭔가에 쫓기는 불안한 심정이 되었다. 그녀가 뒷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서자 낯선 사람들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얼른 보기에도 다섯은 넘어 보였다. 그녀는 앞을 막아서서 변명하는 박을 그대로 지나쳐 빠른 걸음으로 복도 끝에 있는 방 앞에 섰다. 그리고 방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방안은 옷가지며, 이불이며, 피난민 방이 따로 없었다. 그녀는 홱 돌아서서 뒤따라 온 박에게 소리쳤다.
“도대체 내 집에서 뭘 하는 거예요. 내 집에서 사기를 치고 달아나지를 않나, 빈방에 사람을 들여 돈을 받질 않나. 지금 이 짓거리가 사기죄에 해당되는 걸 모르고 했다고는 하지 않겠죠?”
“스텔라씨. 그게 아니고, 진정하시고 좀 앉아서 제 말을 들어 보세요”
“처음에는 잔디를, 주방을, 그 다음엔 방을 빌려주고 있었나요? 당신, 돈 밖에 모르는 사람이잖아. 내 눈을 속이며, 사람들한테 돈을 받고 비어 있는 방을 쓰게 하는 걸 내 눈으로 다 봤는데 아직도 내가 들어야 할 말이 있어요?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요? 여자 혼자 이집을 건사하니까 우스워 보이냐고. 경찰을 부를 거야. 경찰 부르기 전에 당장 내 집에서 나가줘요. 나가라고요.”
그녀는 박의 방문을 열고, 닥치는 대로 박의 옷가지며 책을 복도로 내던졌다. 그녀의 놀람은, 공포감으로, 공포감은 이어 사람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의 연쇄반응으로 나타났다. 마구잡이로 물건을 집어 던지는 그녀에게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나서서 말했다.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죄송합니다. 저희가 갈 데가 없어서 공원에서 자고 있는 것을 보고 이 분이 저희를 이리로 데려 왔어요. 저희가 오지 말았어야 하는데 돈이라니요. 먹여주고, 재워주고 이분이 다하셨는데……”
악다구니를 쓰던 그녀는 그 말을 듣자 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네. 당신이 뭔데 내 집에서 그런 일을 내 동의도 구하지 않고 하는 거예요. 여기가 무슨 자선단체예요? 랜트객이 없어 이 덩치 큰 집 랜트비를 제대로 못 내고 있는 거 알기나 해요. 동포라는 이름으로 내 집에 와서 뭐든 앗아 가려는 사람들. 이제 지긋지긋해. 다 필요 없어. 나가요. 이 사람들 다 데리고 당장 여기서 나가요.”
이층으로 뛰다시피 올라 온 그녀는 도저히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서 국장에게 이 상황에 대한 조언을 들을까 망설이다 두통약을 찾아 먹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무서웠다. 방문자 신분으로 사는 이 땅, 복병처럼 숨어 있는 돌부리에 언제 걸려 넘어질지 모르는 이 낯선 땅이 무서워 사지가 벌벌 떨렸다. 이곳에 와서 사는 이민 일 세대들의 삶도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아 성공한 몇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리 최상의 것을 누린다 해도 타국인들은 여전한 곁방살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들의 안쓰러운 모습을 통해 그녀는 날이 갈수록 체감하고 있던 터였다. 침대에 모로 누워 머리끝까지 시트를 뒤집어쓰고 애써 잠을 청하지만, 잠은 쉬이 오지 않는다. 그때 누군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방문을 두드린다.
“스텔라씨. 잠깐 좀 나와 보세요.”
박의 목소리였다. 그 밤에 누구도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그녀가 아무 기척을 내지 않자 다시 문을 두드린다. 그제야 그녀는 무거운 몸에 나이트가운을 걸치고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는다. 박이 다탁위의 따듯한 차를 건넨다.
“이거 마시면, 좀 괜찮아 질 겁니다. 미안 합니다. 놀라게 할 생각이 아니었는데.”
박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는 것이 정말로 미안한 기색이다. 하지만 한 치 사람속을 어떻게 알겠느냔 말이다. 최도 정중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사람이 무섭다. 근사하게 자신을 치장하고 다가서서 속이려 들면, 속을 수밖에 없는 , 낯선 이에게 방을 임대하는 것은 너무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여기, 이 먼 나라까지 와서 도대체 나는 뭘 하고 있는 건가? 남편은 왜 이혼서류를 갑자기 보낸 것일까? 정말 그 방법밖에 없었던 것일까? 꼭 필요할 때 한 번도 곁에 없는 사람. 그녀가 남편을 못견뎌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박에 대한 화가 남편에게로 옮겨간다. 그녀는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안전한 내 나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왜 불러냈어요.”
잔뜩 뜸을 들이던 박이 입을 뗐다.
“……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이야길 해야 하나. 사실은 나 스텔라씨 남편 분 친구입니다. 그 친구가 절 여기로 보낸 겁니다.”
처음에 그녀는 박의 말을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뭐라구요? 그걸 저더러 믿으라는 건가요? 그렇다면 남편이 기별을 했겠지요.”
“여기 와서 보니 그 친구가 날 왜 그렇게 이곳으로 보내려 설득했는지 이해가 돼요. 스텔라씨 혼자 있는 것이 불안했던 거겠지요. 원래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설명하는 친구가 아니라서.”
그녀의 커진 눈을 보며 박은 사진집을 그녀 앞으로 밀어 놓는다.
“제 직업이 사진 작업 하는 사람입니다. 속이려고 속인 게 아니고, 제가 누구란 걸 알면, 아무래도 더 신경이 쓰이실 거고, 하시는 일도 있는데, 불편해 하실까봐서요. 또 친구 말이 우렁 총각 행세를 단단히 하라는 당부였어요. 스텔라씨를 속인 게 안됐지. 전 나름대로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그 친구, 한동안 못 봤었지요. 군대 제대하고 몇 번 못 봤는데 전시회 때 찾아왔더라구요. 느닷없이 찾아와 제가 사진 작업한 것을 봤다며, 타국에 사진을 찍으러 가지 않겠느냐고 하더군요. 숙식은 해결이 될 거라면서, 그 친구 주제까지 정해줬어요. 생각해보니 적절한 작업 같았고, 덕분에 작업 많이 했습니다. 한국의 경제사정이 나쁜 건 알았는데 밖에서 느끼는 체감 온도는 훨씬 낮더군요. 공항이나 공원, 한국인 식당에 가보면 온통 한국 남자들 천지에요. 아무 대책 없이 무작정 관광비자로 나와 떠돌다 불법체류자가 된 사람도 많고. 기회를 봐서 국경을 넘어가 거기서 미국 비자를 만든다는 사람도 있고. 사진 찍는 동안 그네들의 삶이 참 아팠습니다. 나 자신이 주제와 동일시되는 경험을 하려고 노력했고, 오 갈 데 없는 사람을 만나면, 스텔라씨 모르게 빈방에 재우기도 했습니다. 날도 찬데 공원에서 자는 사람을 두고 올 수가 없었어요. 나를 스텔라씨가 싫어하니 의논도 할 수 없었고. 미안 합니다. 이제 돌아가려고요. 가자마자 전시일정을 잡을 겁니다. 스텔라씨 사진도 틈틈이 찍어 봤는데 허락하신다면, 홍일점으로 전시해 보려구요. 전시회 제목은 ‘자전거 타는 남자’로 할 생각입니다. 나름대로 도와드리려 했는데, 결과적으로 별로 도움이 못 되어 드린 듯해 친구한테 면목이 안서네요.”
박은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진 작가였다. 박의 말을 들으며, 어느덧 그녀안의 따스한 것들이 스멀스멀 흘러나와 바다를 이룬다. 그리고 그 따듯한 것은 남편에게 그녀가 소외되었다고 생각 될 때 마다 생긴 수많은 가시들을 뽑아내고 있었다. 박을 이곳으로 보낸 것. 그것은 입국을 거절당한 남편이 아내를 타국에 볼모로 잡혀 놓고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을 것이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때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한 남편, 늘 그녀와 어긋나던 타이밍의 남편이 그렇게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생각하고, 움직였을 지가 한순간에 그려지면서 그날 밤, 그녀는 더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려야 했다.
11
스텔라씨, 눈이 와요. 눈이에요. 여학생의 들뜬 목소리에 그녀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난다. 크리스마스이브인 오늘, 정말 눈이 온다면 그녀는 거리로 취재를 나가야 한다. 이십일 년 만에 도시가 화이트데이가 될 거라는 기상예보가 있자 백화점에서는 발 빠르게 판매 촉진을 위한 갖가지 이벤트 상품을 내걸었다. 그녀는 거실로 나와 테라스에 선다. 소담스런 함박눈이 펄펄 내린다. 눈은 밤새 내렸던 모양으로 정원에 소복이 쌓여 있다. 부지런한 박이 현관에 길을 내느라 부산하다. 그녀는 박이 구워 놓은 토스트와 커피로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선다.
“길도 미끄러운데 제가 모셔다 드릴까요? 여왕마마가 어떻게 이 눈길을 걸어가시겠습니까?”
“자전거로 데려다 주겠다는 말이죠? 오늘 같은 날은 대중교통을 이용해야죠.”
눈 탓일까? 박의 과장 섞인 말도 선선히 들린다. 지내볼수록 의지가 되는, 자신의 쓰임을 알고 움직일 줄 아는 사람이다.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길은 고즈넉하다. 이따금 가지에 앉았던 새들이 날아오르며, 가지위의 눈을 턴다. 부츠를 신은 정강이까지 푹푹 빠지는 눈을 즐기며, 그녀는 모처럼 아름답다는 말을 떠올린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만난 눈으로 인해 그녀의 마음도 설렌다. 버스 안에서 리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는다.
“굿모닝. 화이트 데이. 어디쯤입니까. 지금 방송국 근처인데.”
“오 분 거리에 있어요. 이렇게 일찍 무슨 일로 오셨어요?”
“얼굴보고 이야기합시다. 스타벅스에 있을 게요.”
그녀는 사무실에 들어가 K주와 방송 스케줄을 짜고 스타벅스로 간다. 리는 가게 앞에서 눈을 맞으며 서 있다.
“애들도 아니고 눈이 와서 온 건 아니죠?”
그녀가 웃음을 띠며 농담을 건넨다. 리가 그녀에게로 다가와 주머니의 손을 꺼내 그녀의 뺨을 감싼다. 친근해지기 전에는 기습적인 리의 행동이 몹시 싫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이런 리가 싫지 않다.
“뺨이 참 이쁜 거 알고 있습니까? 여진씨가 김은애 공연 때, 사회 보는 모습을 봤어요. 무대 위에서 뺨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더군요. 얼마나 이뻤던지. 좁은 동네인 이곳에서 처음 보는 얼굴인데 누구일까, 정말 궁금했어요.”
“어른에게 볼이 이쁘다니요.”
“이쁜 걸 이쁘다고 하지 뭐라고 그럽니까? 이거 크리스마스 선물입니다. 앙드레가뇽을 좋아하는 것 같아 1집부터 8집까지 다 샀습니다. 육개월치 점심 값, 다 털었으니 날마다 점심 사세요. “
“ 전 선물 준비 못했는데”
“그거 잘 됐네. 선물대신 제 말을 들어주시죠. 아버지가 여진씨 팬인 건 알죠? 가까운 날에 아버지를 만나줘요. 하실 말씀이 있으시답니다.”
“ …… 앞으로 더 바빠질 것 같은데.”
“ 그래요. 연말 지나고 새해에 자리를 만듭시다.”
“……”
“ 아, 그리고 공적인 일인데 오 의원 자료 아직 가지고 있죠? 그거 우리 신문사에 넘기죠. 국장이 그걸 터트릴 시점이라고 자료를 모으는 눈치라서. 여기서 날려 보려구요. 혹시 본국에서 홈런을 쳐서 승진이라도 할지 알아요?”
“그 건에 대해 아무 것도 묻지 않더니. 무슨 일 있어요.?”
“지금 여성단체에서 오의원 추문이 모락모락 흘러나오고 있는데 터져서 김이 새기 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걸 먼저 날려야죠..”
“ ……”
“왜, 문제 있습니까?”
“그 파일, 제가 가지고 있지 않아요. 이미 삭제했어요.”
“아니, 그 파일 어렵게 만든 게 얼마나 됐다고 삭제라니요. 납득할만한 이유를 대야지.”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꼭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었어요. 더 이상 묻지 말아줘요.”
눈이 펄펄 내리는 풍경 한 가운데 리를 두고 그녀는 돌아선다. 리의 따가운 눈빛이 그녀의 등을 금세라도 관통할 것 같았다. 일상 어딘가에 숨어 있다 예고 없이 출현하는 복병, 그때마다 미묘하게 달라지는 사람들과의 관계. 그녀가 생각 안에 말을 입 밖으로 함부로 내지 못하는 이유고 타인에게 사적으로 불친절해지는 이유였다. 이원 생방송으로 눈 풍경을 방송하는 그녀의 마음 안에는 종일 진눈깨비가 내린다. 그때, 그녀가 오 의원 일을 의논하려고 했을 때 리가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들어주었다면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이젠 더 이상 선택의 여지도 시간도 없다.
12
박과 긴 시간, 말을 나눈 그녀는 박이 일층으로 내려 간 뒤 주방에서 치즈와 먹다 남은 포도주를 찾아낸다.
고작 두 잔 마셨을 뿐인데 리의 얼굴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터질 듯 클로즈업 되어있다. 그녀의 슬픔에 주의를 기울여 주었던 타인, 기꺼이 그녀를 위한 비무장지대가 되어 주었던 리. 그녀는 수화기를 들고 번호를 누른다.
“헬로우? 여보세요?”
리의 목소리, 리도 아직 잠들지 못한 것이다.
“나예요. 여진이. 지금 이리로 와 줄 수 있어요? 아니 통화만 하는 게 낫겠어요.”
“무슨 일 있어요? 아까, 낮엔 미안했어요.”
“……,”
“가끔 여진씨는 먼데 사람 같아요. 그게 더 서운했습니다. 한 번도 내가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해주지 않으니까. 내가 보고 있는 만큼, 여진씨도 분명 날 보고 있는 건 알겠는데, 어떤 때는 여진씨가 나를 버린 한국보다도 더 멀게 느껴져요.”
술 탓이었을까. 나직한 리의 목소리를 들으며 참을 수 없게 눈물이 복받친 것은 그때였다. 한동안 숨죽여 우는 그녀의 울음소리를 듣던 리가 말한다.
“지금 우는 거 맞죠. 슬퍼서 울고 있는 걸 텐데 왜 난 기분이 좋은 거죠. 앞으로는 평화 시에만 무장해제가 아니라 비 평화시에도 무장 해제하겠단 뜻으로 들려서 그런가 봅니다. 오늘 하루 종일 생각해 봤는데 우리가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답보 상태에 있는 것이 바로 그것 때문이더군요. 여진씨가 편한 말만 골라하고 부러 명랑한 척 하는 그거요.”
“미안해요,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전화 끊을게요.”
“잠깐만요, 나니까, 날 의지하고 믿어 주기 때문에 우는 거 아닙니까. 여진씨 아무에게나 울면서 전화하는 사람 아니잖아요. 꼭이 울어야 한다면 내 앞에서만 울어야죠. 내가 그리 갈게요. 보고 싶어요. 아까, 돌아서면서부터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어요.”
“아니, 오지 마세요. 미안해요. 정말, 선배에게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미안해요. 날 이해 못해도, 날 이해해도 난 많이 미안할 거예요.”
그녀는 수화기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그녀의 카피사건 뒷배경에는 오의원의 정치 후원금을 대는 경쟁 패밀리사가 연루되어 있었다. 그녀가 21세기 클럽에 가입을 거부하고, 오의원 경쟁 계열 회사의 스카웃 제의를 거절하자 파렴치하게 그녀에게 되갚은 것이다. 그들을 거절하는 사람들을 용의주도하게 몰아내는 그들의 방식. 그녀도 오 의원이 그녀에게 했듯이 그것을 되갚아 주고 싶었다. 취재 과정에서 그녀는 경악했다. 오의원의 패밀리는 이미 부패할대로 부패해 있었다. 그녀는 매스컴에 그녀가 취합한 오의원의 추잡한 짓거리를 열람시켜 되돌려 갚아 주고 싶었다. 오 의원이 무너지는 것을 보는 것, 그녀가 겪은 방식대로 갚아줘야 세상의 형평성에 맞는 것이라고 마음을 다지던, 그녀는 그러나 다른 결정을 내렸다. 그녀 때문이기도 했지만, 남편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는 오랜 고민 끝에 회사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직 다시 소속될 곳을 찾지 못한 남편에게 돌아가야 한다면, 그녀라도 돌아가야 할 곳이 있어야 했다. 일정이 예정보다 당겨진 건 리가 전한 오의원의 추문 때문이었다. 오 의원과의 딜은 오의원이 건재해야 지켜질 것이다. 그녀는 오 의원 파일을 본국에 일간지 정치부 부장에게 송고 하는 대신 오 의원의 딸을 키우고 있는 민예랑을 만났다. 그녀는 오의원이 자신의 집에 초대한 이유를 짐작하게 되었다. 민예랑은 오 의원과 그녀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딜은 성공적이어서 그녀는 전 회사에서 복귀를 요청하는, 또한 그녀의 카피 혐의가 무혐의 처리되었다는 정중한 사과의 메일을 받았다.
13
공항에서 그녀는 막 도착한 무수한 한국남자들을 만난다. 하나 같이 비슷한 피로감. 주류에서, 익숙한 삶의 방식에서 밀려난 유랑인의 초조함이 배어 있는 얼굴이다. 신정부가 들어서서도 여전히 사회보장비는 OECD 회원국 중 하위 수준에 머물고 있다. 어느 나라에도 없는 삼학도, 사오정, 오륙도의 신종어를 만들어 내며 밖으로밖으로 밀어내는 국가의 남자들이 달랑 배낭 하나 들고 찾아오는 이곳. 투자 이민이 손쉽다는 질 나쁜 브로커에 속아 방문객의 신분으로 가진 돈 전부를 권리금이 디포짓 보다 더 비싼 그로서리를 인수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운 좋게 리처럼, 국장처럼 사심 없는 손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잊지 말 것은 발 딛고 선 어느 곳이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양새는 비슷해서 권모술수와 순진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게 될 동포여. 모쪼록 건투를 빈다. 그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이 숙연해진다.
비행기가 육중한 동체를 움직이며 서행한다. 뒷일은 박이 꼼꼼하게 정리 할 것이고, 여학생은 어제 먼저 떠났다. 얼굴을 보면 그녀가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은 국장과 리에게는 메일과 오의원 파일을 남겨 두었다. 국장이 당장은 납득을 못해도 그녀를 이해하게 되고 말 사람이지만 리는 어떨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강해 보여도 이미 성장과정에서부터 상처를 면할 수 없었던 사람. 어쩌면 그녀는 그런 닮은꼴에 마음이 쓰였는지도 모른다. 오의원의 파일이 리가 애증의 땅이라 부르는 그 땅으로 귀환할 수 있는 역할을 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녀는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시야 가득 들어찬, 불빛이 반짝이는 비오는 시가지를 바라본다. 그날 밤, 그녀의 눈물이 리에 대한 마지막 예의였다는 것을 리는 알게 될까?
리. 타성을 극복하는 방법을 아직도 배우지 못한 나는 새로운 타성에 젖게 될까봐 두려웠던 가 봐요. 그곳과 함께 당신, 사막 같은 내 생, 그 순간의 오아시스 같은 것이었다고, 그러나 오래도록 아픔으로 기억하게 되겠지요.
핸드폰 벨소리가 울린다. 박이었다.
한 달 후엔 저도 서울에 가겠네요. 집주인과 통화했는데 잘 정리될 것 같습니다. 친구가 공항에 나올 겁니다. 친구 하나는 잘 뒀다며 크게 한 턱 단단히 쓴다네요. 그럼 후에 뵙시다. 핸드폰의 전원을 끄고, 그녀는 내내 불편한 심정을 오의원의 치부를 팔아 본래 그녀의 것이었던 것을 되찾은 것이라고 애써 위로한다. 한치 앞을 못 보는 경제 환란 중에 그녀만이라도 살아남아야 했다고, 또한 오 의원의 정치적 생명은 그녀가 아닌 그 누구라도, 아니 당장 기업인 협회회장과 리가 단죄할 것이라고, 애써 자신을 달랜다.
그러나 그녀. 그 불편함의 정체가 자신이 동포의 돈을 가로채 달아난 최나 오 의원과 다르지 않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오래도록 부끄러움을 지병처럼 지니고 살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한다. 나직이 그녀는 중얼 거린다. 오 의원과 딜을 한 나는 오래도록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라고. 한숨을 내쉬는 그녀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인천 공항에서 마중 나온 ‘형제’를 만나면 뭐라고 해야 할까. 당신이 친구를 보낸 그 최상의 배려가 내가 멀리 있는 타자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느냐고, 이제 당신 곁으로 가는 나를 타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다시 소외 시키겠느냐고, 물어야 하는 것일까. 자가용보다는 자전거를, 자전거보다는 도보이용이 세상을 딛는 확실한 자신의 방식이라고 믿는 남편. 방문객으로서의 여정을 마치고 안전하게 돌아왔다고, 사막을 견딘 선인장이 되어 다시 전쟁 같은 일상을 치뤄 낼 비장함을 무기로 가져 왔다고. 아니, 마침내 당신의 그 아랍어 같던 ‘언어’를 이해하게 되었노라고 말해주어야 하나.
기내에는 때마침 선곡된 남편이 좋아하는 앙드레 가뇽의 마이 퍼니 발렌타인의 첫 음이 울려 퍼진다. 떠나왔던 곳으로 귀항하는 대한항공 보잉 747기가 이륙할 차비를 마치고 허공을 향해 솟구치는 시간이다.
첫댓글 선생님 1000만원이에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