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무명 독립애국지사에 대한추모시追慕詩-이민영
정암은 기미독립선언민족대표 33人중 최고령자이다 이후 고려혁명위원회(고려혁명당)를 창설 국내및 만주에서 독립투쟁하였다,
정암 이종훈선생 추모追慕시
천년千年신라의 열정熱情 내사령公 휘광아래로
대동(大東)의 갑우가(甲又家) 화룡봉-광릉 삼익(三益)의 현절이여
생원공 인자(仁慈)를 닮은 현칙의 가르침
송악(松嶽)의 푸른 장송 그 절개 판서공(公)의 지절(志節)인데
아서라, 동방(東邦)의 빛나는 촉등
조선(朝鮮)이름 드세일 때 빛나는 이여
오위장군(五衛將軍) 諱찬종公 家에
누대 천년 봉공(奉恭) 장휘(畏琿)에
백야청청으로 지핀 이름 기미 민족 대표
정암 공公 諱종훈 선고이시니
사모관대 옷고름 고치어 필운학당을 (同門)동문할 때
이강 윤치소 오세창 권동진은 공公의 (朋友)붕우였고
말을 달려 南北을 휘돌 때
손병희.한용운.이승훈.서재필은 님 동지였으니
이천만 신민은 황제와 님의 동지
지성의 공경은 (皇城)황성 향한 맹세- 외길 生입니다
방방(邦邦)을 울리는 대한독립
태화관으로부터 치는 오등의 물결
세상밝히어 선두에 이름 높으니
세세(歲世)로 이어오는 절개라는 이름
천만리 머나먼 사랑도
고운님 곁이라 솔솔 불어옵니다
나라도 돌아서서 포효하고
싸워온 (武魂)무혼도 되돌아 님 도우며
뱃길 천리 파고(波高)높던 하얼빈의 섧은 피떵이
님의 조선(朝鮮)이듯
걸음발마다 눈물로 뭉쳐친 용정의 누심(漏心)은 이역, 하늘일진데
옷자락 아래로는 조국의 서러운 혈(血)의 누(淚 )
눈물로 강토를 채우고 또 채웁니다
탑골에 혼을 깨우는 탑돌이같은 반복의 회향(回鄕)
어제를 돌보는 청춘의 그리움,
이, 였으며
누세월 흐른동안 님은 대-韓의 동지
세월에 이름으로도 대-韓의 아들이였으며
내祖國 만만세세(萬萬歲歲)라 이야기합니다
섧게 이어진 세월은 그대의 하루.
세월같은 광복의 여정은 선구의 햇불.
이름으로도 대한 독립만세인 것을
이천만 동포여 이루리라,
장백 벌에, 토문에, 송화에, 압록에, 방방(邦邦)으로 내 달려온 사랑아,
발굽 아래 헤진 저 백두산녘 석양의 혜란강,
눈가 이슬에 머문 두만의 江울음으로도 서러운 것을,
그리워 산녘에 드리운 빛서린 만주 벌이여,
살자던
용정하늘은 조국산천 경(景)에 희부연 구름인 것을,
항성은 이역 하늘가에서 저물고
햇살은 님 혼(魂)자리로 누워 가고,
아직도 창가는
나라 애원소리,
위함으로 즐겨먹던 입도 굶겨 가고 ,
자던 집도 누여 보이고,
입던 옷도 내드리고,
나신(裸身)으로
마음은 그대를 담고 있었습니다.
스물 하고도 여린날
구국(求國)과 척사(斥邪)와 광정(匡正)을 외치신 님이여,
인내천의 빛은 사뇌라
인민(人民)과 인본주의(人本主義)를 외칩니다.
반도 독립은 모두의 소원
백성은 동포의 이름이라 사랑외치신 님이시여
삼천리 강산은 우리들 집이라 외칩니다
삶은 바쳐져서 우러러 보시고
우러러서 남겨진 님이십니다.
세상 오는 날, 날에도
숨죽이며 기도한 곳은,
세월이 죽고
세상이 죽고
노래가 죽고
땅이 죽어도
혼으로 살아 생명 주는 사랑
독립만이 길이라 외치신 포효는,
피의 노래입니다
오늘 삼월 일일 아침에
공을 따르는 조선의 아들들이 기도합니다
가신지 칠십삼성상 나라 이름으로 기립니다
흘리신 이름은
영명한 대-한국으로
영원히 님의 얼로 남깁니다.
강江물이 넘치고 차는 날에 영원히 貴하신 이름이여
大한국으로 남으십니다
세월이 지피는 날에 가르치신 이름이여
산천의 곳 곳마다 이 땅, 나무로 자랍니다.
이 땅 햇살로 빛납니다.
이 땅 별빛으로 비추입니다.
햇살되어,
가득하신 이 언덕의 나라에서
인자하고 거룩한 님이시여
편히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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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3인 추도식장에서,민영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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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독립선언서.국권반환 요구서,독립 통고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
홍기조(洪基兆),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권병덕(權秉悳),김완규(金完圭),
나용환(羅龍煥),이종훈(李鍾勳), 홍병기(洪秉箕), 이종일·최린(崔麟)
이승훈(李昇薰),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오화영(吳華英),
최성모(崔聖模),이필주(李弼柱),김창준(金昌俊),신석구(申錫九),박동완(朴東完),
신홍식(申洪植), 양전백(梁甸伯),이명룡(李明龍),길선주(吉善宙),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정춘수(鄭春洙),한용운(韓龍雲) 백용성(白龍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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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년 2월 9일.경기도 광주 출생 (아버지 이상재李尙載와 어머니 해주鄭사이 2남)
본 廣州, 의친왕 이강.윤치소 등과 학당동문
동학교(천도교) 입교. 경주의 최시형에게서 사사. 동학의 정신적 물질적 행위적인 지주였다.
최시형의 제자로, 손병희보다 나이가 많다. 천도교입교후 해월을 모시며 손병희와 같이 동학을 이끌었다.
기미독립선언에 천도교 대표들이 많이 참가한 이유는
이종훈의 조선독립정신에 대한 평소 언행과 지의가 영향이 있었으며, 항상 척왜와 조선인민의 평등,독립을 강조하고는 하였다
손병희.손화중과 함께 천도교를 이끌면서.
1894년 동학 농민 운동과 남접군-전봉준의 동학 농민봉기 전쟁시에는 손병희와
북접군으로 활약하였다.
이후 관군의 약속 위반으로 전봉준이 잡히고 동학운동(출처, 傳記 손병희)이 실패로
돌아가자 ,함경 경기 강원 일대로 도피하면서 지하 운동을 하였고
1898 개화 세력과
권동진,오세창,손병희등과 [갑오][임인]년 개혁 운동을 하였으며
익년,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1902년 귀국하였다.
다시, 1905년에 아들인 이관영이 이완용 암살 기도 사건및 이완용家
방화 사건에 연루, 체포 구금되기도 하였다,
1898년 6월 천도교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이 경성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자,
옥리를 매수하여, 시체를 빼내어, 광주에서 장례를 치렀다,
이후 천도교 인사들이 독립선언에 참가하는데, 정신적 역할로 참가를 이끈 자이다.
전재산을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 동학운동에 바쳤다.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최린(崔麟)등 천도교측 중진들과
독립운동의 실천방법으로 독립선언서, 독립청원서,국권반환요구서 등을 작성하기로 하고,
거족적 운동으로 확대하기 위해 기독교·불교·유림(儒林) 등 각 종교단체를 망라하는
저명 인사들을 민족 대표로 내세워야 한다는 데 합의 추진한 바,
한때 김윤식(金允植)·박영효(朴泳孝) 등 인사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여
이 운동을 포기하려고 하였으나, 고종의 붕어(崩御) 소식으로
배일 감정이 절정에 오르자, 이들은 다시 회합, 이승훈(李昇薰) 등 기독교 측과
한용운(韓龍雪)등 불교 측과 서로 합의하였다. 초기 독립선언서는 이승훈의
독립 건의서가 주장이 약하고,독립 주장 의지가 약함에, 손병희.최린등이
강력한 자주의지. 비폭력. 평화. 민족자결, 자강 원칙을 담는 내용으로
전면 수정하였다. 최린은 독립선언서의 작성자로
최남선을 추천, 기초하고, 공약 3장(公約三章)은 한용운이 추가하였다.
이렇게 하여 작성된 독립 선언서는 천도교측 15명, 기독교측 16명,
불교측 2명 등 33명의 민족 대표가 2.25 비밀 회합시에 모여 서명하고 보성사(이종일)
에서 인쇄 2월 28일부터 전국에 전달, 배포되었으며
거족적 3·1운동의 전개에 결정적 구실을 하였다.
1762자로 된 이 독립선언서는 인도주의에 입각한, 비폭력적·평화적 방법으로
민족자결에 의한 자주 독립의 원칙을 제시하였다
민족 대표중 가장 년장자로 당시 나이 63세로 33인 대표로 참가, 1919년.3월 체포 되어 2년 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고,출감후에 이종일 등과 함께 1922년 3월 1일
천도교 단독 제 2의 3·1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했으나 발각, 실패했다.
1922년 7월에는 지하독립 운동단체인
고려 혁명 위원회(高麗革命委員會) 창설, 고문(임시 의장)으로 추대되어 지하 운동하다가
조직원과 함께 노구를 이끌고 만주로 가서 고려 혁명당(高麗革命)을 조직,
무장독립 운동을 돕고, 조선 청년 교육에 헌신하다가
간도 용정에서 전투후유증으로 병을 얻어 환국, 바로 사망했다.
형제로는, 李錫周와 李錫河가 있으며, 형제들은 동학교에 입교하고
각종 개혁운동에 종훈과 함께 참여 했으며.
양평 일대에서 동학 간부로서 항일 운동에 참여하고
3.1 만세 운동에 참가하고 타계히였다.
선생의 婦人은 파평 尹致道(전대통령 윤보선의 아버지 윤치소의 형)의 여식이다.
1962년 건국 훈장이 추서되었다.
선생의 아들 이관영(일명 東洙, 부인은 의암 손병희선생 딸. 손관화여사)
은 서울 원서동 출생,
19세에 일본에 유학, 같은 유학생인 권동진 오세창 이광수등과 교유하였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귀국하여
을사 적신(敵臣)매국노 이완용을 암살 (기도) 실패하자
이완용 家를 방화하였다.
이에 관헌의 추적을 피하여, 경기 양평 일대로 도피 중
1908년 형제인 李永洙, 이漢洙들과 의병을 모집하고
의병장이 되어 활동타가, 1908년 10월 19일부터 10월 21일까지
경기 용문산 전투(일명 피의 전투)에서 왜군 헌병대와
교전중, 鄭모.梁모씨라 불리우는 동지들과 함께 총살당하였다.
정암의 손자인 이태운李泰運 (이관영의 아들), 보성전문 재학중(현 고려대의 전신)
급우이자 이모부인 소파 방정환 등과.이錫周 이錫河 할아버지 형제의 손자
뻘형제 들과 함께 (민족,농촌계몽 운동)을 전개하였고
2.28에는 민족 대표들 비밀 회합시 경비. 선언서 등사,
국내 독립지사들 거사 준비 비밀 연락책, 회합장소의 경비
선언문 인쇄.배포 담당 하였다.
이종훈선생과 아들 이관영, 손자 이태운등
3대가 독립운동에 몸바친 집안이다.
대부분 이종훈.이석주 이석하家의 3대의 근친 유족들은
독립운동에 직접 참여했기에, 왜경의 탄압과 추적으로 ,
만주 ,물갈,강원도 등지로 전전하는 삶을 살았다.
출처
만주독립운동사, 한국학 중앙연구원, 삼일운동기록, 손병희전기, 최시형평전, 권동진평전
주, 고려 혁명 위원회(高麗革命委員會)
천도교 교주 손병희(孫秉熙)가 죽은 직후 1922년 천도교 중진간부들이 교주의 애국정신을
계승하여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그 조직체로서 이 위원회를 결성하였다.
고문에 이종훈(李鍾勳), 위원장에 홍병기(洪秉箕), 부위원장에 최동희(崔東曦)를 선임하고,
다음과 같이 각 부서를 결정하였다. 비서 송헌(宋憲), 외교부장 최동희, 해외조직부장 이동락(李東洛),
해외선전부장 김광희(金光熙), 해내조직부장 이동구(李東求), 해내선전부장 김봉국(金鳳國),
재정부장 박봉윤(朴奉允)이었다.
이와 같이, 부서를 구성한 뒤에 최동희·김광희·김홍종·강희도는 연해주방면으로
이동락·김봉국·이동구는 만주방면으로 건너가 각 민족단체와 연락하여 활동하기로 하였다.
고려 혁명 위원회(高麗革命委員會)는
만주로 건너간 이동락·김봉국·이동구 등은 각지의 단체 대표들을 규합하여,
1926년길림(吉林)의 양기탁(梁起鐸)의 집에서 민족운동 지도기관으로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결성하고 나중에는 독립군 정의부와 함께 무장독립운동을 하였다
고려혁명당은 정의부(正義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