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레이시아 기행문
(작가:이영주)
여행참가자 : 이종언(43세),문애숙(41세),이영주(11세)
2000년 7월 16일 일요일...아빠와 엄마 나 우리가족은 지하철(5호선)을 타고김포공항에 갔다. 난 외국여행은 처음이다.
아빠께서 말세이시아에 대하여 떠나기전에 공부를 하고 가는 것이 그 나라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하여 나는 엄마가 구해온 나운영언니가 지은 『배낭여행 이모저모』읽었다.
그 책에서 말레이시아의 역사와 기후그리고 그곳에서 금해야 할것등에 대해 알게 되었다.
말레이시아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를 했던 것 처럼 영국의 식민지 생활을 오래 했고, 그래서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영어를 많이 쓰고 있으며, 그리고 우리나라 보다 1시간이 늦다 -우리나라가 3시면 거기는 2시란다.
인구는 말레이인이 50% 중국인이 30% 나머지 20%는 인도인등인데 우리나라 사람도 3000명 가량이 산다고 했다.
참 우리이모도 말레이시아의 서울인 쿠알라룸프의 한인촌 (암팡)에 살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동남아시아에서 싱가포르와 함께 가장 잘사는 나라이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KLCC빌딩이 있는 나라다.
석유와 천연가스 그리고 고무등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이며 사람들도 교육을 많이 받아서 사회질서가 잘 되어 있는 나라라고 한다.
공항에 가는동안 나는 엄마와 영어회화도 하면서 말레이시아 말을 몇가지 외웠다. "감사합니다"는 "떼리 막가시", "미안합니다"는 "아파 까파".
우리는 서둘러서 우리 여행사(KRT)가 있는 곳으로 달려 갔다. 아빠는 무엇이 바쁜지 왔다갔다하며 안절부절 하신다. 아빠는 외국여행이 두번째인데 나처럼 그래도 설레이나 보다. 외환은행 창구에서 달러로 환전을 해야한다고 하시면서 돈을 바꾸셨다.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참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여행사에서 안내언니가 도착을 했다. 김명신 언니라고 했다. 여행을 하는 사람중에는 혼자서 하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나는 너무 놀라웠다. 어떻게 여자 혼자서 할 수 있을까? 나도 저 언니처럼 크면 할 수 있을까?.......
아빠는 큰 가방들을 수화물로 부치러 가는 가이드언니를 도와드렸다. 아빠는 여권을 보여주고 들어가서도 30분은 기다려야 한다고 하셨다. 공항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정말 지루하다.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면세점에서 고추장을 샀다. 비행기에 탑승하려고 줄을 서있는데 "어린이와 같이 가시는 분은 먼저 탑승하세요"라고 한다.
그 말에 우리는 빨리 비행기에 탈 수 있었다. 엄마 와 나는 같은 좌석이고 , 아빠는 복도 옆이다. 안내방송이 나왔다. 주의사항과 정각 3시30분에 출발한다고 안전벨트를 매라고 했다. 드디어 비행기가 떴다. 말레이시아로 출발..... 그리운 이모도 보고 그곳 외국인들도 만날 수 있다. 빨리 도착했으면....... 2시간이 흘렀을까 예쁜 스튜디어스 언니가 "식사는 뭘로 하시겠어요" 하셨다. 나는 밥을 먹었다. 아주 푸짐하게 먹었다. 가는 동안 음악도 듣고 비디오도 보니 지루하지 않았다.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 본 땅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구름 위로 날고 있는 기분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어떻게 만드셨을까? 화면에서는 제주도를 거쳐 일본으로 향한다는 화살표시가 나왔다. 앞으로 5시간을 더 가야 한다. 나는 잠을 잤다.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아니 벌써 쿠알라룸프르 공항에 도착을 했다.
말레이시아 공항은 우리나라 김포공항 보다 3배이상은 더 큰 것같다. 우리는 짐을 찾고 공항을 나왔다. 공항대합실에는 유니온여행사 가이드아저씨가 나와 계셨다. 그리고 이모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반가웠다. 이모는 힘들지 않았나 보다 더 예뻐진 것 같았다. 이모와 내일 만나기로 하고 우리는 호텔로 향했다. 그곳 가이드 아저씨는 우리에게 제일 큰방을 주셨다. 어린이가 있다고 여러 가지로 혜택을 주셨다.
우리는 피곤해서 잠을 자려고 했는데 이모가 왔다. 맛있는 중국음식을 사준다고 해서 우리는 따라 나섰다. 중국집은 너무 지저분해서 음식 맛이 날까 했는데 중국 죽이 생각보다 맛이 있었다. 이모는 우리를 호텔로 데려다 주고 돌아갔다.
2000년 7월 17일 월요일
"말레이시아 아침의 교통상황은 우리나라 서울과 거의 비슷하네" 하시며 아빠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잠에서 깨고 아빠에게 오늘의 일정을 들었다. 오전에 왕궁과 이슬람사원에 간다고 하셨다.
오늘 아침은 "아메리칸 스타일"의 부페였는데 나는 아메리칸 스타일의 음식에 익숙하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도 아침을 빵이나 콘프로스트등을 먹었기 때문이다. 레스토랑으로 내려가니 자리를 안내해 주셨다.
음식은 먹음직스러운 것이 너무 많았다 - 온갖 종류의 열대과일들- 아빠는 너무 많이 가져오셔서 눈치를 살피며 음식을 어떻게 해야할지 무척 난처한 표정이셨다.
그래서 내가 도와 드렸다. "아빠! 다음부턴 먹을 만큼만 가져오세요" 버리면 아깝잖아요. 아빠의 미안한 표정이 얼굴에 나타나 용서해 드렸다.
우리는 버스에 탔다. 아빠 말씀대로 가이드 아저씨는 오늘 구경할 곳을 말씀하셨다. 말레이시아 왕이 있는왕궁에 도착 했다. 그곳은 들어 갈 수 없다며 입구에서 사진만 찍으라고 했다. 나는 말을 탄 경비병 아저씨 옆에서 엄마와 사진을 찍었다. 들어 가보지 못해서 아쉬움이 남았다. 관광객들을 위해 개방하면 안될까?
우리는 말레이시아의 국교인 이슬람교의 사원에 갔다. 가이드아저씨는 우리에게 "차도르"라고 하는 옷을 입고 들어가야 한다고 하셨다. 더운나라라 옷을 길게 입는 것은 더 덥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참고 이슬람사원을 구경하기위해 입고 들어 갔다. 이상하게 기둥이 많이 있었다. 우리 교회 처럼 십자가나 의자등 그런 것은 찾아 볼수 없었다.
그나라 사람들은 금요일 12시이면 차도 운행하지 않고 이슬람사원을 향하여 기도를 한다고 했다. 우리 호텔방에도 천장에 화살표시가 되어 있었는데 그 방향을 향해서 기도를 하라고 표시된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오는 길에 말레이시아 7살 남자아이를 만났다. 우리는 그아이와 사진을 찍자고 했다. 그러나 그애는 싫다고 했다. 엄마가 사정을 해서 사진을 찍었는데 몸을 우리쪽으로 하지 않았다. 부끄러워서 그랬나 보다.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바틱을 만드는 공장에 갔다. 바틱은 말레이시아의 전통옷이라고 했다. 정장옷을 입어야 할 때 입는 옷이라고 했다. 옷을 만드는 과정은 소나무의 송진과 초를 이용하여 만든다고 했다. 앞,뒤로 똑같은 그림이어야 진짜라며 가짜를 파는 사람들이 있으니 속지 말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야 신사처럼 보이는데 바틱옷은 해수욕장에서 보는 옷같이 요란하여 신사복처럼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겐팅으로 갔다. 그곳은 카지노하는 곳이라 어른들만 들어가는데 바틱이라는 옷을 입어야 한다고 하셨다. 우리 어린이들은 가이드 아저씨가 지하 랜드로 데리고 가셨다. 거기에는 놀이기구와 게임시설이 많이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스트레스가 풀리게 놀았다.
나중에 아빠가 내려와서 아빠와 함께 게임을 하다가 그만 아빠를 잃어 버렸다. 너무 무서웠다. 10분이 지나도 아빠가 보이지 않아 울면서 말레이시아 경비원아저씨에게 가서 "where is father?" "I am korean" 이라고 영어로 말했다. 말레이시아 아저씨가 뭐라고 영어로 말하는데 무슨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때 아빠가 나타났다.
2000년 7월 18일 화요일
아침에 이모가 호텔로 찿아 왔다.
이모는 쿠알라룸프에 공부하러 와 있는데 이모 남자친구도 여기서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모집은 쿠알라룸프 시내에서 약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모는 이곳에 한국사람들이 많이 산다고 했다.
한국인 슈퍼와 음식점, 춘천닭갈비집, 노래방도 있었다.
이모집은 아파트인데 야외수영장이 있었다. 나는 수영복으로 갈아 입고 수영장으로 갔다. 거기에서 외국 아저씨가 혼자 수영을 하고 있어서 나는 영어로 인사를 했다. "How do you do" "I´m korean" "Where are you from?" 외국아저씨는 자기는 이란에서 왔다고 했고 나를 예쁘다며 수영도잘한다고 칭찬하셨다.
이란 아저씨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7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고 하셨다. 아저씨는 공항엔지니어라고 하시며 2년동안 이곳에 머무를 예정이라고 하셨다.
말레이시아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곳이라며 구경 많이하고 가라고 하셨다.
우리는 오후5시쯤 동물원에 갔다. 그곳은 우리나라의 수준에는 못미치지만 자연 그대로의 멋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인공적으로 만든곳이 대부분인데 말레이시아는 자연 그대로의 숲으로 이루어져 있어 시원하고 좋았다.
우리는 이모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좀 쉬다가 밤10시에 차이나타운에 갔다. 꼭 중국에 온 것같은 착각이 들었다. 중국집들이 너무너무 많았다. 물건을 사려고 물어봤더니 엄마는 비싸다며 가자고 하셨다. 엄마는 "우리나라 보다 품질이 떨어지는데 왜 이렇게 비싸냐며 이유를 모르겠네" 하신다. 왜 중국인들은 식당이고 상점이고 지저분한지 모르겠다. 음식은 맛있게 하는데.......
2000년 7월 19일 수요일
벌써 말레이시아에서 4일째 되는 날이다. 내가 알고 있는 말레이시아는 매일 낮에 30분정도 비가 내리고 개인다고 하던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아침부터 거센바람과 함께 소낙비가 쏟아졌다.
우리는 말라카를 가려고 했는데 망쳤다. 오늘 하루는 집에서 쉬기로 했다. 이모집에는 리마라는 가정부가 있는데 인도네시아 사람이다. 영어를 못해서 우리는 손짓, 발짓을 다 동원해 대화를 했다. 나이는 21살이고 아들이 있다고 했다. 리마아줌마와 이모의 대화는 아주 특이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 거의 원숭이가 대화하는 것처럼 했다. 비행기를 ∼뿅 ∼퓨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는 리마아줌마와 이모를 보면서 하루를 보냈다.
2000년 7월 20일 목요일
우리는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말라카를 가기 위해서 약간의 음식을 준비하여 "해변으로 가요" 노래까지 부르며 나섰다.
암팡에서 말라카는 약 3시간 거리다. 우리는 가는 도중에 『미니 동남아시아』라고 되어있는 푯말을 보았다. 구경하고 가자고 의견이 모아져 우리는 그곳을 구경하기 위해 내렸다. 날씨는 무척 더웠지만 그래도 신기한 것을 본다는 마음에 더위도 잊었다.
다 둘러본 나의 소감은 "말레이시아 왕입니다요!"
다시 달렸다. 말라카해변으로 말라카에 도착하니 중국인 거리가 보였다. 역시 지저분하고 아! 그런데 저게 뭐야 큰배가 보인다. 그것은 네덜란드함선이라고 쓰여있다. "이곳은 네덜란드가 말레이시아를 침략한 역사다" 며 엄마가 말씀하셨다.
1753년 네덜란드인들이 세웠다는 빨간색의 교회가 있었는데 너무 예뻐 인상이 깊은 교회였다. 그리고 파아란 하늘과 빨간 지붕들이 많아 더욱더 예뻐 보였다.
엄마는 너무 무리를 해서 구경을 해서 그런지 돌아오는 길에 끙끙 앓았다. 엄마가 아프지 말아야 내일 또 구경할 수 있을텐데... 2000년 7월 21일 금요일 우리가 돌아가는 날이다. 밤11시 30분 비행기로 간다.
이모는 쇼핑을 하러 가자고 했다. 우리는 아픈 엄마를 데리고 택시를 타고 센츄럴 마켙으로 갔다. 그곳이 물건도 좋고 싸다고 해서 갔다.
나는 그곳에서 얼어 죽는줄 알았다. 만약에 말레이시아를 관광하려고하는 친구들이 있다면 꼭 긴팔옷을 가지고 가라고 하고싶다. 말레이시아는 더운나라여서 모든 건물 실내의 에어컨이 빵빵나온다. 우리 이모집만 해도 에어컨이 방(3개)마다 달려 있었다.
나는 한국의 친구들을 위해 말레이시아 과자와 선물을 샀다.
이모집으로 돌아갈때는 일부러 택시를 타지 않고 지하철과 버스를 탔다.
잘은 못하지만 그래도 길을 묻는 영어는 통했다.
이모집으로 돌아오니 이모 남자친구 아저씨가 우리가 찍은 사진을 CD에 편집을 해 놓았다. CD를 컴퓨터에 넣고 틀어보니 음악과 함께 재미있는 말들이 사진과 함께 들어 있었다. 너무 좋은 선물이었다.
우리는 쿠알라룸프를 뒤로 세팡국제공항으로 향했다. 이모 결혼식때 또 가야지!
그리운 말레이시아! 안녕!
첫댓글 화들짝~~~ (놀래라 ~~**^*^) 너무 자세히 꼼꼼히 다녀왔네요... 여행기를 쓴 솜씨가 프로네요... 지금은 완전 베테랑 이겠죠? 다녀오면 또 여행기 올려주세요~~~ 좋은 작가 만나서 반가와요 ^*^
여행기 너무 잘 쓰셨군요......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