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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는 지극히 정치적이었고 예리하게 사태 판단을 할 줄 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전쟁 기간 중에는 상당한 노력을 해왔다. 우선 그는 자신이 세르비아 군 총사령관직을 맡아 실질적으로 무력을 장악했고,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인 블랙 핸드를 화이트 핸드로 무자비하게 부수어 버렸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상세히 밝힌 바 있다.
1930년대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통치자 알렉산더
절대 권력을 가진 절대 군주가 되려고 한 알렉산더의 야망은 수상 파시치와 급진당의 지원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 때문에 알렉산더는 파시치에게 많은 권력을 부여하였고 정치의 상당 부분도 그의 몫으로 남겨 두었다. 그런데 제네바 선언은 자신의 운명이 걸린 카라조르지예비치 완가의 위상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채 끝이 난 것이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격으로 알렉산더는 다른 누구보다도 신뢰를 주었던 파시치에게서 극도의 배신감을 느꼈다.
니콜라스 파시치
알레산더의 정치력은 전쟁의 종결과 함께 자연스럽게 고양되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자 각지에 흩어져 있던 망명 세력들은 자신의 본거지를 찾아 베오그라드로, 자그레브로, 규블랴나로, 그리고 사라예보로 각각 몰려 들어왔다. 통일 문제의 논의는 이제 각국의 수도를 중심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 핵심은 단연 베오그라드였다. 특히 베오그라드에서도 그 주역은 왕정일 수밖에 없었고 그 정상에 서 있던 알렉산더는 자연스럽게 향후 유고슬라비아 국가 건설의 가운데에 자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통합의 두 실세인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첫 접촉은 자그레브에 수립된 국민 회의측이 1918년 11월 8일 세르비아 제1군 사령관 페타르 보요비치 장군에게 대표단을 보내 북부 지역에 질서를 회복할 군대와 식량을 요청한 때이다. 이 요청에 따라 세르비아의 군 일부가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던 북부 지방에 파견되었으며 특히 두샨 시모비치(Dusan Simovic) 중령을 특별 연락책으로 자그레브에 파견했다.
페타르 보요비치 장군 두샨 시모비치
알렉산더는 제네바 선언 직후부터 이를 무효화하기 위한 공작을 펼치기 시작했다. 제네바 선언 일주일 뒤인 11월 16일 세르비아 국무 장관 닌치치(Nincic)는 국민 회의의 제2인자로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 인을 대표하고 있던 스베토자르 프리비세비치(Svetozar Pribicevic)를 포섭하기 시작했다. 프리비세비치는 자신이 살고 있는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 공동체가 베오그라드의 세르비아 왕국과 분리되어 소수 민족으로 전락할까 봐 크게 신경을 쓰고 있는 처지였다. 닌치치 장관은 그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제네바 선언이 세르비아 인의 분열을 노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저을 주지시키면서 제네바 선언이 궁극적으로는 무효화될 수 있도록 조처해 줄 것을 부탁했다. 프리비세비치는 국민 회의의 의장 권한대행이라는 직위를 이용하여 알렉산더의 요구를 충실히 수행해 나가기 시작했다. 국민 회의는 사실 안쪽으로부터 조금씩 무너져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닌치치 스베토자르 프리비세비치
이런 분위기 속에서 본격적인 통일 촉진의 물결이 달마티아 쪽에서 구체적으로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아드리아 해에 접한 달마티아는 이탈리아가 침략의 야욕을 보여 온 곳이었다. 이탈리아는 내심 달마티아만 정복한다면 아드리아 해를 내륙의 바다로 만들 수 있을 것이며 이는 당연히 이탈리아를 무적 열강으로 발돋움케 하는 발판이 될 것으로 계산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달마티아에 거주하던 슬라브 인은 자나깨나 이탈리아가 침략할이지 모른다는 극도의 위기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달마티아의 유일한 정치 단체였던 국민 회의 달마티아 지부는 1918년 11월 14일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자그레브의 국민 회의 지도부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인의 통일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가능한 한 빠른 시간 내에 베오그라드의 세르비아 정부측과 접촉을 해야 한다.
이 결의안의 밑바닥에는 발칸 반도를 통괄하는 단일 통일 국가만이 이탈리아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문제 의식이 깔려 있었다. 이 결의안은 이틀 뒤인 16일 자그레브에서 국민 회의의 공식 결의안으로 채택되었다. 이어 11월 19일 이를 지지하는 대중 집회가 열려 세르비아와의 협상을 즉각 시작하라는 요구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물론 국민 회의가 이러한 발전 단계를 밟은 것은 달마티아의 위기 의식도 있었지만 프리비세비치의 역할도 지대했다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 회의는 23일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기 위해 소위원회를 구성하여 전반적인 문제점을 분석했으며, 28명의 국민 회의 대표단을 베오그라드에 파견키로 결정했다. 또 이 위원회는 대표단의 활동과 관련한 기본 방침을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1. 새로 수립될 통일 국가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그리고 슬로베니아 인이 제헌 국회를 구성한 후 제헌 의원 3분의 2의 지지를 얻어 결정된다.
2. 제헌 의회가 구성될 때까지 국가 위원회를 창설해, 이를 통해 공권력을 행사한다. 국가 위원회의 구성은 다음과 같이 한다.
1) 자그레브의 국민 회의의 모든 의원과 런던에 본부를 두고 있는 유고슬라비아 위원회 대표 10명
2) 이와 동등한 수의 세르비아 왕국 국회의원
3) 이와 동등한 수의 몬테네그로 왕국 대표단
3. 이와 함께 국가 위원회는 임시 국기와 해군 지표를 그 첫 모임에서 결정한다.
4. 세르비아 왕은 제헌 국회가 구성될 때까지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그리고 슬로베니아 국가의 섭정 통치자가 된다. 왕은 국가 위원회에 선서를 해야 한다. 왕은 또한 의회 제도에 따라 합법적으로 통치해야 한다. 왕은 법률 제정권을 가지며 또한 거부권을 가진다.
대표단에게 시달되었던 이 협상 지침은 기본적으로 코르푸 선언의 내용을 그 핵으로 하고 있으나, 세르비아가 주장하던 중앙 집중적 권력구조와는 달리 연방 제도를 그 기본틀로 하고 있었다.
이와 때를 맞추어 유고슬라비아 각 국가에서 통일을 승인하기 위한 법률적 토대를 마련한다는 전략에 따라 각 정치 단체별로 투표를 계속하였다. 보이보디나의 경우 11월 25일 노비사드에 7백 57명의 대의원이 참석해 세르비아와의 통합을 논의했다. 대의원 수는 세르비아 인이 578명으로 압도적이었고, 크로아티아 인 89명, 슬로바키아 인 62명, 우크라이나 인 21명, 그리고 헝가리 인 1명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만장일치로 유고슬라비아 국가 구성에 찬성하였다.
몬테네그로에서는 이에 앞서 11월 8일 국민 회의 몬테네그로 지부가 무조건 통합을 결의하였으며 그 후속 절차로 중앙 집중제와 연방제 권력 구도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이후 벌어진 국회의원 선거는 단연 이 이슈가 최우선 고려사항이었다. 중앙 집중제를 지지한 정당은 흰색의 투표용지를 사용해 백색당으로 불리워졌고, 연방제를 지지한 측은 초록색의 투표용지를 사용해 녹색당으로 호칭되기도 했다.
1918년 11월 27일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를 출발한 국민 회의 대표단은 다음날 베오그라드에 도착하여 구수(鳩首) 회의를 한 끝에 세 명의 협상대표팀을 구성했다. 11월 29일 이 세 명의 대표단은 알렉산더의 정중한 영접을 받았고 양측의 협상은 초스피드로 진행되었다. 최종 협상은 1918년 12월 1일 마무리됐다. 저녁 8시에 최종 협상 결과가 세르비아 국회에서 알렉산더가 참석한 가운데 발표되었다.
마침내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는 처음으로 카라조르지예비치 왕가 하에 한 살림을 꾸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속성상 결코 융화될 수 없는 ‘한 지붕 세 가족’이었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국장
세르비아 인, 크로아티아 인 그리고 슬로베니아 인의 연합 왕국은 화려한 출발을 했다. 총리는 세르비아 출신이고 알렉산더의 심복인 스토얀 프로티치(Stojan Protic)가 맡았으며, 부총리는 국민 회의 의장인 코로세츠, 그리고 외무장관은 유고 위원회 대표를 역임한 트룸비치가 각각 맡았다. 겉모양새는 그럴듯하게 갖추었으나 사실상 세르비아가 전권을 행사하는 정치 체제로 변질되어 갔다. 그 이유는 알렉산더 왕이 강력한 물리력을 가진 군부의 지지를 받고 있는데다 야권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 세르비아의 독주를 효과적으로 저지하기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장 강력한 야당 조직은 크로아티아 농민당이었다. 그런데 농민당 당수였던 라디치가 볼셰비키의 불온 사상에 젖어 있다는 이유를 들어 알렉산더는 1925년 농민당을 해산시켜 버렸고, 게다가 라디치는 1928년 암살당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스토얀 프로티치 스테판 라디치 라디치가 암살되는 장면
장밋빛 꿈에 젖어 일단 통일을 하긴 했지만 출발부터 순조롭지가 않았다. 이러한 이유의 근저에는 북쪽의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 측이 세르비아가 필생을 걸고 추진하고 있던 대세르비아주의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과소 평가했던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일단 연합 왕국을 세웠지만 모든 관료 조직은 세르비아 인으로 채워졌으며, 사실상 세르비아 이외의 지역이 세르비아에 합병된 듯한 인상을 줄 정도로 세르비아 인의 권력 독점 현상이 점점 강화되어 갔다. 앞에서 지적한 크로아티아 농민당 해산과 라디치 당수 암살은 특히 크로아티아 인을 자극해 끊임없는 소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 소요를 핑계 삼아 알렉산더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칼을 뽑았다. 그것은 그 자신이 제거한 블랙 핸드의 꿈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세르비아주의의 기초를 마련해 왔던 파시치 전총리(1926년 사망)의 꿈이기도 한 대세르비아주의의 실현이었다. 1929년 1월 알렉산더 왕은 헌법을 중단시키고 자신이 무제한 권력을 행사하는 독재정을 펴기 시작했다.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그리고 슬로베니아 인의 왕으로서 그리고 군대 통수권자로서 모든 관리의 임명권은 그의 손에 들어갔으며 모든 정당과 단체 등도 해산되거나 폐지되었다. 그는 오직 세르비아 인만의 왕이었으며 다른 민족들은 신민의 존재로도 여기지 않았다.
알렉산더는 이 독재정의 권력을 기반으로 착실히 대세르비아주의를 하나하나 실현해 나갔다. 즉 세르비아 어로 바노비나스(Banovinas)라고 불리던 9개의 주를 세르비아 인의 분포에 따라 조작해 새로 만들었다. 게리멘더링(Gerrymandering)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각 주마다 세르비아 인이 다수를 차지하도록 의도되었다. 결과적으로 6개 주에서 세르비아 인이 다수로 둔갑했고 크로아티아 인이 2개 주, 슬로베니아 인이 1개 주를 차지했으며 인구의 상당수에 달하던 이슬람 교도는 어느 주에서도 소수 민족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게다가 알렉산더는 각 주의 지방자치권을 전혀 인정하지도 않았다.
알렉산더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그리고 슬로베니아 인의 왕국이라는 국명을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고쳐 역사상 처음으로 유고슬라비아라는 말이 공식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전 정지 작업을 한 끝에 1931년 9월 알렉산더는 새 헌법을 공포하고 초강경 독재정을 명문화했다. 전국민 생활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민족 및 지역당을 해체했다.
이때부터 반체제 세력에 대한 탄압을 강행했다. 세르비아 인은 그나마 탄압 대상이 되더라도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지는 않았지만, 세르비아 인 이외의 다른 민족은 엄청난 희생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죽지 않기 위해 많은 반세르비아 세력이 해외로 망명을 떠나갔다. 그들은 복수의 칼을 갈면서 살육의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실제로 2차 세계대전 기간 세르비아 인은 복수에 불타는 일단의 크로아티아 인에게 조직적인 살육을 당했다. 자업자득인 셈이었지만 알렉산더가 뿌린 씨에 대해 죄 없는 세르비아 평민들이 죽음으로써 인과응보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결국에는 알렉산더 그 자신도 이들에 의해 암살을 당했다.
라디치가 암살된 후 크로아티아 농민당을 이끌던 블라드코 마체크는 1933년 4월 반역죄로 체포되어 3년의 징역형에 처해졌고, 통일 왕국에서 초대 부총리와 외무장관을 역임한 코로세츠와 트룸비치 등 저명 인사들도 예외없이 고초를 겪었다. 그나마 저명 인사들은 유명세에 힘입어 악조건은 피해 나갔지만 마케도니아 인, 알바니아 인, 의심을 조금이라도 받은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의 일반 국민들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수난을 겪었다. 크로아티아 인, 슬로베니아 인 사이에서 돌이킬 수 없는 반세르비아 감정이 무서운 속도로 번져 나갔다.
블라드코 마체크
한때 국민 회의의 제2인자로 통일 작업의 주역이었고 크로아티아에서 활동했던 세르비아 인 프리비세비치도 처음에는 미움을 받아 투옥되었으나 나중에는 신병을 치료한다는 이유로 체코로 출국을 허가해 주었다. 그는 1936년 체코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세르비아 이외의 지역 예컨대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등에 거주하는 세르비아 인을 ‘프레차니’라고 부르는데 프리비세비치는 당시 ‘프레차니’를 대표한 가장 중심적인 인물이었다. 이때부터 프레차니 세르비아 인은 지역을 대표한 구심점을 상실했고 항상 베오그라드와의 관계 설정 속에서 그들의 활동 영역을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해외로 망명한 인사들 가운데 유고 현대사에서 가장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인물이 바로 크로아티아 출신의 안테 파벨리치(Ante Pavelic)였다. 그는 크로아티아에 있을 때 크로아티아 민권당의 극우 보수파라고 자임했는데 1929년 1월 알렉산더 독재정이 수립되자마자 이탈리아로 망명했다. 그는 이곳에서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아 우스타샤(Ustasa: 반란이라는 뜻의 크로아티아 어)라는 조직을 창건했다.
안테 파벨리치
우스타샤의 최우선 목표는 혁명과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달성해야 될 크로아티아의 독립이었다. 무솔리나가 우스타샤의 설립을 주도하고 조직을 키운 것은 필요할 경우 우스타샤를 세르비아를 위협하는 중요한 외교 무기로 삼으려는 전략이었다. 이러한 그의 의도는 적중해 2차 세계대전 중 크로아티아에서는 우스타샤를 중심으로 한 크로아티아 자치국이 성립되었고 이들은 결국 세르비아 인을 엄청나게 학살하기에 이른다.
알렉산더의 독재정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국제적인 추인을 받아낼 수 있었다. 문화 대국이라고 자처하는 서구 열강들은 정권 자체가 그들의 말을 잘 듣기만 하면 인권이니 민주화니 등의 ‘사치스러운’ 구호쯤은 쉽게 외면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특히 프랑스는 알렉산더의 독재정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당시 발칸에서의 프랑스 전략은 반이탈리아 정책으로 결집되고 있었는데 전통적으로 세르비아는 이탈리아에 반감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발칸 통일의 견인차 중 하나는 이탈리아의 침략 위협을 극도로 느낀 국민 회의 달마티아 지부가 무조건 통일 협상을 추구하면서 촉발되었음을 상기하면 좋을 것이다.
제1차 대전 전(左)과 후의 동유럽 지도
이런 우호 관계 속에서 1934년 10월 알렉산더는 프랑스를 방문했다. 프랑스 외무장관 루이 바르투이와 함께 마르세이유를 방문하던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 출신의 한 슬라브 인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그런데 당시 조사관들은 결정적인 증거는 찾아내지 못했지만 이 마케도니아 인이 우스타샤와 밀접한 관련을 맺은 인물이거나 아니면 마케도니아 혁명 조직인 IMRO의 조직원으로서 이탈리아의 사주를 받았을 가능성이 제일 컸다. 우스타샤나 IMRO 모두 이탈리아와 헝가리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지원을 받고 있었다.
알렉산더 왕의 암살 장면. 암살범은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현장에서 맞아 죽었다.
1934년 프랑스에서 알렉산더 왕이 암살된 이후 당시 열한 살이던 페타르 2세가 왕위에 오르자 알렉산더의 사촌 폴 왕자가 섭정을 하게 되었다. 총리는 처음에 보골류브 예브티치(Bogoljub Jevtic)였으나 1935년 6월부터 밀란 스토야디노비치(Milan Stojadinovic)가 취임했다. 이때부터 약 3년간은 그나마 유고 정정(政情)이 조용했던 시기에 속한다. 그런데 스토야디노비치는 기본적으로 집권 연정을 구성하고 있던 세르비아 급진당, 보스니아의 이슬람 당, 그리고 슬로베니아의 국민당을 권력의 바탕으로 깔고 있었다.
폴 섭정왕자 보골류브 예브티치 밀란 스토야디노비치
스토야디노비치 정부는 역대 어느 정부보다도 외교 정책에 중점을 두었다. 스토야디노비치 총리라는 인물은 상당히 파시즘에 경도된 인물이었기 때문에 독일과 이탈리아와의 친선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그 역시 히틀러의 친위대인 검은 셔츠단(SS)처럼 자신의 파시스트 전위 조직인 녹색 셔츠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이 단체 이외에도 크로아티아의 민족주의 테러단인 우스타샤와 마찬가지 성격을 가진 세르비아 민족 운동 단체를 창설하는 데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이 단체의 이름은 즈보르(Zbor; 시위)였는데 스토야디노비치의 후원 아래 드미트리예 료티치라는 인물을 대장으로 창설되었다. 이 조직은 세르비아 지상주의를 최대 목표로 하고,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체제와 같은 조합 체제 국가를 지향했다. 이 조직은 산하에 ‘흰 독수리’라는 청년 조직이 있었다. 1차 세계대전 때 사라진 블랙 핸드의 후속 조직인 셈이다.
독일과 이탈리아에 경도되는 외교 정책을 취한 스토야디노비치 총리는 바티칸 교황청과의 관계 개선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 내용은 세르비아에서 어느 정도 천대받던 카톨릭의 지위를 개선하는 것이었는데 사실상 세르비아 정교회와 동등한 지위를 카톨릭에 부여하는 것을 골자로 하였다. 정교회 측은 이 사실을 알고 노발대발했다. 정교회측은 이 정책이 카톨릭에 대한 사실상의 특권 인정일 뿐만 아니라 크로아티아의 민족주의자들을 자극하는 기폭제가 될 것임을 우려하면서 이를 철회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나섰다.
페타르 2세와 악수하는 밀란 스토야디노비치
이러한 민족과 종교의 문제는 전 유럽이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로 접어드는 과정에서 새 국면을 맞게 되었다. 1938년 3월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합병했으며 유고 정부측은 독일측이 유고 내의 민족 감정을 극도로 이용하려는 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특히 추축국의 일원인 이탈리아가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를 내세워 분리 정책을 노골화하자 이 문제는 시급성을 다투는 문제로 부각되었다. 게다가 크로아티아 민족 지도자들은 지금보다 강력한 톤으로 지금까지의 중앙 집권적인 국가에서 연방 체제로 변환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런 위기 속에서 1938년 12월 선거는 경찰의 감시 하에 실시된 불공정 선거의 표상이 되었다. 이 선거 결과는 유고 왕국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즉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마체크가 이끄는 크로아티아 농민당측은 44.9%의 투표를 얻어 정부의 54.1%에 근접했으며 이는 사실상 정부측의 완전한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여파로 스토야디노비치 총리는 사임했으며, 베오그라드측은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크로아티아측과 협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코너로 몰리게 되었다.
베오그라드측은 1939년 2월 드라기샤 체트코비치(Dragisa Cvetkovic)를 총리로 하는 새 내각을 구성했다. 세르비아측의 입장에서 크로아티아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낸 것은 위기를 수습하려는 일종의 술책에 불과했다. 이 협상은 알렉산더 암살 후 어린 페타르 2세를 대신해 섭정을 하고 있던 폴 왕자의 주도로 계속되었다.
드라기샤 체트코비치
크로아티아 농민당의 당수 마체크를 협상 대상으로 한 회의는 2차 세계대전을 며칠 앞둔 채 최종타결되었다. 그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크로아티아는 유고슬라비아에서 자치국의 지위를 갖는다.
2. 크로아티아는 당시의 크로아티아뿐만 아니라 슬라보니아, 달마티아, 그리고 크로아티아 인이 거주하고 있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일부 지역을 병합토록 한다.
3. 크로아티아 자치 공화국의 인구는 440만 명이며 이 가운데 86만 6천 명의 세르비아 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서로 인정한다.
4. 크로아티아 자치국은 독자적인 국회(Sabor)를 가지며 이에 책임을 지는 최고 행정 수반(Ban)은 왕이 임명한다.
5. 외교, 국방, 수송 등 몇 가지 문제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치권을 부여한다.
이 대타협(스포라줌)의 교과서는 합스부르크 제국이 헝가리에 자치권을 부여하면서 구성한 이중 제국의 구성을 토대로 해 만들어졌다. 마체크 당수는 최종 합의에 따라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부총리로 취임한다. 이 협정은 그러나 세르비아 인의 불만을 고조시켰으며, 특히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제 통일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극단 세력끼리 극단적인 반목을 하는 투쟁의 장소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를린으로부터 행진하는 군화 소리가 점점 더 발칸 반도를 향해 들려왔다. 또다시 세계 대전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유고슬라비아 왕국 내에서 온통 대립과 충돌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베를린의 독일군 사령부는 유고슬라비아의 목을 점점 조이기 시작했다. 1941년 2월, 영국군이 그리스로 진주했다. 때를 놓칠세라 독일은 유고슬라비아 왕국 섭정자인 폴 왕자에게 서신을 보내 추축국에 합류하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독일은 곧 소련과 그리스를 공격할 계획임을 내비쳤다. 이는 만약 유고측이 독일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유고를 공격하겠다는 경고였다. 독일 정부는 이와 함께 유고측이 독일에 합류하면 테살로니카(그리스 령 마케도니아의 중심지)를 보상으로 주겠다는 사탕발림도 내세웠다.
아돌프 히틀러와 폴 왕자
유고측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당시의 급박한 국제 정세를 면밀히 검토해 본 결과 유고가 만약 독일의 침공을 받더라도 영국, 그리스, 터키, 소련 등 어느 나라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유고 군이 보유하고 있는 대부분의 무기가 독일제였기 때문에 만약 독일과 전쟁을 할 경우 무기나 탄약, 또는 부품 공급이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독일군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어려운 국면에 처했을 경우 가장 손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을 버는 것이다. 유고 정부는 일단 정석대로 시간을 벌기 위한 노력을 하기로 했다. 추축국들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독일과 유고 간의 불가침 협정 체결을 역제의했다. 추축국측의 성화가 거세어지고 있던 3월 21일 유고측은 최종 대책 회의를 열었다. 추축국에 가담하거나 아니면 질 수밖에 없는 전쟁에 돌입해야 하는 상황에서 전 내각 각료들은 투표를 실시했다. 결과는 16대 3으로 추축국이 제의한 협정을 받아들이기로 최종 결정했다. 질 것이 뻔한 전쟁을 할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이에 따라 드라기샤 체트코비치 유고 총리는 이와 관련한 최종 결론을 내리기 위해 비엔나로 출발했다. 3월 25일 그는 비엔나에서 독일측과 협정을 맺고 그 내용을 일부 발표했다. 일부밖에 발표되지 않은 이유는 양측의 합의사항이 일반에게 공개될 부분과 미공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발표 내용 중 공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유고슬라비아는 추축국과 맺은 협정을 준수하며 추축국측은 유고슬라비아 영역을 통과하는 군 수송로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미공개 부분은 “독일과 이탈리아는 유고측과 서명한 협정 3조(전시 협조 체제 구축)에 구애받지 않고 유고측에 대해 전쟁 참가를 요구하지 않도록 약속한다.”는 내용이고, 이와 함께 독일은 유고에 대해 테살로니카 지역을 양도한다는 부대 조건을 명시했다.
독일과의 협정에 조인하는 드라기샤 체트코비치
독일은 처음부터 이 협정 체결을 전략적인 측면에서 간주했을 뿐 이미 유고 침공은 결정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25일 발표된 양측의 공동 성명은 세르비아의 민심을 극도로 흉흉하게 만들었다. 정부가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비난에서부터 곧 독일이 침공할 것이라는 루머까지 난무했다. 결국 전통적으로 민간 정치에 노골적으로 개입해 온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대체로 민심 불안을 이유로 들먹여 정치판을 뒤집어엎는 군 쿠데타의 속을 뒤집어 보면 대의명분도 없는 권력욕에서 비롯된다. 유고 군의 쿠데타는 바로 이러한 가설의 표본이었다. 두샨 시모비치 장군이 지도한 군부 쿠데타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정권을 찬탈할 수 있었다.
1941년 3월 27일의 쿠데타
두산 시모비치 장군
당시 유고 북부 지역에 있던 섭정자 폴 왕자는 베오그라드로 돌아온 즉시 사임했으며 당시 열일곱 살이던 페타르 왕에게 권한을 넘겼다. 게다가 행정 능력이 없던 군부 쿠데타 주도 세력은 그들이 뒤집어엎은 민간 정부의 각료들을 대부분 잔류시켰으며 최종적으로 전임 체트코비치가 합의한 조약을 받아들이기로 하였지만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이견이 분분하였다. 특히 베오그라드에서는 협정 체결을 중대 고비로 연일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계속되어 추축국측을 자극하였다. 신정부의 입장에 관계없이 히틀러는 이미 유고 침공을 결정하고 있었다.
대체로 민주적이지 못한 정치 지도자들은 그들의 정권을 연장하고 국민을 순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지역 감정이나 민족 감정을 잘 이용한다. 독일은 유고 침공 작전을 세우면서 세르비아측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칠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세르비아에 적대적인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를 반쯤 위협하고 반쯤은 민족 감정을 자극하면서 적당히 구워삶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에 대해서는 추축국측이 폭격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독일은 이러한 회유 정책을 표방해 놓고 우선 크로아티아의 최대 명망가였던 크로아티아 농민당 당수 마체크를 포섭 대상자로 삼았다. 리벤트로프 독일 외무장관의 특사는 마체크를 만나 유고슬라비아로부터 크로아티아를 독립시켜 줄 테니 협조하라고 유혹했지만 마체크는 대정치가답게 단호히 이를 거부했다. 1941년 4월 3일의 일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할 수 없이 독일은 무솔리니가 강력히 천거한 우스타샤 조직에 대한 지지로 그 입장을 수정했다. 독일군은 유고 침공을 시작한 지 4일 만인 4월 10일 우스타샤 정권을 크로아티아 자치국이라는 이름으로 수립했다.
이에 앞서 시모비치 장군이 주도한 군사 정부는 독일 침공 가능성을 두고 면밀히 작전을 검토했다. 그런데 이때 유고 군부는 그야말로 머리 나쁜 돌들로 이루어진 집단이었다. 모자를 화려하게 수놓는 별만 단다고 장군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별을 번쩍이던 유고 군 지도자들은 독일군이 발칸의 북서쪽인 크로아티아로부터 침공할 것으로 보고 대부분의 군병력을 이 방향으로 집결시켜 놓았다. 그런데 운명의 4월 6일 독일이 주도하는 추축국 군대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들어와 제대로 전투다운 전투도 한번 해볼 겨를도 없이 유고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추축국의 헝가리 군은 동북쪽의 보이보디나로, 불가리아 군은 마케도니아 쪽으로 밀고 들어왔고 이탈리아 군은 알바니아 쪽으로 들어왔다. 일부 추축국 군대와 맞닥뜨린 유고 군은 총도 제대로 쏘아 보지 못한 채 패배를 거듭했으며 일단 국경이 무너지자 저항 세력은 거의 없다시피 하였다. 세르비아는 알렉산더의 독재정을 통해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등 다른 민족에 가한 핍박을 되로 주고 말로 받았던 것이다.
추축국의 유고슬라비아 공격도
베오그라드로 진격하는 클라이스트 기갑집단 소속 3호 전차
추축국이 유고를 침공한 지 일주일 만인 4월 1일과 15일 양일간 페타르 왕과 유고 정부는 고국을 버리고 그리스로 줄행랑을 쳤다. 드디어 4월 17일 베오그라드에서 평화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유고는 완전히 손을 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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