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2편) 하느님이여 도우소서! (다윗의 시, 영장으로 스미닛에 맞춘 노래)
<구원을 바라는 기도>
다윗의 이 시편을 묵상하면서, 지난날 외길을 달릴 수밖에 없었던 고난의 환경을 만나면서, 그 지독한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하느님께 매달리며 부르짖었던 지난날의 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교만한 자의 말이 우리를 더욱 절망으로 몰아넣고 허탄한 말들이 우리를 괴롭힐 때, 하느님을 믿는 다는 것이, 교회에 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깨닫게 된다.
하느님은 환난과 절망 가운데서 그분에게 도움을 구하는 자들에게 위로와 도움을 주시는 유일한 분이시다. 그분은 살아계시고 놀라운 은혜가 그분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 시편에서 다윗은 우리가 하느님의 도움을 간구하는 많은 이유를 제공하고 있다. “주여, 도우소서!” 이 기도는 지금도, 어느 순간에서도, 앞으로도, 우리의 변함이 없는 간절한 외침이다.
<경건한 자가 끊어지다>
시편12,1절은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도소이다.” 라고 말한다. 다윗은 거짓말하고 부패하고 교만한 사람들 가운데서 하느님께 구원을 부르짖는다. 다윗은 거짓과 위선과 아첨이 널리 펴져서 경건하고 충실한 자가 끊어졌다고 탄식하고 있다.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경건이란 인간들에게 매력적인 용어가 아니다. 경건한 자가 끊어지고 교만하고 악한 자들은 숫자가 많아질 뿐 아니라 그 세력도 대단하게서 번성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악한 사람들이다. 생각이 다르고 자세가 다르고 과정이 다르고 가는 목적지가 다르다.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도소이다.” 하느님과 사람 간에서 충실한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 경건한 자와 충실한 자는 하느님을 의지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다가 큰 시련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마땅한 일이다. 왜냐하면 시련과 역경을 당하고, 하느님과 사람에게 신실하지 아니할 때, 큰 시험을 통과하면서 살아있는 믿음을 증거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시련을 만나면 먼저 하느님께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믿는 이들은 자기 자신과 주위 사람들에게 의존한다. 하느님께 나아가 무릎꿇지 않는다. 시대와 상황을 분석하고 사람들의 도움도 중요하지만, 우선 “여호와여 도우소서!”하는 절규가 없다면, 이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리고 마는 셈이다.
<세상은 완전히 타락했다>
2절은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도움에 의해서만 끊을 수 있는 삼겹실이다. 경건함이 없으면 허탄함, 아첨, 속임수가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난다. 그들의 말은 부정직하여 신뢰할 가치가 없다. 세상은 완전히 타락했다. 믿을 만한 것은 하나도 없고 의지할 수 있는 정직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
<인간은 자신을 의지한다>
3-4절은 “3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어시리니, 4 저희가 말하기를 우리의 혀로 이길찌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라고 말한다. 이들은 혀로, 곧 헐뜯고 고발하고 거짓말과 악의에 찬 소문을 퍼뜨려서 가난한 자들을 괴롭힌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교만으로 가득 차 선전과 아첨과 속임수를 이용해 그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자랑하는 혀”는 우리 몸에서 가장 다루기 힘들며 죄를 범하기 쉬운 부분은 바로 우리의 혀이다. “저희가 말하기를 우리의 혀로 이길찌라.” 이러한 자세는 큰 위험이다. 오늘날의 부패한 정치권을 바라보는 듯하다. 도무지 진실을 발견할 수 없다.
이것은 무능력하고 나약한 인간이 혀로 출세하고 그 자신을 과신하기 때문이다. 혀는 강한 병기이다. 혀는 생각과 감정을 의식 또는 무의식적으로 말해낸다. 경건치 아니한 자가 이것을 사용할 때에 그 혀는 독이 넘치는 “다룰 수 없는 흉기”로 변한다. 그러한 교만한 자기 과신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부인하게 한다.
<구원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필요하다>
5절은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의 탄식을 인하여 내가 이제 일어나 저를 그 원하는 안전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라고 말한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일어나 가련한 자와 궁핍한 자를 눌림에서 자유롭게 하실 것이라는 보증을 받는다. 하느님께서는 저를 비방하는 자들로부터 하느님을 의지하는 자들을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내가 이제 일어나 저를 그 원하는 안전지대에 두리라.” 하느님의 약속은 언제나 강한 힘이다. 경건치 아니한 자는 “약속의 언약에 낯선 자”이다. 그의 생각을 의지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고 하였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다. 그러나 우리는 위에서부터 주어진 약속을 가졌다.
다윗은 고통당하는 의로운 백성이 억압에서 구원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하느님을 피난처와 터와 안전지대로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하느님은 기도의 탄원자에게 응답하신다. 특히 성전에서 도움을 구하는 자가 제사장이나 예언자를 통하여 그에게 위로가 되는 약속 말씀을 듣게 된다는 옛 관습을 여기서 엿볼 수 있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보증>
6절은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라고 말한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그 말씀 안에는 썩거나 부패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 고통당하고 핍박받는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하느님의 보증으로 말미암아, 현실은 악인이 온통 그를 둘러싸고 있을지라도 변함없는 하느님의 말씀을 신뢰한다는 표현이다.
악인의 말과는 대조적으로 주의 말씀은 순결하고 진실하다.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그 말씀의 변함없는 속성은 은(銀)을 정련하는 과정에 비유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완전함과 완벽을 나타내는 숫자인 일곱 번을 여호와의 말씀이 단련된 것처럼 그리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만이 참되므로 유일하게 의지할 곳이다(flawless).
하느님의 말씀은 속임수와 거짓된 아첨으로 더럽혀지지 않으며(2-3), 그러므로 전적으로 의지할 만하다. 하느님의 말씀의 연단하는 힘은 지속적으로 변함이 없다. 응답받은 모든 기도와 주어진 약속은 놀라운 위력을 가진다. 하느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으므로 다윗은 위로와 도움이 있으리라 확신한다.
<하느님의 도움이 없으면 악이 성행한다>
7절은 “여호와여 저희를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영토록 보존하시리이다.”라고 말한다. 원문에 의하면, “여호와여 주님께서 그들을 지켜 주실 것이며, 우리를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실 것입니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사람들의 거짓말과는 달리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참되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한다. 여기서 “저희”는 경건한 자들 또는 가련한 자들을 가리킨다(1,5).
8절은 “비루함이 인생 중에 높아지는 때에 악인이 처처에 횡행하는도다.” 라고 말한다. “비루함”이란 무가치하고 헛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비루한 일에 가치를 두며 독선적인 자기 확신에 차 횡행하는 교만한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그들을 보존하실 것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다윗은 신뢰한다.
8절은 기만적인 말로써 권세를 행사하는 무가치하고 잔인한 인생을 그리고 있다. 인간의 말은 동기와 목적을 갖는 양면성이 있어서 그들의 거짓된 욕망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 보통이다. 방탕하고 경박한(판관,<사사>9,4)자들의 가치가 선양되는 부패한 세상이 오면, 악인이 뻔뻔스러움을 감추지 않고 세상을 짓밟을 것이다. 주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바로 설 자리가 없다는 사실이 뚜렷이 조명되고 있다.
알렐루야!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