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독립의 별이 된 여인들
독립 기여했지만…역사는 그들을 단지 '여자'로만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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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3월1일, 정부수립 후 처음으로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했다. 대통령장을 받은 58명의 역사적 인물 가운데 유일한 여성은 남자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여성이 있었구나' 하는 정도로만 인식됐다. |
나라를 빼앗긴 시절에 나라를 찾고자 목숨 바친 이들의 이야기는 늘 우리를 숙연하게 만들고 마치 큰 빚을 진 것처럼 죄스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건만 번영된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이역 하늘 아래 쓸쓸히 묻혀 있거나 독립운동의 그늘 아래 이름 없이 사라진 이들이 너무 많다. 남성 위주의 독립운동사에서 의(義)를 머금고 독립의 별이 된 두 여인,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과 민족의 딸 김락의 행적을 더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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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에 개봉하여 관객 1천만 명을 넘긴 영화 '암살'의 여주인공 안윤옥(오른쪽)의 모티브가 남자현으로 알려지면서 세상은 그녀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남자현은 영화의 실제 모델이 아니다. |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 받은 유일한 여성
1933년 8월26일 여운형이 발간하는 조선중앙일보에 일본군 대장 암살범의 죽음을 알리는 6단 기사가 실렸다. '단식한 지 9일 만에 인사불성이 되어 보석 출감, 일본 무토(武藤)대장 모살범, 신경(新京, 장춘시) 남자현의 근황, 파란중첩한 과거'의 소제목이 달렸다. 만주 하얼빈의 독립군 여걸, 남자현의 죽음을 크게 기사화하여 서울에 알렸다. '여자 안중근'이라 부르는 여성독립투사 이야기는 식자층에 회자되었으나 곧 제국주의 격랑에 묻혀버렸다.
1962년 3월1일, 정부수립 후 처음으로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했다. 대통령장을 받은 58명의 역사적 인물 가운데 유일한 여성은 남자현이었다. 신채호, 이봉창, 지청천, 김동삼 등 기라성같은 인물과 더불어 최고훈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여성이 있었구나' 하는 정도로만 인식됐다.
건국공로훈장 받은 남자현
58명 중 유일한 여자 수상자
3·1운동 이후 만주로 떠나
아들 신흥무관학교 보내고
서로군정서 일원으로 활약
동만주 일대서 여성계몽운동
2015년에 개봉하여 관객 1천만명을 넘긴 영화 '암살'의 여주인공 안윤옥의 모티브가 남자현으로 알려지면서 세상은 그녀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남자현은 영화의 실제 모델이 아니다. 영화 내용과 남자현의 삶은 암살이란 단어 외에 아무런 연관이 없다. 단지 모티브만 되었을 뿐이다. 역사는 왜 이토록 남자현을 지워 버렸는가. 역사의 빛은 모든 이에게 골고루 비춰 주지 않지만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독립군 어머니 남자현을 달빛 속에 묻어 두었다.
◆독립군 어머니로 만주벌판 누비고
남자현은 경상도 딸이었다. 1872년 안동 일직의 영양남씨 집안에서 태어나 영양 석보에서 성장하여 19세에 아버지 제자인 의성김씨 김영주와 혼인한다. 남편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항일의병이 봉기할 때 집안어른 김도화를 따라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한다. 이때 3대 독자인 유복자를 가진 남자현은 일본군에 대한 복수심을 삭이고 친정 도움으로 자식을 키운다.
20여 년 후 3·1만세사건이 일어나자 남자현은 남편과 부모 묘소에 하직인사하고 47세에 만주로 떠난다. 시댁의 먼 동생인 일송 김동삼이 있는 서간도 통화현으로 가서 아들을 신흥무관학교에 입학시키고 본인은 서로군정서의 일원이 된다. 독립군 뒷바라지로 시작하여 점차 동만주 일대 농촌을 누비며 12개소의 예수교회와 10여곳의 여성교육회를 설립하고 여성 계몽운동에 정열을 쏟아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리게 된다.
만주벌판에서 남자현은 김동삼, 이상룡, 양기탁 등 독립투사들과 함께하면서 점차 강인한 지사로 변모해 간다. 독립군 내부의 분파 갈등이 심해지자 단식기도와 손가락을 잘라 화합을 호소했다. 1925년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채찬, 이청산과 함께 서울로 잠입, 거사를 추진했다.
1927년 나석주 의사 추도회 때 안창호, 김동삼 등 47인의 독립지사가 중국경찰에 검거되자 옥바라지를 하고 석방되는 데 공을 세운다. 1931년 김동삼이 하얼빈에서 일경에 검거되어 투옥되자 구출작전을 폈지만 실패했다. 1932년 국제연맹 리튼 조사단이 하얼빈에 왔을 때 대한독립을 혈서로 써서 호소했다.
남자현은 손가락 세 개를 스스로 자른 인물이다. 한번은 조선인 순사에게 붙잡히자 잘린 손가락을 보여주며 "내가 여자의 몸으로 수천리 타국에 와서 애쓰는 것은 그대와 나의 조국을 위함이거늘 나를 체포하는 것은 조선인 자네를 스스로 체포하는 것과 다름이 없네"라고 말해 순사의 마음을 움직였다.
1933년 3월 만주국 수립 기념식에 참석하는 일본 무토 대장을 암살하기 위해 폭탄을 운반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된다. 수개월간 혹독한 고문과 단식투쟁으로 생명이 위독해지자 풀려나는데 "죽고 사는 것도 정신에 달려있고 독립 역시 정신으로 이루어진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62세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하얼빈 조선인 묘역에 묻혔다가 1957년 도시 개조공사로 묘지마저 사라져 버렸다.
1999년 영양 석보에 생가가 복원됐다. 추모각에는 남자현의 흑백사진이 걸려있다. 무명옷을 빨고 기워 독립군에게 입히고 강냉이밥이라도 배불리 먹여 추위에 떨지 않도록 애쓰는 조선 어머니의 모습이다. 무심한 표정은 다 알고 있다는 듯 '그래도 괜찮아 대한아! 내가 있잖니'하는 듯하다.
◆안동의 딸 김락
일본 고등계 형사들의 필독서 '고등경찰요사'를 살펴보던 안동대 김희곤 교수는 다음의 글을 발견한다. "안동 양반 고(故) 이중업의 처는 대정 8년(1919) 소요(만세운동) 당시 수비대에 끌려가 취조를 받은 결과 실명했고 이후 11년 동안 고생하다가 소화 4년(1929) 2월에 사망했기 때문에 아들 동흠은 일본에 대한 적의를 밤낮으로 잊을 수 없다."
2001년 한 사학자의 노력으로 역사 저편에 묻혀 있던 여인이 70여년 만에 밝은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그녀는 3·1만세사건 때 일경에게 끌려가 고문으로 두 눈을 잃은 여성, 김락(1863~1929)이다. 향산 이만도의 맏며느리이자 백하 김대락의 누이동생이요, 석주 이상룡의 처제이며, 학봉 종손 김용환과 정재 손자 류동저의 장모다.
김락은 안동 독립운동사의 빛나는 다섯 가문과 얽혀있다. 친정 임하의 내앞마을과 시댁 예안의 하계마을, 두 딸이 출가한 서후의 금계마을과 임동의 무실마을, 그리고 큰언니가 종부인 법흥동 임청각으로 모두 독립운동의 성지 같은 곳이다. 안동의 독립유공자 수는 948명으로 대구경북 2천357명의 40%다. 유공자 10명 이상을 배출한 마을이 여덟인데 그중 다섯 마을의 물결을 김락은 온몸으로 맞았다.
3·1운동 선두에 섰던 김락
의병장 향산 이만도 맏며느리
남편·형제도 독립운동 투신
3·1운동때 체포돼 두 눈 잃어
광복 70주년 창작오페라로
불꽃 같았던 67년 삶 재조명
4남3녀 중 막내인 김락은 19세에 퇴계후손 향산 이만도의 아들 이중업과 결혼한다. 향산은 1866년 문과 장원급제하고 당상관 동부승지까지 오른 인물로 예안의 을미의병장이었다. 나라를 빼앗긴 분함으로 단식을 시작하자 전국의 유림들이 찾아와 말렸으나 향산은 요지부동이었고 접빈객은 맏며느리 김락의 몫이었다. 24일 단식으로 순국하자 안동 유림은 독립운동의 길로 뒤따르고 젊은이는 울분의 불을 지폈다.
그해 겨울, 친정 큰오빠 백하 김대락이 66세의 노구를 이끌고 집안의 청장년은 물론 손녀와 만삭인 손부까지 데리고 서간도로 망명을 떠났다. 고향에는 오빠 넷 중 한 명만 남았다. 백하는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태어난 손주의 태명(어릴적 이름)을 '쾌당'이라 지었다. 일제치하를 벗어나 태어났으니 그렇게 통쾌하고 기뻤다.
큰형부 석주 이상룡은 유서 깊은 종택, 임청각 대문을 걸어 잠그고 문중 수십여 가구를 이끌고 큰언니와 함께 서간도로 떠났고 친정 집안조카 일송 김동삼, 시댁 만화공 주손 이원일, 종고모부 동산 류인식도 모두 집안 가솔을 이끌고 서간도로 갔다. 아버지 같은 큰오빠 백하가 4년 만에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백하(白下)는 '백두산 아래 사는 한인'이란 뜻이다.
남편과 아들 동흠과 종흠, 사위 둘도 이미 독립운동에 적극 활동하고 있었다. 군자금을 모으다가 체포되기도 했고 집은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으며 사위 김용환은 이미 세 차례나 감옥살이를 했다. 훗날 파락호로 위장하여 종가와 위토를 수차례 팔아 독립군자금으로 내놓은 사위다.
예안의 3·1만세시위는 격렬했다. 김락은 57세 나이에도 불구하고 시위에 앞장서 일경에게 체포, 여러 달 옥고를 치르고 고문으로 두 눈을 잃었다. 남편 이중업은 파리강화회의 청원운동과 군자금 모금활동 끝에 병을 얻어 1921년 세상을 떠났으니 김락은 고통 속에 두 번이나 자결하려고 했다. 이후 두 아들의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다가 1929년 67세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시댁·친정 식구 대부분이 독립의 별이 되었고 그 결과 25명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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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광복 70주년을 기념하여 불꽃 같은 김락의 삶이 창작오페라로 재현됐다. 부제는 '민족의 딸, 아내 그리고 어머니'다. 사진은 지난해 6월 성주문화예술회관에서 공연된 장면. |
◆오페라로 삶이 재현되고
김락의 내방가사 '유산일록(遊山日錄)'이 최근에 발굴되었다. 시대의 광풍에 휩쓸려 흩어진 가문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했고 향촌 풍광을 묘사한 솜씨와 전고(典故)를 사용하는 기법이 일품이었다. '동반숙질 모였는데 형아생각 간절하다'며 서간도로 간 큰언니를 그리워했고 '풍월시 못하겠느냐만 부녀된 한탄으로 가사로 대신한다'고 읊어 지적 수준이 뛰어난 명문가 여성으로서 자존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2015년 광복 70주년을 기념하여 불꽃 같은 김락의 삶이 창작오페라로 재현됐다. 부제는 '민족의 딸, 아내 그리고 어머니'. 극 중에서 김락은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고문하는 일경 요시다를 꾸짖는다. '사쿠라야, 사쿠라야, 이른 봄햇살이나 만끽해라. 찰나에 사라지는 너의 운명이 가련하고 불쌍하구나.', 화가 난 요시다는 달군 인두를 눈에 들이댄다. 김락은 '간절히 원하면 꿈은 현실이 되는 법, 기필코 내 눈으로 광명의 아침을 보리라'고 외친다.
오페라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2016년 대한민국 오페라 대상을 받았다.
여행작가·역사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