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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학>, 2009년 봄호. *아직 미간행된 원고이므로 복사를 허용하지 않음을 양해해주세요.
집중조명
치투완*에서 서울로 외 4편
박미산
내 살과 당신의 살이 맞닿는다 코끼리 등에서 숨죽이며 본다 콧김을 뿜으며 사랑을 나누는 코뿔소, 보드라운 엉덩이가 흔들린다 각자 뒤돌아서 가는 코뿔소, 실비 맞은 등이 축축하다
한밤중 붉은 도미들이 지느러미를 흔들며 서울을 향해 줄지어 간다 비가 빠져 나간 자리에 불빛 지느러미가 현란하게 가로지른다 환상적인 속도다
아득히 떠 있는 비행기를 잡았다 놓는다, 치투완의 날짐승 같은 나무들 사이에 외뿔 코뿔소가 걷는 것이 보인다, 생살 파고드는 한기, 나 홀로 질풍가도를 달린다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는
환한 날의 코뿔소
열애가 빚은 여러 겹의 바람
* 치투완 : 네팔의 국립공원
스웨터
― Made in England
머리맡에는 늘 대바늘이 있었다. 잠자는 아이들을 한쪽으로 밀며 한 여름 밤 윗목에서 색색의 실을 가지런히 늘어놓는다 잰 손끝 따라 대바늘에 걸려 숭숭 빠져나가는 어머니의 잠은 바늘코를 통과하지 못하고 둥그렇게 투망을 친다 아버지의 생사, 팔남매의 생계가 팽팽하게 딸려오다 툭 끊어진다 밤새 루핑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빨강, 파랑, 보라를 적신다 하청 받은 등판 몸통 팔 짝짝이 대롱거리다가 핏줄과 핏줄을 잇는다 어머니의 새벽은 완성되고, 푸르스름한 마당엔 밤새 배불리 물먹은 개망초가 이팝 같은 꽃을 흔들고 있다
시인
창영국민학교 앞
여자아이는 교문 안으로 들어가고
오빠는 구두통을 메고 세상 안으로 들어간다
눈보라가 심한 날엔
까맣게 얼어터진 손이 교문 밖에서 떨며 서성이다
여자아이 손을 잡고 새하얀 눈을 타고 날아가곤 했다
길모퉁이에서 흙먼지 뒤집어 쓴 구두를
얄팍한 지전으로 바꿔버리고
시간의 발자국을 닦아냈다
그리고
먼지에 덮인 눈물이 너무 뜨거워
시인이 되었다.
빨간 구두
태양이 달군 길을
뜨거움도 모르고 달려갔었지
붉은 그늘 번득이는 너의 세계는 무궁무진했어
천지사방이 다 우리의 세계였지
너는 생글생글 웃으며 사라졌어
혼자 돌아오는 아스팔트길은
입영통지로 녹아내렸어
터진 아스팔트 위를 군화를 신고 걸었어
도심의 불빛에서 만났어, 옛날의 너를
우연히 길을 가다 발걸음이 멈춰졌지
이십 년 전의 그녀와 꼭 닮은 네가
쇼윈도의 불빛을 받으며 나를 바라보았어
희고 쭉 뻗은 다리를 감싸고 있는
너의 화려함은 여전했어
다시는 그리운 눈길 주지 않으려 했는데
어둠 속에 잠겨 있던 발가락이 요동치고 있어
뒤흔들리는 내 마음을 신고
뒤축이 닳도록 달려가는 너는
한 시절 갈아 신지 못했던 나의 도둑인가 봐
도둑인 줄 알면서도 또다시 나를 맡기게 되는군
칠점사*
천둥번개로
목욕한 몸을 말리며
나무 곁에 똬리를 틀고
뜨거운 표정을 지어본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지나가는
너는 천겁의 세월 전
나를 기르던 나의 치정
비린 미련
페로몬을 뿜고 꼬리를 흔들어보지만
너는 젖은 흙을 밟으며
무심하게 스쳐간다
청포냄새가 난다
치정을 말리기 좋은 유월
너에게 감지되지 않을 정도로
스스스 움직인다
근질거리는 회상들
산길 가랑이 사이로 네가
뒤돌아보는 순간
뒤엉킨 천겁을 푸는
까치살모사
스미는
황홀한
혀,
* 칠점사 : 까치살모사라고도 한다.
박미산
인천에서 태어나 2006년 『유심』 신인상 및 200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루낭의 지도』가 있다.
대담
박미산․맹문재
맹문재 박 선생님, 안녕하세요. 새해에 인사를 드리게 되었네요. 작년에 시집을 출간하셨는데 다시금 축하드립니다. 근황은 어떠신지요?
박미산 네, 시집 출간 이후 바쁘게 지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원고 청탁이 들어와 쓰느라고 바빴습니다.
맹문재 아무래도 시집 출간에 대한 소감을 좀 더 들어봐야겠네요. 첫 시집을 내고 난 소감은 어떠한지요? 독자들의 반응도 느끼고 있는지요? 또 시작활동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요? 저도 첫 시집을 내었을 때의 흥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네요.
박미산 네, 첫 시집을 내고 나서 저는 기쁨이나 흥분보다는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혼잡한 사거리에서 발가벗은 느낌이랄까요? 독자들의 반응은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을 때와 비슷합니다. 신춘문예 당선 뒤에 메일을 보낸 독자가 시집을 사서 읽고 난 후 또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저와 비슷한 연배인 것 같아요. 같은 시기에 같은 체험을 겪은 독자여서 제 시에 대해 감동을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독자는 「달 속의 아버지」를 읽고 많이 울었답니다. 본인의 처지와 흡사하다고 하더군요. 결국 시는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보편적일 때 감동을 주는 것 같아요.
맹문재 이번 시집에 실린 ‘시인의 말’을 보니 시어머님과 어머니께 감사를 드리고 있네요. 먼저 어머니를 중심으로 가족 소개를 들려주실 수 있는지요? 「왕가네 당근은 쑥쑥 자랐어요」「카스테라」 등의 작품에서는 어머니를, 「합환목을 심은 당신은」에서는 할머니를, 「달 속의 아버지」에서는 아버지를, 그리고 「나는 지금도 무만 보면 입 안 가득 신 침이 고인다」에서는 언니를 읽을 수 있네요.
박미산 시어머님과 어머니는 저에게 중요한 시적 모티브입니다. 두 분은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았는데 살아온 환경이 많이 달라요. 저의 어머니는 1924년생이고 시어머니는 1918년생이세요. 저의 어머니는 보통학교를 나오시고 아버지 대신 자식들 생계를 떠맡아 고생하고 사신 분이고, 저의 시어머니는 숙명여학교와 이화여전, 일본 문화학원을 다닌 인텔리입니다. 저는 아들 다섯, 딸 셋의 8남매 중 다섯째입니다. 오빠 셋, 언니 하나, 밑으로 남동생 둘, 여동생 하나의 대가족이지요. 아버지는 바람처럼 다니는 분이셨고, 자식들의 생계는 대부분 어머니가 책임지셨어요. 제가 태어난 곳은 신흥동이었어요. 당시에는 인천에서 꽤 좋은 주택가였지요. 그때만 해도 아버지께서 난민수용소장이어서 집도 번듯했고, 아마 우리 식구가 가장 풍요롭게 살던 시기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풍요로움은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였어요. 아버지께서 정치에 꿈을 갖기 시작하셨지요. 몇 년 동안 가정을 돌보지도 않은 건 물론이고 집과 가재도구까지 모두 남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지요. 「뿔새」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아버지는 인물이 훤칠했어요. 그래서인지 아버지 주위에는 여자가 끊이지 않았어요. 어느 날 아버지가 얼굴이 하얗고 아주 젊고 예쁜 여자를 데리고 신흥동 집에 오셨어요. 어머니는 안방을 내주고 우리와 잠을 주무셨지요. 한 달 가량 어머니는 아버지와 젊은 여자에게 밥상을 차려주었어요. 아버지가 서울로 일을 보러 가서 집에 안 들어온 새벽녘에 어머니와 그 여자가 부둥켜안고 울고 있는 걸 보았어요. 그날 어머니와 그 여자가 함께 외출 하고 돌아와서 매일 어머니가 미역국을 끓여서 그 여자에게 바쳤어요. 그 여자는 일주일 정도 더 있다가 영영 가고 말았어요.
그 여자는 임신해서 집에 와보니 아이들이 여섯이나 있고, 가정이 넉넉해보이지도 않고 본처인 어머니의 고운 심성을 보고 유산을 하고 떠난 것이었습니다. 「달 속의 아버지」가 그 시이지요.
큰고모님은 집도 절도 없는 우리 식구를 당신이 살던 도화동으로 부르셨어요. 도화동은 지금 인천대학교 자리인데 공동묘지가 있었고, 문둥이들이 공동묘지 입구에서 살고, 화교들이 농사를 짓고 있었어요. 그런데 6․25가 터지고 휴전이 되고 나서 피난민들이 하나 둘 들어와 살기 시작했지요.
「왕가네 당근은 쑥쑥 자랐어요」는 저의 어머니가 도화동 화교의 당근밭에서 일한 경험을 쓴 겁니다. 어머니가 당근밭으로 일을 하러 다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안 나가시대요. 며칠 지나서 중국인이 우리 집에 와서 어머니와 이야기를 하다가 돌아가고 어머니는 다른 데로 일을 하러 가셨어요. 그때는 어려서 그 이유를 몰랐어요. 지금 되돌아보니 김동인의 단편「감자」 와 같은 상황이었던 겁니다.
도화동에서의 생활은 궁핍, 그 자체였지만 형제간의 우애는 좋았어요. 우리 형제들은 늘 긍정적인 사고를 갖고 있어서 다툼이 없었어요. 언니는 동네에 이름난 미인이어서 동네 총각들에게 인기가 있었지요. 고등학생인 언니를 지금 형부가 매일 쫓아다니다가 임신을 시켰어요. 어머니는 넋 나간 사람처럼 매일 우셨지요. 언니는 시장통 가게에서 흙이 잔뜩 묻은 무를 손톱으로 돌려 깎아 먹었어요. 언니는 겨우 내내 무만 먹고 살았지요. 「나는 지금도 무만 보면 입 안 가득 신 침이 고인다」는 언니의 시입니다.
맹문재 시어머님과의 사이도 각별한 것 같네요.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은 유교적 차원에서든 경제적 차원에서든 결혼 생활이 아주 중요하지요. 시어머님을 비롯해 시댁에 대해서도 들려주실 수 있는지요?
박미산 시아버님은 당진의 만석지기 부호였어요. 시아버님은 일찌감치 서울에 와서 경복학교를 다니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상지대학을 나오셨고, 시어머니는 이화여전을 다닐 때 약혼하고 아버님과 함께 일본으로 유학을 가셨지요. 제가 결혼할 당시 어머님은 번역을 하고 계셨어요. 우리나라는 1970년대 후반까지 일본어로 된 영미문학을 다시 한국어로 중역하는 일이 다반사였어요. 시어머님은 영문과를 나오셨는데 일본어를 더 유창하게 해서 70세까지 번역을 하셨어요.
합환목은 자귀나무라고도 하는데 집안에 심어두면 가족이 화목하고 부부 금슬에 좋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결혼기념으로 시아버님이 합환목을 심어주셨어요.
시아버지는 약주를 좋아하셨어요. 시아버지는 퇴근하고 돌아오시면 저녁을 들면서 꼭 반주를 하셨지요. 시어머니는 번역을 하느라 바쁘기도 했지만 술을 전혀 마시지 못하는 분이셨습니다. 자연히 아버님과 제가 대작을 하게 되어 나날이 술 마시는 양이 늘어났지요. 그러다 보니 맛있는 약주를 마시고 싶어 직접 술을 빚게 되었어요. 당진에 살고 있는 친척에게 누룩을 보내달라고 해서 맑은 술을 빚어 늘 아버님과 마셨어요. 「합환목을 심은 당신은」의 화자는 내 아이들로 설정했습니다. 아버님의 고요한 임종을 보면서 술 빚는 날의 부산스러움과 밥알이 퐁퐁 살아올라오는 생동감을 동시에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아름답고 지적인 시어머니가 언제부터인가 갑자기 엉뚱한 이야기와 행동을 하기 시작하더니 걷잡을 수 없게 빠른 속도로 치매가 왔어요. 어머니만 두고 외출할 수 없을 지경까지 되었습니다. 그때가 제가 석사과정을 마칠 때였는데 논문을 쓸 수가 없게 되었어요. 자료를 찾으러 도서관이나 북한자료실에 가야 하는데 꼼짝할 수 없었지요. 시아버님이 만 4년 동안 중풍으로 누워 계셔서 병구완을 했을 때만해도 워낙 아버님을 좋아해서 그런지 힘든 것을 몰랐는데, 치매는 온 식구가 산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견딜 수가 없더군요. 결국 28년 만에 시어머니를 노인병원으로 모셨습니다.
「카스테라」는 노인병원의 장면을 그린 겁니다. 카스테라와 프리지아를 사들고 어머니를 뵈러 갔는데 마침 식사시간이었어요. 똑같은 숏커트 머리에다 똑같은 옷을 입고 밥을 허겁지겁 잡숫고는 카스테라를 드시고 나서 프리지아까지 순식간에 입속으로 넣는 어머니를 뵙고 혼자 울었습니다.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 생기더군요.
맹문재 이번에 신작으로 발표하는 작품 중 「시인」을 읽어보니 ‘오빠’도 등장하네요. 이 작품은 “먼지에 덮인 눈물이 너무 뜨거워/시인이 되었다.”라고 마무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선생님께서 시를 쓰는 데 오빠의 삶이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여겨지네요.
박미산 바로 위 오빠하고 저하고 두 살 터울인데 오빠는 저를 끔찍하게 아꼈어요.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국민학교를 같이 다녔는데 오빠는 6학년이 되자 거의 학교에 다니지 못했어요. 저랑 학교까지 같이 가서 저는 학교로 들어가고 오빠는 구두 닦으러 다녔지요. 중학교, 고등학교를 오빠가 학비를 거의 대주었어요. 아마도 오빠의 헌신이 없었다면 시인인 제가 없을 겁니다.
맹문재 「정애이모」에 나오는 이모님에 대해서도 궁금하네요.
박미산 저의 시댁은 아들만 3형제입니다. 제 남편은 아들 3형제 중 둘째인데 형과 동생은 이미 결혼했고 둘째인 남편이 뒤늦게 결혼했어요. 제가 결혼하고 나서 5년 후에 시동생이 이혼을 했어요. 동서는 이혼 후에 프랑스로 유학을 가 버리고 조카애 둘은 순전히 제 몫이 되어버렸지요. 큰조카애가 6살, 작은애가 제 아이와 동갑인 5살, 나의 작은애가 4살, 네 아이를 키우느라고 하루가 어떻게 가는 줄 모를 정도로 바쁘게 살았어요. 아이들을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씻기고 재우기를 3년 6개월을 했지요. 시동생이 재혼하면서 조카아이들을 데리고 나갔어요. 나중에는 동서가 프랑스에서 돌아오고 나서 조카들을 키웠지요.
정애이모는 사돈처녀의 이야기입니다. 작년에 큰조카가 결혼을 했어요. 결혼식장에서 조카의 정애이모를 봤어요. 멀쩡했던 처녀가 갑자기 사고로 인해 평생을 누워 지냈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어요? 웬만하면 그 몸으로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을 텐데 조카 결혼식을 보려고 왔더라고요. 한 25년 만에 봤는데 마음이 짠하더라고요. 결혼식 이후 내내 사돈처녀를 생각하다가 쓴 시입니다.
맹문재 작품 세계에 대한 다른 면을 좀 여쭤보겠습니다. 선생님의 작품에서는 “당신”이라는 호명이 많이 나타나고 있네요. 물론 작품마다 “당신”으로 지칭되는 대상은 다르다고 보이네요. 그렇지만 작품의 형식 차원으로 보면 “당신”을 호명하는 의도가 있을 것 같은데, 궁금하네요.
박미산 아버지, 어머니, 사랑하는 연인, 바다, 나 자신을 이 시집에서 “당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지금 현재가 아닌, 이미 흘러가 버린 아버지, 어머니, 연인, 자연, 나를 “당신”이라고 호명해 보는 겁니다. 이미 흘러가버려서 만져지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 무심한 상태에서 “당신”이라고 호명하는 순간, 그들이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만져지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다가 육체적 감각으로 살아 돌아오지요.
맹문재 선생님의 작품 세계에서 또 다른 특징은 “나”를 대부분 등장시키고 있는 점입니다. “나”는 주어이자 화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대체로 강한 자아 인식을 표상하고 있지요. 선생님께서는 시 쓰기를 통해 자아의 어떤 면을 인식하는지요? 시를 쓰는 이유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박미산 “나”도 많이 등장하고 있는데 “당신”과 같은 느낌으로 읽을 수 있겠지요. 어떤 순간에 있었던 아주 사소한 일이 갑자기 선명하게 떠올라 마음속을 헤집어 놓을 때가 있어요. 그런 하찮은 기억들이 그리움이라든가 슬픔을 불러일으켜 존재와 시간의 신비를 체험합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조우하는 시간이 바로 그때이지요.
일상생활의 공간에서 벗어났을 때 과거의 자신을 호명할 수 있고, 그 다른 “나”와 오늘의 “나”를 만날 수 있습니다. “나”를 타자화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나”는 절망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가 살아가는 동력은 ‘나-타자’에 의해 생성됩니다. 이러한 ‘나-타자’ 는 어려운 시련이 닥쳐도 늘 희망과 사랑을 노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절망을 모릅니다.
맹문재 선생님의 작품에서는 외국의 지명이나 인명을 비롯해 외국어나 외래어의 사용도 적지 않습니다. 외국 문화에 관심이 많거나 외국 여행의 경험이 많은 면으로 보이기도 합니다만, 저는 시 쓰기의 한 형식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혹 의도하고 있는 바가 있는지요?
박미산 물론 외국 여행의 경험을 쓰기도 했고, 시 쓰기의 형식으로도 차용한 점도 있습니다. 「알카트라즈에서 클라우드 쿠쿠랜드로」나 「사바아사나」, 「셀프 누드 포트레이트」 같은 경우가 외래어를 의도적으로 차용해서 썼습니다. 딱히 우리말로 표현하기가 애매한 외래어를 차용해서 일종의 낯설게 하기를 한 것입니다.
맹문재 선생님께서는 첫 시집에서 중점을 준 점이 있는지요?
박미산 『루낭의 지도』는 눈물로 얼룩진 나의 생을 걷는 지도였습니다. 그렇지만 눈물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요.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살아가는 동력은 희망과 따뜻함, 사랑이었습니다.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맹문재 앞으로 작품 활동을 하면서 특히 관심을 가지는 분야 혹은 영역이 있는지요?
박미산 시인이 지켜야할 도덕은 절제라고 생각합니다. 생에 대한 절제가 아니라 언어에 대한 절제가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요새 첫 번째 시집에서 너무 많은 말을 쏟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될 수 있으면 절제된 언어로 깊은 사유를 담은 시를 쓰고 싶습니다.
맹문재 이야기의 방향을 다시 돌려보지요. 선생님께서는 사진작가로도 활동을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사진을 찍게 되었는지요? 그리고 시를 쓰는 것과 유사한 점이나 도움이 되는 점이 있는지요?
박미산 사진과 시와 비슷한 점이 많고, 영화는 소설과 어울린다고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사진은 한 컷으로 말하는 점이 시와 같습니다. 저는 1989년부터 사진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진으로 표현되지 않는 것이 있더군요.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글로 안 되는 것을 사진으로 표현하고, 사진으로 안 되는 건 글로 쓰기 시작했지요.
사진은 빛의 예술이라고 하지요. 그 순간이 지나면 다시 오지 않습니다. 오늘 똑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찍은 사진과 내일 똑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찍은 사진이 다릅니다. 이 세상에 같은 사진은 없습니다.
시도 그런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찾아온 시는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 오지 않습니다. 소설이나 에세이는 순간 사라져도 뼈대가 그대로 있는데 시는 순간 사라져 버리면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시와 사진의 유사점이 그것입니다.
맹문재 선생님께서는 우리의 전통 무예인 택견에도 고단자라고 알고 있습니다. 조예가 깊은 분으로서 택견은 어떤 면에서 추천하고 싶은 운동인가요?
박미산 어쩌다 보니 10년 넘게 택견을 하게 되었네요. 택견은 알다시피 우리의 전통무예입니다. 서양무술은 상대를 해하는 무술이지만 택견은 그렇지 않습니다. 상대가 공격해오면 그 힘을 이용하는 무술입니다. 예를 중시하면서 심신수양은 물론 양생운동이기도 합니다.
제가 지도하고 있는 종로 생활관은 새벽 6시 30분에 초등학생부터 60세가 넘는 남녀노소가 함께 어우러져 운동을 합니다. 태권도는 절도 있는 동작을 하다가 관절을 다치는 경우가 많은데 택견은 무릎관절을 구부렸다 폈다 하면서 발차기를 하기 때문에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키를 크게 하고 나이든 사람들에게는 무릎관절이 튼튼해집니다. 누구든지 권하고 싶은 운동입니다.
맹문재 좀 어려운 질문일 수도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떠한 작품을 좋은 시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박미산 시는 제작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well made’가 아닌 시인의 환경이나 체험,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 도사리고 있는 시가 좋은 시 아닐까요?
맹문재 앞으로의 활동 계획이 궁금하네요.
박미산 제가 수필로 등단한 지가 햇수로 18년 되었어요. 그동안 수필집을 한 권도 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3월경에 수필집을 내고 올해 안에 박사논문을 쓸 예정입니다.
맹문재 여러 말씀들 감사드립니다. 내내 건강하시고, 건필하세요.
박미산 네, 감사합니다.
맹문재(시인, 안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