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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의 세계
2023년 9월 24일 본문 말씀: 디도서 1:13-14
(1:13)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1:14)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인간은 사도는 짐승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내부에 하나님과의 연락망이 형성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연락망이란 그저 하나님을 성심성의껏 찾으면 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 바로 종교이며 종교는 최종 ‘유대교’와 ‘그 외의 종교’로 나뉩니다.
‘그 외의 이방종교’의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성격을 갖게 됩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입니다. 이 하늘과 땅에서 가장 소중하고 귀하고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나 자신 뿐이다는 겁니다. 스바냐 2:15에 나오는 니느웨 민족의 종교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하며 심중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 어찌 이같이 황무하여 들짐승의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지나가는 자마다 치소하여 손을 흔들리로다”
즉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라는 원칙에서 시작해서 이 원칙을 확답하는 식으로 되돌아오는 교리가 이방종교들의 특징입니다. 그렇다면 유대교는 이런 이방종교와 어떤 차이를 보일까요? 유대교는 ‘나만 절대요 나만 있다’는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일방적으로 나는 최고요 나만 소중하다고 말해도 소용없다. 누가 옆에서 그것을 보증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교는 인간 마음의 심도가 이방종교보다 더 깊게 내려가서 들춥니다. ‘타인이 내가 어떤 자인지를 인정해 줄 때, 그것이 진정 나다’는 겁니다.
유대교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합니다. 그 방법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율법이 있으니 그것을 진정성 마음으로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한다면 그야말로 누가 뭐래도 우리 자신은 하나님 백성이 맞다라’는 겁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내가 하늘나라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방종교나 유대교나 모두 자기에 대한 미련을 포기 못하고 있는 겁니다. 방법이 다릅니다. 이방종교는 스스로 자기 판단에 나서고 유대교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에 의해서 판정받아 보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모두 다 그 하나님이 가짜라면요? 악마의 창안한 신이라면요?
진짜 하나님은 십자가만을 앞장 세워서 찾아오십니다. 기존의 하나님에다 십자가 자신 아들 하나님 사실을 추가시켜 온전한 신에 관한 내용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십자가가 모든 신들이 악마에서 나온 이미지에 불과함을 고발하고 십자가로 떨어냅니다. 유대교에 대한 예수님의 저주가 대단합니다.
마태복음 21:44-46에 보면,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23:27에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그리고 33절에서는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유대교는, 인간치고 자기 포기가 불가능함을 몰랐던 겁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인간은 자기를 놓지 않습니다. 자신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신을 배신하는 경우는 낯선 세계가 쳐들어 왔을 때 뿐입니다. 그것이 ‘세례’ 즉 세례란 자아를 제거하는 방식으로서의 환경입니다.
이 환경은 기존 환경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존 환경은 자신들의 운명으로 인하여 애도하고 슬퍼하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 8:19-22)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 세상에서는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디서 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걸까요? 그것이 바로 숨어있는 세계가 ‘세례’라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세례는 이 세상 중에 없으면서도 이 세계을 찢고 나타납니다.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막 1:10)
인간들은 대자연이라는 시공간은 결코 찢겨지지 않는 최종 바깥 환경이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그 밖에 하나님께서 건재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실은 진짜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이 세상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실 예수님의 세계에 있습니다. 세상의 등장은 이 세상의 최종 시공간이 찢김이 동반시킵니다. 그리고 발생된 그 틈으로 숨겨진 세계가 쏟아집니다.
이것이 세례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선지자들이 예언하면서 장차 성도를 겨냥해서 이렇게 이야기입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욜 2:13)
그동안 인간의 마음들은 악마로부터 소송당하며 고소당하며 수배자로 쫓겨다니는 마음이었습니다. 보다 완벽에 완벽을 기하므로서 죽어서 좋은데 갈려고 자기 마음 관리에 애써왔던 겁니다. 하지만 악마의 철저한 추궁 앞에서 인간들은 말씀과 행위에 합치가 맞지 않음이 늘 들통납니다.
세례란 바로 성도가 자기 마음을 자신이 관리할 필요가 없는 환경을 뜻합니다. 따로 마음 관리를 해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 대신 성도는 자기 선택을 포기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행하시는 선택은 백성 이외의 사람을 선택하지 않는 방식으로 적용됩니다. 이 말은 곧 나에 대한 나의 선택이 무용지물이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주님으로부터 선택당한 자는 비로소 웃게 됩니다. 주님이 여기 계시니 안 웃을래야 안 웃을 수가 없는 겁니다. 더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관심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관심있습니다. 세상이 이런 맛은 없습니다! 자아 있는 그 마음에 큰 대포 구멍이 뚫여서 바람이 오갈 뿐입니다.
이 세상에 오직 예수님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선택의 효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찢어진 틈만 주의깊게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23-09-24 19:58
5강-디도서 1장 13-14절(세례의 세계)230924-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디도서 1장 13-14절입니다.
디도서 1:13-14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레데 사람은 짐승이다.’라는 철학자의 이야기, 이 대목에 대해서 사도는 동의하고 있습니다. 짐승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인 듯 보이지만 실은 사람이 아니고 짐승에 불과하다, 라는 겁니다. 사도가 말하는 짐승이 아닌 인간의 기준은 뭐냐?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연락하는 사이였고 통하는 사이였습니다.
차에 엔진이 있는데 엔진이 빠졌다, 겉모습은 멀쩡한데 본 넷 열어보니 엔진이 없어요. 그것은 차라고 할 수 없겠죠. 엔진 부분이 뭐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이 연락하는 요소입니다. 그걸 가지고 구약 내내 언급하기를 ‘언약’,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약속이 주어졌고 사람이 그 약속 안에서 하나님과 연락이 된다면 그건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이고, 연락이 안 되고 끊어진 상태, 그것은 바로 여기서 짐승에 해당되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러면 연락이 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이미 모든 인간은 범죄했기 때문에 인간 손으로는 손 쓸 수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들이 있습니다. 선택한 자들에게는 연락이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6장 7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런 말씀 나옵니다. 이 말은, 너희들 외에는 선택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니고요, 선택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선택을 해버려요. 그러면 선택을 한 것이 우리 인생에 계속, 계속 남아 있습니다. 남아 있다는 말은 우리 인생 안에서 선택이 우리의 몸과 마음에 계속 작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뭐가요? 하나님의 선택이요. 그러니까 내가 내 인생을 선택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이 말이.
내가 내 선택을 포기하라는 뜻입니다. 성도는 자기 인생을 자기가 선택하지 않더라도 상관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불신자는 주님의 선택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가 내 인생을 선택해야 되고, 내가 나를 붙잡아야 돼요. 내가 나를 배신하면 안 되고, 내가 나를 포기하면 안 돼요. 그게 바로 불신자의 삶입니다.
보다 완전한 것, 보다 진리적인 것, 보다 참된 것을 계속 자기 안에 끌어당겨서 이걸 자기 안에 누적을 시켜줘야 약간은 안심이 되는 그러한 참 복잡하고 간들간들한 삶이 바로 불신자의 삶입니다. 광주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죠. 성령이 없는 사람들은 수배자 신세가 되어서 하나님의 완전함에 쫓기고 있습니다.
인간이 완전하려 하는 것은 누가 눈치를 챘느냐 하면, 이미 악마가 눈치를 채고 있어요. 악마는 놀지도 않아요. 하여튼 부지런하기 짝이 없어요. 늘 우리를 송사하고 정죄합니다. “너 수배자지? 너 완전해? 너 성경 말씀 완전히 알아? 너 성경 말씀 완전히 알고 거기에 합치된 행위를 보여주는 거야?” 계속해서 추궁하며 쫓아오죠.
우리는 그러한 질책과 소송, 고소, 송사, 이거 피해서 도망쳐서 ‘이제는 안 따라오겠지?’ 하고 뒤돌아 보지만 어느새 벌써 따라와서 “똑바로 안 해? 그게 완전한 거야? 그게 네 인생을 제대로 사는 거야?”라고 자꾸만 하는 거예요. 인간은 거기에 대책이 없으니까 매일 국어책 보는 것처럼 성경만 보는 거예요.
성경 보면서 ‘이 정도 하면 됐어? 이 정도 하면 되는 거야?’ 교회 와서 충성하면서 ‘이 정도 하면 되는 거야?’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총동원해서, 자기에게 딱 집중해서 그 수배자 신세를 탈피하려고, 더 이상 쫓겨 다니지 않기를, 내 양심에 쫓겨 다니지 않는 그런 인생이 되고 싶은 거예요.
어딜 가도 추궁당하지 않는 그런 인생이고 싶어서, 선악 체계니까 자꾸 선한 것, 올바른 것, 그걸 자꾸 잔뜩 자기들이 짊어지지만, 그게 완전합니까? 문제는 그게 완전하냐 이 말이죠. 그게 완전하게 못 한 이유가 내용은 없고 형식만 가져와서 형식만 있기 때문에 완전치 않은 거예요.
형식은 격식이거든요. 오늘 본문에 보면 유대교 나옵니다. 유대인들 나와요. 14절에 “유대인들의 허탈한 이야기와” 그다음에 “진리를 배반하고” 이렇게 나와요.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인간 속에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들이는 요소가 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된 자고, 선택된 자에게는 하나님의 선택이 너무 강해서 굳이 내가 내 인생을 선택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만약에 여기 소녀들만 이 자리에 있다고 치고, 그 소녀들이 다 방탄소년단을 아주 좋아한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바쁜 방탄소년단이 여기까지 와서 누구 만나겠어요? 방탄소년단 팬클럽이 행사 진행하면서 전부다 ‘만나봤으면 좋겠는데, 만나봤으면 좋겠는데!’ 하고 있는데 몰래 방탄소년단 멤버…, 7명인지 몇 명인지 모릅니다.
하여튼 그중 하나가 와서 문 열고 쓱 들어왔다고 합시다. 그때 사회자는 봤는데 다른 사람은 앞을 보고 있어서 보지 못했을 때 사회자의 눈빛이 어떻게 달라지겠습니까? 1번, 두렵다. 2번, 떨린다. 3번, 고함친다. 몇 번이겠어요? 그냥 씩 웃었어요. 웃는 겁니다. 왜? 생각만 하고 그리워하던 그 방탄소년단이 현장에 있으니까 그냥 웃을 수밖에 없죠.
웃는다는 것은 자기 인생을 다 포기해도 괜찮다는 이야기에요, 이게. 포기해도 괜찮다는 겁니다. 왜? 주님이 현장에 있으니까. 나를 만드신 분이 여기에 있고, 나를 선택하신 분이 있고, 나에게 연락을 취하던 그분이 여기 있으니까 그냥 웃지요. 웃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무슨 고민, 인생 경험, 걱정, 쫓김? “누가 너를 정죄하리오?” 마구 정죄하라고 하세요. 마구 송사하라 하세요. “너 똑바로 안 살아?” 그런 잔소리 막 하라고 하세요. 상관없어요. 주님이 현장에 있다는 것을 못 느끼기 때문에 어쨌든 간에 내 인생 내가 건사해서 나중에 심판 날 통과를 해야 한다는 그 초조감, 어디 수능 칩니까? 어디 대학 시험 쳐요? ‘이 점수 가지고 되겠나?’ 맨날 자기 점수 보면서. 마귀는 백 점 안 맞는다고 닦달하고요.
그러니까 부지런히 쫓겨 가는 거예요. 성경에 보니까 뭐 자기를 부인하라, 어쩌고 나오니까 그것 가지고도 막 채근을 을 해요. ‘나는 못났다. 나는 부족하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이것도 시험 나온다고 계속 외우면서 이렇게 하지만 내용 없는 형식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것을 굳이 자기 입으로만 이야기한다는 이 고집은 또 뭡니까? ‘너 아무것도 아니야.’ 백번을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했는데 갑자기 누가 와서 “그래, 너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하면 멱살 쥐고 “이 씨, 넌 뭐야?” 이게 무슨 행패입니까?
유대교가 나오는데 짐승 같다, 인간도 아니다, 이 유대교, 그리고 거기에 믿음에 배신한 자, 쓸데없는 허탄한 이야기’ 이런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성경에서 성경이 알려준 대로 유대교가 무엇인지, 유대교 말고 다른 종교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복음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다른 복음부터 이야기 한 이유를 알아야 해요. 인간에게 다른 복음이 있습니다. 이 다른 복음 중에 유대교가 포함이 되는데 이 불교하고 유대교, 유대교는 유대교고요, 유대교 외에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의 모든 종교는 불교입니다. 불교가 뭐냐?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에요. 내가 신이라는 겁니다. 그게 성경에 또 나와요. 스바냐에 보면 나옵니다.
스바냐 2장 15절에 보면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하며 심중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이게 바로 니느웨, 모든 이방 민족들의 특징이 뭐냐? 바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에요. 굳이 인도에서 나온 불교를 언급하지 않아도 이미 모든 세상 사람들은 오직 자기뿐이에요.
그리고 이것이 자연스러워요. 오히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 이상해요. 오직 나는 나뿐이다, 하는 것이 솔직한, 솔직한 인간의 본성에 자리 잡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범죄 한 인간 그리고 추방된 인간으로서 내놓을 것은 바로, 나라도 건져야지. 뭐 어떻게 하겠어요?
그러면 ‘나는 나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불교라면 유대교는 뭐냐? 유대교는 하나님을 이용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으면서 ‘나는 나다.’라고 우기는 종교가 유대교입니다. 이 유대교의 특징은 이방 불교보다 더 깊이 들어가 있어요. 불교가 깊은 것 같지만 유대교가 더 깊어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더 깊어요.
불교는 어느 정도밖에 안 되냐면, ‘나는 나다.’라고 하면 자기가 절대적인 신인 줄 알고 있죠. 유대교는 그게 아니고 남이 인정할 때 비로소 내가 된다는 것이 유대교입니다. 내가 나라고 하는 것은 소용없고, 남이 인정할 때 비로소 나는 나로서 확정이 된다는 것이 유대교입니다. 그 남중에 최고의 남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여호와 하나님이 내 백성이라고 해 줄 때 우리는 비로소 인생의 목적에 접촉했다, 도달했다고 간주하는 게 유대교입니다.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뭐가 있는가? 율법이 있는 거예요. 그 율법을 계속해서 지키고, 순종하고, 충성을 다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으면 남들로부터 인정받지 않더라도 상관없어.’ 최고의 타자, 최고의 남은 하나님이니까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으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거예요. 그게 유대교입니다.
제가 유대교라고 강조하지만 유대교라는 말을 빼면 결국 남는 것은 뭐냐? 그게 한국 교회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것. 그런데 복음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진짜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만나고, 십자가만 앞장세우고, 십자가에 달린 그분이 하나님이에요. 다른 하나님은 없습니다.
십자가 하나님은 기존의 인간이, 유대교가 상상한 하나님을 다 제거해버려요. 다 떼어 내버리는 겁니다. “나 하나님 믿습니다.” 그게 바로 이단이에요, 하나님 믿는다는 게. 십자가로만 나타나신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유대교의 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내가 믿는 하나님도 맞고 거기에다가 추가적으로 십자가 지신 하나님의 아들 하나 보태면 이게 온전한 하나님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기존의 하나님을 우상으로 포기할 생각을 안 하고, 기존의 하나님도 놔두고 거기에 내용상 더 보충해서 십자가 지신 아들까지 더하면 완벽에 완벽을 기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유대교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안다고 되어 있어요, 모든 인간들은. 심지어 불교도 부처가 하나님이에요. 미륵보살이 하나님이라고요. 인간은 그 하나님을 떼어 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불교보다 유대교가 더 깊어요.
불교는, 모든 인간들은, 모든 이방인들은, 알라신도 마찬가지고 불교에요, 신이 되고자 하는 여기에 대해서 ‘내가 바로 신이다.’ 유대교는 그 이방 종교에게 말합니다. “그거 네가 얼추 그렇게 소리하는 이야기를 하나님이 인정해줬다는 조건하에 네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잖아. 좀 솔직해라.”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쪽이 유대교에요.
그래서 이슬람에 불교가 먹히지를 않습니다. 불교 말이 맞는데, 내가 신인 건 맞는데 내가 신이라고 하는 걸 누가 알아주나, 무슨 소용이 있어요? 하나님이, 알라신이 인정해줄 때, 내가 폭탄 테러를 해도 자부심을 느낄 정도로, 진짜 하나님이 인정해주는 그 정도가 돼야 어렵게 살아도 사는 보람이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이게 모든 인간의 공통점입니다.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대교에 대해서 가만두지를 않죠. 마태복음 21장 44절에 보면, 유대교 교인들을 아주 가루를 만들어 버린다고 했어요.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아주 과격한 이야기를 그 당시 대제사장 앞에서 했어요. 대제사장에게 들리라고 이야기했어요. 가루를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가루로 만들면 흙 되죠. ‘흙이 흙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런 뜻이에요.
네가 하나님을 모르니까, 엔진이 없으니까, 연락 관계가 없으니까 자기 코앞에 등장한 예수님이 하나님인 줄을 못 알아보는 거예요.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가, 자기가 추상적으로 상상한 하나님, 이게 자기가 만들어낸 하나님이거든요, 그 하나님을 쥐고 있으니까 자기 앞에 있는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은 생각도 못 한 겁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을 못 믿는 거예요.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고, 그런 건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내가 알던 하나님이 가짜고, 마귀가 그런 장난을 쳤구나.’ 하는 것을 십자가 앞에서 자인하는 자, 진짜 하나님을 만났고요, 그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그냥 씩 웃죠. 자꾸 웃음이 나와요. 그동안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가지고 평생 교회 다닌 걸 생각해 볼 때 본인이 가짜로서 웃어요.
이게 자기 자신에 구멍이 뚫린 거예요. 총 맞는 것처럼 구멍이 뚫린 겁니다. 총알 맞은 정도가 아니라 대포알 만나서 자기 자신에 구멍이 뻥 뚫려야 돼요. 뚫리면, “정신이 너무 없어. 웃음만 나와서, 그냥 웃었어, 그냥~.” ‘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지?’ 가슴이 뻥 뚫려서 바람이 휙휙~, 오락가락 불어야 돼요, 우리 안에.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이 찌꺼기 있잖아요, 이걸…, 아침부터 죄송합니다. 그걸 고상한 말로 변비라고 합니다. 찌꺼기가 자기 안에 꽉 차 가지고 바람도 안 통해요. 사는 게 답답해요, 이게. ‘이놈의 나라는 덩어리, 또 내일은 뭐 먹고 사노? 우에 이걸 질질 끌고 가노?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뭐고?’ 세월이 가면 갈수록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계속 추가가 되는 거예요.
왜 그렇게 구멍이 뚫리지 않느냐? 내가 나를 포기를 못 하니까, 나를 살리기 위해서 그냥 지식으로 지식만 계속 끌어당기는 거예요. 뇌경색에 좋은 게 뭐냐? 대마종자유. 대마종자유는 실험으로 보게 되면 우리 안에서 만성 염증을 기름 녹이듯이 체내에서 확 녹인다는 거예요.
만성 염증이 이 두뇌부터 모든 세포에 탈 나게 했으니까 그걸 녹이는 겁니다. 그리고 ‘새송이버섯 간장 구이를 자주 드시고, 식사 후에 스트레스를 일으키니까 비틀기 운동하시고, 평소에 재래시장 다니면서 운동하시고, 체지방 감소하시면 뇌경색에 좋습니다. 특히 오메가 3를 오메가 6와 함께 하시면 건강에 참 좋습니다.’
좋아서 뭐 할 건데? 이게 지식인데요. 이게 진리가 아니잖아요. 지식이잖아요, 지식. 끊임없이 지식을 추구하는 거예요. 지식은 뭐냐? 결국엔 형식으로서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감추는 용도로 지식이 자꾸 활용이 돼요. 꼭 상견례 자리 같아요. 상견례에 가게 되면 있을 때도 힘들지만 집에 오면 정신적으로 파김치 되는 이유가, 상대에게 반할 마음도 없으면서 그 티를 안 내야 한다는 이중성의 압박감, 대단히 심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물론 우리 사돈은 존경스럽죠. 굳이 이 말을 해야 돼. 상대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좋아하는 티를, 싫어하는 티를 행여나 들킬까 봐 스스로 형식적이고 실례가 안 되는 내용들만, 그런 단어만 쓰려고 하니까 이게 얼마나 힘듭니까! 집에 와서 쥐어뜯듯이 한복 벗어 던지고 “아이고, 두 번 다시는 못 만나겠다, 힘들어 죽겠어.”
사람이 형식을 갖추는 이유가, 내부의 수치스러움이 들킬까 싶어 형식을 갖추는 거예요. 그래서 인생은 뭐냐? 전부가 사기입니다. 몽땅 다 사기에요. 불교도 사기고요, 유대교도 사기입니다. 주님께서 아주 가루를 만들어버려요.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이게 주님의 말씀입니다. 제 말이 아니고. 글자 그대로 읽어도 아주 심각합니다.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너희들은 전부 다 가증스러운 공동묘지’라고 본 거예요.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7)
겉에는 뼈다귀만 들어있으면서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안에는 뼈들이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그 더러운 것을 안 들키기 위해서 겉으로 아름답게 보이려는 너희들, 그게 바로 형식에 맞춰야,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방식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하나님은 계시지, 언젠가는 죽어서 만나야 되지,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총동원해야죠. 성경을 보든지, 기도를 하든지, 헌금을 하든지, 뭘 하든지 총동원을 다 하는데 그걸 주님한테 걸려버린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 23장 33절에 보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독사의 자식이 아니에요, 새끼에요.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이 말은 뭐냐? 사람은, 이 불신자들은 지옥을 보여주기 위해서 태어나야 될 사람이고 이 땅에 등장해야 될 사람이라는 거예요. 지옥이 판결, 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지, 왜 천국에 갈 수 없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사람들이 꼭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이방신, 불교라든지 유대교, 둘의 공통점이 있어요. 이 둘 다 자아를 포기할 수가 없어요. 교회 와서 성경 읽어도 근본적으로 주님께 목숨 바칠 의사가 전혀 없이 성경을 보기 때문에, 교회는 나오는데 불교 신자고, 유대교 신자고, 알라신 믿는 이슬람 종교 믿는 사람이고 다 똑같은 거예요. 다를 게 전혀 없어요.
그렇다면 성도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선택이 우리 안에 작동하는 사람인데 작동했을 때 어떤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는가? 십자가로 찾아온 주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온 십자가와 만나 부활의 활동을 하면 우리에게 어떤 맛이, 어떤 특징이 있게 되는가? 영화에 보면 이런 대사가 있어요. “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 이것은 갈비인가, 통닭인가. 예, 수원 왕갈비 통닭입니다.” 여기 보면 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는 거예요, 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
지금 사도바울이 인간이 짐승이라고 출발하고, 유대인들 까고…, 이 유대인 까면 이방 종교는 뭐 종교도 아니죠. 그래서 모든 것이 잘못이라면 그러면 성도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을 이야기하는가? 인간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유대교 아니면 불교, 불교 아니면 유대교로 갈 수밖에 없어요. 갈비 아니면 통닭, 통닭 아니면 갈비. 인간이 낼 수 있는 재료 가지고는 그것 밖에 안 돼요. 이런 맛은 없었다, 하는 것은 인간 생각 그 이상을 뛰어넘는 활동이 우리 내부에 일어나는 겁니다.
그 활동을 위해 주께서 준비한 것은 바로 세례입니다. 성경에 세례라는 것이 나와요. 주님께서는 세례를 둘로 나누었습니다. 물세례가 먼저 있고, 그다음 물세례 다음에 불 세례, 그다음에 성령세례, 하나님이 이렇게 순서를 가지고 일을 하십니다. 세례라는 것이 뭐냐 하면, 도저히 제거될 수 없는 자아를 강제로 제거하는 방식인데 그 방식이 환경입니다, 환경.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환경으로 바꿔버려요. 새로운 환경. 그러면 새로운 환경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기존에 인간들이 시도했던 자연을 통해서 새사람 되고,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배우고 그렇게 해서 새사람 되겠다는 그 시도 자체가 다 헛방인 것을 성령을 통해서 알려줍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19절에서 22절까지 빨리 읽으면 이렇습니다. 생각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영광과 족히 비교되지 않는다, 이렇게 해놓고 19절에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라고 되어 있어요.
이것은 자연의 애도입니다. 자연의 슬픔이에요. 자연이 슬프다는 것은 그 속에 있는 우리 자신도 슬픔의 일부로서 슬퍼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겁니다. 이 자연은 그냥 슬퍼해요, 말없이. 이게 자연의 실어증인데 자연이 말을 잃어버렸어요, 너무 슬퍼서. 자연이 고대하는 것은 이 땅에, 이 자연에 없는 것을 고대해요. 그게 뭐냐?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거예요. 성도가 출현되는 것을 자연이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고 어떤 것을 주섬주섬 찾느냐 하면, 이 자연 세계에 변화를 통해서 진리를 채택하고 진리를 뽑아내려 애를 씁니다. 그러나 주님 주신 세례는 그것이 불가능하고 성립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기 A4 용지가 하나 있는데 그 용지를 제가 찢어버렸어요. 과격하죠?
자, 이 종이를 찢어버릴 때 여러분, 한 번 보세요. 종이 자체가 그 두께, 폭이 있어요, 없어요? 폭이 없잖아요. 폭이 없는데 종이를 둘로 찢었을 때 거기에 틈이 생기고 그 틈에서 이 세상에 없는 것이 나옵니다. 그게 바로 세례입니다. 마가복음 1장에 보면 하늘 자체가 찢어져요. 시공간이 찢어진다고 되어 있어요.
마가복음 1장에, 예수님이 세례받으실 때,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짐, 갈라짐으로 되어 있는데 다른 번역에는 찢어짐, 같은 뜻입니다. 강렬하게 찢어져요. 하늘이 찢어지면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이 찢어진 종이의 두께의 그 폭, 거기에 폭이 있을 리가 없죠. 그 폭 안에서 아무리 살펴봐도 이 안에 무엇도 다른 세계가, 제3의 세계가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을 못 하잖아요. 인간은 이 시공간이라는 자연 속에 덮여서 그 자연이 전부라고 여긴 거예요.
그러나 세례라는 것은 인간이 찾아낼 수 없는, 자연에 덮여있는 인간이 찾아낼 수 없고 얻을 수 없는 새로운 숨어있는, 숨어있는 세계가 세례를 통해 찢어지면서 거기서 흘러 넘쳐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구원 못 받는 거예요. 기존에 있는 것,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겁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새로운 건 없습니다. 왜냐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피조 세계거든요.
지금 로마서 8장에서 피조 세계는 뭐냐 하면, 가슴 두드리면서 말도 못 하고 지금 탄식하고 있어요. 스스로 이 자연 세계에 대해 애도하고 있고, 슬퍼하고 있는데 거기서 새로운 게 뭐가 나와요? 안 나와요. 과학? 안 나옵니다. 철학? 안 나옵니다. 그 자연의 일부가 인간이고 인간은 죽게 되어 있어요. 이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이 망하면 같이 망하게 되어 있어요.
원래 이 물세례의 처음 시조가 노아의 홍수입니다. 인간들은 그때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사업하고, 우리하고 똑같죠. 그냥 하늘 보면서 ‘우리 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늘 주고 땅 줬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런데 하늘이 이렇게 무너지고 땅이 솟아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인간들 생각에서는 ‘뭐야 이거? 우리보고 죽으라는 거야?’ 하나님은 “그래, 죽으라는 거야.”
이 자연이 같이 압사해서 자연도 죽고 인간도 죽고 그 사이에서 전부 다 죽어요. 죽으라는 거예요. 그러면 “노아는 살았잖아?” 노아가 산 게 아닙니다. 노아가 산 것이 아니고 노아와 함께 있었던 정결한 제물이 노아와 더불어 압사하는 그 가운데서 정결한 제물에서 정결한 피를 생산하고 짐승은 죽었어요.
노아는 그때 새로운 약속을 받게 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그 피, 정결한 피, 그 피에서 이 세상을 움직이는 중심부가 거기서 새롭게 발생 됩니다. 인간은 물에 다 잠겨 죽잖아요. 물에 잠겨 죽은 가운데서 새로운 언약이 나온 거예요. 그건 새 하늘과 새 땅과 같은데 무지개에 의해서 보호받는 새로운 땅을 준 겁니다. 그 땅의 중심부에 정결한 양의 피가 거기에 생긴 거예요, 양의 피가! 그 양의 피로서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서 이야기를, 연락을 취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것이 세례의 기초에요. 그래서 세례요한이 오는데요, 그 세례요한에 대해서 마태복음 21장 25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묻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요한의 세례가, 요한이 보여주는 세례 세계가, 그 내용이 기존에 있는 사람들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느냐, 아니면 인간의 아이디어에는 없는 하늘에서 새롭게 주입된 거냐?’ 묻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내용도 별로 모르면서 세례요한은 하늘로부터 왔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바통을 받은 거예요. 하늘에서 온 세례요한으로부터 받은 바통이 뭐냐? 세례 요한이 하늘로부터 왔다면 그 세례요한의 세례 내용, 그 내용에 준해서 다음에 나타난 내가 바로 하늘로부터 온 존재라는 거예요, 예수님 자신이.
땅에 있는 인간들은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온다는 사실을 상상도 못 했어요. 왜? 그들이 하나님을 믿으니까요. 믿는 게 문제에요. 하나님을 믿는 게 문제에요. 구멍이 나야 하는데. 예수 믿고 혁명? 혁명 없습니다. 해체에요, 해체입니다. 가루로 만들어요. 우리를 가루로 해체시켜 버리는 거예요.
세례요한이 물세례 주면서 자꾸 반복해서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뭐냐? “나는 물세례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물세례 아니야. 성령세례야.” 이게 한두 번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장 26절에도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너희가 알지 못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온다는 거예요.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 내가 알지 못하는 분이 오셔서 나를 가루로 만들고 내 자리에 그분이 들어서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나는 내 세계는 작살나고 예수님의 세계 속에서, 예수님의 세계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걸 아는 순간 그냥 우리는 웃죠. 그냥 웃어요. 마음에 바람 든 것처럼. “총 맞은 것처럼 정신이 너무 없어. 웃음이 나와서. 그냥 웃었어, 그냥~.”
‘하나님 뭐예요, 왜 일을 이렇게 하세요?’ 그동안 우리가 살고자 하는 이 자연 세계가 든든하다고 치고, 이 자연 세계, 해는 내일 또 뜰 거고, 달도 뜰 거고, 안정된 세계 속에서 나도 안정을 확보하겠다고, 그래서 우리가 초등학교, 중학교 때 공부하는 이유가 안정된 나를 확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종이에 틈이 있을 줄은 내가 상상도 못 했지요. 무슨 틈이 있어요, 이게. 그냥 교회 다니면 천당 갈 줄 알았죠.
요엘서 보면, 예수님도 참 과격합니다만 선지자도 참 막상막하에요. 너무너무 과격해요. 요엘 2장 1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어떻게 수행하고 어떻게 바르게 살면 복을 주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마음 가져와.” “예, 마음 가져왔습니다.” 찢어버립니다.
왜 자꾸 네 마음을 네가 가지고 있냐 이 말이죠. “아직도 안 버렸어, 그 네 마음? 아직도 네 그 마음 포기 안 했어?” 인간의 마음이 포기되어야 할 이유가요, 인간의 마음은 자꾸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해요. 사람 대우받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게 화근인 거예요. 그래서 귀신의 거처, 마귀들의 거처가 되는 겁니다. 남한테 인정받으려고 하는 거예요. 좀 포기하면 안 돼요?
그냥 버리세요. 이럴 때 전라도 말이 나와줘야 돼요. “뭣 혀? 안 버리고 뭐 헌다냐!” 진즉에 버려야 돼요, 진즉에. 뭐 백날 섬겨봤자 유대교에요. 하나님 섬기고, 봉사하고…, 전부 다 형식입니다. 각을 짜 맞춘 거예요, 각. 목사님, 이럴 때는 어떻게 합니까, 저럴 때는 어떻게 합니까, 성경 몇 장 몇 절에는 이런 게 있고…, 성경 보면 뭐합니까? 십자가를 경유하지 못하는데요.
십자가를 경유하지 못하는 해석은 국어 시간입니다. 저도 설교하지 말고 성경 죽 읽을까요? 국어 시간처럼. ‘각자 성령께서 역사하겠지.’ 역사 같은 소리 하고 있네요. 이게 뭐예요? 그럴 거면 성경 집에 가서 보지 뭐 하려고 교회까지 와서 성경 봐요? 이게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성경해석이 국어 시간이 아닌 게 나타납니다.
사도행전에 빌립집사가 있는데 그 빌립집사가 그냥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난 게 아닙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가라고 이야기 했고, 39절에 보면요,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빌립집사가 성령을 통해서 시공간을 초월해서 갑자기 사막에 등장했고 거기서 누굴 만날지 몰랐는데 갑자기 먼지 바람을 일으키면서 저쪽에서 뭔가 애굽의 고관대작이 오는데 보니까 내시였고 그 내시가 그냥 가던 갈 가시면 되는데 “마차 스톱!” 해서 31절에 보면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해놓고 뭐라고 하느냐? 성경구절을 들이미는데 성경구절이 뭐냐?
이사야 53장 7, 8절을 들이민 겁니다. 사도행전 8장 32, 33절에 나옵니다.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라고 할 때 34절에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선지자가 말한 것이 누구입니까?
이 만남을 누가 주선했느냐 하면, 사도행전 8장 26절에 보면 주님의 사자가 먼저 주선을 했어요. 섭외를 했다고요, 주의 사자가요, 천사가.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세상일 사람이 움직이는 것 아닙니다. 천사가 하는 대로 움직이고, 주님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천사가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어요. 선택받은 자, 선택받고 싶은 사람 손들라고 하면 다 들게요? 안돼요. 다 손 내려야 돼요. 선택이라 하는 것은 나는 누구도 선택하지 않는다, 가 전제된 상태에서 선택되는 겁니다. 나는 누구누구를 선택하지 않는다, 기필코 선택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켜가면서 선택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가 귀하기 짝이 없습니다. 귀하기 짝이 없어요. 성도는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바로 이런 질문이 들어 있어요. ‘이분 누구십니까, 이분?’ 그분이 누구겠어요? 하나님이지요. 이 땅에서 죽으신 분만이 하나님이에요. 이 땅에서 죽으신 분, 그 죽은 사람이 하나님이에요, 그 죽은 사람이.
자연 속에 있는 인간들은요, 자연 위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상상해서 ‘하나님이 저기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유대교에요, 유대교. 심지어 힌두교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불교의 미륵보살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도 신을 인정해요. 마찬가지예요. 비록 이름은 미륵이지만. 모든 인간은 신을 알아요. 그리고 인간에 살지 않고 하늘에서 따로 살고 있다고 다 알고 있어요.
그 악마의 아이디어, 그거 인간이 부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전부라고 알고 있는 나 자신이 내 뜻대로 부서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환경을 바꿔요. 무슨 환경? 아무것도 할 필요 없는 환경이 찾아와요. 그게 세례환경입니다. 세례라 하는 것은 노아 홍수 때 물로써 압박을 하면 물속에 갇혀 있는 노아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구원받았어요. 환경이 노아를 구원한 거예요. 이유를 알아보니 자기와 같이 방주에 탔던 정결한 짐승이 피를 흘렸는데 그 피가 바로 나를 구원한 거예요. 죄사함 받고 악마에게 더이상 수배자 노릇 안 해도 괜찮아요. 여러분, 이 종교라는 것, 결국 인간은 종교를 찾게 되어 있는데 마지막 찾는 그 종교가 이게 마귀의 덫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들어보니 어떤 사람은 바른 가르침을 찾아간다는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에요. 그중에 뭐 ‘하마 성경?’ ‘하나님의 마음으로 성경을 본다’는 ‘하마 성경’이라는 것도 있어요. 통합측에서 그걸 이단이라고 했는데 제가 그걸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기존 교회로도 충분히 이단입니다. 또 무슨 이단을 찾아요? 기존 교회마다 이단인데!
이유가 뭐냐? 말씀에 관심 없고 말씀 잘 지키는 자기한테 관심 두는 그게 이단이지 뭡니까? 자아? 안 부서졌어요. 자아가 가루 안되었어요. 해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웃을 수가 없어요. 입꼬리가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항상 입꼬리가 내려가 있어요. 혹시 누가 나를 비난할까 봐, 내가 방어를 해야 되니까 늘 긴장되어 있어요.
원래 수배자는 늘 방어 자세로 살고 있어요. 사기 치고 수배당한 사람은, 곳곳에 현상수배 사진이 붙어 있는 사람은 늘 안절부절 어쩔 수가 없어요. 늘 자기 단도리하고 자기 마음을 늘 감싸야 돼요. 그것도 구약 선지서에 나와 있습니다. 아모스 보면 그게 나와 있거든요.
아모스 9장 2, 3절에 보면 “저희가 파고 음부로 들어갈찌라도 내 손이 거기서 취하여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찌라도 내가 거기서 취하여 내리울 것이며 갈멜산 꼭대기에 숨을찌라도 내가 거기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찌라도 내가 거기서 뱀을 명하여 물게 할 것이요.”
이 슬퍼하는 자연 세계 어느 구석에 인간이 엄중한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 도피행각을 벌이는데 여러분, 도피할 곳 없습니다. 방금 이 아모스의 말을 이렇게 각색해도 괜찮아요. “통합 측에 가도 내가 끄집어낼 것이요, 합동 측에 가도 뱀에 물릴 것이요, 감리교에 가서 숨어도 내가 끄집어 당길 것이요, 침례교에 가도 끄집어 당길 것이고, 불교에 가도 끄집어 당길 것이고, 이슬람에 가도 끄집어 당길 것이다.” 어떤 인간도 이 대자연 안의 종교 안에 숨을 곳은 없습니다.
종교를 포기할 생각 하지 말고 본인을 포기해야 되는데 인간은 종교는 포기해도, 교회는 안 다녀도 본인은 포기 못 합니다. 이거 어쩔거예요, 이 문제를? 인생 이만큼 힘들게 살았는데 이제 와서 어쩔 거예요? 요엘서 이야기했습니다. 마음을 찢으면 된다는 거예요. 오늘 세 번째 찢는데 오늘 한 번 더 찢을까요?
마음을 찢으면 그 틈이 생기고 그 틈이 생겨버리면 그 틈에서 준비된 엄청난 천국의 모든 은사가 선물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단, 조건은 뭐냐? 우리 마음이 걸레가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찢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한 번 더 찢어야 되겠다. 찢어진 이것끼리 합체될 수가 없어요. 이건 뭐 스카치 테입로 붙여도 안 돼요. 찢어진 거예요.
우리 인생 왜 사느냐? 찢어지라고 사는 거예요, 찢어지라고. 내 한 몸 간수하기 위해서 ‘내가 찾는 그 진리가 어디에 있느냐?’ 진리를 왜 찾습니까? 바른 복음 전하는데? 그거 찾지 마세요. 내 마음 안 찢기겠다는 그 마음 가지고 어디 가도, 성당 가도 마찬가지지요. 어디 가도 뱀이 없을 줄 알아요?
마가복음 4장 22절에 보면요, 참 이게 어려운 말씀인데 성경에 나오네요. 나오니까 거론 안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성경 그대로 읽을 테니까 여러분은 속으로 이게 무슨 뜻인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아무리 성경이 국어로 되어 있지만 이게 너무 어려운 국어에요. 수능에 나와도 아무도 못 풀지 싶지요. 이건 1타 강사도 못 풉니다. 다시 한번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다 드러낸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너희들로 하여금 서로 자기 아지트에 들어가서 숨는 조치로서 말씀을 주겠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숨바꼭질 오징어 게임을 한다는 거예요. “내가 간다! 숨어라, 숨어라!” 할 때 어느 인간치고 구멍으로 안 숨는 인간이 없어요. 전부 다 숨어요. 나는 합동 측, 나는 통합 측, 감리, 침례…, 기어들어 가서 토굴에 다 숨고 있어요.
“숨었냐? 무궁화 꽃이 피었지?” “예, 피었습니다.” “다 숨었지? 내가 찾아간다. 너 나와, 너 나와!” 다 집어내요. 족집게로 다 집어냅니다. 그게 뭐냐? 말씀의 위력입니다. 말씀은 세례라는 환경을 가지고 우리한테 찾아오는 거예요. 세례라는 환경, 새로운 환경 가지고 찾아오는 거예요.
세례요한의 경우를 한번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3장입니다. 세례요한이 그 새로운 환경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2절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회개라는 것은 마음을 찢으라는 뜻이지요. 10절에 보면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좋은 열매 맺으면 될 것 아니냐’ 이 뜻이 아니지요. 이 말씀을 함으로써 이 말씀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가 할 수 있는 역량을 다 동원시켜서 자기를 보호할 방법을 찾아가게 만들어요. 도끼 들고 설치니까 세례요한이 설치니까…, 세례요한은 구약 사람이거든요. 세례요한이 도끼 들고 설치니까 ‘야, 나 살려야 돼. 마지막 심판 날이 오는데 나 살려야 돼.’라고 나름 자기 사는 방식을 찾아서 다 기어들어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회개도 하고요, 좋은 열매 맺으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요 역할이 세례요한 역할이고 그게 다입니다. “각자 구멍으로 다 들어갔지?” 그다음에 ‘성령과 불로써 너희에게 세례를 준다’는 거예요.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11절) 성령과 불로써 너희에게 세례를 준다, 라는 이 말씀은 바로 불로 세례 줄 자와 성령세례 줄 자를 주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해서 분류시키는 작업을 내 뒤에 오시는 분이 해내신다는 거예요.
왜? 어차피 인간은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자기 한 몸 건사하기 위해서 신경 바짝 쓰면서 늘 긴장된 상태에서 힘든 인생 살아가는 것은 고만고만하거든요. 모든 인간이 다 그렇게 살아가거든요. 자기 힘으로 자기를 부인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여기에 누가 뛰어드느냐? 예수님이 거기에 뛰어들었어요.
아까 본 것처럼 하늘이 찢어지면서 거기서 성령이 내려온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주님께서 세례요한이 깔아놓은 이 율법의 세계, 정죄의 세계에 찾아갑니다. 성령의 세례를 선물로 준비해 놓으시고 거기서 자기 백성을 찾아갑니다. 율법으로 열매 없음을 뻔히 아시고, 율법으로는 내놓을 것이 없음을 뻔히 아시고 그다음에 성령으로 그들에게 죄사함을 주시는 겁니다.
“다시는 쫓겨다니는 생활을 그만하라. 내가 너에게 죄사함을 주노라. 이제는 그냥 나와 함께 다니면서, 입꼬리 올라가면서, 늘 싱긋이 웃으면서 그냥 헛웃음이라도 좋으니까 자꾸 웃음이 나오는 생활을 하”시라는 그 말입니다. 왜? 내 것이 없으니까 웃음이 나오지요. 내 것이 있는데 무슨 웃음이 나와요. 썩은 미소만 나오지 나올 게 뭐가 있겠어요.
다만 이것이 성령이 주시는 자유며 기존의 종교에서 이런 맛은 없었다! 갈비냐 통닭이냐? 갈비 맛도 아니고 통닭 맛도 아니고 그것은 세례, 성령과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세례의 맛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