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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신앙 스크랩 왜 우리는 청교도의 길을 가야 하는가?
강대식 추천 0 조회 200 11.04.27 08:3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왜청교도의길을가야하는가.hwp

왜 우리는 청교도의 길을 가야 하는가?

 

1. 청교도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청교도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영국에서는, 그들을 핍박한 기득권자들인 국교도들이 만들어 내었고, 미국과 유럽에서는, 마찬가지로 그들을 반대하는 기득권자들이 만들어 냈다.

 

제임스 패커의 말이다.

“청교도”라는 이름은 애시당초 진흙 구덩이에서 나왔다. 1560년 초에 탄생한 이 이름은 분리주의자들, ‘까탈스럽고 비판적이며 위선적인 작당‘이라는 풍자적인 단어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왕정에 반대하는 ’공화주의 도당‘을 의미했다.

영국에서 반청교도 감정은 왕정복고 시대에 물꼬를 텄다가 그 이후 꽃을 피웠다.

미국에서는 조나단 에드워즈 시대 이후 서서히 꿈틀거리다가

약 100년 전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

그런데 지난 50년 동안 학자들은 그 진흙을 말끔히 씻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교도들의 대표적인 저작들을 읽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청교도들에게 덧씌워진 진흙 덩어리들을 씻어내지 못하고 있다.

역사를 모르고, 자기 신학에 대한 독단이 빚어내는 산물이다.

 

나 역시 약 5년 전만 해도 내가 붙들고 있는 보수신학이 최고이고, 전부인 줄 알았다.

청교도들의 대표적인 저작들을 읽고서는,

보수신학도 시대사상으로 접근한 것이고, 순수한 성경적인 해석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청교도 성경해석을 종합했다고 할 수 있는 로이드 존스의 로마서강해와 에베소서강해를

읽어보면 그 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로마서 해석이 얼마나 비성경적인지를 알 수 있다.

로마서가 성경 전체의 복음을 가장 체계적으로 잘 정리한 책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로마서 해석이 잘못 되었다는 것은 성경 해석 전체가 잘못 된 것이 되고 만다.

 

보수신학에서 교과서처럼 여기는 벌코프의 조직신학도 로이드 존스의 교리강좌 세 권(청교도 해석의 진수임)을 읽어 보면, 그 책을 내려놓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를 쓴 옥성호집사는 이 교리강좌를 읽고 신앙을 되찾았고

평생의 스승으로 삼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청교도는 고약하고 고리타분하고 율법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이 아니다.

청교도는 살 수 없는 것들을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이 결코 아니다.

청교도는 이조 시대의 청백리나 도닦는 사람들이 결코 아니다.

 

적대 세력들이 청교도를 싫어하여 악한 의도로 만들어낸 이미지 일 뿐이다.

묵은 누룩들과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들이 만들어낸 이미지일 뿐이다.(고전 5:7)

그런 선입견과 편견을 씻어내지 않으면 청교도들의 진수(그 순수함과 진실)를 결코 맛볼 수 없다.

 

청교도들은 한 마디로 예수님처럼, 사도와 선지자들처럼 살고자 한 사람들이다.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기까지 300년간 핍박속에 기독교를 세웠던 초대교회 교인들처럼

청교도들도 종교개혁으로부터 300년간 핍박속에 가장 순수한 신앙을 산 사람들이다.

로이드 존스는 기독교 2천년 역사를 통하여 예수를 가장 잘 믿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청교도들은 오직 성경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성경대로 성령을 따라 믿는 사람들이다.

성경의 진리들을 오직 성경으로 오직 성령의 조명으로 해석하고 교리를 세우고

그 교리를 삶의 기준과 원칙으로 삼고 모든 삶의 영역에 적용하고자 한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누룩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율법화를 대표하고, 사두개인들은 세속화를 대표한다.

진정한 청교도들은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이 결코 아니다.

 

휫트필드는 말했다.

청교도들은 빛 가운데 불타오르는 빛의 사람들이었다. 검은 성 바돌로뮤의 날의 조치 때문에 쫓겨나 대로와 울타리와 헛간과 들에서조차 설교할 권리를 박탈당했을 때, 청교도들은 여전히 말씀의 권위를 가진 사람들로서 특별한 방식으로 글을 쓰고 설교했다. 지금은 그들 모두가 이 세상에 없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글을 통해 말하고 있다. 이 시간에도 특별한 기름부으심이 그들을 따라다니고 있다.

 

조엘 비키는 청교도들의 작품들이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하는 역사를 이렇게 말한다.

19세기의 마지막 즈음에 전혀 다른 사상적 흐름이 대서양의 양편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청교도들의 칼빈주의는 낡은 것으로 여겨졌으며, 청교도주의의 심장이자 핵인 성경에 최고의 권위를 두는 시각은 전혀 다른 관점으로 바뀌었다. 기독교가 보다 학문적이고 과학적이어야 한다고 외치면서, 그들은 그들의 불신앙과 배교를 합리화했다. “훌륭한 옛 청교도의 작품들”은 북미와 영국의 출판사에서 출판을 멈추었다. 청교도 작품들이 쓰레기통에 버려지거나 폐기물 수집을 위해 팔리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청교도 작품들은 그 영향력이 쇠퇴하여 읽히지 않아 도서관 서재에 꽂혀져 방치되었고, 중고 서점과 진열대에서 헐값으로도 팔리지 않게 되었다.

그러던 때에 하나님의 손길로, 런던에서 로이드 존스 박사의 사역이 청교도 작품들에 대한 필요를 재생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수시로 자신의 설교에서 청교도 작품들을 언급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 내용의 출처를 궁금해 하도록 했다. 로이드 존스는 그들을 에반젤리컬 도서관(런던 소재)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청교도 작품의 재인쇄본이 발간될 때까지 1950년부터 콘퍼런스를 열어 이를 수년 간 주재했다.

 

2. 청교도들의 특징/ 조엘 비키

 

1) 청교도들은 성경으로 삶을 형성했다.

그들은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으로 살며 호흡하면서, 말씀에 수반되는 성령의 능력을 향유했다. 그들은 성경 66권을 은혜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해진 성령의 서제로 생각했다.

그들이 영원토록 신뢰할 수 있는 진리를 주시는 보고(寶庫)로 성경을 바라보았다.

존 플라벨, “성경은 우리에게, 삶에 있어서 최선의 방식과, 고난을 대처하는 가장 고상한 길과, 죽음을 맞는 가장 평안한 방법을 가르쳐 준다.”

 

2) 청교도들은 지성과 실천을 완벽히 결합시켰다.

그들은 지성을 신앙이 머무는 전당으로 이해했다. 존 프레스턴은 말했다. “회심에 있어서 이성은 고양되기 마련이다.” 코튼 매더도 말했다. “무지함은 경건의 어머니가 아니라 이단의 어머니일 뿐이다.” 청교도들은 지성이 없는 기독교는 뼈가 없는 연체동물과 같다고 생각했다. 반지성적인 복음은 급한 필요나 채우는 텅 빈 혹은 형태 없는 복음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신자와 불신자간에 지성의 차이가 없다면 삶에 있어서도 차이가 없게 될 것이다.

(오늘날 교회와 교인들은 지성을 놔버리고, 믿음신학, 형통의 신학들에 매달리고 있다)

 

3) 청교도들은 그리스도에 집중적 관심을 두었다.

아이작 암브로스, “그리스도를 성경 전체의 본질이자 정수이며 영혼인 동시에 목적으로 여기라,” 청교도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했고 그분의 아름다움에 대해 많은 글을 남겼다.

 

4) 청교도들은 시련과 시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었다.

청교도들은 시련과 시험은 우리를 겸손해지도록 만들기 위해(신8:2), 죄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습1:12),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나아오도록 이끌기 위해(호5:15)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고 가르쳤다. 로버트 레이튼, “환란과 고통은 천국이 그 보석을 닦아서 빛나도록 다듬기 위한 다이아몬드 가루다.”

 

5) 청교도들은 두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었다.

청교도들은 우리가 이 땅에서의 순례의 길에서 시종일관 “우리의 눈 속에” 천국을 지녀야만 한다고 믿었다. 천국을 향한 “영광의 소망”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제임스 패커는 “왜 청교도를 알아야 하는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청교도들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성숙이다. 청교도들은 성숙이 무엇인가 모범을 보여 주었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애숭이에 불과하다. 우리는 영적 난쟁이들이다. 반대로 청교도들은 장대한 거인들이었다. 그들은 위대한 하나님을 섬기는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들에게는 맑은 정신에서 나오는 치열함과 따뜻한 가슴에서 나오는 열정이 한가지로 있었다. 그들은 위대한 신자, 산 소망, 지칠 줄 모르는 실천가, 그리고 끊임없이 고난당하는 질고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겪은 고난(영국에서는 당국자들이, 미국에서는 조악한 자연 환경이 그들을 덮쳤다)은 그들을 단련시키고 원숙하게 하여 아주 훌륭한 성장을 이루게 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편안함과 호사스러움은 성숙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러나 고난과 역경은 성숙에 이르게 한다. 청교도들은 영적 전투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었다. 오래 계속되는 압박과 좌절에도 불구하고 명랑하고 평화를 사랑하며, 인내하고 순종하며, 희망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그들이 거둔 도덕적이고 영적인 승리 때문에 히브리서 11장이 그 현관이랄 수 있는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는 영예를 얻었다.

 

3. 청교도 작품을 읽어야 하는 10가지 이유 / 돈 키슬러

 

1) 청교도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생각을 높이 고양시켜 준다.

여러분이 청교도를 읽기 시작하면 ‘영적인 의미에서’ 다소 고독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의 마음은 읽고 느끼면서 흥분하기 시작하겠지만, 여러분이 말하는 것을 알아 들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여러분은 참으로 고립될 수 있다.

여러분은 보통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으며, 여러분이 생각하는 차원의 깊이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 이처럼 빈약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책을 거의 읽지 않게 때문이다.

독서는 우리가 생각하도록 만들어 준다. 우리는 지금 글자문화 대신에 시각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대부분의 의사소통이 사진, 비디오, 영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할 사고 작용이 이미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굳이 개념들과 씨름할 필요가 없다. 누군가가 우리를 대신해서 사진 속에 있는 내용을 해석해 준다. 청교도 시대에는 사상들이 책에 담겨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책 속에 있는 사상들과 씨름해야 했다.

포스트맨은 독서와 사고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 준다. 청교도는 무엇보다 위대한 사상가들이었다. 또한 청교도는 위대한 독서가들이었다.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2) 청교도는 그리스도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다.

새뮤얼 러더포드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리스도의 달콤함은 내게 우주만큼 크다네. 오, 영혼이 가장 높은 하늘만큼 넓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 담아 낼 수만 있다면! 수십조 개의 세상과 그만큼 많은 하늘이 있고 그곳이 사람들과 천사들로 가득하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부족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일세. 그리스도는 생명의 샘이시네. 저 아름답고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그리스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네.”

 

3) 청교도는 그리스도의 충족성을 이해하도록 도와 준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필요하지만 인생을 헤쳐 나가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심리학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리스도가 만유시고 만유 안에 계시다면, 우리가 어떻게 문제 해결을 위해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겠는가? 제레미아 버로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데에는 충분하지만 당신을 만족시키기는 데에는 불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큰 신성모독인가!”라고 말한다. 프로이드가 태어나기 한참 전에 이미 한 청교도가 현대의 심리적 혼란의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

 

4) 청교도는 삶과 경건에 있어 성경의 충족성을 보여준다.

자존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존경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과 같이 창조되었다면 어떻게 자존감을 결여할 수 있단 말인가?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생명을 위해 일대일로 자기의 생명을 교환하신 것이다. 이것이 여러분의 진정한 가치이다!

청교도는 성경에 기초한 참된 상담자였다. 그들은 최고의 상담은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열리고 해석되고 적용될 때 일어난다는 것을 이해했다. 300여년전 아이작 엠브로즈는 <그리스도인 군사>에서 성경으로 충만하지 않은 사람에게 조언을 받는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에 대해 이렇게 썼다. “상처 때문에 위로를 얻고자 하는 영혼은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면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 의사도 아닌 불신자에게 당신의 질병을 보여준단 말인가? 모든 질병을 고치는 하나님께로 가시라. 하나님은 진정으로 당신을 인도하신다. 바울이 성령에 의해 회심했을 때, 바울은 혈육과 의논하지 않고 즉시로 하나님께 순종했다. 혈육과 의논하지 마시라.”

하나님과 가장 친숙한 사람들이야말로 영혼을 치료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람들이다. 사실상 청교도는 ‘영혼의 의사’로 불린다. 토머스 왓슨은 <죄는 영혼의 질병이다 그리스도는 영혼의 의사다>라는 논문을 썼다.

 

5) 청교도는 죄의 본성이 얼마나 가증스러운지를 가르쳐 준다.

죄 교리는 신학이라는 전체 스웨터를 풀어줄 실마리이다. 죄 교리에서 벗어나면 다른 모든 교리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죄가 고통보다 더 나쁘지만 사람들은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반면 죄를 피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버로스는 죄가 지옥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죄가 지옥보다 더 나쁘다고 주장한다.

조나단 에드워즈, “하나님은 무한히 거룩하시므로 죄는 무한히 악하다.”

 

6) 청교도는 실제적인 삶에서 우리를 도와준다.

팀 켈러는 리처드 백스터의 <성도의 생활 지침서>를 ‘이제껏 만들어진 성경적인 상담안내서 중에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패커는 이 책을 기독교 서적 중에서 성경 다음으로 훌륭한 책이라고 평했다. 이 책은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시켰던 사람의 천재성을 보여 준다. 죄악된 영혼을 치료하는 데 사용되던 심리학이라는 용어가 차츰 병든 마음을 고치는데 사용되기 시작했다. 심리학은 영혼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목사들의 손에서 불신자가 대부분인 상담가들의 손으로 옮겨졌다.

루이스 베일리의 <경건의 연습>은 청교도의 경건생활의 안내서의 모델로 생각할 수 있다. 이 책의 기본 생각은 한 사람의 하루와 인생을 성경을 기준으로 규정해 보자는 것이다. 존 거스트너 박사는 이 책이 청교도 운동을 낳았다고 했다. 나다나엘 래뉴의 <고독, 경건한 묵상으로 향상시키기>는 영적인 묵상에 관한 청교도 작품 중에서 고전으로 손꼽힌다. “여러분이 홀로 있는 시간조차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품에 관해 묵상하면서 여러분의 마음을 선하게 사용함으로써그 시간을 향상시킬 수 있다.” 청교도에게 제11계명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을 낭비하지 말지니라“일 것이다.

 

7) 청교도는 성경적인 복음전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오늘날의 복음 전도는 대체로 인간중심적이다. 그러나 청교도의 복음전도는 하나님 중심적이었다. 오늘날 거의 상실된 하나의 교리가 청교도에게 있었는데 그것은 ‘구도’ 혹은 ‘구원을 위한 준비’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수단들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이와 같은 수단들을 사용해야만 한다.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면 나는 누군가가 그리스도에 관한 정통교리를 설교하는 것을 들어야만 한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고자 하신다면 하나님의 정상적인 수단은 그 복음 설교일 것이다.

구도는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아무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구원’을 찾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구도로서 구원을 얻지는 않지만 구도하지 않고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

 

8) 청교도는 올바른 삶의 우선순위를 가지도록 도와준다.

고후5:9,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어떤 청교도는 이 말씀을 “하나님의 미소는 나의 가장 큰 상급이요, 하나님의 찡그리심은 나의 가장 큰 두려움이다”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함께 보내는 사람들과 비슷해진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청교도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영원에 대한 투자가 될 것이다.

 

9) 청교도는 하나님과 올바르게 관계 맺는 법을 가르쳐 준다.

 

10) 청교도는 성경 말씀의 권위를 높여 준다.

우리는 신실한 사역자가 바로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버린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이유는 순종하라고 주신 것이다. 토마스 테일러, “하나님의 말씀은 그 위엄과 권위가 영원히 보존되도록 전달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대사들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할 때는 마치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듯이 말해야 한다. 말씀의 권위에 저항하거나 그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무서운 죄다. 하나님은 자기의 일꾼들이 거절 당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실 것이다.”

청교도들이 갖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성경에 대한 경외심에서 왔다. 만일 우리가 청교도들이 하나님을 알던 것처럼 하나님을 알려면, 우리도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이 사랑을 키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부지런하고도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청교도를 읽는 것이 그 다음으로 좋다. 사실상 청교도를 읽는 것은 교회 역사상 가장 훌륭한 지성인들이 있는 학교에 입학하는 것과 같다. ‘여러분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과 비슷해질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청교도를 읽는 것은 시간을 가장 잘 활용하는 것이다. 오, 우리가 청교도와 같이 가장 높이 경배하고 찬양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4. 청교도들에게서 배울 교훈/ 제임스 패커

 

1) 그들의 통일된 일상에서 교훈을 배워야 한다. 그들의 기독교가 포괄적이었듯이 그들의 삶 역시 통짜였다. “주님 앞에서 거룩”의 태도로, 개인의 능력과 활동의 계발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한 가지 목적으로 살았다. 그들에게는 성속의 분리가 없었다. 만물은 선하고 모든 활동은 성결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한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하늘에 소망을 두고 질서를 존중하며, 실제적이며 현실적이고, 기도하고 큰 뜻을 품으며, 실천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들은 인생을 나눌 수 없는 한 덩어리로 보았기 때문에 철저하게 양심적이고 사려깊게 행동과 묵상, 노동와 예배, 하나님 사랑과 이웃 및 자기 사랑, 사회적 정체성과 개인적 정체성, 그리고 관계가 부과하는 넓은 책임과 개개인을 통일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철저함을 바탕으로 성경이 규정한 그리스도인의 광범위한 전체 의무를 고루 이행하는 균형 잡힌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방법”과 계획에 따라 세심한 시간 안배를 하며 살았다. 그들 안에 값지고 귀한 보배가 들어 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갈 길이 먼 사람들에게 필요한 지혜이다!

 

2) 뼈를 깍는 듯한 그들의 영적 경험에서 교훈을 배워야 한다. 청교도들은 하나님과 교통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은 것 만큼 성경을 지극히 높였다. 청교도들은 그들에게 적용된다고 본 전체 성경 진리에 관해 논증적이고 조직적으로 묵상했다. 청교도들은 성경이 성결에 이르는 불변적 잣대임을 알고, 결코 이 점을 잊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타락한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정직하지 못하고 기만적인가 알았으므로, 겸손과 자기 의심을 버릇처럼 몸에 지니려고 했고, 영적인 등하 불명이 없는지, 혹 내면에 잠복하고 있는 악은 없는지 자기 점검에 게으르지 않았다.

 

3) 그들의 실효를 거두는 행동에서 교훈을 배워야 한다.

그들은 순수한 실천가요 행동가요, 그들 안에서, 그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어떤 옳은 행위가 있었다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는 그분의 종들이었다. 그들은 결코 교회나 국가를 전복하는 혁명가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변화가 요청되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비밀 요원이 되어 효과적인 변화를 일으키기를 소원했다. 오늘날 서구 그리스도인들은 열심이라고는 싸늘히 식었고 수동적이며 두려워할 줄만 알뿐이다. 개인 경건주의라는 고치 속에 꼭꼭 숨어 지낼 뿐, 대부분의 공공사는 나 몰라라 내버려 둔다.

 

4) 가정의 견고함을 위하는 그들의 조처들에게서 교훈을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인 가정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청교도의 결혼 윤리는 일생을 함께 할 좋은 친구로서 오래 동안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이를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 그들의 자녀 교육은 정도를 행하고 몸과 마음을 함께 돌아보며, 건실하고 경건하며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생활을 꾸려갈 성인으로 키우는 데 그 목표를 두었다. 선의, 인내, 일관성, 그리고 불요불굴의 태도를 으뜸되는 가정의 덕목으로 여겼다. 30세를 밑도는 평균 수명, 아이 가운데 최소한 몇 명은 잃던 시절, 경제적으로 곤핍을 당하던 시절에 가정 생활은 인격의 바탕을 닦는 학교였다.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가정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고 최선을 다한 청교도들의 강인함은 칭송받아 마땅하다. 청교도 평신도들이 복음 전도와 사역을 실천한 곳은 다른 곳이 아닌 가정이었다.

 

5) 인간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그들의 자세에서 교훈을 배워야 한다. 그들은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도덕적인 문제, 영원, 그리고 인간 영혼의 위대함에 관한 분명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

 

6) 교회 개혁에 관한 청교도적 이상에서 교훈을 배워야 한다.

백스터에게 “개신교” 목사는 칼빈주의를 유포하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설교자, 교사, 요리 문답가, 그리고 삶의 모범으로서, 말하자면 “부흥의 열기가 있는”, 또는 “개혁된” 사역을 펼치는 사람이었다. “개혁”의 본질은 하나님의 진리를 풍부하게 이해하고 그분을 향한 열심을 불태우며, 헌신과 사랑 그리고 기쁨의 불꽃을 돋우고 그의 부르심과 개인 생활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뜻을 뚜렷하게 펼치는 것이었다. - 리랜드 라이큰, 「청교도- 이 세상의 성자들에서」

 

5. 로이드 존스의 청교도론

 

요약하면, 청교도의 특징은 무엇인가? 국교도와 청교도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들은 다 프로테스탄트였으며 16세기 말엽까지는 사실상 모두 칼빈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들은 모두 프로테스탄트였고 칼빈주의자였으며 국가 교회를 믿었다. 이것은 그들의 공통점이었다. 그러면 차이는 무엇인가? 참된 차이는 그들은 모두 프로테스탄트였지만 국교도들은 언제나 “카톨릭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본질적인 차이이다. 그들은 모두 하나의 포괄적인 교회, 하나의 국가적인 연관을 가진 교회를 믿었다.

 

청교도와 국교도의 차이는 교회의 본질에 대한 관심의 문제였다. 그것은 완전하고 철저한 개혁에 대한 열망이었다. 그것은 의식들과 예복들을 반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으나 교회의 교리 전체로 발전되어 나갔다. 청교도는 부분적으로 개혁된 교회에 만족하지 않고 완전하게 개혁된 교회를 원했다.

 

청교도와 국교도 사이의 차이는 국제적인 시각과 한 국가적인 시각의 차이라 할 수 있다.

녹스와 청교도들은 국제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국교도들은 국내에만 있어서 국내적인 사고방식만 갖고 있었다. 리츠드 콕스가 일차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것은 “영국 교회의 얼굴”이었다. 청교도는 언제나 신약으로 돌아가기 원했다. 국교도는 역시 전통과 관습과 계속성에 관심이 있었다. 언제나 계속성을 강조했다. 영국 국교회는 “중간 교회”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기들은 개혁교회일 뿐만 아니라 카톨릭 교회라고 언제나 주장해 왔다. 계속성과 전통!

청교도는 모든 것을 오로지 성경의 가르침에 기초한 반면, 국교도는 이성을 끌어들였다.

청교도들은 복음적인 관점만이 유일한 관점이라고 하는 반면에, 국교도는 복음주의는 하나의 관점이요 하나의 강조점이요 하나의 태도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강조점을 선포할 자유만 얻는다면, 포괄적인 교회의 부분이 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교도는 이렇게 하지 않으려 했다.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차이이다.

 

실제 영역에 있어서의 차이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청교도는 예배의 신령성을 강조한다. 국교도는 예배의 형식적인 면을 강조한다. 예배의 구성에 더 관심이 있다. 청교도는 교제에 관심이 있는 반면에 국교도는 보다 더 개인주의적이다. 모인 교회라는 개념은 청교도 사상에 있어서 핵심과도 같다. 그러나 국교도는 보다 더 개인주의적이다. 청교도는 죄를 색출해 내어버리는 것이나 엄격한 교회 훈육을 믿었다. 국교도는 외면적 일치에 만족하는 경향을 보인다.

 

1662년 이후 300년의 역사는 로마 카톨릭의 잔재로 여겨졌던 것에 복종하는 일보다 차라리 추방당하는 것을 택했던 사람들이 옳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준다. 청교도주의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정신 구조요 하나의 정신이다.

 

참된 청교도주의는 궁극적으로 장로회주의 안에서 발견된다고 저는 주장한다. 특히 존 녹스에게서 말이다. 토머스 카트라이트에게서도 발견된다. 분리주의적인 관점을 취했던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되며, 뉴잉글랜드 교회들에서도 발견된다. 또 비국교도와 독립파, 침례교도들 중에서도 발견된다. 그리고 토머스 굿윈이나 존 오웬에게서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바로 본질적인 청교도 정신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교회와 교회론을 중심적 위치에 두었기 때문이다. 스펄전에게서도 같은 방법의 본질적 청교도 정신을 보게 된다. 그는 청교도적 사고 방식의 완벽한 실례이다.

 

오늘날 국교회적 사고를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침례교 연맹, 영국 회중교회, 메소디즘과 청교도주의를 기원으로 하는 기타 교회들이다. 그들은 청교도가 아니라 국교도로서 생각함으로써 자신들의 기원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청교도는 일차적으로 순전한 교회, 진실로 개혁된 교회에 관심이 있다. 은혜의 교리를 크게 강조하고 목회 신학에 강조점을 두며 청교도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존경할지라도, 첫 번째 관심이 순전한 교회, 성도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에 관심이 없다면 자신을 청교도라고 부를 자격이 없다.

 

청교도주의는 철저한 개혁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여 교회의 교리 전체로 나아간다. 우리는 청교도주의의 다른 면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또한 그들이 교훈의 위대한 자료들이 되었던 것에 대해서도 감사한다. 만일 우리가 교회의 교리를 중심에 놓지 못하면 참된 청교도의 자세, 청교도의 사고방식, 청교도의 정신, 청교도의 이해를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청교도들의 실패 원인

 

로드의 분명한 패배가 승리로 바뀌어 버린 이 엄청난 변화의 원인은 무엇인가? 로드는 고소당하여 사형 판결을 받았고 그 편에 속한 모든 것들이 패배한 것처럼 보였다. 찰스 1세가 처형되었을 때는 특히 그랬다. 완전히 패퇴할 것같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62년에 그 사람들이 승리했다. 거의 완전히 멸절당한 것 같이 보이던 로드파가 다시 권력을 장악하였고 대단한 승리를 축하했다. 이 기간 동안 내내 상승세를 타고 있었던 청교도들은 특별히 무엇이 잘못되어 있었는가?

 

1) 종교와 정치의 혼합이다. 이것이야말로 청교도 역사에서 가장 마귀적인 것이다. 공동의 적을 이기기 위해 서로 타협하게 되었다. 교회 내의 종교를 정치와 혼합시키는 것은 언제나 위험하다. 1640년부터 1662년까지의 기간이 주는 교훈을 배워 그처럼 세상에 휘말리는 일에서 벗어나기 바란다. 우리는 영적 무기를 가지고 주님의 싸움을 싸워야 한다.

 

2) 훨씬 더 비극적인데, 그것은 청교도들 사이에 일어난 불행하고 후회스러운 분쟁이다.

청교도들 사이에 분열이 생겼다.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났다. 장로교파, 독립교회파, 제5왕정파, 퀘이커파, 개간파, 평등주의파, --. 영국 국교회의 정책은 이들을 “분열시켜 정복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성공적이었다. 그 결과 1662년의 재난이 도래하게 되었다. 청교도들이 사분 오열되어 싸우고 있는 동안, 거의 대부분이 대륙으로 도피했던 로드파 사람들은 자기편 사람들의 회복을 위해서 계획을 세우고 모의했다.

 

3) 장로교도들도 국교회 사람들만큼 의회의 법령과 국가의 권세를 이용해 자기들의 특별한 교회관에 복종하도록 대중들을 억눌러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1644년에 그들은 국가의 권력과 의회의 입법 조치를 통해 자기들의 관점을 강요했다. 이러한 관점은, 궁극적으로 문제는 변덕스러운 대중들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 결과 크롬웰을 내세웠던 런던의 대중들이 1660년에는 찰스 2세가 돌아오는 것을 환영했다. 똑같은 사람들이 말이다. 법을 제정하는 권세와 교리를 강요하는 권세를 국가에게 주면 언제나 이러한 결과가 따라온다.

 

그들은 “엄격한 종교적 행동”을 의회의 법률 조항에 의해서 강요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스포츠나 오락 및 기타의 것들에 대해서 법 조항을 통과시켰던 것이다. 공화정 기간 동안 주어진 방법대로 살도록 강요받았던 런던 대중들은 그것들을 믿은 적도 없고 또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매우 지치고 진력이 나게 되었다. 이것이 주요 원인의 하나가 되어, 왕정제로 다시 바뀌어 왕을 데려와야 한다고 하며, 삶을 망치는 청교도들을 제거해야겠다고 말하게 되었다. 도덕적, 영적 설득을 통해서가 아니라, 의회의 법률 조항을 통하는 식으로 도덕을 “강요하는” 것은 그 자체에 대한 반작용을 낳게 되는 것 같다.

 

만일 이 모든 분파와 파당이 놀라운 기회를 맞았을 때 보조를 같이 하기만 했다면, 특히 찰스 2세의 복귀 때 그랬더라면- 그들이 보편적인 종교적 관용에 대해 보조를 같이 하기만 했다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장로교도들은 그 일에 동조하지 않았다. 반드시 장로교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일 청교도들이 어떤 한 체제보다는 보편적으로 종교적 관용을 위해서 함께 연합했다면, 그 당시와 그후 300년 동안의 역사는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너무 늦게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존 오웬이나 토머스 굿윈 등 다른 많은 사람들이 취했던 입장이 진리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해를 많이 받았고 영광스러운 가능성과 기회가 지나가 버린 때였다.

 

만일 우리가 진리가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면, 그것을 붙잡고 그것을 위해서 싸우며 모든 타협을 거절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어떠한 대가를 요구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모든 유혹, 모든 제안, 모든 아첨, 명예를 주겠다는 속임수를 모두 거절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대적하여 사용되는 간계들을 간파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어떤 직책을 주겠다든지, 어떤 명예로운 지위를 주겠다든지, 승진을 시켜 주겠다든지, 우리 교단의 어떤 자리를 주겠다든지,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을 준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야 믿음과 교회의 순결성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싸울 수 있다. 그들의 입장을 알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입장에 입각하여 행동했던 이 사람들을 기념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우리에게 이들의 자취를 따라갈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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