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크 헤너그라프, “바벨탑에 갇힌 복음”, 새물결플러스
믿음운동의 거성들이 기독교에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다. 케년을 대중화시킨 해긴은 그의 오류를 확대했고 덧붙였다. 차악에서 최악으로의 개악은 케네스 코플랜드와 베니 힌과 같은 유포자들로 인해 계속 진행되고 있고, 이제는 제이크스 그리고 조이스 마이어 같은 “믿으면 다 된다”는 믿음운동 주창자들의 설교와 실천을 통해서 한층 더 심각해지고 있다.
론다 번의 ‘시크릿’,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 등이 베스트 셀러로 팔리고 있다. 성경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문화적 변혁의 일꾼이요 주창자에서 추종자와 모방자로 변질되고 있다. 대중문화가 조금만 움직여도,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덥석 미끼를 무는 어리석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성경적인 신앙의 모범은 늘어만 가는 요망스런 유행들과 공식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영적 훈련을 받고자 하는 성경적인 열망이 오히려 믿음신학의 견고한 토대를 제공하고 있다.
조엘 오스틴, ‘우리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말이 중요하다. 믿음 혹은 상상력을 동원해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신의 인생을 향해서 믿음의 말을 해야 한다. 당신의 말에는 엄청난 창조의 힘이 깃들어 있다. 무엇인가를 말하는 순간, 당신은 그 말에 생명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 원리이다. 좋은 말을 하건, 나쁜 말을 하건, 긍정적인 말을 하건, 부정적인 말을 하건 이 원리는 동일하게 적용된다.’
론다 번이 그녀가 찾은 ‘삶의 비결’, ‘플라톤, 세익스피어, 뉴턴, 베토벤, 링컨, 에머슨, 아인슈타인 등 역사의 위인들’ 중 1퍼센트 만이 알았다는 삶의 비결을 알리자 전 세계가 주목했다. 출간 수 주 만에 ‘시크릿’은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문화 현상으로까지 자리 잡게 되었다. 오프라 윈프리는 ‘시크릿’을 ‘삶을 변화시키는’ 책이라 추켜 세웠다.
‘시크릿’은 ‘끌어당김의 법칙’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승들은 끌어당김의 법칙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법칙이라고 말했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창조의 법칙이다. 양자물리학은 온 우주가 생각에서 나왔다고 가르친다. 당신은 생각들 그리고 끌어당김의 법칙을 통해서 자기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다. 역사 이래 이 법칙은 당신과 모든 다른 사람의 인생에서 쭉 작용해왔다.’
시크릿에서 사용된 창조 과정은 신약성경에서 따온 것이다. 이 과정은 간단한 3단계로 당신이 원하는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지침이 되어준다. ‘구하라, 믿어라, 그리고 받아라’.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들과 마주치면 그 사람들을 자세히 보지 말라. 당신의 마음에 즉시 완벽한 몸매를 지닌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도록 하라. 그 결과 나는 지금 53킬로그램이라는 완벽한 체중을 유지하면서도 먹고 싶은 것은 무엇이나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완전한 생각을 하라. 그러면 결과는 완벽한 체중으로 돌아온다.’
‘고통과 비극의 희생자들은 그들의 삶에 그런 환경을 불러들인 것이다.’ 처참하게 성폭행 당한 후 살해된 아홉 살 먹은 제시카 런스포드가 이 참상을 불러들였는가. 이 공식대로라면 6백만의 유태인들은 홀로코스트를 스스로 불러들인 것이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결코 비켜가는 법이 없다. 끌어당김의 법칙에는 예외란 없다. 어떤 일이 당신에게 일어난다면, 당신의 생각이 부른 것이다.’ ‘당신이 우주의 주인이다. 당신을 섬기기 위해 램프의 요정 지니가 대기하고 있다.’
론다 번에게 지니는 끌어당김의 법칙이고 조엘 오스틴에게는 믿음의 말씀이다. 오스틴에게 믿음이란 일종의 힘이고, 말은 이 힘을 담는 그릇이다. 그리고 이 믿음의 힘을 통해서 사람들은 자신의 현실을 창조할 수 있다.
‘긍정의 힘’과 ‘시크릿’의 공통점은 하나님도 꼼짝 못하게 만드는 믿음의 힘을 믿는다는 것이다. 번이 자신의 이야기들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주로 과학을 남용한다면, 오스틴은 성경을 왜곡한다. 내로라 하는 믿음의 말씀 주창자들이 이미 비슷한 기법들을 사용했고, 그 결과 기독교를 유래없는 깊은 늪에 빠트렸다. 20세기 후반에는 케네스 해긴, 로버트 틸튼, 마릴린 히키, 존 아반지니 그리고 모리스 설루로와 같은 믿음의 말씀 선생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21세기 초에는 크레플로 달러, 로드 파슬, 조이스 마이어, 존 해기, 제이크스 그리고 폴라 화이트 같은 새로운 번영신학 설교자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부동산 재벌가 도널드 트럼프는 폴라 화이트를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하는 ‘놀라운 여성’이라고 했고, 뉴욕타임지는 제이크스를 ‘차세대 빌리 그레이험’이라고 나팔을 불어줬다.
영적인 독약을 대량으로 살포하고 있는 자들이 교회에서 막강한 강단을 차지하고 있다. 폴 크라우치는 만약 하나님이 ‘이단 사냥꾼들’을 죽이지 않으신다면 자기가 죽이겠다고 한다. 베니 힌은 ‘나를 공격하면 당신들의 자녀들이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다’고 말한다. ‘나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나는 이스라엘 사람이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내게 성령의 기관총을 주셨으면 하고 바란다. 그걸로 당신들의 머리를 날려버리고 싶다.’ 이들을 통해 기독교 텔레비전과 방송국들은 수백만 달러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그들은 성경의 예수님과는 너무 다른 모습의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그분은 명품 옷을 입고 으리으리한 집에서 산다. 주변에는 돈 많은 제자들만이 득실거린다. 그들의 예수님은 ‘역동적인 형통의 법칙들’의 저자인 케서린 폰더같은 신사고 구루들과 한 편이 되어, ‘성경의 백만장자들’에게 찬탄을 보낸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그리고 예수님이 번영을 가르친 사람의 스승이었을 뿐 아니라 그들 자신이 백만장자였다. 이들은 오늘날의 백만장자들이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풍족한 생활을 영위했다.
(렘23:16,21,2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이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
(벧후2:1-3)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그들의 호색하는 것을 따르리니 이로 말미암아 진리의 도가 비방을 받을 것이요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
(행20:30-31)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16-31
3장 믿음운동의 핵심인물들
믿음운동이 교회에서 세력을 형성하기 훨씬 전에, 신사고운동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피니아스 파크허스트 큄비는 질병과 고난은 바르지 못한 생각에서 비롯된다는 사상을 퍼뜨렸다. 큄비의 추종자들은 적극적인 긍정의 힘을 통해서 자신이 원하는 현실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초능력자들은 그의 추종자들에게 부와 건강을 마음으로 그린 후 입으로 긍정 혹은 고백하면, 그 보이지 않던 심상이 만질 수 있는 실재로 변한다고 가르쳤다.
말씀·믿음 신학과 신사고 운동의 가르침 사이에 나타나는 유사성은 의미심장하다. 마이크 돌리, ‘생각이 물질로 변한다!’ 론다 번,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이 미래의 삶을 창조한다. 가장 많이 생각하거나 가장 집중하는 것이 당신의 삶이 되어 나타난다’. 믿음의 신학자들이 ‘마음의 힘’을 ‘믿음의 힘’이라는 말로 대체함으로써 초월적인 개념을 중화시켜 보려고 애썼다.
신사고 초월론과 믿음의 말씀 신학이 놀랍도록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믿음 운동의 본질, 스타일, 그리고 구사하는 전술은 주로 오순절 진영에서 활동했던 신유 치유자들이자 가짜 부흥사들이 보여준 가르침과 활동들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케네스 코플랜드와 케네스 해긴은 자기들의 삶과 사역에 큰 영향을 미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오스본과 윌리엄 브랜험을 꼽는다. 오스본은 케년의 성경을 왜곡하는 방식을 초지일관 따랐고, 브랜험은 마귀에서 나온 것이라며 삼위일체 교리를 비난했다.
베니 힌도 브랜험을 충심으로 따랐다. 믿음 치유가들인 에이미 셈플 멕퍼슨, 케서린 쿨만이 힌의 삶과 사역에 끼친 영향은 엄청나다. 힌은 이들의 무덤을 정기적으로 찾아 ‘기름 부으심’을 경험한다. 힌은 에이미의 유골에서 기름 부으심이 나온다고 주장한다.
오럴 로버츠는 번영신학을 외치는 대중적인 설교자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암 완치법을 발견하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20층짜리 연구소를 설립하는 프로잭트는 곧 ‘상업적인 목적으로 투자자 그룹에게 매각’됐고 결국 암치료제는 개발되지 않았다. 비슷한 방법으로 앨런은 추종자들의 등을 쳤다. 그는 하나님께 명하여 ‘1달러 지폐를 20달러 지폐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적의 기름을 적신 기도’, 기적들을 보게 하는 ‘기적의 장막 조각들’을 추종자들에게 주기도 했다. 앨런은 음주운전으로 구속된 후 보석금을 내고 풀려 나오자 마자 결국 하나님의 성회 교단으로부터 출교 당했다. 그는 1970년 간경변증으로 사망했다. 베니 힌과 같은 교사들이 그를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끊임없이 추켜세우는 것과 앨런의 사기와 기만적인 말들은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윌리엄 케년
‘신자는 나사렛 예수처럼 성육신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이다’ 그의 말이다. 믿음운동의 원조라고 불리우는 ‘아버지’ 해긴은 사실은 케년을 대중화시킨 것에 불과하고 원조는 케년이다. 1867년생인 그는 감리교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종교방송의 선구자로 ‘케년의 교회방송’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1931년 출범했다. 번영신학의 설교자들이 즐겨 쓰는 말, ‘고백대로 됩니다’ 는 케년이 처음 사용한 말이다. 신사고 운동이 그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신사고 초월론의 모판과도 같은 에머슨 웅변학교를 졸업했다. 오순절 진영에 미친 케년의 영향은 케네스 해긴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브랜험과 오스본과 치유부흥사들은 그의 책을 광범위하게 인용했다. 그는 보스워스, 에이미와 같은 오순절지도자들과도 접촉했다. 그는 예수의 육체적인 죽음이 죗값을 치르는 데 불충분했기 때문에 모든 신자는 자신의 죽음으로 자신의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케네스 해긴
현대 믿음운동의 아버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해긴은 오순절주의자들 사이에 케년의 설교와 출판물들을 대중화하고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다. 해긴의 원숭이 귀신 이야기에서 해긴이 없으면 그리스도는 원숭이 귀신 앞에서 너무나 무기력하기만 하다. 1937년 남침례교에서 출교 당했다. 그러나 모든 대표적인 번영신학 전파자들이 해긴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제자 명단에는 프레드릭 프라이스와 케네스 코플랜드가 있다. 해긴이 케년을 대중화했다면, 코플랜드와 그 주변의 무리들은 해긴을 대중화했다. 해긴이 사위 버디 해리슨에게 결성케 한 믿음교회 국제연맹에서 찰스 캡스와 베니 힌과 같은 사람들이 안수를 받았다. 해긴의 연합 라디오 방송은 연재 249개소의 지역 방송국들을 거느리고 있다. 그가 이끄는 레마성경훈련원은 1974년 개원 이래 1992년까지 졸업한 학생 수는 모두 만2천명이나 된다. 잡지 ‘믿음의 말씀’의 구독자 수는 40만 가정에 이른다. 1992년 기준으로 이 단체는 다양한 책들과 출판물들을 4천7백만부나 판매했다. 연례 수련회에 참석하는 참가자들도 2만명이 넘는 것으로 보고 되고 있다.
해긴의 인기는 부분적으로는 영적인 문제들에 관한 자신의 권위 주장에 기인한다. 그리고 그의 ‘권위’는 크게는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접촉에 의한 것이다. ‘나는 환상을 믿는다’의 책에 의하면 이러한 접촉에서 예수님은 해긴에게 천국과 지옥을 구경시켜줬다고 한다. 해긴은 1933년 자신의 회심을 기록하면서 입신 경험을 말한다. ‘아침에 바지를 입듯이 나는 내 육체로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입을 통해서 몸 밖으로 나갔다.’ 해긴은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주장을 모두 세 번이나 했다. 처음 ‘죽었을’ 때(1933) 해긴은 ‘지옥의 불’로 인한 열기를 느꼈다고 적고 있다. 70년 후인 2003년에 네 번째 그리고 죽었는데, 이번에는 부활하지 못했다. 해긴은 예수님이 1950년에 나타나서 병자들을 고치도록 자신에게 특별히 기름을 부으셨다고 주장한다. ‘손에서 손으로 불이 튀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으면 악령 혹은 귀신이 그 몸에 통증을 일으킨다’. ‘나는 그분 손바닥에서 십자가의 상처를 보았다. 손바닥에는 세 개의 찔린 구멍이 나 있었다. 구멍 하나하나는 아주 커서 손가락을 넣어볼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그 구멍의 반대편에서 빛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성경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못이 그리스도의 손바닥이 아니라 손목을 관통했을 거라고 한다. 헬라어 케이르도 손을 포함한 전체 팔뚝을 가리키는 말이다. 신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해긴은 하나님이 개인들, 교회들 그리고 목사들이 그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상상 못할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다고 악에 찬 으름장을 놓았다. ‘그 목사는 강단에서 엎드러져 죽었다.’ 해긴의 부인 오레사도 집회에서 한 여인이 공중부양한 것을 의심하다가 ‘바닥에 붙어버린듯’ 꼼짝하지 못했다. 그 공중부양이 하나님이 일으키신 것이라고 인정을 할 때까지 그러고 있었다고 한다. 베니 힌도 섬뜩한 선언을 서슴치 않는다. ‘성령이 내게 임하였습니다. 그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를 공격하는 자들은 죽어 나자빠질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신 말씀입니다. 내가 택한 자들을 건들리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다.’
케네스 코플랜드
자신의 멘토인 해긴의 메시지들을 암기한 덕분에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한때 오럴 로버츠의 추종자로 일하기도 했다. 해긴의 사위가 1967년에 젊은 코플랜드를 불쌍히 여겨 해긴의 테이프들을 선물했다. 받고 난지 1년만에 케네스와 그롤리아 코플랜드 부부는 자신들만의 전도협회를 세우고 소그룹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이 모임은 대형 부흥집회로 커졌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973년 ‘신자의 승리의 함성’ 소식지를 발행했고, 3년후에는 ‘신자의 승리의 함성’ 라디오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1981년에는 위성방송이라는 하이테크로 발전을 거듭하고 다음 해에는 ‘최초로 전 세계를 대상으로 종교방송을 개시하는 역사를 창출’한다. 미국의 200개 도시들과 전 세계 20개 이상의 나라들을 위성으로 연결한다. 영국, 필리핀, 남아프리카 공화국, 호주, 케나다, 한국에 지부를 두고 있다. ‘에덴 동산의 아담은 육체로 나타난 하나님이었다.’는 그의 주장과 ‘아담은 우리의 선조이며 우리의 하나님이었다’는 모르몬교 예언자 브리엄 영의 가르침 사이의 놀라운 유사성을 보라. 하나님이 188-190센티미터 정도의 키에 약 90킬로그램의 몸무게, 손 크기가 약 22센티미터라는 코플랜드의 주장과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본다면 ‘사람의 모양을 한 하나님을 볼 것이다. 모든 인성, 이미지 그리고 형상까지 사람과 비슷한 하나님인 것이다’라고 가르친 모르몬교 창시자 조셉 스미스의 진술과 비교해 보라. ‘아담이 하나님의 복제이고 하나님께 복속된 존재가 아니라’는 코플랜드의 주장과 ‘하나님 자신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 같았다. 하나님은 높이 들린 사람이다’라는 조셉 스미스의 주장과 무엇이 다른가. 코플랜드는 아담과 하나님이 완전한 동일 복제였다고 가르칠 뿐 아니라 지구가 하나님이 사는 행성의 복제물이라는 신화를 조금도 굽히지 않는다. ‘하나님이 역사상 가장 큰 실수를 했다,’ ‘사탄은 십자가에서 예수를 정복했다.’ 그는 신자가 믿음으로 말만하면 30미터짜리 요트도 생길 수 있다고 주장한다. 2007년에 그래슬리 상원의원은 코플랜드 부부에게 공문을 보냈다. ‘급여계좌, 주택보조금, 신용카드 내역, 교회 명으로 구입하려던 면세용전용기, 다른 목회자들로부터 사역 40주년 ‘선물’로 받은 2백만 달러에 관한 세부사항을 제출하십시오’ 이에 대해 목회자 수련회 방송에서, ‘나랑 한번 해보겠다는 거요? 좋아요, 덤벼요, 하지만 경고합니다. 나는 성질이 더러운 놈이요’라고 했다. 베니 힌은 전 세계 청중 앞에서 험악한 말을 했다. ‘케네스 코플랜드를 공격하는 자들은 하나님 자신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베니 힌
“당신은 중생할 때, 말씀이 당신 안에 육신이 되셨다. 그래서 당신은 그분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가 된 것이다. 예수를 모셨다고 말하지 말라. 당신은 그분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것이다. 이렇게 말하라 ‘내가 내가 내가 내가 내가 예수다’ 당신은 정녕코 결단코 도무지 ‘아프다’고 말해선 안 된다. 당신이 새로운 피조물이라면 어떻게 아플 수 있겠는가? 이렇게 말하라 ‘나는 치유 받았다’.
나는 힌의 십자군 집회들에 참석한 후, 사람들이 치유 받을 가능성보다 상처를 입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힌의 발 앞에 쓰러지기 위해서 ‘적자생존’의 천박한 모습으로 우르르 몰려다녔다. 오클라호마에서 힌의 십자군에 참가한 한 여인은 즉사했다. 엘라 페파드는 자기 위에서 성령에 죽임을 당한 누군가에게 짓눌려 허우적거리다가 합병증으로 사망했고, 형사고발이 착수됐다. 이 집회에 휠체어에 타고 참석했던 사람들은 달라진 것 없이 씁쓸함을 삼키면서 집회장을 떠났다. 실망감을 달래주기 위해 힌은 말했다. ‘그날이 오고 있다. 누구도 휠체어에서 휴거당할 사람은 없다. 누구도 병상에서 휴거당하지 않는다. 휴거 전 모두가 치유 받을 것이다.’
힌은 하나님이 1990년에 정기적으로 십자군 집회를 시작하라고 이끄셨다고 주장한다. ‘나는 그 즉시 질병과 고통을 일으키는 귀신들을 내쫓는 권세를 받았다. 그리고 집회마다 1만2천~1만5천 명이 참석하는 군중들 가운데서 성령께서 하실 일과 관련하여 구체적인 지시를 받았다. 수 백건의 치유 사례가 나왔고 수천 명의 회심자들이 나왔다. 휠체어에서 일어난 사람들, 목발을 버리고 혼자 힘으로 선 사람들이 포함된다. 몇몇 시각장애자들과 청각장애자들의 눈과 귀가 열리는 것을 목도했다.’ 입증해 보라는 압력을 받자, 이러한 치유 사례들을 기록하는 일을 담당하는 수전 스미스는 이런저런 핑계를 댔다.
더 심각한 것이 있다. 힌은 치유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죄책감을 갖게 한다. 그의 책 ‘주님 기적이 필요합니다’에서 힌은 신자들이 믿음이 부족하다며 비방을 퍼붓는다. 그의 책에는 성경 왜곡과 교조적인 진술이 숱하게 나올 뿐 아니라 빈약한 과학적인 증거들로 위장한 간증들이 부지기수로 출현한다. 힌이 진정한 성령의 능력을 드러냈음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병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힌은 마치 최면술사와 힌두교 구루마냥 암시를 이용해서 심인성 증상들과 질병에 위약효과를 나타냈을 뿐이다 다리가 길어지는 것과 같은 착각을 힌이 만들어낼 수는 있겠지만, 절단된 사지를 다시 만들어낼 수는 없다. 진정한 성령의 능력은 생명과 사지를 만들어 내신다. 그러나 힌의 암시 능력은 서글픈 거짓말을 만들어낼 뿐이다.
성령을 통해 그가 터득했다는 신학은 기만 그 자체다. ‘기름부음’이라고 주장하지만 가당치도 않은 비상식적인 언설들을 일삼았다. 힌은 성령께서 여자들이 원래는 옆구리로 출산을 하도록 되어있다고 주장한다. 힌은 ‘기름부음’을 받기 위해 케서린 쿨만과 에이미 셈플 멕퍼슨의 무덤을 자주 찾는다고 인정한다. 술에 취해서 숙취가 가시지 않아 방금 전 한 예언을 기억조차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힌은 복음주의자 진영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는 텔레비전을 통해서 수백만 명에게 그리고 ‘안녕하세요 성령님’, ‘성령의 기름부으심’과 같은 대형 베스트 셀러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되었다. 그는 강단과 책을 통해서 하늘로부터 그에게 특별하고 신비한 권능을 받았다는 환상을 자아낸다. 은사주의자들에게 주는 그의 메시지는 이것이다 오늘까지 ‘성령세례’를 경험하고 방언을 하는 것은 많은 것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는 ‘겨우 그 정도라면, 대단한 게 아니다.’ 기름부으심을 받지 않았으면 아무것도 받지 못한 것이라는 주제를 계속 강화한다.
‘주님을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면 기름부으심은 필수다. 기름 부으심이 없으면 성장도 없고 축복도 없다, 승리도 없다.’ 힌은 1992년 8월7일 켈리포니아 애너하임에서 열린 세계 은사주의자 컨퍼런스에서 가장 오싹한 공갈을 쏟아놓았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전능한 권능으로 지적합니다. 잘 들어세요. 남가주에 나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성령의 기름부으심 아래서 말합니다. 비방을 그치지 않으면 당신들의 자녀들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회개하세요’. 힌은 교리적으로 이런 선언을 했다. ‘말이 실제를 만듭니다.’ ‘믿음은 믿음의 말을 할 때 생긴다.’ ‘고백을 공격하는 자들은 마귀편입니다.’
지난 15년 넘게 힌은 허황된 선언들에 관한 설명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는 1999년10월19일에 전 세계인들이 텔레비전 수상기 주변에 관들을 나란히 정렬하고, 죽은 자들의 손을 티비 스크린에 얹어 안수하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1990년1월1일 힌은 하나님이 그에게 쿠바의 카스트로와 미국의 동성연애자들의 운명을 말씀으로 알게 하셨다고 했다. ‘성령께서 카스트로가 90년대에 죽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더 이상 권좌에 있지 못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카스트로는 살아있고 그의 정권은 지속되고 있다.) ‘동생연애자들은 불로 멸망시킬 것입니다.’ 1993년 힌은 허황된 공언을 했다. 예수님이 7년 후인 2000년3월29일에 ‘우리의 집회들 중 한 집회에 육체로 나타나실 것이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2010년이 역사의 뒤안길로 넘어가고 있지만 그의 예언은 성취되지 않고 있다.
조엘 오스틴
그는 오늘날 지구상에서 가장 앞서가는 부와 번영복음 설교자로서 힌의 위치를 가뿐히 넘어섰다. ‘피플’지는 오스틴을 가리켜 ‘매주 4만7천명이 출석하는 레이크우드교회의 목사이자(2위와의 격차가 두 배 이상 된다), 1백여 나라들에 주일예배가 실황 중계되며, 두 권의 베스트 셀러를 낸 저자이자 뉴욕시 메디슨 스퀘어 가든과 같은 곳에서 연출되는 순회 동기부여 예배쇼의 선구자’라고 소개했다. ‘그는 최고급 맨션에 살고 전용 제트기로 여행한다. 두 번째 베스트 셀러만 해도 1천1백만 부나 팔렸다.’
경이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오스틴의 설교는 다른 믿음운동 교사들과 비슷하게 근거 없는 일화들과 성경의 오용 그리고 잘못된 해석이 빚어낸 무용담들로 꽉 차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있던 마비환자 일화를 왜곡한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현실을 만들어낸다는 전제를 입증하기 위해서다. ‘이 마비환자는 치유받기 전에 자리를 들고 걸어 나갔어야 했다. 신세 한탄만 하고 누워있어선 안 된다’.
오스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구속의 사역을 완수하신 게 아니라고 말한다. 성경은 예수님이 마귀와 귀신들을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이기셨다’(골2:15)고 말한다. 성경은 우리 구주께서 죽음과 지옥의 권세를 언제나 한 손에 쥐고 계셨다고 말하는데 오스틴은 예수님이 사탄의 손에서 죽음과 지옥의 열쇠를 탈취하셔야 했다고 말한다. 그는 성경 전체의 맥락을 무시하고 지옥에서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두 세력이 역사상 처음으로 대결전을 벌이기 위해 만났다’고 한다. 오스틴의 성경 해석에 의하면 지옥에서 거둔 그리스도의 승리조차 우리의 죄를 위한 속죄로서 충분하지 않다는 믿을 수 없는 주장에 도달한다. 부활후에도 ‘우리의 죄를 위해 피의 제사가 필요했다 지불해야 할 값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무덤에서 막 일어나셨지 그분의 몸에는 보혈이 아직 남아 있었다. 우리의 죄를 위한 희생으로 흘리실 바로 그 보혈 말이다.’ 이 말들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오스틴의 끔찍한 속죄론도 심각하지만, 믿음의 힘이 너무 강력해서 우주의 주권자라도 이 힘에 묶인다는 그의 주장은 더 큰 문제다.
오스틴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핵심적인 신념은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저주와 함께 전해 내려오는 축복이 ‘당신의 DNA’를 통해 계승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계에 흐르는 축복이든 가계에 흐르는 저주이든 이를 뒷받침할만한 성경적인 근거는 없다. 성경은 명시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겔18:20).
조이스 마이어
이 여류명사는 오스틴과 마찬가지로 믿음운동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별이다. ‘80여권의 책을 저술했고’ 그 책들은 2010년 현재 ‘전 세계적으로 1천5백만부 이상이 팔렸다.’ 조이스는 성경 본문을 왜곡한다. 마비된 상태로 38년간 누워있었던 환자가 믿음도 없고 어리석었다고 말한다. ‘38년간은 어딘가에 누워있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다’. ‘우리는 일어나서 앞으로 앞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야 한다.’ ‘문제는 당신이다. 신세한탄만 하지 말고 그냥 일어나라. 건강과 번영으로 나아가는 열쇠는 당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당신의 믿음을 믿는 것이다.’ ‘믿음은 힘이다. 당신의 인생을 바꾸고 당신의 운명을 바꾸는 힘이다.’ ‘말은 능력을 담는 그릇이다. 말은 창조적이며 파괴적이고 긍정적이면서 부정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 미래에 관해 바른 말을 해야 한다. 당신이 오늘 하는 말이 내일을 결정짓게 된다.’ 우리가 하는 말이 기대하는 미래의 현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말은 ‘마귀를 발밑에 깔아뭉갤 수 있는’ 수단이다. 추종자들에게 ‘마귀를 꾸짖으라’고 가르친다. 그녀는 가계에 흐르는 저주론을 믿는다. 성경은 저주가 아니라 결과가 세대를 통해 내려간다는 점만을 밝힌다. 예수님이 지옥에서 고난을 당한 끝에 거듭나셨다는 마이어의 주장은 참으로 해괴망측하다. ‘예수님이 지옥에서 당신의 자리를 대신하셨음을 마음 다해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
존 해기
조이스 마이어처럼 시도 때도 없이 주관적인 환상 비행선에 올라타는 믿음운동 교사이고 텔레비전 전도자이다. 해기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죽음을 당한 홀로코스트에 그리스도가 비밀스럽게 재림하실 것임을 믿지 않는 목회자들을 반셈족주의자들로 몰아붙이는 전투적인 시온주의자이자 번영주의자다. 해기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예수님이 형통과 번영을 가져다 주신다는 왜곡을 일삼고 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정문에서 약2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서 발굴된 ‘바늘귀 문’에 대해서 자정 이후 낙타는 이 ‘바늘귀 문’을 통해서 어렵사리 들어오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문이 예수님 당시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문은 중세에 지어진 것이다. 해기는 우리의 형통이 우리의 사고, 우리의 혀 그리고 우리의 십일조에 의해 좌우된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혀가 생각과 더불어서 현실의 뿌리가 된다고 믿는다. ‘어떤 사람이 죽고 싶어라고 말할 때 그 사람은 죽음의 영이 자신의 생명을 침범하도록 부르는 것이다.’
크레플로 달러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당신은 그냥 사람이 아니다.’ 기독교의 핵심과 배치되는 이단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럴로버츠 대학교로부터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가 온전한 하나님이셨다고 주장하는 목사들을 ‘환상에 빠진 설교자들’이라고 맹렬히 비난한다. 그는 예수님이 피곤을 느꼈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일 수 없다는 말을 주저하지 않고 한다. 달러의 이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의 핵심에까지 이른다. 달러는 그리스도를 저급한 존재로 비하시킬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신격화한다.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개가 개를 낳듯, 하나님이 하나님을 낳는다는 것이다. ‘2003~2005년 사이에 예수님이 하늘을 깨치고 나타나실 것이다’ 2005년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T. D. 제이크스
뉴욕타임즈는 그를 빌리 그레이엄의 뒤를 이어 미국을 대표하는 다섯 명의 ‘복음전도자’ 가운데 한 명으로 소개한다. ‘종교계에서 엄청난 학식을 쌓은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여자여, 그대는 풀려났느니라>등 그의 책들은 수백만 권이 팔렸다. 2만6천명이 출석하는 그의 대형교회와 토기장이 집은 댈러스 남부에 자리 잡고 있는데 2000년 미국 대선 때 조지 부시와 엘 고어가 다녀간 곳이다. 그는 혀의 힘에 관해서 선포한다. ‘말을 할 때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살고 죽는 일이 당신의 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으로 나타나신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여러 가지 방법들로 계시하신다’고 주장한다. 육신이 되신 말씀보다 그는 입으로 하는 사람의 말이 더 강력하다고 생각한다.
로드 파슬리
알아주는 텔레비전 전도자, 베스트셀러 작가 그리고 오하이오 주에 자리 잡은 세계추수교회의 창립자인 파슬리는 지지자들에게 짓지 않은 집을 소유하고 사지 않은 좋은 물품들을 얻을 수 있다고 부추긴다. 파슬리의 관점에서 기적의 크기는 지금 내는 헌금의 크기와 정확하게 비례한다. ‘당신의 종자돈에 이미 기적이 들어 있다.’ 그는 기적을 일으켜 준다면서 기도수건을 강매했다. 그는 케년과 나란히 하나님이 이 땅에서는 믿음의 말씀 없이는 어떤 일도 하실 수 없다는 사상에 경도되어 있다. ‘왜 하나님이 내게 구하라고 하십니까? 왜 이 말씀을 하실까요? 스스로는 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는 원하는 것을 얻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는 당신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내 말을 믿습니까?’
파슬리와 같은 설교자들이 초래하는 결과의 일부는, 사회 각층의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귀신이 붙었고 귀신을 쫓아내야만 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문제에 대해 개인적으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위로를 받는다. 비난은 자신 안에 들어온 귀신에게 돌려진다. 그리스도인들이 옹호하던 영적 전쟁이라는 제자도의 모델이 귀신좇는 일에 자리를 빼앗기게 됐다.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영적인 훈련을 수행하려는 열정이 파슬리의 축사라는 즉효 처방(‘오늘 밤 여러분을 자유케 하기 위해 나는 여기 섰습니다.’)으로 전락한 것이다. 파슬리가 결박했다고 주장하는 귀신의 영들은 에이즈, 알코올 중독, 관절염, 디스크, 청각장애, 동성연애, 근친상간, 백혈병 그리고 이명현상 등이다.
프레데릭 프라이스
믿음이 없어서 사람들이 죽음과 질병과 고투를 벌리고 있다고 선포한다. ‘케네스 해긴은 현존하는 어떤 사람보다 내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쳐 왔다.’ 그의 크렌셔 크리스천센터는 1만7천명의 ‘삶을 나누는’ 교인들이 모인다고 한다. 그는 전국으로 방송되는 텔레비전 사역을 이끌고 있다. ‘주님을 찬양하라’라는 TBN프로그램의 단골 출연자이기도 하다. ‘내가 롤스로이스를 타는 이유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함입니다.’ ‘우리 죄를 위한 형벌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그렇다면, 두 강도 역시 당신의 죄값을 치러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형벌은 지옥으로 가서 하나님과 분리된 채 일정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신학의 근본은 예수님이 부자셨다. 비싼 옷을 입으셨다. 제자들은 호의호식하면서 살았다 등의 비성경적인 기초 위에 세워져 있다.
존 아반지니
‘예수님이 가난뱅이였다면 나는 가난해지길 원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자셨다면, 나 역시 부자가 되길 원한다.’ 예수님이 아주 부유하여 디자이너에게 주문한 옷을 입으셨다고 주장한다. ‘예수님이 멋지고 큰 집을 소유하셨다.’ ‘예수님이 잘 나가는 분이었다는 점을 알기까지는, 당신은 부유해질 수 없다,’ ‘로또보다 위대한 것이 왔다. 그분의 이름은 예수다!’ 아반지니가 하나님의 말씀, 사람에게 빛을 던지는 말씀을 취하여 돈을 끌어모으는 수단으로 전락시켰다는 것이 가장 기가 찬 대목이다. 베니 힌은 말했다. ‘악한 자는 재물을 쌓아둔다. 나는 존 형제가 이 문제에 관해 가르친 것을 좋아한다. 존은 악인들의 재물을 어떻게 얻어오는가에 관한 가르침에서 최고이다. 아, 나는 그 가르침이 좋다.’
로버트 틸튼
맥도날드가 패스트푸드를 대중화시켰듯이 틸튼의 사역은 ‘페스트푸드식 믿음’을 퍼뜨렸다. 그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하나님은 당신이 재정적으로 그리고 신체적으로 번창하길 원하신다. 그러려면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맹세를 해야 한다. 맹세는 1천 달러에서 시작된다. 델 모트의 부동산 ‘정보광고’에서 영감을 얻은 틸튼은 ‘석세스N라이프’라는 종교정보 광고를 만든다. 이 광고는 스켄들 때문에 시청율이 크게 하락하기 전까지 미국 전역의 212개 지역 방송국들에서 6백만 가구를 대상으로 방송이 되었다. 88만명의 메일 수신자, 850명이 넘는 풀타임 직원들을 자랑했다. 틸튼은 한 때 번영신학 설교자들 가운데서도 진정한 스타였다. 8천명의 교인의 믿음의 말씀 가족교회와 세계전도 센터는 한때 1년에 6천5백만 달러를 헌금으로 거둬들였다. 틸튼이 약속한 기도 요청서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이 ABC 방송국의 카메라에 잡혔다.
마릴린 히키
‘필요한 게 뭡니까? 말해보세요. 필요한 걸 말해보세요. 말하면 생깁니다. 돈지갑에 대고 말하세요. 크고 두꺼운 지갑아, 돈으로 가득 찰 지어다. 수표에도 대고 말하세요, 수표야, 지금까지는 한 번도 형통하지 못했던 수표책아, 이제는 잔고가 차고 넘칠지어다.’ 히키는 한 기도편지에서, 헌금과 함께 동봉한 기도수건을 자기에게로 보내면 특별한 기름부으심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히키는 그것을 ‘지금 당장’ 보내면 사도행전 19장에서 일어난 ‘특별하고’ ‘비상한’ 그리고 ‘각별한’ 기적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기름부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찰스 캡스
‘아담은 그래도 지혜로왔다. 마귀는 아담을 죽이는데 900년이 걸렸다. 이제 마귀는 그의 말을 인류에게 넣어 70년 남짓한 세월 동안 자신의 말로 스스로를 죽이게 한다.’ ‘말은 창조력이다.’ ‘동정녀 탄생을 이해하는 열쇠는 이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과 성령의 권능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그 이미지를 마리아게게 보내셨다. 마리아는 자기 안으로 그 이미지를 받아들였다. 마리아 몸 안에 있던 태아는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잉태했던 것이다.’ 그의 책 <하나님의 창조력>은 3백만 부가 팔렸다. ‘집세를 내야 하는 날이 1월1일이다. 그러면 12월29일에 당신이 부요하다고 말하길 시작해서는 안 된다. 집세 내가 1년 전에 말하라’. 그는 심상화와 고백이라는 개념을 가장 이단적으로 몰아간다.
폴 크라우치
그가 소유한 자산은 5억 달라가 넘고 세입이 매년 1억9천만 달러를 상회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크라우치의 트리니티 방송국은 ‘70개의 위성과 12,500 군데의 공중파와 케이블 협력사들을 통해 전 세계로 퍼진다’. 오늘날 ‘받기 위해 주라’는 공식은 TBN에 출연하는 기금 조성자들에게 표준으로 통한다. 이 방송의 연속찬양집회에서 바이넘은 말했다. ‘지금 통장에 79달러36센트가 있는가? 예언자의 말을 듣고 비우라. 오, 예수님, 지금 수표에 그 액수를 써서 잔고가 없다고 선언하라고 감히 말한다. 성령께서 이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사람들 중 여섯 명의 백만장자가 있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종자돈으로 1만 달러를 서원하게 하라 하셨다. 지금 하나님이 성령 가운데서 찾으시는 한 여성이 있다. 백인 여성이다. 그 여성에게는 지금 10만 달러의 종자돈을 심기 원하신 하신다.’ 폴 크라우치는 말한다. ‘하나님의 길을 막아서지 마시오. 하나님이 놓으신 다리를 가로막는 일을 그치시오. 내가 쏘지 않으면 하나님이 당신을 쏠 겁니다.’
토드 벤틀리
‘여기 너의 천사가 있다 이 천사는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천사다(베데스다 연못). 네가 어디고 가든 천사가 동행할 것이다. 나는 네가 이 땅에 치유의 부흥에 관해 말하기를 원한다. 네가 치유의 은사를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네가 예언의 일부가 되길 바란다. 치유 부흥의 완성을 이끌어나가길 원한다.’
믿음 운동의 진영에서 뜨고 있는 번영신학 설교자들 중 인물은 문신을 새긴 오토바이족 토드 벤틀리다. 그는 릭 조이너에서부터 존 아노트와 같은 사이비 부흥사들과 스티븐 스트랭과 같은 출판 거물들에게 매력을 느꼈다. 스트랭은 말한다. ‘지난 32년간 여러 은사운동을 지켜봐왔지만, 밴틀리만큼 빠르게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 부흥집회를 본 적이 없다. 모든 사람이 이 집회에 관에 말한다. 존경받는 지도자들이 다수가 이 집회에 참석한다. 그리고 대부분이 이 집회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신다고 말하며 자리를 뜬다.’
자기 안에 귀신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벤틀리는 라인하르트 본케와 베니 힌과 같은 영적 거인들과 같이 집회를 열어가는 꿈을 놓지 않고 있다. 그에 의하면 영적인 위대함을 꿈꾸면 언젠가는 현실이 된다. 벤틀 리가 행한 한 예언에 의하면 예수님은 2008년6월8일 벤틀리와 함께 무대에 나타나셨다. 천사들과 전능자만이 아니다. 사도도 벤틀리에게 타나난다. 벤틀리는 숱한 선배 믿음 운동 교사들처럼, 자신이 죽은 자들을 많이 부활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사람이 누군지, 신문기사나 그것을 목격했다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철학과 수학 분야에서 두 개나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는 윌리 뎀스키가 하는 증언이다. 그와 부인은 일곱 살 난 아들이 자폐증에서 놓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은사집회에 참석했다. ‘메시지는 전체적으로 능력, 치유하는 능력, 치유받기 위한 능력에 맞춰져 있었다. 벤틀리는 놀라운 치유의 사례들을 말했다. 설교후 벤틀리는 헌금을 거뒀다. 그는 얼마나 기름부음을 받길 원합니까? 하고 물었다. 우리가 받는 복과 우리가 내는 돈의 액수를 연결시켰다. 내 아들은 기도를 받기 위해 단상으로 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나가지 못했다. 안내자들은 두 번이나 막았다. 아들이 휠체어에 앉아 있지 않아서 안된다고 했다. 이 집회의 배후에는 권력, 명예, 그리고 돈이 중요한 모티브로 자리잡고 있었다. 치유에 들어간 시간은 얼마 안 됐다. 그러나 대부분은 떠나갈 듯 크기만 했지 생기 없는 음악 그리고 자기 상품(책들과 CD) 선전과 판매에 열을 올리는 벤틀리의 말로 채워졌다. 집에 돌아와 새벽녘에 아이들이 잠들자 우리는 얼마나 종교가 무섭게 오용될 수 있는지 목청을 높이며 이야기했다. 이번 일은 우리가 낚인 것이었다. 아이들에게는 뭐라고 해야 할까? 나는 아직도 그 궁리를 하고 있다.’
의식변용 상태.
이들은 너나없이 추종자들을 의식변용 상태(약물, 최면 혹은 명상 등을 통해 평소와는 다른 의식을 갖게 된 상태)에 들어가게 한다. 목표는 언제나 똑 같다. 비판적인 사고를 없애라. 깨달음을 얻는 데 지성은 방해만 될 뿐이다, 로드니 하워드-브라운은 말했다. ‘분석하려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이 하고 계시는 일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아는 유일한 길은 가슴뿐입니다.’ 때로 이 상태는 노래 한 곡을 수 없이 반복해서 불러 현실감각을 잃을 때 얻어진다. 미친 듯이 위아래로 뛰거나 허공에 팔을 광적으로 흔들라고도 한다. 웃다가 울다가를 미친 사람처럼 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열띤 행동이 비판적인 사고 과정을 마비시키고 일관된 사고를 해제하는 일종의 과도호흡의식 상태를 만든다. 그런 다음에는 벤틀리가 시범 보인 것과 같이 성령 안에서 “절어지는” 것이다.
의식변용 상태에서는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표출이 강렬하게 나타날 수 있다. 추종자들은 사역을 하고 있는 밴틀리 곁에 서 있는 천사를 보았다고 말한다. 이들의 경험은 밀교적인 수행을 통해서 의식변용 상태를 만드는 동양의 영매들의 경험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이런 경험들은 우울증, 현실도피, 환청, 그리고 다른 비슷한 심각한 병증들과 연결될 위험이 있다. 청산칼리를 삼키면 똑같은 결과가 나온다. 이단 집회소든 교회서든 의식변용 상태에 들어가면, 그 파괴적인결과는 언제나 똑같다.
군중심리.
군중심리는 믿음의 말씀 교관들에 들린 강력한 도구다. 또래들이 받아들여야 하는 압력은 상당히 강해서, 추종자들은 종종 여러 가지를 경험한 척하게 된다. 베니 힌의 텔레비전 호화 쇼에 출연했던 유망 은사주의 지도자가 이 점에 관해서는 하나의 고전적인 사례다. 힌이 사람들을 성령 안에서 죽이고 있었다. 힌은 이때 이 사람 쪽으로 빨리 움직였다. 그리고 손을 뻗으며 소리를 질렀다. “예수의 권능있는 이름으로!” 이 사람은 그 즉시 “잡아주는 사람”으로 지정된 사람의 팔을 향해 뒤로 자빠졌다. 나중에 이 사람은 그의 경험은 하나님의 권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군중심리가 거짓으로 자빠지게 한 것이다. 그가 카메라 기사에게 거짓으로 넘어진 것을 빼달라고 요청하자, 그 기사는 슬며시 웃으며 사람들이 보통은 짐짓 넘어지는 시늉을 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벤틀리는 참가자들이 군중심리에 함몰될 만한 그럴듯한 요소를 더 고양하기 위해 집회에 상당한 공을 들인다. 그는 지성을 마비시키는 가사가 전부인 음악을 긴 시간 반복하면서 집회를 시작한다. 간증을 하는 동안 목회자들과 참가자들은 의심하다 감동을 받는다. 가르침의 시간이 간증의 시간 뒤에 이어진다. 사람들에게 심리적 압박을 줘서 “사역의 시간”에 참여하도록 하려는 계책이다. 사역의 시간에는 그야말로 온갖 것들이 다 나온다. 심리적 압박이 너무 세서, 분별력이 있는 신자가 아니라면 조류에 휩쓸려버리고 만다.
기대 조작.
밴틀리와 같은 사람들은 집단압력을 사회심리학적인 조작 기제로 능숙하게 사용하지만, 이들은 또한 추종자들의 기대를 끌어올리는 일에도 고수들이다. 예수, 사도 바울, 그리고 천사들을 만난 경험이 많다는 벤틀리의 이야기들이 그 예다. 기대 수준을 높이기 위해 사용하는 “복음서 유사” 이야기들은 너무 희한하다. 믿음의 교사들은 그들의 잡지가 소개하는 “기적의 물” 혹은 밴틀리의 “부활” 등의 기사들이 일으키는 기대가 넓은 범위의 신비 경험을 촉박한다는 점을 십분 활용한다. 이들은 사람들은 성령 안에서 죽일 때, 추종자들의 기대가 경험 자체를 낳는다는 점을 기막히게 이용한다. 밴틀리의 추종자들의 기대는 파블로프의 개 실험에 나오는 개처럼 자극에 반응하여 침을 흘리는 것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웬만한 최면유도에 반응을 보일 정도로까지 극대화한다.
암시.
가장 심각한 것은 암시의 강력한 힘이다. 의식이 변용된 상태에서는 암시의 힘이 극도로 커져서 사람들이 극도로 민감해진다. 여기에 집단압력과 높아진 기대감이 더해지면, 추종자들은 평범한 일이건 비현실적인 일이건 관계없이 마음에 와 닿는 것이면 무엇이라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영적인 환상의 호소에 취약해지고, 현실과 환상을 구별할 수 없게 된다.
로버트 마크스, “군중 속의 사람들은 혼자 있는 사람들보다 쉽게 영향을 받는다. 부흥사들, 정치적인 웅변가들 그리고 독재자들뿐 아니라 대중 최면사들에서도 이 점은 분명하게 나타난다.” 샤를르 보뎅, “운동의 영역에서는 모방에 의한 암시가 일반적이다. 폭발적인 웃음은 군중들 가운데로 쉽게 퍼져간다. 하품 역시 전염된다”. 한 번 전염된 암시는 운동 전체를 오염시킨다. 인간 존재는 “짐승 혹은 천치처럼 행동하면서도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다. 어느 누구도 “대량 제안의 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히스테리가 한 번 맹위를 떨치며 유행하면, 바보뿐 아니라 지성인,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똑같이 눕혀버린다. 번지는 히스테리는 우리의 무의식에서 솟아나고, 이성과는 관계없이 생물학적이다.” 샤를 보뎅은 결론을 내린다. “첫째로, 참가자들이 정신적인 이완상태에 들어간다. 둘째, 유사 신비사건들에 의해 정서 상태가 요동한다. 셋째,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가 존재한다.”
빠른 문제 해결을 위해 이런 집회 장소들을 찾는 목사들과 교인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을 괴롭히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근본적인 것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부흥을 구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에 진정 필요한 것은 힘 있는 종교개혁이다. 교회가 개혁돼야 문화가 살아날 수 있다. 위기에 처한 기독교의 비극은 그리스도인들이 엉뚱한 곳에서 하나님을 찾는다는 데 있다.
5장 믿음의 힘
믿음 신학 교사들은 말한다. 믿음은 힘이다. 언어는 그 힘을 담는 그릇이다. 믿음을 통해서 사람들은 자신의 현실을 창조할 수 있다. 케네스 코플랜드는 <믿음의 힘>이라는 책도 썼다. 거기에서 “믿음은 하나의 힘이다. 만져지는 힘이다. 행동하는 힘이다”. 그는 중력이 중력의 법칙을 만드는 것과 똑같이, “영적인 세계를 움직이게 하는 법칙은 바로 이 믿음의 힘”이라고 말한다.
신사고운동의 비판가 론 로디즈는 말한다. “신사고에 의하면 인간 존재는 자기 삶의 상황을 규정하는 사고를 활용함으로써 건강, 성공 그리고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신사고 주창자들은 ‘끌어당김의 법칙’에 동조한다. 이 법칙은, 우리의 사고가 원하거나 바라는 바들을 당겨올 수 있다고 말한다. 부정적인 사고는 실망스러운 환경을 불러온다. 긍정적인 사고는 바람직한 환경을 불러온다. 우리의 사고는 창조적일 수도 파괴적일 수도 있다 신사고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고를 어떻게 창조적으로 활용해야 할지를 가르쳐준다.”
믿음 신학의 교사들이 내세우는 전형적인 증거 본문은 히브리서 11장 1절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그들은 믿음이 우주를 조성한 만질 수 있는 물질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상’은 정확하게 옮기면 ‘확신’이다. 믿음은 만질 수 있는 물질이 아니라 살아있는 신뢰, 즉 확신의 통로다. 이러한 확신은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향해서 뻗어나간다. 성경이 말하는 참 믿음은 믿어야 할 대상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믿음의 대상이며 동시에 근원이시다. 성경이 말하는 참 믿음은 실상을 믿는(혹은 해긴의 말대로 “믿음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인 것이다. 믿음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은 믿음의 대상과 근원이다.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 성취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허언이 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짚어 말하는 것이다. 벌코프, “믿음의 태도만이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현재에서 미래로, 임시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 향하게 하고 믿음의 태도만이 그들로 하여금 고난 중에서도 인내하게 한다.”
6장 믿음 공식
믿음 교리에서는 고백이 믿음공식을 풀고 영적인 법칙을 작동시킨다고 가르친다. 케년은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우리의 고백이다”고 한다. 믿음공식에 따르면 세계의 부는 당신의 혀에서 나오는 말에 정비례한다. 해긴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믿으라고 가르친다. ‘나는 내 믿음을 믿는다’. ‘계속 말하라. 마음에 각인될 때까지 그렇게 하라. 처음 말할 때는 이상할 것이다.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머리에 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대고 믿음에 관해 말하라.’
공식은 간단하다. “말하라. 행하라. 받아라. (그리고 말해주라)”이다. 이런 공식들이 밀교에서 말하는 세 가지 근본 신념과 얼마나 비슷한지 놀랄 지경이다. 첫째, 밀교는 사람들은 현실을 창조하는 능력이 그들 자신 안에 있다고 말한다. 둘째, 밀교는 그 창조력이 말 안에 담겨있다고 믿는다. 셋째, 말로 사물을 생겨나도록 할 때 창조적인 심상화를 활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코플랜드의 밀교적인 교훈은 기독교 진영에 널리 퍼져 있다. 조용기목사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목회하는데, 자신의 베스트셀러 <4차원의 영성>에서 ‘4차원의 능력’이라는 이름 아래 똑같은 믿음공식을 교조화시키고 있다. 조목사는 이교에서 이 능력을 활용하고 있음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명령하고 주장하라의 불교판 이단인 창가학회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들이 사탄에 속했지만 그들은 4차원적인 명민함으로 신체와 환경을 지배하게 됐다고 말한다. “짧은 문구들을 수없이 반복함으로써-- 이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창조하고 있다. 그리고 기적도 행하고 있다.” 이것은 조용기목사의 말이다. “악마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면 예수님의 교회가 이보다 더한 일을 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4차원적 사고란 무엇인가? 조목사는 어느날 30세된 여성(남편감을 위해 10년째 기도하고 있다는 사람)에게 귀뜸을 해줬다. 이 여성이 꿈꾸는 남편의 모습을 “창조”하라는 것이었다. 남편을 원하면 좀 더 구체적이어야 한다. 이 여성을 의자에 앉힌 조목사는 종이를 주고 거기에 1에서 10까지를 적으라고 했다. 조목사가 물었다. ‘유럽 사람, 아시아 사람 혹은 아프리카 사람 중 어떤 남편이 되길 원하는가? 여성이 유럽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다음, ’키는 어느 정도 되어야 하는가?‘ 180센티라고 대답했다. 직업, 취미,--- 그 영성이 꿈꾸는 남성상을 다 적어나갔다. 이 종이를 거울 앞에 붙어놓고 매일 이 열 가지를 하나씩 큰소리로 읽으라고 시켰다. 조목사는 이 노처녀가 짧은 시간에 꿈꾸던 남성과 결혼했다고 의기양양하게 보고 한다. 조용기목사는 “품음의 법칙”을 이렇게 요약한다. “확고부동한 목표를 정한다. 그 다음에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린다. 생생하고 튀어나올 듯한 그림이어야 한다.” 그래야 “성공을 심상으로 만들 수”있다. 그런 다음에는 그것이 현실이 되도록 “품”는다. 그리고 “입에서 나온 말의 창조력”을 통해서 실재가 되도록 그것을 “말한다.”
베니 힌도 TBN의 ‘주님을 찬양하라’의 프로에 나와서 “입으로 한 말의 능력”을 논하다가 한 마법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마법사 한 사람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마법을 배우면서 말로 새들을 죽이고 입으로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교육받았지요’ ---주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마귀는 말로 죽이지만, 너는 말로 살릴 수 있다.’ 내 안에서 섬광이 일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입에 있는 권세를 모르고 있다.”
믿음의 교사들이 단골로 쓰는 전술이 있다. 성경이 긍정적인 고백을 가르치고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서 잠언 18장 21절(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을 남용하는 것이다. 언어가 다른 사람에게 참화를 끼칠 수 있다고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지만, 우리의 고백이 현실을 창조해내는 권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개념을 지지하는 성경구절은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이 긍정적인 고백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다면, 믿음의 공식에 묶여 있는 우주의 종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당신은 하나님이 되고, 하나님은 당신의 벨보이가 된다! 당신은 자아로 둘러싸인 채 우주의 보좌에 앉는다. 그 결과 우리는 빈약한 신관 그리고 비대해진 인간관을 갖게 된다.
달러와 마찬가지로 벤틀리는 지지자들에게 공식을 말함으로써 통증, 질병 그리고 심지어는 죽음을 정복하라고 훈계한다.
7장 하나님을 믿는 믿음
크레플로 달러, “하나님은 만드신 모든 것을 지으실 때 믿음이라는 재료를 사용하였다. 그 말씀 하나하나에 믿음이라는 재료가 들어가 있다. 왜냐하면 말은 단지 그릇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중심에는 믿음이라는 것이 있다. 하나님의 속을 들여다 본다면, 믿음 밖에는 다른 아무것도 볼 수 없다. 하나님은 입을 여실 때마다 믿음이라는 물질로 이 말들을 가득 채운다.”
우리의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바른 이해이다. 기독교신학에서 하나님은 우주의 주권자로 소개된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완벽하게 지혜롭고, 자충족적이고, 전능하시고, 또 전지하다. 그러나 이단과 마찬가지로 믿음운동에서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이 음흉한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은 단지 “믿음의 대상”일 뿐이고 사람이 주권자로 여겨진다. 사실 하나님은 피조물들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불쌍한 꼭두각시로 그려질 뿐이다. 믿음신학에서 하나님은 체중과 신장이 있다. 실패했다는 비난도 받는다. 영적 세계의 법칙에 매이고 믿음의 힘에 의존한다. 이 하나님은 전능과는 거리가 멀다. 무기력하다. 무한하고 전지하지 않고 제한되어 있다.
믿음운동의 하나님은 전혀 하나님이 아니다. 믿음운도 교사들이 어떻게 하나님에게서 전능을 박탈하고 전지를 탈취했을까?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성경이 그들의 결점 있는 신학을 지지하는 듯이 여기도록 이끎으로써 이렇게 했다. 믿음 운동의 교사들에게는 독창성이라는 것이 거의 없다. 그들은 늘 그 밥에 그 나물이다. 차려내는 밥은 마가복음과 히브리서고, 반찬은 그때마다 달라진다.
<원하는 인생을 창조하는 8가지 단계>에서 크레플로 달러는 하나님께만 속한 통치권을 감히 찬탈했다. “하나님은 말씀을 존재케 하는 똑같은 창조력을 우리에게 주셨다(잠18;20,막11;23).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을 창조한 것처럼, 당신의 입에서 나가는 하나님의 말씀 역시 당신이 하는 모든 것을 출발점이 된다.”
마크 키로나는 지상에서 가장 큰 기독교 텔레비전 방송의 카메라들을 들여다 보며 말한다. “예수님이 마가복음 11장에서 하나님을 믿으라 하셨을 때, 예수님은 실상 여러분의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대로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당신이 성령 안에서 무엇인가를 들으면 당신의 입으로 그것을 말하십시오. 아버지는 생각하시고 아들은 말씀하며 성령께서는 당신의 말을 취하여 믿음에 합당하도록 당신의 말을 기록하십니다!”
8장 믿음의 전당
힌은 욥의 곤경이 두려움의 말을 했고 하나님께 불평을 쏟아놓았기 때문에 찾아왔다고 주장한다. “육에 속한” “나쁜 사람”으로 묘사한다. 욥의 “입이 제일 큰 문제”였다고 주장한다. 믿음신학의 메시지를 활기차게 전개하기 위해서 욥은 쓰러져야 한다. 힌은 욥을 모든 시대에서 최악의 믿음 실패자라고 대놓고 비아냥거린다. 하나님은 욥을 의롭다고 칭찬하시는데 힌은 욥이 악하다고 한다. 욥기의 처음 두 장에서 하나님은 몇 번에 걸쳐서 욥이 흠이 없고 순전하고 하나님을 공경하고 악을 피한다고 말씀하셨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을 향해 욥과 같은 자는 세상에 없다고까지 하셨다.
욥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힘든 고통 가운데서도 자신의 창조주를 저주하길 한결같이 거부했다. 그는 논란의 여지 없이 가장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엄혹한 믿음의 시험을 위해 선발됐다. 하나님은 그를 비난하던 욥의 친구들에게 명하셔서, 용서 받으려면 욥에게 기도를 부탁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욥에게 명령하신다. 욥은 “옳게 말했기”(42:7) 때문이다. 이것이 욥을 믿음의 명예전당에 올려놓는 유일한 판결이다. 믿음의 교사들이 떠들어대는 것과 믿음의 명예전당에 올라가는 데 필요한 특징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믿음이란 그럴싸한 공식으로 불러 일으킨 마술적인 힘이 아니다. 믿음은 환난 가운데서도 인내함으로써 욥이 보여준 것과 같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서도 하나님을 의뢰함이다.
믿음의 명예전당은 성경적인 믿음 개념을 희롱하는 자들이 요란스럽게 떠들어대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 전당은 자기의 목숨을 왕중 왕을 섬기기 위해 기꺼이 바친 수많은 남녀들에 의해 채워질 것이다. 성경의 욥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따라야 할 믿음의 길을 안내해준다. 진정한 믿음이란 휠체어에서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불행을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하는 도구로 삼는 법을 배운 조니 에릭슨 타다와 같은 사람들이 간 그 길을 따르는 것이다. 진정한 비극이란 사지마비나 요절이 아니라, 오래 살고 안정된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삶을 사용할 줄 모르는 것이다.
<위험천만>이라는 텔레비전 프로에서, 셜리 믹크레인이라는 여배우는 말리부 해변을 달리며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린 채로 소리친다. “내가 신이다!”. 신사고 구루인 에크하르트 톨레는 하나님이 불붙은 가시덤불에 나타나 그분의 초월적인 영광을 드러내는 데 사용하신 똑같은 어휘들을 써서 인간에 대해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당신의 정체에 관한 궁극적인 진리는 나는 이것이다 나는 저것이다가 아니라, 나는 나다(I AM)는 것이다.” 디팩 초프라 역시 인간이 신이라고 믿는다. “우리 안에 있는 신성의 씨앗을 잘 키우지 못하는 한 우리는 피어나지 못한다. 사실 우리에게는 신성이 있다. 우리 안에 담겨 있는 배아 형태의 남신과 여신은 활짝 피어나길 기다리고 있다.”
지난 수년간 동양의 신비주의와 밀교는 많은 이단 집단들과 더불어 미국에서 우려할 만한 수준의 신망을 얻었다. 심령과학에서 뉴에이지 운동에 이르기까지 미국인들은 “모든 것은 하나. 모든 것은 신, 그리고 인간은 신”이라는 사상에 쉴 새 없이 노출되고 있다.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예전에는 이런 정서에 거부감이 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입으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자기 자신의 신성을 선포하는 일에 희열을 느끼는 종교 선생 무리들이 활동하기 좋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믿음신학 교사들은 흥이 나서 이 모든 것들을 선전한다. 그들의 뒤집힌 우주에서는 인간은 신으로 등극하고 신은 종의 자리로 강등된다. 사탄은 하늘 위를 날고, 그리스도는 땅의 우묵한 곳에 떨어지신다.
9장 신이 된 인간
마일즈 먼로, “다시 말합니다! 기도라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권위, 혹은 하나님께 면허를 드리는 행위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인간사에 개입하실 수 있습니다. 심호흡 좀 하세요. 종교적인 사람들은 나를 이해 못할 테니까요. 준비 됐습니까? 사실 하나님은 인간의 허락 없이는 이 땅에서 아무것도 하실 수 없습니다!”
역사의 먼 동이 틀 무렵부터, 사탄은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거짓말을 강매하고 다녔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그 유혹 이후 관능적인 속삭임으로 세대를 타고 내려왔다. 뉴에이지 진영과 기독교 양쪽에서 알려진 신학자인 스콧 펙은 <아직도 가야할 길>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그 자신이 되길 원하신다. 우리는 신성을 향하여 성장하고 있다. 하나님은 진화의 최종 목표다.”
해긴은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동등하게 창조됐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열등의식 없이 설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능한 한 그분과 비슷하게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하나님인 것처럼 우리를 그와 동급으로 지으셨다. 인간은 신의 영역에서 산다. 인간은 하나님과 동등한 조건으로 산다. 신자는 그리스도라고 불린다. 그것이 우리다. 우리가 그리스도다!”
달러와 마찬가지로 마이어는 마치 황소가 송아지를 낳는 것처럼, 하나님이 작은 신들을 내놓으신다고 확신하고 있다. 하나님의 세계 교회 창립자인 이단 허버트 암스트롱은 “하나님이 반복해서 계시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과 같은 수억의 사람으로 자신을 복제하는 것이다. 왜 창조자께서는 인간을 이 땅에 두셨는가?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고, 그분 자신을 재창조하려는 지고의 목적을 위해서다.”
이단 모르몬교의 학자 스티븐 로빈슨조차도 믿음운동의 작은 신들 교리가 지나치다고까지 하니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베니 힌은 “나는 이 땅을 걸어 다니는 ‘작은 메시아’다”고 말한다.
믿음운동 교사들은 습관적으로 요한복음 10:31-39을 인용한다. (요10:34)“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 말씀은 시편 82:6을 인용한 것이다. 거기서 신들이라고 불리운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재판관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공정해야 했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 이 재판관들은 다른 인간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이들은 작다는 말을 붙인다 해도 문자적인 신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벧후1:4도 곡해한다. 코플랜드는 말한다. “이제 베드로는 크고 소중한 약속으로 당신이 신적 본성의 참여자가 된다고 말한다. 자, 우리는 신인가? 우리는 한 부류의 신들이다!” 본문이 신자가 하나님의 본질 혹은 본성을 취한다는 뜻으로 왜곡될 수는 없다. 구속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도덕적인 속성들을 반영할 수 있기는 해도, 하나님의 정확한 복제물로서는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을 하나님과 동등한 수준에 올려놓기 위한 가엾은 시도로서 창세기 1:26-27을 남용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하신다. 찰스 캡스와 제리 세이빌은 “모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데무트가 문자적으로는 “그 종의 정확한 복제”라고 주장한다. “모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동일체가 아니라 유사성 혹은 흡사함을 뜻한다. 복제물이라는 주장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를 파괴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복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반영이다. 밀라드 에릭슨은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에게 투영된 하나님의 특성들로 이루어져 예배, 인격적인 상호작용 그리고 노동을 가능하게 만든다.”
베니 힌은 말한다. “아담은 창조되었을 당시 굉장한 존재였다. 성경은 그가 하늘의 새, 바다의 고기들을 다스렸다고 한다. ‘다스림’이라는 히브리어 어휘는 만약 부하 한사람을 부릴 때는 그가 하는 모든 일을 당신도 할 수 있다는 뜻임을 분명히 내비친다. 아담은 날 수 있었고 우주활공도 가능했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달까지도 갈 수 있었다.” 다스림의 히브리어는 지배 혹은 통치라는 의미도 있다. 이것은 통치자가 다스림의 객체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을 시사하지 않는다. 마일즈 먼로는 말한다. ‘당신은 하나님과 뜩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과 똑같이 당신도 자신의 세계를 창조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물질이 생긴다. 당신이 말하면 물질이 생긴다.“
10장 강등 당한 하나님
로드 파슬리, “왜 하나님이 ‘내게 구하라’고 하는가? 스스로는 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는 원하는 것을 얻으실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는 당신에게 권세를 주셨다.” 번영 신학 설교자들은 인간을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인간을 닮은 존재로 창조하기도 한다.
코플랜드, “하나님은 신비감에 둘러싸인 분이다. 어떤 면에서는 당신과 나와 같으시다. 188센티미터에서 190센티미터 정도의 신장에 90킬로그램 정도의 몸무게 그리고 손 크기가 약 22센티미터 정도 되신다”. 이사야가 하나님이 손 뼘으로 하늘을 쟀다(사40:12)는 말씀을 난도질 한 것이다. 베니 힌은 한술 더 떠서 성령님도 인간의 형상을 입은 것으로 말할 뿐 아니라, 성령님이 옷을 입고 계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코플랜드, “성경에서 가장 큰 실패를 누가 했는지를 발견했을 때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가장 큰 실패는 하나님이 하셨다. 하나님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그분이 실패했다고 결코 말한 적이 없어서다. 실패자라고 말하기 전에는 당신은 실패자가 아니다.”
11장 사탄의 높아짐
케네스 코플랜드, “하나님은 외부인처럼 기웃거리는 입장이 되셨다. 이 땅으로 합법적으로 들어오실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 물질 세계는 그분에게 속해 있지 않는 것이다.” 믿음신학에 의하면 사탄은 에덴에서 아담을 속여서 우주적인 반역을 저지르게 함으로써 만고의 쿠데타에 성공했다. 아담과 하와는 과실 하나의 값으로 자신의 신성을 사탄에게 팔았다. 순식간에 최초의 인간은 신존 존재에서 마귀적인 존재로 변형되었고, 사탄은 이 세상의 신이 되었다. 이 운명의 순간에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 출입이 금지됐고, 하나님은 이 땅에서 철수하셨다. 그리고 사탄이 이 땅과 모든 거민들에 대한 법적인 권리를 획득했다.
이 믿음신학의 신화는 은연 중 이원론을 전개한다. 우주의 지배를 놓고 두 세력이 싸운다. 마지막까지 누가 이길는지 모른다. 하나님과 사탄이라는 두 세력의 배후에 있는 힘은 인간의 말에 의해 작동된다. 코플랜드, “두려움은 사탄을 움직이게 한다. 그러나 믿음의 방법은 하나님을 움직이시게 한다.” 이런 개념이 성경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조로아스터교 그리고 영지주의와 같은 이방의 신념 구조에서 발견된다는 것이 역설적이다. 이런 개념을 수용하면, 성경적인 신관은 완전히 파괴된다. 즉 전지전능하시며, 자존하시고, 초월하시며, 영원하시고, 결코 다 이해할 수 없으시며, 보이지 않으시며, 다른 것과 비교되지 않으시며, 무한하시며, 지혜롭고, 온전히 거룩하실 뿐 아니라, 자신의 뜻에 따라 만물의 질서를 세우시는(엡1;11) 주권자이신 신관을 파괴하는 것이다.
믿음신학에서 두드러지게 특이한 대목은, 인간을 신 혹은 마귀적인 존재로 묘사하는 것이다. 베니 힌, “하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인간이 되셨다. 인간을 작은 신들로 만드셨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하늘로 돌아가셨다. 나는 하나님의 일부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인가? 당신이 그분의 자손인가? 자녀인가? 당신은 인간일 수가 없다! 그럴 수 없다! 절대 없다! 하나님이 육체를 낳을 수 없다.” 힌은 설교를 이렇게 연다. “저는 오늘 성령에 의해 이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힌을 통해서 말씀하실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확실히 인간이 아닌 그 무엇이라는 어떤 성경적인 증거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타락한 천사의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이 작은 신이 아님은 확실하다. 타락의 결과 인간의 본성은 타격을 입고 뒤틀렸으나,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영광의 뒤틀린 형상이 타락한 인간 안에서 여전히 보인다.”(칼빈)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을 하나님처럼 보이게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인 것은 아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땅을 지배하는 권세가 사탄에게 넘어갔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탄은 주권적인 세도를 부리기는 커녕 한낱 피조물일 뿐이다. 사탄은 하나님이 아니라, 천사 그것도 타락한 천사다. 사탄은 이 세상(전체가 아니라)의 임금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요16:11), 정통 기독교는 사탄이 무한하신 창조주의 의지에 궁극적으로 복종하는 유한한 피조물이라고 한다(시103:20-21). 사탄은 그의 능란한 속임수에 자원하여 복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실제적인 통치자가 된다. 우리가 옛적부터 계시는 하나님께 속하여 있지 않으면, 우리는 사탄, 즉 이 세대의 신(고후4:4,11:3,요8:42-47)에게 속한 자들이다. 사탄이 이 땅에 대하여 지배권을 잡고 있다는 개념 자체는, 인간이 땅의 소유권을 받았다가 마귀에게 넘겨줬다는 잘못된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인간은 땅의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자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24;1).
믿음신학 교사들이 얼마나 마구잡이로 하나님을 실패자로 강등하고 사탄을 주권자로 승격시켰는지 보면 기가 차다. 오늘 기독교 서점에 나가서 둘러보면 하나님을 “우주의 대법정”에 소속된 분으로 묘사하는 책들을 쉽게 발견할 것이다. 찰스 켑스가 쓴 책 <세 세상에서의 권위>가 그것이다. “아담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계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담이 사탄에게 굴복함으로써 그는 하나님을 추방했다. 하나님은 밖에서 기웃거리는 처지가 됐다. 사탄은 세계를 통치하는 신이 됐다. 사탄은 아담의 권위를 획득함으로써 땅에 대한 지배력을 휘두르게 됐고, 하나님은 밖에 남겨지셨다. 하나님은 우주의 대법정의 법률에 의해 다스려질 영역으로 옮겨 가셔야 했다.” 여기서 하나님은 구분이 지으신 우주로부터 폐위되시는 모습을 본다! 만약 하나님이 캡스의 우주 위원회에 소환되셔야 했다면 그분은 정의상 진정한 하나님이 아니시다. 성경의 하나님은 우주의 최고 재판관이시다(창18:25,시96;13,전3:17,딤후4:1).
믿음운동 진영 아니 이제는 기독교 공동체 전체에 널리 펴져 있는 가장 참담하고 비성경적인 사상은, 성령께서 그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사람에게도 사탄이 역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양한 사회적인 배경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이, 자기가 귀신들을 끌어안고 살고 있기에 축사로 치유 받아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다. TBN 방송을 켜보라. 음욕의 귀신부터 후두염의 귀신까지 묶기에 바쁜 믿음운동 설교자들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사탄의 능력을 턱없이 과대평가한다. 부화뇌동하고 의지력이 약한 사람들은 “마귀가 그렇게 했다”(저주, 간통, 뱀처럼 바닥에서 똬리를 트는 일 등등)가 실제는 죄에 둘러대는 편안한 핑계에 불과함을 똑똑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런 태도는 분노에서 자살까지 모든 것을 마귀에게 돌리게 하지만, 영적인 전쟁이란 이 세상과 육체 또한 연계되는 것임을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우리가 “세상 풍조”와 “육체의 욕심”(엡2:3)을 따르기 때문에 영적인 전쟁에서 자주 쓰러진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동시에 마귀의 소굴이 될 수도 있다는 주장은 마귀를 신격화하는 전형적인 사례다.
존 해기의 도발적인 주장을 들어보라, “적그리스도는 머리에 총상을 입을 것이다. 그의 이름을 이루는 글자들의 조합으로 그의 정체를 알아낸 한 의로운 유대인이 총격을 가할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기적적으로 부활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판박이로 흉내내는 것이다.” 사탄은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살후2:9)을 통해 그리스도의 기적을 모방할 수는 있지만, 사탄이 죽음과 무덤의 권세를 이길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사탄이 순전한 기적들과 구분되지 않는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개념은 이원론적 세계관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 세계관 아래서는 하나님과 사탄이라는 동등하고 적대적인 두 세력이 지배권 확보를 위해 다툰다. 해기의 주장이 단지 비정상적인 사고이길 바란다. 그러나 슬프게도 기독교 진영에서 이런 외침이 점점 더 크게 들려오고 있다.
12장 격하된 그리스도
믿음신학 교사들은 이단들 그리고 타 종교들과 결탁하여 그리스도조차 단지 유한한 인간으로 격하시킨다. 크레플로 달러는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머무시는 동안에도 하나님이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환상에 빠진 설교자들”이라고 몰아붙인다. 베니 힌은 <안녕하세요 성령님> 초판에서 말한다. “성령께서 예수와 함께 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도 죄를 지으셨을 것이다. 그렇다. 예수를 순결하게 잡아준 능력은 바로 성령이셨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셨지만, 인자라 불린다. 따라서 예수님은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었다. 성령 없이는 예수님은 결코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상상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는 무덤을 향해 가셨다. 거기서 영원히 지내야 하는 것을 아셨다. 성령께서 마음을 바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지 않으셨다면 그랬을 것이다.”
입만 열면 하나님을 말하고 자신을 하나님이 기름부으신 자라고 떠들어대는 베니 힌은 성경의 가장 기본적인 것 하나도 이해하기 못하고 있다. 예수님이 자신을 인자라고 지칭하실 때 그분은 이 칭호를 하나님의 메시아를 가리켜 사용하신다(단713,14).
믿음신학 교사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성육신이신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신자들이 하나님의 성육신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솔직히 코플랜드는 자기가 마치 그리스도와 같다고 생각하는 기색이 완연하다. 성경은 힘주어 말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많은 성육신 가운데 한 형태가 아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유일한 성육신이시다. 따라서 그분은 독특하고, 유일무이하며, 단 하나뿐인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믿음신학 교사들은 그리스도를 격하하고 인간을 신격화하는 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그들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우주를 지으실 때와 마찬가지로 말씀으로 인해 지어진 분이라 주장함으로써 어리석음을 한층 더 올린다. 캡스,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그 형상을 마리아에게 전달하셨다. 마리아는 자기 안에 있는 형상을 받은 것이다. 마리아의 자궁 안에 있는 태아는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더 나아가 그분을 조각조각 모여진 존재로 만든다. “손가락을 만드는 데 필요한 믿음이 방출되고, 팔을 만드는 데 필요한 믿음이 이 땅으로 방출됐다. 이제 하나님이 마리아라고 부르는 계집 아이 위에 머무시는 일만 남았다. 이 처녀의 소생은 하나님의 소산이었다.‘
13 장 십자가의 재창조
속죄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의 희생적인 죽음으로 인간의 죄문제를 완전히 다루셨다는 뜻이다. 그분 위에 세상의 모든 죄가 지워졌다. 그분은 실제로 완벽하셨고 죄가 없으셨지만, 우리의 모든 죄가 그분에게로 전가됐다는 의미에서 죄인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속죄하는 희생을 통해서 위치상 의로운 자들로 여겨진다. 갈보리 십자가의 속죄가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에서 결정적인 요소라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것이 없다.
당신의 구원이 획득되든 상실되든 하는 곳은 지옥이 아니라 십자가다. 믿음운동의 가장 악의적인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역사를 십자가가 아니라 지옥의 가장 깊은 구덩이로 옮겨가고 있다.
바울 사도가 요약한 예수의 희생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5:2)이다. 베니 힌은 “향기로운 제물”을 “사탄의 상징”으로 바꿔버린다. 힌, “뱀은 사탄의 상징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탄을 멈추게 할 유일한 방법이 사탄과 같은 본성이 되는 것임을 아셨다. 예수님은 내 죄가 되셨다. 죄는 지옥의 본성이다. 죄는 사탄을 만든 바로 그것이다. 그분은 육체가 되심으로써 육체가 그분처럼 될 수 있다. 그분은 죽음이 되셨다. 그래서 죽어가는 사람이 살 수 있다. 그분은 죄가 되셨기에 죄인들이 그분 안에서 의로워질 수 있다. 그분이 사탄의 본성 일부를 취하셨기에, 사탄의 본성을 갖게 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케네스 해긴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수난 당하시면서 사탄의 본성을 취하셨다고 한다. “영적인 죽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 그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탄의 본성을 갖게 됐다는 뜻 또한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영적인 죽음을 맛보았다.”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마귀적인 존재가 되셨다 하는 오류는 더 큰 오류로 반드시 귀착될 수 밖에 없다. 즉, 예수님이 갈보리 십자가에서 당한 고통은 인간의 죄를 속하는 데 부족하다는 것이다. 조이스 마이어는 확신에 넘쳐서 말한다. “예수님이 지옥에서 당신의 자리를 대신하셨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지 않는다면 천국에 갈 수 없다.” 믿음신학 교사들은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도 “이제야 비로소 시작됐다”로 해석한다. 이 유해한 오류를 조엘 오스틴보다 대중의 입맛에 맞게 만든 사람도 없다. 그는 성경 전체의 교훈에 반하여, 지옥에서 “우주에서 가장 막강한 두 세력이 역사에서 최초로 대회전을 했다”고 주장한다. 오스틴은 믿음운동의 선구자들처럼 십자가의 승리를 지옥의 복도로 옮겨놓는다.
14장 지옥에서 이룬 구원
정통신학에서 속죄의 결말은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믿음 신학에서 십자가는 “단지 시작일” 뿐이다. 조엘 오스틴보다 이 면에서 교리적으로 일탈한 자는 없다. “예수님은 사흘 간 원수와 싸우셨다. 이 싸움은 오랜 세월 기다려온 것이었다. 빛과 어둠의 싸움, 선과 악의 싸움이었다.” 오스틴은 구속이 지옥의 큰 솥에서 사탄과 구세주가 영웅적인 전투를 벌인 결과로 확실해졌다고 지지자들에게 호언한다.
프레드릭 프라이스, “우리 죄를 위한 형벌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두 강도 역시 당신의 죗값을 치러줄 수 있었다. 아니다. 형벌은 지옥으로 가서 하나님과 분리된 채 일정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코플랜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완전한 구속 사역의 시작이었을 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아, 내가 네 손아귀에 내 영혼을 던진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라고 외치셨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2:15). 따라서 조엘 오스틴과 같은 번영신학 설교가들이 말하는 지옥에서의 “만고의 전투”는 허망한 상상력이 빚어낸 3류 소설일 뿐이다.
15장 지옥에서 이룬 중생
믿음신학은 사탄이 예수님이 불법적으로 지옥으로 끌려가도록 기술을 걸었다고 한다. “마귀는 예수님이 스스로는 죄를 짓지 않으셨고, 단지 다른 사람들의 죄의 결과로 죄가 되셨다는 점을 놓쳐버렸다”. 따라서 사탄과 지옥의 귀신들은 합당한 권한도 없이 그리스도의 “빈약하고 이미 물처럼 쏟아진, 벌레가 먹은 듯한 영혼”을 고문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준비하고 있던 일의 서막에 불과했다. 하나님은 그 순간에 지구의 중심부를 향해 다음과 같이 믿음으로 가득찬 말씀을 하셨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파괴의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서 예수의 영에 부활의 권능을 불어넣었다! 갑자기 예수의 뒤틀리고 죽음에 눌린 영혼이 생명으로 차오르면서 생기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마귀의 눈에는 중생한 존재였다. 예수님은 다시 태어났다. 그는 죽은 자들의 첫 열매였다.“ 예수님은 마귀를 모든 귀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본거지에서 채찍질하셨다. 예수님은 사탄에게서 열쇠를 빼앗아 지옥에서 거듭난 사람으로 나오셨다.” 찰스 캡스, “예수님은 지옥 구덩이에서 다시 나셨다. 예수님은 지옥의 문들에서 첫 소생의 교회를 시작하셨다.” 케네스 해긴은 “예수님이 거듭난 최초의 사람이다”라는 신화를 대중화한 선구자 중 한 사람이다.
그리스도께서 지옥에서 중생하셨다는 가르침에서 파생하는 문제들은 수없이 많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병적이다. 이들의 광적인 작태는 그리스도의 환생이라는 오류로 연결된다.
16장 환생
그리스도의 환생은 말 같지도 않은 속죄론 가운데서도 단연 으뜸이다. 믿음신학에 따르면 예수님은 단지 한 사람으로서 육체를 입고 오셨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사탄적인 존재로 환생하셨다. 그리고 지옥에서 영혼은 다시 한번 마귀적인 존재에서 신적인 존재로 환생했다. 그분의 신성이 돌아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폴 크라우치는 그리스도가 부활시 신적인 존재로 환생했다고 하고, 케네스 해긴은 중생한 신자들도 나사렛 예수와 마찬가지로 성육신한 존재라고 한다. 모리스 설루로는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과 똑같다고 한다. 이 모든 말들은 기독교의 핵심을 비껴난 이단적인 오류다.
17장 이 세상에 동화됨
프레데릭 프라이스, “성경은 예수님이 그분의 발자취를 좇도록 우리에게 모범을 남기셨다고 한다 내가 롤스로이스를 타는 이유가 있다. 나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믿음신학 설교자들은 은혜의 복음을 탐욕의 복음으로 바꾸기 위해 “전통적인 기독교”라고 하는 체제를 완전히 손보아야 했다.
예수님이 안락한 삶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의 안위자라고 말하는 것은 문화적인 동화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경고하셨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 그들은 형통이 모든 신자에게 주어진 신성한 권리라는 사상을 보검처럼 주저 없이 휘둘러 댄다. 이런 기독교는 “개독교인‘이라는 얇은 복장을 하고 탐욕의 세례를 주는 종교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시대에는 불쌍하리만치 문화적인 동화가 일어나고 있다. <텔레비전 전도와 미국 문화>의 저자 퀸틴 슐츠, ”텔레비전 전도자들은 자신들만의 복음을 변형된 형태 그리고 미국 문화에 맞춘 형식으로 제시한다. 그들의 믿음은 기독교적이라기보다는 미국적이고, 역사적인 뿌리를 갖기보다는 대중적, 집단적이라기보다는 훨씬 개인적이며, 성경적이기보다는 경험주의에 가깝다. 그 결과 그들이 전파하는 믿음은 대단히 부요롭고 이기적이며 개인주의적이다. 그들의 믿음은 미국의 꿈을 반영한다. 즉 스스로 동기를 부여하는 자가 큰 풍요를 이룰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그들의 믿음은 또한 교회에 끼쳐진 근대성의 영향력을 반영한다.“
세상적인 기준에서 부유한 신자들이 영적으로도 부유하고, 가난한 자들은 영적으로 가난뱅이라는 인식은 공허할뿐더러 신성모독적이다. 이런 허튼 소리를 틀어대는 사람들이 그들이 착취하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 보내온 돈으로 으스대며 다닌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착취를 당하던 사람들은 종종 기독교라고 믿던 신념을 절망한 채 버리고 떠나 이단 왕국에서 안전함을 누리려고 한다. 사도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딤후3:1-5)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문화에 의해 변형되고 있다. 하나님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함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왕국과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구함으로 뒤바뀌어 버렸다. 형통 장사꾼들은 도서와 테이프와 텔레비전에서 자기들과 비슷한 예수를 제시한다. 예수님은 큰 집에서 사셨다. 최고 명품 옷을 입으셨다. 후원금이 많이 들어와서 재정이 풍부했다. 그래서 재정 담당자를 따로 세우셔야 했다. 오럴 로버츠는 <예수님이 가난하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알았나>라는 책을 썼다. 믿음신학 설교자들은 예수님이 부자였다고 주장할 뿐 아니라 제자들도 역시 호사스럽게 살았다고 우긴다.
그리스도께서는 재정적인 번영을 주기 위해 오시지 않았다. 그분이 오신 것은 우리의 시선이 영원한 번영에 초점 맞춰지도록 하심이다. (마6:19-20)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이 세상의 문화는 신분상승과 물질주의에 집착하고 있다. 믿음운동 판매원들은 바로 이것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노동 없이 부를, 절제 없이 돈을 획득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대 이러한 경향이 더 짙어만 간다. 이들은 자기희생이 아니라 자기확대를 비밀 구호로 삼는다. 유감스럽게도 상당수의 현대 교회들이, 한번 지나가는 인생, 이 땅에 있을 때 맛볼 수 있는 향락을 맛보는 편이 낫다는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들은 더 이상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라고 노래하지 않는다. 이들은 소리친다. “믿음의 공식을 쓰면 모든 것이 말만 하면 그대로 된다.”
우리는 걸레 한 장으로 부를 거머잡은 이야기들을 갈망하고 한 번에 터지는 대박에 목을 맨다. 오스본은 사람들이 “하루 단 60초면 7가지 간단한 비결”을 배울 수 있다고 약속한다. 그러면 당신은 “단 일주일 만에 최고 인생”이 될 수 있다. 어떤 남자는 오스본의 “신속한 믿음 공식” 덕분에, “롤스로이스와 새 집”을 살 수 있었다. “오스본 사역에 단체에 20달러 혹은 50달러짜리 묘목을 심으라”고 계속 권한다. 이렇게 해야 “하나님이 일으켜주시는 돈의 기적을 볼 수 있다”라는 것이다. 이와 정반대로 성경은 우리에게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라고 명령한다.. 변화를 받을 때만이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다.”(롬12:2)
가난이 경건의 척도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 문제는 무엇을 소유했는가가 아니라, 소유한 그것으로 무엇을 하는가의 문제다. 우리의 시간, 재능 그리고 재물은 우리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여야 한다. 성경은 돈 자체를 위한 축적을 지지하지 않는다. 대신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돈을 사용할 것을 권고한다.
(참고; 부나 가난 자체가 경건과 직결될 수는 없다. 부하면서도 경건할 수 있고, 가난하면서도 불경건할 수 있다. 보수의 부패를 비난하던 진보가 자리를 그 차지하면 더 부패하기도 한다. 지나친 부도 지나친 가난도 경건에 장애가 될 수는 있다.)
결국 번영신학 지지자들은 자기만족과 이기적인 생활을 가르친다. 자아를 섬기는 것과 구세주를 섬기는 것의 차이는 문화에 동화되느냐 아니면 그리스도께 동화되느냐의 차이인 것이다. 예수님은 이 점을 잘 짚어주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
해기,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빈곤을 십자가에 못박으셨고 당신에게 아브라함의 부요함을 주셨다. 빈곤의 저주는 십자가에서 깨졌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면, 빈곤의 저주에서 벗어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나오는 형통의 권리들을 실천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당신으로 하여금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의 창들을 여시고 담을 곳이 없도록 복을 내려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파지 않은 샘물을 주실 것이다. 당신이 만들지 않은 포도원을 주실 것이다. 당신이 짓지 않은 집을 주실 것이다.” 믿음신학 설교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후렴구가 있다.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는 길은 헌금을 내는 것이다.”라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헌금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헌금이 아니다. 하늘의 창들을 열고 복을 쏟아부어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게 하는 이 헌금은 일종의 돈 놓고 돈 먹기다.
18장 사기와 연막
후아니타 바이넘, “지금 나를 보고 있는 분들에게 도전한다. 이 말씀은 여러분을 위한 것이다. 여러분의 계좌를 완전히 비우라. 통장에 79달러가 있는가? 비워버리라. 지금 비워버리라. 예언자의 말이다.”
기독교의 미명을 뒤집어 쓴 사기와 연막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떠돌이 약장사들도 그렇다. 영적인 암흑의 시대에 요한 테첼 수도사는 당대의 부자들에게 면죄부를 사도록 사기를 쳤다. “헌금함에 동전이 짤랑 하고 떨어질 때 연옥의 영혼이 깨어난다”. 중독성이 있을 만큼 간결한 구호다. 교황이 내린 과업을 완수하고 자기도 호의호식하기 위해서였다. 루터는 이를 가리켜 “탐욕과 갈취”? 위한 비뚤어진 관행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오늘날의 거짓 교사들은 빈곤에서 자유를 주고 한 평생 호의호식하게 해주겠다며 신세대에게 사기를 치고 있다.
오럴 로버츠는 테첼보다 훨씬 교묘하다. 구원을 돈 받고 팔지 않은 대신 그는 두려움과 탐욕과 같은 기본적인 본능에 호소했다. 오럴의 전술은 믿음신학 교사들 사이에서는 이미 표준이 됐다. 그들은 파트너들에게 하늘 낙원이 아니라 지상의 형통을 약속한다. 그들은 암기하기 좋도록 멋들어진 구호를 만들어낸다. “필요하면, 씨앗을 심어라”. “씨앗 심기”는 “송금”의 동의어이다. 오럴 로버츠의 아들 리처드는 텔레비전과 우편을 이용해서 엄청난 액수를 긁어모은다. 그 방법은 “정서적인 호소의 가장 저급한 형식”이라 알려져 있다. 1987년 1월4일 오럴 로버츠는 그가 한 것 가운데 가장 악명 높은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3월까지 8백만 달러를 모으지 못하면 하나님이 자기 목숨을 거둬가실 것이라고 했다. 로버츠가 자신의 씨앗 믿음 신학을 성결구절들로 지칭함으로써 지지를 받으려고 하지만 그의 신학은 저 유명한 초월론적 형통 이단인 기독교 통일학교(창시자; 찰스 필모어)의 신학과 너무나도 비슷하다. 로버츠는 “씨앗을 심는” 자들에게 형통을 약속했다. 오늘날의 새로운 종자의 번영신학 교사들은 더 큰 재정적인 보상, 즉 “100배의 보상”을 약속한다.
베니 힌은 하나님을 믿을 만한 강매자로까지 왜곡한다. “여러분, 여러분의 씨앗을 뿌리지 않고 가지고 있을 때마다, 여러분이 좋건 싫건 하늘나라에서는 20퍼센트의 벌금이 부과된다. 아니 여러분이 내놓지 않으면 하나님이 참사를 일으켜 걷어 가신다..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면 당신이 싫건 좋건 곤경을 통해서 가져가실 것이다.” 바이넘의 애창곡은 “마지막 남은 것을 드려라”이다.
번영신학의 보따리 장수들이 풀어놓는 사기와 연막이 이 땅을 계속해서 달구고 있기에, 이런 유사품들이 어른거릴 때는 진리를 익히고 또 익혀서 어렵지 않게 알아보는 일이 정말로 결정적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신종 요한 테첼들에게서 건져주시길!
19장 언약과 계약
코플랜드에 의하면 예수님은 자신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부자였고 형통한 인물이었다. 그는 33년간 고귀한 삶을 살았다. 예수님은 마치 아브라함처럼 언약 아래에서 자신의 모든 권한을 활용했다. 믿음신학이 말하는 “복음”은 우리가 예수처럼 아브라함의 후손이므로 언약의 상속자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이 수립됐고 형통은 이 언약에 의거한 공급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지금 당신에게 속한 형통을 실현해야 한다.”
언약은 하나님을 욱박지르는 데 사용할 수 잇는 단순한 계약이 아니다. 예수님은 금괴보관소의 문을 여는 주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인류를 죄에서 구속하시려는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을 선포하고 있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이다. 언약은 우리를 부자로 만들어주는 계약이 결단코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나오는 형통의 원리들을 실천하기만 하면 이 말씀은 당신으로 하여금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해기는 찰스 스펄전의 말을 명심해야 한다. “옛 언약은 형통의 언약이었다. 그러나 새 언약은 고난의 언약이다. 우리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이 현세에서 발을 떼고 오는 세상을 맞을 준비를 하게 된다.” 그들의 말대로 형통은 언약이고 빈곤은 저주라면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보다도 더 저주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바울은 저주는 고사하고 자족의 삶을 살았다. (빌4: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세우신 모든 언약-계약의 예표와 그림자들-은 거룩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되었다. 우리가 갈망하는 것은 형통이 아니라 에덴 동산이다.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계21:2)은 곳이다. 그때까지 부하든 가난하든, 우리를 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는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다(빌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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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청교도의 길을 함께 원문보기 글쓴이: 한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