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산 1리(구산,사구)
<위치 및 환경>
면사무소에서 의성 방면으로 3.2km 지점에서 금성면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 남대천을 건너면 구산마을이다. 산기슭에 일자형으로 길게 된 20여 호의 마을로 쌍계천 너머 사구마을과 마주하고 앞산이 금산이며 뒷산이 삼보산이다. 경관이 좋고 수리가 안전하며 살기좋은 마을이며, 조선조 순조때 저술한 도와공(陶窩公)의 구장지(龜庄誌)에서는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구산이라 하여 촌안산여구복형하유부연상구유서당남유구산촌(村案山 如龜伏形 下有釜淵 上舊有書堂 南有龜山村)이라고 적혀있다. 대천 연변이어서 땅이 기름지고, 따라서 곡식이 잘 되어 비닐 하우스 등 개량된 영농 방법으로 전주민이 소득을 높이고 있다. 150년 전 아주 아주신씨가 구미에서, 120년 전에 김령김씨가, 80년 전에 진주강씨가, 120년 전에 청주이씨가 비안에서, 함양박씨는 60년전 비안에서 입향하였으며, 아주신씨가 주를 이루고 기타 성씨는 대를 이어 명맥만 이어가며 상부상조하여 단란하게 살고 있다.
< 마을이름 유래>
♠마질기 마을
마을 뒤에 삼보산이 있고 앞은 농경지가 펼쳐져 있다. 마을 앞으로 금성면으로 통하는 지방도로가 있으며, 산 기슭에는 가옥이 1열 로 형성되어 있다. 호수는 현재 25호이다. 50년 전에는 30호였다. 마질기라고 부르는 것은 뒷산이 보현산에서 산맥이 펼쳐 내려와, 산맥의 끝에 있다고 마지막 마을, 마질기라고 부르고 있다. 구산리 이름은 뒷산이 거북같이 생겼다고 하여 구산마을이라고 행정상 부르고 있다. 뒷산 삼보산의 유래는, 전설에 세가지 보배가 있었다고 한다. 산삼, 백사, 금이 있다고 전해오고, 또는 산모양이 세모 모양으로 삼모산이라고도 전한다. 마을앞 쌍계천은 지금은 금산 밑으로 흘러가고 있으나, 약 100년 전에는 마을 앞이 하천이어서 집뜰에서도 낚시질을 하였다고 전하며, 1930년을 전후하여 홍수로 하천이 바꾸어지면서 지금의 금산 밑으로 변하였다. 1995년 봉양면 상수도 취수장이 설립되고, 상수도원 보호지역으로 농경 및 축산업에 제약을 받고 있다. 성씨 거주는 서기 1,800년경 아주신씨 17호가 거주하고, 그후 1850년경에 청주이씨 3호, 김녕김씨가 3호, 진주강씨 3호가 이주 하였다. 해방 전후만 해도 호수가 32호였고, 대부분 부유한 편이라 했다. 지금은 젊은이는 도시로 나가고 노약자가 집을 지키고 있다.
♠사구마을 옛 기록에 사화라고 마을이름이 기록되었으며, 그후 사부래이라고 불려왔다. 조문국시대 역촌이라는 설도 있으나 누가 살았는지는 알 수 없고, 1760년경 밀양박씨, 해주오씨, 분성배씨가 각기 집성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으며, 1800년경 아주신씨, 김녕김씨, 진주강씨가 이주하였고, 그후 청주이씨가 입주하였다. 지금은 대다수 성씨가 도시로 이주하고 아주신씨가 많이 살고있다. 1946년경 호수가 40호였던 것이 해방으로 귀환 가정이 증가하여 56호가 되었다. 정부 시책으로 지붕개량이 처음 초가집 5채가 기와집으로 바꾸어지고, 1970년대에 와서 초가집은 전부 기와집 및 스레트집으로 변하였다. 새마을사업으로 전기가 가설되고 농촌생활이 개선되었다. 1990년대에 와서는 가옥의 구조 개선, 화장실 개선 및 TV, 냉장고, 세탁기, 전화 등 문명의 이기를 갖추게 되었고, 농기구의 기계화에 의한 영농방법 혁신으로 고소득을 얻어 자가용 승용차, 화물차를 가지게 되어 생활에 불편이 없다.
○주요지명 ○부채골 : 마을중간 산 골짜기를 부채골이라고 부르는데 고려시대에 절이 있었다 한다. 40년 전 1950년까지도 돌부처가 있었는데 그후 부처를 도난 당했다. 그곳에 바위 한 개가 서 있다. 옆산 기슭이에 라총이라고 하는 신라시대 무덤이 전해 오고 있다. 현재는 검은 상석과 작은 비석이 서 있다. 무덤 모양이 편편하여 형체만 남아 있다.
● 마질기 지리학적으로 보면 태백산맥이 청송 보현산에 이르고 그 한 지맥의 마지막 지점인 마침터가 마질기라 한다. 어원을 생각하여 보면, 마침은 모든 사물의 끝맺음을 의미하며 전도가 없는 완성으로 풀이 된다. 그리하여 마침터의 침자를 바꿀 질(迭)자로 바꾸고 「터」자는 「基」자를 사용하여 마질기로 지명을 바꾸어, 끝맺음에서 다시 도약할 수 있는 곳으로 하는 옛 선조들의 지혜가 깃들어 있다고 생각된다. 마질기 마을은 예부터 인재와 장사가 배출하고 부촌으로 이어지며 전도가 양양한 길지 마을로 호평을 받고 있다.
● 삼보산 삼보산은 마을 뒤쪽에 우뚝 솟은 산이다. 이 산에 예부터 산삼, 백사, 금의 세가지 보물이 있다고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전한다. 그동안 수많은 호사가들이 이 보물을 찾아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보물을 찾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을 이 보물이 있었더라면 자연의 섭리에 따라 아마 지금쯤 번성하였을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삼모산이라고도 하였다. 이산의 지혐이 세모로 되어 한모는 마질기쪽 ,한모는 샘골쪽 ,또 한모는 먹방이쪽으로 지맥이 뻗쳐 삼모산이라 하였다. 삼모가 삼보로 되었는지 삼보가 삼모로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지금껏 삼보로 부르고 있으니 언젠가는 보물이 나오기만 기대하여 본다.
●가마소 마을뒤 남대천 언덕의 바위 형태가 가마와 흡사하다 하여 가마소로 붙어진 것으로 전한다. 수심이 깊고 장어, 메기, 잉어 , 붕어 등 물고기의 보고이다. 봄철이면 한량들의 낚시터이기도 하고, 겨울에는 학생들의 스케이트장으로도 이용되는 곳이다. 장마 때면 남대천의 물이 넘쳐서 소의 암벽에 부닥치면 장관을 이루고 수세가 약화되어 흐른다. 몇 십년 전만해도 이 소아래에서 학생을은 학교에 가기 위하여 옷을 벗고 책보자기와 옷을 머리에 이고 냇물을 건너야 했다.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은 소이다. 강제원의 말에 의하면 이 소에 물이 돌면서 그 형태가 사람 머리의 가마와 비슷하다하여 가마소라고 한다고 한다. 또 소의 수심이 옛날 명주꾸리 한 개의 길이가 되었고, 천년 묵은 이시미(이무기)가 살고 있다는 전설이 있다. 이는 수심의 깊다는 표현이며, 이시미가 산다는 것은 사람이 함부로 목욕을 하다가는 물에 빠져 죽는 수가 많음으로 재앙을 방지하고자 하는 경고를 뜻하는 것으로 옛 조상님들의 지혜이다.
○ 덕곡 마을 동남쪽 깊은 골짜기를 덕골이라 한다. 골짜기는 죄우의 산이 높고 수분이 풍부하여 한발이 심하여도 농사짓는 데는 지장이 없이 풍작을 이루며, 천수답에도 물을 공급하여 준다. 골짜기는 마을 주민들이 농사를 경작하는 데는 없어서는 안 될 보고이다. 이러한 보고의 골짜기를 덕골이라 한다. 덕골에는 경지가 많으며, 고개 너머는 샘골이다.
<주요사건 및 자랑>
♠ 자랑 (1) 사부랑 1958년 봄, 민유림 조림사업으로 오리나무 27만주를 금산서원 뒤편부터 마을 뒷산까지 80정보를 면이 주관하여 약 1개월에 걸쳐 면민의 부역으로 식수하였다. 나무심기에 필요한 기구는 본동에서 주선하고 식수 후 관리는 동에서 책임지게 됐다. 해방 후 어느 부락을 막론하고 무분별한 도벌로 산은 벌거숭이가 되고 토사는 흘러내려 하상은 높아졌다. 정부에서는 사방사업과 조림사업에 주력하였으며 심사제도가 생겼다. 1959년, 한·미 합동 조림심사에 전국 41개소 중 최우수지로 선정되어 봉양면과 마을이 표창을 받았다. 그러나 오리나무는 쓸모가 없고, 그당시에 경제 수종을 심었더라면 40년을 맞는 지금은 큰 재산이 되었을 것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많다.
(2) 효부 김시홍 남편은 타향살이를 하는데 시모가 중풍으로 눕게 되자 가정살림을 꾸려 나가면서 11년간이나 간호하던 중 다시 병세가 악화되었으나, 10여 년 동안 하루같이 봉양하며 어려운 농촌경제인데도 3남매 모두 전문대학까지 뒷바라지를 하였음은 타인의 귀감이 된다.
(3) 사구 1900년 경에 앞들을 벼농사를 짓기 위해 마을 위쪽 덕은마을 앞 쌍계천을 막아 보를 만들어 논에 벼농사를 지어 식량을 구했다. 1965년경에 수리조합을 조직하여 양수기로 물을 끌어서 농업용수에 썼다. 사구리 앞 쌍계천을 수 백년 동안 신발을 벗고 다리를 걷어 올리고 건너 마을에 가서 농사를 지어 오고,학교를 다녔으나, 본동 출신인 신태근 의성군의회 의장의 힘을 입어 대형트럭이 서로 교차할 수 있는 교량이 놓여져 홍수가 지나도 안전한 교량이라 자랑 할 수 있다. 사구 저수지는 몇 백년의 역사를 가진 조그마한 저수지였으나, 91년 정부지원금으로 현대식 저수지로 탈바꿈하여 지금은 수 백 두락의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물을 담수할 수 있다.
(4) 사구보 옛날 벼농사를 짓기 위하여 몽리자를 동원하여 돌 또는 나무로 보를 막아 물을 유입하여 농사를 지었으나, 1900년에 시멘트로 덕은앞 쌍계천을 가로막아 벼 농사를 지어왔고, 한해(旱害)에는 자연수가 부족하여 그 당시 수리계장 신상락이 몽리자와 협의 끝에 강물을 퍼올리는 발동기 양수장을 1975년에 설치하고 수리를 해결하였으나, 시설이 노후되고 발동기가 고장이 잘 나고 설치장소도 부적합하여,1987년도 신태근의 힘을 얻어 신형 자동양수기를 설치하여 지금은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벼농사 짓는 데는 지장이 없다. (당시 양수장설치추진위원장 오영근) 보답 200여 두락의 면적을 가진 사구보 역사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이렇다 할 장비 하나 없이 옛날 몽리자들이 힘을 모아 순수한 등짐으로 돌을 운반하고 거적을 깔고 말목으로 돌의 유실을 방지하고 자갈로 거적을 눌러 물을 담수시켜 수백 년을 내려오던 고생을 생각하면, 오늘날에 와서 완전하게 시멘트로 제방하여 물을 담수하여 지금은 군내서도 이름있는 수리답으로 손꼽힌다.
(3) 마질게보 옛날 논에 물을 대서 벼농사를 짓기 위해 개울을 막아 보를 막고, 봇도랑을 내서 논에 물을 들도록 했다. 그 당시는 앞들이 전부 밭이였는데,1910년 김용안, 신정석 주동으로 보를 막아 논으로 개척했다. 보 막는데 돌을 쌓고 나무를 깔고 몽리자들의 힘이 많이 들었다. 해방 후 1950년 시멘트로 보를 개척했다. 한해에 대비해서 수리계장 신사홍, 총무 신부해 주동으로 양수기를 설립했다. 그때는 발동기 가동으로 했으나, 1970년에 신형으로 전기 양수기를 설치해서 물을 펐다. 한해 때만 양수가동하고 평상시에는 보를 이용한다. 사구보는 몇 해전에 설치했다고 "구들,구보"라고 말하고, 구산보는 그후 설치했다고 "새들,새보"라고 한다.
(4) 골작 저수지 1970년 전에는 오룡골,샛골 양고을에 논이 천봉답으로 약 70두락이 있었는데, 매년 한해로 하늘만 쳐다보고 지어 오던 중에, 1976년 신영진이 동장직을 맡으면서 부단한 노력끝에 정부로부터 한해 대책용 저수지 신설비를 얻어와서 오른골못을 신설하는데 큰 역할을 하여 몽리자에게 많은 호평을 받아, 1978년 완공한 다음 또다시 샛골 옛 성황당 및 개골에 취로 사업비를 정부로부터 보조받아 오영근 동장이 공사를 완성하여 ,한해에 타격받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명칭은 샛골 못이라고 한다.
(5) 저수지 사구 저수지는 300년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누가 막았는지는 모르는 사실이다. 처음 저수지 면적은 얼마되지 않았으나, 몽리면적은 약 200두락이 넘고, 매년 가뭄에 벼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 걱정하던 중 해방이 되고, 1970년대 들어와서 수리계장인 신정근의 노력으로 정부보조금을 얻어 수리 및 확장공사를 했다. 그후에도 농업용수가 부족하여 1975년 못 수리계장과 보 수리계장이 합심하여 발동기 양수장을 자력으로 설치하여 영농에 큰 도움을 주었고, 1985년 한해가 심해 못바닥이 손바닥이 들어갈 정도로 가뭄이 심해서 한해 대책용으로 정부로부터 1800만원의 지원을 받아 못을 완전히 준설하였다.
(6) 지금의 사부래이 수십 년 전만 해도, 신, 오, 배, 김, 박씨 등 오순도순 근 60호가 살 적에는, 어느 골목을 지나가도 아이들의 울음소리, 따닥방망이 소리 들리고, 질삼 등을 하였으나, 지금은 옛 이야기로 돌아갔고, 또한 아침이면 아동들이 수 10명씩 등교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초등학교 아동은 없고 집집마다 60세이상 노인들만 집을 지키고 있다. 사구마을 앞 쌍계천은 마질기와 수백 년 동안 신발을 벗고 건너 다니는 시절을 해소하기 위하여 그당시 회장 신영진, 새마을 지도자 신원한 부락민이 단결하여 교량가설에 협의하여 1975년도 계획을 세워 1976년도에 주민부담으로 300만원에 폭 2m, 길이 80m콘크리트 교량을 가설하여 주민, 학생, 차량할 것 없이 건너 다니다가 부실공사로 인하여 7년 후 교량이 파괴되어 재교량 사업을 신청한 결과, 김정후 신태근 당시 군의회 의장의 힘을 입어 폭 4m, 길이 80m 교량을 가설하게 되고, 홍수에도 지장이 없고 대형차량이 다녀도 안전한 교량을 가설하였다.
(7) 식수 해방전 1850년까지는 위쪽중간, 아래쪽 세 곳에 우물이 있어 물동이로 가져다 먹었는데 지금은 마을 위쪽 논 가장자리에 지하수를 개발하여 지하 80m 굴착하여 전 마을 주민이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지하수 물이 깨끗하지 못해 봉양면 광역상수도 물을 이용할 예정이다. 그러나 부담금이 호당 50만원의 비용이 들어 어렵다.
(8) 마질기 상수도 1970년 전만 해도 우물 3곳을 이용했으나 식수가 부족해서 불편함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동장 신탁수가 우물에 펌프를 설치하였으나 수질과 수량이 부족해서 1985년 반장 신상목이 주관하여 앞들에 80m 지하수를 개발(군보조금)했다. 수질도 좋지 않고 기계고장이 잦아서 불평이 많았다. 광역상수도를 이용하려해도 자부담이 많아서 어려움을 겪고있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민간신앙>
(1) 정자석 마을에서 200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큰 바위 4개가 있다. 받침돌 위에 바위돌을 올려 놓고 있다. 높이 2m, 폭 2m 정도되는 큰 돌이다. 이 정자석을 우리 마을에서는 돌정자라고 부른다. 무게는 약 10톤 정도이다. 옛날 장수가 공기놀이를 하였다는 설이 있으며 마을 사람들의 휴식처로 이용된다. 정자석 주변에 마을이 있었거나 사람이 산 흔적이 있으며, 언제부터인가 이 바위에 정성을 들이면 득남하고 소원성취한다고 믿어왔다. 마을을 지켜 준다는 신앙석으로도 믿어왔으나, 지금은 그때의 신격의 생각은 전혀 없고 바위 자체가 파손, 단 1석의 흔적만 남아 있다.
(2) 서낭당 곡현동으로 가는 산길로 마을에서 약 2km 정도 되는 산고개에 위치하고 있다. 서낭신은 부락을 수호하는 신으로 서낭당으로 부르기도 한다. 고개를 넘다 보면 고개정상에 큰 나무밑에 당을 볼 수가 있는데,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돌맹이를 올려 놓거나 가지고 있던 물건 중 한 개씩 두고 가기도 하였다. 이는 토지수호신에게 재난을 없애고 복을 빌며 여행의 피로를 풀고 소원성취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렇게 하였다고 본다. 그리고 정월부터 2월까지 큰 나무에 금색줄을 쳐 오고가는 사람들은 돌맹이를 한 개씩 두고 고개숙여 정성을 들이는 사람도 있다. 간혹 침을 뱉고 가는 사람도 있다. 일설에는 이 돌맹이가 전시에 돌팔매에 이용되어 무기의 구실을 하였다한다. 이 고개길은 주로 사람의 행로이며 우마차의 수송로이기도 하다.
(3) 선돌 마을입구에 3개가 있으며, 음력 2월 1일엔 촛불도 켜고 음식도 해놓고 바위앞에서 운세를 빌었다. 마을을 지켜 주는 고마운 바위로 생각하고 있다. 1970년대 생산증대의 일환으로 경지정리를 하였는데 그때 모두 파손되고 지금은 흔적이 없다.
(4) 유적 (기와) 20년 전만 해도 옛날 둥근기와가 부락근처에서 발견, 기와를 가루로 만들어서 놋그릇을 닦았다. 부족시대에 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추정된다.
(5) 노거수 누가 언제 심었는지 알 수 없는 수령 약 300년의 회나무 2주가 서 있다. 그늘이 좋아 여름철에는 동민의 휴식처로 이용되며, 단오절에는 그네를 매어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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