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쌍탑가람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각기 독특한 형태의 가람배치를 한 사찰을 운영했다. 먼저 고구려는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堂式)이었다. 일명 회탑식(回塔式)이라고도 하는 것인데 사찰의 가운데에 탑을 세우고 3개의 금당이 탑을 둘러싸는 형식의 가람배치였다.
반면 백제는 사찰의 입구에 못을 두고 못을 건너면 탑이 나타나고 탑의 뒤에는 금당이 있고 금당의 뒤편에 강당이 모두 남북 자오선상에 일직선으로 늘어선 이른바 일탑일금당 방식의 가람을 경영하였다.
이에 비하여 신라의 가람배치는 삼국시대와 통일 후를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데 삼국시대에는 북방불교인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아 일탑삼금당의 가람배치가 유행했다.
그러나 고구려와는 달리 회탑식 가람배치는 찾아볼 수 없고 분황사와 같은 품자형(品字形)의 가람배치를 하거나 황룡사와 같이 3개의 금당을 동서 일직선상에 병렬시키는 가람배치를 하였다.
그런데 삼국통일 이후에는 백제의 가람배치 양식이 들어와 금당과 강당을 짓게 되는데 금당 뜰에 들어서는 탑의 경우는 지금까지의 단탑에서 동서로 두 개의 탑을 세우는 쌍탑형식의 가람배치인 이른바 쌍탑일금당의 형식이 등장한다.
쌍탑일금당 가람의 첫 사찰이 바로 사천왕사이며 제2호가 망덕사이며, 제3호는 감은사였다. 다만 사천왕사와 망덕사는 목탑을 조영하였으나 감은사에서는 석탑이 등장하는 것이다.
감은사탑 이후에 신라에서는 주로 석탑을 많이 만들었지만 목탑의 전통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 증거가 9세기의 절이었던 보문사에 목탑이 건립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삼국시대 이래로 건립되던 목탑 문화의 전통은 통일 후에도 오랫동안 다양한 모습으로 유지되었던 것이다.
사천왕사 금당터의 뒤편에는 종루터와 경루터로 알려져있는 건물터가 있다. 그러나 이 건물의 정확한 용도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또한 건물터에는 사방으로 놓여있는 초석에 네모난 구멍이 뚫려있는데 구멍의 용도도 현재는 알 수가 없다.
사천왕사터의 남쪽에는 머리가 잘려진 2마리의 귀부가 힘찬 모습으로 서 있는데 부근에서 명문와편에 많이 발견되었지만 비편의 내용은 전혀 알 수가 없다.
지친 다리를 이끌고 도로를 건너면 좁은 들판이 나타나고 들판의 한 자락에 작은 숲이 보이고 그 사이에 당간지주며 건물의 초석들이 흩어져 있다. 망덕사터다.
망덕사터 남쪽으로는 남천이 흐른다. 남천에는 고운 모래위로 맑은 물이 흘러가는데 바로 이곳에 그 유명한 박제상의 부인과 관련된 애닲은 전설이 전하고 있으니 바로 장사벌지지이다.
박제상이 고구려로 가서 보해를 구출하고 돌아와 집에도 들르지 않고 다시 이해를 구하기 위해 왜국으로 향했다. 부인이 그 소식을 듣고 절망에 빠져 망덕사 문 남쪽 모래 위에 기다랗게 드러누워 통곡했다. 그래서 그 모래 이름을 '장사'라 했다.
또한 부인의 친척이 달려와 부인을 부축해 일으키려 했으나 뻗친 부인의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지명이 '벌지지'가 되었다. 박제상과 그의 아내의 애잘한 사연이 깃들인 이곳에 비를 세웠는데 바로 '장사 벌지지 비(長沙 伐知旨 碑)'이다.
사천왕사를 지어 당의 침략을 물리쳤다는 신라의 호국사찰 이야기는 다시 망덕사로 이어진다.
<계속>
카페 게시글
신라 왕릉으로 가는 길
경주낭산답사기<9> 사천왕사와 망덕사③
춘추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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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0.24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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