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영어로 성경 대중화를 이끈 '틴데일[W.Tyndale]'
성경이 역사상 어떤 책도 비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읽힌 데는 기독교가 서방 세계의 지배적 종교로 군림한 것과 함께, 각 나라의 언어로 번역된 것을 꼽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성경이 처음부터 영어 독어 불어 등 여러 언어로 번역된 것은 아니다. 성경의 절대적 권위는 4세기에 확립됐지만, 이후 1,000년이 넘도록 극소수 종교 지도자에 의해 독점됐다. 왜냐하면 당시 최고 지식인 계층만 접할 수 있었던 라틴어로 쓰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난해한 라틴어 성경을, 쉬운 영어로 번역해 오늘날 우리가 읽는 '흠정역 성경'의 토대를 마련한 분이, 바로 영국의 윌리엄 틴데일(1494~1536, 42살에 순교)이다.
지금 기독교인들이 많이 쓰고 있는 '여호와(Jehovah)' '유월절(Passover)' '대속(Atonement)' '속죄양(Scapegoat)' 등의 기독교 용어를, 영어로 처음 표현한 분이다.
윌리암 틴데일은 당시의 소수 종교 지도자들이 독점했던 라틴어 성경을 일상의 쉬운 영어로 번역함으로써, 성경을 대중화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분이다.

윌리암 틴데일
당시 영국은 헨리 8세가 첫 부인 캐서린 왕비와 이혼하는 과정에서, 교황과 단절하고 영국 국교회를 성립시키던 시기를 배경으로, 수구파와 개혁세력 간의 정치적 대립과 종교개혁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그는 선동이나 항의보다 성경 번역이라는 실천운동을 통해, 봉건적인 성직사회에 도전했던 것이다. 종교개혁의 한 축이 루터나 칼뱅의 문제 제기에 있었다면, 틴데일과 같은 성경 번역자의 노력은 동일한 신념 하에, 선동이 아닌 실천으로써 나머지 한 축을 지탱했던 것이다.
이와같이 틴데일은 당시 대중을 무지 속에 남겨두고 통제하려 한 봉건적 의식의 종교지도자들에 맞서, 인간이 직접 하나님을 만나고 스스로 사고할 권리를 가질 수 있도록, 오로지 성경 번역에만 매진했다.
그리고 자신이 번역한 책을 들고, 종교개혁의 본산지이자 인쇄술 선진국이었던 독일로 가서 성경('틴데일 성경')을 찍어 내서, 이를 보급하는데 애썼다.
그러나 평민들이 성경을 읽고서 '겁도 없이 성직자와 수도사들과 논쟁을 벌이는 사태'는, 교회의 입장에서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틴데일은 악마의 앞잡이로 몰리게 됐다.
그후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추기경 울지는, 종교개혁 과정에서 헨리 8세와 결별해 쓸쓸한 최후를 맞고, 개혁에 동감했던 크랜머는 왕의 이혼에 반대했던 틴데일과 달리, 처세에 성공해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대주교가 된다.
'유토피아'의 저자인 토머스 모어등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비열한 수단을 써서 틴데일을 체포함으로써,
결국 그는 그토록 염원했던 성경 번역을 완전히 마치지 못한 채 화형당했다.
그렇지만 그가 숨지고 70여년이 지난 뒤, 당시 국왕 제임스 1세의 후원으로
47명의 학자들이 번역해 1611년 발행한 '킹 제임스 성경' 또는 '흠정[欽定·왕이 손수 제도나 법률 따위를 제정하는 일]역 성경'의 신·구약 70~80%가, 틴데일의 성경을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흠정역 성경'은 오늘날까지 가장 정확하고 아름다운 번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도망자의 삶을 감수하면서까지 번역에 매진했던 틴데일은, 오만한 신학자에게 "몇 년 안에 저 밭 가는 소년이 당신보다 성경을 더 많이 알게 될 것이오"라고 당당히 예언한 뒤, 몸소 독일의 인쇄소를 찾아가 성경 출판에 나섰던 것으로 전해진다.
틴데일의 영어 성경 평가
틴데일 시대 이전의 영어 성경은 번역판을 보고 번역한 작품에 불과했다. 즉 그것은 라틴 불가타 성서, 또는 그보다 더 오래된 라틴어 성경에서 번역한 것이었다.
그러나 틴데일은 처음으로 히브리어 원전과 그리스어 원전에서 번역을 시도했다. 그는 옛날 원어를 가지고 진실을 탐구했을 뿐만 아니라, 현대의 학자와 개역자들이 별로 고칠 데가 없는 완벽하고 고상한 번역으로 그 진실을 구현해 냈다.
그의 믿음대로 현대적 책의 형태를 갖추게 된 성경은, 오늘날 인류 최대의 베스트셀러로 가장 영향력이 큰 책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