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나간 시간을 담은 모든 것을 사랑한다. 그것은 어린 시절 혼이 나고 목이 터져라 우는 내 사진이어도 좋고, 새로 바른 벽지 아래 희미하게 비치는 낡은 벽지의 문양이어도 좋다. 그래서 나는 1980년 5월의 광주도 사랑한다. 아프고 은폐되었지만 그날의 역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김지하 시인의 '타는 목마름으로'를 배우던 날, 선생님께서는 대학 가요제에 나온 동명의 노래와 함께 70·80년대에 애창되었던 몇몇 노래들을 들려주셨다. 촌스러운 양복차림에 통기타를 메고 '타는 목마름으로'를 부르는 대학 가요제 영상. 그러나 키득거리며 장난스럽던 우리와는 달리 슬픔과 회상에 젖어드는 선생님의 눈동자를 보며, 우리는 놀라움과 의아함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숙연한 소풍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자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민주화 관련 동영상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5·18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다큐멘터리였다. 말 그대로 처참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담임선생님께 "광주로 소풍을 갔으면 좋겠다"고 별 기대 없이 말씀을 드렸는데 선생님께서 뜻밖에 흔쾌히 승낙해 주셨다.
4월 22일. 광양에서 제철소 견학을 마친 후, 국립 5·18 민주묘지에 도착했다. 비가 온다던 예보와는 달리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초여름 날씨였다. 참배광장에서 국화꽃을 바치고 분향하고 나서, 우리는 숙연한 마음으로 묵념했다. '감사합니다. 당신들이 아니셨다면 우리가 민주주의 속에 자라지 못했을 거예요.'
유영봉안소에서 유독 교복을 입은 학생의 영정 앞에서 머물던 발길을 재촉하여 묘역으로 갔다. 최초 사망자는 전신타박상으로 숨진 농아였다. 헌혈하고 집으로 돌아가다 숨진 여중생, 남편을 마중 나갔다가 조준사격으로 숨진 임신 8개월의 임산부. 생년이 62년으로 기록되어 있는 묘비도 있었는데, 62년생이면 80년 당시, 지금 우리와 같은 나이였다.
묘지를 둘러보고 나서는 5·18 추모관에서 여러 자료를 볼 수 있었다. 당시 외신기자들이 취재한 영상과 사진에는 그날의 참상이 그대로 멈춰 있었다. 너무나 처참했고, 가슴이 아팠다. 친구들은 영상관에서 영화 <화려한 휴가>의 제작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끝내 펑펑 울고 말았다.
역사의 문을 지나 민주주의의 성지인 '망월동 묘지'로 가는 길엔 금낭화와 할미꽃이 만개해 있었다. 구 묘지라 불리는 이곳은 항쟁 직후 희생된 시신들이 청소차에 실려 버려지듯 매장된 곳이다. 교과서에서 보았던 이름이 새겨진 묘비 앞을 지날 때마다 우리는 잠깐씩 멈춰 고개를 숙였다.
되풀이 말아야 할 비극
구 묘역 참배를 끝으로 광주 시내로 들어섰다. 5·18의 발원지인 전남대학교 정문을 지나, 버스는 금남로로 들어섰다. 이곳에서는 시위 기간에 연일 격렬한 항쟁이 있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버스 여러 대를 앞세운 차량 시위와, 21일 오후 1시 애국가 소리에 맞춘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있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다시 도청 앞 분수대(5·18 민주광장)를 반쯤 돌아 구 전남도청 건물 앞에 버스가 멈췄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도청 건물과 마주 보고 섰다. 27일 새벽 4시 10분부터 5시 10분까지, 도청에 남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시민군은 쏟아지는 총탄 속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들은 피 냄새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미래에 도래할 자유의 냄새임을 알았을 것이다. 전남도청이 목포로 옮겨간 이후 구 도청건물은 총알 자국을 그림자 속에 묻고 서 있었다.
고 윤상원 씨를 비롯하여 민주화를 염원하던 민주 청년들의 고뇌가 서린 녹두 서점 옛터를 뒤로 한 채 창원으로 출발했다. 사천 휴게소에 들러서야 비로소 우리는 본래의 활발함(?)을 되찾았다. 고3다운 식욕으로 이것저것 요기를 한 뒤에는 선생님이 사주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신나게 떠들었다. 그리고 달리는 버스 안에서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지금 나는 광주에 가기 전과 많이 달라진 나를 보고 있다. 5·18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된 것은 물론이고, 소풍을 가기 전까지 품고 있던 편견도 사라졌다. 어느 가수의 노래에 이런 구절이 있다. "전경과 학생, 서로 대립했었지만 나이는 같아. 고로 열광하고 싶은 마음 같아." 다시는 이런 민족사의 비극이 없기를 바라며 열린 교실 창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광주의 80년 5월이 한 마리 노고지리가 되어 울고 지나간 하늘…. 오늘은 날씨가 좋다!
/정은화(창원 문성고 3학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