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군의 흑룡강 출병
--------------------------------------------------------------------------------
1996년 하이텔 이차대전 연구회 게재
1997년 하이텔 군사동, 손중극님 홈페이지에 전재
1999년 11월 홈페이지에 게재
참고자료
참고한 서적은 신유 저, 박태근 역 "번역본 북정일기"와 국편위 한국사론9집 "조선후기 국방체제의 제문제", 육사 "무기체계학", 기타 여러 서적입니다. 이 사건에 참고할만한 중요한 서적중의 하나를 잃어버려 몇몇 부분은 상호대조를 통한 확인 작업이 빠져 조금은 불안합니다. 당시 청나라 군대의 구성등에 대해서 자신 없는 부분이 조금 있군요. 개별적인 서술에 다소 오류가 있을 수도 있으니 참고 하십시오.
참고
예전에 하이텔 이차대전 연구회에 올렸던 글을 갈무리해서 올립니다. 인용 부분이 많긴하지만, 단순히 요약정리한 글이 아니고, 제가 나름대로 원사료를 바탕으로 당시 사건을 설명한 글입니다.
1)서설
우리나라는 잘 아시다시피 수 많은 전쟁과 전투를 치루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연구가 아직 부족한 실정이고 각 전쟁이나 전투의 구체적 실상에 대해서도 일반에 알려진 바가 적습니다. 그나마,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등은 드라마나 소설등을 통해 많이 소개가 되기는 했지만 오류가 적지 않은 실정입니다. 그리고, 아지까지 전통 전쟁에 대한 연구는 역사적 측면에서의 접근이고 전쟁사적 측면 혹은 군사학적 측면에서의 접근은 아직까지 그 토대가 극히 허약합니다. 이는 한국의 민간 군사학 수준에 관련된 문제긴 하지만 하여튼 아쉬운 부분이죠.
제가 첫번째로 테마를 잡은 것은 17세기 중엽 효종대에 단행된 "나선정벌"입니다. 이것을 테마로 잡은 것은 이것이 교과서에도 나오는 유명한 사건이긴 합니다만 이 사건의 구체적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일반에 알려진게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에 대해 시중에서 구할수 있는 자료는 우선 당시의 실록과 승정원일기등의 관찬 사서류라 할 수 있지만 이건 워낙 고가의 것이라 도서관이 아니면 접할 수 없는 책이죠. 그외에이 사건에 대한 단행본으론 2차 나선정벌 당시의 지휘관인 신유장군이 당시 작전중에 쓴 일기인 "북정일기"가 있습니다. 이 책은 필사본이며 그 탓인지 아직 시중에 영인본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없습니다. 저도 이 책의 한문 원본은 구해보지 못했지만 다행스럽게도 10여년전에 문고판으로 번역본이 나온적이 있어 이것을 기초로 당시 나선정벌의 대략적인 모습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 나선정벌에 대한 논문이 적지 않게 나와 있으므로 이것을 참고하면 나선정벌에 대한 접근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문제는 역사학적 성격이 강한 이러한 기존 자료들을 어떻게 좀더 군사학적 성격이 강하도록 탈색시키느냐가 문제인데 이는 아직 저의 능력 밖이라 시도가 어렵겠죠. 더구나, 나선정벌에 대해선 아직 국방부 전편위 등에서 다룬적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이 사건의 대략적 추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일단 몇차례에 나누어 당시 사건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2) 나선정벌의 배경- 러시아의 동진
잘 알다시피 이 나선정벌이라는 특이한 사건이 발생한 배경은 바로 러시아의 동진이다. 대략 1581년부터 러시아는 우랄산맥을 넘어 드넓은 시베리아 대평원을 향한 전진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시작해서 러시아인들이 태평양의 오호츠크해에 도달하기까지 불과 60여년밖에 걸리지 않았다.현재 시베리아를 보면 정말 부럽기 짝이 없는 광대한 면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베리아가 러시아의 영토로 편입된 것이 바로 이 무렵의 일인 것이다.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는 우리나라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연달아 발생한 바로 그 시기이며 이 두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만주인들의 명나라 정복이 발생한 시기이기도하다. 동아시아의 주요 국가인 한, 중, 일 3국이 전화에 말려든 혼란한 시기에 거칠고 우직한 로스케인들은 거친 시베리아 눈바람을 헤쳐가며 동으로 동으로 전진했던 것이다. 콜롬부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 세계사적인 평가를 받으며 주목 받고 있지만 이보다 조금 늦은 시기인 러시아인들의 시베리아 진출도 그 의의에있어 결코 가볍지 않다. 오히려 동양 각국인들에게 있어서는 더 큰 의미를 가진 사건일지도 모른다.
러시아의 빠른 시베리아 장악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코작인의 기질, 연수육로 (連水陸路)의 이용, 화력의 우세 등을 들 수 있다. 당시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 일선에 있던 사람들은 바로 코작인이다. 이들의 강인한 기질과 불굴의 투지는 이미 널리 알려져있는 그대로이다. 또한 러시아인들은 시베리아 곳곳의 하천을 이용하여 배를 끌고 하천을 통해 빠른 속도로 이동 하였다. 시베리아를 주로 배를 통해 이동했다는 것은 다소 이상하게 들리지만 에니세이강,레나강등의 복잡한 지류를 이용하면 충분히 가능한 방법이라고 한다. 분수령이 낮았으므로 배를 가지고 산을 넘었으며 혹은 주변의 풍부한 목재를 이용 다음 하천에서 새로이 배를 건조하기도 하였다.화력의 우세야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부분일 것이다. 이렇게 장황하게 러시아의 시베리아 장악에 대해 설명하는 이유는 왜 아시아인들이 시베리아를 상실하게 되었는가 대한 개인적인 아쉬움 때문이다.
한편, 방향을 돌려 왜 러시아는 여러가지 난관을 무릅쓰고 시베리아를 향한 전진을 계속했을까하는 의문을 풀어보자. 이 또한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탐낸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모피 때문이라고 한다. 아니 겨우 모피 (毛皮) 때문에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개척했단 말인가 ? 하는 의문이 들것이다. 그런데, 당시 러시아 황실의재정수입의 1/10이 바로 이 모피에서 나왔다고하는 것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당시 나선정벌과 관련한 일련의 러시아 전투보고서에 계속 모피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보아도 당시 러시아측이 모피에 대해 관심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3)흑룡강 유역에서의 러시아-청나라 충돌
흑룡강 일대에 러시아인들이 진출한 시기는 1643-1644년 무렵이다. 이때는 이미 만주족이 중국정복에 성공 청나라를 세운 시기이다. 몇 차례의 탐험적인 성격의 흑룡강 주변 탐사에 이어 마침내 1649년 신임 야쿠츠크 지사 Frantsbekov는 그의 부하 하바로프 (Khabarov)의 흑룡강 원정을 승인하였다. 하바로프는 1650년 흑룡강 상류연안의 Dahur 족을 토벌하고 원주민의 요새를 점령하여 알바진 (Albazin)이라 이름하고 거점으로 삼았다. 흑룡강 일대에서도 러시아인들은 배를 이용하여 기동하였다. 1651년 6월에는 흑룡강을 따라 항해하면서 주변 원주민 (대략 고아시족 내지 퉁구스족 계열의 여러 소수민족) 들을 정복하던 하바로프는 Guigudar 마을에서 661명을 살해하고 400여명의 부녀자를 납치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 때문에 불안과 분노를 느낀 이 일대의 제 부족들은 청나라정부에 보호요청을 하였으며 이에 청나라 정부도 러시아의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1652년 4월3일 새벽 영고탑지역의 청나라 정규군 지휘관인 하이써 (海塞)는 흑룡강 연안 현 하바로프스크 부근의 러시아의 동계 야영 지역을 기습했다. 중국측은 만주 팔기병 약 1500명을 동원하였으나 불과 200여명의 러시아군에게 참패하여 700여명이 사망하는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청나라 정부는 패전 책임을 물어 하이써를 10월19일자로 처형하고 새로운 지휘관으로 역전 노장인 사르프다 (沙爾虎達)를 임명하였다. 사르프다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부원수의 자격으로 우리나라에침공한 바 있는 자로서 노련한 지휘관이었다. 한편, 러시아도 이 사건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면서 중앙정부의 귀족인 Zinoviev를 흑룡강으로 급파했다. Zinoviev는 현지에 도착 청나라군을 격파한 코작인 부대를 포상하고 이 지역일대를 러시아영토로 정식 편입시킬것을 러시아 중앙정부의 의사로서 승인하였다. 그리고는, 황제에게 보고하기 위해 하바로프를 데리고 모스크바로 돌아갔으며 하바로프를 대신할 신임 지휘관으로 스테파노프를 임명하였다. 스테파노프의 정식 직위는 "대흑룡강-대 Dahur 지방장관"으로 휘하에 500 여명의 코작인 부대를 거느렸다. 바로 이 스테파노프가 2차에 걸친 조선의 흑룡강 출병의 상대가 된다.
4)청나라의 파병 요청
1654년 2월2일 청국사절 한거원 (韓巨源)이 효종에게 원병을 요청하는 청국 예부 (禮部)의 자문 (咨文:실무부서간의 외교문서)을 제출했다. 그 내용은 100명의 조선 소총수를 청국 지역인 영고탑 (현 중국 길림성 영안현) 에 출동하여 청국 영고탑 昻邦章京 (행정,군사상의 지휘자:당시 만주에는 2명의 昻邦章京이 있었음) 사르프다의 지휘하에 들어와 나선 (羅禪) 정벌에 참전하라는 것이었다.
효종은 이 해괴한 나선이라는 나라나 민족에 대해 들은 바 없었으므로 청나라 사신 한거원에게 "나선이란 어디에 있는 나라인가" 하고 물었으나 한거원도 "영고탑 근처에 있는 별종입니다."라고만 대답했다. 당시 우리나라와 청나라도 이미 명나라 시대의 유럽 출신 선교사들에 의해 러시아를 가리키는 莫斯科未亞 (모스코비아)라는 국명을 알았으나 이들이 유럽북부에서 흑룡강까지 진출해올지는 상상조차 못했기에 이 나선이 바로 이 모스코비아와 동일체라고는 몰랐던 것이다. 효종은 1차 출병 당시의 조선군 지휘관인 변급 (邊?)의 귀환보고 때에야 이들이 서양인인 것을 알게되었다.
당시 러시아측이 소수의 병력이었음에도 왜 청나라는 조선측에 원병을 요청하였을까 ? 이는 두 가지 이유인데 청나라의 소총병 수준이 그렇게 높지 않다는 점과 당시 청나라 주력부대가 남중국 일대에서 명나라 잔존세력의 토벌에 진력했기에 만주의 군사력이 미약했다는 점 때문이다.
5)제1차 나선정벌
조선측은 청나라의 원병요청을 즉시 수락하고 즉시 함경북도 우후 (虞候;조선시대 지방군의 지휘자 중의 하나; 함경병사의 차하급자로 함경북도 일대 장교중에선 서열 2위) 변급을 지휘관으로 임명하였다. 참전 장병은 건제부대를 파견하는 방식이 아니라 무명 15필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지원자를 모집하였다. 당시 총융사 (당시 중앙군의 주요 지휘관중의 하나) 김응해가 "육진 (六鎭:두만강 일대의 주요 조선군 방어 지역) 일대의 수년 계속된 흉작으로 살기가 어려워 무명 15필에 모병하는데 많은 군사들이 지원했다" 고 하였으며 이에 효종도 "군사들이 가난 때문에 사지 (死地)로 즐거이 찾아가니 참으로 측은한 일"이라고 언급하는 것으로 봐서 당시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함경북도 우후 변급은 약 100여명의 소총수를 선발하여 3월 청나라에 입국하였다. 당시 청나라, 러시아 모두 선박에 승선한 상태였다. 앞에??언급했듯이 러시아군은 주로 선박을 통해 기동했던 것이다. 당시 러시아측은 스테파노프의 지휘하에 약 370명의 병력으로 흑룡강을 거쳐 송화강으로 진입해오다 마침내 4월28일 청나라의 선단과 마주쳤다. 당시 러시아측의 함정이 대선이 13척, 소선이 26척이라고 변급이 보고하였는데 병력 규모를 보면 그렇게 큰 배는 아니었던 것 같다.
청-조 연합군의 병력은 약 750명 (혹은 1000명)이었으며 그 중에 100명이 조선군이었다. 청-조 연합군도 대선 20척, 소선 140척에 승선한 상태였는데 대선이 17인승인 것으로봐서 청나라 측의 함선도 아주 작은 크기였던 것 같다. 당시 청나라는 함선의 크기가 러시아에 비해 너무 왜소하여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으며 변급의 제안에 따라 강연안에 상륙, 강을 연해서 통 버드나무로 만든 대형 방패 뒤에서 러시아의 함선에 대해 소총 사격과 화살을 퍼부었다. 러시아측은 이 전투에서 많은 부상자를 내고 5월2일 퇴각 하였다. 청-조 연합군은 계속 100리 정도를 강을 따라 추격하여 호통에서 교전하였으며 다음날인 5월3일에도 90리를 추격하여 골지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5월4일에도 청-조 연합군은 120리를 추격하였다. 5월5일에는 마침내 러시아군은 흑룡강으로 완전히 도주하였다. 청-조 연합군은 마침내 5월7일 강 가운데의 한 섬에 토성으로 진지를 구축하고 5월16일 흑룡강에서 철군, 6월18일 영고탑으로 귀환하였다. 6월21일 마침내 84일간의 원정을 마치고 변급과 휘하 100명의 소총수들은 본국으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당시 청나라의 승리는 결정적인 것이 아니었으므로 다음해인 1655년 흑룡강 상류 러시아의 쿠마르스크 요새에 대한 청나라 도통 (都統:만주족 정규군인 8기 부대중의 1기의 지휘관으로 1기는 7500명) 명안달례 (明安達禮)의 공격은 또다시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스테파노프는 이 전투에서 보루내에서 치열한 진지전으로 청나라 군대를 격파했던 것이다. 또, 1657년에도 스테파노프는 송화강내륙 깊숙히 침투하여 청군과 교전하였다. 이에 청나라는 러시아군을 결정적으로 토벌하기 위하여 대규모의 반격 작전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1658년 제2차 나선정벌의 시작이다. 청나라는 진지전의 불리함을 깨닫고 강상에서 러시아 선박을 포착, 섬멸함이 유리함을 깨닫고 대규모 선박 건조를 시작했으며 2차에 걸친 패전에 따른 교훈에 따라 화력의 보강이 절실하다고 생각 재차 조선측에 원병을 요청하게 된다.
6) 제2차 나선정벌 당시 양측 전투서열
▶ 러시아
지휘관: 대 흑룡강 - 대 Dahur 장관 스테파토프(Stepanov)
병력: Dahur軍 500여명 (코작인으로 구성)
함선 11척에 탑승
▶청
지휘관: 영고탑장군 (北海王寧古塔昻邦章京) 사르프다 (沙爾虎達)
부지휘관: 심양장군 (瀋陽昻邦章京) 곽배 (郭拜) -> 북경부원수 ?
조선측지휘관: 함북병마우후 (咸北兵馬虞候) 신유
병력: 갑병 (甲兵) 1000명 (갑병은 보병과 궁수 포함)
수병 (水兵) 600명
화기병 (火器兵) 100명
각급 지휘관 및 군속 300-400명
조선군 265명
이상 총병력 2300여명
대형전함 4척, 기타 대/중형 함선 36척, 소형함선 12척
7)조선측 군대의 구성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조선측 지휘관은 함북병마우후 신유이다. 2차 나선정벌 당시의 조선측 소총수 즉 포수의 충원은 어떻게 했을까 ? 1차 정벌 당시는 무명 15필에 지원병을 구했으나 2차 정벌 당시는 포수를 선발했던 것 같다. 이들이 정확하게 어디 소속의 군병인지는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조선후기의 지방군은 속오군이나 함경도나 평안도 지역의 경우 속오군 소속외에도 장사부, 수영패, 성정군 등 속오군 보다 규모가 큰 지방군 부대가 무수히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방군의 경우에는 화기병의 경우는 별도의 군대로 편성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므로 더더욱 자신이 없다.
일단 이들 소총수들은 총 200명으로 함경도 일원에서 모집한 병력으로서 길주 35명, 명천 16명, 경성 22명, 부령 13명, 회령 26명, 종성 25명, 경원 23명, 온성 30명, 경흥 10명 등이다. 신유가 5월29일자 일기에서 "회령포수 강응방은 창질이 크게 덧났으나 의약설비가 진중에 없어 죽음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 사람의 병은 지병이어서 어제 오늘의 병이 아닌데, 지난번 포수들을 뽑을 때 회령부사에게 빼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회령부사의 하는 일은 매사가 이 같으니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다." 고 통탄하는 것으로 봐서 강제로 선발한 것은 분명하다.
그밖에 화병(火兵) 20명, 초관(哨官) 2명, 군관 2명, 통사 2명, 수솔 38명, 구인 (마부) 39명 등으로 총 병력은 265명이다. 따라서 장교급은 신유를 포함해서 총 5명이고 200명은 소총수 나머지는 대부분 지원 병력이다. 초관의 지위는 조선후기의 군제상 몇 차례 변천이 있지만 대략 하급장교로써 사-초-기-대 의 단위로 부대를 구성할때의 초의 지휘관으로 휘하 100여명 (정확하게는 112명) 의 병사를 거느리게 되어 있다. 오늘날의 중대장급에 상응하는 지위라고 보면 되겠다. 당시 참전한 초관 2명의 이름은 신성일, 박세웅이다.
함북우후 신유의 경우 평산신씨 출신으로 평산 신씨는 덕수 이씨와 함께 조선후기의 명문 무인 집안이다. 신유는 이 원정에 참전한후 그 공으로 종2품 가선대부로 특진하였으며 그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황해도병마절도사, 삼도 수군통제사, 포도대장 등을 역임한 바 있다. 1985년 대한민국 정부는 신유의 공을 기려 그의 묘소가 있는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남계동에 숭무사라는 사당을 세운바 있다.
8)조선군 소총수들의 사격 실력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측 군대의 병력 규모는 겨우 265명이고 이중 실 전투병력은 불과 200명이다. 청나라 같은 대국이 왜 265명 정도의 병력에 대해 원병을 요청하는 넌센스를 연출했을까 ?
전에도 설명한 바 있듯이 당시 청나라의 만주 지방 병력이 매우 부족했다는 점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소총수들의 자질 때문이었다. 청나라측 병력을 보면 소총수들은 불과 100여명에 불과하다. 원 계획상으로는 북경에서 추가적인 200-300명 정도의 소총수를 파병하려고 했으나 결국 참가하지 못했고 결국 200명의 조선 소총수와 100명의 청나라 소총수로 전투를 치루었다. 그나마 이들 청나라 소총수들은 실력이 한심했다. 신유의 북정일기를 읽어보면 출병준비중인 5월18일 청측 지휘관인 사르프다의 요청으로 양국 소총수들간에 사격 시범이 있었다. 이때 조선측은 200명이 1발식 사격하여 이중 65명이 명중하여 한바탕 잘먹였다고 하는데, 청측의 소총수들은 포술에 생소하여 109명중에 과녁에 맞히는 자가 약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를 두고 신유는 "저들 청나라 군대가 포술에 마저 능숙하다면 호랑이에 날개를 단 격으로 막강했을 것" 이라고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당시 조총사격 훈련은 어떻게 행하였는가 ? 역시 북정일기를 읽어보면 한발 남짓에 너비 3치의 팻말을 60보 거리에 세워두고 사격을 했다고 한다. 5월21일의 사격시범을 보면 60보 거리에서 3발식 발사하여 좌초 100명중 1발 이상 명중한 자는 67명 (3발 모두 명중자 3명, 2발 명중자 8명), 우초 100명중에 1발 이상 명중한 자는 56명 (3발 명중자 2명, 2발 명중자 13명) 이라고 한다. 이날 사격중에 "경원포수 박사길의 조총이 파열하여 왼팔에 중상을 입었으나 폐인은 면하고 곁의 사람도 모두 무사하니 다행이다."고 언급하는 것으로 봐서 조총이 파열되는 사고가 가끔 일어났던 것 같다. 며칠후에는 비에 젖은 화약을 말리다가 폭팔하는 사고가 일어나서 회령포수 김우일이 다리에 부상을 입고 사경을 헤메는 사고도 일어난 적이 있다.
9) 전투가 있기 까지의 경과
전투가 있기까지의 경과를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4월30일 청나라의 통역관이 조선의 회령 (함경북도)으로 입국한다. 청나라 통역관의 입국이 매우 늦어져 조선군의 일정이 매우 촉박해 지는데, 조선측의 사정에 아랑곳 없이 청나라 통역관을 무조건 강행군을 요구, 조선군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두만강을 도하 급하게 만주 영고탑으로 이동해야 했다. 5월1일 선발대가 바로 두만강을 도하했으며 5월2일 지휘관 신유가 청나라 통역관과 함께 두만강을 도하 청나라 영토로 입경했다. 5월4일 신유는 그의 일기에 "하루종일 빗속을 뚫고 행군하였는지라 길이 질어 인마가 흙탕물에 빠지고 군수물자(치중)가 비에 젖어 말이 아니었다." 고 적고 있다. 원래 계획상은 5월6일 까지 만주 영고탑에 모든 부대가 집결 청군과 조선군이 같이 출전하기로 되어있었으나 청나라통역관이 조선측에 예정보다 늦게 입국, 행군일정에 대한 통보를 제대로 받지못한 조선군이 엉뚱한 곤욕을 치루게 된 것이다. 강행군 끝에 조선군은 5월9일에야 영고탑에 입성했다.
간략한 청나라의 환영식을 마치고는 조선군은 밤부터 날이 샐때까지 군량미를 싣느라고 또 한번의 고생을 치뤘다. 불과 300명 미만의 병력이 몇 달간 먹을 양식임에도 신유의 일기의 거의 1/3이 군량미에 대한 각종 걱정으로 도배가 되어있다. 이것을 보면 수나라 양제의 고구려 정벌 때 전투병의 2배에 해당하는 치중병이 동원된 것이 이해가 되고,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당시 수나라 군대가 군량미를 마구 버렸던 일도 이해가 되는 것 같다.
5월10일 마침내 영고탑 성문 밖에 양국군이 정렬하여 출병준비를 마무리했다. 이날 처음으로 신유는 청나라측의 지휘관인 사르프다를 접견하고 차 (茶) 접대를 받았다. 5월11일에는 조선측 소총수들을 청나라 지휘관에 배속시켰다. 즉, 가슴 아프게도 조선군이 별도의 지휘계통을 유지하여 건제부대로 싸운 것이 아니라 분산하여 청나라 지휘관에 배속시킨 것이다. 200명의 소총수를 고산 (高山:청나라 팔기병의 중급지휘관) 8명에 1인당 24명식 (8*24=192) 배속시켰다. 그리고, 남은 8명은 2초에 나누어 배속시켰다고 하는데, 이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5월12일 소형함선에 나누어 탄 양국 병사들은 항해를 개시 5월15일 전선이 준비된 송가라강 어귀에 도착했다. 그러나, 심양과 북경에서 도착할 지원병력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여기서 6월달이 되기까지 그냥 강주변에 머무르며 세월을 보내야했다. 여기서 신유는 애당초 일정이 늦어졌다고 강행군을 강요할 때는 언제고 다른 청나라 부대가 도착하지 않았다고 세월을 보내는 건 또 무슨 일이냐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모두 약소국의 비애가 아닐 수 없다.
이날부터 조선군은 한 열흘동안 청나라 군인이 잡은 이상한 물고기 (길이가 두발, 크기가 아름이나 되는 큰 고기라고 함)를 구경하기도 하고, 청나라측에서 보내주는 소를 잡아 먹기도 하는등 정말 한가로운 일정을 보내게 된다. 전에 말한 조총시범을 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5월24일에는 청나라측에서 화약을 실은 배가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여 청나라 영고탑 포수 109명이 사용할 각각 4발식의 조총 화약을 조선측에 빌려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청나라의 대부대가 송가랑 어귀에 머무르면서 시간이 경과하자 주변 여러 소수민족들이 청나라 군진에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러시아군이 나타나면 러시아측에 붙고, 청나라 군이 나타나면 청국에 굴종하는 식이었다. 꼭 한국전쟁때 일반 서민들이 북한인민군이 나타나면 인공기를 흔들고 국군이 나타나면 태극기와 유엔깃발을 흔드는 것과 같은 양상이라고 하겠다. 하여튼 이들 여러 소수민족을 통해 러시아측의 동향에 대한 간헐적인 정보를 입수하게 되는데 정보들이 일치하지 않아 그때마다 일희일비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신유는 "만약 청국인들이우리에게 사실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청국측의 적정 염탐이 매우 소홀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며 비난하고 있다.
마침내 6월2일 청나라의 나머지 부대와 전선이 모두 도착했다. 청측 지휘관이 탑승할 배에 대해 상선(上船) 4척은 배 모양이 우리나라 전선(戰船)을 닮아 배 위에 모두 판옥(板屋)을 만들었는데, 다만 지붕이 없을 뿐 단청이 화려하고 만듬새가 아주 견고하여 우리나라 전선처럼 엉성하지 않았다."고 평하고 있다. "엉성한" 이라는 표현이 눈에 띄는데... 하여튼 우리민족의 적당주의와 마무리 능력 부족은 하루이틀에 걸쳐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들 배의 건조는 중국 한족이 맡았다고 하며 수효는 600명으로 배를 건조한 자들이 모두 배의 수부로 복무하게 되었다고 한다. 청나라와 싸워 진 것은 중국의 한족이나 우리 민족이나 모두 마찬가지지만 전투병도 아닌 수부로 근무하는 상황은 더 비참하게 보인다.
6월4일 각 전선에 조선군 소총수를 분승시켰는데, 배 한척에 조선포수 5명식, 중국 갑군(甲軍) 25명식, 그리고, 경우에 따라 청나라 포수 5명식도 승선시켰다. 선봉을 맡은 전함에 앞에서 말한 초관중의 한명인 좌초관 박세웅이 탑승했으며, 우초관 신성일은 후영에 위치한 전함에 탑승했다. 신유는 후영에 자리 잡게 되었다.
6월5일 마침내 전 부대가 송가라강 어귀를 출항했다. 6월6일에는 러시아에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왈가족 여자가 청나라측에 러시아측 사정을 알려주었다. 즉, "적선은 13-14척으로 모두 새로 만든 육중한 큰 배들이며, 배위에는 모두 판옥을 만들어 수부와 포수들은 그 위에서 거처하며, 스스로 말하기를 비록 아군은 적고 적은많으나 오직 싸움만 있을 뿐이라고 호언합니다." 라고 했다. 러시아군에 의해 폐허가 된 강주변을 마을들을 바라보며 서서히 전진하던 청나라의 함선들은 6월10일 흑룡강 어귀에 진입, 20리를 경과했을 무렵 마침내 러시아측 선단과 조우하게 된다.
10) 6월10일의 전투
전에도 이야기했듯이 결정적인 전투는 단 하루만에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이날에 대한 묘사는 "북정일기"의 원문을 그대로 옮겨 놓겠습니다. 조금 생략되는 부분은 있지만...
아침 일찍 열벌 마을을 출범하여 흑룡강 어귀를 지나 20여리를 내려갔을 때 드디어 적의 선단과 맞부딪쳤다. 우리는 적선을 향해 달려 들었다. 적선들은 곳 돛대를 세우고 10여리를 후퇴하여 강가에 배를 모아 포진한 후 적병들은 갑판위에 올라서 아군의 동정을 일일이 살펴보고 있었다. 우리 전선이 번갈아 들락거리면서 적선과의 거리가 한 마장쯤이나 접근하였을 때 일제히 대포를 쏘며 공격을 개시하자, 적선들도 대포로 응수해 치열한 공방전을 거듭하였다. 이때 후영(候營),전위(前衛), 중군(中軍)의 모든 전선이 한꺼번에 쳐들어가 활과 총포를 무수히 쏘았다. 적병들이 숨돌릴 겨릇도 없이 총탄과 화살이 빗발치듯 떨어지니, 배위에서 총을 쏘던 적병들은 드디어 지탱할 수 없어서 모두 배안으로 들어가 숨기도 하고 혹은 배를 버리고 강가의 풀숲으로 도망치기도 하였다.
우리 전선들이 적선을 포위하고 쇠갈고리를 던져 끌어당긴 뒤 포수들이 적선에 올라가 불을 질러 태우려고 하자 대장 사르프다는 불태우지 말라고 긴급명령을 내렸다. 한편, 포수와 사수들이 강가의 풀숲 속에 잠복한 적병을 향해 맹렬한 사격을 가하자 적병 역시 치열하게 응전하여, 이 때문에 조선 군사와 청군 군사는 약간의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만약 여세를 몰아 일시에 적선들을 불태웠다면 적병중에 살아남은 자도 없었을 것이고, 조선 군사와 청국 군사의 사상자도 줄어들었을 것이다. 대장 사르프다가 재물을 탐내어 불태우지 말라고 무모한 명령을 내린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처사였다. 적선에 올라탔던 포수와 사수들이 다시 원래의 배로 돌아와 계속 포위하고 있을 때 적선과의 거리는 불과 일보 정도로 근접하였으며, 이때 배안에서 은신한 적병들이 연속 사격을 가해와 우리는 적지 않은 사상자를 내게 되었다. 사망자는 길주의 윤계인 등 모두 7명으로 모두 총을 맞아 즉사하였다. 그 밖에도 청나라 장군들과 사공들도 사상자가 적지 않았다. 형세가 이렇게 다급해지자 급히 불화살(火箭)을 쏘니 적선 11척 중 7척이 잇달아 불탔다. 이미 날이 어두워져서 배 3척으로 하여금 닻을 내려 적선 4척을 감시하게 하고 나머지 배들은 강 대안에 집결하여 밤을 새웠다.
처음 우리 군사가 앞을 다투어 적선으로 옮겨타 공격을 할 때 명천 포수들이 탑승한 청나라 전선의 포수와 사수들이 배를 비우고 모두 적선으로 옮겨타자, 이미 배에서 내려서 상륙한 적 40여명이 청나라 전선을 빼앗아 타고 상류로 도망하였다. 후영에 있던 여러 배가 일시에 추격하는데 내 (신유) 가 탄 배가 제일 앞장을 서서 돌진하였다. 여러 전선이 물고기 꿰듯 줄줄이 늘어서서 포위하니 배를 세우고 몇몇 적병은 숲속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이때 갑군들이 배에 올라 적 40여명을 모두 죽여 버렸다. 적의 배는 모두 11척으로 그 중 7척이 불타고 4척이 남았는데, 이것은 사르프다가 적의 배에 실린 재물을 탐내어 화공을 허술히 한데다 날이 저물어 더 공격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3척의 배로 적선 4척을 계속 감시하긴 하였으나 한 밤중에 남은 4척의 적병들이 배 한척에 합승하여 도망치고 말았다. 그러나, 밤이 어두워 파수하던 배들이 추적하지 못했다. 이날 조선군의 사상자는 전사 7명,중상 14명, 경상 11명 이었다. (중상자 중 1명은 뒤에 사망) 적선에 볼모로 잡혀있는 왈가족 여자 백여명이 강가에 기어올라 살려달라고 울부짓는 것을 보고 즉각 구출하였다. 적병들은 선내에서 타죽거나 혹은 강변에서 총에 맞아 죽어 그 시체가 즐비하였다.
11) 전투종료후의 분위기
전투 다음 날인 6월11일 노획한 적 함선 3척을 수색하였으며, 여러 군사들이 얻은 노획품도 모두 회수하였다. 조선측은 몇자루의 러시아의 조총 (신유의 표현은 조총입니다.)을 전리품으로 챙겼으나 청측에 압수당했다. 6월12일 풀숲에 숨어 있던 적병 10명이 달려나와 살려달라고 하니 죽이지 않고 포로로 했으며, 이에 적의 패잔병이 더 살아있을 것을 우려한 청측은 강주변의 들판을 수색하게 되었다.
이때 신유는 "수풀 속에 총알과 화살이 꽂힌 무수한 시체가널려 있어 적군이 전멸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고 언급하고 있다. 청나라측 사상자에 대해 신유는 "청국인들이 저들 군인과 수부의 사망자수를 분명히 말은 안하지만 대략 60-70명이 되는 모양이다. 심양 고산이 1명, 영고탑 보십고 (청군의 무관직;우리나라의 초관과 유사) 1명이 전사하였다. "고 언급하고 있다. 신유는 또 "이때까지 적(러시아)과 세 번 크게 접전한 청나라가 한번은 100명이 총에 맞아 죽고, 한번은 4백명이 쓰러졌으며 한번은 여러 고산 중에서 겨우 4-5명만 살아 남을 정도였다. 이처럼 적의 위세가 극성스러웠는데, 이번 싸움에서 청측의 사상자가 적지 않았음에도 그 기쁨이 오죽하랴..." 고 전투후 청군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이 싸움후 인근 소수 민족들인 왈가족과 견부락 사람들이 들판에 널린 러시아군 시체를 찾아다니며 일일이 난도질을 하였다고 한다.
6월16일에는 사망자 및 전사자에 대한 청나라 측의 행정적 처리가 시작되어 청나라 군인과 동등한 보상을 조선측에 약속하였다. 이날 알려진 바로는 청나라 군인의 사망자수는 갑군 전사자 80명, 수부 전사자 30명, 부상자 200명이라고 한다. 6월21일에는 조선 북병영 (北兵營)의 관문 (關文: 공문서의 일종) 이 신유에게 도착하였다. 내용은 군량 문제에 관한 것이었는데, 사실 이 군량 문제는 신유가 완전히 귀국할때까지 신유의 머리속을 복잡하게 만든 원흉이었다. 2차 정벌 당시 청나라는 조선군의 군량에 대해 조선측이 자체해결하도록 했기 때문에 조선국경과 엄청난 거리상에 있는 지역까지 군량을 수송하는 문제는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더구나, 청나라 측이 조선측의 군량미를 탈취하려는 의도까지 있어 이로 인해 신유는 사르프다를 가리켜 "도둑놈 심보로 가득찬 자"로 평하고 있다. 즉, 조선측의 추가군량이 도착할때까지 조선군의 귀국을 못하게 하고는 추가 군량이 도착하면 즉시 조선군을 귀국하게 하여 남은 식량을 차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여튼, 전반적인 러시아군의 동향에 대한 정보부족과 누가 전공을 세웠느냐에 대해 총지휘관 사르프다와 북경에서 파견된 부원수 간에 다툼이 벌어지는 통에 조선군의 귀국은 전투종료후에도 계속 지연되었으며 여기에 더하여 사르프다는 조선군의 군량미에도 눈독을 들였던 것이다. 결국 조선군이 다시 두만강을 넘어 조선으로 돌아온 것은 8월27일이었다.
12) 러시아측 장비에 대한 신유의 평
이 부분도 신유의 북정일기중에 6월12일자 해당부분을 그대로 옮긴다.
"적의 배는 몸매가 매우 거대하고 갑판 위에는 전부 판옥을 세웠다. 판옥은 넓은 판자로 서까래를 만들어 작은 나무들을 엮어 얹은 뒤 벚나무 껍질을 씌우고 그 위에 흙을 깐 다음 또 두꺼운 판자로 덮었으니 비록 평지에 있는 건물이라도 이 만큼 튼튼하지는 못할 것이다. 삼나무 판자는 온통 통나무를 써 이를데 없이 견고해서 홍이포 (洪伊砲)로 때려도 부수기 어려울 정도이다. 또 판옥 위에는 두꺼운 판자를 빙 둘러 견고한 방패를 만들었기 때문에, 만약 저들이 선실에 숨거나 또는 배를 강가에 대어 상륙하지 않고 끝까지 배워서 맞서 싸웠더라면 우리는 저들과 승부를 가리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저들의 포기(砲技) 또한 절묘하여 종전에 청국인들이 맞싸워 저들에 크게 패배하여 사망자가 부지기수였는데, 이제 오늘 한나절 싸움에서 온 배가 가라앉았으니 참으로 승패는 운명에 있는 것이요, 무기에 있지 않음을 가히 알겠다."
신유의 이야기로는 러시아측의 함선이 매우 견고하고 사격 기술도 우세하기 때문에 이긴 것은 결국 운이나 다름 없었다는 평이다.
신유는 한편 진정한 군인답게 러시아측의 소총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표시했다. 처음 조선군이 노획한 러시아측 소총을 모두 압수당한후 숨겨두었던 한자루도 결국은 뺐기게 되었는데 신유는 어떻게든 이 총을 한자루 얻어가려고 비상한 노력을 기울였다. 입수했던 러시아 총을 빼았긴 뒤 계속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던 신유는 7월24일 청나라 통역관 이몽선에게다음과 같은 제의를 한다. "적들의 총기는 우리나라 조총과는 그 구조가 달라 매우 신기한 무기이므로 몇 자루 입수해서 국가에 바치고자 하오. 지난번 싸움때 아군이 노획한 총은 모두 귀국이 몰수해서 달리 구할 길이 없었소. 대장에게 직접 이런 말씀을 드리고자 했지만, 만나보기도 쉽지 않고 또 혹 거절당하면 매우 무안할 것 같아서 오늘까지 주저했던 것이오. 통관께서 이 뜻을 조용히 말해 줄 수 없겠소 ?"라고 하였다. 통관은 이 말은 듣고 일단 청나라 지휘관인 사르프다에게 전해주겠다고 답변했다. 7월26일 마침 사르프다가 신유를 자신의 막사에 초청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가다가 신유는 또다시 조총 이야기를 꺼냈다. "군사를 지휘하여 먼 곳에 와서 큰 승리를 보고 개선하게 되니 우리나라에도 큰 영광이오. 그런데, 적의 총포가 매우 특수하므로, 만약 이를 몇 자루 입수해서 국가에 바칠 수만 있다면 개선의 영광은 더 한 층 빛날 것이오. 그러니 대장의 의향은 어떠하신지요 ? " 어렵게 꺼낸 신유의 제안에 사르프다는 옆에 앉은 부하들과 낮은 귀엣말을 주고 받다가 "노획총기는 일일이숫자를 적어 북경에 이미 보고하였으니 북경 당국의 지시를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소."라고 대답했다. 이에 대해 신유는 자신의 일기에 " 적군으로부터 노획한 총은 무려 3-4백 정이나 되는데, 북경에 보고했다는 핑계로 인색한 처사를 하다니 매우 괘씸한 놈이다." 라고 속으로 격분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신유의 간절한 노력은 성공하여 7월28일 청나라는 노획한 러시아 총기 1정을 조선측에 보내왔다. 이 러시아측 총에 대한 신유의 해설을 들어보자.
" 적의 조총은 우리나라 조총과는 달리 화승 (火繩)을 사용하지 않고, 안에는 삽화철 밖에는 방하철이 있고 사이에 부싯돌을 끼워 내리면쇠붙이와 돌이 서로 맞부딪쳐 점화되는 까닭에 매우 신기하다. "
러시아의 총기를 입수하려는 신유의 노력은 과연 이 사람이 진정한 애국자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사람의 일기는 모두 병사들의 안전에 대한 걱정과 군량미 문제로 점철되어 있으며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러시아 총기가 조국에 큰 도움이 될 것임을 알고 계속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우리 역사에 이렇게 숨어 있는 애국자들이 많다는 점은 정말 유의해야 할 점이다. 그런데, 신유가 이토록 관심을 기울인 이 러시아 총은 어떤 방식의 것인가 ? 육군사관학교 교재로 쓰인 "무기체계학"이라는 책에는 소화기의 발달사에 대해 서술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화승총 (match lock)
수포(水砲)에서 발전하여 인류최초로 오늘날 총의 형태로 개발 된 것이다. 화승총은 염갱에 적신 긴 심지를 준비하여 이를 용수철로 불씨에 묶어 놓고 화약과 탄자를 총구로 장진한 뒤 격발 장치를 작동하여 용수철의 힘에 의하여 화약불씨가 점화되도록 만들어 졌다.
수석총 (flint lock:燧石)
수석총은 마찰에 인하여 불씨를 얻는 것이며 수석총의 종류에는 1550년경 스칸다나비아에서 스냅판스라는 이름으로 개발된 것과 1590년 경에 남부 유럽지방에서 미ㅋ리트라는 이름으로 개발된 것이 있다. 그러나, 완전한 수석총의 형태를 갖춘 것은 17세기 초이며 이 방식은 그후 약 2세기 반동안 세계 도처에서 애용되었다. 이 수석총은 두 개의 부싯쇠를 장치하여 이들의 충격마찰 로 생기는 불꽃을 점화약에 유도하여 발사되게 만든 것으로 1분 간에 2발까지 발사가 가능하고, 불발이 종래보다 현저히 감소하 는가 하면 제작과 점화가 간단하여 19세기 중엽까지는 거의 독 보적인 총기로서 현대 총기의 시조가 되었다. 아마도 당시 조선의 조총은 다름 아닌 화승총이며 이때 신유가 입수한 것이 바로 이 수석총인 듯 하다.
13) 여러 에피소드
과연 이 싸움에서 러시아는 조선군이 참전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 또 조선측은 러시아라는 나라에 대해 얼마나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까 ? 결국 당시 양상을 보면 서로 누군지도 모르고 싸운 모양새였다. 러시아측의 기록에 직접적으로 조선을 지목한 것은 전혀 없다. 다만 북정일기를 보면 러시아측이 청나라 군대에 약간 특이한 다른 무슨 집단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고 있었던 징후는 있다. 신유는 북정일기에서 "지난 갑오년에 우리나라 군대가 처음으로 출병하였을 때 비록 적군과 여러 차례 교전은 없었으나 적들은 감당하지 못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도망치고 말았다.(1차 나선정벌을 말함). 그 후 적들은 말끝마다 머리 큰 사람 (大頭人)을 두렵다고 하였다는데, 이 말은 견부락 (흑룡강 하류 일대의 소수민족)에서 나왔다고 한다." 머리 큰 사람 ? 여기서 말하는 머리 큰 사람이 바로 조선군이다. 당시 우리조상들은 모두 "대두" 인가? 라는 의문을 표시할지도 모르겠는데 이에 대해 신유는 "머리 큰 사람이란 우리나라 군사들이 모두 벙거지 (전립:戰笠)를 쓴 것을 두고 한 말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청나라사람들도 "적들이 매양 대두인이 두렵다고 하는데 이번에 조선 포수가 원병으로 출동한 사실을 견부락 사람들이 모르는자가 없으며 그들 중에 배반자가 많아 필히 조선군 참전의 기밀이 누설되었을 것이다."라고 언급하는 것으로 봐서 대두인이 바로 조선군을 지칭하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러시아측으로서는 조총부대가 가장 신경쓰였을 것이며 조선군의 독특한 전립이 인상에 남았던 모양이다. 나선정벌과 관련된 논문을 보면당시 중국군의 구성에 대해 러시아측 보고서가 몽골군을 언급하는 것은 분명히 오류이며 이 몽골군은 조선군을 잘 못 안 것이라고 주장하는 분도 있는 듯하나,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사실 당시 전투에 몽골군이 참전하지는 않았었다.
그렇다면, 조선군은 얼마나 러시아측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을까 ? 일단, 1차 출병당시 효종이 "나선"이라는 나라에 대해 의문을 표시한 것은 이미 언급했다. 신유는 그의 일기에서 여러 번 적들이 누구인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고 있는데, 이른바 "서양국인"이라고 하여 이들이 백인종임은 출전전에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물론, 1차 참전후의 보고로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한편, 청나라인들이 러시아를 가리켜 노추(虜酋)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당시 중국발음으로는 노추가 어떤 식으로 발음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의 로스케라는 말과 비슷하게는 보인다. 전투후 직접 러시아군을 목격한 신유는 러시아인들의 인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저들의 얼굴모양과 머리털은 흡사 남만인 (南蠻人: 당시 중국과 일본에 드나들던 네덜란드, 포르투칼인들을 가리킴)을 닮았는데, 실은 그 보다 더 영악하게 생겼으니 비록 남만인은 아닐지라도 필시 남만의 이웃 오랑캐 임이 분명하다." 고 평하고 있다. 이어서 "청나라 대통관 이몽선은 이들이 오로소(吳老素), 즉 차한국인 (車漢國人)이라고 하지만, 일찍이 차한이라는 나라는 들은 바 없으므로 그 사실여부를 알 길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차한국은 아마도 원제국 (元帝國) 시대의 차카타이한국과 관련이 있는 명칭으로 보이는데 정확한 것은 아닐지라도 청나라든 우리나라든 대략 러시아의 정체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음을보여준다. 나중에 러시아 포로를 직접 만났는지 신유는 "적병은 자기나라를 오을소(吳乙素)라 하였다. 저번에 통관 이몽선이 말한 오로소와 음이 같으니 같은 나라인가 싶다. 오을소와 오로소가 다른 것은 발음차이일 것이다."고 일기에 적고 있다.
당시 러시아측은 자신들의 상대방이 다름아닌 "중국"임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후임 다우르 지사 빠쉬꼬프가 시베리아국(局)에 보낸 보고에서 166년(당시 러시아의 달력 기준) 현지에 급파된 수색대가 온드류쉬까의 지휘하에 흑룡강에 도달하여목격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기 때문이다. "쉰갈강에서 중국군의 대형 범선이 수많이 서있고 지휘관 스테파노프와 남아 있던 동료대원들이 타고 있는 배는 중국군에 포위된 채 모두 파손되어 있었다...(중략)...결국 중국군은 오노프레이꼬 스쩨파노프와 그 다우르 군사를 발견하자마자 곧 그 자리에서 죽인 것 같습니다."
여담이지만 당시 러시아군 보고서를 번역한 것을 보면 "대러시아 ·소러시아 ·백러시아 전체의 황제 폐하이시며 군주이신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대공 (大公)과 대러시아 ·소러시아 ·백러시아 전체의 정교국 황태자 이신 알렉세이 알렉세예비치 대공께 소신 아포니까 빠쉬꼬프가 삼가 올리나이다."로 보고서가 시작되고 있는게 눈에 띈다. 하여튼 당시 러시아측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500여명 중에 300여명이 전사하고 180여명은 탈출하였으나 남은 180여명도 굶주려 죽은자, 원주민에게 습격당해 죽은자든 험난한 길을 가야했다.
신유는 일기에서 다음과 같은 말도 하고 있다. 이야 말로 전혀 전쟁사와는 관련이 없는 이야기지만 에피소드란 소제목을 믿고 써내려 간다. "영고탑 오랑캐들은 처음 밥을 지을 때는 매우 정갈하나, 밥을 먹을 때 보면 반드시 물을 말아가지고 어육, 소금, 간장등으로 비며 먹는다. 이에 비해왈가 오랑캐들은 음식은 매우 불결하여 마치 개돼지 먹이와 같고, 밥 먹을 때는 개와 한 우리에서 먹으니 참으로 금수와 같다. 그들에게 쌀밥과 간장을 주었더니 모두가 얼굴을 찡그리고 토해버린다. 그 누가 천하의 입맛은 다 같다고 했던가! 참으로 잘못된 말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