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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찾아가는 문화기행 원문보기 글쓴이: 土堂
허균과 난설헌
교산(較山) 허균은 유명한 시인이자 최초로 국문 소설 홍길동을 을 쓴 작가 였으며 ,유불선에 통달한 학자였고 불 같은 의지를 지니고 현실을 뜯어 고치려던 개혁 사상가였다. 오늘날에 평가이나 당시 그에게 붙여진 이름은 한 마디로 "막된 인간" 이었다.
그의 아버지 초당 허엽은 화담 서경덕의 제자로 명종 원년인 1545년 진사갑과에 장원급제하여 명종 19년 경주 부윤,명종 22년 대사헌,승지,이조참의, 부제학의 벼슬을 지낸 학자,무인,외교관으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 사람이다.
허엽은 아들셋,딸 둘을 두었는데 우성전의 부인이 된 맏딸과 맏아들 약록 허성은 전처 소생이고 허봉,초희(허난설헌). 허균은 전처 사별후 재혼한 후처가 낳은 아들,딸이다.
허균의 외가는 선조때 참판을 지낸 외조부 김광철이 은퇴 후 낙향하여 강원도 대관령 에서 조금 떨어진 사천 구릉에 애월당(해를 사랑하여 날이 길어지고,달이 길어지면 어머니가 오래산다는)이란 당호를 지어놓고 해돋이를 바라보며 살았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곳 애월당에서 수태를 하게 되면 백두대간에서 이어진 교산의 정기가 외손에게 빼앗긴다 하여 딸과 사위가 동침을 하지 못하게 재우지를 않았다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아우 김광진의 집에 혼사가 있어 딸 내외가 왔다. 김광철은 딸 내외를 아우네 집에 먼저 보내고 , 잔치에 다녀 왔는데, 이게 웬일인가 ? 딸 내외가 동침을 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교룡의 정기는 강릉 김씨에서 양천 허씨로 넘어 가 버리고 만것이다. 교룡~이무기 또는 용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상상의 동물로, 때를 못 만나 뜻을 이루지 못하는영웅,호걸을 비유 하기도 한다.허균은 출생 설화부터 교룡의 운명,시대를 앞서 태어난 풍운아로서의 길을 타고 났는지 모른다.
5세때 형들의 어깨너머로 글을 익히고,9세때 시를 지을 만큼 총명이 뛰어났다. 시(詩)는 형 허봉의 지기지우인 손곡 이달에게,문(文)은 서애 유성룡에게 배웠다. 형 허봉은 머리가 비상해 18세에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여 순조로운 출세길을 달렸다.
신진세력 이었던 동인의 선봉장으로 자기의 주장을 숨김없이 벍히는 성격으로 34세때 이율곡에 대해 비평을 한 일이 있었는데, 정철을 선두로 한 반대파 서인들이 들고 일어 나 이율곡을 비방한 인물로 탄핵을 받아야 했고, 함경도 갑산으로 유배를 당하였다. 5년만에 풀려 났으나 서울 출입이 금지되어 춘천과 인천,백운산 등지를 방랑 하다가 금강산으로 들어가 사명당과 친밀한 교분을 쌓았다.
그러나 술을 좋아하던 그는 황달이 심해 서울에 있는 의원에게 가던 중 금하현 생창역에서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더구나 그 다음해 누나 허난설헌이 남편과의 불화끝에 스물일곱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난설헌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동서로 사람들이 붕당된 후 동인의 영수가 된 허엽의 딸로 태어났다. 허엽은 동인중에서도 북인계에 가까운 인물로 사상적 기저가 성리학 하나에만 고착되지 않고 여러분야에 비교적 열려있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초희라는 어엿한 이름을 가진 것으로 볼때 그녀의 집안은 당대 어느 사대부에 비해 여성에게 관대 하였던 같다.
허엽 가문에 열려 있는 가풍은 딸 난설헌에게도 남자와 똑같은 기회를 주었으며 아들들 에게는 새로운 사상을 가질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당대 뛰어난 문인으로 평가 받은 허성,허봉이 난설헌의 오빠이며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은 난설헌의 동생이다. 둘째 오빠인 하곡 허봉은 여동생 난설헌의 문재를 알아보고 당대 뛰어난 시인 이달에게 여동생의 교육을 부탁하였다.
서자로 태어나 벼슬길이 막힌 이달은 불운한 시인이었다. 그는 당(唐詩風)의 시를 잘지어 선조때 삼당파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난설헌과 허균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어렸을때 천재성을 드러낸 난설헌은 8세때 (광한전 백옥루)상량문에 한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에서
이 티글 세상에 태어난 것만은 부끄러운데
어찌어찌하여 이 상량문을 짓게 되었다.
천천히 붉은 붓대를 들어올려
웃음지으며 붉은 종이를 펼쳐드니
강물이 흘러내리고 샘물이 솟아나듯이
저절로 글이 써졌다.
구절 구절이 아름답고 문장도 굳세었다.
그 자리에서 나아가 신령스런 이글을 바치니
백옥루에 올려 이 경치를 더욱 빛나게 하리라
이글을 장대들보에 걸어두고
동서넘북 상하
여러 방향 땅의 신에게 축복을 비노라
들보 동쪽으로 떡을 던지네
새벽에 봉황을 타고
하늘나라 궁전에 들어가니
동이트며 해가
뽕나무 밑에서 솟아올라
아침노을 일만올이
바다를 비추어 붉게 물들이네
들보 남쪽으로 떡을 던지네
들보 서쪽으로 떡을 던지네
들보 북쪽으로 떡을 던지네
들보 윗쪽으로 떡을 던지네
들보 아래쪽으로 떡을 던지네
엎드려 비오나니
이 대둘보를 올린 뒤 계수나무 꽃도 시들지 말고
아름다운 풀도 긴 봄 누리게 하소서
해가 느려져 빛이 바래더라도
난새 수레를 타고 오히려 즐겁게 노시며
땅과 바다의 색이 바뀌더라도
회오리 수레를 타고 길이길이 사시옵소서
은빛 창가에 노을이 깔리면
구 만리 저 아래
보잘것 없는 인간세상을 내려다 보시옵고
구슬문이 바다에 다다르면
맑디 맑은 뽕나무 밭을
삼천 년 동안 웃으며 지켜봐 주소서
손으로 하늘의 해와 별을 돌리시되
몸은 구천 세계 바람과 이불속에
유유히 노시옵소서
상량문의 일부
시는 신선 세계에 있는 상상의 궁전인 광한전 백옥루 상량식에 자신이 초대 받아 그 상량문을 지은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시에서 난설헌은 어린이의 한계와 여성의 굴레를 모두 벗어 버리고 가상의 신선 세계에서 주인공이 되는 자신을 과감히 표현하여 신동 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조선후기 사씨남정기를 쓴 문인 김만중이 논하였듯이 가문과 스승의 격려속에 조선시대 규중의 유일한 여류 시인으로 성장 하였다.
난설헌은 당시 세도가 안동 김씨 김성립의 집안으로 15세에 시집을 갔는데 1살이 많은 김성립의 조부 김홍도는 진사 장원과 문과장원에 급제한 당당한 명문세가 였으나 김성립대에 와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였다. 동인과 서인으로 붕당된 상황에서 동인은 북인과 남인으로 붕당 되었는데 김성집은 남인계에 속한 인물이었다.
당시 남인은 북인보다 더 성리학에 고착 되었고 보수적이었다. 자유로운 가풍에서 자란 난설헌은 가부장적인 시댁의 시집살이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당시 여성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 시부모와의 갈등도 골이 깊어갔다.
8세때 신동으로 소문이 나있던 난설헌을 남편 김성립은 버거워 했다.거기다. 추남에다 방탕했다. 그런 집안에 시집 간 난설헌은 남편에 대한 애정대신 아이에게 애정을 쏟았으나 아들과 딸은 봉오리를 맺기도 전에 연이어 돌림병으로 잃고 ,뱃속의 아기를 유산하는 불행을 당한 후 곡자라는 시를 남겼다.
지난 해엔 사랑하는 딸을 잃었더니
이번 해엔 사랑하는 아들마저 잃었네
가슴 메어 지도다, 광릉의 흙이여
작은 무덤을 나란히 마주 세웠네
...............
응당 언니 아우의 혼들이 알아
밤마다 서로 손잡고 놀아라
불행은 연이어 왔다. 상주에서 객사한 아버지와 오라버니 허봉이 귀양 갔다 돌아온후 술로 세월을 보내다 그 또한 아버지 처럼 객사를 하자 몰락하는 친정에 대한 안타까움과 아이를 잃은 슬픔등으로 건강을 잃고 쇠약해져 갔다. 조선에서 태어난 것, 여성으로 태어난 것, 남편과의 불화로 그녀는 삼한을 가득히 안고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였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로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부용꼴 스물 일곱 송이 붉게 떨어지니
달빛이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그 예언은 적중해서 스물일곱 나이에 눈을 감았다.
춘우(春雨)
보슬 보슬 봄비는 못에 내리고
찬바람이 장막 속 스며들 제
뜬 시름 못내 이겨 병풍에 기대니
송이 송이 살구꽃 담 위에 지네
봄
고요한 뜨락엔
꽃비가 내리고
힌 목련 핀 둑길위엔
꼬꼬리가 우는데
수실로 꾸민 비단 장막은
아직도 선득선득
봄 한기가 스며 있네
잠에서 깬 예쁜 여인은
곱게 곱게 단장을 하는데
향기로운 비단옷,
귀한 허리띠에는
원앙 한쌍이 새겨져 있네
주렴을 걷어 비스듬히 말아
비취 찌를 꼿아두고
나른한 손길로 은쟁을 잡아
봉황의 울음소리 타 보는데
황금 채찍에
화려한 안장 얻고
님은 어디로 가셨나
다정한 앵무새는
창가에서 소곤소곤
풀 숲을 날던 나비는
연못가에서 팔랑팔랑
꽃은 뭘 보고 있나
난간 밖 하늘 하늘
거미줄을 보고 있네
어느 집에선가
피리 소리 흐느끼는데
황금 술잔 맑은 술 위에
동동 떠서 빛나는 달님
밤새 잠 못 이루며 슬퍼하니
새벽이면 비단 수건은
붉게 젖어 있으리
난설헌 사후 김성집은 남양 홍씨와 재혼 하였지만 곧이어 터진 임진왜란에서 의병으로 싸우다 전사했다.
허균
허균은 17세때 김대섭에 둘째딸과 혼인을 하였다. 허균이 형 허봉을 잃은것은 20세,누나를 잃은 것은 그 이듬해 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은 선조 25년 1592년 4월, 그의 나이 24세때 였다. 홀 어머니,어린 딸과 함께 피난을 가다가 함경도 단천에서 아내가 아들을 낳게 되었다. 피난중이라 제대로 먹지 못하고 약해질 대로 약해진 아내가 3일 만에 죽었다.
갓 태어난 아들도 곧 죽었다. 26세 되던 선조 27년 강원도 교산으로 내려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지내며 첫 저술인 "학산초담"을 지었다. 피난살이를 하던 1593년 이었다. 그가 호를 교산으로 한것도 여기에서 비롯 되었다 전쟁이 끝난후 그는 문과 시험에 당당히 합격 하였고, 이 해에 동인의 두령격인 김효원의 딸을 맞아 재혼을 하였다. 승문원에서 벼슬살이가 시작 되었다.
1597년 3월 예문관 검열직에서 파직되어 강릉으로 내려갔다.
4월9일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하여 춘추관- 기사관-세자시강원설서를 거쳐 정6품 병조 좌랑으로 승진했다.
1598년 명나라 시인 오명제가 종군문인으로 우리나라에 왔을때 형 허봉과 함께 최치원 이후의 시 수백편을 외워 주었는
는 데 자신의 작품은 한글로 기록해 주었다. 기억력이 비상하여 한번 보고나 들은 것은 잊는 법이 없었다.
1604년 황해도 수안군수로 발령 받았다가 1년후 끝장(방탕벽 으로) 1607년 3월 삼척부사로 부임 하였다가 13일만에 쫓
겨 났다가 12월 공주목사로 부임 1609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여 이이첨 일파가 득세하자 새 정권에 기
반이 없던 허균은 또 다시 벼슬이 떨어졌다. 1611년 익산군 함라면 함열현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왕조의 이단자
허균은 자신의 문집 '성소부부고' 4부 64권을 기억력에 의지해 엮어낸다.
1618년 허균이 역모 혐의로 잡혀 가기전 사위 이사성의 집으로 빼돌린 "성서부부고"는 그가 처형 된후 52년이 지나 외손자 이필진이 세상에 내놓아 빛을 보게 된다. 허균이 부안의 기생 계생을 만난것은 1601년, 호남지방의 세미 운반을 감독하는 전윤판관으로 전라도에 내려갔을 때 였다.
29세의 계생을 만났을때 허균의 나이는 33세그는 계생의 재주를 아끼고 사랑 했지만 계생은 허균의 지기인 묵재 이귀의 애인 이었으므로 육체관계 까지는 가지 않았다. 집안의 막내로 버릇없이 자란 허균은 하늘이 준 식욕과 성욕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가는 곳마다 기생과 시를 짓고 놀고 함께 잤으며 그것을 (기생들 이름까지도 )기록에 남겼다.
1612년 44세 되던 광해군 4년부안에 보안면 우동리 선계골에 누실(누추한집)을 짓고천재시인 유희경,계생,승려시인 해안과 어울려 성황산, 개암사, 변산의 채석강,적벽강을 찾아 다니며 풍월을 읊고 어지러운 세상의 온갖 슬픔과 괴로움을 잊으려 하였다. 당대 1500편의 시를 남겼으나 749편만이 전해진다.
이때 언문(상놈의 글자라 천대받던)으로 "홍길동 전"을 쓴 까닭은 민중을 위해 그들이 읽을수 있는 이야기를 꾸며야 한다는 발상 이었을 것이다.
"홍길동 전'은 민중의 힘으로 부조리한 사회제도를 개혁하고 이상국을 세우려는 의지가 집약된 걸작 이었다. 소설은 괴담 이라 천시하고 공맹(공자,맹자)을 공부하는 것 만이 참된 선비의 도리라고 생각하던 유교의 관습에 젖지않고 소설을 즐겨 읽고 쓴 선구자 였다. 그는 홍길동 전에 이어 다섯편의 한문소설을 남겼다.
엄처시전,손곡산인전,장산인전,남궁선생전,장생전으로 "장생전"은 도가소설로 도둑의 소굴을 경회루 대들보 위에 설정한 것은 광해군 즉 임금이 가장 큰 도둑 이라는 풍자와 고발 이었다. 1617년 광해군 9년 12월 ,허균의 역모를 고발하는 비밀 상소가 옛친구 기준혁에 의해 세번이나 올려졌다. 광해군의 어머니 인목대비의 폐비 논의가 일어난 것이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아버지 선조의 계비로 광해군 보다 10살 아래였다. 그녀의 아버지와 자식이 모두 죽임을 당해 광해군을 원한에 차서 대했다. 기준혁은 인목대비 폐비문제를 놓고 치열한 접전을 벌일때 당시 집권세력인 이이첨,정인홍,허균등 대북파에 반대하여 이덕형,이항복,윤선도 등과 함께 적대세력을 이루던 영의정 기자헌의 아들 이었다.
그 무렵 허균의 후실 선산 김씨 부인의 소생으로 나중 박황에게 시집가 외손자 운룡을 낳은 작은 딸이 세자의 후궁으로 내정되자 이이첨등은 허균을 동지로서보기보다 적으로 보게 되었다. 세력이 더 커지기 전에 뿌리를 뽑아야 하겠구나 생각한 이이첨은 대비 페출의 죄를 몽땅 허균에게 뒤집어 씌워 유생들의 비난을 오직 허균 한몸에 쏟아지게 했는데 원수 사이가 되어버린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이 선봉장격이 되었다.
허균은 불우한 시인, 세상에서 버림받은 서자,승려,무사들과 술로 나날을 보냈다. 1618년 50고개에 들어서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 풍운아 허균은 세상을 둘러엎고 새 세상을 만들기를 위한 용트림을 하여 혁명 계획에 착수 했던 것이다.
그는 추종자들로 하여금 8월15일 남산에 올라가 "서쪽 적이 압록강을 건너오고 유구의 군사가 남에서 처들어 오니 모두 피난하라'고 외치게 한후 성 안이 소란해지면 도성을 점령하려고 했다고 하는 것이 광해군 일기에 기록된 허균의 역모 계획 이었다. 사실여부가 어떻든 허균이 의금부에 하옥된 것은 8월17일,그 몇일전 허균은 자신의 문집을 비밀리 사위집으로 옮겼고, 8월20일 가택수색이 있었다.
8월26일 서문 밖에서 목이 떨어지고 팔, 다리, 몸뚱이가 따로 끊겨 나가는 "능지처참"으로 한 많고 파란 많은 50년 이승살이의 막이 내렸다. 그의 추종자 현응민, 하인준, 김우성등과 첩 추섬이 줄줄이 붙잡혀 가 자백했으므로 꼼짝 달싹도 못하고 영원이 돌아오지 못 할수 밖에 없었다.
용인군 원삼면 맹리 능안마을 수정산 기슭 ,양천 허씨 문중 묘역에 있는 허균의 묘는 시신이 없는 가묘이다. 하지만 허균은 영원히 죽은 것이 아니었다. 왕조시대가 끝나고 백성이 주인이 된 세상이 오자 역사의 무덤에 깊이 잠들어 있던 영웅 홍길동과 함께 허균 또한 민중 문학의 선구자로서 부활 하였던 것이다.
첫댓글 동쪽 양반집 세도는 불길처럼 타오르며
높은 정자 위에 악기 소리가 드높구나
북쪽 가난한 이웃은 입을 옷조차 없는데다
주린 배 끌어안고 쑥으로 이은 오두막에 살고 있네
어느 날 아침 그 높은 정자도 기울면
도리어 북쪽의 고달픈 이웃을 부러워 하리라
흥하고 쇠하는 것이 수없이 바뀔지니
하늘의 이치는 벗어나지 못하리라
난설헌
허균의 <호민론>은 백성을 항민(恒民), 원민(怨民), 호민(豪民)으로 나눈다.
항민은 순종하며 부림을 당하는 백성
원민은 윗사람의 수탈을 원망하지만 행동으로 나서지 못하는 백성
호민은 허균이 찿는 변혁 주체라 할 수 있다.
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 본면 초희(楚姬)
호는 허난설헌. 난설재(蘭雪齋). 자는 경번(景樊)
허균(許筠(1569~1618)
권필(權필),이안눌(李安訥)과 함께 당대를 대표하는 문인의 한사람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喬山) 또는 성소(惺所). 학산(鶴山) 등이었고, 후에는 백월거사(白月居士)로도 불렸다. 주요저서:성소부부고, 시집(을병조천록), 구조시산(조선의 역대 시를 뽑아 비평을 붙인)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