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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부여, 그 숨은 그림 찾기
- 한기홍의 수필 세계 -
한상렬 / 문학평론가
1.
길가에 아무렇게나 구르는 돌멩이나 풀 한 포기에도 나름의 의미는 담겨 있다. 다만 우리가 그런 것들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그저 무덤덤하게 살아가기 있기 때문에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발견하지 못할 뿐이다. 그런 사물들과 우연히 조우하여 의미를 발견해 내는 것이 다름 아닌 수필의 세계가 아닌가 생각된다. 수필의 소재는 우주만물이다. 이 우주만물에는 그만의 독특한 특성이 있으며 그가 거기에 놓여야 할
의미를 지닌다.
다만 인간은 그런 사물의 저마다의 특성을 혜아리지 못할 뿐이다. 겉으론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 듯 보이지만, 외관으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건만, 심안에 의지하면 남의 눈에 띠지 않는 내면의 모습이 보이는 경우도 있다. 이런 눈이 작가에게 필요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기에 모름지기 작가는 심안으로 보아야 한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내면 의식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혜안. 작가는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수필가 염정임은 "나에게 있어 수필을 쓴다는 것은 일상에 숨어 있는 그림을 찾으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보고 듣고 사물들과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나의 의식이나 기억 속에 숨어서 밝혀지기를 기다리는 희미한 그림들을 찾아내려는 것이라고 하겠다. …… 어쩌면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그림들로 미만 해 있는 경이로운 것이 아닐까. 우리가 무심코 스쳐 지나가는 일상의 우물이 있고, 다 허물어져 가는 빈집 어딘가에 보물 지도가 감춰져 있는 것을 알 수만 있다면…." 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수필 쓰기를 숨은 그림 찾기로 비유하고 있다.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보통의 사람에게는 발견되지 아니하는 숨은 그림을 작가는 발견해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작품으로 형상화할 때 문장은 살아 숨쉬고 의미는 날개를 달고 독자의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이때 비로소 한 편의 수필은 탄생한다.
천만 어를 쓴다해도 그 안에 의미가 담기지 아니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강물을 치솟아 흐리게 하고 태산을 움직인다해도 그 안에 진실의 목소리가 담겨져 있지 아니하다면, 그건 한낱 메아리 없는 독백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 수필은 그 안에 숨어있는 그림을 찾아내야 하며, 내재한 진실의 목소리를 찾아야 한다. 여기 한기홍의 수필은 이 같은 숨은 그림 찾기에 좋은 본보기가 된다.
2.
주행 게이지에 나타난 사만사천사백사십사 킬로미터라는 표시. 순간 화자는 그 사(四) 자가 갖는 우연한 숫자의 나열에서 오는 불안감을 느낀다. 트럭들이 마구잡이로 달리는 매립지로 가는 길에서다. 그는 미세한 변화라도 있나 신경을 곤두세운다. 화자가 동충하초를 끌어내기 위한 단초다. 수필 <동충하초>는 여기서 유년의 이야기로 진입한다.
가난했던 시절. 흙벽돌을 찍어내는 일을 거들어야 했던 고된 노동의 나날. 공책보다는 천연색 딱지에 더 마음이 팔렸던 일이 아버지의 분노를 사게 한다.
"분노한 아버지로부터 매를 맞으면서도 딱지를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어떻게 마련한 딱지인데…' .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훌쩍거리다가 분풀이하듯 손을 뿌리치고 동구 밖 뽕나무밭으로 달려갔다. 동네 사람들은 그 곳을 사천사백 고랑이라고 불렀다. 두 길도 넘는 뽕나무 줄기가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있었고, 무성한 이파리가 사방을 메우고 있었다. 억수같이 비가 내려도 큰 이파리가 빗줄기를 가려줄 것만 같았다. 빗물에 젖은 딱지를 행여 찢어질까 두 손으로 감싸고 그루터기를 찾았다. 딱지를 보관하기 위한 수혈(樹穴)이라도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동충하초>에서
그리고 다음날 숨겨놓은 딱지를 찾으러 뽕나무밭으로 달려갔지만, 밤새 내린 소나기에 흔적도 없었다. 팔뚝과 종아리가 흙과 피로 범벅이 된 그를 어머니는 말없이 씻어주고 어루만져 주었다고 했다. 그는 골방 창틀에 매달려 희뿌연한 빗줄기의 촘촘한 장막을 체념어린 눈으로 응시한다.
'이 세상에 있는 누에는 모두 오려무나…. 소나기를 타고 저 뽕밭에 떨어져 뽕잎을 전부 갉아먹으려무나!' 이런 독백의 의미는 다름 아닌 화자의 암울했던 지난날의 기억이다. 인공의 몸짓으로 섭생하다가 드디어 아름다운 풀잎으로 환생한다는 동충하초. 그 동충하초에 담겨진 의미를 찾아내고자 하는 노력은 바로 숨은 그림 찾기라 하겠다. 그의 소재를 다루는 솜씨가 남다른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육안으로 사물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심안으로 내재된 의미를 찾아내고자 하는 지난한 몸부림. 이를 그의 장인정신이라 해도 좋을 만하다.
작가에게는 모름지기 이 같은 작가정신이 있어야 할 일이며 이런 바탕 위에 훌륭한 수필은 동충하초와 같이 탄생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여기 변용의 시간을 우리가 터부시하는 사(四) 자의 의미를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사만사천사백사십사'라는 주행 시간은 분명 우연적인 것이지만, 더구나 사십사세라는 연령의 우연한 일치가 화자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우연을 뛰어넘어 고난의 기다림을 현시하는 시간 개념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삶의 의미에 대한 천착이 이 수필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사만사천사백사십사 킬로미터의 주행 기록은 이제 불혹을 넘기고 사십사세를 목전에 둔 내 나이와, 삼십이 년 전의 순백한 동심에 파문을 일으킨 딱지. 그리고 사천사백 밭고랑을 자랑하던 거대한 뽕밭의 전설을 연상시켰다. 문득 숫자가 갖는 묘한 일치.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각지를 전전해야만했던 암울했던 세월. 그러나 이제는 어엿한 가장으로 변모한 자신의 모습을 대견스레 돌아본다.
그렇다. 암울했던 겨울. 인고의 몸짓으로 벌레가 되어 섭생하다가 마침내 화창한 여름날, 아름다운 풀잎으로 다시 피어나는 누에의 기묘한 일생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동충하초'라 했던가. "그래 동충하초야말로 가장 숭고한 생명의 환원(環元)일지도 모르지! 그 여름날 뽕밭에 퍼붓던 장대비처럼 질퍽하게 세상을 향하여 소리 없이 외치는 시대의 절망이며, 또한 환희일 게야…" 나는 그렇게 주억거리고 있었다.
<동충하초>에서
이렇게 주행거리와 자신의 나이 그리고 사천사백의 밭고랑의 우연한 일치에서 오는 화자의 삶에 천착한 의미 규명은 이 수필의 문장의 의미화에 기여하고 있다. 그리하여 동충하초와도 같았던 자신의 삶의 역정을 돌아보는 작가 정신은 숨어 있는 그림을 찾아내듯 일상성 속에 잠들어 있는 의미를 발견해내고자 하는 작가정신과 통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수필 <일요일 오전>과 <일편단심 민들레야>는 일상적 화소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있으며, <호천(狐川)의 결(決)>은 회고적 내용을 통해 순수했던 동심의 갈등과 화해를 무리 없이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작가 한기홍의 수필이 지닌 묘미를 그 사상적 깊이와 함께 수필적 언어의 자유로운 구사의 탁월함으로 단정해도 좋다. 수필문학이 언어로써의 문학임을 전제할 때, 수필에서 사용하는 언어 그 자체가 문학성을 지녀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일상어가 지닌 식상함, 천편일률적인 상식화한 주제 구현. 이런 것들은 변화의 시대에 독자를 사로잡을 수 없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이퍼텍스트가 이 시대를 지배한다고 할 때 변화는 곧 생명일 수밖에 없다. 한기홍은 이런 변화에 민감하면서도 회감에 젖기도 하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그의 장점이라 하겠다.
수필 <타조에 대한 고찰>은 제목이 주는 뉘앙스의 건조함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경지를 한껏 높인 작품이라 하겠다. 전국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작품 공모에서 당당히 당선한 이 작품은 타조와 자신과의 동일시를 통해 숨어 있는 그림을 찾고자 하는 진지한 탐구 정신이 발로된 작품이라 하겠다. 타조에 대한 그의 독백은 이런 의문에서 비롯된다. "타조여! 어딜 그렇게 달려가는가? 그 왕방울 같은 눈을 질끈 감고 수풀이든 늪이건 사막이건 가리지 않고 혼신의 힘을 쥐어짜며 구석으로, 골짜기로 질주하는 네 모습이 우습고나…. 이놈아! 차라리 달리는 가속도를 그대로 살려서 높은 골짜기에서 계곡으로 날아 창활한 허공으로 두둥실 날아 보거라!"라고. 타조를 보면서 자신의 운명을 찾고자 하는 화자의 태도는 바로 숨어 있는 그림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나는 아직도 그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포부가 있다. 흉중 깊숙이 숨겨져 있는 꿈의 실체를 묵묵히 헤아려 본다. 타조를 생각하면서 다시금 확인하는 것은 비상하지 못하는 내 자신의 게으름과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는 것이다. 쉽사리 번복되는 포기의 일상화는 철들고 이십여 년을 되풀이 해온 너무나 편안한 독약과도 같은 안주의식(安住意識)이었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타조에 대한 고찰>에서
비상을 위한 날개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게으름과 능력의 한계로 치부한다. 이는 타조의 한계이듯 자신이 지닌 벽이기도 하다. 그의 말과 같이 "삶의 단편적인 위기마다 퇴화되어 불쌍한 타조의 날개처럼 움츠러들었는지" 도 모르는 자신에 대한 자각은 이 수필의 피사체인 타조에 대한 페이소스로 연결된다. 즉 "새이면서도 유일하게 날지 못하는 녀석의 운명적 안타까움에 대한 연민과 초원을 질주하는 그 기묘한 자세에서 풍기는 고달픈 '삶의 뒤뚱거림' 속에서 절망을 딛고 오기롭게 일대(一代)를 풍미하는 외강내유(外剛內柔)의 품위를 보았기 때문이다."라고 의미화 하고 있다. 타조의 끝없는 슬픔과 절망에 대한 의미 파악과 삶에의 천착 여기에 이 수필은 자리하고 있다. 결국 그의 수필 <타조에 대한 고찰>은 끝임 없이 추구하고자 하는 작가의 숨은 그림 찾기의 모습이라고 하겠다.
3.
수필작가 한기홍의 수필 중에서 단편적으로 보이는 수필세계는 앞에서 고구했듯이 숨은 그림 찾기라 하겠다. 수필 <동충하초>가 그러하며 또 <타조에 대한 고찰>이 그러하다. 그의 수필은 수필적 화자가 피사체에 초점을 맞추면서 내재해 있는 숨은 그림을 찾고자 하는 노력으로 보인다. 이런 경향은 오늘날 일상성에 머물고 있는 수필 쓰기에 새로운 바람이라 하겠다. 수필 창작에 바치는 작가의 노력의 결정이요, 장인정신이라 하겠다. 앞으로 그가 창작해 낼 수필의 세계가 기대된다.
<문학세계 2001년 5월호 평론>
고뇌하는 한 지성의 존재 해명의 얼굴 그리기
―韓基弘의 <<은빛 매미의 눈망울>>의 수필세계 탐색
한상렬(문학평론가)
1. 시작하면서
수필작가 한기홍. 그는 지금 지천명의 고개 마루에 올라서 있는 작가로 누구보다도 삶의 지난한 역정을 거치면서 자신을 성찰하고 삶의 문제에 천착하여 고뇌해 오고 있는 작가다. 문단 경력은 일천하지만 그런 통과 의례적인 과정을 뛰어넘어 이미 작가로서의 발군의 능력을 평가받았는가하면, 실제 작품 창작에서도 타작가보다 그 공간적 거리를 넓히고 있는 작가라 하겠다. 평자의 인상 비평적인 결론에 준거하겠지만, 실제 창작의 과정을 지켜본 평자로서는 이런 평가가 충분한 근거를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비록 뒤늦게 문단에 데뷔하였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작품 창작에 혼신 하여 이미 제3회 전국공무원문예대전에서 수필부문에 우수상을 수상함으로써 작가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현재 한국문협 인천지부의 수필분과위원장과 계양산문학회 회장을 지내는 등 문학 외적인 활동도 만만치 않은 작가다. 물론 이런 외적 성과가 작품 창작에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겠지만, 한 작가가 자신이 몰두하는 전공분야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프로 의식을 지닌 뚝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데뷔 4년만에 자신이 창작한 결과를 한 권의 책으로 상재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일이겠다. 물론 데뷔와 동시에 자신의 저서를 출간하는 이도 없지 않으나 문제는 그렇게 출간된 책이 독자의 손에 들어가 어느 정도 읽히며 감동을 주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양적 팽창의 시대에 결코 양이 질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수필작가 한기홍. 작가의 말에서도 언급했듯 그에게 본격적 수필문학의 등불을 지펴준 필자의 입장에서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고구가 혹여 팔이 안으로 굽듯 주례사식 비평이 되지 않을까 저어하는 독자들이 있을까 염려되지만, 시작하면서 분명히 전제할 말은 수필작가 한기홍이야말로 인천수필문단, 아니 한국수필문단에 새 지평을 열만한 문학적 안목과 창작의 기량 그리고 집념과 성취욕을 함께 갖고 있는 작가임을 분명히 해도 좋으리라 여겨진다. 이는 뒤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겠지만, 어느 영역이든 자신이 몰두하는 분야에 프로의식을 갖고 투신하는 저력이 없는 한 한때의 반짝임이 지속되지 못함을 수도 없이 보아온 터여서다.
우리 수필문단의 문제가 여럿이겠지만, 그 작법 상에서 드러나는 문제의 일단은 대개 서정성에 치우쳐 신변위주의 수필들이 대조를 이룬다는 데 있다. 이는 수필문학의 문학성 확보의 어려움과 함께 천편일률적으로 급조된 작품을 양산하게 하고 있다. 이 점이 수필문학을 타 문학의 시녀이듯 폄훼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해도 지나침이 없겠다. 그런 저간의 문제를 이미 간파하였는가. 그의 수필의 대부분은 고뇌하는 한 지성의 삶의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주로 나타나며 존재의 의미에 천착한 내면 의식의 탐색과 그 해명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동시에 발견하게 한다.
신변의 자잘한 수필적 화소들이 독자들에게 주는 미적 아름다움도 있겠지만, 오늘과 같이 번다한 현실 세계에서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시대에는 보다 깊은 인생 체험과 고뇌의 시간에서 창출해 낸 깊이 있는 작품이 요구될 것으로 보아, 작가 한기홍의 수필세계가 독자에게 주는 감동적 메시지는 그만큼 크리라 여겨진다.
2. '은빛 매미의 눈망울'이 그 역설적 의미
한기홍의 수필집 <<은빛매미의 눈망울>>은 '회상의 실타래', '지난 세기의 일들', '내 속의 희미한 나', '은빛 매미의 눈망울' 등 4부로 편성되어 총 45편의 수필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 작품들은 과거회상의 시간적 배열과 회억, 여정(旅情)을 통한 존재의 확인, 존재 탐구를 위한 자아 성찰과 함께 순수 지향의 작가적 소망의 형상화로 대별할 수 있다. 이런 작품 배열은 작가가 천착하는 세계의 모습, 일테면 고뇌하는 한 지성의 순수 지향과 존재 의미의 규명이라는 문학의 원초적 욕구와 동일선상에 놓여 있다. 이는 그의 수필이 지향하는 바 세계의 투명함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한기홍 수필의 특장은 여타 수필작가들의 신변잡사에서 멀어질 수 있으며, 그 사유의 깊이로 인해 철학적 수필의 경지마저 느끼게 한다.
문학이란 독창적인 언어와 구조를 통한 예술적 형상화로서 인간의 의미를 규명하고 재해석하는 사상성이 들어있어야 한다. 따라서 문학은 인생의 진실을 추구하되 미적 구성을 통한 창조의 세계라고 하겠다. 이 점에서 한기홍의 수필의 자리는 이미 확고한 경지를 이루고 있다 하겠다.
문학이 주체로 하는 인간은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연과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구체적인 인간이므로 작가를 둘러싸고 있는 시대와 사회는 문학에 커다란 의미를 띠게 마련이다. 에이브람스는 예술 작품의 총체적 상황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요소를 첫째로 예술적 생산품, 둘째 제작자인 예술가, 셋째는 작품을 이루는 행위와 사상으로 존재물에서 유래된 소재, 넷째로 독자를 들고 있다. 이들 네 개의 좌표는 예술 작품의 총체적 상황으로 이들을 어떻게 얽어 짜느냐에 문학작품의 성패가 달려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작품 속에서 구현된 작가의 사상이란 작품의 형식이나 기교에 못지 않게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작가의 말을 먼저 들어본다. "내 흉중에 깊이 도사리고 있는 가냘픈 그리움이자, 문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내 마음의 행로입니다. / 내 안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순진무구한 또 다른 눈망울이지요. / 매일마다 반복되고 돌출 하는 세상의 번사들을 은빛이 된 매미의 눈망울로 투시하고 싶은, 어쩌면 가엾기 짝이 없는 나의 욕망입니다."라고 그는 '은빛 매미의 눈망울에 대한 소회를 풀어놓고 있다. 그렇다. 은빛 매미는 작가의 화신이자. 자화상일 것이다.
나는 얼마 전 시골의 할아버지댁 정자나무 밑에서 보았던 여름밤의 끝도 없이 펼쳐진 푸른 별의 바다를 생각해 내었다. 시냇물처럼 흐르던 은하수의 물결과 광활한 우주에서 보내오는 억만 개의 별빛들 …. 막내삼촌은 저건 무슨 성좌니, 무슨 별자리니 하면서 꿈 많은 소년의 상상력을 무한대로 부풀려 놓았었다.
이놈을 잡아야지! 살며시 꽁지 쪽으로 손을 올려놓다가 멈추었다. 매미의 은빛날개가 부르르 떨었기 때문이다. 흠칫 놀라면서 바라본 매미의 무채색 눈망울에서 무언가 은은한 빛이 번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 눈빛을 받고서 나는 한동안 우두커니 서있었다. 내게 붙잡혀 겪어야할 매미의 애처로움을 가엾게 생각하기보다는,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순하디 순한 하얀 그리움이 매미의 두 눈에서 빛살처럼 뿜어져 나와 내 가슴에 마구 달려드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젠가 아버지와 다투시고, 구슬프게 우시다 고개를 든 어머니의 눈물 젖은 눈망울과 비슷했다. ―<은빛 매미의 눈망울>에서
그의 수필은 현재에서 과거로의 시간적 변환이 무시로 진행된다. 그리하여 13세 소년이 바라보던 인생의 우주가 미적 세계로 진입하게 한다. 칼싸움으로 승부를 가리기 위해 찾은 상수리나무 숲 너머 묘지가 있는 잔디밭. 그런데 그 상수리나무의 검은 몸통에 앉아있는 희한한 곤충. 주먹만한 매미였다. 은빛을 띤 흰색날개의 왕방울 같은 그 매미의 무채색 눈알에서 무언가 은은한 순백색의 빛이 번져 나오고 있었다고 했다. 지순한 그리움. 여기서 그는 어머니의 눈물 젖은 눈망울을 유추해 내고 있었다. 그러나 난데없이 날아온 돌멩이로 붕붕 소리와 함께 매미는 날아가 버리고 그 충격으로 관목 위에 주저앉는다. "노란 하늘이 묘지 터처럼 눈앞에서 번쩍거리고, 은빛 매미는 소년의 가슴에 풀지 못할 수수께끼를 심어 놓은 채 날아가고 없었다. 대결을 포기하고 순순히 항복한 다음, 산을 내려가는 내 머릿속에는 노란 어지러움증과 더불어 온통 붕붕대는 매미의 하얀 눈망울이 어른거려 온몸을 휘청거려야만 했다." 상징적인 표현이다. 그가 바라본 은빛 매미의 눈망울은 화자에게 있어 순수지향의 그리움의 구체물이다.
지금까지 경쟁과 모반을 꿈꾸던 생활인의 굴욕을 벗어 던지는 의식의 전환을 위한 매체이자 계기가 된다. 그래 화자가 만나게 되는 돌출 하는 세상사의 번사들을 순수로 채색하게 하는 모티브가 된다. 마땅히 대결을 감행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대결을 그가 포기하고 순순히 항복하고 산을 내려왔듯, 그는 첨예했던 자신의 주장을 버리고 상대의 의견을 따르기로 한다. 이는 다분히 역설적이기까지 하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선 후, 묵묵히 백지에 두 개의 원을 그려보았다. 그림에 솜씨가 없어 매미의 눈알 같지는 않았다. 무언가 각박한 거래나 날카로운 이해득실을 따질 때면, 담배를 피워 물고서 한번씩 은빛매미의 눈망울을 떠올리는 습관이 굳어졌다. 남들이 이해 못할 내 나름의 괴벽이지만, 나에게는 순진무구한 동심의 나라에 그리움을 듬뿍 안고서, 입장료 없이 틈입할 수 있어 좋다.
―<은빛 매미의 눈망울>에서
그렇다면, 그가 매미의 은빛 눈망울에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경쟁이 아니다. 이해득실을 따지는 각박한 세태의 인정도 아니다. 순수에 대한 지향. 그의 흉중에 남아 있는 인간에 대한 사랑. 첨예한 대립 관계에서도 중용을 찾고자 하는 미덕. 화자의 자아의 눈뜸이요 생활인의 예지의 발견이다. 이를 어찌 삶의 나약함으로 단정지으랴. 수필가 한기홍의 정신세계의 뿌리는 이런 역설적 순수지향에 있다고 하겠다.
3. 고뇌하는 지성
한기홍의 수필은 그 구성의 패턴이 정형화되어 있다. 시간적 배경이 현재에서 과거회상으로 진입하여 회억에 젖는 역전구성의 작품이 여러 편 발견된다. 동충하초의 예에서 보듯 "기억의 터널을 통과한 유년시절. 어느덧 나는 그 아득한 단초(端初)를 잔잔하게 오버랩 시키는 기억 저편의 아스라한 유년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와 같은 역전적 구성은 화자가 존재의 의미를 규명하기 위한 기법적 패턴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작품구성의 비법이다.
그는 회고적 기법을 이용할 경우 상당수의 작품에서 '비 오는 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는 그만의 독특한 작품 구성의 패턴으로 한 작품의 창작에 앞서 배경 설정에까지 그가 얼마나 고뇌하고 있는가를 감지하게 한다. 그의 작품 속에서는 유독 비가 자주 내린다. 작품의 배경으로서 비가 내린다는 것은 흔히 고뇌와 우수의 상징이다. 허구적 소설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고뇌하던 유년시절을 회고한 <동충하초>의 억수 같은 빗줄기가 그러하고, <겨울비>에서 차창에 날라와 붙는 '은빛 매미의 눈알'을 바라보며 과거로 돌아가는 장면이 그렇고, <그 사람이 보고 싶다>에서도 기어코 비가 오기 시작한다. 회감에 젖기 위한 도입의 패턴이다. 이렇게 한기홍의 수필에서의 '비'는 과거로의 회귀를 위한 문학적 예비장치로 작용하면서 삶의 현장에서 존재의 문제에 고뇌하고 성찰하는 한 지성의 숨가쁜 삶의 모습을 보게 한다.
칭얼거리는 동생을 끌어안고 아버지로부터 한 차례 꾸중을 더 듣고 잠자리에 들었다. 함석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마치 내 심장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그루터기 속의 딱지가 더 이상은 젖지 않기를 밤새 빌면서 잠을 설쳐야 했다. ―<동충하초>에서
주행 게이지에 나타난 숫자를 보며 유년시절 한 장면을 연상하는 이 수필은 화자의 유년시절의 꿈과 동충하초와도 같은 경이적 변신을 꿈꾸는 작가의 고뇌 어린 정신 세계를 읽게 한다. 인공의 몸짓으로 섭생하다가 드디어 아름다운 풀잎으로 환생하는 동충하초. 이는 고통스런 체험을 통해 얻어지는 변환과 자각의 기쁨이요, 심안으로 내재된 의미를 찾아내려는 작가 정신이라 하겠다.
수필문학은 작가 중심의 1인칭에서 출발한다. 한기홍의 수필은 작가 자신에서 출발하지만 그 내재한 존재의 의미를 추구해 내는 과정의 고뇌를 읽게 한다. <겨울비>의 "담배를 끄려고 재떨이를 여니 담배꽁초가 수북하여 끼워 넣을 공간이 없다. 문득 내 인생의 역정도 이렇게 빡빡하여 껍데기뿐인 내 의지를 담아 줄 여백조차 없을까 두려워졌다."라는 결미와 같이 그의 수필은 과거 회상을 통한 회감과 현재로의 시간적 회귀를 통해 이루어지는 존재의 규명이라는 고뇌하는 지성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경향상은 <그 사람이 보고 싶다>도 역시 동일선상에 놓인다. "내 머리 속에 아득히 박혀 있는 수많은 추억의 실타래는, 그 중 한 가닥을 흐릿한 내 안구(眼球)의 망막 위에 지긋이 올려놓는다."는 회상의 준거 아래 기어코 비가 오기 시작한다. 그리곤 추억 속의 현장으로 진입한다. 가슴 아픈 젊은 날의 추억의 한 장면이다. 그 장면이 왜 비가 오는 날이면 새록새록 자아나는가? 누구에게나 고단한 어제가 있었듯 젊은 시절 화자의 고단한 삶의 역정이나 고뇌 어린 기억은 바로 자기 얼굴 그리기가 아닐까. 흔적처럼 남아 있어 지워지지 않는 젊은 날의 초상. 그래 화자는 비 오는 날이면 스멀스멀 회감에 젖는지도 모른다.
삶에 고뇌하는 화자의 성찰은 때때로 회색의 풍경화로 나타난다. 회색은 색깔이 주는 시각적 심상의 부정적 정서가 다분하다. 한기홍의 수필에서 엿보이는 이런 색채적 심상은 작가의 순탄치 않은 고뇌와 갈등을 대변한다. <회색(灰色)의 계절>에는 "모든 것을 실종시키고 있는 듯 하다. 사무실에서 나와 긴 한숨을 내쉬고는 우울한 하늘을 향해 양팔을 쭉 폈다. 우드득 뼈가 이완되는 소리가 들리고 현기증과 함께 눈앞에 노란 별이 무수히 점멸 하고 있다."라고 하였듯, 계절이 주는 색채적 미감의 부정적인 의미는 존재의 회의와 갈등을 증폭시킨다. 출근시각 화자가 접한 친구의 실종소식은 충격적이다. 보물선을 발견했다는 소식과 묘한 대조를 보이면서 화자에게는 회색의 계절이 주는 시각적인 부정적 정서와 함께 존재의 문제에 대한 또 다른 고뇌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실종자의 목소리를 접하면서 이런 부정적 고뇌와 갈등은 "담배연기를 내보내려고 열어놓은 차창 안으로 몰아친 한줄기 바람이, 시원스럽게 이마의 머리칼을 흩날린다. 내 자신의 보물선은 어디에 있을까? 그래! 평범한 일상의 연속이 비범하고 행복한 요즘 세상이란다. 갑자기 따뜻한 온돌에서 한숨 푹 자고 싶어졌다."라는 긍정적 자아개념으로 전환한다. 여기 삶의 고뇌는 비상을 위한 행위라 하겠다. "인간의 생애에 커다란 항아리가 있다면, 그 속에 인생을 담는 것은 각자의 노력일 것이다. 가득함에 기뻐하고, 부족함에 슬퍼하는 일은 무릇 모두의 일이겠으랴만, 새털같이 가벼운 마음으로 하늘을 보아야겠지. 허허실실은 보잘 것 없는 한 종지 찻잔에도 가득한 것이거늘…(<비취빛 가을>에서) 이런 자각이야말로 고뇌 어린 지성의 목소리라 하겠다.
4. 전고(典故)와 자아 성찰
수필이 자아성찰이요, 자기관조의 문학임은 말할 것도 없다. 때문에 수필은 항용 신변잡사에 머물 취약함을 생래부터 지니고 있다. 알베레스의 말을 인용하지 않아도 수필은 이런 서정상과 지성의 결합이어야 한다. 즉 신비적 이미지와 지성적 이미지가 혼연하여 조화를 이룰 때에 그 수필은 미적 경지에 도달한다. 작가 한기홍의 수필은 이런 수필정신에 탁월하다. 인간 존재의 해명을 위한 작가의 정신적 행보가 인간으로서의 성취와 존재 해명을 위한 고뇌에 차 있다. 그는 여기서 전고(典故)의 적절한 활용으로 지적 수필의 경지를 한층 높이고 있다. 전고는 전례(典例)와 고사(故事)를 적절히 배합하여 활용하는 것으로 고실(故實) 즉 전거가 되는 옛일을 의미한다.
한기홍 수필의 특장이 있다면 이런 전고의 응용을 위한 회감의 정서와 인용이다. 이는 수필문학이 갖는 미적 요소인 비유의 기법으로, <동충하초>의 비유가 그러하고, <호천(狐川)의 결(決)>이 그러하다. 자동차의 유리창에 부딪는 빗방울을 '은빛 매미의 눈알'로 비유하고 있는 비유의 탁월함은 '소오강호(笑傲江湖)'에서 구체화되고, 수필 <일요일 오전>, <방생>, <윤집궐중(允執厥中)>에서도 나타난다.
수필 <타조에 대한 고찰>은 제목이 주는 뉘앙스의 진부함에도 불구하고 미적 수필의 경지를 한층 높인 작품이다. 전국공무원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 공모에 당당히 당선한 이 작품은 타조와 자신과의 동일시를 통해 숨어 있는 자기의 그림을 찾고자하는 진지한 탐구 정신 곧 자아 성찰을 보인다. "타조여! 어딜 그렇게 달려가는가? 그 왕방울 같은 눈을 질끈 감고 수풀이든 늪이건 사막이건 가리지 않고 혼신의 힘을 쥐어짜며 달리는 가속도를 그대로 살려서 높은 골짜기에서 계곡으로 날아 창활한 허공으로 두둥실 날아 보거라!"라고. 이는 타조를 통해 존재를 성찰하고 해명해 나가고자 하는 과정으로, 화자의 얼굴 그리기라 하겠다.
그렇다! 나는 아직도 그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포부가 있다. 흉중 깊숙이 숨겨져 있는 꿈의 실체를 묵묵히 헤아려 본다. 타조를 생각하면서 다시금 확인하는 것은 비상하지 못하는 내 자신의 게으름과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는 것이다. 쉽사리 번복되는 포기의 일상화는 철들고 이십여 년을 되풀이 해온 너무나 편안한 독약과도 같은 안주의식(安住意識)이었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타조에 대한 고찰>에서
비상을 위한 날개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현실에서 날지 못하는 자신을 화자는 이렇게 성찰하고 있다. 이는 타조의 한계이듯 화자의 인간적 한계다. 타조의 끝없는 슬픔과 절망에 대한 의미 파악과 삶에의 천착. 여기에 한기홍의 수필의 정신세계의 일면이 있다. 끊임없이 추구하고자 하는 고뇌하는 지성의 자기 성찰은 비상을 위한 예비 동작이기도 하다.
수필작가 한기홍은 드디어 비상하기 시작한다. 고단했던 지난날의 회감에서 벗어나 훨훨 창공을 나기 시작한다. 바로 첫수필집 <<은빛 매미의 눈망울>>이 이를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5. 나가면서
수필작가 한기홍은 한국수필문단에 아직은 낯선 작가다. 그러나 이는 외적인 문명(文名)으로서의 일천함이지, 실제 작품 창작의 열정이나 그 작품의 문학성에 있어서는 이미 한 세계를 이루고 있다.
작가는 자신이 인생의 정오(正午)에 이미 달해있음을 감지한다. "평범한 인물로서, 또한 항용 그러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장성(長城)의 일각에 틀어박힌 붉은 벽돌 한 장이 되어 세상의 유구함에 작게나마 기여하면 되는 거지…"(수필 <인생의 정오>) 이런 자아성찰은 그의 소박한 삶의 참된 모습이다. 물론 화자로 하여금 또 다른 고뇌의 빌미를 제공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삶이란 어차피 이런 고뇌와 갈등의 연속이 아닐까 싶다.
한기홍의 수필집을 덮으면 우수의 비가 내린다. 그리고 유리창에 부딪는 은빛 매미의 눈망울이 이내 영상으로 떠오른다. 고뇌하는 한 지성의 역설적 의미와 함께. 그렇다. "작품을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내 속에 있는 최선의 것들을 모두 끌어내는 것이다."라고 아름다운 영혼의 순례자 칼릴지브란은 말하고 있다. 혹여 그가 닮아가고 싶어하는 영혼은 아닐까 싶다.
(2002 창작수필집 ‘은빛 매미의 눈망울’ 수록 평론)
시간時間의 역학力學과 詩의 본질本質
--- 시의 생명성生命性
박 남 권(한국문학예술 발행인 . 시인)
시간은 환영일 뿐이다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양자물리학에서 한 말이다. 모든 일은 순서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은 아닌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행동에서 시간의 순서를 배제하면 동시에 일어난다. 아니 일어나는 게 아니라 이미 존재한다. 존재하는 것이다. 시간의 크기 시간의 폭도 무의미하다. 이미 존재한다면 크기와 상관없이 시간은 내 것이 되는 것이다.
꽃이 피거나 꽃이 지는 것은 시간에 있어서 특히 시에 있어서는 동시 개념이 적용되어진다. 천 년 전과 백년 후가 여름날 소나기처럼 오락가락 해도 시간의 개념은 편하고 자연스럽게 적용되어진다. 백제 고구려 신라가 오고가고 고려 조선이 오고가도 밤과 낮이 변하는 순간으로 역사 앞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 세분되어지지 않은 밀도와 영적인 시인의 척도로 시를 통해 시인의 사고를 통해 재생되고 때론 창조되어 훑고 지나간다. 시간 -개념이 무 개념이고 무 개념이 영원을 약속하는 영적인 시간과의 법칙이 시로 표현된다.
호모 사피엔스들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쫙쫙 끼얹는 물소리, 대중탕은 벗은 자들의 은혜로운 빨래터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부끄럼들을 문질러 댄다
당당한 눈빛도 있다 욕조에 목만 내놓은 육신들
왜 인간들은 몸을 감추었을 때 떳떳할까
아잔타 절벽의 회랑동굴, 수많은 부처들이 때를 밀었었다
돈황에서도 그랬었다
잃어버린 시간 속 서서히 내 몸에 덧칠되어 온 오욕의 치장들
샤워기에 들이민 얼굴에 분수처럼 뿜어져 오는 물살이
한 조각 깨달음에 목말라 흐느꼈던 절망의 눈물 같다
내가 자초한 삶의 지루한 페인팅, 무채색이었으면 좋으련만
얼룩진 캔버스엔 바미얀 석불을 로켓포로 쏘아버린
탈레반 병사의 우직한 편견만이 아롱진다
목욕탕 뽀오얀 수증기 속에 붉은 나신들이 넘실거린다
일심으로 몸을 닦는 거룩한 수행자들
모두가 부처다
끈적한 배수구로 씻겨나가는 인간의 비릿한 언어들
양어장 치어 떼처럼 이글대는 고단한 삶의 빛줄기들이
더 벗겨진 곳으로 가고자 쏴아 쏴아 아우성이다
환幻하다
탈의장에서 멈칫, 피부가 많이 벗겨져 있다
얼마나 문질렀는지
내 몸이 붕 떠있는 것 같다
이제 이 정도 흘러왔으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괴나리봇짐을 싸야하지 않겠는가
창밖의 회색 빛 도시 어느 골목쯤에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그 나무가 보리수 같이 보였고,
일요일 점심은 라면 한 개가 좋겠다고 뇌까렸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문
이렇듯 이 하루가 천년을 커버하고 천년은 아니 원시까지도 잠시의 순간이나 찰나로 시공을 초월하는 시 그리고 시의 세계, 시의 세계는 광대무한의 우주 그 자체이다, 우주 속에 시 한 수를 툭 던져보는 시인이다.
시의 본질
시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시에 있어서 가장 난해하고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되고 천인 천답이 될 수도 있는 큰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장 핵심이 되는 본질은 언어의 생명성이다. 언어에 생명을 불어 넣는 작업이 시작詩作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이 없거나 생명성이 희박한 무미건조한 단순 언어에 생명성을 부여해 피가 돌게 하고 맥박이 뛰게 하며 영적 활력을 불어 넣어 죽어 있는 언어에서 살아 있는 생명의 언어로 태어나거나 부활시키는 고도의 작업, 그 기술이야말로 시의 본질이고 시의 생명성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한기홍의 시에서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이 그 진수를 자주 볼 수 있어서 반가운 일이다.
- 태풍 '송다'는 북해도 일원에서 소멸 중이고, 나는 고흐에 푹 빠져있다 -
가을하늘은 블랙홀로 통하는 길이다
그래서 끝간데 없는 푸름은 야수파野獸派다
빈센트 반 고흐는 과연 현명했다
아를에 있는 도개교跳開橋 시공을 건너
우주로 가려했다
그러나 그는 조급했다 결국
삼나무와 별이 있는 길에 이르고만 말았다
창밖에 가을햇살이 부서지고 있다
큰길에 둥둥 떠다니는 가솔린 덩어리들
언젠가 항해하려다 좌절한 사거리 횡단보도엔
아직도 사계四季를 모르는 여럿의 야수파들이
방황하고 있는데 고흐보다 잘생겼다
가을하늘은 블랙홀로 통하는 길이다
내게 은총이 쏟아진다면 구월 하늘만 같아라
창문을 활짝 열고 봉두난발을 불쑥 내밀어
창공에 오욕을 털어 본다
텁텁한 여름 쪼가리들과 모멸 깃든
먼지들만 떨어진다
꽉 찬 가을하늘이 동공에 들어오는데 한쪽이 흐리다
지천명 가까이 하늘을 봐왔지만
아직도 안 보이는 모퉁이가 있다
그 다리, 도개교跳開橋… 도개교
조급했던 고흐가 그곳에서 웃고 있다
블랙홀 닮은 삐죽거리는 설움이
손보다 먼저 고흐를 더듬었다
-<가을하늘, 고흐의 캔버스>전문
이 시를 보면 시에서 화려한 빛과 생명이 교차하는 숨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맥박을 감지 할 수 있었고 언어의 오만한 혈관을 타고 흐르는 미세한 백혈구의 움직임까지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서 단숨에 달려갈 수 있었고 반복해서 그 소리가 듣고 싶기도 했다. 시란 무엇인가. 시는 생명탄생의 소리이다
일배일배부일배一杯一杯復一杯
양인대작산화개兩人對酌山花開
- 李白
이백의 시다. 언젠가 미당 서정주 선생님이 살아 계실 때 남현동 예술인촌 미당 선생님을 찾아가서 시에 대한 얘기를 종종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때 얘기 중 기억에 생생한 위의 시를 소개 한다. 위의 시에서 일배일배부일배一杯一杯復一杯(한 잔 한잔 다시 또 한잔) 여기 까지는 시가 아니란다. 단순 설명이란다. 그 다음 양인대작兩人對酌(두 사람이 대작을 한다) 부분도 시가 아니란다. 그럼 어디가 시인가? 양인대작산화개兩人對酌山花開가 시란다. 두 사람이 술잔을 주고받을 때 산이 술에 취해서 벌겋게 취했다(꽃이 피었다)가 시라고 하신다. 그렇다 시는 언어의 서술이나 설명이 아니며 무미건조의 단순 언어의 나열로는 시가 되지 않는다. 산과 사람이 친구가 되는 생명을 불어 넣고서야 비로소 시가 된 것이다.
가늘게 뜬 눈자위로 얼핏 푸른 갈기 히히잉 준마소리가 들리고 옛 먼지 그득한 기사騎士는 하얗게 보였다. 지난 초저녁은 가물대는 아득한 기억인데, 동네 골목 꺾어지는 붉은 벽돌 밑에서 오랜만에 개똥을 밟은 일이나 060 스팸 전화에서 코 먹은 물기로 오빠 나 급해 빨리 나와 줘 따위 비음쓰레기도 자욱한 여명 어느 구석에서 가늘게 굼실대며 야사野史로 편입해 달라고 속삭이는 때인데. 새벽에 세월을 헤아리면 모든 게 부질없어 보인다. 대개 새벽에 누운 채로 광막한 대륙이 눈꺼풀에 쏟아지는 것은 신기한 일인데, 어깨엔 작대기 칼 메고 가슴엔 고경古經을 두른 옛사람이 말달리는 북원의 우주는 내가 누운 도시보다 컸지만, 희한하게도 이파리보다 얇은 내 눈두덩 위에 놓여있다. 따그닥 따그닥 말발굽 소리가 속눈썹 숫자를 넘길 즈음, 왁자한 말갈어와 거란사투리가 융성함으로 부유하는데 옛사람의 말편자가 내 콧잔등을 후려쳤다.
발해 방문을 환영합니다
- <발해의 푸른 밀지> 일부
이시를 읽으면서 한기홍시인과의 인연을 얘기하고 싶어진다. 1990년대 후반인가 인터넷이 들어오고 그때 “문학의 즐거움”이라는 문학 사이트를 김한순 시인이 처음 하게 되었다. 그 전에는 하이텔 유니텔 데이컴 천리안 등에서 컴퓨터를 통한 이메일 정도나 하다가 문학 사이트가 나오자 날마다 많은 문인들이 열정적으로 시와 글을 올리던 기억이 난다. 그 때 나도 열심히 참여를 했고 문학의 즐거움 사이트에 같이 참여한 한기홍 시인의 시와 글을 많이 읽었던 기억이 있다.
매일 매일 올라오는 글을 읽으며 시인을 만나 것 이상으로 반가워하고 또 기다리기도 하였으며, 독후감이라는 꼬리 글을 길게 달아주기도 한 인터넷카페가 생기기 전의 재미있고 아름다운 시절이다. 문학의 즐거움, 그 때에도 한기홍 시인의 글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읽었고 반겼으며, 기다리고 인기도 매우 높았던 것으로 기억에 남아 인상적이다. 글이 읽혀지는 조건인 글의 재미, 소재의 다양성, 시작이나 글을 끌고 가는 능력 등이 비범하고 독자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아는, 그래서 삼박자가 맞아 떨어지는 한시인의 글은 클릭수가 상당히 많았다.
서른이 넘어서도 시집도 안가고
첨단유행에, 높은 격조 따지던 외동딸이
아비 몰래 카드를 돌려 막다가
이윽고 억대로 불어난 빚을 쓰윽 밀어 주었을 때,
상징주의를 신봉하던 풍豊씨는
십칠 평 임대 아파트 뒷동산에 정장 차려입고 올라가
가끔씩 베란다에서 우두망찰한 하얀 바위 밑
굵은 참나무 등걸에 넥타이를 동그랗게 말아 걸었다.
귓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아우성, 곧 이태 전 먼저 간
아내의 창백한 얼굴을 비롯한 머구리떼 들끓듯 퍼지는
온갖 이명耳鳴의 소요가 있었다.
이제는 삼류詩도 접어야 하구, 억울해 봤자
그저 담담해질 뿐인 데카당스*의 빚도 까먹어야 하네
굳이 무덤까지 끌고 갈 채무가 있다면
못난 죽음, 묘비명보다도 더욱 아프게 심장에 끌로 새겨질
보들레르*와의 아름답고 추했던 추억이네
이를테면∼
그의 思潮에 一爛慢한 文化의 꼿이 한껏 피어, 그 花辯을버리고 바람도 업는 저녁에 徵光에 떠러질가 말가하는 懊惱의 아름다운 疲榮이며 밝음도 어두움도 안인 陰鬱, 絶望, 壓生의悲調를 가진 思惟에 한결갓치 새 洗禮를 밧앗다 ∼*(1)는
선지자의 웅변에서 이제 전향하는 것이네
참나무 밑에 가지런히 벗어 놓은
풍씨의 구두가 석양에 빛날 때,
'수사중' 금줄을 치던 형사가 너스레를 쳤다
그 양반 차암 깔끔하게 가셨네.
- <어느 상징주의자의 전향>전문
사람들은 흔히 글의 수준에 대해서 논하고 무슨 레벨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언급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좋은 시나 좋은 글은 평생을 써도 몇 편 안 나오는 현실을 감안하면 대동소이하여 레벨이나 수준은 별 의미가 없다. 평론가나 시인이 시인을 어떻게 평할 수가 있겠는가? 도토리 키 재기다. 그러나 한기홍 시인의 시나 글은 상당히 좋았다라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이번에 전체적으로 읽어보니 전번의 생각에 좀 더 가산점을 후하게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선천적인 문학성과, 시인이 그동안 열심히 쓰고 갈고 닦아 얻어진 결과라고 여겨지고, 그 것이 한 시인의 장점으로 남아 부러워지기도 한다.
나귀를 돌보기도 지쳤는데,
적토마 외양간이 왠 말이냐
오늘, 서점엘 갔는데
눈꼬리가 찢어졌다
서가에만 일별… 오거서五車書
좌판에 천보天寶 융단, 문자향 넘실대고
내게 고종古宗의 서권기書卷氣를 발우에 담아 준다 해도
청산의 선지식善知識 발톱만이라도 뵐까
오그라지게 춥다
서점에서 책 한 권도 못 샀다
쭈삣 꺼내든 소가죽 지갑에 꼬깃한
비닐하우스 재배 배추 이파리,
심검당尋劍堂* 벽력검에 호떡이 되었다.
문득포장마차 소주 한 잔 속
일렁이는 파랑…허어 바로 이것이야
오도송悟道頌일 게야
뭣 좀 아는 소惺牛*는 절대 외양간에서
발을 씻지 않는다
오늘 밤 이불 속엔 양말을 신고 들어가야지….
- <여년驢年*, 오두방정>전문
시어는 언어 선택의 마술이다. 책에 여성 시인의 경력을 소개하면서 여성 시인이 몸을 팔아 살고 있다고 써서 크게 난리가 났다는 일화가 있다. 그녀는 철물점을 하고 있어 그 철물점에서 주로 취급하는 품목이 못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시어의 선택은 언어의 마술이다. 한문에서는 뜻이 들어 있어 별문제는 없으나 한글은 문제가 심각하다. 한문에서도 대통령大統領을 개犬자 견통령犬統領으로 써서 망신을 당한 신문사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한기홍 시인의 시어 선택은 탁월하다. 그가 선택한 시어의 마술에서 쉽사리 빠져나가기란 쉽지 않다. 시간과 흔들림의 미학을 첨부한 그의 마술은 시력詩歷이 더해감에 따라 날이 서고 예리해져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베고 예리한 섬광을 들이대기도 한다.
희미한 것은 그리지도 않는다는, 색도 칠하지 않는다는 고흐의 색감이 빨려 들어가 움직일 수 없듯이 잠시 자신을 잃어버리는 또는 불어 넣기도 하는 마장마술馬場馬術의 기술을 가끔 가끔 보게 되어, 그의 시는 단숨에 읽히고 때론 묵중한 둔기로 무차별 공격을 해오는… 그래서 기쁘기도 하다. 그러나 한평생 시를 쓴 원로시인들도 늘 시에 고민하고 시를 어려워하며, 시 발표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시의 한계는 무한하며 시는 깊이를 잴 수 없는 깊은 경지의 글임을 알아야 하고, 영육이 합일된 부단한 수련을 할 때만 시의 정글 시세계에 이름을 새기고 시의 집을 지을 수 있음도 알아야 할 것이다.
한편의 시에서 시인을 알 수 없듯이 한권의 시집에서도 시인을 전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시집 한권을 읽으며 시인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인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어떤 시에서는 이승과 전생을 뛰어 넘는 깊은 고리도 발견 할 수 있어서 시인을 더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된 점도 있다. 깊이 들어갈수록 시를 계속 여러 번 읽고 음미할수록 단순 언어의 동작이 아니라 고도의 기술과 언어의 조립능력이 삶을 살아온 정서와 기막힌 조화로 이루어져 아슬아슬한 경계선 바로 직전까지 도달하였음을 알 수가 있고, 그가 살아온 경험과 무게와 시의 무게가 비례하여 하나의 집을 짓듯 시를 지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시어하나 시 한 줄에도 그의 웃음과 그의 한숨이 섞여져 한이라는 원초적 강물의 시원始原이 되었다는 것이다. 시를 왜 쓰는가는 쓰지 않을 수 없기에 쓴다라는, 그래서 시는 시다라는 말을 들으며 시집詩集 속으로 걸어간다.
(2008.10.9 충무로 한국문학예술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들
수필가 이은화
공상과학 속의 이야기가 현실로 다가온 디지털 홈을 들여다 볼 기회가 있었다. 외출 중 집 안의 가전제품을 비롯해서 전등이나 가스 등을 제어하는 핵심 단말기의 총아로 이미 휴대폰이 떠 오른지 오래다. 그래서 혹자는 주부들을 자질구레한 가정사에서 해방시켰으며 자아를 위한 자유로운 시간을 더욱 가질 수 있게 한 공로자로 휴대폰을 꼽는데 망설이지 않았다. 그러나 과연 과학적이며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을 소유했고, 갖은 편리한 문화적인 혜택을 누린다고 해서 진정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은 진작부터 가지긴 했었다. 가진 만큼의 부담과 누리는 만큼 잃어버리는 것이 적지 않은 까닭이다.
많은 기기(器機)를 가질수록 더 많은 것을 익히거나 지키기 위해 더 많은 것을 가져야하는 현실은 돌이킬 수 없는 근대의 맹점이다. 다 가지고 누려서 좋은 것이 아니라 조금 더 편리할 뿐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닫혀진 공간에 살면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까지도 옹색하게 만든 장본인은 물질문명의 이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자신이 아닌가. 정을 잃어버리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잃어버리고 한치의 오차가 없는 컴퓨터의 장점에 매료되어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는 존재라고 착각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일이다.
이렇게 숨막히는 현실 속에서도 한기홍님의 글은 급한 물살을 타는 세대를 거스르는 듯 속도를 못 낼 뿐 아니라 역행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 그가 오히려 어린 아이 같은 환상을 꿈꾸는 일탈을 보여주며 진정으로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항변한다. <자명고를 기우며>에서 님은 세월이나 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 것은 기억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아… 언제나 세월은 오늘에 있는 것을, 내 회상의 저편에서 주억거리고 있는 금빛 상념들은 지금도 눈앞에서 그 장구한 풍상, 역사, 정신을 무언의 함성으로 일깨우고 있다. 그래, 세월은 두둥둥 북소리 고동색 이끼 향으로 내 고락에 스며들어 반죽되면서, 빛살 같은 은총으로 내게 끊임없이 머물고 있는 거야. 오늘 시장통 골목에서 나는 내 곁에 옛날이, 어제가, 오늘이 변함없이 빙긋 웃고 있는 것을 비로소 보았다. 허공에 일렁이는 황사의 물결위로 아직도 찢어져 울고 있는 푸르른 북소리를… 그 자명고를 기우려는 작디작은 내 소망을.
(43집 p237)
자명고는 현실 속에서 이루고자 하는 님의 바람을 담고 있다. 오늘을 살면서 옛날을 느끼고 어제와 오늘을 넘어 미래를 보고 있는 님의 기억이 있기에 님은 언제나 자유롭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는 <아프리카를 그리며>를 통해 시공을 넘나드는 자유를 누리는 진정한 자유인의 좌표가 어딘 지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그 막연한 의문을 한 꺼풀 벗겨내는 비밀의 열쇠를, 오늘 아침에 받아본 신문의 한 면에서 본 듯하여 눈을 번쩍 뜨고 말았다. 영국BBC방송에서 컴퓨터로 재구성한 한 원시인류의 모습을 신문에서 응시하면서, 몸 속의 핏줄기가 눈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 같은 착각에 젖어들었다.(43집p238)
황당하게도 님은 신문의 한 면을 통해서 그가 청년기부터 아련하게 그의 의식을 지배해온 막연한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 또한 그의 기억을 통한 일탈이다.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에서 제제가 노래하지 않고 노래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작은 새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듯이, 님에게 있어 끊이지 않는 상념은 자유로울 수 있는 출입구인 셈이다. 그 문을 통해 그는 아득한 먼 옛날을 이웃집처럼 만나고 돌아온다. 무엇인가 늘 생각하는 진지한 표정의 진정한 자유인을 그렇게 님의 글 속에서 만날 수 있다.
(2004 제물포수필 44호 . 수필가 이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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