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70만여년전의 전기 구석기문화가 존재했음을 나타내는 유적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미야기(宮城)현 가미타카모리(上高森)유적의 석기
발굴이 날조됐던 것임이 언론의 추적결과 밝혀졌다.
이 유적은 도호쿠(東北)구석기문화연구소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50)
부이사장을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이 지난달 하순 발굴작업을 시작,
지난달 27일 ‘70만년전과 60만년전의 석기 등 31점을 발견했다’고 발표했
던 것이다.
그러나 마이니치신문이 가미타카모리 유적 현장에 설치해둔 비디오에
후지무라 부이사장이 석기 발굴직전인 22일 새벽 혼자 유적지에 구덩이를
파고 자신이 이미 보유하고 있던 석기를 묻는 장면이 잡힌 것.
후지무라 부이사장은 4일 마이니치신문측에 이같은 사실을 시인하고
이 유적에서 올해 발견된 석기 이외에도 전기 구석기시대의 유적으로 알려진
홋카이도(北海道) 소신후도자카(總進不動坂)유적의 석기발굴도 자신이
조작한 것이라고 털어놨다.
일본의 전기 구석기 유적지인 가미타카모리 유적은 1992년부터 후지무라
부이사장 등이 발굴을 주도했으며 출토연대가 처음엔 13만년 전이었으나
그후 다섯 차례 추가발굴을 통해 60만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이 유적은 특히 98년 고교 교과서에도 수록되는 등 역사적 사실로
인정받았지만 이번 사건으로 신빙성이 크게 흔들리게 됐으며
일본 구석기시대 역사에 대한 연구도 전면적인 재검토가 불가피해졌다.
후지무라 부이사장은 날조 동기에 대해 "마(魔)가 끼었던 것 같다"며
“발굴실적이 나오지 않아 초조해 하던 끝에 개인적으로 모았던
석기수집품을 땅에 묻고 새로 발굴한 것처럼 발표했다”고 밝혔다.
그는 고교졸업후 독학으로 고고학을 배운 뒤 72년부터 본격적으로
발굴작업을 시작해 81년 4만여년 전의 석기를 발견해 당시 최고(最古)기록을
1만년 이상 경신하는 등 발굴 때마다 새로운 기록을 세우며 학계에서
'석기의 신', '신의 손'으로 불려왔다.
이번에 함께 발굴작업을 벌였던 조사단원들은 “지금까지 학문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가진 석기는 모두 그가 발견한 것이다. 그는 언제나 모두가
쉬고 있을 때 땅속에서 석기를 꺼내 발굴했다고 했다”고 말해 발굴날조가
오래 전부터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후지무라
부이사장은 “작년 이전 발굴품은 조작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한편 그가 발굴한 유적에서는 30km 떨어진 곳에서 각각 발견한 2개 석기의
단면이 딱 맞아떨어지는 '기적'이 일어난 일도 있었던 것으로 마이니치는
전했다.
이번 사건과 관련, 관련 학계에서는 “개인의 공명심도 공명심이지만
일본사의 연대를 위로 끌어올리려는 일본 고고사학계의 풍토도 일조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조심스러운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2. 日 '유적조작' 정밀조사 착수…고대사 수정 불가피(2001년 11월 6일자 동아일보 기사)
일본 도호쿠(東北)구석기문화연구소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 부이사장이
유적발굴을 날조해온 사실이 드러나면서 문부성이 다른 발굴유물에 대한
정밀조사에 착수하기로 하는 등 일본 역사학계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후지무라 부이사장의 유적발굴을 토대로 일본에도 이집트문명에 견줄 만한
독자적 고대문명이 존재했다며 일본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역설해온 역사책은
‘거짓’이 되고 만 것이다.
오시마 다다모리(大島理森)문부상은 6일 "후지무라 부이사장이 어디까지
관여했는지 정밀 조사를 할 것"이라며 "후지무라 부이사장이 자백한
2개 지역 유물 외에도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또 "교과서의 내용도 재점검하지 않으면 안된다"며
역사교과서의 해당 내용을 수정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일본 역사학계가 원점부터 다시 검증해야 하는 부분은 일본내 구석기시대
유물의 상한 연대. 후지무라 부이사장이 고고학계에 등장해 명성을 날리기
이전까지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물은 1946년 발굴된 2만5000년 전 것이었다.
그러나 후지무라 부이사장이 1981년 미야기(宮城)현에서 4만∼5만년 전
석기를 발견한 데 이어 93년 55만년 전, 95년 60만년 전, 99년 70만년 전
석기를 계속 발굴하자 일본내 구석기유적의 상한 연대는 엄청나게 부풀려졌다.
이번에 들통난 미야기현의 가미타카모리 엉터리 선사유적은 산세이도,
짓쿄출판, 야마가와출판 등이 펴낸 문부성 검정필 교과서에 '사실'로 기술되어
있다. 이 책에는 “50만∼60만년 전의 전기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베이징 원인(北京原人)과 같은 단계의 인류가 아시아대륙을 통해
일본에 온 것이 분명하다“고 씌어 있다.
우익단체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만든 책에도
"가미타카모리 유적 연대는 78만년 전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 유물의 주인은 자바원인이나 베이징원인류로 추정된다"며
일본 역사의 유구함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번에 유물 발굴이 조작된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이같은 내용은 모두 바뀌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일본에서 일어난 희대의 선사유적 발굴조작 사건은 한 신문사의 추적취재 끝에
결국 조작 현장이 '몰래 카메라'에 생생하게 잡히면서 종결 됐다.
도호쿠(東北)구석기문화연구소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부이사장이
'최고(最古)유적' 발굴을 거듭하자 일본 고고학계에서는 몇 년 전부터
조금씩 의문을 제기했다. 이는 △발굴된 석기의 상태가 너무 깨끗한 점
△1980년대 이후 중요유물을 죄다 후지무라가 발굴한 점 △지각 변동이
심한 지층임에도 석기가 대부분 같은 깊이에서 발굴된 점 △가미타카모리
유적에서 발견된 석기는 양면이 가공된 조몬(빗살무늬)토기와 비슷한 점 등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마이니치(每日)신문은 고고학계 인사를 취재한 끝에 조작에 대한 심증을
굳히고 유적발굴 현장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했다. 마이니치신문은
"고고학 연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행위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서는
발굴책임자의 동정을 확실하게 붙잡을 필요가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고
카메라를 설치한 이유를 밝혔다.
마이니치신문은 9월 홋카이도(北海道) 유적발굴작업이 진행될 때에도
카메라를 설치했으나 화면상태가 좋지 않아 날조사실을 입증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카메라가 설치된 줄 모른 채 발굴현장에 나타나
유물을 파묻는 모습이 그대로 잡히면서 발굴 사기극은 끝을 맺었다.
3. 日고고학협회 '유물날조' 후지무라 제명(2000년 11월 14일자 동아일보 기사)
일본 고고학협회는 12일 도쿄(東京)에서 긴급위원회를 열고 미야기(宮城)현
가미타카모리(上高森)구석기 유적지 등에서 유물을 날조해온 도호쿠(東北)
구석기문화연구소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50)전 부이사장을 제명했다.
일본 고고학협회는 1948년에 결성된 일본내 고고학 분야 최대 학회로
회원은 3600여명. 대학과 연구기관의 고고학자 등 21명이 위원회 운영을
맡고 있다. 제명 처분은 협회의 명예를 손상한 회원을 제명할 수 있도록 한
규정에 따른 것이다.
협회는 이날 성명을 통해 "새로운 발견 사실만 중요하게 생각해 온 풍조와
연구자 상호간의 비판 부재에 관해 심각하게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발표했다.
성명서는 이어 후지무라전부이사장의 발굴 '성과'를 토대로 성립된 학설에 대해
“다른 의견도 많아 아직 정설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또 그의 주장이 교과서에 실린데 대해 "학술적으로 검토한 결과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며 비판했다.
고고학협회 아마카스 겐(甘粕健·니가타대 명예교수)회장은
"연구자간 상호 비판 부재로 날조사건이 일어난데 대해 죄송스럽게 생각한다"며
"앞으로 진지한 연구를 통해 학계의 신뢰를 회복하겠다"고 말했다.
협회는 또 후지무라전부이사장이 발굴에 관여했던 모든 유적지에 관해
다시 검증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도 설치하기로 했다.
위원에는 고고학 분야 외에 지질학 자연과학 분야 전문가가 포함되며
내년 5월경 발족한다. 협회는 재조사를 위해 도호쿠 구석기문화연구소에
과거 발굴 조사 자료와 학술보고서를 제출하도록 요구했다.